7. 운명 Symphony no.5
고급 아파트는 다 이런가. 아파트 입구에서부터 입주자 누굴 찾는지 출입 기록을 남긴 차였다.
흥신소 일이 아니고는 곽지경 인생에 별 인연이 없는 아파트였다.
‘가서 밥이나 챙겨 줘. 돌볼 사람 붙이려고 했는데 죽어도 싫다고 했다잖아. 나랑 기주는 바쁘고, 알지?’
미림이 몇 번이고 다짐시키던 게 떠올라 지경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번 사고로 인해 흥신소에도 닥쳐온 변화가 제법 컸다.
임기주는 회사에서 발 빼느라 밖을 나돌 실정이 못 됐고, 흥신소에서 가장 비중 있던 실무자인 정기승이 나가리되는 바람에 미림은 어느 때보다 바쁜 차였다.
미림은, 지경이 지금 도착한 아파트 주인이자 유성의 약혼자인 범운 그룹 상무한테 사이즈가 꽤 큰일을 맡았다고 했다.
그러니 병문안 정도는 손이 놀고 있는 저가 가 주는 게 맞았다.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오르는 동안 지경이 모서리에 등을 걸치고 주의 사항을 복기했다.
식사했는지 확인할 것, 사고 관련 얘기는 하지 말 것, 너무 귀찮게 하지도 말 것.
유산 얘기는 입에도 올리지 말 것.
마지막 사항을 되뇐 지경이 미리 외운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바로 이어지는 현관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건네도 집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신을 벗고 들어서도 기척이라곤 없어 혹시 아무도 없는 집에 잘못 들어왔나 싶을 지경이었으나, 거실에 들어서자 곧장 뒷모습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유성이 형, 저 왔어요.”
지경의 인사에도 유성은 고개를 돌려 말끄러미 시선을 주는 데서 그쳤다.
유성을 발견한 지경이 마른 입술을 축이며 걸어갔다.
원래도 생기가 넘치는 인상은 아니었다지만 지금은 아예 산 사람 같지도 않다.
“사장님이 형 괜찮은지 보고 오라고 하셔서요. 사장님이랑 기주 누나는 요즘 뭐 한다고 바빠서.”
“…….”
“그나마 제가 제일 만만하고 한가하네요, 네. 그, 상무님? 그분은 언제 들어오세요?”
대꾸가 돌아오지 않아도 지경은 꿋꿋하게 떠들었다. 유성의 요즘 상태에 관해서 지경 역시 들은 바가 있어 이 정도는 예상했다.
“아침은 드셨어요? 전 김밥 먹고 왔는데.”
일단은 나오는 대로 신변잡기를 주워섬겼다. 본의 아니게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 틈에서 치여야 했던 지경은 붙임성 있게 구는 데는 나름으로 자신이 있었다.
다만 유성은 원래도 대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일단은 앞에 두기만 해도 말문이 막히는 저 얼굴이 그랬고, 특유의 분위기 역시 유성에게 벽을 만들었다.
종일 벽을 보고 떠들어야 할 줄 알았는데 다음 순간 유성은 언제 메마른 낯빛이었냐는 양 빙긋 웃었다.
웃는 것만으로 공기가 고조된다. 지경이 움찔했다. 무표정일 때도 눈길을 잡아끌더니 길쭉한 눈매가 둥그렇게 접히자 빛이 유성 쪽으로 더 많이 드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갑작스레 태도를 바꾼 유성이 지경에게로 다가와 앉았다.
“지경 씨는 왜 예전에 하던 일 그만뒀어요?”
밥 챙겨 먹는지 확인하라는 사장님의 지시를 충실히 수행할 작정이었건만 유성은 뜬금없는 주제로 찌르고 들어왔다.
전에 하던 일이라면 예의 건달 짓거리였다. 약 팔고 돈 뜯고. 스물 초입에 잠시 했던 일이건만 떠올리자 입이 썼다.
“그렇게 살기 싫어서요.”
“지경 씨 형은 아직 미림이네 아버지 회사 다니지 않나요?”
불편한 이야기였다. 아아, 뭐. 저한테 형이 있었던 것도 같다는 식으로 넘기려는 지경을 유성은 집요히 바라보았다.
“미림이는 요즘 뭐 하느라 바쁜데요?”
본론은 이거였나. 지경이 어물거리는 사이 유성이 그에게로 가까이 몸을 숙였다.
달콤한 향기가 확 끼쳐 왔다. 정신이 번쩍 깨일 만큼 강렬한 향이었다.
다음 순간 지경은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닫는다. 공기 중에 그저 약간의 설탕 냄새 같은 것이 섞여 들었을 따름이다.
곽지경의 오감을 흔든 것은 유성의 사근사근한 미소와 거리감 없는 몸짓, 오메가 페로몬이 섞인 체향이었다.
이 형이 진짜 얼굴이 작살 나긴 하는구나. 지경은 다소 얼떨떨한 기분마저 느꼈다.
미인계, 말로만 들었지 정말로 겪어 보기는 처음이다.
“형, 저 베타예요.”
“그래서?”
농담이라도 들은 양 유성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렴풋이나마 느껴지는 달큼한 향기는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형질 영향이 없는 쪽에 가까운 베타였으나 눈치는 있었다. 유성이 지금 지경에게 발휘하고자 하는 영향력이 지나치게 잘 느껴졌다.
아, 이 형이 마음먹고 후리면 이 정도인가 보다. 곽지경은 갑자기 무형의 손이 목을 콱 죄어 오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베타라, 페로몬…… 잘 못 맡아요.”
꽉 잠긴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하는 꼴이, 지경 스스로 듣기에도 웃겼다. 내용하고 태도가 안 맞지 않나.
유성 역시 재밌다는 듯 쿡쿡 웃었다. 정말로 재밌어서 웃는 게 아니라 저것도 저를 흔들고자 하는 수작의 연장임을 지경은 알았다.
그런데도, 뻔한 수법에도 의도대로 흔들린다.
왜 임기주가 유성이 나타나기만 하면 흘긋거리느라 바빴는지 알 법하다고 생각하며 지경이 마른침을 삼켰다.
유성이 지경의 바로 옆에 팔을 짚었다. 곁눈으로 유성의 손이 움직이며 지경을 만지려고 하는 것이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소름이 등줄기를 따라서 오도독 돋아났다.
등 뒤에서 기척이 잡혔다. 돌아보는 순간 시야가 가득 차는 덩치에 지경이 헉, 짧게 숨을 들이켰다.
“손님이 와 있었네요.”
뒤에는 최사헌이 서서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다지 기분 상해 보이는 말씨가 아니었는데도 지경은 소스라치며 유성으로부터 물러섰다. 이 역시 본능이었다.
‘최 상무? 야, 그 인간 존나 살벌해.’
임기주가 사무실에 갓 들어와 몸서리치며 떠들던 말이 아른아른 떠올랐다.
‘정기승 대가리 터뜨리는 장면을 너도 봤어야 한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자랐을 것같이 생겨서는. 눈이 막 뒤집혀 있더라니까.’
눈은 모르겠고 일단 덩치가 존나 살벌하긴 하다.
꿀꺽. 지경이 마른침을 삼키며 목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오시기 전에 가려고 했는데.”
말하고 보니 더 이상했다. 무슨 내연남 대사 같지 않나.
“사장님이 유성이 형 잘 지내나 보고 오라고 하셔서요.”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지경이 식은땀을 흘리건 말건, 유성은 도울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왜 왔어요?”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면 모를까.
자기 집에 오자마자 왜 왔냐는 질문을 듣고도 사헌은 초연했다. 온몸의 솜털이 삐죽삐죽 곤두서는 긴장을 느끼고 있는 것은 지경뿐이었다.
지경의 직감이 알렸다. 폭탄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
“저는 이만, 가 볼까요.”
두꺼운 낯짝에는 자신 있었는데 이 분위기에서 버티기는 무리였다. 슬그머니 내빼려는 지경의 팔뚝을 유성이 붙잡았다.
“어디 가.”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껏 단 한 번도 말을 놓은 적 없으면서 이 타이밍에 꼬리가 싹뚝 잘린 반말이라니.
사헌의 눈초리가 슬그머니 유성이 쥔 지경의 팔로 향했다.
단단히 잘못 걸렸다. 곽지경은 결론을 내렸다.
나는 지금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질 새우다.
“저녁 먹고 가.”
또한 깨달았다.
처음부터 유성은 저를 구슬려 뭘 알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게 아니었다.
이 장면을 보여 주고 싶었던 거다.
다름 아닌, 지금 섬찟한 냉기를 흘리는 저 남자에게.
한마디로 잘못 걸렸다.
“아뇨. 저는 아무래도…….”
“먹고 가시죠.”
사헌이 둘 쪽으로 다가섰다.
“모처럼 유성 씨가 권하는데.”
망했네. 곽지경은 그냥 웃기로 했다. 울 수는 없잖는가.
“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오랜 기간 막내로 비벼 온 싹싹함을 끌어모아, 지경이 대답했다.
* * *
아, 그냥 갈걸.
입에 들어온 전복을 갈아 버릴 듯 꼭꼭 씹으며 곽지경은 늦은 후회도 함께 씹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먹으면 죽을 먹어도 체하겠다.
저녁이 차려진 식탁에서는 입을 여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오기 전에 둘이서 무슨 얘기 하고 있었는지 안 궁금해요?”
젓가락만 써서 밥알을 깨작거리던 유성이 침묵을 깼다.
“미림이랑 당신이랑 요즘 무슨 짓 하느라 바쁜지 물어봤는데.”
기껏 대화가 시작되었건만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지경이 다 씹지도 않은 밥을 꿀꺽 삼켰다.
사헌의 시선이 아주 잠깐 지경에게 머물렀다. 고작 그뿐인데도 넌 저런 소릴 듣고 뭘 했냐는 채근으로 느껴졌다.
“두 분이야 일하느라 바쁘시죠…….”
지경이 말을 하는 둥 마는 둥 흘리며 밥을 한가득 퍼서 입에 넣었다.
밥알이 목구멍에서 곤두선다. 상사 앞에서 벌서는 기분이었다. 상무면 상무지, 우리 사장님도 아닌데 왜.
결혼을 앞둔 커플이라고는 믿기지 않도록 둘 사이에 오가는 공기가 살벌한 탓이다. 밥 먹다 사람 하나 잡겠네.
사실 식탁 위에서 솟구치는 적의는 유성 혼자만의 것처럼 보였다. 바짝 날이 선 유성에 반해 사헌은 잠잠했다. 오히려 유성을 살피는 눈빛은 걱정뿐인 듯했다.
상반된 태도의 두 사람이 만드는 기묘한 기류에 지경이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뭘까.
“좀 더 먹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사헌이 유성의 앞으로 반찬 그릇을 밀어 주었다.
식탁의 구성이 유성을 위한 것임은 척 봐도 보였다. 전복에 미역에, 환자가 먹어야 할 법한 재료나 소화가 잘되는 심심한 메뉴가 전부였다.
처음 담은 그대로인 밥그릇을 젓가락으로 헤집기만 하던 유성이 사헌을 쏘아보았다.
그러고는 숟갈을 들어 밥을 몰아 먹기 시작했다. 옆에서 보기에도 저러다 얹히겠다 싶은 우악한 식사였다.
식기가 달그락대며 부딪히는 소리만 식탁에 울렸다.
분풀이처럼 먹어 치우는 짓을 스스로도 감당 못 했는지 유성이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이어서 도로 숟가락을 붙잡는 고집 센 얼굴에는 눈물이 글썽댔다.
“그만해.”
사헌이 유성의 손목을 덮었다.
“마셔, 물.”
쥐여 준 물잔을 유성이 강하게 쳐냈다.
뿌리쳐진 물잔이 사헌의 어깨에 맞았다. 물이 가슴을 적시고 흘렀다. 난데없이 물벼락을 맞고도 사헌은 묵묵하게 유성의 손을 먼저 닦았다.
분위기를 살피던 지경이 머뭇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물잔을 주웠다. 길쭉한 유리잔은 이미 대각선으로 금이 가 있었다.
허리를 숙이는 동안 식탁 위에서 유성이 뭐라고 한 것 같았다. 얼핏 욕설처럼 들렸다. 바로 허리를 펴려던 지경이 멈칫했다.
이대로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되도록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보니, 식탁 위쪽의 상황은 과연 살벌했다.
유성은 사헌에게 끌어안겨 있었다. 빠져나가고 싶은 듯이 몸부림을 쳤으나 떠밀지도 못할 정도로 힘이 미약했다.
유성의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품에 완전히 안은 채로 사헌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숨결을 따라 유성의 둥그런 등이 와들와들 떨렸다.
살결을 서늘하게 하는 향취가 공기를 따라 흘렀다. 최사헌의 알파 페로몬임은 쉽게 짐작 갔다.
형질 보유자의 페로몬에 영향을 극히 미미하게 받는 체질이면서도, 지경은 사헌으로부터 물러섰다.
“이만 가 주겠습니까.”
사헌의 품속에서 자그마한 훌쩍임이 들렸다. 물기 어린 숨소리조차 들려주고 싶지 않다는 듯이 사헌이 유성을 더 철저히 감쌌다.
지경은 서둘러 인사하고 현관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내려서야 운동화 좌우를 바꿔 신은 사실을 깨달았다.
아아, 씨. 볼멘소리를 내며 지경이 버스에 올라탔다.
사장님이 이제 이 일은 안 시키셨으면 좋겠는데. 진이 다 빠져서 당장 연락할 힘도 없다.
버스에서 내려 미림에게 지금 도착한다는 전화를 하려던 지경이 주머니를 더듬던 손을 허망하게 빼냈다.
“핸드폰.”
중얼거린 뒤 지경이 이미 저 멀리 떠나는 버스를 보았다. 버스 뒤꽁무니를 잡으러 뛰어가는 지경을 약 올리듯 버스가 속력을 높였다.
도무지 되는 일이 없는 날이었다.
* * *
“뭐가 불만입니까.”
사헌의 물음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유성이 무릎에 머리를 묻었다. 웅크린 자세는 이 이상 방어적일 수 없다.
식탁을 치우는 동안 구석에 굳어 버린 유성은 그대로 숨만 헐떡일 뿐 아무런 말을 안 했다.
속이 안 좋냐, 약이 필요한가, 병원이라도 가야 하지 않겠냐는 말에 모조리 묵묵부답이었다.
확연히 마른 목덜미에 도드라진 목뼈의 형태가 사헌을 미칠 지경으로 몰아갔다. 잘못 건드리면 뼈대부터 와르르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겁나는 모양새였다.
“백유성, 또 뭐가 문제야.”
참지 못하고 사헌이 유성의 앞에 섰다.
유성이 겨우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 물 자국이 있었다.
“어제 외출에 사람 몇 명이나 붙였어요.”
대답을 피하거나 거짓말을 했다간 참지 않겠다는 투였다. 독이 오른 눈빛보다는 살이 부쩍 내린 뺨만 신경 쓰였다.
“셋.”
“당신, 그거 병이야.”
유성이 이기죽거렸다.
가드를 붙였던 외출에서 총을 맞고 돌아온 배우자에게 이 정도도 못 하겠냐는 항변을, 사헌은 굳이 하지 않았다.
“새벽에 나가도 따라오던데, 내가 언제 나가나 24시간 감시라도 해요?”
“…….”
“당신이 밖에서 온갖 짓거리 다 하고 있을 때 나는 여기서 그냥 약에 취해 잠들어 있으라고?”
이제 아플 곳이 없다는데 통증을 호소하고, 단 몇 시간도 제대로 잠들지 못하는데, 약 말고 방법이 있냐고 사헌은 이번에도 묻지 않는다.
사헌은 유성을 탓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답답해도 며칠만 참아요.”
“최의현이 이틀 후에 출국이니까?”
유성이 무릎을 감싸던 팔을 풀고 일어섰다. 갑자기 몸을 일으키자 어지러운지 주춤거리는 유성을 사헌이 붙들었다.
유성이 우울하게 사헌을 쏘아보았다.
“최문경 사장이 폭력 조직하고 맺은 유착 관계, 범운 물류에서 벌였던 분식회계, 그간 무마시킨 최의현 사고들. 마약, 폭행, 살인미수. 최종필 회장은 이미 당신 밀기로 결정했으니까 이 정도 카드면 굳히기는 문제없겠네요.”
“……의사가 절대 안정이라고 했는데 신경 쓰는 일이 너무 많은 것 같네, 당신.”
“어떻게 여기까지 아는지는 안 궁금해요?”
“머리 좋은 사람이니까 무슨 방법으로든 알아냈겠죠.”
“머리로 알아낸 거 아니야. 몸으로 알아냈는데.”
한쪽 입매만 끌어올려 유성은 비릿하게 웃는다. 셈이 빤한 도발이다. 사헌이 숨을 깊이 내쉬었다.
“애꿎은 사람까지 끌어들이지 마.”
“왜? 질투해?”
물 자국이 말라붙은 눈가 위로 글썽글썽한 눈이 번쩍인다. 저게 독기라면, 다른 이를 죽이기 전에 유성 자신부터 죽여 가고 있다고 사헌은 생각한다.
그래도 독은 독이어서, 집에 들어설 때 보았던 장면을 생각하니 부글부글 끓었다. 미림의 부하 직원에게 잘못은 손톱만큼도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랬다.
“내가 뭐 하는 중인지 안다며. 최의현이 바닥으로 가는 게 보고 싶다면서. 가만히 있어도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줄 수 있어.”
사헌이 애써 말을 틀었다. 조금이라도 달래서 내일부터라도 밥을 좀 더 먹이고 살찌우고 싶었다.
“그걸로는 안 돼.”
수를 다 안다는 듯이 유성이 머리를 곧추세웠다.
“고작, 고작 자기 엄마 끈 떨어진 연 되는 바람에 그룹 내에서 밀려나는 거? 비싼 옷 입고, 좋은 밥 먹으면서 괄시받고 사는 거? 그걸로 만족하라고?”
따져 묻느라 유성의 상체가 쏠렸다. 분에 겨운 유성이 쓰러지지 않는 건 사헌이 받치고 있는 덕이었다.
“나는 다 잃었어!”
말이 터져 나왔다.
사헌을 밀치려다 제풀에 주저앉으려는 유성을 사헌이 껴안았다.
“나는, 동생도, 아, 아이, 아이도…… 전부 다.”
단어가 서로 아귀가 맞지 않는 틀처럼 덜걱덜걱 흔들렸다.
유성이 자기가 그러는 줄도 모른 채로 엉거주춤하게 배 언저리를 더듬을 때마다, 사헌은 흉곽을 들쑤시는 칼날을 느꼈다. 폐에서 작열통이 느껴졌다.
“당신이 하려는 건 자해야.”
매일 독을 퍼마시듯 살았던 우연조가 끝내는 어떻게 되는지 봤다.
“이대로 두면 최의현이 아니라 당신부터 죽게 생겼는데 그걸 내버려 둬?”
“상관하지 마.”
물음이 마무리되기 전에 유성이 툭 끊으며 들어왔다. 사헌의 목에 날붙이를 가져다 대듯 유성은 뾰족하게 굴었다.
“제발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말라고요. 당신한테 피해 안 가게 한다고. 파혼하고 다 끝내면 되는 거잖아. 이제 안 끌어들일 테니까.”
어디서, 뭘 하다 죽든 내버려 둬.
유성의 말은 그렇게 들렸다.
그리고 사헌은 어렵지 않게 유성의 최후를 상상할 수 있었다.
맹목적으로 불빛에 달려드는 부나방이 어떻게 되는가. 타 죽을 뿐이다.
“나 좋아해?”
기습처럼 던져진 물음에 사헌이 입을 다물었다. 바보라도 알아들을 수 있을 답이었다. 약점을 파고들듯, 유성이 사헌의 옷깃을 잡았다.
얼굴이 바싹 다가왔다. 눈빛만 형형하고 얼굴색은 파리하게 하얗다. 우울하고 그늘진 아름다움이 사금파리처럼 날을 세운다. 사헌은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얼굴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러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이를 악다문 유성의 턱이 달달 떨렸다.
“죽여 버리고 싶어.”
날것 그대로의 살의가 형상을 드러냈다.
화려한 눈매에서 불이 타올랐다. 풀무질이 일어나고 모루가 칼날을 벼렸다. 유성에게 해로운 온갖 것들이 거기 있다.
힘이 없어 제대로 멱살을 쥐지도 못하는 손이 사헌의 가슴팍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하게 해 줘.”
“내가 최의현 죽여 주겠다고 하면, 그만할래?”
마침내 사헌이 말을 건넸다.
오로지 진심으로만 채운 말은 무거워서 뱉자마자 뚝 떨어졌다. 듣고 난 유성은 차라리 얻어맞은 몰골이다.
“하…… 윽, 흑…… 흐으…….”
흐느낌과 한숨이 섞여서 흘러나오다, 끝내는 바람 빠지는 헛웃음이 됐다. 유성이 입가를 닦으며 웃었다.
“당신도 진짜 제정신 아니구나…….”
비아냥도, 비난도 되지 못한 중얼거림 뒤로 유성의 입술이 울음을 터뜨릴 듯 일그러졌다.
이내 유성이 맥없이 사헌에게 머리를 기댔다. 뜨끈한 볼이 빗장뼈 위에 가만히 얹힌다.
“그 애 이름은 뭐였을까.”
힘없는 말이 또다시 사헌의 속을 난자하면서 지나갔다.
“지 팀장님이 태명 얘기를 해서, 당신이 돌아오면 같이 짓자고 하려고 했었거든요.”
유성이 슬프게 속삭였다. 좋았던 때는 가깝고도 멀었다.
“뭐였을까, 그 애 이름? 좋은 이름으로 지어 주고 싶었는데.”
주저앉고 싶은 순간을 사헌은 견딘다. 손에 잡히는 건 모조리 박살 내고 싶었고 눈에 들어오는 것들은 불태우고 싶었다.
“어떤 이름이 좋았을 것 같아요?”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사헌을 유성이 밀어냈다. 여전히 힘이라곤 들어가 있지 않은 손길이었으나 사헌은 밀려나야만 했다.
“죽여 달라는 말 취소할게. 당신까지 지저분해질 필요 없어.”
어떤 배신보다 그 말이 사헌을 괴롭게 만들었다.
차라리 같이 떨어지자고 해 주었더라면.
오물을 뒤집어쓰고 진창에 가자고 해 주었다면.
“내가, 기꺼이 지저분해지겠다면?”
“…….”
“이용당해 주겠다면.”
그 말에 물기로 번질거리던 유성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움츠린 입술을 우물거리다 유성이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닦았다.
“나 같은 인간을 좋아해 줘서 고마워.”
뚝, 뚝, 눈물을 떨어뜨리면서 유성은 웃었다. 입매가 우느라 일그러졌다가 다시 위로 올라붙으며 떨렸다.
“난 당신한테 아무것도 못 해 줬는데, 당신은 끝까지 날 좋아해 줬어. 고마워.”
더듬거리거나 훌쩍이지 않고 어떻게든 제대로 말하고 싶은 듯이 유성은 침을 크게 삼켰다.
“그래 준 사람, 당신 말고는 없었어.”
누가 나한테 그렇게 해 줄 줄 몰랐어…….
고마워…….
“나도 좋아하는 사람한테 잘해 주고 싶었는데…….”
아주 아주 잘해 주고 싶었는데.
유성이 목으로 흘러내린 울음을 닦았다.
왜 사는 일이 이토록 마음처럼 안 될까.
“미안해.”
“사과하지 마.”
사헌이 다급하게 유성의 어깨를 쥐었다.
마른 어깨를 함부로 쥘 수가 없어, 헐거운 손아귀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냥, 이대로는 안 되는 건가.”
짓누르는 무게를 이기지 못한 사헌이 바닥에 무릎을 댔다. 유성의 품에 고개를 묻은 사헌의 눈길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바닥에는 떨어진 물방울이 동그랗게 퍼져 있었다. 시야가 흔들린다. 가슴이 부서질 것 같았다.
“내가 당신 몫까지 잘할 테니까 이대로, 이렇게. 같이. 그렇게는 안 되는 건가, 우리?”
바닥의 물 자국이 커졌다. 유성이 사헌의 등을 감싸 안았다.
“당신 나한테 정말 잘해 줬어. 고마워요. 아무 마음 없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어.”
남자의 등은 커다래서 만져 주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물기가 유성의 발등을 적셨다.
“처음부터 좋아했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성은 후회한다. 당신을 만나지 말걸 그랬다.
* * *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아했다.
그는 내게 몹시 다정해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언제까지나 함께 살고 싶었다.
그러니까 지옥에는 꼭 나 혼자 갈 것이다.
집 거실에서는 새벽 도시의 전경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통유리창이 커다란 스크린처럼 보였다.
거실에서 보이는 풍경을 눈에 담은 뒤 나는 현관으로 나아갔다. 나갈 채비를 마친 최사헌이 난처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일어날 필요 없었는데요.”
“내가 배웅해 주고 싶어서 그래요.”
요즘 최사헌은 여명이 밝기도 전에 집을 나섰다. 집에는 어떻게 들어오는지 신기할 정도로 스케줄이 빡빡해 보였다.
그런데도 최사헌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집에 들어왔다. 자고 갈 수 없으면 와서 얼굴이라도 비쳤다.
오직 나를 위해 들이는 수고였다.
최사헌은 정말이지 극성맞게도 지극정성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나 싶을 정도로.
왜 그러는지 지금은 안다.
“잘 다녀와요.”
언젠가 했듯 까치발을 들고 최사헌의 입술에 입 맞췄다. 기분 좋은 놀라움이 최사헌의 눈동자에 어렸다.
마지막 인사를 고를 수 있다면 뭐라고 할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 통화가 유민이에게 하는 마지막 말임을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총을 들고 차량으로 달려가는 순간이 아이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최후의 찰나임을 알았다면.
마지막으로 건네는 인사는 무언가 다르리라 생각했건만 입맞춤은 똑같이 따뜻하고 기분 좋았다.
문으로 나서려던 최사헌이 갑자기 내 팔을 당겼다. 끌어안았다. 입술이 다시 맞물렸다.
“오늘은 일찍 들어올게.”
다정한 약속이 귓가에 떨어졌다. 손끝이 내 머리카락을 한차례 정돈하고 간다.
이런 사소함이 나를 아프게 했다.
문이 닫히고도 한동안 현관 앞에 있었다. 이미 안 보이는 사람을 한참 더 배웅하듯이.
발바닥이 차가워질 무렵에야 드레스룸으로 가 옷을 갈아입었다.
넉넉한 후드를 뒤집어쓰고 끈을 졸라매었다. 모자 부분을 연결한 줄이 당겨지면서 천이 조글조글하게 조였다.
아파트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운동화로 땅을 박찼다. 총에 맞았던 옆구리가 뭉근히 쑤셨다.
이른 시간이었으나 바깥에는 나처럼 뛰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개중에는 눈에 익은 얼굴도 보였다.
아파트 밖으로 잠깐 고개만 디밀어도 서넛씩 가드가 붙었다. 예컨대 지금 내 대각선에서 달리는 남자가 그렇다.
공원을 거니는 척하는 사람이 하나, 눈에는 들어오지 않지만 내 뒤쪽을 서성거리는 사람이 또 하나 있다.
눈치채지 못한 척 공원을 계속 달렸다. 따돌리려거나 갑작스레 경로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지난번에는, 갑자기 택시에 올라 가드들을 따돌리는 데 성공했었다.
기사에게 아무 곳으로나 가능한 한 빠르게, 외진 곳으로 가 달라고 재촉해 내린 곳은 경기도 외곽이었다. 어디인지 알고자 나도 주변을 한참 두리번거려야 했는데 내린 지 30분도 되지 않아 다시 사람이 붙었다.
위치 추적이 이루어지고 있음은 그때 알았다.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산책처럼 길을 따라 걸었다.
30분쯤 걸어가니 몇 주째 공사 중인 널찍한 평지가 드러났다. 철골을 올린 공사장 뒤편에서 잿빛 연기가 어른어른 올라왔다.
빽빽하게 발전한 도시에도 어디선가 늘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니. 이미 파헤쳐지고 다듬어지고 군살이 박인 살갗에도 상처는 다시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어디든 또다시 부서질 수 있다.
나는 공사장을 빙 돌아 연기를 따라갔다. 나를 감시하는 이들은 이제 건물 하나 정도의 사이를 두고 있었다.
그들이나 나나 서로 눈치챘음을 알지만, 너무 노골적이지 않으려는 것이다.
공사장 뒤편에는 칠이 벗겨진 드럼통이 있었고 안에서 불기운이 어른거렸다.
나는 통 앞에 서서 불티가 퍼져 나가는 모양을 구경했다. 양철통 위로 불길이 날름날름 치솟았다.
어릴 적 사찰에 가서 공양을 드렸던 생각이 났다. 그 절에서도 무언가 태우는 곳이 있었다.
극락왕생, 왕생극락. 절에서 꾸벅꾸벅 절을 하며 되뇌던 사람들. 번뇌를 벗어야 한다던 설교를 기억한다. 고통은 욕망에서 오게 마련이라며.
불길이 거무죽죽한 종잇조각들을 깨끗이 핥고 있다. 불꽃 가까이 다가가자 화끈한 기운이 위협적으로 끼쳐 왔다.
물러서지는 않았다.
해치려 하면 해쳐지게 되고, 탐하면 다치게 되느니.
그러나 나는 이미 다쳤다.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되었다.
무량수불. 마지막으로 중얼거리며 염주를 돌렸다. 플라스틱 끈으로 묶여 있느라 진물이 나도록 패인 손목의 상처를 염주가 스쳤다.
손목에서 염주를 빼냈다.
타오르는 불길에 염주를 던져 넣자 불티가 타닥 튀어 올랐다.
나무에 새겨진 한자들이 시커멓게 그을렸다. 경구는 이제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극락정토에는 영영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후드 아래로 깊숙이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내 것이 아니었다.
곽지경의 핸드폰을 켜자 부재중 통화와 문자가 몰려왔다.
그중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고 대신 외우고 있던 번호를 단숨에 눌렀다.
아직 새벽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신호가 채 한 번 지나가기도 전에 통화가 연결되었다. 마치 낯선 번호 뒤에 내가 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했다.
그리고 전화기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불면서 매큼한 연기가 콧속으로 들이닥쳤다. 나는 피하지 않고 숨을 들이켰다. 기침을 억지로 삼켰다.
“목소리는 나오나 보네, 최의현.”
남을 저주하려면 무덤을 둘 파야 한다고들 말한다.
“출국하기 전에 한 번 만날래?”
나는 이미 내 몫의 무덤을 파 두었다.
“오늘. 장소는 알려 줄게.”
* * *
“바쁘실 텐데 여기까지 오셨어요.”
지서희가 커피를 내밀었다.
사헌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씁쓸한 커피를 들이켰다. 정신 못 가누게 바쁜 건 사실이었으므로 괜히 아니라고는 하지 않았다.
“회복 잘 되어 가고 있다고요. 다행입니다.”
“상무님이 신경 써 주신 덕분에요.”
괜한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사헌은 서희의 치료비는 물론 한동안의 생활비와 재활 비용까지 부담했다. 지금 이 재활센터에서 지내는 돈도 모두 사헌의 사비로 빠져나가고 있다.
집안일에 엮여 벌어진 사고이니 전적으로 책임지는 게 맞다고 사헌은 말했지만, 어쨌든 받는 처지에서 감사한 것은 감사한 것이니까.
“경호는 어떻게 하고 계세요.”
“쉬는 중에도 일 걱정합니까.”
“상무님 걱정이 돼서요.”
“다친 사람이 누군데 날 걱정해요.”
사헌은 웃어넘겼으나 오래 곁에서 보아 온 서희로서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사헌의 친모인 이소선이 서희를 고용한 것은, 이소선 본인의 의도와 별개로 출중한 한 수였다.
사헌의 곁에는 생각보다 위험이 많았다. 범운 내부에서 일어나는 위협이었으므로 그룹 바깥 사람인 친모가 따로 붙인 이가 아니었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일도 그만큼 많았을 것이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니 최문경 사장도 손을 쓰고 있기는 하겠죠. 그래도, 이번만 넘기면 됩니다.”
정기승은 재빠르게 움직여 주었다.
범운 물류가 최문경 사장의 지휘하에 패권을 잡던 시기에는 대규모 허브 구축과 화물 분류 자동화에 대단한 자본이 들었다. 이후 유통업 입지를 다지기 위한 토지 비용도.
청음과 오간 자본들, 내부에서 부도 직전까지 몰렸으면서 회계를 조작한 것, 파헤치니 끝도 없었다. 화려한 껍질을 벗기고 들여다보니 문경은 당시 낭떠러지였다.
인천에서 밀수와 대금업을 하던 조직의 유혹을 냉큼 받아들인 것도 당연해 보였다. 할아버지에게 실패를 고하느니 혀를 깨물었을 인물이니까.
최종필 회장에게 고해바친다 한들 꿈쩍할 거라고는 생각지는 않았다. 아마 알고도 덮었을 거다.
사헌 역시 이전에는 굳이 고모의 부정을 끌어들일 계획은 없었다. 회장은 딸을 감쌀 것이고, 최문경의 실적을 향한 공격은 곧 범운을 향한 공격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상관없다.
조용하고 착실하게 할아버지의 용인하에 꼭대기로 올라가겠다는 애초의 계획은 폐기했다. 백유성이 피 흘리며 돌아온 순간부터 사헌은 거리낄 게 없어졌다.
최문경과 관련한 자료가 세간에 밝혀지면 주가에 상당한 타격이 될 것이다. 안 그래도 문경은 최근 올림픽 특수를 노리며 호텔을 무리한 규모로 확장하고 있었다. 들어간 로비 비용도 만만치 않다.
약간의 불꽃만 있으면 충분하다.
“이번엔 실수 없을 겁니다.”
사헌은 다짐하는 사람처럼 말했다. 문경을 고발하고, 의현을 내쫓고, 쓸어 낸 만큼 빈자리를 차지해 더 위로 오른다.
그러면 이루려던 것을 다 할 수 있다.
아무것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유성도…….
“유성 씨는 어떤가요.”
서희의 조심스러운 물음을 들은 사헌이 굳었다. 쥐고 있던 빈 커피잔이 구겨졌다.
“나아질 겁니다.”
염원에 가까운 말이었다.
센터를 오가는 환자들보다도 안색이 나빠 보여, 서희는 사헌에게 좀 쉬셔야 하는 것 아니냐는 뻔한 말이라도 건넬까 했다.
하지만 서희보다 사헌의 휴대폰이 먼저 입을 열었다.
평소에 사헌이 쓰던 것과는 다른 벨 소리였다. 템포가 빠른 곡이라 어쩐지 다급하게 들렸다.
양해를 구하듯 손을 들어 보인 사헌이 구석으로 가 전화를 받았다. 자리를 피해 받을 겨를도 없어 보였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사헌의 말끝이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서희는 통화가 유성과 관련되었음을 직감했다.
창가의 커튼이 바람도 없이 일렁인다. 햇빛이 거슬렸는지 사헌이 커튼을 쳐 버린 탓이다.
곁에서 고용인으로서 보아 온 최사헌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바쁘고 너그러웠다. 자기가 관심 있는 문제가 아닌 이상 주변 사람에게 딱히 신경 쓰지 않기에 나오는 아량이었다.
“똑바로 설명해요. 위치 추적까지 하고 있는데 어떻게 없어져.”
커튼을 움킨 사헌의 등이 호흡을 따라 얕게 오르내리고, 셔츠 깃 위의 목은 뻣뻣했다. 서희는 뒷모습에서도 표정이 보인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표정의 주인이 사헌이라는 것에도.
“됐습니다. 내가 가죠.”
쏘아붙이고 전화를 뚝 끊은 사헌이 서희를 지나쳐 갔다. 인사조차 없다.
저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상황인 듯해 지서희는 오히려 걱정되기 시작했다.
사헌이 쳐 놓은 커튼을 걷어 내자 야외 주차장이 보였다. 때마침 사헌의 차가 재빠르게 주차장을 나서고 있었다.
사헌의 차가 출발하고 얼마 안 돼 세단이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손님이 많은 병원 주차장에서 오가는 차는 흔했으나, 무언가 꺼림칙한 느낌이 경계가 훈련된 경호원을 괴롭혔다.
잠시 뒤에야 서희는 찜찜함의 정체를 깨달았다.
사헌의 뒤를 따라서 나간 차는 운전석 문이 열리지 않았었다. 내내 운전석에 사람이 있었다는 소리다.
사헌 역시 알고 있을지 몰라도, 파악하게 된 이상은 알려야 했다. 서희가 휴대폰을 붙잡았다.
미행이다.
* * *
“정말 여기서 내리게요?”
택시 기사가 영 수상쩍다는 듯이 나를 흘깃댔다.
어디 시가지도 아니고 차들이 달리는 도로 옆 갓길에 세워 달라니 이상할 만했다.
이유를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대신 미리 준비해 온 현금을 뭉텅이로 건넸다.
“네. 그리고 남는 돈으로 아무 데나 더 가 주세요.”
“아니, 내린다며.”
“저 내리고 나서요.”
택시 기사는 그야말로 해괴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반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문을 열고 내렸다.
택시 뒷좌석 아래 흘린 내 핸드폰이 어디에서 멈출지 궁금해졌다. 마지막으로 위치가 추적되는 곳은 과연 어딜까.
최사헌은 거기 가 볼까? 아마 그럴 것이다.
그때는 모든 게 끝나 있을 거다.
끝까지 나를 힐끔거리는 택시를 떠나보내고 곽지경의 휴대폰을 꺼내 다른 택시를 불렀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목적지로 향할 택시였다.
종착역으로.
뒷좌석 창문에 기대어 흘러가는 풍경을 보는 사이 차는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했다.
앞은 산이었다. 바람을 따라 기우는 나뭇가지를 보면서 주머니에 남은 지폐로 값을 치렀다.
“손님, 잘못 주셨는데요.”
미터기에 찍힌 금액보다 확연히 많은 액수에 기사가 허겁지겁 나를 불렀다.
“그냥 팁으로 받으세요.”
“아니, 그래도 이건 너무 많은데.”
본래 내야 할 돈의 두 배는 될 금액을 받아 들고 기사는 얼떨떨한 낯빛이었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그는 잔돈을 거슬러 주려 들었다.
“전 이제 필요 없어서 그래요.”
“예?”
“살펴 가세요.”
문을 닫고 내려서자 습한 바람이 닥쳐왔다.
오후부터 비가 내린다더니 벌써 공기가 눅눅했다.
산 공기에서는 나무와 흙냄새가 비릴 정도로 강하게 났다. 콧속을 드나드는 풀 내음을 맡으면서 나는 계절치고 두꺼운 외투 안쪽의 물건을 더듬었다.
플라스틱 덩어리가 만져졌다. 한참 그것을 더듬어 본 후에야 거침없이 걸었다.
차로 오를 수 없게 된 좁고 가파른 숲길 위에 절이 있었다. 절이 보일 만큼 오르자 어느덧 숨이 차고 목에 땀이 뱄다.
어머니가 유민이와 나를 데리고 들르던 사찰은 어릴 때 보았던 것보다 조금 작고 초라했다.
가빠진 숨이 콱 막혀 버리게끔, 추억이 덜미를 챘다.
유민이는 사찰에서도 분방하게 뛰어다녔다. 지레 눈치를 보느라 평소보다 조용해지는 쪽은 나였다.
어머니는 스님과 인사를 하고, 염주를 굴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가끔은 불당으로 들어가 절을 했다.
사찰을 천천히 돌면서 무엇이 기억과 같고 뭐가 달라졌는지 살폈다. 이끼 낀 돌계단이 같았고, 칠이 다 누렇게 변해 닳아 버린 벽화가 달랐다.
벽면과 기둥에 구절들이 낙서처럼 쓰였다. 나무가 갈라진 틈으로 먹이 고인 채였다.
어느 벽에는 『법구경』이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이에도 미워하는 이에도 마음을 주지 말라. 사랑하는 것을 가까이하지 못함은 고통이요. 미워하는 것을 가까이함도 고통이다.
그러니, 무엇에도 애착하지 말라.
사랑을 잃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가.
그 어디에도 애착이 없고, 무엇도 미워하지 않는 자, 생사의 족쇄에서 놓여나리니.]
새카맣게 적힌 글귀를 나는 그저 노려보았다.
개방된 법당의 불상 앞에서 두어 명이 묵묵히 절을 올리고 있었다. 백팔 번뇌를 끊으려 백팔 번의 절을. 평안을 빌고자 다시 3천 번의 절을.
누구도 무엇도 말하지 않고 그들은 끊임없이 절을 했다. 땀을 뻘뻘 흘리는 얼굴에 기이한 몰아가 깃들어 있었다.
나도 아주 천천히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목탁 치는 소리가 들렸다. 향을 태운 연기가 허공으로 흘러들었다.
찬 바닥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생각했다.
여기서 마음을 토해 낼 수 있다면, 마음먹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을 수 있으리라.
무릎을 펴고 일어서는 순간 거짓말처럼 속이 깨끗해져 깊이 판 흙구덩이에 도로 흙을 채워 다져 넣을 수 있을지 모른다.
최사헌과 파혼하고 어딘가 한적한 곳으로 내려가 유민이와 죽은 아이를 기리는 상상을 했다. 애욕도, 증오도 버리고.
무거운 머리를 들고 일어서자 금빛 불상이 인자하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부처의 얼굴을 앞에 두고도 나의 번뇌는 떨어져 나가는 대신 엉키기만 했다.
부패한 장기가 몸속에서 건강한 살에 들러붙듯 무럭무럭 자라났다.
부처는, 나 자신은, 나를 구하지 않았다.
마지막 절을 올리고 법당에서 나왔다.
바깥은 먹구름 탓에 침침했다. 솔바람이 세게 불며 푸른 가지들을 흔들었다. 솔잎이 춤추듯이 떨어졌다.
사찰에서 계곡으로 이어지는 철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차로는 오르기 힘들 정도로 길이 덜 닦여 있었으나 뒤로 한동안 빠지자 이럭저럭 길이랄 게 나왔다.
트인 것치고 사람이 썩 자주 드나들지는 않는 길이었다. 원래는 이 아래 시설이 있었는데 새로 길을 닦는다고 지자체에서 출입을 막고 철거하더니, 시장이 횡령으로 임기를 못 마치면서 그도 흐지부지 없던 일이 됐다.
덕분에 인적이 드물어진 산길은 도로가 중간에서 뚝 끊겨 있었다.
부서진 시멘트 덩어리를 밟으며 올라서자 멀리서 우르릉, 천둥 우는 소리가 잡혔다.
이마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올려다볼 필요도 없이 연달아 바닥이 젖었다. 진회색 시멘트가 시커멓게 얼룩졌다.
비가 내렸다.
빗줄기가 섞인 바람이 등을 떠민다. 끊겼다가 갑자기 생겨난 길에 차가 서 있다.
나는 빈 손목을 만져 보았다. 그다음 망설이지 않고 걸어가 차의 조수석에 올라탔다.
조수석 문이 세게 닫혔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나를 보았다. 뚫어져라 내게 박힌 시선은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겨우 만났네, 백유성.”
최의현이 거칠거칠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굵어진 빗줄기가 창문을 무섭게 두들겼다.
최의현은 한 손으로만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다른 손은 무얼 하나 살피니 목덜미를 긁느라 바빴다.
면도날로 길게 그어 놓았던 상처는 검붉게 부풀어 있었다. 덧나고 아물기를 반복한 듯 흉터의 모양이 거칠었고 여러 번 꿰맨 티가 났다.
“아파?”
궁금해서 물어봤다. 아팠으면 했다.
동시에 네가 아파 봤자 얼마나 아프겠냐는 마음도 있었다.
태도가 노골적이었는지 최의현이 대번에 비위가 뒤틀린 표정을 했다. 상처를 긁던 짓이 멈췄다.
대신 피딱지가 낀 손톱이 내 목을 할퀴었다.
먼저 한 손이 목을 움켰다. 다음 손이 곧장 덮쳐든다. 순식간에 최의현의 두 손에 목을 잡혔다.
“컥……!”
손아귀가 점점 파고들며 숨통을 조른다. 눈알이 팽창하는 듯한 압박은 물론이고 호흡이 당장에 가빠졌다.
팔을 움직여 품 안의 플라스틱을 잡았다.
가물가물해지는 의식을 벼리면서 나는 네모난 전기충격기를 최의현의 목덜미에 꽂았다.
딱, 따닥.
푸른 스파크가 튀었다.
* * *
백유성을 같은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최사헌은 생각을 꽤 많이 했다.
유성이 감시를 금세 눈치챌 거라는 사실은 처음부터 염두에 뒀다. 민감하고 영민한 사람이니까.
최의현이 출국하게 얌전히 있지 않을 것도 알았다. 유성의 광기 어린 복수심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테니.
그래서 최의현에게 사람을 붙였다.
유성이라면 모를까, 최의현은 자신에게 붙은 사람을 걱정할 성정이 아니었다. 자식 주변을 경계할 최문경 역시 지금은 정신이 없을 터였다.
전달받은 GPS를 확인한 사헌이 차 속도를 높였다. 출국을 앞둔 최의현이 이런 외진 곳에 갈 이유가 뭐가 있겠나.
백유성 때문이 아니라면.
산에 가까워질수록 차량은 드물어졌고,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유성과 관련한 연락을 받기 위해 따로 둔 휴대폰이 조수석에 던져져 있었다. 일 관련으로 그를 찾는지 가방 속에서 이따금 진동이 울었다. 부르는 소리에 일일이 대답해 주기엔 사헌은 지금 지나치게 다급했다.
정신은 이미 최의현이 도착했다는 산어귀에 박힌 채였다. 거기 있을 유성에게.
빗줄기가 한두 방울씩 전진하는 차의 앞창을 적셨다. 사헌이 늦게 와이퍼를 켰다.
교차로를 통과하려는 순간이었다.
좌측 도로에서 검은 차가 전속력으로 질주해 왔다.
굉음이 노을이 깔린 도로를 울렸다.
유리가 산산조각 나 빗속으로 튄다. 비가 깨진 유리창 안으로 닥쳤다.
옆구리를 들이받힌 사헌의 차가 빗길을 미끄러지며 한 바퀴 돌았다. 굵어진 비가 차체에 부딪혀 산산이 튀었다.
사고를 낸 차 안에서 남자가 터진 에어백을 헤쳤다. 도로는 마치 영화의 세트장처럼 적막했다. 남자가 운전석 문을 열고 내릴 때까지 두 차량뿐이었다.
재킷을 입은 남자가 안쪽에서 주머니칼을 꺼내며 나섰다. 빗물이 칼끝에 맺혔다.
근육을 긴장으로 부풀린 채 남자가 찌그러진 운전석을 확인한다.
비어 있었다.
핏자국이 운전석을 타 넘어 조수석에 남았다. 조수석 문은 반 뼘 정도 열린 채였다.
남자가 서둘러 차 근처를 둘러보았다.
떨어진 피가 있었을지 모르나 빗줄기가 흔적을 지웠다. 카랑카랑한 욕설이 빗소리와 뒤섞였다.
* * *
푸른 불꽃이 점멸했다.
목덜미에서 손이 떨어져 나간다.
꿈틀거리던 최의현이 축 늘어졌다. 나는 숨도 쉬지 않고 그가 정말로 더는 움직이지 않는지 확인했다.
최의현의 맥박은 느렸다. 눈꺼풀이 움찔거리는 것 외에는 아무 동작도 없었다.
한 손으로는 재킷 안주머니에 붙인 칼을 꺼내며 나는 최의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연습은 해 보았으나 정말 한 번에 끝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연습처럼 단번에 박아 넣을 수 있을지도 문제였다. 힘이 빠진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치명상을 입히지 못한 채로 깨기라도 하면 모든 게 어그러진다.
쏟아지는 기침을 삼키고, 최대한 조용히 산소를 마시면서 최의현의 몸통을 손으로 짚었다. 분명 무언가 가져왔을 것이다.
청음과 유착 관계가 들쑤셔지며 최문경이 몸을 사리는 시기라 최의현 혼자 올 것까지는 예상했다. 출국을 앞두고 최의현은 나보다 더 갇힌 상태였다.
하지만 여기 날 만나러 오면서 맨몸으로 왔을 리 없다. 최의현이라면 분명…….
최의현의 허리춤을 뒤지던 손에 차가운 물체가 잡혔다.
손바닥이 땀으로 미끈거렸다. 이를 악물고 뒤지자 홀스터로 고정된 권총이 코트 밑에 숨겨져 있었다. 총구 밑으로 길쭉하고 동그랗게 연결된 물건도 만져졌다. 소음기다.
소름 끼치게 차가운 쇠의 감촉을 견디며 내가 총을 잡았을 때였다.
미적지근한 숨이 섬찟하게 목을 간지럽혔다.
모든 감각이 고요히 뒤틀어지는 환상 속에 나는 눈동자만을 움직여 위를 보았다.
최의현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벌어진 입술에서 쌔액쌔액, 숨소리가 흘렀다.
우르릉, 궂은 하늘이 거칠게 호흡하듯 천둥이 울렸다. 최의현이 내 목을 붙잡았다. 나는 곧장 칼을 쥔 손을 휘둘렀다.
칼날이 최의현의 어깨에 박혔다. 씨발! 최의현의 고함이 귀에 왱왱 울렸다. 바로 칼 손잡이를 뽑아 다시 찔러야 했으나 근육에 박힌 칼이 쉽게 뽑히지 않았다.
휘둘러진 주먹이 관자놀이를 쳤다. 순간 시야가 흔들리고 눈앞이 거멓게 변했다. 충격으로 멈춘 사이 하복부에 다시 주먹이 꽂혀 들었다.
운전석이 흔들렸다. 팔과 팔이 뒤얽힌다. 스위치가 눌려 차창이 내려갔다. 빗줄기가 머리카락을 적신다.
탕!
총성이 빗소리를 찢었다.
* * *
갓길에 차를 대고서 택시 운전사는 졸고 있었다.
이상한 손님을 받는 바람에 장사 시작부터 횡재했다. 큰돈을 받은 건 좋았는데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 영 께름칙해서, 기사는 본래 영업하던 자리로 돌아와서도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
빗줄기가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기사가 겨우 눈을 떴다.
오늘 비가 온다고 했던가. 아침 예보에서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비가 퍼붓는 걸 보니 손님을 좀 잡을 수 있을 듯했다. 슬슬 운전에 나서고자 기사가 운전대를 붙잡았을 때였다.
운전석 문이 벌컥 열렸다. 빗물이 뺨에 떨어져 기사가 몸을 들썩였다.
“어, 어?”
운전석 문을 붙잡은 훤칠한 남자는 말도 없이 기사를 끌어냈다. 이게 무슨? 기사가 버둥거렸으나 힘이 어찌나 센지 속수무책이었다.
당장에 길바닥에 팽개쳐진 기사가 허둥지둥 바로 섰다.
“당신 뭐야?”
당황한 나머지 새된 소리로 지껄이는 기사를 사헌이 한쪽 팔로 막았다.
“미안한데 잠깐 차 좀 빌리겠습니다.”
이어서 사헌이 지갑에서 꺼낸 지폐 뭉텅이를 기사의 손에 건넸다.
“어, 어?”
기사가 멍청하게 입을 뻐끔대는 와중에 사헌은 가차 없이 그를 빗길로 끌어냈다.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이봐, 이봐요.”
“명함 같이 드렸습니다. 차 변상할 테니 그 번호로 연락하시면 됩니다.”
이번에도 기사가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차가 먼저 쌩하니 사라졌다.
“허어.”
빠르게 내달리는 자신의 택시를 보면서 기사가 혀를 찼다. 달리는 차 뒤로 물보라가 튀었다.
손에 들린 지폐 더미는 제법 두툼했다. 맨 위에는 아까 들은 말대로 명함이 올라와 있었다.
이름만 들으면 알 법한 기업 간부 명함이라는 사실보다 기사를 놀라게 한 것은 새빨간 핏자국이었다.
지폐에도 핏물이 군데군데 들어 있었다. 내리는 비가 명함에 번진 피를 씻어 냈다.
“왜 병원에를 안 가고…….”
이미 사라져 버린 택시가 떠난 쪽을 향해 기사가 중얼거렸다. 다급하게 차를 빼앗은 남자가 병원으로 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그는 어디로 가는 걸까.
비가 기사의 머리카락을 적시며 등골로 흘러내렸다. 아이고, 차가워라. 기사가 맥없이 진저리치며 비를 피할 곳으로 물러났다.
빗발이 점점 더 거세어지고 있었다.
* * *
소음기가 달려 있는데도 귀가 먹먹했다. 정신을 못 차리는 최의현을 간신히 떠밀고 운전석 문을 열어젖히자 무릎이 꺾였다.
힘이 빠진 다리로 빗길을 더듬더듬 기어가면서도 나는 총만은 세게 붙잡았다. 손가락 마디가 아프도록 쥐었다.
포장되지 않은 산길로 기었다. 일단은 한숨 돌려야 했다. 몸싸움 중에 최의현에게 얻어맞은 배며 옆구리가 무작정 쑤셨다. 뼈가 나갔을지도 모른다.
“괜찮아…….”
괜찮다. 길어야 앞으로 몇 시간이다. 혹은 몇십 분. 그만큼만 정신을 차리고 있으면 된다.
한 번이다. 손에 들린 총이 무거워 그쪽 손목을 붙잡고 일어섰다. 딱 한 번, 정확히 쏠 기회. 그거면 끝난다. 모든 것이. 이번에야말로 모든 게.
빗물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세게 눈을 훔치며 나무 사이로 들어섰다. 적당히 굵직한 나무 둥치에 숨어 최의현의 차 방향을 보아야 했다.
“백유성!”
기억과 같은 외침이 들렸다.
나무를 짚은 손이 미끄러지며 무릎 한쪽이 휘청 꺾였다. 거친 나무껍질을 긁어내린 손바닥이 화끈댔다.
총에 맞았던 옆구리가 타오르는 듯해 나도 모르게 몸을 옹송그렸다.
그날이 바로 어제 같았다. 내가 저지르는 짓에 아이가 참을 수 없다는 듯 구역질해 댔을 때. 벌레처럼 도망가던 나.
최의현은 이번에도 역시 죽지 않았다. 죽이고 싶은데 죽지 않았다.
죽여 버릴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끝이다. 정말로 끝장이다.
본래는 여기서 더 떨어진 곳으로 데려가 조용히 끝낼 생각이었으나 계획이 틀어졌다. 괜찮다. 예상 못 한 범위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오기 전에 끝낼 수만 있으면 된다. 보통 지나다니는 길과 떨어진 곳이고, 혹시 총소리가 들렸더라도 폭우 탓에 도착은 늦을 것이다.
빠르게 젖은 겉옷을 만져 봤다. 전기충격기는 차에서 떨어뜨렸고 칼도 회수하지 못했다. 손에는 하나로 엉겨 붙은 듯 쥐고 있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이거면 충분했다.
조심히 시선을 돌리자 멀리로 최의현의 차가 보였다. 문은 여전히 열린 채다.
최의현은 보이지 않았다.
타앙!
갑작스레 들린 소리에 반사적으로 나무 뒤에 웅크렸다. 한순간 천둥인가 했지만 나는 빠르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총소리였다.
최의현은 권총만 가져온 게 아니었다.
총을 붙잡은 손가락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상황이 달라졌다. 더 확실히 숨어야 했다.
일단은 안으로 가야 한다. 여기는 너무 길과 가깝다.
제대로 펴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그새 흙이 푹 젖어 걷기 힘겨웠다. 바닥에 흙탕물이 졸졸 흘렀다.
물러진 흙이 걸음마다 푹푹 패었다. 이동 속도보다 발자국이 문제였다. 비에 젖어 식은 체온도 발목을 붙잡았다.
나는 깊이 숨기를 포기하고 입 안의 살을 질겅질겅 물었다. 체온과 함께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졌다. 얻어맞은 눈가가 점차 부풀어 시야가 찌그러졌다.
시간을 더 끌수록 불리해지는 쪽은 나였다.
유인해서 끝내자. 결정을 내린 후 덜덜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날 정도로 씹자 둔해지던 정신이 어느 정도 깨어났다.
최의현의 차가 있는 쪽을 다시 살피자 나무와 나무 사이로 흐릿하게 실루엣이 하나 더 보였다.
차가 늘었다.
심장이 쿵, 떨어져 내렸다.
최의현에게 붙은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아마 나처럼 따돌리고 도착했다가, 뒤늦게 따라붙은 걸 거다.
이 경우도 고려했으나 막상 이런 상황에 닥치니 깜깜했다. 최악은 사람이 끼어드는 바람에 나나 최의현이나 멀쩡히 돌아가는 것이다. 최의현이 출국하고 나는 여기 남는 일이다.
발치부터 피가 차갑게 식었다. 발바닥이 빨아들인 지면의 냉기가 머리로 오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생각이 한 점으로 모인다. 위기를 맞은 동물이 본능에 지배되듯 나는 오직 하나만을 떠올렸다. 필요한 것도 하나. 원하는 것도 하나.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이다. 머릿속이 깨끗하게 재정립된다.
그저, 무조건 빨리 끝내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움직여야 한다.
방해자보다 더 빨리.
발을 잡아당기는 흙에 발길을 내맡기고서 속도를 높였다.
흙바닥에 갓 찍힌 듯한 발자국이 있었다.
다시 속도를 늦췄다. 멀리 김이 피어오르는 등이 있다.
덩치가 커 숨겨지지도 않는 등판이 분주히 움직였다. 최의현은 주둥이가 긴 장총을 들고 있다. 찌그러진 시야 때문에 총이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으나 직감으로 느꼈다. 공기총이 아니다. 그때 내 옆구리를 쏘았던 그 총이었다.
권총을 쥔 팔을 앞으로 뻗었다. 부푼 쪽 눈꺼풀을 감고 조준해도 상이 두어 개로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입술을 계속 씹어 피를 내도 고통은 이 이상 정신을 선명하게 해 주지 못했다.
결정해야 할 때였다.
맞힐 수 있다. 신경을 쇳덩이에 옮겨 놓은 듯 살갗에 내리는 비와 추위, 통증이 흐려졌다. 맞힐 수 있다. 한 번 더 중얼거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최의현이 갑자기 몸을 크게 틀었다.
머리를 움키고 비명을 질렀으나 그뿐이었다. 빗나갔다. 제대로 맞히지 못했다. 결과가 차갑게 가슴에 박혔다.
이어서 총알의 방향을 따라온 최의현의 시선이 나를 맞혔다.
최의현은 정신 나간 들소처럼 나를 향해 달려왔다. 관자놀이가 찢어졌는지 흐르는 피를 비가 빠른 속도로 씻어 내고 있었다. 칼이 꽂혔던 어깨에서 빗물이 분홍색으로 튀었다.
피하기는 늦었다. 도망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등을 보이지 않는 게 낫다. 덜덜 떨리는 팔다리와 달리 차가워진 정신이 결론을 내렸다.
나는 빠르게 가까워지는 최의현을 보며 방아쇠를 한 번 더 당겼다.
이번에도 어깨였다. 분홍빛이던 빗물이 이번에는 새빨갛게 번졌다. 최의현과의 거리는 이제 1미터 남짓이었다.
최의현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기묘하게 침착해진 나처럼 최의현도 아드레날린에 취해 있는 듯했다.
손바닥이 머리로 날아왔다. 서넛으로 분열된 손의 형상이 느리게만 보이는데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충격에 고개가 속절없이 돌아가면서 온몸이 흔들렸다. 와중에도 총을 놓치지 않으려 하는 내 손목을 최의현이 비틀었다.
총소리가 또 터졌다. 이번에는 흙바닥만 맥없이 쏴 갈기고 만 소리였다.
“도대체 이유가 뭐야?!”
내 멱살을 붙잡고 나무 기둥에 처박으며 최의현이 악을 질렀다.
아슬아슬하게 흙바닥을 긁던 발끝이 허공으로 들렸다. 목에 실린 압박감이 서너 배는 되는 양 느껴졌다.
자칫하면 정신을 잃을 것 같다. 그러면 끝장이다. 나는 안간힘으로 버둥댔다.
“왜 항상 쉬운 일을 어렵게 만들어? 좋게 갈 수도 있었잖아.”
나를 보는 최의현의 얼굴 반쪽이 피에 젖어 있었다. 비가 계속 내려 흐릿한 다홍색만이 남을 뿐이었으나 눈썹이며 머리카락에 엉긴 핏방울은 색이 선명했다.
유민이의 사고 현장에서 봤던 피는 저보다 훨씬 짙었다.
내 옆구리에서 흘렀던 피도 저것보다 뜨거웠다.
“네가…… 끔……찍하게, 싫어.”
간신히 뱉은 말에 최의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최의현이 내 말에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이 역겨웠다. 침을 뱉으려 입술을 모았으나 그만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등이 다시 나무에 처박혔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덜걱덜걱 흔들린다. 온몸의 뼈대가 한꺼번에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시야가 고장 난 전등처럼 한차례 나갔다가 돌아왔다.
“그, 래…… 윽…… 죽여.”
유민일 죽였듯이 나도 죽여 봐. 말을 하고 싶어도 목이 눌려서 소리를 내기 어려웠다.
“정말 죽여 줘?”
최의현의 눈이 비이상적으로 번뜩였다. 나를 내던지고 최의현이 몸을 굽혔다. 최의현의 이마 위쪽으로 찢어진 상처가 보였다. 내가 빗맞힌 자국일 것이다.
조금만 잘 겨눴으면 머리를 맞힐 수 있었는데.
아쉬워하는 찰나 총구가 나를 향했다.
한 손으로 총을 쥐고서 최의현이 나를 쳐다본다. 끊어진 것만 같던 척추 마디에서 찡한 통증이 올라왔다. 속눈썹에 매달린 물방울이 무겁게 떨어져 뺨을 긋고 내려간다.
이대로 있으면 정말 죽는다.
깨달음과 같이 온 것은 공포가 아니었다. 눈알 뒤를 활활 달구는 분노였다.
죽는다. 최의현에게.
죽이지 못하고 죽는다.
머리에서 사이렌이 울었다. 비틀대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대답해, 백유성. 정말 죽여 주냐고.”
이 순간에도 최의현은 나를 가지고 놀려고 들었다. 눈에서 뜨거운 것이 흐르다 금세 미지근해졌다. 비가 내리고 있어 다행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뛰었다.
마지막 기력을 쥐어짜서 달리면서도 무모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언제 등을 맞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의현의 수작질에 넘어가 주는 것만은 견딜 수가 없다.
최의현도 제대로 된 상태는 아니다. 빗맞히게 하다, 탄창이 비고 나면, 그때 어떻게든. 머리가 과하게 돌다 못해 공회전했다.
숨이 금세 턱까지 찼다. 입에서 피 맛이 났다. 뒤를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물컹거리는 흙에 발이 미끄러지면서 몸이 아래로 쭉 내려갔다.
떨어진다. 몸의 무게가 한순간에 쏠렸다. 다시 땅을 디뎌 보려 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비탈로 굴러떨어지는 대신 단단한 팔에 붙잡혔다.
사람의 체온을 닮은 온도의 벽이 내 몸을 받쳤다.
이미 어지러운 숨이 코와 입으로 무분별하게 빠졌다. 위를 보자, 지금 여기 보여서는 안 될 얼굴이 있었다…….
머리를 후려치는 듯한 격발음이 터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떨었다. 중심이 공처럼 굴렀다. 실제로 내가 돈 건지, 그저 감각이 미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 나는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창백하게 젖은 얼굴이 나를 힘없이 응시한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완벽한 조형이 순간 일그러졌다.
최사헌의 몸이 나를 무겁게 눌러 왔다.
차가운 빗물과 대비되어 소스라치게 뜨거운 액체가 쏟아져 닿았다.
얼얼한 충격이 머리통을 때렸다. 골통이 부수어졌다고 해도 믿을 만했다.
총에 맞은 것은 내가 아니었다.
“……도망가.”
흙바닥을 짚고 자기 몸에 깔려 있던 나를 떠밀면서 최사헌이 중얼거렸다. 핏물이 비와 섞여 흙을 쓸고 지나갔다.
나는 더듬더듬 일어나 최사헌의 어깨를 붙잡았다. 최사헌이 괴로운 신음을 내질렀다. 만지는 것만으로 팔꿈치 위의 뼈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팔뿐이 아닐지도 모른다.
총상을 제하고도 최사헌은 엉망이었다. 모든 사실이 어지럽게 나를 두들겼다.
“도대체 여길, 왜. 당신이 여기 왜.”
“당신 살리러.”
퍽 우스운 말이라도 했다는 듯이 말끝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신고했으니까…… 어디든 숨어서 조금만 버텨.”
복부를 팔로 압박하며 상체를 일으킨 최사헌이 나를 다시 밀었다. 힘이 빠진 몸은 미는 대로 밀렸다.
“가라면 가.”
최사헌의 입술에서 새하얀 입김이 빠져나오다 사그라졌다.
흐릿한 시야에 최사헌의 등 뒤로 점점 커지는 실루엣이 보였다. 등에 걸머진 장총이 위협적으로 길쭉했다.
최의현이 다가왔다.
* * *
유성의 등이 멀어진다.
땅을 박차는 발소리를 들으며 사헌은 이것으로 됐다고 생각했다.
의현은 이제 사헌의 앞이었다. 장총이 시야에 먼저 들어왔다.
일어서려 했으나 도무지 발이 움직여 줄 것 같지 않아, 사헌은 그냥 앉아 있기로 했다. 등을 기댈 곳이 없어 상체가 세우고 있는 무릎으로 기울었다.
“도망을 가네.”
멀어지는 유성을 보면서 의현이 떠들었다. 보란 듯 유성이 사라진 방향을 가리키며 사헌을 보는 의현은 들떠 보이기까지 했다.
“죽어 가는 널 두고.”
유성이 도망친 쪽을 찌르던 의현의 검지가 그대로 움직여 사헌을 향했다.
“실컷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 기분이 어때?”
빈정거리는 의현의 눈에 기대감이 강렬히 빛났다.
“좋은데.”
사헌이 팔로 배를 누른 채 억양 없이 대답했다.
피가 계속 빠져나가는 데다, 비까지 맞느라 체온이 빠르게 떨어졌다. 오감이 둔했다. 벌써 손끝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거봐. 백유성은 너 이용하는 거라고 했지. 쟤는 나 때문에 너랑 붙어 있었던 거야. 너 따위는 신경도 안 썼다고.”
“의현아, 너는 항상 말이 너무 많다.”
“뭐?”
의현이 발작적으로 총을 치켰다.
“백유성이 그렇게 좋았어? 말해 봐, 이 새끼야! 좋았냐고, 응? 죽여 달라고 뛰어들 만큼?”
총구가 사헌의 가슴을 짓눌렀다. 당장이라도 쏠 수 있다는 투로 의현이 방아쇠에 손가락을 바짝 걸었다.
“좋아하니까 살았으면 한 거지.”
심장 위편을 짓누르는 딱딱한 총구를 느끼며 사헌이 느리게 숨 쉬었다.
유성이 정말로 자신을 좋아했는지, 한때는 그랬는데 마음이 다 말라 버렸는지, 헷갈리기도 했으나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 것은 어떻게 됐든, 유성이 살길 바란다.
도망가서 잘됐다. 도망갈 마음을 먹을 수 있는 상태였던 것도, 잘됐다.
“넌 좋아하는 사람한테 이런 걸 쏘고 싶어?”
사헌이 의현이 쥐고 있는 총신을 툭, 건드렸다. 그게 순식간에 자기를 죽일 수도 있는 살상 무기가 아니라 어린애 장난감이라도 된다는 듯이.
의현의 이마에 핏줄이 불뚝 섰다. 양철 캔처럼 찌그러지는 의현의 이목구비를 따라 빗물이 고이고 떨어져 내린다.
“왜 항상 너야?”
의현이 울부짖었다.
방아쇠가 당겨지기 직전 사헌이 총신을 먼저 붙잡아 힘껏 당겼다. 당황한 의현이 힘으로 버틴다.
총이 격발되었다. 둘 중 누군가 악에 찬 비명을 질렀다.
발포된 총의 몸체가 끓어오르듯 뜨거워졌다. 아직도 총신을 잡고 있던 손바닥 살이 익는 것을 느끼며 사헌이 신음했다.
“씨발! 씨발 새끼…….”
의현이 보이는 행동은 이제 거의 발작에 가까웠다. 전신을 들썩이며 발로 사헌의 구멍 뚫린 배를 마구 걷어찼다.
손아귀에서 끝내 총이 빠졌다. 끝장이다. 사헌은 직감했다.
“죽어.”
의현이 사헌에게서 완전히 빼앗은 총을 치켜들었다.
차가운 빗방울이 지글대는 손바닥을 두드리며 흘러내렸다.
죽기 직전에는 살아온 삶이 보인다던데.
무언가 대단할 줄 알았건만 주마등은 별것도 없었다.
능소화가 을씨년스레 핀 돌담, 우연조의 빼빼 마른 손, 피아노, 가곡과 연주곡, 미처 익숙해지기도 전에 아무렇게나 떠돌아야 했던 이국의 풍경들. 모래의 정원.
백유성.
다른 모습을 떠올리고 싶어도 우는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게 미안했다.
‘뭐였을까, 그 애 이름?’
유성의 물음을 떠올리느라 사헌은 무거운 눈꺼풀을 끝내 감지 못했다.
그러게. 그 애를 만나면 뭐라고 불러야 할지.
신이나 사후 세계 따윈 믿지도 않았으면서 사헌은 그런 생각을 했다.
총구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새카만 사헌의 눈동자에 주변 풍경이 맺혔다. 수풀과 나무가 빙글빙글 돌아간다.
빗방울이 사헌의 눈동자로 흘러 고이며 시야가 완전히 뿌예졌다가 다시 깨끗해졌다.
거기에 유성이 있었다.
권총을 똑바로 쥐고 의현을 쏘느라 유성은 미동도 없었다. 비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 사이로 표정 없는 눈매가 피비린내 나는 상황에 안 어울리게 아름다웠다.
의현이 비틀거리며 떨어뜨린 총을 잡으려 했다. 다시 총성이 터졌다.
무릎을 붙잡고 쓰러진 의현이 목이 갈라지도록 비명을 질렀다. 격발음 사이로 뼈가 부수어지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치명상을 입은 짐승처럼 의현은 엎드려 꿈틀댔다.
달려온 유성이 장총을 먼저 집어 들었다. 사헌은 유성이 바로 의현의 머리를 쏘리라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 돌아온 것이리라고.
유성이 의현을 겨누었다.
* * *
장총의 총구가 최의현을 향한다.
바로 이 순간이다.
바로 지금. 이때를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
최의현이 피를 쏟으며 벌레처럼 흙바닥을 기고 있다. 손가락에 걸린 방아쇠가 느껴졌다. 쇠의 감촉과 검지에 맺혀 떨어지는 빗방울, 방아쇠 표면에 고인 체온까지 모두 생생했다.
총신의 무게 탓에 팔이 덜덜 떨렸다. 관절이 삐걱대며 비명을 지른다.
억지로 총을 받치고 최의현의 뒤통수에 총구를 눌렀다.
“유민이한테 사과해.”
신음하던 최의현이 움직임을 뚝 멈췄다.
“그래……. 그러면 그렇지…….”
그륵거리는 소음과 중얼거림이 기분 나쁘게 섞였다. 진흙과 솔잎이 달라붙어 지저분해진 최의현의 얼굴이 나를 향했다.
“나 때문에, 하, 돌아온 거야. 맞지?”
히죽거리는 최의현을 보자 혈관이 분노로 끓어올랐다. 온몸의 핏줄에 증오가 덩어리져 그대로 터질 듯했다. 뱃가죽 안에서 내장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너 때문이라고?
비가 시야를 흐렸다. 와이퍼로 유리창을 닦아 내듯 눈꺼풀을 세차게 깜빡이자 다시 앞이 깨끗이 돌아온다.
시선을 옆으로 옮기자 똑같이 피 흘리는 최사헌이 눈에 들어왔다. 상처를 붙잡은 최사헌의 손가락 사이로 비와 피가 섞여서 흘렀다.
죽어 가고 있다.
언제나 나를 구해 주었던, 찾아내 주었던, 사랑해 준 사람이.
목울대를 지나 흘러내리는 빗줄기가 뜨거웠다. 다음 순간에야 눈물임을 알았다.
방아쇠를 당긴다.
총소리 탓에 귀가 얼얼했다. 윙윙거리는 먹먹하고 가느다란 소음만이 귓전을 울렸다.
반동으로 어깨가 빠질 것 같았다. 흙물이 비산했다. 피가 섞인 흙이 검붉게 튀었다.
나는 계속해서 총을 쏘았다. 방아쇠가 가벼워질 때까지.
흙바닥에 엎어진 최의현이 완전히 늘어져 경련했다.
핏물이 철벅거리는 바닥을 디딘 채로 무릎을 구부려 최의현을 들여다보았다. 경련하는 눈꺼풀을 보면서 주머니에 쑤셔 넣고 온 것을 최의현의 옆에 떨어뜨렸다.
“살인자는, 너야. 최의현.”
최의현이 내 손가락에 끼웠던 약혼반지가 진흙에 나동그라졌다.
“죽어 버려.”
생사의 족쇄가 목덜미를 조인다. 아무런 애착이 없는 것이 진정 고통 없는 삶에 이르는 길이라면, 나는 아직도 덫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빗물이 눈앞을 흐리며 뺨으로 흘러내렸다.
* * *
유성은 그대로 탄환을 다 쓴 총을 던져 버렸다.
그토록 많이 쏘았지만 최의현을 맞힌 총알은 한 발도 없었다. 단 한 발조차. 최의현은 기절한 듯 잘게 꿈틀대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멍해진 사이 유성이 사헌에게 뛰어왔다.
“왜 여기…….”
“당신 살리러요.”
대번에 튀어나온 대답에는 칼날처럼 새파란 결기가 있었다. 사헌은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였다.
사헌보다 훨씬 작은 체구로 억지로 사헌을 받쳐 안으면서 유성이 이를 악물고 산길을 내려갔다. 둘의 무게 때문에 흙이 푹푹 파였다.
억수같이 퍼붓던 빗줄기가 가늘어지는 중이었다. 흐린 정신 속에서 사헌은 유성의 훌쩍거림을 들었다.
앞을 고집스레 응시하는 유성의 입가에 흰 입김이 번졌다. 사헌의 숨은 유성의 것보다 차가웠다. 식은 체온이 느껴졌는지 유성이 떨었다.
“죽으면 죽여 버릴 거야.”
그게 또 울 것처럼 들려서 그러지 않겠다고 당장 약속이라도 하고 싶었다.
유성은 사헌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걷다 말고 결국 유성의 다리가 꺾였다.
끌어안은 두 몸이 젖은 산길을 굴렀다. 머리가 나무 둥치에 부딪히자 머릿속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사헌이 바닥에 늘어진 자신의 손을 보았다. 흙투성이인 손바닥에 빗물이 고이는 중이었다.
정말로 손가락 하나도 꼼짝 못 하겠다. 눈꺼풀에 납을 달고 있는 듯했다. 팔이 이상하게 돌아간 게 느껴졌다.
유성은 조금 더 떨어진 곳에 쓰러져 있었다. 허위허위 주변을 짚다 사헌을 발견한 유성이 기어와 그를 끌어안았다.
사헌을 안아 올리려는 노력이 연달아 실패하자 유성이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얼굴에 떨어지는 눈물이 뜨거웠다.
“안 죽어…….”
사헌이 언 입술로 입 맞추며 유성을 달랬다. 정말로? 유성이 울음 사이사이로 그렇게 물어 온 것 같기도 했다.
정말로. 사헌은 대답했지만, 제대로 들렸을지는 확신하기 힘들었다. 혀가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온몸이 그랬다.
멀리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차와 사람 소리였다. 유성의 안색이 변했다. 주변을 둘러보며 유성이 소리치고 있다.
유성이 안간힘으로 내는 외침도 뭉개진 웅웅거림으로만 들렸다. 의식이 자꾸 탁해진다.
가물어 가는 의식 속에서도 사헌은 안도했다.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과는 약간 다른 마음이었다.
약속을 지킬 수 있겠다는 안심이다.
혼자 두지 않아도 된다는 안심.
피와 진흙과 화약, 싸늘하고 비린 비 내음이 한 덩어리로 콧속을 메웠다. 악착같이 사헌을 끌어안은 품에서는 특유의 달콤한 체취가 어른거렸다.
사헌이 더 크게 숨 쉬었다. 크게, 많이. 호흡을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최사헌은 그 마음이 사랑임을 알았다.
* * *
엄마는 나한테 다녀오겠다고 하고서는 영영 안 돌아왔다.
유민이는 내가 보는 앞에서 죽었다.
내 아이는 태어나 보지도 못했다.
모두가 떠나 버린다.
세상에 정말로 저주가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있다. 사는 것 자체가 죄업인 운명도 있다고.
그러니까 나는 오래 살고 싶지 않았다.
병원 침대의 시트가 팔꿈치 밑에서 사박사박 운다. 소리에 소스라치며 일어났으나 잠결에 내가 뒤척여서 난 소리였다.
최사헌은 아직도 눈을 감은 채였다. 잠든 것과 다르게 시체 같은 안색을 보고 있자니 손톱 밑이 저릿저릿했다.
최사헌의 손을 잡자 따뜻하게 느껴졌다. 간신히 안도하면서도 울음기가 치밀어 시트에 고개를 처박아야만 했다.
“죽으면 죽여 버릴 거야.”
위협도 되지 않는 협박을 했다. 최사헌이 나지막이 웃던 소리가 떠올랐다.
‘당신 살리러.’
그 말도.
온몸의 살점이 아렸다. 치료받은 상처뿐만 아니라 다치지 않은 부분들도 모두 부서졌다 붙은 것처럼 지끈거렸다.
“죽어 버릴 거야…….”
“무서운 소리를 하네.”
환청처럼 대답이 들렸다.
나는 화들짝 고개를 치켰다. 최사헌이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고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목울대를 세게 맞은 듯 숨이 막히고 울렁거렸다. 침대 가장자리를 꽉 붙잡고서 겨우 숨을 한두 모금 삼켰다.
“나보다 당신이 더 환자 같아.”
어찌할 바 모르는 나를 구경하던 최사헌이 손가락으로 내 볼을 간질였다. 피가 돌지 않아 체온이 서늘했다. 손을 타는 동물처럼 나는 그 손아귀에 적극적으로 고개를 묻었다.
“다친 데는요.”
“그걸 왜 당신이 물어봐.”
침상에 누워 있는 쪽이 누군데. 입을 열면 원망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왜 거기 왔냐고. 왜 날 감쌌냐고. 기실 탓해져야 하는 쪽은 나인데.
“내가 안 물어보면 안 챙길 것 같아서.”
아무렇지 않게 다정한 소리에 치솟던 원망은 끈적거리는 슬픔으로 변했다.
“나는 처치 다 받았어요. 약도 먹었어요. 괜찮아요.”
정신이 뜨거운 곳과 차가운 곳을 번갈아 오갔다. 잠시라도 긴장을 풀면 울거나 화를 낼 것 같아 꾹꾹 눌러 말했다.
“다행이네.”
거기까지 듣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터졌다. 시트를 그러쥔 손등에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그러게 왜 왔어요? 다쳤잖아요.”
“어쨌든 죽진 않았으니까.”
“죽을 뻔했단 말이야.”
“당신도 죽을 뻔했어. 이래서 최의현은 당신 안 보이는 데로 보내 놓으려고 했던 건데, 아…….”
“아파요?”
황급히 묻자 최사헌이 쓰게 웃었다. 아직도 혈색이 다 돌아오지 않은 얼굴빛이 불안하기만 했다.
“실수했죠. 당신이나 최의현이나, 이렇게까지 할 줄 알고 있었어야 했는데.”
최사헌이 손을 펴 내 볼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번에는 지켰습니다.”
“…….”
“지켜 주겠다는 약속.”
온몸에 힘이 빠져 병실 침대에 온전히 몸을 기댔다. 몸이 찰랑찰랑하게 녹아내리고 있는 듯했다. 최사헌은 한동안 그런 나를 말없이 보아 주었다.
“왜 안 쐈습니까, 마지막에?”
최사헌이 무엇을 묻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나에게는 최의현을 완전히 끝낼 기회가 있었다.
목숨을 버려서라도 갖고 싶었던 찰나였다. 그러나 탄창이 바닥날 때까지 방아쇠를 당기며 내가 했던 생각은 오로지 최사헌에 관한 것이었다.
신이 있다면. 부처든 주님이든, 누가 있다면.
정말로 내 운명이 처참하고 지저분하다면. 나 때문에 유민이와 아이가 죽은 거라면.
그 순간 최의현을 쏘면 최사헌도 나 때문에 벌을 받게 될 것만 같았다. 정기승을 쏘고 나오면서 아이에게 사과해야 했던 순간처럼, 말도 안 되는 기원이라도 해야 했다.
그렇게 간절했었다.
“아직도 나랑 파혼하고 싶어요?”
최사헌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른 것을 물었다.
“모르겠어.”
자꾸만 울음이 비어져 나올 것 같아 주먹을 세게 쥐었다. 누가 머리를 작신작신 깨무는 것처럼 아팠다. 폐가 불탄다. 심장이 갈비뼈를 때리며 뛰었다.
“나하고 있으면 안 좋은 일만 생길 텐데, 당신도 알잖아. 다 들었잖아. 봤잖아. 그런데 대체 왜.”
결국 목소리가 울먹이며 흐트러졌다. 최사헌은 다 가질 수 있다. 다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나인가. 왜 하필 나여야 하나.
최사헌은 천하의 멍청이고 우린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흠집 그 자체고, 그런 나한테 목숨까지 거는 최사헌은 얼마나 멍청한지…….
“사랑해.”
최사헌이 말했다.
“그거면 됐잖아.”
너무 담백한 태도라 그 앞에서 애끓는 반박 따윈 무의미해졌다. 나는 애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최사헌을 보다가, 그냥 그를 덮은 이불에 고개를 묻었다.
그러고 나서 엉엉 울었다.
볼썽사나울 정도로 크게 울었다. 그랬더니, 최사헌은 웃었다. 그가 고개를 젖히고 웃을 때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병실을 흔들었다. 나는 계속 울었다.
울면서 다짐했다.
나는 이 남자를 위해 살 것이다.
그게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