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화
하온이 꺼내든 것은 효명군의 무기고에서 가져온 아주 평범한 검이었다.
“검을 다룰 수 있다 하셨지요.”
“응.”
“다행입니다. 응방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농기구 창고를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지. 지도로도 그려보았잖나.”
“그곳의 자물쇠를 풀어 두었습니다. 응방 쪽으로 향하시다 혹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거기 숨으십시오. 작은 창이 나 있으니 그리로 바깥의 사정을 살피시고, 사람이 없을 때 나오시면 될 것입니다.”
하온이 의자 위에 벗어두었던 자신의 두봉을 집어들어 무흔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짙은 청남빛의 긴 겉옷에는 흰 머리카락을 숨기기 좋은 모자도 달려 있었다.
이어 자신의 허리띠를 풀어 무흔의 허리에 둘러주었다.
“검을 여기 차시고, 겉옷 안쪽으로 숨기십시오. 제가 들고 온 쑥뜸 바구니를 들고 나가면 다들 저라 여길 것입니다.”
“부디 그래야 할 텐데….”
“키도 체형도 비슷하니 괜찮습니다. 여기에서 응방까지, 그 뒤쪽의 쪽문에 이르기까지의 길은 숙지하셨지요?”
“물론. 그대와 몇 번이나 확인해봤잖나.”
“그 쪽문 옆, 제가 붉은 천을 매어둔 수레가 있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 숨으시면 제 조력자가 해시(21시~23시)를 알리는 종이 울릴 때 수레를 끌고 나갈 것입니다.”
“그자는 믿을 수 있는가?”
“제가 다 죽어가는 그의 부인과 아들의 병을 낫게 해주었습니다. 목숨까지 내어놓겠다는 것을 말렸으니, 믿으셔도 됩니다.”
“응.”
하온이 품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어 무흔에게 건넸다.
“이것은 은자입니다. 성 밖을 나서게 되면 필요하실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북극성을 기준으로 동쪽으로 가시면 희로국에서 멀어집니다.”
“응.”
“하룻밤 묵으실 때는, 객잔에 방을 잡으시면 됩니다. 시장에서도 돈을 달라는 대로 다 주지 마시고 주변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잘 들으십시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말씀드렸잖습니까. 은증왕을 뵐 때마다 제 형이 떠오릅니다. 저는 도저히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 저 또한 받은 은혜를 남에게 베푸는 것이니 무겁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무흔은 하온을 덥석 끌어안았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용기가 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토닥토닥. 그리 무흔의 등을 두들겨 준 하온이 무흔의 목덜미에 길게 늘어진 두봉의 끈을 단단히 매듭지어주었다.
“시장에 도착하는 대로 얼굴을 가릴 수 있는 챙 넓은 모자를 사십시오. 기왕이면 머리카락을 숨길 수 있도록 가림천이 달린 것이 좋겠습니다.”
“응, 그런 모자라면 화첩에서 본 적이 있어.”
“제가 미리 구하였어야 했는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잘 가리고 다닐 테니 염려 마.”
“자, 이제 저를 치십시오.”
대체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 무흔은 어안이 벙벙하여 하온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다 괜찮다는 듯이 옅은 미소를 머금고는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제 얼굴을 한 번 주먹으로 치신 후, 뒤통수를 검집으로 후려치십시오.”
“나보고 자네를 치라고?”
“그래야 다들 제가 은증왕께 당한 줄 알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시간이 없습니다! 곧 교대할 병사들이 당도할 것이니, 얼른 저를 치십시오. 뒤통수를 가격하여 저를 기절시키셔야 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무흔은 두 손을 모으고 예를 갖추어 하온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내 이 은혜를 죽어서도 잊지 않을 것이오.”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두 번 울렸다. 문밖으로 조심스레 나선 무흔은 다급히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
주한모가 보낸 살수가 효명성에 잠입했다.
낮 동안 무흔 처소의 위치를 파악한 그는 생각보다 허술한 감시에 코웃음을 쳤다. 그대로 몇 시진 동안, 이상하게도 자물쇠가 없는 농기구 창고에 숨어 기다렸다.
밤이 깊었다. 쥐 죽은 듯 고요할 것이라 여겼던 살수의 예상과는 달리 성내에는 빈틈없이 횃불이 올라 있었고 병사들의 움직임이 요란했다. 동원된 병력의 수가 상당했다. 뭔가 이상했다.
사평과 그 수하들을 발견한 살수는 우선 숨었다.
“북쪽 구역은 수색을 마쳤고, 동쪽은?”
“동쪽 구역은 진행 중입니다. 은증왕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성을 빠져나가지 못한 것은 확실합니다.”
“세 군데 성문의 출입 통제는 물론이고, 응방과 배추밭 뒤의 쪽문 또한 폐쇄하라.”
오가는 대화를 훔쳐 듣던 살수는 상황을 빠르게 판단했다. 은증왕이 도망쳤으며, 아직 성내에 있는 게 분명했다.
도주를 위해서는 당연히 문으로 향하는 것이 순서였다. 예부상서가 알려준, 감시가 가장 허술한 응방 옆 북서문은 자신이 일을 마친 후 빠져나갈 곳으로 점찍어 둔 곳이었는데, 낭패였다.
살수는 뒤처진 병사 하나를 처리하여 옷을 바꾸어 입고, 효명성의 일원으로 가장하여 은증왕을 찾으러 나섰다.
“어디에 숨었기에 이리 보이질 않는단 말인가? 수색을 시작한 지 벌써 두 시진이나 지났네.”
“그러게나 말일세. 머리도 얼굴도 온통 하얀 자이니 금세 찾을 줄 알았더니만.”
“하필 주군께서 자리를 비우셨을 때… 우린 오밤중에 이게 웬 뜬금없는 노동인가!”
“하필은 무슨. 주군께서 아니 계시니 탈출을 감행한 것이겠지.”
병사들의 불평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던 참이었다. 효명성의 서쪽에서 큰 소리가 울렸다.
“은증왕이다!”
“이쪽입니다! 은증왕을 찾았습니다!”
살수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빠르게 뒤를 쫓았다.
*
무흔은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는 중이었다.
“젠장, 하아… 하아….”
아까 하온을 하는 수 없이 쓰러뜨리고, 북서쪽 응방으로 향할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온의 말 대로 자물쇠 빠진 농기구 창고가 보이기는 했으나, 무흔은 그곳을 빠르게 지나쳤다.
그런 뒤, 응방 너머에까지 단숨에 도달했다. 쪽문 옆에는 성 밖으로 나가려 대기 중인 수레가 여럿이었다. 날이 어두워 색상을 분간하기는 힘들었으나 천이 묶인 수레는 찾아낼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두 대라는 것이었다.
간단했다. 색을 확인하기 위해 다가가기만 하면 될 일이었건만, 거기서부터 일이 꼬였다.
“거기 누구요?”
저와 가까운 쪽 마차에 매달린 천을 막 붙들어 붉은 것이 아님을 확인한 무흔은 그 자리에서 꼼짝없이 얼어붙었다. 덩치가 커다란 사내가 눈을 부라리며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냥 평범한 일꾼입니다. 아유, 이 수레가 아니고 저 수레인가 보네. 내가 밤눈이 어두워… 하하.”
무흔은 몸을 구부정하게 숙이고 두봉에 달린 모자를 더 푹 눌러쓰며 걸음을 옮겼다. 나름대로 자연스레 걷는다고 걸었는데, 통했는지 아닌지. 가슴이 두근거려 미칠 지경이었다.
‘반대쪽 마차였구나. 얼른 가자. 일꾼이라 둘러댔으니 대충 짐 좀 들여다보면서 슬쩍 올라타 숨어야지.’
저를 힐끗거리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무흔은 좌우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앞만 보고 걸었다. 잽싸게 달려가 마차에 오르고 싶은 것을 참으며 여유 있는 척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무서운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거기! 이 근방에서 수상한 자를 보지 못했나?”
움찔한 무흔은 두 대의 커다란 수레 사이에 몸을 숨기고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횃불을 든 병사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최대한 소리를 죽여 붉은 천이 매달린 수레로 향하려는데, 아까 저를 보고 눈을 부라리던 덩치의 대답이 무흔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냥 평범한 일꾼이라는 자가 기웃거리기는 하더이다.”
“그냥 평범한 일꾼?”
“말하는 게 영 수상하다 했소. 내 수레에서 얼쩡대다 저기, 저쪽으로 갔는데….”
놀란 무흔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사내 하나가 무흔을 향하여 이리 오라며 손짓을 했다. 얼핏 봐도 병든 아내와 아이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의원께서 보낸 분입니까?”
속닥이는 사내의 물음에 무흔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붉은 천이 달린 수레의 휘장을 슬그머니 걷었다.
“이 안으로 숨으십시오.”
“병사들이 왔소.”
“제가 잘 둘러댈 테니 걱정 마시고, 얼른.”
“나를 숨겨준 게 걸리면 그쪽이 크게 일을 치를 텐데.”
“해 보는 데까지 해 봐야지요. 하온 의원께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참으로 신의가 있는 자다. 무흔은 그 마음에 감복했다.
‘몰려온 병사가 얼핏 횃불에 비친 수만 다섯이 넘는데… 몇 대 남지 않은 수레를 하나하나 검문하면 내가 걸리는 건 둘째치고 아무 상관 없는 이자가 곤욕을 치르겠지. 하온도 마찬가지고.’
무흔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의 반대쪽을 가리켰다.
“저쪽에서, 병사들의 시선을 끌 만큼 소란을 피워줄 수 있겠소? 내 그사이 도망가려 하니.”
“하지만….”
“어서!”
무흔은 사내의 등을 떠밀었다. 그가 적절하게 이목을 끄는 사이, 무흔은 응방 뒤 쪽문으로 대담하게 다가갔다. 성을 나서는 자들이 앞을 지키고 선 병사에게 출입패를 내보이는 사이, 당당하게 지나가려던 찰나였다.
“어이, 거기. 의원인가? 응? 하온? 어두워서 잘 보이질 않네.”
들고 있는 바구니에서 나는 약재 향 때문에 의원으로 오인을 한 듯했다. 무흔은 고개를 푹 수그린 채로 대답했다.
“하온은 아니고… 의, 의원은 맞소만.”
“침 한 대만 놓아 주지. 저녁으로 먹은 게 체했는지 원. 영 답답해.”
무흔은 머리를 푹 수그린 채, 당혹감을 애써 가라앉히며 바구니 위쪽을 뒤져댔다.
“이런… 아무래도 침통을 어디 흘리고 온 모양이야.”
“밝은 곳에서 찾게.”
병사가 무흔의 손목을 덥석 붙들어 불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순간 그가 손목으로 고개를 불쑥 들이밀었다.
“응? 무슨 장갑을 다 꼈는가?”
무흔에게로 불쑥 다가온 병사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무리 어둠 속이라 해도 새하얀 얼굴과 자색의 눈동자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헉! 혹시 은즈….”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무흔은 냅다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우측으로 난 길에서는 횃불을 든 병사들이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무흔은 그 반대쪽으로 난 길을 따라 무작정 달려 내려갔다.
등 뒤로 아까 그 문 앞에 섰던 병사의 외침이 크게 울렸다.
“저기! 저쪽에 은증왕이다!”
쳇, 눈치가 빠른 자였군. 무흔은 달리는 와중에 한숨을 푹 쉬었다.
“은증왕을 찾았다!”
한쪽에서 소리가 울리자, 그것을 듣고 다른 병사들이 소식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무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저 앞을 향해 달렸다. 푹 눌러썼던 모자는 어느덧 벗겨져 새하얀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길게 흩날리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이번 탈출도 망했다는 절망부터 엄습했다.
이번엔 진짜 될 것 같았는데.
무흔은 거추장스러운 바구니를 내던지고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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