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화
주한모의 긴 손가락이 태자의 젖은 가슴을 쓸어올리고 어깨를 꾹 눌러 다시 그 자리에 앉혔다.
“아아… 벗고 들어오거라.”
태자가 홀린 듯이 탄성을 흘리며 손을 뻗었으나, 한모는 무심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태자의 젖은 손을 밀어냈다. 단호한 목소리가 욕실에 나지막이 울렸다.
“중한 이야기는 마쳐야지요.”
“그래, 은증왕을 추궁해 보았느냐? 과거 염록왕의 사건 정황을 아는지? 아니면, 선대 효명성주의 죽음에 대해서는?”
“은증왕은 좋은 말로 소통이 안 되는 부류입니다. 그에게 어울리는 고초를 실컷 겪게 해 주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어요.”
한모는 그날의 은증왕을 떠올리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더 가지고 놀자면야 퍽 재미가 있을 듯도 했으나, 눈치를 보아하니 조카가 처음으로 마음에 들어 하는 소중한 장난감인 듯하여 그만두었다. 작은 즐거움마저 빼앗는 숙부가 될 수는 없으니.
“허면 어찌할 셈이야, 무슨 방도라도 있느냐?”
주한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 마음이 놓인 태자가 신이 난 표정으로 탕에서 나왔다. 무엇 하나 몸에 걸치지 않은 그대로였다. 저보다 두 살 어린, 엄연히 제 신하인 자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 먼저 그의 신발을 벗겨 내었다.
“얼른, 안으로 들어오너라.”
“젖는 것이 영 내키지 않습니다.”
“벗으면 되잖나.”
“번거로워서.”
“허면 내가 그대의 발이라도 씻기도록 허락해 주겠느냐.”
“원하신다면.”
오만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주한모는 욕조 턱에 앉은 채 몸을 돌려 두 발을 탕에 담갔다. 하의가 종아리까지 푹 젖었으나 아까의 말과는 달리 딱히 개의치 않았다.
태자는 체통 따위 잊은 채 좋다고 탕으로 돌아왔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제 책사의 발을 닦으며 물었다.
“그 방도라는 것을 말해 보거라.”
“별것 있겠습니까. 은증왕을 제거해 버리면 그만인 것을.”
예상외의 방법이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백자인데, 그 유명한 희로국의 3황자 은증왕을 구경 한 번 못 해보고 그냥 죽이기에는 아무래도 아까웠다.
“희로국에서는 저주와 액운이 되돌아갈까 두려워 은증왕을 차마 죽이지 못해 끼고 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한다 해도 딱히 외교 문제로 번질 일은 없지요.”
“희로국에서 염록왕에게 보복을 하지는 않을까?”
“그것은 태자께서 바라시는 바 아닙니까?”
태자는 21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황제는 아들들보다도 동복 아우 염록왕을 더욱 사랑하고 아꼈다. 그 염록왕은 당시 1황자였던 자신이 황후의 소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태자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반대했었다.
그러한 염록왕의 제거를 바랐던 것은 저뿐만이 아니었다. 태자는 은근한 손길로 물에 푹 잠긴 한모의 발을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내가 바라는 바? 아니, 우리가 바라는 바이지.”
같은 시기, 염록왕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벗이었던 효명성주 내외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조사를 위해 친히 북부로 온 염록왕을 제거하려던 이는 바로 성주의 이복동생, 주한모였다.
“나의 한모, 우리가 이리 만난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염록왕 덕이야.”
태자의 자리를 노리는 1황자와 효명성주의 자리를 집어삼키려던 주한모의 이해관계가 맞아들어간 것이었다. 둘은 그렇게 처음 인연을 맺었다. 비록 주한모는 원하던 성주의 자리를 얻지는 못했으나, 이를 전화위복 삼아 결국 조정에 진출했다.
염록왕은 당시 새파랗게 어렸던 그들에게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셈이었다.
“은증왕은 어찌 처리할 셈이야?”
“실은, 그가 감옥에 갇혀 있다기에 화로에 괴연석을 묻어 들여보냈습니다.”
“괴연향을 써서 자연스레 처리하려 하였구나! 과연 그대의 묘책은 따를 자가 없지.”
“하필 조카님께서 같이 있던 바람에 실패하였지요. 들통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상황입니다.”
“헌데 주 국공이 왜 감옥에 내려갔나?”
“보아하니,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더이다.”
“목석으로는 하늘 아래 이길 자가 없다는 주 국공을 홀렸다?”
둘은 눈을 마주치고는 별일도 다 있다는 듯 웃음을 나누었다.
“조카님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미 살수를 보냈습니다.”
“명줄을 끊어놓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지.”
고개를 끄덕이며 태자는 한모의 발목과 종아리를 은근한 손길로 쓸어 올렸다.
“생각할수록, 궁금하고 또 아까워. 은증왕의 생김새는 정녕 그리 곱더냐? 그 주 국공의 아랫도리가 불끈할 만큼?”
“참으로 독특하며 희귀한 미색이더이다.”
“미색이라한들, 그대에 견줄 만하겠는가?”
태자는 씩 웃으며 주한모의 한쪽 발을 물 위로 들어 올렸다. 입을 벌려 발가락을 하나하나 머금고는 쪽쪽 소리가 나도록 빨기 시작했다.
주한모는 미간을 찌푸렸으나, 그마저도 빚어놓은 듯이 아름다웠다. 태자는 황홀한 표정으로 그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전하께서 제 비책에 마음이 들떠 그러한지, 평소보다 정성이 모자란 것 같습니다.”
주한모가 감히 태자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평소보다 못하다는 소리에 퍼뜩 놀란 태자는 주한모의 다리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얼른 그 앞으로 바짝 다가가 무릎을 꿇어앉았다.
태자는 아비인 황제와는 결이 다른 변태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얼핏 보면 하극상이라 할 것이나, 피학의 쾌락에 맛을 들인 태자는 가학의 정점에 서 있는 주한모의 그림자만 봐도 흥분할 기세였다.
“제가 이리 옷까지 적셔가면서 전하의 청을 들어주었거늘… 적당히 빨아대는 것이 용납될 거라 여기십니까?”
주한모의 손이 태자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이어 단숨에 거칠게 끌어당겼다.
늘 그러하듯, 태자는 함부로 다뤄지는 것을 한껏 즐겼다. 그 누구도 제게 감히 해 주지 못한 행위를 겁 없이 자행하는 유일한 인물이 바로 주한모였다.
“한모, 그대는 내 혼의 주인이야. 아아아아….”
태자의 입술 사이로 쾌감에 물든 숨결이 길게 튀어나왔다. 흥분 가득한 몸의 떨림이 수면 위로 미세하게 퍼져나갔다.
“한 번의 기회를 더 드릴 터이니 이번엔 그 입을 제대로 놀리셔야 할 것입니다.”
주한모가 다리를 벌렸다. 태자는 주한모의 젖은 하의를 벗겨낸 후, 속옷의 매듭에 손가락을 대었다.
찰싹.
물에 젖은 태자의 손등 위로 주한모의 손이 매섭게 날아들었다.
“제가 방금 전하께 입을 제대로 놀리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하아아… 한 대만 더 때려주겠느냐.”
“매듭부터, 제대로 풀어보십시오.”
태자는 매듭의 한쪽 끝을 이빨로 물었다. 이빨이 살에 스치자마자, 주한모의 손이 이번엔 고귀하신 몸의 어깨를 매섭게 때리고 지나갔다.
“흣, 하아아아….”
“한 대라도 더 맞아보려 일부러 이러시는 것이라면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니다, 아니다. 내 어찌 그대를 상대로 얕은 수를 쓰겠는가. 제발, 한 번만 기회를 더 다오.”
태자는 재빨리 입술을 안쪽으로 오므려 매듭을 힘겹게 풀어내었다. 그런 후에는 여전히 꿇고 있는 무릎 위에 두 손을 얌전히 모은 채로 대기했다. 마치 고깃덩이를 눈앞에 둔 개가 꾹 참고 주인의 명을 기다리는 모양새와 같았다.
“고생하셨으니, 상을 내어드리겠습니다.”
초조하게 주한모의 답을 기다리던 태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제 앞에 놓인 허벅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
효명성의 밤하늘에 달이 막 떠올랐다. 하온은 뜸을 뜨는 도구와 쑥을 한가득 준비하여 바구니에 담았다. 그 아래에는 특별히 따로 준비한 찻잎이, 그리고 긴 겉옷 아래에는 검이 한 자루 숨겨져 있었다.
오늘이 오기까지, 몇 날 며칠을 하온은 제 모든 힘을 다하여 공을 들였다. 설득과 회유, 교묘한 밀고 당기기를 동원하여 결국엔 무흔으로 하여금 탈주를 결심하게 만든 것이었다.
하온은 여느 때와 똑같이 자연스레 무흔의 거처로 발을 들였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오늘 밤이 딱 좋겠습니다. 실행에 옮기시지요.”
“이리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혹, 성주님을 배신하는 것 같다 생각되십니까?”
“주 국공의 믿음을 저버리는 것은 사실이잖소.”
무흔의 표정에는 망설임이 가득했다. 주윤, 그라면 어떻게든 자신이 본국으로 송환되지 않을 방도를 마련해줄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감이 자꾸만 발목을 잡는 중이었다.
“저희 성주님께서는 황제 폐하에 대한 충성심이 각별하십니다. 절대로 황명을 거역할 분이 못 되시지요.”
“그래 보이기는 하였어.”
“또한, 솔직히 말씀 드리면… 우리 성주께서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치유자를 포기하실 것입니다. 본인만 희생하면 된다 여기실 테니까요.”
무흔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온은 그 절망의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은증왕께선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하온의 질문에 무흔은 순간 굳었다. 그가 장갑을 가져다 무흔의 손에 끼워주며 쐐기를 박았다.
“내용은 여쭙지 않겠습니다. 오죽하면 포로로 갇혀 적국에 남기를 원하시겠습니까. 돌아가길 원치 않으시는 그 이유를 떠올려보십시오.”
황궁 지하 석전에 갇혀 제발 그 괴물이 저를 찾아오지 않기만을 바라던 시간들, 그자가 저를 덮치던 매 순간마다 온몸으로 받아내었던 극한의 고통과 두려움이 무흔의 머리에 다시금 생생하게 떠올랐다.
“자네가 말했던 그… 성을 무사히 빠져나갈 계책 말이야. 성공할까?”
하온이 무흔의 손을 꼭 붙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진중한 눈매에는 확신에 차 있었다.
가지고 온 커다란 바구니를 뒤적여 잿빛 종이에 싼 것을 꺼내어 펼쳤다.
“배앓이를 일으키는 차입니다. 우선 이것을 바깥의 병사들에게 대접하시지요. 그것이 첫 단계입니다.”
하온이 가져온 찻잎은 그리 오래지 않아 효과를 발했다. 문밖의 감시병들이 어쩔 줄 모르고 식은땀을 흘리며 배를 움켜쥔 것이었다.
마침 내가 곁에 있어 잘됐다 하며 병사들을 진료해 준 하온은 얼른 기회를 잡아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대체 저녁으로 둘은 뭘 먹은 게요? 내 여기서 은증왕을 모시고 있을 터이니 그대들은 일부터 보고, 교대할 병사들을 불러오시오.”
“으… 으윽, 그리해도 될지….”
“안 될 것 뭐 있나. 얼른 화장실로 달려!”
아래가 터질 듯한 와중에도 끙끙대며 참아내던 병사들은 하온의 설득에 간단히 넘어가 버렸다. 둘만 남자, 하온은 긴 겉옷자락 아래 숨겨온 검을 무흔에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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