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생사는 본래 고통만은 아니니1)
오전 다섯 시, 루크는 눈을 떴다.
카이얀은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라고 말했지만, 훈련된 몸이 단번에 바뀌는 건 아니었다. 따라서 루크는 평소와 똑같은 시간에 깨어났다. 제 방 한가운데 가만히 앉아 있다가 루크는 몸을 일으켰다.
카이얀의 집에 온 이후, 비는 시간이 늘었다. 사실 하루 종일 비는 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루크는 그게 못내 어색했다. 적응하기 쉽지 않은 문제였다.
약간 갈증이 일었다. 루크는 여덟 시까지 얼마나 남았나 확인했다. 세 시간. 그리고 그 후에야 카이얀이 자기에게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를 떠올렸다.
루크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때 갑자기 카이얀의 목소리가 들렸다. 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서재에 있는 모양이었다. 로스터드 씨는 보통 일곱 시나 여덟 시에 일어나는데, 의아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루크는 거실로 내려가는 것을 잠깐 미루고 제 방 앞에 서서 카이얀의 목소리를 들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카이얀의 목소리는 꽤 선명하게 들렸다. 루크의 청력은 일반인의 것과 달랐다. 그는 상대의 목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카이얀이 통화음을 올려놓은 모양이었다.
- 거긴 새벽이겠군. 미안하네, 시차 생각을 못 하는 바람에.
“아뇨. 어차피 깨어 있었습니다.”
카이얀은 좀 피로한 듯했다. 예의상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잠을 못 잔 걸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다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루크는 이유도 모르고 숨을 죽였다.
- 그래… 다른 게 아니라, 이제 곧 부모님 기일이지 않나.
“네. 한 2주 정도 남았네요.”
카이얀은 건조하게 대꾸했다. 루크는 카이얀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그에게 투시 능력 같은 건 없었다.
- 그때 잠시 들러도 좋을까 해서 전화했다네.
카이얀은 잠시 말이 없었다. 상대방도 이렇다 할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루크는 가만히 기다렸다. 카이얀은 잠깐 사이를 둔 후에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외국에 계신 걸로 압니다만.”
- 그때쯤엔 귀국할 걸세. 혹 자네가 내키지 않는다면 올해는 가지 않아도 괜찮으니 편히 이야기하게.
“오셔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이번엔 식사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일이 좀 있어서요.”
- 아, 그래, 바쁜 사람 붙잡고 시간 뺏을 순 없지. 이번 논문도 좋은 평을 받았다더군.
“장군님이 저보다 몇 배는 더 바쁘시겠죠. 그럼, 편히 들렀다 가십시오.”
그 후 전화가 끊어졌다. 카이얀이 핸드폰을 가볍게 탁 던지고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루크는 어쩐지 이 앞에 계속 서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걸음을 옮겨 거실로 내려갔다.
잊었던 갈증이 밀려왔다. 루크는 좀 어색한 기분으로 냉장고에서 물통을 꺼냈다. 평소처럼 한 통을 전부 마셨지만, 시간의 문제인지 어색하고 낯선 기분이었다. 몸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생각했으나 몸은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것들을 받아들였다.
사실 루크는 어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잘 몰랐다. 다만 카이얀이 좀 화가 난 것 같았고, 자기를 꽤 매섭게 다그쳤던 것만 기억하고 있었다. 카이얀은 나이란과 통화할 때 자리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갔지만 루크는 그 소리를 들었다. 루크가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이야기가 오갔다.
“아, 루크 씨.”
카이얀이 얼굴을 문지르며 거실로 들어왔다. 가볍게 부르는 소리에 루크가 딱 시립했다. 카이얀은 잠깐 복잡한 얼굴로 루크를 보았는데,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어 루크는 바짝 긴장했다.
“매번 그렇게 경례할 것처럼 각 잡을 거 없습니다. 자, 봐요.”
카이얀은 일단 물을 한 잔 마셨다. 그리고선그러고선 컵을 든 채 루크 쪽으로 돌아섰다.
“잘 잤어요?”
“아, 네.”
“그 정도면 됩니다. 알았죠?”
그러고서 카이얀은 마저 물을 마시고 컵을 싱크대에 내려놓았다. 피로한 듯 기지개를 켜더니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오늘은 꼭 옷 사러 나갑시다.”
“네.”
그러더니 루크는 쭈뼛쭈뼛 카이얀의 눈치를 살폈다. 카이얀은 눈의 피로 때문에 계속 눈을 감고 있다가, 문득 눈을 떴을 때 루크의 얼굴을 보았다. 뭔가 싶어 카이얀이 물었다.
“뭐 할 말 있습니까?”
“잠을 못 주무신 것 같은데, 나가도 괜찮으십니까?”
“아, 뭐. 하룻밤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오늘은 꼭 새 옷으로 바꿔야 할 것 같아서.”
이전엔 컴퓨터란 것으로 주문했던 것 같은데, 싶어 루크는 머뭇거렸다. 물론 카이얀과 밖에 나가는 것은 아주 좋다. 하지만 카이얀이 피곤해 보여서 조금이라도 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전에는 그 모델… 이라고 하는 걸 주문하지 않으셨습니까?”
“모델을 주문했다고요?”
카이얀은 소파에 기댔던 몸을 반쯤 일으켜 루크를 보았다.
“네.”
“아… 그걸 그렇게 생각했구나.”
중얼거리더니 카이얀이 픽 웃었다. 루크는 여전히 카이얀 앞에 뻣뻣하게 서 있었다. 그런 루크를 보고 카이얀은 자기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루크의 착각을 정정해 주었다.
“모델을 주문한 게 아니라, 그 모델이 입고 있는 옷을 주문한 겁니다. 그러니까 모델이란 건 옷의 실제 착용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이왕이면 더 좋게 보여 주기 위해서 고용한 사람을 말하는 거고요.”
루크는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어쨌든 모델이 옷이라는 생각은 사라진 듯했다. 차차 알아 가면 되겠지 싶어 카이얀은 그쯤에서 설명을 그쳤다. 그에게는 확인해야 할 다른 문제가 있었다.
“몸에 이상은 없고요?”
“네.”
“그렇게 생각도 안 하고 바로 대답하지 말고, 좀 천천히. 어디 불편하다든가 아프다든가 그런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물어보는 겁니다.”
없어서, 루크는 바로 없다고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카이얀이 좀 천천히 대답하라고 한 게 떠올라 약간 사이를 두었다.
“네. 이상 없습니다.”
카이얀은 왠지 머리가 아팠다. 천천히 대답하라고 한 건 몸에 이상한 점이 있나 없나 좀 더 생각해 본 다음 대답하란 거였는데, 루크는 또 다르게 이해한 모양이었다.
“자, 잘 들으세요. 앞으로 뭔가 몸에 이상이 있으면 바로 나한테 얘기하는 겁니다. 아프거나, 어딘지 낌새가 이상하거나, 혹은 나 없을 때 다쳤다거나, 아니면 나 없는 사이에 또 지난번처럼 아팠다거나. 그럴 때 이 정도가 아픈 거 맞나, 말해도 되나, 이런 생각 하지 말고 바로 나한테 얘기해야 됩니다. 무슨 소린지 알아요?”
“네.”
영 못미더웠지만 이걸 명령이나 지시로 인식한 이상 루크는 따를 것이다. 카이얀은 잠깐 앉아서 기다리라고 말하고 오트밀 죽을 준비했다.
나이란에게 자신만만하게 큰소리야 쳤지만, 사실 카이얀도 당연히 불안했다. 다만 믿는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다.
- 루크가 먹는 약은 일반적인 사람처럼 먹고 자고 하지 않아도 루크의 몸을 정상적으로 유지시켜 주고 신체 기능을 향상시켜 주는 약이야.
나이란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여러 장기들이 음식을 전혀 섭취하지 않아도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하기 위해선 약이 필요하단 소리였다. 그렇다면 루크의 신체는 일단 정상인의 것과 가까울 확률이 높았다. 신체 능력 향상이야 그렇다 쳐도 음식물 섭취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럴 바엔 그냥 음식을 먹일 것이지, 대체 알약으로 생명을 유지시킨다는 건 누가 가장 먼저 생각해 낸 것일까. 그 작자한테 평생 아무 맛도 안 나는 알약만 먹고 사는 게 어떤 일인지 알려 줄 수만 있다면…….
생각이 잠깐 다른 곳으로 새 카이얀은 멍하니 서 있었다. 죽은 금세 팔팔 끓어 거품이 냄비 뚜껑 밖으로 넘치려 했다. 카이얀은 얼른 불을 껐다. 혹시 모르니 가볍고 무른 것부터 시작할 생각이었다.
원래 제 음식은 따로 만들려고 했는데 잠을 못 잔 탓인지 좀 귀찮았다. 입맛도 없어 샐러드나 시리얼 같은 걸 밀어 넣을 마음도 들지 않았다.
“배고프면 얘기해요.”
아침 다섯 시가 좀 넘은 시간이니 지금 식사를 챙길 것 같진 않았다. 그러다 문득 카이얀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배고프다는 게 뭔지 압니까?”
“아… 네.”
“정말로?”
“네, 약을 먹으면 괜찮아집니다.”
카이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것 같으니 다행이었다. 확실히, 루크의 몸은 정상인과 비슷하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이젠 약 안 먹을 거니까, 배고프면 나한테 얘기해야 됩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요. 스푼이나 포크 같은 건 사용할 줄 압니까?”
“죄송합니다. 그게 뭔지 잘 모릅니다.”
카이얀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카이얀이 식사하는 걸 봤으니 스푼 같은 걸 본 적이야 있을 것이다. 다만 이름을 모르는 거겠지. 카이얀은 허리를 반듯이 펴고 소파에 앉은 루크를 보다가 좀 막막해졌다.
가르칠 게 산더미겠네.
* * *
루크와 함께하기 위해선, 과연 가르쳐야 할 게 그야말로 산더미였다.
밥을 먹는 내내 카이얀은 루크에게 식기를 사용하는 법과 음식을 씹어 삼키는 법을 가르쳤다. 루크는 태어나 단 한 번도 뭔가를 씹어 삼켜 본 적이 없는 사람 같았다. 카이얀은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해도 좋을 그의 치아가 어떻게 그렇게 튼튼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과연 현대 과학이란.
카이얀은 그냥 그쯤에서 납득해 버렸다.
“그릇은 싱크대에 두면 됩니다.”
루크는 그러라고 가르친 것도 아닌데 카이얀과 식사 속도를 맞추려 했다. 카이얀이 적당히 먹고 스푼을 내려놓자 루크도 얼른 먹는 것을 멈추었다. 서툴게 씹어 삼키느라 쩔쩔맨 탓에 루크의 그릇은 반도 비지 않은 채였다.
“더 먹죠. 혹시 배부릅니까?”
“아… 그게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포만감이 느껴지냐는 말인데, 아, 음…….”
너무 익숙한 감각이다 보니 오히려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카이얀은 자기도 모르게 더 어려운 말을 사용했다가 루크가 더 아리송하단 표정이 되자 설명하기를 그만두었다.
“배고프지 않으냐는 뜻입니다.”
“아, 네. 그렇지 않습니다.”
“그거 먹고?”
카이얀은 루크의 접시를 눈짓했다. 그렇게 말해도, 어느 정도 식사가 적당한 것인지 루크가 알 리 없었다. 카이얀은 앞으론 좀 더 천천히 먹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식탁을 정리했다.
“설거지할 테니까, 옷 좀 갈아입고 오세요.”
그렇게 말하고 카이얀은 소매를 걷었다. 고무장갑보단 이쪽이 편했다. 평소처럼 물을 틀고 그릇을 닦으려는데, 곁눈으로 루크가 제 방으로 올라가지 않고 옆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카이얀은 뭔가 싶어 물을 틀어 놓은 채로 고개만 돌려 루크를 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뭐 모르는 거 있어요?”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로스터드 씨 팔…….”
“아.”
카이얀은 그제야 생각난 듯 제 팔을 내려다보았다. 통증이 좀 심하긴 해도 못 견디고 내내 안달을 낼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 루크가 좀 더 늦게 놓았다면 피가 났을지도 모르지만, 다행히 거기까진 가지 않았다. 보기 싫게 피멍이 든 것뿐이다.
“괜찮습니다. 약 바르는 걸 깜빡해서 그렇지 금방 없어질 겁니다.”
“제가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음, 괜찮은데요. 루크 씨 설거지할 줄 모르잖아요?”
여상히 대답하며 카이얀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쯤 되면 방으로 갈 줄 알았는데, 루크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호의는 고맙지만 스푼 하나 제대로 쥘 줄 모르는 남자에게 설거지를 맡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치료하는 것,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아, 설거지 얘기가 아니었던 모양이지.
카이얀은 됐어요, 라고 대답하기 위해 루크 쪽을 흘끗 보았다. 그리고 루크와 눈이 마주친 순간 됐다는 말이 쑥 들어가 버렸다.
어찌나 간절한 얼굴로 보는지, 허락해 주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네, 그럼… 좋을 대로 하세요. 옷부터 갈아입고 오시면 좋겠네요.”
루크는 그제야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대강 설거지를 끝내고 카이얀은 구급상자를 꺼내 왔다. 애도 아니고 상처를 남에게 돌봐 달라 하는 게 좀 불편했지만, 루크가 간절해 보여 거절하는 게 더 어려웠다.
루크는 빨간색 티와 바지를 입고 내려왔다. 카이얀은 저 끔찍한 옷들을 보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굳이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이게 멍 빼는 연고인데요. 그냥 살살 펴 바르면 됩니다.”
카이얀은 소파에 앉았다. 당연히 루크가 옆에 앉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바닥으로 내려갔다. 무릎까지 꿇고 앉는 걸 보며 카이얀은 웃음이 나려는 걸 참았다.
사실, 그는 연고를 건네주면서도 걱정스러웠다. 이 사람은 평생 자기 상처를 스스로 돌본 적이 없을 것이다. 연구소에서 지급하는 약 외에는 먹어서도 발라서도 안 되는 몸이었으니까. 그러니 남의 상처를 처리하는 데도 미숙하지 않을까 싶었다.
루크는 생각처럼 서툴렀다. 그러나 카이얀이 알려 준 대로, 면봉에 연고를 짜고 멍이 든 곳에 문질렀다. 멍은 왼쪽 팔꿈치와 손목 사이에 있었는데, 루크는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상처를 돌봤다. 지나치게 조심하느라 시간이 배로 걸릴 정도였다.
“조금 피가 났던 것 같습니다.”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루크가 슬쩍 고개를 들어 카이얀의 얼굴을 살폈다. 카이얀은 그 파란 눈을 보았다.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카이얀은 그게 어쩐지 안타까워서, 부러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신경 안 쓴다니까요. 루크 씨가 약 발라 줬으니까 더 빨리 나을 겁니다.”
누가 약을 바르든 상관없는 문제였지만 카이얀은 그렇게 말했다. 그랬는데도 루크는 별로 안심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루크는 한 손을 카이얀의 손목에 가볍게 얹은 채 사과했다. 피가 났던 것 같다고 말한 게 마지막 용기였는지 눈을 쳐다볼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카이얀은 새삼 제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자기가 봐도 좀 심하게 멍이 들긴 했다. 루크가 어깨를 물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세게 문 탓일 것이다. 하지만 팔을 물라고 한 건 자기였고, 루크도 그 덕에 진정됐으니 생색 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제 별로 아프지 않다고 말하려는데, 루크가 여전히 바닥만 보며 입을 열었다.
“자주… 그러는 건 아닙니다.”
“네, 압니다.”
카이얀은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정서적으로는 완전히 어린애인 남자를 안심시키기 위해선 노력이 필요했다.
“혹시 또 그러면 그냥 두시는 게 좋습니다. 아무리 길어도 30분 안에는 진정이 됩니다.”
카이얀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말을 듣자마자 이 남자를 안심시켜 줄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거의 헛웃음 같은 소리가 나왔다. 카이얀의 분위기가 갑자기 확 달라지자, 루크는 당황해서 번쩍 고개를 들었다. 카이얀은 탁 루크의 손을 뿌리치고 연고 뚜껑을 닫아 구급상자에 대충 던져 넣었다.
“그럼 루크 씨도 이런 상처는 내버려 두십시오.”
카이얀이 구급상자를 들고 벌떡 일어나자, 엉거주춤 루크도 따라 일어섰다. 루크는 안절부절못하며 카이얀이 찬장에 구급상자를 넣는 걸 보고만 있었다. 약이야 대강 다 발랐지만 좀 더 보고 제대로 사과하고 싶었는데, 카이얀은 성의 없이 제 소매를 풀어 내렸다.
“로스터드 씨, 죄송합니다.”
루크는 뭣도 모르고 또 사과했다. 카이얀은 이젠 소리 지르고 어쩌고 할 기운도 없어서 그냥 한숨만 내쉬었다.
“뭐가 죄송한지 알고나 그럽니까?”
욱 화가 치밀었다.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냥 내버려 두라느니 신경 쓰지 말라느니,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루크 씨가 바닥을 뒹굴며 피 토하고 비명을 지르는데 내가 그 옆에서 밥이나 먹고 있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닙니까.”
사실 루크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다른 사람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카이얀이 옆에 있어 준 지난 두 번은 조금 견디기가 수월했던 것 같기도 하다.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고집은.
카이얀은 혀를 찼다.
그러나 루크에겐 그 나름대로의 걱정이 있었다. 지난번, 카이얀은 아주 냉정하고 단호하게 자기를 보내려 했다. 루크는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했고 설명을 들은 적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자기의 존재가 번거로워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귀찮게 하지 않고 지내겠습니다.”
루크가 조심스레 덧붙인 말에 카이얀은 한동안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루크는 초조하게 카이얀의 입술만 쳐다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저 입술은 무섭다.
저렇게 예쁘고 좋은 것도 무서워 보일 수 있구나, 하는 뜬금없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예쁘고 좋아서 무서운 것 같기도 했다. 정확히 어떤 건지는 잘 모르지만.
“솔직히 루크 씨가 귀찮지 않다고는 못 하겠네요.”
카이얀은 여전히 약간 거리를 두고 선 채 말했다. 대수롭지 않은 어조라 그저 물 흐르듯 흘려보내면 되는 말이었는데, 루크는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굳혔다.
“하지만 누구랑 같이 산다는 건 원래 가끔 귀찮은 겁니다. 누구랑 같이 사는 게 언제나 편할 수는 없습니다.”
카이얀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당장 내쫓지는 않겠다는 것 같았다.
카이얀은 겁을 집어먹어 단단히 굳어진 루크의 얼굴을 살폈다. 당신과 사는 게 조금도 귀찮지 않다, 는 말은 못하겠다. 누구와 같이 살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터다.
“아마 루크 씨도 나랑 있어서 불편할 때가 있을 겁니다.”
“전 불편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불편해 보이는데요. 카이얀은 그 말을 밀어 넣고 그냥 픽 웃었다. 나가라고 할까 봐 바짝 얼어 있으면서, 아주 강력하게 주장하는 게 우스웠다.
“그렇다니 기쁘네요. 어쨌든 내 말의 요지는 그게 아니라… 원래 같이 사는 건 불편하고 귀찮을 때가 더 많지만, 그래도 누구나 그걸 감수하고 같이 산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네?”
“왜 누구나 그걸 감수하고 같이 사는 겁니까?”
카이얀은 납득했다. 그래, ‘원래 그렇다’는 말이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점에 대해 설명하려면, 결혼과 가족에 대해 설명해 줘야 하는데……. 솔직히 카이얀은 좀 귀찮았다. 그냥 빨리 나가서 루크의 옷부터 새로 맞춰 주고 싶었다. 그래서 아주 일반적인 이유를 댔다.
“보통은 그걸 감수해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서로 좋아해서겠죠.”
그렇게만 대답하고 카이얀은 차키를 챙겼다. 루크가 ‘보통’의 범주를 잘 모른다는 걸 깜빡하고선.
* * *
카이얀은 느긋했다. 그는 꽤 기분이 좋았다. 카이얀은 백화점 매장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한가하게 옷을 볼 계획이었다. 루크는 얼굴도 몸도 거의 완벽에 가까운 남자였다. 아마 어떤 옷을 입혀도 훌륭히 소화해 낼 것이다. 쇼핑에도 인형 놀이에도 취미가 없지만 루크의 끔찍한 무지개 옷들을 기쁜 마음으로 집에서 내버릴 절호의 기회였다.
“저, 고객님.”
부르는 소리에, 카이얀은 고개를 들었다. 한가하게 기성복 매장을 돌아다니는 카이얀과 루크를 부른 건 애매한 웃음을 띤 점원이었다.
“실례지만 이 옷들은 전부 3백 바트 이상의 제품입니다. 저가 제품은 4층으로 올라가 보시는 편이 좋으십니다.”
카이얀은 잠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루크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카이얀은 얼마 가지 않아 점원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카이얀은 새삼 제 옷차림을 살폈다. 그냥 셔츠에 면바지였다. 루크 쪽은 볼 필요도 없었다.
여기가 무슨 VIP 비밀 룸도 아닌데, 점원에게 이런 말을 들을 정도로 옷차림이 이상하긴 한 모양이었다. 백화점에 자주 들락거리지 않으니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돈 많은 학자는 기가 막혀 픽 웃었다. 카이얀은 자기가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자존심은 또 별개의 문제였다. 그는 여기서 애처럼 고가의 옷들을 사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았다. 그러나 점원이 무슨 소릴 했는지도 모르고 멀뚱히 서 있는 루크를 보니 좀 유치해지고 싶기도 했다.
“네, 압니다.”
카이얀은 지갑을 열었다. 카이얀은 딱 한 종류의 카드만 사용했지만, 지갑에는 두 개의 카드가 들어 있었다. 한 번도 사용해 본 적 없는 까만 카드. 카이얀은 약간 욱하는 심정에서 그 카드를 뽑았다. 뽑자마자 점원 쪽으로 건네주니, 친절한 미소를 띠고 있던 점원이 깜짝 놀라 손을 내밀었다.
“아니까 이리로 왔죠. 루크 씨, 골라 봐요.”
카이얀의 카드를 확인한 점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떤 장식도 없는 새까만 카드에는, 회사명조차 적혀 있지 않았다. 점원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카드였다. 카드를 뒤집자 일련번호와 마그네틱이 보였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게 뭔지 모르겠으면 상사한테 물어보십시오.”
카이얀은 친절하게 알려 주고 루크가 옷 고르는 걸 도와주었다.
아마 저 카드를 가진 사람은 몇 없을 것이고 이런 곳에서 사용하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을 터다. 계산만 저걸로 안 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카이얀은 루크에게 라운드 티와 캐주얼 재킷을 보여 주었다.
“이걸 이렇게 입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바지는 까만 게 나아요, 아니면 좀 밝은 회색?”
그렇게 물어도 루크가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루크는 얼결에 카이얀이 내미는 옷들을 전부 받아 들었다.
“뭐 다 입어 보십시오. 입어 봐야 뭐가 더 어울리는지 알 것 같네요. 사이즈는 이 정도면 될 것 같고.”
카이얀은 대수롭잖다는 듯 말하며 루크를 피팅룸으로 떠밀었다.
루크는 좁은 피팅룸으로 들어가 한동안 얼어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카이얀은 차에서 아주 친절하게 백화점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사실 루크는 그 설명의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때문에 온 사방의 점원과 고객들을 보고 놀랐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옷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것에도 놀랐다. 루크에게 익숙한 건 사격 표적과 똑같이 생긴 마네킹 정도였다. 그나마도 이런저런 옷을 걸치고 있어 이상했다.
카이얀이 미리 피팅룸에 대해 설명했기 때문에, 루크는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빨간 티와 바지는 쉽게 벗겨졌다. 주섬주섬 티를 입고 바지를 입고, 마지막으로 재킷까지 걸치려는데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점원이라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뒤이어 카이얀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소리가 따라왔다.
“그런 말을 들으려고 카드를 드린 건 아닙니다. 여기서 옷 골라도 괜찮겠죠?”
“물론입니다. 원하시는 제품이 있다면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뇨, 일행이 낯을 가려서요. 둘러볼 테니 그냥 들어가 계십시오.”
루크는 그쯤에서 얼른 밖으로 나갔다. 깔끔하게 차려 입은 남자와 대화를 하고 있던 카이얀이 고개를 돌려 루크를 보았다. 카이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기분 좋게 웃으며 루크에게 다가왔다.
“재킷 입을 줄 모릅니까?”
안다고 대답하기도 전에 카이얀이 루크에게서 재킷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루크의 뒤로 돌아가 그가 재킷을 입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뒤늦게라도 입을 줄 안다고 말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루크는 카이얀이 챙겨 주는 게 좋아 가만히 있었다.
“오.”
다시 루크 앞으로 온 카이얀이 미묘한 감탄사를 뱉었다. 그러더니 루크를 거울 앞에 세웠다.
“안에서 거울 안 보고 나왔죠? 여기서 한 번 봐요.”
카이얀이 피팅룸에 대해 ‘옷을 갈아입는 곳’이라고 설명해 줘서, 루크는 정말 옷만 갈아입었다. 거울 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게 사실이라 루크는 거울에 시선을 두었다.
아주 낯선 남자가 거울 속에 있었다.
위아래 옷의 색깔이 달랐다. 계속 카이얀을 봐 왔기에 어색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자기가 그렇게 입고 있으니 기분이 달랐다. 루크는 제 차림을 보며 뻣뻣하게 굳어 있다가 조심조심 말했다.
“민간인 같습니다.”
“어… 네, 그렇죠. 일단 루크 씨는 당분간…….”
민간인입니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뭔가 마음에 걸렸다. 확실한가? 괜한 말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카이얀은 말을 돌렸다.
“어떻습니까? 아까 루크 씨가 입고 있던 옷보다 훨씬 낫죠?”
카이얀이 씩 웃었다. 눈매가 근사하게 휘어지며 단단한 인상이 스르르 허물어지는 웃음이었다.
“잘 어울리네요. 멋있어요.”
루크는 넋을 놓고 카이얀을 보았다. 일반인보다 몇 배는 뛰어난 청력을 갖고 있는데도, 카이얀의 말이 귀에서 다 튕겨져 나가는 듯했다.
“멋있는 건 로스터드 씨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백화점 사방에 보이는 모델 사진도 카이얀만큼 근사하진 못했다.
“뭡니까, 아부해요?”
카이얀은 그냥 한번 웃고 말았다. 뜻밖의 말에 기분이 좋았지만, 새삼스러울 건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루크는 카이얀에게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말로 뱉진 않아도, 표정으로 온갖 찬탄을 다 던지고 있었다. 카이얀은 좀 난처한 기분으로 루크에게 다른 옷을 들려 피팅룸으로 들여보냈다.
그런 일이 한동안 계속 반복되었다. 카이얀은 계속 루크에게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듭니까?”하고 물었지만, 루크는 어느 쪽도 잘 선택하지 못했다.
애초부터 그가 익숙하게 이것저것 척척 고르길 기대한 건 아니어서, 카이얀은 그냥 자기가 보기에 더 보기 좋은 쪽을 선택하거나 그냥 둘 다 사 버렸다.
“지치진 않습니까? 힘들면 밥부터 먹어도 되는데.”
“아, 배고프십니까?”
“약간 그러네요.”
카이얀이 웃으며 대답했다. 루크를 받아들이기로 한 후, 카이얀은 좀 더 자주 웃음을 보였다. 카이얀 본인은 몰랐으나 루크는 그 차이를 알아차렸다. 조금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저는 어느 쪽이든 좋습니다.”
카이얀은 고개를 끄덕이며 루크를 살폈다.
짧게 잘라 위로 올린 까만 머리카락, 그 아래로 반듯한 이마와 깊은 눈이 보인다. 눈매가 뚜렷하고 콧대가 자연스럽다. 단정하게 꾹 다문 입술은 언제나 혈색이 좋다. 그저 흔한 캐주얼 패션일 뿐인데 끔찍한 무지개 옷을 벗어 버리자 그 얼굴이 아주 빛을 발하는 기분이었다.
데리고 다니기 부담스럽네. 온 사방에서 힐끔거리겠어.
카이얀은 꽤 기분 좋게 생각했다. 그리고 루크가 여직 손에 들고 있던 빨간 티와 바지를 점원에게 들려 주었다.
“이건 버려 주시고, 나머진 계산하겠습니다.”
시계와 벨트, 쓸 일이 없겠지만 지갑도 있어야겠지. 정장을 입을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밥을 먹은 후엔 정장을 사러 가자. 역시 넥타이와 커프스도…….
카이얀은 이것저것 생각하며 흡족해졌다. 그는 절대 쇼핑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대부분 집에서 연구를 하고, 필요한 경우 도서관에 나가는 게 전부라서 옷에 신경을 쓰지도 않는다.
하지만 루크는 달랐다. 좀 더 멋지게 입혀 주고 싶다. 그가 누리지 못한 평범한 것들을, 잠시라도 마음껏 누리게 해 주고 싶었다.
* * *
집에 돌아왔을 때, 카이얀은 좀 피곤한 상태였다.
루크의 옷을 잔뜩 샀다. 루크에게 별로 필요 없을 것 같은 모자, 세련된 운동복, 옷을 넣을 옷장까지 사고 말았다. 루크가 중간에 “로스터드 씨는 뭔가 사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어서 얼결에 자기 옷도 한 벌 샀다.
루크는 들떠 보였지만 그게 옷 때문인 것 같진 않았다. 어차피 자기만족이었으므로 카이얀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루크와 밖에서 저녁까지 먹고 들어오는 길이어서 집에 들어가자마자 씻고 쉬고 싶었다.
“확실히 쇼핑 체질은 아닌 것 같습니다. 루크 씨는 안 힘들어요?”
“네, 전 아주 좋습니다.”
“얼마나?”
“네?”
“얼마나 좋으냐고요.”
이전에 0부터 10이 어쩌고저쩌고 했던 게 생각나 장난스럽게 물었다. 카이얀은 고민하는 루크를 보고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아무렇게나 대답하면 될 걸, 어떻게든 적당한 대답을 내려고 끙끙대는 게 재미있었다.
“십? 백? 천?”
“조금… 어려운 것 같습니다.”
머뭇머뭇하는 말에 카이얀은 그냥 웃고 말았다. 대충 차키를 내려놓고, 농담으로 물어본 거예요, 친절하게 설명까지 덧붙였다. 옷 갈아입고 씻고 쉬라는 말을 해 준 뒤 카이얀도 제 침실로 들어갔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루크는 그런 카이얀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
* * *
다음 날 정오, 루크와 밥을 먹다가 카이얀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발신자를 확인하고 카이얀은 핸드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색하게 밥을 먹고 있던 루크에게 마저 먹어요, 라고 말한 후 자리를 옮겼다. 거실과 제 연구실 사이 통로에 선 채 카이얀은 전화를 받았다.
“네.”
간단하게 대답하자 저쪽에서도 통화하는 데 문제없느냐는 의례적인 말이 들렸다. 괜찮긴 하지만 시기가 뜬금없어서 카이얀은 약간 의아했다.
“괜찮습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 아, 마침 어제 패스 카드에 대한 보고를 받았네. 10년 넘게 한 번도 쓴 적 없는 카드를 썼길래,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해서.
“패스 카드를요? 그걸 쓴 적이…….”
없는데, 라는 말은 중간에 사라졌다. 아, 어제. 생각해 보니 그 카드를 그대로 맡긴 채 계산해 달라고 해 버린 것 같다. 카이얀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아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출처도 같이 보고를 받으셨을 것 같은데요. 문제는 없습니다. 신분 확인용으로 내밀었는데 착오가 있었던 것 같네요. 오늘 다시 가서 해결할 겁니다.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 아니, 아니, 그러라고 전화한 게 아닐세. 그건 자네가 쓸 수 있는 돈이고, 국가에서 자네에게 지급한 거니까 언제든지 편하게 사용해 주면 좋겠네. 몇 번 말했지만, 이번에야말로 쓸 마음이 들었나 싶어서 걸어 봤다네.
절대 말 많은 남자가 아닌데 횡설수설한다. 카이얀은 좀 피곤해지는 것 같았다.
“제 돈도 충분합니다.”
- 그래, 알고는 있지…….
저쪽은 개인 연구 같은 게 아니라 국가적인 일로 매우 바쁜 몸이다. 굳이 이런 일까지 챙기는 게 이상한 한편으론 또 이해가 갔다. 마음의 짐이란 게 다 그렇겠지. 하지만 카이얀은 검은 카드를 마음대로 긁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밀리엄 장군님.”
뭐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 제 일을 너무 마음에 담아 두실 필요 없습니다, 혹은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말도 그리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았다. 카이얀은 그만두기로 했다.
“아닙니다. 끊겠습니다.”
저쪽에서도 약간의 사이를 두고 대답이 들렸다. 카이얀은 전화를 끊었다. 아마, 괜히 전화해서 알려 줬다고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카이얀은 정말 그 돈을 백화점 같은 곳에서 써 버릴 생각이 없었다.
한숨을 내쉬고 식탁으로 돌아오자 루크가 앉은 채 카이얀을 쳐다보았다. 카이얀은 핸드폰을 탁 내려놓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 안 먹었어요? 굳이 기다릴 필요 없었는데.”
루크의 접시는 아까 카이얀이 일어날 때와 똑같았다. 좀 미안하고 난처한 기분으로 그렇게 말하자, 루크는 얼른 제 식기를 집어 들었다.
“오늘 백화점에 다시 가야 할 것 같은데, 번거로우면 그냥 집에 있어도 됩니다.”
가볍게 말을 꺼내자 루크는 다시 식기를 내려놓았다. 그냥 먹으면서 들어도 되는데……. 일일이 말해 주는 것도 이상해서 카이얀은 그냥 식사를 계속하며 루크의 대답을 기다렸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로스터드 씨와 같이 가고 싶습니다.”
카이얀은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이며 루크를 보았다. 그리고 약간 놀라고 말았다. 불안하고 안달을 내는, 전과 별로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래요, 그럼.”
“감사합니다.”
카이얀은 또 말문이 막혔다. 그냥 언제나 습관처럼 하는 감사의 말이 아니었다. 루크는 정말로 안도하고 있었다. 그렇게 못되게 굴진 않았는데 싶어, 카이얀은 마음이 좀 불편해졌다.
“몸에는 별 이상 없는 거죠?”
화제를 바꾸기 위해 물었다. 루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상입니다.”
“그럼 됐습니다. 다 먹고 출발하죠.”
카이얀은 허리를 곧게 편 채 식사하는 루크를 바라보았다. 계속 시선이 달라붙어 있는 걸 느꼈는지 루크가 살짝 고개를 들어 카이얀의 눈치를 살폈다. 안심시켜 주기 위해 한 번 웃어 주고 카이얀도 식사를 계속했다.
서두르지 말자. 천천히 하면 된다.
카이얀은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남을 위해 이렇게까지 고민하고 신중해져 본 것은 또 처음인 것 같았다.
* * *
카이얀은 백화점에 들러 카드 일을 해결한 뒤 곧장 돌아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루크가 들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어쩐지 바로 집에 가자고 하기가 미안했다. 해서 카이얀은 루크에게 줄 새 책이라도 고를까 하며 근처 서점으로 향했다.
루크는 즐거워 보였다. 그저 평범하게 입고 있을 뿐인데 사람들이 루크를 흘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사실 카이얀도 루크 못지않게 시선을 끄는 외모였지만, 무지개 옷을 벗어 버린 루크의 변화가 너무 극적이라 카이얀은 루크의 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서점은 6층부터 시작이었다. 엘리베이터 기다리기가 번거로워 카이얀은 에스컬레이터를 택했다. 루크는, 물론 어느 쪽이든 신기해했겠지만 움직이는 계단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앞으로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종종 보게 될 겁니다.”
슬쩍 말해 주니 루크는 순수하게 감탄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문득 카이얀을 불렀다.
“저 사람, 로스터드 씨와 얼굴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어디요?”
저기 있습니다, 하고 루크가 손가락으로 멀리 있는 영화 포스터를 가리켰다. ‘늑대인간: 범죄의 보름달’이란 제목의 영화였다. 커다란 늑대의 머리에 턱 손을 얹은 채 서 있는 남자 배우는, 사실 썩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조명 때문에 얼굴에 음영이 져 있는 탓이었다.
“제가 저렇게 생겼어요?”
“느낌은 다르지만 얼굴이 비슷합니다.”
루크는 눈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기분이 상했다거나 한 건 전혀 아니라 카이얀은 그냥 웃고 말았다. 이젠 먼저 말을 걸지 않아도 이런 일상적인 이야기도 하나씩 건네 온다. 장족의 발전이었다.
“저 사람 사진은 왜 걸려 있는 겁니까?”
서점에 도착했을 때 루크가 물었다. 아무래도 영 신기한 모양이었다. 모델과는 또 다른 분위기로 연출되어 있으니 신기할 법도 했다.
“영화라는 건데, 화면 안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겁니다.”
아동 서가로 가며 카이얀이 대수롭잖게 설명했다. 어떻게 된 일이진 몰라도 서점 여기저기에 같은 영화를 홍보하는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아마 책이 원작일지도 모른다. 신작 코너를 지나치며 살피니 과연 같은 제목의 책이 진열되어 있었다.
“어, 이거.”
카이얀은 직업병의 일환으로 작가 이름을 확인하다가 멈칫했다.
머독 비숍.
새 책을 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생각하며 카이얀은 파라락 책장을 넘겼다.
옆에 서 있던 루크도 조심스럽게 그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영화 포스터와 똑같은 책 표지를 살피며 카이얀에게 묻는다.
“이 사람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책을 다른 말로 영화라고 합니까?”
“아, 그건 그냥 책이고, 영화는 또 다른 겁니다. 왜요, 보고 싶어요?”
“네? 아닙니다. 지금 보고 있습니다.”
카이얀은 순간 위아래 입술이 서로 붙은 것처럼 말문이 막혔다. 한 손에 책을 들고, 아주 태연하게 지금 영화를 보고 있다고 말하는 루크 때문이었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뭐라고 설명해 줘야 하지?
이럴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루크의 오류를 바로잡아 주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루크가 사물을 지나치게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현대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냥 8층으로 올라갈까요?”
“책 사러 오신 게 아니었습니까?”
“뭐, 이따 다시 오면 되니까 괜찮습니다.”
어떻든 영화를 한번 보여 주고 싶었다. 영화관에 자주 오는 편이 아니라 카이얀으로서도 꽤 새로운 느낌이었다.
영화 티켓을 사고 잠시 함께 앉아서 기다렸다. 그러다 카이얀은 문득 팝콘이 생각났다. 거짓말로라도 즐겨 먹는다곤 못하지만 루크에게 이것저것 새로운 것들을 먹여 보는 것도 좋겠지 싶었다.
“팝콘이 뭔지 알아요?”
모른다는 루크를 데리고 팝콘을 샀다. 루크는 팍팍 튀어 오르는 노란 팝콘과 한 번도 맡아 본 적 없는 냄새에 몹시 놀랐다. 카이얀은 내친 김에 콜라에 핫도그까지 샀다. 그런 다음 꽤 흐뭇한 마음으로 루크가 핫도그를 조심조심 베어 먹고 팝콘을 하나하나 집어먹는 걸 지켜보았다.
잘 먹으니 보기 좋았다. 좀 염려했는데, 다행히 약을 끊은 이후 몸에 큰 이상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카이얀은 원래 군것질에 별로 흥미가 없어서 그냥 루크가 먹는 걸 보기만 했다.
무슨 모이 먹듯이 먹네.
카이얀은 픽 웃었다. 잘 입혀 놓으니 카나리아 같았다. 확실히 낯선 음식이라 조심스럽긴 할 것이다.
“맛있어요?”
“네, 맛있습니다.”
루크는 허둥지둥 입에 든 걸 삼키며 대답했다. 카이얀은 그냥 알겠다며 고개만 끄덕였다. 영화 시작 시간을 기다리는 내내, 카이얀은 루크가 먹는 걸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상영관에 들어가서도 카이얀은 루크를 챙기느라 바빴다.
“영화관에선 조용히 하는 겁니다.”
“네.”
“앞자리 발로 차거나 하는 일도 안 됩니다. 워낙 다리가 길어서 불편하겠지만 애써 봐요.”
“알겠습니다.”
“팝콘, 실수로 흘려도 되지만 너무 왕창 쏟진 마시고요.”
“네.”
뭘 말해도 꼬박꼬박 네, 네 하니 카이얀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영화 시작하면 눈 감는 겁니다. 첨단 기술이거든요. 뇌로 바로 영상을 쏴 주죠.”
이건 의외였는지 루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역시 아무리 루크가 뭘 몰라도 이건 무리였나 싶어 말을 정정하려 할 때였다.
“네, 연구소에서 몇 번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민간 기관에서도 사용되고 있는 기술인 줄은 몰랐습니다.”
카이얀은 한 손에 음료를 든 채 깜짝 놀라 물었다.
“그게 실제로 가능하다고요?”
“네?”
“아.”
카이얀은 좀 무안해졌다.
그래, 가능하단 거지.
혼자 납득하며 카이얀은 그냥 농담한 거라고, 눈 뜨고 화면 보면 된다고 말해 주었다. 루크는 카이얀이 대체 혼자 뭐에 놀라고 뭘 납득한 건지 몰라 약간 얼떨떨해졌지만 카이얀이 그쯤에서 대화를 중단했으므로 다시 그 얘길 시작하진 못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루크는 영화관에 대해 몰랐다. 카이얀은 안으로 들어가며 짤막하게 충고했다.
“발 밑 잘 보십시오. 어두워서 헛디딜 수도 있으니까.”
카이얀의 염려는 괜한 것이었다. 어두컴컴한 상영관 안에서 자리를 찾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루크의 시각, 청각, 후각은 일반인에 비해 몇 배는 더 예민했다. 지나치게 밝은 곳이라면 또 얘기가 다르지만, 어둠 속에서 사물을 분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루크의 여러 신체 능력에 대해 모르는 카이얀은 영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결국 카이얀은 루크의 팔을 잡고 자리까지 데려갔다. 잘 보이니 상관없다고 말해도 될 일이었지만 루크는 가만히 있었다.
‘이상하네.’
가슴이 간질거린다. 전투 중인 것도 아닌데 심장이 뛰었다. 그러다 루크는 뭔가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왜 잘 안 보이는 것 같지?’
예전에 10 만큼 잘 보였다면, 지금은 9 정도인 것 같았다. 여전히 사방이 어두운 불을 켜 놓은 것처럼 환했지만-루크는 이 표현의 이상함을 몰랐다- 기묘하게 사물의 윤곽이 흐렸다.
착각인가.
낯선 곳에 와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카이얀은 이상하면 말하라고 했지만, 기껏 밖에 나오기까지 했는데 시력이 조금 감퇴한 것 같다는 말이나 하고 싶진 않았다.
불편할 정도로 푹신한 의자에 앉으니 곧 영화가 시작되었다. 화면이 휙휙 넘어가고 빛이 번쩍거렸다.
카이얀은 꽤 흥미롭게 영화를 보았다. 한 남자가 이상한 개를 하나 맡게 되면서 시작되는 얘기였다. 알고 보니 그 개는 늑대인간이었는데, 보름달이 뜨는 밤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괴물로 변해 사람들을 해치고 다녔다. 늑대인간을 맡은 남자는 아무 것도 모른 채 그 개를 가까이 두고…….
1시간이 조금 넘는 짧은 스릴러라 전개는 빨랐다. 늑대인간을 기르는 남자가 누명을 쓰게 되는 장면까지 넘어갔을 때, 카이얀은 루크를 보았다. 재밌게 보고 있을까 싶어 돌아본 건데 루크의 표정이 지나치게 좋지 않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왜 그래요, 괜찮습니까?”
소곤소곤 물었지만 루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만 저었다. 카이얀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바로 루크를 부축해 일어났다. 다행히 앞이 바로 통로라 서둘러 나갈 수 있었다. 카이얀은 번쩍거리는 불빛과 소리를 뒤에 두고 재빨리 상영관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입니까? 어디 아파요?”
루크의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카이얀은 너무 놀라 어쩔 줄을 모르고 일단 루크를 근처 의자에 앉혔다. 드물게 몸을 못 가누며 거의 나동그라지다시피 의자에 앉은 루크는 한동안 멍한 눈으로 카이얀을 쳐다보았다. 카이얀은 덜컥 겁이 나 몸을 낮춰 루크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살짝 올려다보는 모양새였다.
“왜 그래요. 또 아픈 겁니까?”
약을 끊은 부작용이 이제야 오는 걸지도 모른다. 루크는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잘 안 들립니다.”
카이얀은 자기도 모르게 확 상체를 뒤로 뺐다. 루크가 거의 고함지르듯이 말한 것이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 쪽으로 몰렸다. 카이얀은 대체 어찌된 일인지 알 수가 없어 루크를 보기만 했다.
“아… 죄송합니다.”
카이얀이 놀라자 루크가 사과했다. 그 목소리도 여전히 컸다. 사람들이 흘끔거리기 시작했다. 카이얀은 일단 루크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야겠다 싶었지만 루크는 거의 걷질 못하는 상태였다. 충격을 받은 듯했다.
카이얀은 루크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이제 들립니까? 좀 작게 얘기해 보세요.”
“네, 들립니다.”
목소리가 작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평소 크기는 아니었다. 카이얀은 대체 어찌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전처럼 아픈 것도 아니고, 피를 토하는 것도 아니다.
혹시 영화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었나?
카이얀은 곧 그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지워 버렸다.
“무슨 문제가 있는 겁니까? 얘길 해 보세요.”
루크는 여러 차례 마른침을 넘기고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카이얀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죄송합니다. 소리가 너무 커서 그랬습니다.”
소리가 너무 크다고?
차라리 영화 내용이 충격적이었다는 말이 더 받아들이기 쉬우리라. 카이얀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영화관 특유의 음량이었을 뿐인데, 소리가 너무 컸다니? 하지만 루크가 괜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소리가 너무 컸다고요?”
“네.”
루크는 카이얀에게 설명할 수 있었다. 루크도 자기의 몇몇 감각이 정상인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루크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걸 말하게 된다면 카이얀이 자길 피할 것이다. 밤늦은 시간, 서재에서 조용히 책꽂이 사이를 오가며 책장을 넘기는 소리는 듣기가 좋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하지만 카이얀은, 자신이 바로 옆방에서 제 통화 소리를 엿듣거나 했다는 걸 알면 화를 낼지도 모른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가? 아플 정도로 컸습니까? 귀가 아프거나 하진 않고요?”
루크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사실 귓속이 심하게 욱신거렸지만 괜한 말을 덧붙이고 싶진 않았다.
“진작 말하지 그랬습니까. 왜 미련하게 참고 있어요.”
“아… 말하면 안 된다고 하셔서 그랬습니다.”
카이얀은 그냥 한숨만 내쉬었다.
“어쨌든 영화는 피하는 게 낫겠습니다. 몸 많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집에 들어가는 게 좋겠네요.”
어차피 루크가 밖을 둘러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바로 집에 가지 않은 거였다. 몸이 좋지 않으니 들어가 쉬게 하는 게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카이얀은 루크에게 음료수를 마시게 했다. 그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부축해 일어나려는데, 루크가 덥석 카이얀의 팔을 붙잡았다.
“로스터드 씨, 괜찮으시다면 좀 더 밖에 있고 싶습니다.”
“힘든 거 아니에요? 집에 들어가서 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까까지만 해도 다 죽어 가다가 기운 차린 척하는 게 불안했다. 확실히 집에 있으면 답답할 것이다. 군인이니 활동량도 많았을 테고, 몸도 움직이는 일에 익숙한 몸이다.
“그럼 서점 의자에라도 좀 앉아 있을래요?”
카이얀은 웬만하면 루크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하자는 주의였다. 그래야 원하는 것을 말할 때 저런 눈치 보는 얼굴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루크를 서점 의자에 앉혀 놓고, 카이얀은 물이라도 사다 주겠다며 일어났다.
흘끗 시계를 확인하고 자판기가 어디 있을까 살피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사람들이 유난히 술렁이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서점이 이렇게 시끄러울 일이 없는데 싶어 카이얀은 그냥 저가 예민하겠거니 하고 넘기려 했다.
그때, 갑자기 누가 툭 팔뚝을 쳤다.
“야, 카이얀!”
카이얀은 반사적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화려한 금발에 파란 눈,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잘생긴 청년이 자길 보며 웃고 있었다.
“머독?”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의 이름을 부른 순간, 카이얀은 머독 비숍의 팬클럽에게 완전히 둘러싸이고 말았다.
머독 비숍은 카이얀이 대학교에 다닐 때 만난 친구였다. 대학에 다닐 땐 그냥 소설이나 쓰면서 살겠다고 말하던 친구였는데, 데뷔작 장편 판타지 소설이 영화화가 되고, 거기 배우로 출연하면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전형적인 냉미남 스타일이지만 성격 자체는 소탈했다. 카이얀이 편하게 여기는 몇 안 되는 친구였다. 더불어 카이얀이 이사한 주소를 보내지 않아 실망했던 친구 중 하나이기도 했다.
“넌 어떻게 된 게 전화 한 통 먼저 할 줄 모르냐. 뭔 일 있었어, 뭔 또 이사를 갔대?”
“야… 말 걸지 마. 사람들 다 쳐다보잖아.”
“참, 너 기사 뜨는 거 싫어했지. 가려, 가려. 얼굴 가려.”
그러더니 머독이 제 재킷을 벗어 푹 카이얀의 머리에 덮어 씌웠다. 그 우스꽝스러운 행동에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핸드폰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거렸다. 카이얀은 부아가 치밀어 홱 그 재킷을 치웠다.
“더 눈에 띄잖아. 아무튼 난 먼저 간다. 일행 있어.”
음료수는 못 뽑겠다. 나가면서 사 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카이얀이 얼른 인파를 헤치려는데 누군가 중얼거렸다.
“저거 카이얀 아냐?”
술렁임이 물결처럼 둘러싼 사람들을 덮었다. 카이얀은 기겁해서 얼른 달아나려 했지만 사람들이 갑자기 달려드는 바람에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사진 찍어 주세요, 머독이랑 같이!”
“와, 진짜 둘이 친한가 봐. 그냥 루머인 줄 알았어.”
망했어. 난 망했어. 카이얀은 난처하게 웃으며 빠져나가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냥 사진 한 장 찍어 주는 게 속편하겠다 싶어, 카이얀은 그냥 머독 옆에 서서 모델이 되어 주었다. 옷을 대충 걸치고 나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너 앞으로 이런 데서 나한테 아는 척하지 마.”
카이얀이 웃는 얼굴로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머독은 그냥 웃었다. 그러더니 카이얀의 귀에 속삭였다.
“원래 이런 팬서비스도 필요한 거야.”
머독에 제 귀에 입술을 가까이 했을 때, 카메라 소리가 확성기를 댄 것처럼 커졌다. 카이얀은 머독이 일부러 그런 걸 알고 걸려들지 않기 위해 정면만 보며 대꾸했다.
“이 사람들이 내 팬이냐. 왜 내가 서비스를 해야 돼?”
“그러지 말고, 나 때문에 유명해진 건 맞잖아.”
“안 고맙거든!”
욱해서 그쪽을 확 돌아보았는데 그러자마자 실수인 걸 깨달았다.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또 셔터를 누른 탓이었다. 카이얀은 홱 머독을 뿌리치고 바쁘게 루크에게 돌아갔다. 기다리고 있던 루크가 얼른 일어났다.
“미안한데 여기서 나가야 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몰려서.”
작가 겸 아마추어 배우인 녀석한테나 가 볼 것이지 이쪽으론 왜 오는 거야. 카이얀은 이를 갈며 루크를 이끌었다. 잠깐 쉬었다고 루크는 아까보다 훨씬 더 나아져 있었다. 카이얀은 서둘러 주차장으로 내려가 루크를 태웠다.
막 시동을 거는데 전화가 왔다. 카이얀은 머독의 전화일 거라고 생각했고, 그일 수밖에 없었다. 카이얀은 한숨을 내쉬고 전화를 받았다.
“왜, 또.”
- 야, 그런다고 진짜 그냥 가냐. 사인해 줄게. 와서 받아 가라.
“안 돼, 일행도 있고 네 사인도 필요 없고, 거기 가서 네 팬들 입에 오르내리기도 싫어.”
- 매정한 놈.
“사인회 아냐? 아니면 영화 무대인사? 가서 할 일이나 해.”
영화가 개봉하고 책이 히트를 친 이런 시기에 작가가 할 일 없이 서점에 나타났을 리 없다.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둘 중 하나가 맞긴 했는지 머독은 조용했다.
“끊는다.”
- 야야, 그러지 말고 이따 저녁이나 먹자. 어차피 나 이거 금방 끝나고, 너도 어차피 외식하려고 했던 거 아냐?
진짜 끈질기네.
카이얀은 성가셨다. 딱히 친구들에게 잘해 주는 게 없는데도, 주위 사람이 떨어져나가지 않는다는 건 카이얀 인생의 미스터리였다.
“일행 있어서 그래. 나중에 따로 만나는 게 낫겠다.”
루크 혼자 집에 두고 다녀와도 될까 싶었지만 일단은 그렇게 말했다. 머독은 신이 나서 날짜에 장소에 시간까지 다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떻게든 만나자고 하면 시간을 내준다. 입으론 불평하지만 해 달라는 건 해 주는 편이다. 카이얀은 몰랐지만, 그게 카이얀의 친구들이 그를 떠나지 않는 이유였다.
“저 때문에 방해가 되는 건 아닙니까?”
조수석에 앉아 있던 루크가 조심스레 물었다. 별로 그런 건 아니어서 카이얀은 솔직하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루크는 영 신경이 쓰이는지 운전하는 카이얀을 보며 말했다.
“전 차에서 기다려도 괜찮습니다.”
“누군지나 알고 말해요? 어려운 사람 아니고 그냥 친구예요. 약속도 잡았으니까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안심하라고 좀 길게 말해 주자 루크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집까지 가는 동안 카이얀은 이것저것 루크의 몸에 대해 물었다. 루크는 카이얀에게 제 비정상적인 감각들에 대해 말해야 하나 고민했으나 결론은 똑같았다.
말하지 말자.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와 다른 걸 싫어한다. 함께 싸운 다른 군인들도 그랬는데, 카이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카이얀에게 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숨기는 것도 아니다. 루크는 그렇게 스스로와 타협했다.
집에 도착한 후에도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카이얀은 먼저 씻고 서재로 갔고, 루크도 욕실을 사용한 후 제 방으로 돌아갔다.
루크는 카이얀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몰랐다. 하지만 카이얀이 책을 많이 본다는 건 알고 있었다. 카이얀은 밤마다 오래 서재에 머물렀다. 일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책 읽는 걸 좋아하는 것인지 루크로서는 알 수 없었다.
서재와 맞닿은 벽에 가만히 기대서 있으면 카이얀의 움직임을 그려 볼 수 있다. 자박자박 걷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멈춰서는 그 움직임까지 선명히 떠오른다. 책꽂이에 기대 책장을 넘기는, 그 가볍게 숙인 고개와 진지한 눈, 책장 위에 가지런히 얹힌 손가락까지 전부 보이는 듯하다.
카이얀을 들을 수 있다. 그는 루크가 본 것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
그러니, 영화 정도는 보지 않아도 좋았다.
* * *
“나 때문에 유명해진 건 맞잖아.”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이따금 제 소설 원작 영화에도 출연하는 머독 비숍의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했다.
사실 은둔 학자가 얼굴이 팔리고 유명해지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카이얀의 이름이 처음 알려진 건 머독 때문이었다. 카이얀은 처음에 머독을 일약 스타로 만들어 준 데뷔작의 공동 집필자로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정보였다. 카이얀은 머독이 첫 작품을 쓸 때 다양한 종류의 조언을 해 주었고, 머독도 카이얀과 함께 제 작품을 보며 이것저것 뜯어고쳤다. 그것 때문에 머독은 책이 영화화될 당시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책 쓰는 걸 도와줄 친구가 있다. 영화화되면 디테일한 부분이 생략되거나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그런 점도 그 친구와 잘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
‘책 쓰는 걸 도와줬다’는 건 지나치게 모호한 표현이었다. 사람들은 이 잘생기고 젊은-당시 머독은 대학을 막 졸업한 24세였다- 베스트셀러 작가의 공동 집필자의 정체를 궁금해했다.
그 뒤는 마치 각본처럼 흘러갔다. 사람들은 카이얀의 정체를 알아냈다. 그가 몇몇 친분 있는 젊은 작가들의 비공식적 조언자 노릇을 하고 있으며, 대학생일 때 이미 유명 평론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적이 있고, 이제는 그 평론 대회의 심사위원 중 하나라는 사실까지 알려졌다.
사람들은 젊은 천재에게 열광했고, 급부상한 머독 비숍의 성공 열쇠를 그의 절친한 친구 카이얀 로스터드에게서 찾으려 했다. 우정을 나눈 두 친구의 시너지 효과는 언제나 좋은 드라마거리였다.
저 혼자 쓴 작품을 함께 썼다고 오해받았는데도 머독은 전혀 기분 나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한술 더 떠 다음 인터뷰에서 “이 기회에 그 친구 발목 좀 잡으면 좋죠. 워낙 비싸게 구는 녀석이라.”라는 훈훈한 발언까지 했다.
논란은 확산되었고 카이얀의 연구 성과와 그가 이미 외국 학계에서도 주목을 받는 사람이라는 것까지 밝혀졌다.
“솔직히 너나 나나 얼굴 덕 좀 봤지.”
쨍, 술잔을 부딪치며 머독이 말했다.
“누가 뭐래. 난 그런 거 하나도 안 반가웠거든.”
카이얀이 잔을 탁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머독과 집 근처 바에서 만난 참이었다. 옛날 얘기는 머독이 좋아하는 주제 중 하나였는데, 아마 머독에겐 그때 일이 부와 명성을 동시에 거머쥔 결정적 계기쯤으로 남은 모양이었다.
“네가 잘생기지만 않았어도 그냥 사람들이 천재인가 보다 하고 말았겠지. 못생겼으면 이렇게까지 화제는 안 됐을 텐데. 인터넷에 아직도 너랑 나 엮는 글 돌아다녀. 알긴 아냐?”
그랬다. 여전히 머독 비숍과 카이얀 로스터드가 서로의 연관 검색어일 만큼, ‘머독&카이얀’ 혹은 ‘카이얀&머독’은 화력 좋은 키워드였다. 그저 머독의 글을 좋아하고 카이얀의 천재성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는 한편, 그런 팬들이 따로 있을 정도니 두 사람의 팬층은 여러 방면에서 두꺼운 편이었다.
“지난번에 사진 찍혀서 더 심해졌겠지. 요즘은 그냥 인터넷에 관심 끄고 산다.”
처음 ‘머독&카이얀’으로 엮인 글을 읽었을 때는 기가 막혔다. 그러다 그 일이 반복되니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게다가 사실, 머독은 별로 억울해하지도 않았다. 그는 여자하고 친구 이상은 안 된다는 동성애자가 맞았다. 그는 유연하게 그런 글들을 즐길 줄 알았다.
“그건 그렇고 너 지그문이랑 연락은 하냐?”
“지그문?”
뜬금없는 머독의 물음에 카이얀은 한 번 되묻고 고개를 저었다.
“안 하는데. 필요하면 지가 먼저 하겠지.”
“넌 꼭 필요해야 하냐. 그냥 할 순 없어?”
“뭘 새삼. 너도 필요할 때만 하잖아. 책 냈단 얘기도 안 한 주제에.”
그리고 필요할 때만 해도 흔들리거나 금이 가지 않는 것이 그들의 관계였다. 카이얀은 그들이 1년쯤 연락해 오지 않아도 별로 걱정이 되지 않았고, 몇 년 만에 연락해서 돈을 빌려 달라고 한대도 기분 나빠하지 않을 타입이었다. 그와 어울리는 모두가 그랬다.
“너 그날 누구랑 있었던 거야? 누군데 잠깐 얼굴도 못 본다고 튕겨?”
카이얀은 대답 대신 어깨만 으쓱했다. 루크가 누구인지 구구절절 설명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게 머독의 호기심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뭐야, 너 연애해? 난 또 지그문 만난 줄 알았잖아. 하긴, 지그문이었으면 그냥 둘이 같이 나왔겠지.”
“연애는 무슨 연애. 신경 꺼.”
“와, 하긴 너 인기야 좋았지. 내가 그렇게 소개시켜 준다고 준다고 해도 거절하더니 나쁜 놈. 다 꿍꿍이가 있었구먼.”
“꿍꿍이는 무슨, 너야말로 연애사가 파란만장한 주제에…….”
갑자기 울린 벨 소리에 카이얀의 말이 뚝 끊어졌다. 슬쩍 제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린 카이얀은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나이란 캠벨, 그녀였다.
“나이란이네.”
슬쩍 화면을 훔쳐본 머독이 쯧, 혀를 찼다.
“너 아직도 걔랑 연락하냐.”
뭐가 못마땅한지 몸을 뒤로 물리기까지 한다. 그러든 말든 카이얀은 이 전화를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그렇게까지 얘기했는데 쓸데없는 일로 전화를 건 것 같진 않았다.
일어나야 하나. 머독을 살폈지만 머독은 부러 관심 없는 척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린 채였다. 카이얀은 그냥 앉은 자리에서 전화를 받았다.
“왜.”
고운 말이 나갈 리 없었다.
- 루크 몸 상태 좀 확인하려고.
“이런 일로 전화하지 말랬는데. 그새 까먹었어?”
- 그런 문제가 아니야. 약 끊었지? 너도 루크에 대해 잘 모르니까 얘기 들어 두면 좋잖아.
그 뒤로 나이란은 몇 가지 질문을 했고, 카이얀은 못마땅한 심정으로나마 대답을 해 주었다. 나이란의 이런저런 설명을 듣고 있던 카이얀의 얼굴이 어느 순간 확 굳어졌다.
“그런 건 진작 말해 줬어야지.”
머독은 관심 없는 척하는 것도 잊고 흥미롭게 카이얀을 바라보았다. 나이란과 몇 마디 더 나누는 동안 카이얀은 내내 인상을 쓰고 있었다. 친구들과 말할 때 저런 얼굴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머독은 대체 둘이 무슨 얘길 하는 걸까 궁금해졌다.
“알겠어, 일단 끊어.”
카이얀은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곧장 끊어 버렸다. 머독은 홀짝, 술을 마저 마시고 과일 안주를 집어먹는 척하며 카이얀에게 물었다.
“왜, 뭔데 그렇게 찡그려?”
“그런 게 있어.”
“내가 뭐랬냐. 진작 캠벨하고 연 끊으랬잖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머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카이얀은 그게 재미있어서 픽 웃었고, 한편으론 이놈이 사람 보는 눈이 있다 싶어 놀랐다.
나이란과 카이얀은 같은 대학교 출신은 아니었다. 세미나에 끌려갔다 만난 사이였는데, 어쩌다 보니 외부 학회도 같이 하게 되었고-둘의 전공이 판이하게 달랐는데도 그랬다-, 어찌어찌 친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머독은 그 관계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또 다른 친구 지그문과 함께 셋이 모인 날이면, ‘너 아직도 걔랑 만나냐?’라는 물음을 빼놓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카이얀으로서는 머독도 나이란도 꽤 아끼는 친구였다. 따라서 어느 한쪽의 말에 휘둘려 다른 한쪽을 버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네 말 들을걸.”
이제 와 이렇게 말해 봤자 소용없겠지만.
“내가 이상하다고 했잖아. 걔, 사람 자체는 안 나빠도 애가 좀 이상하다니까. 그런 애가 과학자라니, 산 사람 액체에 넣어서 오브제로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지금은 뭐한대?”
“그냥, 연구소에 있나 봐.”
사실 카이얀도 그녀가 정확히 뭘 하는지는 몰랐다. 그저 루크 연구의 책임자 비슷한 것이려니 하고 있을 뿐이다.
카이얀은 캠벨 박사가 전한 말을 떠올리며 술을 마셨다. 나이란은 루크에 대해 꽤 중요한 정보를 전했다. 아마 그녀가 말해 주지 않았다면 계속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야.”
카이얀이 툭 부르자, 머독이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뭐.”
“만약에 네가 아파.”
“안 아픈데.”
“알았어, 그럼 만약에 네 몸 상태가 좀 이상하다고 쳐 봐.”
“안 이상한데?”
“아, 말이 그렇다고, 이 멍청아.”
“뭔 소리야, 안 아픈데 말이 그렇다고?”
“야 이…….”
이 멍청한 곰을 데리고 내가 뭐 하고 있는 걸까. 카이얀은 그냥 한숨을 내쉬었다. 엄밀히 말해 머독 비숍은 곰보다는 표범 과였지만.
“됐다. 술이나 마셔.”
루크랑 가서 얘기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날 머독과 여러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친구와 만나 한 얘기가 다 그렇듯 세세히 기억나는 건 없었다.
카이얀은 머독의 남자 애인이 끄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크게 취한 건 아니지만 사람을 불러 제 차를 운전시키긴 싫었고, 그렇다고 자기가 운전하고 올 수도 없는 노릇이라 차는 그냥 주차장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들어가.”
“어. 아, 책 영화화도 축하한다.”
“네가 책이랑 영화 비교 분석하고 다른 사례 쫙 찾아서 유형 분석하면 더 잘 팔릴 텐데.”
“돈도 많은 게 욕심은. 가라.”
머독이 탄 차는 멀어져갔고 카이얀도 집으로 들어왔다. 이미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루크 혼자 오래 집에 둔 것 같아 좀 미안해졌지만, 그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로스터드 씨. 오셨습니까?”
어떻게 안 건지 루크는 이미 현관에 나와 있었다. 평소라면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들은 말이 있어서인지 하나하나 다 마음에 걸렸다.
조금 취한 걸까. 몸이 뜨끈했다. 하지만 실수할 정도는 아니다 싶어, 카이얀은 대강 고개만 끄덕이고 거실로 갔다.
“물 드리겠습니다.”
“네, 주시면 고맙죠.”
이제 루크는 능숙하게 정수기를 다뤘다. 꽤 괜찮게 적응해 나가는 중이다. 그 모습을 보며 카이얀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루크로부터 컵을 받으며 맞은편 자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잠깐 얘기 좀 하죠.”
네, 하고 짤막하게 대답한 루크가 맞은편에 앉았다.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허리를 펴고 앉는다. 여전히 저 자세는 군인 같고, 가끔 혼날까 봐 겁을 먹은 어린 학생 같기도 하다.
“오늘 나이란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루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라 말도 못하고 눈치부터 살핀다. 연구소로 돌아가라 할까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루크 씨 몸에 대해서 이런저런 얘길 해 주던데.”
쫓아내는 말은 아니었지만, 루크에겐 이쪽도 그리 반가운 말이 아니었다. 카이얀은 루크를 다그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물을 쭉 마시고 컵을 내려놓으며, 평이한 어조로 물었다.
“나한테 뭐 할 말 없습니까?”
루크는 멍하게 카이얀을 보기만 했다. 카이얀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그저 그 시선을 받으며 담담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카이얀은 얼굴을 찡그리거나 화를 내지 않았지만, 루크는 잠시 후 스스로 놀라 고개를 떨어뜨렸다.
속이려고 한 건 아니다. 연구소에 있을 때부터, 제 몸 상태에 대해 보고하는 건 일상이었다. 그러니 카이얀에게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던 건, 그냥… 카이얀이 불쾌할까 봐, 그래서였다.
루크는 동아줄이라도 발견한 양 안심이 되었다.
그래, 이거야.
“로스터드 씨의 기분이 상할까 봐 그랬습니다.”
카이얀은 뭐라 더 묻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무슨 할 말 없느냐고 했더니 대뜸 제 기분이 상할까 그랬단다. 맥락 없는 대답이었지만 대강은 알아들었다.
“그래요.”
그냥 간단하게 대답했는데, 루크는 여직 고개를 못 들고 있었다.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주먹에 꽉 힘이 들어갔다. 손등이 하얗게 질리는 게 보였지만, 카이얀은 가만히 그걸 지켜보고만 있었다.
“일부러, 엿듣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
카이얀이 이렇다 할 대답으로 안심시켜 주지 않자 더 불안해졌는지, 루크가 다시 덧붙였다. 카이얀은 대답하지 않고 루크가 하는 양을 보기만 했다.
말을 버벅거리는 일이 없는 사람인데, 유난히 헤매고 있었다. 카이얀은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잠깐 생각에 잠겼다.
처음 나이란으로부터 이런저런 얘길 들었을 땐 확실히 기겁했다. 루크의 시각, 청각, 후각이 일반인에 비해 수 배 정도 발달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이제껏 집에서 했던 모든 통화 내용을 루크가 전부 들었다는 거 아닌가.
가장 먼저 영화관에서의 일이 납득이 되었으며, 그 뒤를 이은 건 낭패감이었다. 초반에 나이란과 루크의 거취를 두고 실랑이를 벌인 것도 전부 들었을 것이고, 서재가 바로 루크의 옆방이니 제가 움직이는 소리도 전부 전해졌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계속된 침묵이 루크를 불안하게 한 모양이었다. 루크는 조심히 사과하더니, 곧 머뭇머뭇 고개를 들어 카이얀의 눈치를 살폈다. 카이얀의 무표정을 보고 겁을 먹은 루크는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하고 덧붙였다.
“영화관에서 소리가 너무 크다고 했던 건, 청력의 문제였습니까?”
부드럽게 말하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루크가 걱정하는 것처럼 크게 화가 나거나 불쾌했던 건 아니다. 다만 좀 놀란 건 사실이었다.
“네, 그랬습니다.”
“내가 약 버리라고 하면서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습니까?”
“아닙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추궁하려던 건 아닌데 루크가 계속 위축되어 있으니 왠지 자기가 못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카이얀은 이번에 루크가 고개를 들어 자길 보면 웃는 얼굴을 보여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몸에 이상 있으면 얘기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
“네……. 그랬습니다.”
“나한테 말했어야 한단 생각은 안 들었습니까? 아니면 자주 아파서 그 정도 아프거나 몸에 변화 있는 건 아무것도 아닌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루크는 그저 쩔쩔매며 사과만 반복했다. 저러니까 괴롭히고 싶잖아. 카이얀은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지금까지 내 통화 다 엿들었던 거 맞습니까?”
일부러 냉랭한 목소리를 가장하니 루크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까 웃어 주겠다고 결심했지만 지금은 웃을 타이밍이 아닌데, 싶어 카이얀은 그냥 루크를 보기만 했다. 루크는 고개부터 저었다.
“엿들은 건 아닙니다.”
“아, 몰래 엿들은 건 아닌데 그냥 들렸다?”
“네…….”
어쩐지 그 말이 그 말 같았지만, ‘엿들었다’는 것보단 ‘그냥 들렸다’가 나은 것 같았다.
“싫으시다면 밖에… 있겠습니다. 그 정도로 떨어지면 들리거나 하진… 그러진 않습니다.”
카이얀은 이번엔 진심으로 할 말을 잃어 침묵했다.
밖에 있겠다니, 웃기지도 않아서. 저 말을 진심으로 한다는 게 더 기막혔다.
“됐습니다. 루크 씨, 농담 몰라요?”
군인일 때의 습관 탓인지 루크의 대답은 보통 즉각적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정말 당황했는지 루크는 딱 굳어서 입도 벙끗하지 못했다.
“신경 안 씁니다. 들린다는데 귀 막고 있으라고 할 수도 없고.”
원하신다면 막고 있겠습니다, 뭐 그런 답답한 소리가 나오기 전에 카이얀이 선수를 쳤다.
“하지만 앞으로 뭔가 이상한 점이 생기면 바로 얘기해야 됩니다. 지난번에 내가 한 말 못 알아들은 것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답답하게 굽니까.”
거기까지 말하고 카이얀은 나이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루크에게도 말해 주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몸의 변화에 가장 민감한 게 루크 본인일 텐데, 그도 알아야 할 것들이었다.
“전쟁 중일 때는 보호기를 착용했다고 들었습니다. 필요하면 나이란이 보내 준다곤 했는데, 그게 생각보다 관리 점검이 필요한 기기라고 하더라고요.”
“생활하는 데는 문제없습니다. 보호기까지 필요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루크의 말에 카이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란 말로는 약을 끊었으니 감각이 앞으로 조금씩 둔해질 거라고 하던데요. 그냥 일반인 수준으로 떨어질지, 아니면 그보다 더 떨어질진 예상을 못 하겠다고 했습니다.”
“아… 네, 아까 영화관에서, 평소보다 조금 안 보이는 것 같긴 했습니다.”
“물건이 안 보이거나 할 정도는 아니죠? 혹시 그 정도가 되면 안경 맞춰야 되니까 바로 얘기하고요.”
“네.”
카이얀은 그쯤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그 이야기를 중단했다. 그럼 됐습니다, 하고 일어났다. 루크도 함께 일어났는데, 문득 카이얀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참, 코도 좀 예민하다고 했는데. 술 냄새 나죠?”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화장실에 방향제 빼 줄게요. 냄새 독했을 텐데 말을 하지. 가서 자요.”
카이얀은 그렇게 말해 놓고 돌아섰다. 방향제는 그냥 둬도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카이얀은 그 전에 이미 화장실로 가고 있었다. 루크는 카이얀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술을 마셨는데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문득, 뱃속이 뜨겁고 몸 속 어딘가가 간지러웠다. 그러나 그 낯선 감각은 금방 사라졌다. 루크는 잠깐 당황해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곧 카이얀이 말한 대로 제 방으로 올라갔다. 오늘 밤도 로스터드 씨가 서재로 올라올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 * *
나이란으로부터 루크의 여러 감각이 일반인의 것보다 훨씬 더 예민하다는 걸 들은 이후, 카이얀은 고민에 빠졌다.
마음 같아선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고 싶은데,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다행히 후각은 일반인보다 약간 뛰어난 정도라고 했다. 시각도 큰 문제는 없을 듯했다. 먼 곳까지 볼 수 있고 어두운 곳에서 밝게 볼 수 있는 정도라고 했으니까.
문제는 청각이었다. 소음이 심한 곳에 데려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이제까지 차에서도 힘들었겠다 싶었다. 일반인이 듣기엔 그저 가볍게 윙윙거리는 소리지만, 루크 귀에는 심한 소음이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정원에 물이나 줍시다.”
휙, 루크에게 호스를 던지며 카이얀이 말했다.
“물 틀 테니까 좀 기다려요.”
루크는 호스 구멍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물이 나오는 건가? 그런 판단이 선 건 아주 순식간이었고 분명 물이 꿀렁꿀렁 나오기 시작하는 것까지 봤는데, 어째서인지 거기서 고개를 돌려야 한다는 생각은 하질 못했다.
촤악!
“윽!”
루크가 재빨리 호스 구멍을 얼굴에서 치웠다. 이미 늦은 게 문제였다. 얼굴과 머리카락이 다 젖고 뚝뚝 떨어지는 물에 셔츠 앞섶까지 축축해져 버렸다. 마당 수도꼭지를 돌린 카이얀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루크만 쳐다보았다.
“어… 괜찮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눈에 물 들어간 거 아니죠?”
당연히 들어갔지만 안 괜찮을 정도는 아니었다. 루크는 다시 괜찮다고 말했다. 카이얀은 루크에게 다가와 대강 호스 잡는 법과 물 뿌리는 방법 같은 것에 대해 알려 주었다.
“난 저쪽에서 잡초 정리 좀 하고 있겠습니다. 아… 아니다, 루크 씨, 잔디 깎아 본 적 없죠? 해 볼래요? 물은 그 다음에 줘도 되니까.”
카이얀의 정원에는 대체적으로 나무가 많았다. 잔디밭 여기저기에 특별한 규칙 없이 늘어선 나무들, 봄의 끝물이라 꽃이 지고 이파리가 더욱 파랗게 변해 가고 있었다.
“지난번에 한번 깎긴 했는데, 뭐 한 번 더 해도 되니까.”
“잔디가 뭡니까?”
“아, 이거요. 이 풀.”
카이얀은 이제 별로 당황하지도 않고 제 발밑을 가리켰다. 운동화로 가볍게 잔디를 툭툭 밟아 루크에게 잔디가 뭔지 알려 준 후, 이젠 자기가 이런 질문을 받고도 머뭇거리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기뻐했다.
“잠깐만요. 기계 갖고 오겠습니다.”
카이얀은 기계 다루는 걸 귀찮아 했지만, 못 다루는 편은 아니었다. 그는 흔히 잔디 깎기 기계라고도 하는 모워를 가져와 카이얀 앞에 두었다. 긴 손잡이를 잡고 앞으로 밀며 사용하는 아주 평범한 기계였다.
“이렇게, 시동을 걸고.”
좀 구식이라 키를 꽂아 돌리고 별도의 시동까지 다시 걸어야 했다. 시동을 걸기 위해 줄을 쭉 잡아당겼다 놓은 카이얀은, 덜덜덜 떨리기 시작한 기계를 단단히 잡고 있다가 손잡이를 루크에게 넘겨주었다.
“옛날 모델이긴 해도 자동입니다. 그냥 알아서 깎아 주니까 원하는 방향으로 밀고 나가면 됩니다.”
그렇게 말해 놓고 카이얀은 영 불안해서 잠깐 루크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루크는 잠시 기계를 살피고 혼자 고개를 갸웃갸웃하더니-의외로 어울려서 카이얀은 기겁했다- 이내 조금 엉성한 자세로 잔디를 깎기 시작했다.
그러고 있길 몇 분 후, 카이얀은 이제 기계란 기계는 다 루크에게 들려 줘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익숙지 않아 주춤거리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루크는 평생 잔디만 깎고 산 사람처럼 능숙했다. 아마 수동 기계였더라도 쩔쩔매는 일 없이 척척 다뤘을 것 같았다. 카이얀은 자기도 모르게 넋을 놓고 루크의 움직임만 좇았다.
확실히, 기계에 익숙한 사람이다. 기계라는 게 겉모양만 다르지 뜯어보면 사실 다 비슷비슷하다. 다루는 것도 마찬가지, 손보는 것도 거기서 거기.
카이얀은 왜 나이란이 루크를 그렇게 중요한 전력이라고 했는지, 그때 깨달았다. 우스운 일이었다. 잔디 깎는 걸 보며 살상용 인간의 유용성을 깨닫다니. 하지만 루크는 고작 잔디 깎는 데 저 정도일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오차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전쟁터에서도 저랬겠지. 어쩌면 저보다 더했을 것이다.
“무슨 문제가 있으십니까?”
카이얀이 계속 쳐다보자 좀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잠시 기계를 멈춰 놓고 기다리는 루크를 보고 카이얀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잘한다 싶어서요.”
“아… 감사합니다.”
전쟁터에선, 들을 수 없는 칭찬이었겠지. 사람 참 잘 죽이네요, 머리를 참 잘 깨뜨리네요, 이런 말을 할 순 없었을 테니까.
카이얀은 목장갑을 끼고 가지를 정리하기 위해 돌아섰다. 거기선 들을 수 없는 말이니, 여기 머물 때라도 잘한다고 자주 말해 줘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정원 손질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난번에도 카이얀은 잔디를 깎고 가지를 정리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함께 움직이자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일찍 끝났다.
카이얀은 늘어져라 기지개를 켜고, 마무리는 자기가 할 테니 가서 쉬라며 루크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루크는 같이 정리하고 들어가겠다고 했지만 카이얀은 거절했다.
하는 수 없이 루크는 안에 들어와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카이얀이 장만해 준 옷은 한두 벌이 아니라, 새로 산 옷장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루크는 이제 편한 옷과 불편한 옷의 차이에 대해 알고 있었으므로 최대한 편한 옷을 입은 채 창문으로 카이얀을 관찰했다.
아주 일상적인 움직임이다. 다른 군인들처럼 동작에 힘이 들어가 있지도 않다. 긴장되어 있거나 경계하지도 않는다. 풀어진 얼굴로 정원 여기저기를 다니다가, 울타리에 툭 기대 정원을 둘러보는 카이얀은 어딘지 아주 평화로워 보였다.
카이얀은 곧 집으로 들어왔다. 잠시 물소리가 나더니 2층으로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카이얀은 똑똑, 가볍게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루크는 이 ‘노크’라는 것에 대해 배운 후 한동안 무척 신기해했었다.
“밖에서 책 읽을래요? 피곤하면 여기 있어도 됩니다.”
정원 나무 아래 벤치가 놓여 있던 게 떠올랐다. 루크는 반사적으로 고개부터 끄덕이고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카이얀은 루크를 데리고 서재 앞까지 갔다가, 순간 멈칫해 돌아보았다.
“아… 미안한데, 여기서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책은 내가 적당한 걸로 골라보겠습니다.”
루크는 평상시와 똑같은 얼굴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카이얀이 탁 문을 닫고 서재로 들어간 후에야, 자기가 약간 이상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서재에 들여보내 주는 건가 싶어 조금 기대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루크는 ‘실망’에 대해 표현하는 법을 몰랐고 그저 실망감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설령 표현하는 법을 알았다 해도, 카이얀에게 대놓고 이야기하진 못했을 것이다.
곧 카이얀은 제가 읽을 책과 루크가 읽을 얇은 동화책 여러 권을 들고 나왔다.
“겨울엔 밖에서 책 볼 일이 없거든요. 날이 따뜻해지니 이런 건 괜찮네요.”
카이얀은 좀 들뜬 모양이었다. 루크는 그 뒤를 얌전히 따라가며 카이얀의 말을 들었다. 정원으로 나간 카이얀은 벤치 끝에 앉아 루크와 저 사이에 책을 쌓았다.
늦봄, 한낮이었다. 나뭇잎이 드문드문해, 머리 위의 그늘은 구멍 난 보자기 같았다. 알갱이 같은 햇빛이 어룽거렸다. 카이얀은 별다른 이야기 없이 무릎을 세워 앉은 채 책을 읽기 시작했다.
루크는 적당한 동화책을 제 무릎에 펼쳐 놓고, 카이얀만 바라보았다.
책에 집중한 카이얀은 진중했다. 살짝 내리뜬 눈이나 뒤로 기댄 등, 비스듬히 숙인 고개. 손질하고 물을 준 지 얼마 안 된 정원은 싱그러웠고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루크의 청각을 자극했다.
턱선이 날카롭고 눈이 깊어 음영이 뚜렷한 얼굴이었다. 이파리가 드문드문한 그늘의 구멍 사이로 드는 햇볕은 마치 동그란 별 같아서, 카이얀은 더욱 빛나 보였다. 문득 그 빛이 카이얀의 입술에 닿았을 때, 자기도 모르게 루크는 숨을 멈추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얼굴로 열이 몰리는 것 같았다. 심장이 목에서 뛰는 것처럼 목이 뻐근하고 가슴이 아프다. 발끝에서 목까지 소름이 돋는 느낌.
이상해. 이건 이상해…….
아픈 것도 아닌데 어쩐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왜 그럽니까? 어디 불편해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들썩인 모양이다. 카이얀이 문득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그의 입가에서 빛이 사라지고, 그 입술에서 시선을 떨어뜨리니 좀 나아지는 듯했다. 루크는 이유도 모르고 그저 안도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루크의 안도는 산산조각 났다. 카이얀이 루크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인 탓이었다.
“얼굴이 왜 이렇게…….”
“들어가겠습니다!”
루크는 벌떡 일어섰다. 거의 고함치는 목소리여서 카이얀은 화들짝 놀랐다.
“목이… 목이 말라서 그렇습니다. 물 마시고 오겠습니다.”
루크가 뒤늦게 변명했고, 카이얀은 약간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은 거 맞습니까?”
미심쩍게 묻는 카이얀에게 다시 괜찮다고 대답한 후, 루크는 허둥지둥 집으로 달아나 버렸다.
다행히 루크의 그 이상한 감각은 금세 가라앉았다.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마치 무언가가 억지로 감각을 눌러 없애 버린 듯했다. 그러나 루크는 그런 것엔 관심이 없었다. 어떻든 그 감각이 사라졌다는 것에 안도했다.
카이얀은 한 시간 정도 밖에 머물다가 안으로 들어왔다. 카이얀과 함께 식사를 하는 동안, 루크는 긴장 상태였다. 아까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저 카이얀을 보기만 했는데 몸이 이상해졌다. 혹시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 것도 위험한 거 아닐까.
“루크 씨, 몸 뻐근하거나 그러진 않습니까?”
카이얀의 물음이 루크의 생각을 방해했다. 루크는 잠깐 제 몸에 대해 생각했다. 몸이 아프거나 하진 않았다. 전혀. 예전엔 비정기적으로 찾아오던 통증도, 약을 끊은 후엔 완전히 사라졌다. 물론 처음에 밥을 먹었을 땐 속이 불편하기도 하고 지나치게 목이 마르기도 했지만, 그건 잠시뿐이었다.
“네. 괜찮습니다.”
“아아. 나이란 말로는, 그 약에 근강화제도 들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시중에서 파는 거랑은 좀 다르다고,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근육이 붙도록 도와주는 성분이라고 하던데.”
꼭 약 때문이 아니라도 활동량이 많았을 텐데, 루크의 몸은 보기가 좋을 만큼만 단단했다. 제멋대로 튀는 모워(mower)를 쉽게 다룬 걸 생각해 보면 나약한 편은 절대 아니겠지만.
“잘 몰랐습니다.”
“이제 그 약도 끊었으니 몸에 변화가 있을 텐데, 계속 안에만 있으면 근육이 빠지고 체력도 약해질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뭐 별달리 마음에 걸리는 거 있어요?”
“죄송합니다. 마음에 걸린다는 건 어떤 의미입니까?”
“아, 음… 어, 신경이 쓰인다고 해야 하나. 그런 거죠.”
신경 쓰이는 게 있느냐고 하면, 없진 않다.
카이얀.
이상할 정도로 카이얀에게서 눈을 못 떼는 자기 자신. 카이얀은 표적도 아닌데, 마치 목표물이기라도 한 것처럼 관찰하고 있었다. 그걸 자의로 멈출 수 없다는 게 가장 걱정스러웠다.
이걸 말해도 될까? 말해야 하는 걸까?
루크는 계속 고민했다. 그러고 있는 걸 보다가 카이얀은 ‘마음에 걸리다’에 대해 다시 설명했다.
“좀 고민스럽다든가, 찜찜하다든가… 아, 그 말도 모르나? 아무튼 그 일만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해진다거나, 그런 겁니다.”
오해는 아무 조건 없이도 발생하는 것이었다. 루크는 카이얀의 말을 충분히 알아들었지만 그가 대답하지 않자 카이얀은 끙끙대며 계속 머리를 쥐어짰다.
“그러니까 왜, 그 일 때문에 답답하다고 할 수도 있고, 빨리 해결해 버리고 싶기도 하고.”
로스터드 씨가 마음에 걸립니다, 라고 말하려던 루크는 딱 입을 다물었다. 루크는 카이얀 때문에 답답하진 않았다. 오히려 카이얀이 있으면 마음이 안정된다. 가끔, 아주 가끔 그 안정이 흔들리고 스스로의 감각이나 감정이 이상해지는 것뿐이다.
“뭐 어쨌든, 몸 아픈 곳 없냐는 거죠. 기운이 없거나 그러진 않고요?”
“네.”
“음… 하긴, 몸이 그렇게 빨리 허물어지거나 하진 않으니까. 그래도 몸 만들어 놓은 게 아까우면 조깅 같은 거라도 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카이얀은 축복받은 몸의 소유자라 운동에 대해선 잘 몰랐다. 그는 날 때부터 비율이 완벽에 가까웠고, 살은 더디게 붙고 근육은 빠르게 성장하는 체질이었다. 그러니 루크에게 충고해 줄 말이 많을 리도 없었다.
“아침에 나랑 산책이야 다니고 있고… 연구소에서 훈련할 땐 어떻게 했습니까? 아령 같은 거?”
“훈련할 때는 대체적으로 시뮬레이션을 했습니다. 대부분은 작전에 투입되었는데, 그게 훈련 대신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카이얀은 잠깐 멈칫했다. 그러더니 곧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가장했다.
“그럼 달리 운동해 본 적은 없단 얘기네요.”
루크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마 군인들과 함께 작전에 투입된 적이 없었다면, 루크는 ‘운동’이라는 단어에 대한 설명도 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만큼 루크와는 먼 얘기였다.
“하지만 그 몸은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제 몸 말씀이십니까?”
“네. 제 친구는 엄청나게 신경 쓰던데.”
카이얀은 ‘네 체질을 살 수만 있다면 네 몸무게만큼의 금을 내놓겠다’고 했던 머독을 떠올리며 말했다.
“로스터드 씨는 이 몸이 좋으십니까?”
“어… 네?”
그게 내 맘에 들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지 않나? 카이얀은 의구심이 일었다.
“제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쪽에 신경 쓰는 사람들 꽤 많습니다. 루크 씨도 그런가 해서.”
말하다가 카이얀은 자기가 꽤 멍청한 질문을 했다는 걸 알았다. 루크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자라나며 자연스럽게 저 몸이 되었을 테고, 좋은 몸의 기준 따위는 모르니 스스로의 몸이 좋고 싫고 하는 생각 자체가 없을 것이다. 괜한 걸 물어 얘기를 복잡한 쪽으로 끌고 온 것 같았다.
“어쨌든 보기 좋은 몸이긴 합니다.”
대강 수습하려고 그렇게 말했는데, 루크는 즉답했다.
“그럼 계속 이대로 있겠습니다.”
카이얀은 잠깐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루크 씨가 어떤 체질인진 몰라도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라고 말할까 했는데,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 얘긴 그만두고, 카이얀은 식사를 마친 후 자전거를 주문했다.
* * *
카이얀은 어릴 때 이후로 자전거를 타 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진 같이 자전거를 타고 이리저리 다니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그 집에 있던 짐들은 대부분 다 버렸고, 자전거도 그 중 하나였다. 그저 누구와 함께 타는 게 좋았을 뿐 자전거 자체에 흥미가 있던 건 아니어서 그 후로도 카이얀은 자전거를 장만하지 않았다.
“제일 간단하고, 몸이랑 자전거만 있으면 되니까요. 비 오면 우비 쓰고 나가도 되고, 심심할 때 시내까지 나갔다 오는 것도 좋고, 중간에 샛길로 빠져서 한 20분만 가면 호수도 나오고.”
구구절절 설명했고 루크는 절반 정도만 알아들었다. 카이얀은 자전거에 대해, 우비에 대해, 심심하다는 것에 대해, 샛길에 대해, 호수에 대해 다시 설명해 줘야 했다.
“배우는 거 자체는 그렇게 안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날이 좋았다. 오전에는 비가 내렸다. 바닥이 조금 젖어서 미끄럽긴 했지만,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카이얀은 며칠 만에 겨우 배달된 자전거 두 대를 집 앞에 나란히 세워 놓고 한번 타 보려고 했다. 부모님은 열일곱 살 때 돌아가셨으니, 거의 10년 만에 타 보는 자전거였다. 잘 될까 걱정스러웠는데, 의외로 어제까지 계속 자전거를 탔던 것처럼 쉽게 탈 수 있었다.
“아, 되네요.”
자전거는 한 번 배워 놓으면 잊어버리지 않는다더니, 과연 그랬다. 빈말로라도 제 운동 신경이 좋다 할 수는 없었는데도. 카이얀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자전거를 세워 놓고, 저만치에 멀뚱히 서 있는 루크 쪽으로 갔다.
“자, 타는 거 봤죠? 이렇게 다리 하나를 다른 쪽에 두고, 손잡이 잡고요. 이건 브레이크라는 거고, 멈출 때 사용하면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카이얀은 운동 신경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카이얀은 열 살 때 두발자전거를 배우다가 제 형편없는 운동 신경을 깔끔하게 인정했다.
지금이야 잘 타지만, 또래들이 다 잘 배워 타고 다닐 때도 카이얀은 번번이 넘어졌다. 카이얀은 순전히 제 경험에 비추어, 루크도 자전거를 손쉽게 배우진 못할 거라고 짐작했다.
“이렇게 타면 됩니까?”
루크는 3초 만에 자전거를 다 배웠다.
“어… 음… 잘 타네요.”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카이얀은 벌써 저만치 가고 있는 루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체크무늬 셔츠에 청바지, 모자까지 씌워 놓고 나왔더니 딱 소년 같았다. 처음에 좀 긴장한 것 같던 루크는, 얼마 가지 않아 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거의 일주일 내내 시멘트 바닥에 넘어져 가며 자전거를 배웠던 카이얀은 어쩐지 좀, 진 것 같은 기분이 되고 말았다.
“비슷한 걸 타 본 적이 있습니다.”
하긴, 군용 스쿠터에 타봤던 건지도 모른다. 자전거와 비슷하니 금방 배우는 것도 당연하다.
아는데, 정말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카이얀은 고개를 저었다. 애도 아니고. 생각해 보면 루크 쪽이 약간이지만 키도 더 크고, 몸도 더 단단하고, 생긴 건… 영화관 스크린에 얼굴을 걸었던 머독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카이얀은 곧 그런 생각을 접었다. 무슨 상관인가, 부러워하기라도 할 건지. 군용 스쿠터에서 총을 들었을 루크를. 루크의 삶이야말로 영화에 견줄 만했을 텐데.
루크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카이얀은 호수까지 갔다. 호수는 멀지 않았다. 카이얀은 자전거로 빠르게 20분, 혹은 30분 정도일 거라고 짐작했다. 둘 다 체력이 없는 편은 아니었으므로 그리 힘들진 않을 것이다.
둘은 아주 평화롭게 자전거를 탔다. 볕이 좋았고 바람은 등 뒤에서 불었다. 바퀴는 순조롭게 굴러갔고, 집들이 양옆으로 늘어선 도로를 빠져나와 샛길로 접어들자 생태 보존이 잘 된 산책로가 나왔다. 그늘 때문에 습해서인지 길에 물이 덜 말랐지만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다. 자전거도로를 달리면서, 카이얀은 흘끗 루크를 보았다.
과장을 조금 섞어, 마치 십 년 내내 자전거만 타고 다닌 사람 같았다. 저것도 약의 힘일까, 아니면 어릴 때부터 훈련해 온 결과일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앞을 봤는데, 문득 저만치에 비둘기가 와글와글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날아가겠지?
카이얀은 그렇게만 생각했다. 새들은 정확히 자전거도로에 몰려 있어서 완전히 진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래도 거리가 꽤 멀어서, 카이얀은 그저 날아가겠거니 하며 속도를 유지했다.
새들은 날아가지 않았다. 멀뚱멀뚱 카이얀을 보고만 있었다. 가장 가까이 있는 비둘기와 체감으로 손가락 한 마디쯤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카이얀은 있는 힘껏 브레이크를 쥐었다. 생각할 틈도 없었다.
끼익―.
바닥이 젖어 있지 않았다면 넘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퀴는 그대로 헛돌았다. 자전거에서 떨어진 카이얀은 자전거가 달리던 바로 그 속도대로 미끄러졌다. 모래알갱이가 깔린 바닥에 무릎과 손바닥이 온통 쓸리고 말았다. 푸드득 새들이 날아가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카이얀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으아. 이게 뭐야.”
어찌된 영문인지 배까지 욱신거렸다. 카이얀은 낑낑대며 얼른 몸을 일으켰다. 셔츠 앞자락과 바지가 전부 흙 천지였다. 무릎은 말도 못하게 욱신거렸다. 카이얀은 얼른 고개를 내려 무릎을 보았는데, 천천히 피가 배어나기 전까진 그리 많이 다치진 않았다고 착각했다.
“아… 으, 어떡하지.”
혼자 오래 살다 보니 혼잣말이 늘었다. 카이얀은 엉망이 된 제 몰골과 손대기도 사나울 만큼 아픈 무릎을 살피다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나왔는데, 이게 대체…….
“괜찮으십니까?”
루크가 덥석 카이얀의 양 팔뚝을 붙들었다. 카이얀은 그제야 자기가 루크와 같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새삼스럽게도.
멀쩡히 달리던 자전거도 내팽개치고 제게 달려온 모양이었다. 흙빛으로 질린 루크의 그 단정한 얼굴을 보다가, 카이얀은 그냥 어쩐지 이 모든 게 다 우스워졌다. 그래서 웃었다.
“하하.”
“왜 그러십니까?”
“웃겨서요.”
웃기니까 웃죠. 그렇게 말하고 카이얀은 대강 제 옷을 털었다. 무릎은 도저히 손댈 엄두가 나지 않아 가만 두었다. 이제 이 무릎으로 자전거를 타고 집까지 돌아가야 하는구나. 가서 상처 흙부터 씻어 내고 소독… 소독…….
“아프지 않으십니까?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어째 다친 저보다 더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아, 카이얀은 루크를 가볍게 툭 쳤다.
“그냥저냥 집까지 갈 정도는 됩니다. 집에 가야 할 것 같은데, 호수엔 다음에 가죠.”
“제가 업어 드릴 수 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래.
카이얀은 픽 웃었다. 무슨 병자도 아니고, 그저 무릎이 좀 까진 것뿐이다. 까졌다고 하기엔 좀 심하게 아프고, 찢어졌다고 하기엔 민망한 정도지만. 다시 자전거를 타고 집까지 갈 기운 정도는 충분했다.
“자전거 여기 버려두고 돌아갈 수도 없고요.”
“제가 나중에 다시 갖다 놓겠습니다.”
“아니, 그냥 지금 타고 가면 될 걸 뭐 굳이…….”
그렇게 한참 말도 안 되는 실랑이를 했다. 루크는 카이얀을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카이얀도 루크가 이렇게 강경한 태도를 취한 건 처음이라 좀 당혹스러웠다.
결국 두 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집까지 돌아왔다.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집에 오는 내내 무릎에서 피가 줄줄 흘러 신경이 쓰였지만, 빨리 집에 가서 씻고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리 거슬리지 않았다.
오히려 신경 쓰이는 건 루크였다. 루크는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내내 카이얀을 주시했다. 앞을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몇 번 충고해 줬지만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더니 집에 도착해선, 상처에서 모래부터 씻어 내겠다는 카이얀을 따라 욕실까지 들어왔다.
“저기, 나가 있어도 됩니다.”
딱히 당장 샤워할 게 아니라 상처에서 모래만 씻어 낼 생각이니 루크가 옆에 있든 없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좀 부담스러웠다. 루크는 무슨 대통령이라도 지키는 사람처럼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그냥 물로 한 번 씻어 낼 겁니다.”
“상처, 봐 드릴 수 있습니다.”
엉겁결에 카이얀은 루크에게 샤워기를 빼앗겼다. 루크는 평소보다 훨씬 더 저돌적이었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그렇게 요란한 일도 아닌데……. 카이얀은 조금 무안했지만 신경 써 주는 거니 나쁘게 말할 수도 없었다.
루크는 아주 신중하게 카이얀의 상처에서 모래를 씻어 냈다. 시력이 좋다고 했으니 작은 것도 잘 보이려나, 그래서 용케 상처를 건드리지 않고 있나. 어차피 샤워기 물이 상처에 들어가 아팠지만 카이얀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허리를 숙인 채 제 상처를 살피는 루크를 내려다보았다.
전쟁터에선 이보다 더한 일도 많았을 텐데. 아마 루크 본인이 이보다 몇 배나 더 크고 위험한 부상을 입은 적도 있었을 것이다. 거기 비하면 이건 정말 어린애가 뛰다 넘어진 정도일 게 분명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며 성의껏 살피는 걸까. 민간인이라 이 정도 상처도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음, 루크 씨. 그냥 한 일주일 지나면 나을 겁니다.”
루크는 드물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 좋은 청력에 그럴 리 없겠지만, 물소리 때문에 못 들었나 싶어 카이얀은 굳이 덧붙였다.
“생각하는 것만큼 심한 상처는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어쩐지 카이얀은 그 이상 말을 꺼낼 수가 없게 되었다. 방금 왜 짜증 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 얼떨떨해져 있는데 상처에서 모래를 다 씻어 낸 루크가 대뜸 카이얀의 무릎 아래로 팔을 넣어 안아 들었다.
“루크 씨! 저기요, 이럴 필요 없습니다!”
카이얀은 당황했지만 루크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카이얀을 소파에 앉힌 후, 물이 흐르는 다리를 가볍게 수건으로 닦아 냈다. 그러더니 구급상자를 찾아-예전에 카이얀이 위치를 알려 주었다- 카이얀 앞에 내려놓고 저는 바닥에 앉았다.
“지나치게 굴 필요 없습니다.”
막무가내로 구는 루크 때문에 카이얀은 조금 불편해졌다. 욕실에선 그렇다 쳐도, 싫다는 사람을 굳이 번쩍 안아 들어 여기까지 데려올 건 뭔가. 카이얀은 어린애도 아니었고, 자존심도 강했다. 카이얀은 좀 더 확실히 해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숙여 바닥에 앉은 루크의 어깨를 짚었다.
“내가 하겠습니다. 그냥 씻고 올라가 있으면 됩니다.”
단호한 목소리에 내내 상처만 보고 있던 루크가 고개를 들었다. 카이얀은 약간 놀랐다. 지난번에도 이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은데, 저렇게 아래서 올려다보니 루크의 인상이 완전히 변했다. 눈치를 보며 안달하는 강아지 상이었다.
“제가 해 드리고 싶습니다. 안 되겠습니까?”
그쯤 되자 카이얀은 길어지는 입씨름에 지쳐 버렸다. 좋을 대로 하라고 팽개쳐 두고 나니 곧 조심스러운 손길이 상처에 닿는다. 따갑고 아팠다.
카이얀은 그냥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멍하게 생각했다. 보모도 아니고 왜 이러나. 굳이 어느 쪽이 보모냐를 따지면, 내 쪽이 보모라고 하는 게 더 맞을 텐데.
“민간인의 몸은 불편한 것 같습니다.”
루크가 문득 말했다. 그러면서 소독약을 발라서, 카이얀은 순간 몸이 펄쩍 튀어 오르는 것을 간신히 막았다.
“어떤 면에서요?”
“제 몸은 이 정도 상처는 한나절 안으로 다 낫습니다.”
카이얀은 무어라 말을 덧붙이지 못했다. 그건 비정상이라고 말해 줘야 할까. 아니, 아마 루크도 그건 알고 있을 것이다. 그저 카이얀은 루크가 왜 이렇게 제 상처에 매달리는지 알 것 같았다. 그에게 더디게 낫는 상처란 낯설고 두려운 미지의 무언가일 것이다.
“일주일이나 걸리지 않습니다.”
루크가 계속 흘러내리는 피와 약을 솜으로 닦으며 중얼거렸다. 카이얀은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몰라 침묵하다가, 그저 루크를 불렀다.
“루크 씨.”
“네.”
“난 괜찮습니다.”
사람은 다치면서 배우는 것이다, 고작 자전거 타다 다쳐 놓고 이런 교훈적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다만, 카이얀은 그저 루크가 지나치게 자길 걱정하지 않았으면 했다.
“못 걸을 만큼 다친 것도 아니고, 어디가 부러진 것도 아닙니다.”
이 사람을 납득시키기 위해선 천천히 말해야 한다.
카이얀은 그걸 상기했다.
루크 평생, 세계는 그에게 적대적이었다. 아무도 그에게 천천히 이해해도 좋다고 말해 주지 않았다. 그렇게 지내 온 루크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세계의 다른 면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카이얀과 함께하는 세계는 조금 단조롭고 지루하고 이따금 새로웠다. 또 어떤 순간에는 놀라울 만큼 온화했다. 동시에 그만큼 낯설고 두려웠다.
군인도 아니고 약물을 투여받은 실험체도 아닌 ‘민간인’은 루크에게 있어 작고 약한 동물 같은 것이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죽어 버릴 것 같다. 그래서 두려웠다. 상대가 너무 약해서 두려웠다.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그래도, 제가 지키겠습니다.”
루크는 한 번도 살아 있는 것을 지켜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지키는 것은 규칙이었다. 그가 따르는 것은 작전이었다.
그러나 카이얀을 향해 당신을 지키겠다고 말한 순간, ‘지킨다’는 말이 갑자기 기지개를 켜고 봄 나무처럼 꽃잎을 둘렀다. 아무 의미도 없던 그 말이 갑자기 감미로운 어감으로 가슴에 닿았다.
“제가 지키겠습니다.”
루크는 그 언어의 신비가 놀라워 반복했다. 카이얀은 그가 무엇을 느꼈는지 몰랐다. 함께 살고 있어도,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타인이었다. 루크가 무슨 다짐을 했는지, 어떻게 변해 가고 있는지… 카이얀은 몰랐다. 그래서 그는 그저 웃었다.
“자전거로부터요? 아니면 비둘기로부터?”
“모든 것으로부터.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하.”
왜 이렇게 진지해졌지?
루크 혼자 영화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카이얀은 웃었다.
“고맙네요. 하지만 지금 루크 씨 보호자는 접니다. 무리는 말고요.”
“네.”
루크는 단호하게 대답하고, 상처에 연고를 바르기 시작했다. 카이얀은 그런 루크를 보다가 한쪽에 걸린 달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의 기일이 멀지 않았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카이얀과 루크는 계속 함께 지냈다. 그러나 매일 특별한 걸 함께한 건 아니었다. 카이얀이 거실 소파에서 신문을 읽다가 루크에게 설거지하는 법을 알려 주는, 그런 아주 평범한 일상이 지속되었다.
둘의 관계는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아침마다 함께 산책을 했고, 카이얀은 루크가 혼자 외출해도 안심할 수 있을 때까지 새 연구를 좀 더 미루기로 했다. 루크는 종종 카이얀을 빤히 보다가 달아났는데, 그런 일들만 제외하면 둘은 꽤 편안한 사이였다.
그렇게 5월 21일이 되었다. 카이얀 양친(兩親)의 기일이었다. 카이얀의 부모는 한날한시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은 카이얀의 가족사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카이얀은 스스로의 과거를 철저히 숨겼다. 사실 카이얀의 진짜 성은 ‘로스터드’가 아니라는 말도 있었다. 어머니의 처녀적 성이라든지, 만들어 낸 성이라든지 하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물론 루크는 그런 소문들에 대해 전혀 몰랐다. 사실 루크는 세상 사람들보다도 더, 카이얀에 대해 몰랐다.
“모시고 갈 수 있습니다.”
“아는데, 집에 있는 게 좋겠습니다. 꽤 멀기도 하고.”
아침부터 정장을 챙겨 입은 카이얀은 몇 번이나 루크를 말렸다. 그러나 루크는 강경했다. 지난번 자전거 일 이후로 루크는 상당히 변했다. 자기 의견을 말하는 일이 잦아졌으며, 마치 카이얀이 병아리나 된다는 듯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를 지켜보았다.
당연히 카이얀은 그게 부담스러웠다. 챙겨 주는 건 고맙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루크는 사람 챙기는 방법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무엇보다도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면 카이얀에겐 보호가 필요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보호가 필요 없는 인물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었다. 스물일곱 살의 신체 건강한 남성, 은둔 수재, 양지 음지에 고루 친구들이 있고 그를 지원하는 학계 거물들도 있었다.
“묘소에 가는 겁니다. 차로 네다섯 시간 정도 달려야 하는 곳이니 루크 씨는 여기서 기다리는 게 나을 겁니다.”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오고 갈 때 한 마디도 하지 않겠습니다.”
요즘 왜 이렇게 말을 안 듣지?
카이얀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무조건 네, 네, 하던 루크가 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한 마디도 안 할 것까진 없습니다. 그냥 가죠.”
어쩐지 루크에겐 늘 져 주게 된다. 사실 카이얀은 친구들에게도 그랬다. 저렇게까지 같이 가고 싶다는데 끝까지 무시하는 것도 좋지 않겠지. 대단한 장소도 아니고 그저 묘지일 뿐이다.
카이얀은 자동차 열쇠를 챙기고 밤에 걸칠 겉옷까지 손에 들었다. 늦봄이지만 아직까진 밤에 조금 쌀쌀하다. 루크에게도 겉옷을 가져오라 했더니, 루크는 혹 카이얀이 그 사이에 가 버릴까 두려웠는지 정말 1분 만에 옷을 챙겨 뛰어 내려왔다.
“점심은 차에서 먹게 될 것 같은데. 패스트푸드 먹어 본 적 없죠?”
카이얀은 부러 가볍게 말하고 앞장섰다. 루크는 카이얀과 같이 간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그 뒤를 따랐다. 카이얀은 그런 루크를 흘끗 돌아보고, 오래 차를 타다가 그가 멀미를 하면 어쩌나 잠시 걱정했다.
- 다른 게 아니라, 이제 곧 부모님 기일이지 않나. 그때 잠시 들러도 좋을까 해서 전화했다네.
만약 카이얀이 밀리엄 장군의 말을 상기했다면, 그때라도 루크를 집에 머물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카이얀은 차를 몰고 가는 다섯 시간 내내 밀리엄 장군의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저 중간에 묘소에 바칠 꽃을 사고, 핫도그의 자극적인 맛에 놀란 루크를 보고 즐거워했을 뿐이다.
대부분의 소설에서 우연은 달가운 존재가 아니다. 우연은 늘 원치 않을 때 발생해, 일을 원치 않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법이었다. 그리고 카이얀은 작가들이 우연을 그런 식으로 배치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 실제 삶에서도 우연은 자기가 원치 않거나 예상치 못했을 때만 발생하니까.
“밀리엄 장군님.”
디로렌스 주 앤더슨 공동묘지, 양친의 묘비 앞에서 막 돌아서는 거구의 사내를 봤을 때 카이얀은 그냥 딱 뒤돌아서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눈까지 마주쳤는데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 카이얀. 자네랑 마주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네.”
살짝 목례해 보이자 밀리엄 장군도 인사를 되돌렸다. 군복 차림이었는데, 묘비 앞에서 모자를 벗었다가 아직 쓰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때 루크가 뒤에서 척 경례를 붙였다. 카이얀은 신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이 분위기에서 경례라니, 아무리 훈련된 군인이라고 해도……. 카이얀에게 무어라 말하려던 밀리엄의 시선이 루크에게 닿았다.
“아.”
설마 여기서 경례를 받을 거라곤 생각 못 했는지 그의 반응은 조금 늦었다. 그러나 장군은 곧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루크에게 경례를 돌려주었다. 카이얀은 이게 무슨 우스운 일인가 싶었다.
“일행인가? 새로운 친구인가 보군.”
손을 내리며 밀리엄이 물었다. 복잡하게 설명하고 싶지 않아, 카이얀은 그냥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만난 거 식사라도 같이 하겠나?”
지난번에 통화했을 때 일이 있다고 핑계를 댔으나, 이렇게 딱 만난 이상 거절하는 것도 난처했다. 카이얀은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기다려 주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일행이 동석해도 괜찮으실지?”
“자네만 괜찮다면 나도 상관없네.”
“네, 그럼 잠시.”
카이얀은 밀리엄을 지나쳐 묘비 앞까지 갔다. 루크는 카이얀이 보지 않을 때 밀리엄 장군을 경계의 눈으로 살피다가 그와 딱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루크는 제 몸이 확 굳는 걸 느꼈다. 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곧 밀리엄 장군이 먼저 표정을 풀고 빙긋 웃었다. 그제야 루크는, 그도 자기를 경계하고 관찰했음을 깨달았다.
“루크 씨.”
카이얀이 멈춰 있는 루크를 불렀다. 루크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카이얀 뒤에 붙었다.
카이얀은 루크를 묘비 앞까지 끌고 올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흘끗 돌아봤을 때 루크와 밀리엄이 좀 이상해 보여, 반사적으로 루크를 부르고 말았다.
“불편하면 차에서 기다려도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같이 있겠습니다.”
루크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상대는 군인이다. 카이얀을 적대하고 있진 않지만, 루크는 불안했다. 무엇보다도 자기를 살피던, 사람을 꿰뚫는 듯 날카롭던 그 눈빛이 불안했다.
카이얀은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생각하며 묘비 앞까지 걸어갔다. 루크를 데려온 것도 예상 밖의 일이었는데, 하필이면 밀리엄 장군까지 만나고 말았다. 그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반가운 얼굴도 아니었다.
버나드 아이사트.
라냐 아이사트.
카이얀은 묘비에 적힌 두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열일곱, 부모와 헤어졌다. 그땐 스스로가 꽤 어른스럽다 여겼는데, 지금 돌아보면 한없이 어린 나이였다. 설마 저에게 그런 끔찍한 일이 생길 거라곤 상상조차 못한.
십 년이 흘렀다. 이제는 묘비 앞에 서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열일곱에 마음껏 울었을 것이다. 그땐 울지 않는 게 강한 거라고 생각해서, 혼자 남았으니 버티기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울음을 참았다. 그마저도 돌이켜 보면 어린애의 치기다.
카이얀은 미리 준비해 온 나리꽃을 비석 앞에 내려놓았다. 어머니가 좋아한 꽃이다. 어머니는 참 성실한 사람이었는데, 이런 면에서조차 반전이란 게 없었다.
이제는 풍화되고 미화된 기억이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어머니에게 나리꽃을 선물하곤 했다. 아버지는 나리꽃을 좋아한 게 아니라, 그 꽃을 보고 기뻐하는 어머니를 좋아했다.
꽃을 내려놓으면서, 밀리엄 장군이 내려놓았을 게 분명한 흰 장미를 보았다. 눈을 한 번 의식적으로 감았다 떴다. 점심때가 조금 지난 애매한 시간, 맑은 날이었다.
카이얀은 돌아섰다. 루크는 흘끗 카이얀이 머물던 자리를 보고 이내 그 뒤를 따랐다.
밀리엄 장군과의 식사는 언제나 비슷했다. 둘은 서로에게 그리 반가운 사이가 아니었고, 기껏해야 1년에 한 번 만나 식사를 함께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조금 달랐다. 둘 사이에 루크가 있었던 것이다.
“친구를 데려올 줄은 몰랐네. 처음 보는 얼굴이군.”
밀리엄 장군은 부드럽게 나이프를 움직이며 말했다. 카이얀은 그의 말을 어디서부터 정정해 줘야 할지 몰라서 잠시 사이를 두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이쪽은 루크라고 하고, 나이란 캠벨 박사의 연구소 출신입니다. 루크 씨, 밀리엄 장군님입니다.”
밀리엄은 4성 장군으로 육군을 거의 총지휘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루크도 육군 소속이었지만 루크에게 있어 소속이야 형식적인 것이었다. 루크에게 자주 지시를 내리던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 당연히 루크와 밀리엄 장군은 만난 적이 없었다.
“캠벨 박사의 연구소라면, 얼마 전에 폐쇄된 거길 말하는 건가?”
“네.”
대답해 놓고도 카이얀은 깜짝 놀랐다. 앞서 말했듯 밀리엄은 4성 장군이다. 이런 사소한 일까지 알고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나이란 캠벨 박사의 연구소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 연구소의 총 책임자가 나이란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연구소 이름을 몰라 그렇게 얼버무린 것인데, 밀리엄이 바로 알아차리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연구소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까?”
“아, 이번 정권에서 꽤 주시하던 곳이라네. 자네도 알겠지만 이번 정권과 지난 라투르 정권은 노선이 조금 다르지 않나. 사바튼 연구소는 라투르 정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던 곳이라 말이 많았으니, 소속된 주요 연구원들 이름 정도는 외우고 있지.”
나이란의 연구소 이름이 사바튼이었던 모양이다. 카이얀은 그러려니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밀리엄 장군이 갑자기 루크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그래… 그 연구소 출신이란 거군.”
어쩐지 심상치 않은 어조였다. 카이얀은 자기도 모르게 바짝 긴장했고, 루크도 마찬가지였다. 루크는 타인의 시선이 자기에게 머물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예민했다. 전장에서 쌓은 감각이었다.
밀리엄 장군이 노골적으로 훑어보자, 루크는 나이프와 포크를 쥔 손에 꽉 힘을 주었다. 밀리엄 장군이 위협적인 행동을 한다면 당장이라도 반격할 준비를 하고선.
“밀리엄 장군님.”
보다 못한 카이얀이 불편한 어조로 끼어들었다.
“제 친구입니다.”
“내 입으로 이렇게 말하면 좀 뻔뻔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어쩔 수 없겠군. 자네가 군인 출신 친구를 사귈 줄은 몰랐네.”
아까 루크가 경례한 일을 기억하고 하는 소리였다. 그러나 카이얀은 동요하지 않았다. 군인인 것은 이미 알고 있다. 알고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언제까지 과거의 일을 들먹이며 특정 직업군의 모두를 막연히 적대시할 것인가. 이제 그는 열일곱이 아니었다.
“놀라시는 건 자유지만 간섭은 필요 없습니다.”
“그래, 물론 자네의 사교 생활에 간섭하겠다는 건 아닐세. 다만 사바튼 연구소는 여러 혐의를 쓴 채였다는 걸 말해 줘야겠군. 현 정권은 그 혐의들을 입증해 내지 못했어. 반인권적인 인체 실험에 대한 혐의가 가장 중대했다네. 그런 사바튼 연구소 출신 군인이라면 짚이는 게 있는데… 내 짐작이 맞나?”
카이얀은 저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나이란의 이름을 꺼내는 게 아니었다. 설마 이 자가 연구소에 소속된 박사들 이름까지 전부 꿰고 있을 줄은 몰랐다. 카이얀은 밀리엄 장군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말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카이얀은 거의 본능적으로, 밀리엄이 루크의 실험에 대해 단편적으로나마 알고 있음을 눈치챘다.
상대는 육군 장군이다. 군인인 루크의 신병에 대해서, 우선권을 갖는 건 당연히 저쪽이다. 저 자가 사바튼 연구소의 혐의를 입증하겠다고 하며 루크를 요구한다면, 카이얀으로선 그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나이란에게 했던 것처럼 어설픈 위협으로 상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카이얀은 순순히 져 줄 생각이 없었다. 카이얀 옆에 앉은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루크였다. 때문에 카이얀은 다시 반복했다.
“제 친구입니다. 지나친 관심은 거절하겠습니다.”
단호한 목소리였다. 밀리엄 장군은 한동안 카이얀을 응시하다가, 다시 루크를 보았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던 그는 이내 고개를 한 번 젓더니 한숨처럼 말했다.
“자넬 걱정해서 하는 얘기라네.”
“마음은 감사하지만 장군님의 걱정은 필요치 않습니다.”
“사바튼 연구소는 꼬리를 자르고 달아나 버렸지만, 그 배후들은 여전히 건재해. 그들이 자네 친구의 신병을 요구하면 어쩔 텐가.”
“말씀대로 그들의 주요 혐의와 관련된 사람입니다. 요구할 수 있을 리 없습니다.”
“증거를 폐기하기 위해 강제로 빼앗아간다면?”
카이얀은 입맛이 뚝 떨어져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한마디 거칠게 내던질 말을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는데,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밀리엄 장군의 얼굴을 보자 한숨부터 터져 나왔다.
“거기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을 걸세. 자넨 정직한 사람이니까.”
사실이라 할 말이 없었다. 카이얀을 혼란에 빠뜨려 놓고, 장군은 태연하게 식사를 이어 갔다.
“내 충고를 잊지 말게. 나라를 지키는 군인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가끔 중요한 것을 지키기 위해 더 강한 권력에 기댈 필요도 있지.”
이 사람과 마주치지 않았다면 좋았을걸. 카이얀은 그렇게 생각했다. 옆에는 두 사람의 대화를 거의 알아듣지 못한 루크가 앉아 있었다. 길지 않은 식사를 마치고 밀리엄 장군과 헤어지며, 카이얀은 물끄러미 루크를 바라보았다.
증거 폐기. 그래, 정치권력이 생각해 낼 만한 짓인 것 같긴 하다. 그렇다고 ‘아, 그러십니까.’하고 내줄 생각은 절대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차에 올라서도 한동안 자기만 바라보는 카이얀이 의아했던지, 루크가 물었다. 카이얀은 그에게 무언가 설명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뭘 어떻게 말해 줘야 할지 몰라서,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으로선 아무 일도 없길 바라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 * *
집에 돌아온 카이얀은 생각할 것이 많았다.
부모님의 묘 앞에서 엉엉 울 시기는 지났지만, 그렇다고 마냥 태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안 그래도 심란한 시기인데 루크 일까지 신경을 쓰자니 머리가 아팠다. 저녁까지 먹고 온 길이라 밖은 이미 캄캄했다.
“피곤해서 먼저 자러 가겠습니다.”
열 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카이얀은 자러 갈 생각이었다. 루크는 좀 당혹한 것 같았지만 곧 안녕히 주무시라고 인사하고 제 방으로 올라갔다. 도착하자마자 대강 몸을 씻은 카이얀은 오래 운전해 뻑뻑해진 눈을 문지르며 침실로 갔다.
“자네가 군인 출신 친구를 사귈 줄은 몰랐네.”
밀리엄 장군의 말이 떠올라, 침대에 누운 채로 픽 웃었다. 자기도 몰랐다. 아마 머독이나 지그문이 알면 그들도 무척 놀랄 것이다. 전부 나이란으로부터 시작된 일이라는 걸 알게 되면 아예 뒤로 넘어갈 것이고.
카이얀은 자기가 깊은 고민 없이 루크를 맡았다는 걸 인정했다. 루크를 보내기로 결심했을 때 루크는 발작하다 의식을 잃었고, 나이란이 루크를 맡기랍시고 불러 준 건 웬 시골 물류 창고 주소였다. 그 상황에서 카이얀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딱 한 가지였다.
그날을 기점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변했다. 카이얀은 루크를 경계하고 밀어내는 걸 그만두었다. 루크 같은 사람을 마음에 들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알고 있었지만 마음은 바구니 같은 게 아니어서 마음대로 사람을 넣었다 뺐다 할 수 없는 법이었다.
“사바튼 연구소는 꼬리를 자르고 달아나 버렸지만, 그 배후들은 여전히 건재해. 그들이 자네 친구의 신병을 요구하면 어쩔 텐가. 증거를 폐기하기 위해 강제로 빼앗아 간다면?”
카이얀은 오래 뒤척였다. 어쩐지 불편하게만 느껴지는 잠자리에서, 그는 루크를 걱정했다. 그리고 루크를 걱정하는 자기 자신의 마음에 놀랐다. 밤은 더디 갔고 그날 꿈자리는 더없이 사나웠다.
* * *
카이얀은 넋 놓고 앉아 닥쳐올 위험을 기다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도움이 되어 줄 수 있는 몇 사람이 있었다. 카이얀은 아침에 루크와 함께 산책하며 리스트를 정리해 보았다. 좋은 친구들, 자기에게 순수한 호의를 가진 각계 저명인사들…….
“무슨 고민이 있으십니까?”
루크는 점심을 먹다가 문득 물어왔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샐러드를 먹던 카이얀은 양상추를 오리엔탈 소스에 빠뜨리고 말았다.
“어, 아뇨. 별로 그렇진 않은데요.”
“아침부터 계속 말이 없으셔서 걱정했습니다.”
이제 웬만한 단어도 무리 없이 구사해 내는 루크를 보다가 카이얀은 그냥 고개만 저었다. 루크에게 대놓고 말하는 것도 우스웠다.
“오늘 잠시 학교에 가 볼까 합니다.”
“학교 말씀이십니까?”
루크의 눈이 반짝였다. 아, 그러고 보니 학교란 걸 책으로만 접했을 뿐 실제로 본 적은 없겠지. 카이얀은 고개를 끄덕이며 루크의 시선을 피했다. 평소라면 그냥 데려갔겠지만, 목적이 있어서 가는 것이다. 루크를 데리고 가지 않는 게 좋을 듯했다.
“모시고 가겠습니다.”
“아뇨, 혼자 가야 하는 일입니다. 루크 씨는 집에 있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했는데도 루크가 같이 갈 수 있다고 하자, 카이얀은 아예 단호하게 그의 말을 잘라 버렸다.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어젠 같이 갈 수 있었지만 오늘은 정말 곤란합니다.”
카이얀이 정색을 하자 루크는 약간 기가 죽은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 사람도 슬슬 친구를 사귀는 게 좋을까, 그런 맥락 없는 생각이 들었다. 오직 자기 반응에만 매달려 저러는 걸 보고 있자니, 심리학 책 같은 소리지만 루크에게도 건강한 사회적 유대감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루크를 사교 클럽 같은 곳에 데리고 나갈 순 없었다. 카이얀은 풀이 죽은 루크를 달래 주기 위해 다른 말을 꺼냈다.
“오늘, 연구실에 있어도 됩니다. 컴퓨터가 거기 있으니까, 영화라도 보고 있으면 좀 낫겠네요.”
“하지만 제 청력 때문에…….”
“컴퓨터로 보는 건 그렇게 소리 안 커요. 내가 어떻게 보는지 알려 줄 테니까 골라서 보면 될 거고.”
그래, 밖에 내보낼 수 없다면 인터넷이라도 알려 주자. 그게 좋을 것 같았다.
카이얀은 루크를 데리고 연구실로 갔다. 그러고 보니 루크가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여기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지 싶었다. 카이얀은 불을 켜고 루크를 책상 앞으로 데려갔다.
“그 의자에 앉아서, 옆에 네모난 박스 같은 거 있죠? 거기 동그란 버튼 누르면 컴퓨터가 켜지는 겁니다.”
카이얀은 루크가 앉은 의자 뒤에 선 채 루크에게 컴퓨터를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 주었다. 웹 사이트에 접속해 일정 기간 모든 영화를 무제한으로 볼 수 있는 정기권까지 결제했다.
“이건 마우스라는 건데, 이걸 이렇게 움직이면 설명을 볼 수 있고요. 클릭해서 이 버튼을 누르고 좀 기다리면 영화가 나오고… 여기 이 네모난 걸 누르면 화면이 커집니다. 한 번 해 봐요.”
카이얀은 혹시 몰라 영화 정렬을 인기순으로 바꿔 주었다.
연구소에서 사용하는 컴퓨터는 본 적 있겠지만, 아마 루크는 키보드나 마우스를 만져 보는 것 자체가 처음일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사용법을 알려 주는 건 번거롭고 피곤한 일이었다. 이렇게까지 마음을 썼지만, 루크는 그리 기쁜 것 같지 않았다. 카이얀을 따라가는 게 더 좋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안쓰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대가 덩치만 큰 어린애인 건 사실이지만, 지금 굳이 저가 졸업한 대학교까지 찾아가려는 건 후일 루크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냥 될 대로 돼 버려라 하고 손을 놓기엔 이미 늦었다. 루크는 더 이상 타인이 아니었다.
“저녁 먹고 올 거니까, 배고프면 냉장고에서 뭐라도 꺼내 먹고요. 할 줄 알죠?”
마음이 약해져서 좀 부드럽게 타일렀다. 루크는 그 이상 조르지 않고 그저 알겠다는 대답만 꺼내 놓았다. 얌전한 모습이 안타깝고 미안해서, 카이얀은 의자에 앉은 루크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그 손길에 용기를 얻었는지 곧 루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왔다.
“차 운전하는 법, 가르쳐 주시면 배우겠습니다.”
“배우고 싶어요?”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싶어 물었더니 꽤 진지한 대답이 돌아왔다.
“네. 배우면 밖에 나가실 때 제가 운전해서 모시겠습니다.”
카이얀은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루크가 믿지 않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운전을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 좀 위험하긴 하지만 루크의 감각은 뛰어난 편이고, 약효가 전부 떨어진다 해도 훈련으로 다듬어온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니까. 운전해도 덤벙대다 실수하는 일은 없겠지 싶었다.
“배우고 싶으면 나중에 알려 주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소리는 이걸로 조절하고요. 문까지 나올 필요 없습니다. 그냥 앉아서 맘에 드는 거 골라 봐요.”
카이얀은 연구실 밖으로 나가는 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루크의 시선을 느꼈지만, 더 해 줄 말이 없었다. 분리불안을 앓는 개의 치료 훈련도 아니고.
어쩐지 좀 진이 빠졌다. 루크가 마음에 걸렸지만, 그 짧은 사이에 별일 있겠나 싶었다. 그 이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았더라면, 카이얀은 절대 루크에게 영화 따위를 골라 보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 * *
카이얀이 대학을 졸업할 때, 그의 학부 교수들 열 명이 학교에 눌러 앉으라고 권했다. 열 명이었는지 열한 명이었는지 카이얀은 사실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한두 해만 부교수로 있으면 곧 정식 교수가 될 것이고, 또 그렇게 오륙 년만 지나면 새로운 곳으로 나갈 길도 자연 열린다는 말을 수십 번은 들었다.
그러나 카이얀은 모든 충고를 감사히 들었을 뿐 실제로 학교에 남지는 않았다. 가르치는 것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연구 성과가 뛰어난 것과 남을 잘 가르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한 곳에 묶여서 사람들과 복작대는 것이 싫었다.
“그때 자네가 학교에 남겠다고 한마디만 했어도.”
나이 지긋한 홀튼 교수는 아직도 그 소리였다. 아쉬워서 하는 말임을 모르지 않아 카이얀은 그저 웃으며 술을 마셨다.
학교 근처 호화 레스토랑, 다섯 명의 교수들이 그 자리에 모여 있었다. 학교에 가기 전에 그저 간다는 사실만 알리기 위해 연락했는데, 갑자기 이런 자리가 마련되어 버렸다.
집에 들어가는 시간이 늦어질 것 같아 조금 초조했다. 하지만 카이얀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를 하고 술을 마셨다.
“지난번에 머독 군과 사진 찍은 거 봤네. 인터넷에서 또 한바탕 난리더군.”
“요즘은 인터넷 볼 일이 없어서요. 잠잠해지겠죠.”
“난 또, 자네가 갑자기 먼저 연락하기에 그 일 때문에 무슨 마음의 상처라도 받았나 걱정했지 뭔가.”
그리 우스운 얘기도 아니었는데, 마음의 상처라는 그 미묘한 어감 때문에 교수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카이얀도 유연하게 받아 넘겼다.
“그럴 리가요. 그 정도 일로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긴 하지. 그래도 자주자주 연락하고 그러게.”
못마땅한 듯 혀를 차는 사람도 분명 있었다. 제자들 중 특출한 수재인 카이얀을 아끼면서도, 도저히 먼저 연락할 줄 모르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의심하게 하는 태도는 못마땅한 것이다. 까다로운 사람이라 카이얀은 그저 사과하고 넘어갔다.
어떻게 말하든 좋은 은사님들이었다. 먼저 안부라도 묻는 일이 없다 책하면서도, 오랜만에 카이얀이 학교에 왔다니 단번에 달려 나온 사람들인 것이다. 카이얀은 고마움과 안도를 함께 느꼈다.
자리가 파하고 카이얀은 홀튼 교수와 둘이 남게 되었다. 주차장까지 함께 내려갔는데, 홀튼 교수가 카이얀을 보고 은단을 씹으며 물었다.
“무슨 일 있는 게로군.”
“예?”
“표정이 그래. 밥도 술도 편히 못 넘기던데, 무슨 일인가? 저기선 못 할 얘기였나?”
“아닙니다…….”
속을 간파당하자 갑자기 학생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카이얀은 깊이 주름진 홀튼 교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연륜은 무시 못 한다는 걸 이럴 때 느낀다.
“이트나 교수가 이번에 의원 선거에 당선됐다네. 알고 있었나? 그 일 때문에 요즘 정신없이 바빠서 오늘도 못 온 거고.”
“네, 소식 들었습니다.”
“그래.”
뜻 모를 소리만 하고 홀튼 교수는 먼저 차 문을 열었다. 카이얀은 그가 떠나는 걸 보기 위해 옆에 서 있었는데, 홀튼 교수가 차에 오르기 전에 카이얀 쪽으로 슥 시선을 돌렸다.
“사람은 써먹으라고 있는 걸세.”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뜨끔했다. 홀튼 교수는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은 채 말을 맺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게. 난 요즘도 늦게까지 학교에 있다네.”
카이얀은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이렇게 말해 줄 줄은 몰랐다. 스스로도 꽤 뻔뻔하단 자각은 있었다. 스승은 친구와는 좀 다르다. 머독이나 지그문에겐 정말 아무 때나 연락해서 도와 달라 해도 되지만, 이건 경우가 다른 것이다. 그런데도 홀튼 교수가 선뜻 그렇게 얘기해 주자 몹시 반갑고 고마웠다.
“감사합니다.”
좀 더 세련된 말을 할 줄 안다면 좋을걸. 카이얀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홀튼 교수는 개의치 않았다. 짧은 작별 인사를 남기고 그는 먼저 차를 출발시켰다.
카이얀도 제 차에 탔다. 시간을 보니 벌써 열 시였다. 자리가 길어져 술자리까지 이어진 탓이었다. 다섯 시쯤 모였는데도 이 시간이라니……. 낭패감이 들어 카이얀은 허둥지둥 시동을 걸었다.
* * *
다행히 집은 멀쩡했다. 거실에 불이 꺼져 있는 것만 빼면.
“루크 씨?”
탁, 거실에 불을 켜니 밥을 먹은 흔적이 전혀 없었다. 혹시 설거지를 해 놓은 건가 싶어 살펴보기도 했지만, 이건 아예 냉장고 자체를 안 연 거다. 카이얀은 좀 답답해지고 걱정이 되기도 해서 루크 방으로 올라갔다.
“루크 씨, 안에 있습니까?”
불렀는데 대답이 없었다. 보통 부르면 바로 문을 열고 나오는데. 카이얀은 혹시 자나 싶어 조용히 문을 열어 보았지만, 방 역시 캄캄할 뿐 루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아직도 연구실에 있나?
카이얀은 얼른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노크도 잊고 바로 문을 열었다. 컴퓨터 앞부터 살폈는데, 루크는 거기에도 없었다. 당혹해서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가에 서 있는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났다.
끙끙대는 신음 소리였다. 카이얀은 가슴이 철렁했다. 어딜 다쳤나. 혹시 그 사이에 누가 와서 공격했나. 총이라도 맞았으면 어떡하지. 그래도 루크 씨가 아직 여기 있으니 잡으러 온 사람들을 처리했을지도.
생각은 마구잡이로 달려 나가 순식간에 바닥에 시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닿았다. 다행히 피 냄새 같은 건 조금도 나지 않았다. 아니, 목을 꺾어 죽였을지도……? 부질없는 추측을 하며, 카이얀은 천천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루크 씨.”
루크는 연구실 구석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책장을 손으로 짚었는지, 책이 몇 권 바닥에 떨어진 게 보였다. 연구실도 어두컴컴해서 카이얀은 일단 불부터 켜려고 했는데, 갑자기 루크가 덥석 카이얀의 손목을 붙잡았다.
“로스터드 씨…….”
손목을 감은 루크의 손이 몹시 뜨거웠다.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외출복 차림이던 카이얀은 깜짝 놀라 불 켜는 것도 잊고 루크 옆에 몸을 낮춰 앉았다.
“왜 그럽니까, 어디 다쳤어요? 아니면 열이 나나?”
손을 뻗어 루크의 이마를 짚었는데, 열이 있나 없나 가늠해 보기도 전에 그가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카이얀의 손목은 놓지 않은 채라 엉겁결에 카이얀은 균형을 잃고 끌려가고 말았다.
“이상… 뭔가, 이상합니다…….”
루크는 필사적으로 몸을 추스르려 했지만, 마치 한기가 드는 것처럼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카이얀을 단단히 붙든 채 루크는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이, 이거 뭐… 뭔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루크 씨, 진정하고 나한테 기대요. 또 아파요? 왜 이렇게 몸이 뜨겁지?”
카이얀은 일단 루크에게 팔을 뻗었다. 모로 웅크린 채 팔만 뻗어 카이얀을 잡고 있는 모양이었는데, 카이얀이 다른 손으로 웅크린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가까이 했다.
무슨 일이지. 대체 뭘까.
카이얀은 일단 전처럼 루크의 등을 제게 기대게 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루크의 몸이 앞으로 기우뚱하더니 카이얀 쪽으로 쓰러졌다.
“윽!”
그대로 뒤로 밀려날 뻔한 카이얀은, 곧 더 큰 당혹감에 휩싸여야 했다.
어느새 루크가 제 양 팔뚝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루크 쪽이 키가 커서 이렇게 가까워지니 카이얀이 올려다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루크의 눈은 어둠 속에서 보기에도 몽롱하고 뜨거웠다. 눈가가 발갛게 된 것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 생각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힘겨운 듯 루크가 툭 고개를 떨어뜨렸다. 뜨거운 이마가 카이얀의 어깨에 닿았다. 루크는 그러고 한동안 신음을 삼키기 위해 애를 썼다.
“저 좀…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간신히 중얼거리던 루크는, 마침내 한계에 달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입술이,
카이얀의 목에 닿았다.
카이얀은 너무 놀라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루크는 그저 부숴 버릴 듯 카이얀의 양팔을 세게 쥔 채, 본능을 찾아 서툴게 움직였다. 루크는 오랜 갈증을 겪은 사람처럼 카이얀의 목에 연거푸 입을 맞추더니, 마치 그것만이 해갈의 길이라는 듯 흰 목덜미를 꽉 물었다.
“아…….”
루크가 달게 한숨을 뱉었다. 제 잇자국이 난 곳을 핥으며, 루크는 카이얀을 더 바짝 끌어당겼다.
묵직해진 루크의 중심이 제 허벅지에 닿았을 때, 카이얀은 그만 딱 기절해 버리고 싶었다.
“루크 씨, 저리로 좀…….”
간신히 팔을 뻗어 밀치려는데 팔뚝이 확 아팠다. 루크가 더 강하게 움켜쥔 모양이었다. 카이얀은 신음을 삼켰다.
이게 뭐야?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카이얀은 고함도 칠 수 없을 정도로 굳어 버렸다. 그는 거의 패닉 상태였다. 그에게 있어 루크는 그냥 키 183센티미터의 일곱 살 어린애였던 것이다.
루크의 입술이 점차 위로 올라왔다. 아이처럼 귓불을 물었을 땐 정말 기겁했다. 이러다간 정말 키스라도 해 올 것 같았다. 카이얀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혼란에 빠져 있을 때, 거부의 움직임을 느낀 루크가 애원하듯 귓가에 속삭였다.
“이상해… 이상합니다, 로스터드 씨…….”
아니, 안 이상해.
당신 지금 즐기고 있잖아!
“떨어져요!”
카이얀이 확 그를 밀쳤다. 일생이 훈련이었던 루크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카이얀도 약한 편은 아니었다. 방심하고 있던 루크는 그대로 손을 놓치고 뒤로 밀려났다. 카이얀은 거의 뒤로 넘어지다시피 한 루크가 비척비척 고개를 들었을 때야 어느 정도 냉정을 찾을 수 있었다.
“루크 씨, 대체 갑자기 왜…….”
카이얀은 일단 벌떡 일어나서 루크와의 거리를 벌렸다. 문가까지 훌쩍 물러났다. 루크가 일어나서 다가오는데, 걸음걸이가 불안정했다. 시야가 흔들리는지 아니면 몸을 지탱하기 어려워서인지, 벽까지 짚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 아픈 줄 알겠다. 카이얀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일단 연구실 밖으로 도망쳤다.
내가 왜 내 집에서 도망 다녀야 하는 거지?
피곤했던 카이얀은 왈칵 짜증이 치밀었다. 카이얀은 일단 거실로 나와 상황을 판단해 보려 했다.
그래, 영화를 보고 있으라고 했지. ‘재미있다’는 개념 자체를 잘 이해 못 하던 사람이니, 일부러 인기순으로 정렬까지 해 줬다. 그런데 왜 갑자기…….
아.
카이얀은 뭔가로 호되게 얻어맞은 듯 정신을 차렸다.
아, 나 왜 그랬지. 인기순 정렬이라니, 당연히…….
게다가 성인 인증까지 한 아이디로 정기권까지 결제했으니 말 다 한 셈이다.
하지만 루크의 행동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스물일곱인 자기와 나이가 비슷할 텐데, 어떻게 성적인 흥분을 이해 못하고 저렇게…….
몰라도 혼자 자위라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건 거의 본능… 아니, 이게 아냐. 카이얀은 두서없이 밀고 들어오는 생각을 떨쳐 버렸다.
지금 중요한 건 상황 파악이 아니다. 상황을 알면 어쩔 건가. 지금 이걸 어떻게 해결할지가 문제였다.
생각, 생각을 하자. 아…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액션 영화 카테고리에 고정시켜 놓고 가는 건데. 아니, 액션 영화에도 그런 장면이 종종 있던가. 다큐멘터리나 보라고 할 걸. 아니, 그러다가 임신과 출산 이런 다큐멘터리라도 클릭했다면? 그냥 ‘지구와 바다’ 이런 거나 틀어 주고 무한히 돌려 보게 할 걸 그랬다.
너무 당황해서인지 자꾸 생각이 샜다. 카이얀이 어쩔 줄 모르고 거실을 서성일 때 루크가 간신히 따라왔다. 카이얀은 자기도 모르게 식겁해서 확 뒤로 물러났다.
불부터 켜자. 밝아지면 좀 이성을 찾을지도 몰라.
카이얀은 루크가 어두운 곳에서도 밝게 볼 수 있는 비정상적인 눈을 가졌다는 걸 잊고 스위치를 눌렀다.
“루크 씨, 그만. 그냥 거기 있어요.”
루크는 카이얀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 듯, 혹은 너무 크게 들려 뜻을 파악할 수 없는 듯, 인상을 쓰고 고개를 저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갑자기 묘안이 떠올랐다. 지그문. 지그문이 있다.
카이얀은 허둥지둥 핸드폰을 꺼냈다. 지그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밤에 영업하는 녀석이라 전화를 받을까 걱정스러웠는데, 다행히 저쪽에서 금방 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 카이얀!
“야야야, 야, 야, 지금… 너 시간 괜찮아?”
- 뭐야? 무슨 일이야? 왜 그러는데, 강도라도 들었어?
“아냐, 아냐, 지금 그런 게 문제가 아니고, 야, 어떻게 해야 되지?”
- 너 왜 그러는데? 진정하고 제대로 설명을 해. 지금 급해? 도와줄 사람 보낼까?
사실 카이얀은 지그문의 말을 반쯤 듣지 못했다. 루크가 소파를 짚었다가 손이 미끄러져 쾅 넘어진 것이다. 카이얀은 허둥지둥 루크를 일으켜 세우러 달려가다가 우뚝 멈추었다.
정신 차려라, 카이얀… 상대는 지금 10대 중반의 청소년들이나 겪는 격렬한 성적 욕망에 휩싸인 군인이라고…….
스스로를 책망하며 카이얀은 일단 됐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생각해 보니 어린애처럼 친구에게 전화를 걸 일이 아니다. 지그문이 매춘 사업을 하고 있으니 도움을 받을까 했지만, 루크에게 매춘부를 붙여 줄 수는 없었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사이, 루크가 카이얀 앞까지 와서 그를 안으려다가 중심을 잃고 무너졌다. 그대로 카이얀의 허리를 껴안으며 루크가 개처럼 고개를 비볐다.
“이상해, 이상해… 아파, 뜨거워, 아파, 이상해…….”
단편적인 단어들만 띄엄띄엄 뱉으며 루크가 잔뜩 매달려 왔다. 카이얀은 미칠 것 같았다. 루크가 이해 안 가는 건 아니다. 이런 일이 처음이라면 당혹스러울 수도 있지. 대체 왜 처음인진 모르겠지만.
하지만 루크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와 키스해 줄 순 없었다. 그 이상의 건 말할 것도 없고. 카이얀이 이런 선까지 어영부영 동정심에 휩쓸려 넘어 버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지금 루크는 별로 불쌍해 보이지도 않았다.
“떨어지라고요.”
카이얀은 한숨처럼 말하고 루크의 어깨를 잡았다. 아까처럼 밀어 버릴 생각이었는데, 루크는 생각 외로 단단히 카이얀의 허리를 안고 있었다. 바닥에 무릎을 댄 채 끌어안고 있어서 쉽게 넘어지지도 않을 자세였다.
우뚝 선 채 루크의 상기된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카이얀은 제 허리 뒤로 손을 돌렸다. 있는 힘껏 루크의 손목을 잡아 허리에서 떨쳐 버렸다. 곧바로 루크를 거칠게 밀었다.
루크가 휙 뒤로 넘어졌다. 카이얀이 거실 밖으로 뛰쳐나가려는데, 루크는 상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움직였다. 재빨리 카이얀의 손목을 잡은 루크가 말도 못할 힘으로 카이얀을 죽 끌어당겼다.
근육질 운동 중독자는 아니었지만 한 번도 힘으로 남에게 휘둘려 본 적이 없는 카이얀은 그대로 루크에게 끌려갔다. 루크는 카이얀의 몸을 가볍게 움직여 그대로 소파에 처박았다. 루크가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너무 거칠게 밀쳐져 골이 찡 울릴 정도였다.
“가지 마십시오……. 이상하면, 꼭 말해야 된다고 하셔서…….”
루크는 여전히 열에 들떠 횡설수설하며 소파에 누운 카이얀을 제 팔 사이에 가두었다. 카이얀은 미치고 팔짝 뛰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대로 누운 채 키스당할 것 같았다.
카이얀은 너무 당황해서 일단 팔을 뻗어 루크의 가슴팍을 밀어내려 했다. 루크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아주 간단하게 카이얀의 양 손목을 한 손에 잡아 위로 치워 버렸다.
“놔요, 루크 씨. 지금 무슨 짓 하려는지 알기나 합니까?”
“몰라, 이상해…….”
이제 숫제 반말이다. 카이얀은 기가 막혔다. 그때 루크가 다시 카이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더니 강하게 지분거렸다. 단단해진 루크의 중심이 카이얀의 허벅지에 눌려 자꾸만 자극했다. 그쯤 되면 카이얀도 의지와는 관계없이 흥분할 법도 한데, 너무 놀라서인지 아무 감각도 없었다.
“로스터드 씨, 가만히…….”
아까 물고 빨던 곳을 계속 자극하던 루크가 위로 올라와 카이얀의 입술을 덮쳤다. 카이얀은 순간 머리가 하얗게 비는 것 같았다. 당연히, 루크는 키스하는 법을 전혀 몰랐고 어떻게든 혀를 카이얀의 입안으로 집어넣으려 애쓸 뿐이었다.
“웁! 웁웁으!”
카이얀은 입술이 눌린 채 소리를 냈고 옆으로 고개를 확 돌렸다. 그때 루크가 카이얀의 손목을 결박했던 손까지 가져와, 카이얀의 얼굴을 정면으로 단단히 고정했다. 손에 힘을 주어 뺨을 누르자 자연 입이 벌어졌다. 루크가 기다렸다는 듯 매끈하게 혀를 집어넣었다. 그러면서도 아래 자극이 부족한지 계속 허리를 움직였다. 카이얀은 제 얼굴을 붙든 루크의 손을 떼어 내려 하다가 마음을 바꿨다.
퍽!
카이얀이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왼손이고,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오른팔은 소파 등받이에 꽉 눌린 채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카이얀은 테크닉이라곤 하나도 없이 정말 정직하게 키스하는 루크의 혀를 깨물어 버릴까 찰나 고민했다. 그러다 그보다 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루크가 잠깐 허리를 들어 올렸을 때, 카이얀은 곧장 오른 무릎을 쳐올렸다.
쿠당탕, 루크가 왼편으로 확 넘어가 나뒹굴었다. 소파 앞 테이블에 부딪친 것인지 요란한 소리가 났다. 카이얀은 쓰러진 루크의 손목을 잡고 곧장 일으켜 세웠다. 루크는 정신을 못 차리고 끙끙대며 끌려왔다.
욕실까지 간 카이얀은 그대로 루크를 내던지다시피 떨쳐 냈다. 휘청 중심을 잃은 루크가 그대로 타일 위에 넘어졌다. 어찌어찌 반사적으로 바닥을 짚었는데, 너무 강하게 넘어졌는지 순간 손목이 시큰했다.
촤악!
루크가 아픔을 인지하기도 전에 갑자기 머리 위에서 물이 쏟아졌다. 카이얀은 수도꼭지를 최대한 냉수 쪽으로 돌린 채, 셔츠에 면바지까지 입고 있는 루크에게 물을 분사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카이얀이 물을 껐다. 루크는 갑작스러운 차가움에 약간 이성이 돌아온 상태였다. 그가 고개를 들어 카이얀을 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착 달라붙은 그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카이얀은 냉랭하게 물었다.
“정신이 듭니까?”
루크는 당연히 대답하지 못했다. 정신이 좀 든 것 같기도 하고, 안 든 것 같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루크는 카이얀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조금만 참으면 괜찮아질 겁니다.”
루크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카이얀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 얼굴이 정말 영문도 모른 채 찬물을 뒤집어쓴 순진무구한 아이 같아서 카이얀은 또 난감해졌다.
“그렇게 봐도 소용없습니다. 옷 갈아입고 열 좀 식혀요.”
카이얀은 차갑게 내뱉고 돌아섰다.
쾅.
욕실 문을 거세게 닫고 나니 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카이얀은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와서 손도 못 씻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러고도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 이상하게 욕실에서 기척이 없었다. 설마 쓰러진 건 아니겠지. 마구 다니다가 어디 머리라도 부딪친 건…….
카이얀은 일단 욕실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루크 씨? 루크 씨.”
다행히 타일 바닥에 쓰러진 건 아니었는지, 루크는 금세 문을 열고 나왔다. 찬물을 뒤집어써 비교적 멀쩡해진 그가 허둥지둥 말을 시작했다.
“로스터드 씨, 제가…….”
카이얀은 지금 그의 말을 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방으로 올라가세요. 시간이 지나면 나아집니다. 처음이라 놀란 것뿐이에요.”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딱 자르는 말이었다. 카이얀이 휙 돌아서려는데, 루크가 덥석 아까처럼 카이얀을 붙잡았다.
“죄송합니다, 제발 가지…….”
“루크 씨, 갑자기 몸이 변해서 낯선 거 이해합니다. 그 전엔 왜 이런 일이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자연스러운 겁니다. 위로 올라가서 참아 봐요. 아니면 그, 혼자 만져 보든지.”
카이얀은 일견 차분한 듯했지만 여전히 태도는 딱딱하고 냉정했다. 루크는 한마디도 덧붙이지 못했다. 뭔가 말하려고 하던 루크는 기죽은 얼굴을 한 채 욕실 밖으로 나갔다. 아까는 그렇게 불도저 같더니, 카이얀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마침내 조용해진 거실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이라도 치른 느낌이었다.
일단 샤워부터 해야겠다. 루크가 잔뜩 헤집은 입이 찜찜했다.
* * *
혼자 방으로 돌아간 루크는 덜덜 떨며 몸을 진정시키려 애써 보았다. 그는 자기의 변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문제는 카이얀이 나가고 난 후 네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부터 시작됐다. 카이얀은 아무 생각 없이 영화를 인기순으로 정렬했지만, 그건 정말 커다란 실수였다. 상위 두 개는 얼마 전에 개봉한 액션 영화였지만, 세 번째 영화는 성인물이었던 것이다.
성적 욕망에 얽힌 인간의 본질을 탐구한다며 나름대로 예술성을 강조한 영화였지만, 그거야 평론가들 이야기였다. 평범한 사람이 보기엔 그저 여러 가지 분위기로 연출한 베드신으로 점철된 영상일 뿐이었다.
당연히 루크는 화면 속 행위에 대해 몰랐다. 그는 일생 성욕을 억제당하며 살았고, 성욕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지냈다. 가끔 함께 작전을 수행하던 군인들이 음담패설을 입에 담을 때는 있었지만 전부 루크가 모르는 단어였다.
화면 속에서, 남자가 여자의 어깨를 붙잡고 거칠게 키스했다. 여자가 입술을 맞댄 채 자연스레 그를 끌어안았다. 남자는 바쁘게 여자가 입은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다가, 이내 마음이 급해진 듯 확 뜯어 버렸다. 단추 튀는 소리가 과장되어 울렸다. 여자는 스스로 블라우스를 벗어 버린 후 남자의 티를 머리 위로 벗겨 버렸다.
그 뒤 그들은 온갖 곳에서 행위를 계속했다. 침대, 욕실, 소파, 양탄자 깔린 바닥, 유리로 된 테이블, 나중엔 정원까지 나갔다. 영화로 만든 것이라 행위 자체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진 않았지만, 루크가 보기엔 지나치게 자극적인 영상이었다.
‘이상해…….’
아래로 피가 몰리는 기분이었다. 루크는 끙끙대며 일단 영상을 멈췄다. 그래도 이상할 정도로 뜨거워진 몸은 쉽게 식지 않았다.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걷는 것도, 몸을 웅크리는 것도 몹시 불편했다.
루크는 겁이 났다. 바로 화면에서 눈을 떼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통증이 시작되려는 건지도 모른다. 여긴 카이얀이 쓰는 곳인데, 이런 곳에서 팔다리를 휘저으며 발작하면 좋지 않을 것이다.
밖으로 나가야 해.
알면서도 루크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도저히 뭘 어째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눈 먼 것처럼 후각에 의존했다. 흥분 상태가 지속되자 시각보다 후각이나 청각이 더 예민해지는 듯했다.
카이얀의 냄새. 루크는 오래된 책장의 냄새 같은 것보다 카이얀의 냄새에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앞이 팽팽 도는 것 같아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그리고 카이얀의 체취가 밴 연구실 구석에 가서 바짝 웅크렸다.
그게 카이얀이 도착하기 30분쯤 전의 일이었다. 루크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이상해, 이상해, 어쩔 줄 모르고 그러고 있는데 나중에는 중심이 아파오기까지 했다.
어떻게든 자세를 편하게 바꿔 보려고 뒤척이다가 책 모서리에 중심이 닿았는데, 거기서 그대로 파정해 버리고 말았다. 비린내가 났다. 루크는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댔다.
이상해. 이상해…….
처음 맡아 보는 냄새였다. 루크는 그저 끙끙거리며 카이얀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비정상적으로 성에 무지하고 통증에 길들여진 루크로서는, 그저 이게 또 다른 형태의 발작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앞으로 뭔가 이상한 점이 생기면 바로 얘기해야 됩니다.”
말해야 하는데, 카이얀에게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럼 그가 해결해 줄 텐데…….
아니, 해결해 주지 못해도 좋았다. 그저 전처럼 안고 달래 주면 좋겠다. 이번엔 그렇게 아프게 물지 않을 텐데, 그 정도로 아픈 건 아닌데. 그저 몸에 열이 오르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안달이 나는 것뿐인데.
루크는 벌벌 떨리는 몸을 주체하려는 노력을 완전히 포기하고 무의식에 기대 생각을 이어 갔다. 지난번처럼 그의 체취를 가득 들이마시며 기대 있고 싶다. 물라고 내어 주는 팔은 희고 곧아서 아름다웠다. 거기까지 생각했는데 갑자기 아까 봤던 영화의 한 장면이 머리를 후려쳤다.
핥고 싶어…….
어지럽다. 몸이 너무 뜨거웠다. 불이 붙은 것 같았다. 진정하려고 카이얀을 떠올린 건데, 오히려 더 심해지고 말았다. 루크는 어찌할 수 없는 본능으로, 제 상상 속에서 마음껏 카이얀을 안고 그에게 키스했다.
루크의 상상은 철저히 영화에 기반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동성 간의 삽입에 대해 전혀 몰랐다. 때문에 그의 상상은 온통 키스와 애무로만 점철되었다.
한 번만 입을 맞출 수 있다면 살 것 같았다. 동화 속에서, 왕자가 백 년간 깨어나지 못한 여자에게 키스하던 것이 떠올랐다. 카이얀이 키스해 준다면, 그가 안아 준다면, 안고 괜찮다고 말해 준다면… 루크는 마침내 이 고통스러운 수면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내 사람이, 모든 일에 능숙한 카이얀과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랑해.”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던 그 말을, 카이얀이 해 준다면…….
루크는 사랑에 대해 잘 몰랐으나 카이얀이 자길 사랑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동화책에서 배운 사랑은 아주 일차원적인 것이었지만, 루크는 거의 본능적으로 카이얀의 사랑을 갈구했다.
한 번만 사랑한다고 해 준다면.
날 사랑하면 좋겠다. 그럼 이 발작도 금세 멎을 것 같다. 뭐든 다 지금보다 훨씬 더 좋아질 것 같다.
“떨어져요!”
쾅, 카이얀에게 밀려나 낮은 책장 모서리에 등허리를 찧었을 때, 루크가 영문도 몰랐던 것은 당연했다. 두 번의 발작을 겪었을 때 카이얀은 전부 안아서 달래 주었다. 그런데 이번엔…….
아, 새로운 형태의 발작이라 잘 모르는 건지도. 그래서 루크는 다시 카이얀에게 다가갔다.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평소 힘의 반절도 쓸 수 없는 것 같았다. 눈앞이 팽팽 돌고 귀에선 이명이 울렸다. 균형도 제대로 잡을 수 없었다. 그래도 필사적으로 다가갔는데, 카이얀은 아예 달아나 버렸다.
혼자 연구실에 남아 루크는, 흥분 중에도 어리둥절했다. 이렇게 아픈데, 이렇게 이상하고 두려운데, 왜…….
카이얀을 붙잡아 소파에 쓰러뜨렸다. 이렇게 다루면 안 되는 것 같은데, 말로 설명하고 아프니 도와달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런 일말의 이성은 카이얀 위에 몸을 겹치는 순간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카이얀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을 때 세상의 진리 한 가지를 깨달은 느낌이었다.
그게 뭔지 루크는 몰랐다. 그는 진리의 개념 자체에 대해 몰랐으나 사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크는 거칠게 카이얀의 입을 헤집었다.
어째서, 이렇게 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카이얀이 직접 키스해 주지 않아서인지는 몰라도 몸은 조금도 괜찮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좀 더, 가지고 싶다. 좀 더 가지면 이 갈증이 채워질까.
루크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오래 억눌렸다 폭발한 성욕은 청소년기의 그것보다 훨씬 강렬했다. 제 성기가 카이얀의 허벅지에 닿아 마찰되자 루크는 그대로 죽어 버릴 것 같았다.
그 상태로 다시 한번 파정해 버리고 말았다. 단지 닿은 것뿐인데, 두 번째 사정은 처음보다는 훨씬 덜 무서웠다.
카이얀이 있으니까. 카이얀이… 잘 설명하면 도와줄 거니까.
설명할 생각도 없었지만 루크는 맹목적으로 그 생각만 좇았다.
“정신이 듭니까?”
어느 정도 이성이라 할 만한 것이 돌아왔을 때, 루크는 욕실에 있었다. 상황을 잘 파악할 수가 없었다. 찬물을 뒤집어쓰자 몸 상태가 좀 나아졌다.
하지만 이상한 회복이었다. 조금도 개운하지 않았다. 주저앉은 채 카이얀의 차가운 얼굴을 올려다보자, 가슴 어딘가가 선뜩해졌다.
왜 저런 표정을 하는 걸까.
내가 뭔가 실수한 거야. 이제 안아서 달래 주는 일에 지쳤는지도 모른다. 연구원들도 발작이 일어나면 성가시단 얼굴을 했다.
“방으로 올라가세요. 시간이 지나면 나아집니다. 처음이라 놀란 것뿐이에요.”
안 좋은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카이얀이 자길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루크는 돌아서는 카이얀을 반사적으로 붙잡았다.
“죄송합니다, 제발 가지…….”
영문도 모르고 호되게 거부당한 채, 간신히 꺼낸 말은 아주 간단히 묵살당했다.
“루크 씨, 갑자기 몸이 변해서 낯선 거 이해합니다. 그 전엔 왜 이런 일이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자연스러운 겁니다. 위로 올라가서 참아 봐요. 아니면 그, 혼자 만져 보든지.”
루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 마디짜리 용기도 나지 않았다. 카이얀이 저런 얼굴을 하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방으로 올라가 루크는 옷부터 갈아입었다. 물에 다 젖어서 엉망이었다. 속옷은 파정 때문에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주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보통은 그걸 감수해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서로 좋아해서겠죠.”
카이얀이 그렇게 말해 줬는데, 자기가 모든 걸 다 망쳐 버린 것 같았다. 발작을 일으키는 몸이 싫다 생각한 적은 없다. 어쩔 수 없는 실험 결과라고 여러 번 설명을 들었고 루크는 결과에 의문이나 불만을 품지 않은 착한 실험체로 교육받았다. 그런데 처음으로, 자기 몸이 진저리나도록 싫었다.
젖은 옷을 한쪽으로 대충 치웠다. 루크는 수치에 대해 잘 몰랐지만 어쩐지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물기를 닦지도 않고 옷을 끼워 입었다.
가만히 있으면 나아질 거라고 했는데, 카이얀의 말이니 옳을 텐데 이번만은 그가 틀렸다. 루크는 진정할 수 없었다.
물에 젖은 옷을 입느라 직접적인 자극이 닿아 오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다시 그 낯선 열기가 치솟았다. 루크는 한편으론 이성이 희미해졌고, 다른 한편으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발작하게 되면 카이얀은 정말 성가셔 할지도 모른다.
바로 그 순간, 욕실에 있던 카이얀은 우당탕 하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문제가 생겼다. 카이얀은 직감했다. 대충 비눗기를 씻어 버리고 재빨리 옷을 주워 입은 카이얀은 얼른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사실 혼자 올려 보낸 후에도 걱정하긴 했다. 나중에 잘 설명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루크의 방까지 뛰어 올라갔는데 갑자기 막막해졌다. 노크를 할까, 아니면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르니 그냥 문을 열어? 혹시 혼자 하는 은밀한 장면을 엿보게 되는 건 아니겠지?
이런 걸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카이얀은 일단 문을 벌컥 열었다.
카이얀은 너무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보인 건, 바닥에 넘어진 루크였다.
“루크 씨? 왜 그래요.”
루크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손에 잡히는 물건을 들어 자기 허벅지를 내리찍었다. 반복되는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지만, 옷에 가려진 부분이라 카이얀은 멍도 상처도 보지 못했다.
루크가 성적인 흥분을 발작으로 여긴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카이얀으로선 피곤한 노릇이었다. 안 그래도 오래 밖에 나가 있었던 데다 가볍게 술까지 마셔서 피곤한데, 들어오자마자 루크에게 깨물리고 키스까지 당했다. 카이얀은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선뜻 다정한 말이 나가질 않았다.
“이제 괜찮습니까?”
“네. 저, 로스터드 씨…….”
“얘긴 다음에 합시다. 일단 오늘은 그냥 자고요. 알았죠?”
카이얀은 잘라 말했다. 루크는 뭐라 더 말하려 하다가, 그저 짤막하게 대답했다.
“네.”
카이얀은 한쪽에 쌓인 젖은 옷더미를 가리키며, 저건 세탁기에 넣어 두고 자라고 말했다. 그 후 카이얀은 루크의 방을 나간 후 문을 닫았다.
루크는 그저 제 방에 우뚝 서 있었다. 1층 침실로 내려가는 카이얀의 발소리가 들렸다. 루크는 그 발소리가 완전히 멎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젖은 옷을 들고 세탁실로 내려갔다. 축축한 옷더미를 세탁기에 넣은 후 루크는 잠시 그 앞에 멍하게 서 있었다.
사방이 고요했다. 분명 카이얀이 이 집에 있는데, 아무도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카이얀과 루크는 보통 아침에 산책을 함께했다. 특별한 말을 나누지 않아도, 둘의 친밀감이 깊어지는 데 꽤 괜찮은 역할을 했던 일과였다.
그러나 이번 산책은 불편했다. 카이얀과 루크 둘 모두에게 그랬다. 카이얀은 루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정면만 보고 걸었고, 루크 역시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물어 버린 상태였다.
계절이 여름으로 넘어가며 낮이 점차 길어졌다. 이제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날이 환해지는 시기였다. 카이얀은 루크와 약간 거리를 둔 채 걸었고 루크는 카이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는 것만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아침을 먹을 때도 침묵은 계속되었다. 카이얀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려 했지만 그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분위기는 점점 더 불편해졌다. 카이얀은 그 어색함을 깨고자 루크를 보며 물었다.
“어제 부딪친 덴 괜찮습니까?”
카이얀은 루크와는 달리 어제의 모든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루크를 미는 바람에 그가 책장에 부딪친 것이 조금 걱정스러웠다. 욕실 바닥에 너무 거칠게 팽개쳐서 손목에 무리가 갔을 거란 짐작도 해 봤다.
“네. 괜찮습니다.”
카이얀의 질문에 루크는 화들짝 놀라 바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저 카이얀이 자기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 자체에 놀란 듯했다. 카이얀은 무던히도 눈치를 살피는 루크를 보며 쏟아지려는 한숨을 참았다.
“저, 로스터드 씨.”
먼저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려는데 루크가 벌떡 일어나며 카이얀을 불렀다. 카이얀은 태연한 척 식기를 싱크대에 내려놓으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루크의 얼굴을 보는 게 쉽지 않았다. 두 사람은 바로 어제, 거실 소파에서 몸을 겹친 채 키스를 나누었던 것이다. 물론 일방적인 키스였지만 그렇다고 카이얀이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었다.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이 말이 나올 거라곤 짐작했지만, 이렇게 변명조차 없을 줄은 몰랐다. 이것도 외면하고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아 카이얀은 몸을 돌렸다. 루크는 자기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긴장한 얼굴로 카이얀의 대답만 기다리고 있었다.
뭐라고 말해 줘야 안심할까. 아니, 안심시켜 줘야 하나? 내가 왜?
루크가 한 일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불쾌했다. 쾌감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에게 간단히 휘둘려 소파에 팽개쳐졌을 때의 당혹과 약간의 굴욕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차라리 이 정도에서 적당히 선을 긋는 게 낫지 않을까. 카이얀은 잠시 대답을 미루고 루크와의 적절한 거리를 가늠했다.
“네.”
그렇게만 대답하고 카이얀은 돌아섰다. 뒤에 남겨진 루크가 안절부절못할 걸 모르지 않았다. 네, 라니. 괜찮단 말도 아니고 여전히 기분이 상해 있다는 말도 아니고, 뭐 어쩌라는 건지 카이얀 자신도 의문인 대답이었다.
좀 더 성의 있게 말해 줄 수도 있었지만 카이얀도 혼란스러웠다. 그는 연구실로 돌아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새 연구를 미룬 지 너무 오래되었다. 이번에는 조금 장기 프로젝트로 가 봐도 좋지 않을까. 민속 타부와 관련된 고전 작품을 모아서, 동서양의 작품을 비교하고 또 그 안에서 다시 카테고리를 나누고…….
“가지 마십시오……. 이상하면, 꼭 말해야 된다고 하셔서…….”
“놔요, 루크 씨. 지금 무슨 짓 하려는지 알기나 합니까?”
“몰라, 이상해…….”
망할.
카이얀은 신경질적으로 모니터를 껐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 집에서 제 연구실 문에 대고 노크할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카이얀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태연을 가장한 목소리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루크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여전히 군인 같은 걸음걸이였는데, 어째서 잔뜩 주눅이 든 것처럼 보이는지 모를 일이다. 아까의 대화 때문에 불안해져서 다시 온 걸까. 하지만 루크가 재차 사과한다 해도 카이얀으로선 해 줄 말이 없었다.
“핸드폰을 두고 가셨습니다.”
예상과는 다른 말에, 카이얀은 루크의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루크가 두 손으로 들고 있는 핸드폰을 보고 카이얀은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네, 고맙습니다.”
“전화가… 왔었습니다.”
“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루크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었으나 그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루크가 나가지 않고 미적거리자 카이얀은 무슨 일이 있나 하는 얼굴로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받자 갑자기 더할 나위 없이 비참해지고 두려워져서, 루크는 꾸벅 고개를 숙인 후 달아나고 말았다.
루크의 고민을 정확히 알 리 없는 카이얀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번호를 보니 지그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너무 피곤하고 정신이 없어서, 대뜸 전화를 건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했다.
다시 전화를 거니 지그문이 재빠르게 받았다.
“야, 미안.”
대뜸 사과부터 던져 놓으니 지그문이 웃었다.
- 천하의 카이얀이 사과를 다 하네.
기껏 사과했더니 하는 말 하곤.
카이얀은 얼굴을 찡그리며 뒤로 몸을 기댔다. 꺼진 모니터에 찌푸린 제 얼굴이 비치는 걸 보며 카이얀은 퉁명스레 내뱉었다.
“너한테 사과할 일이 없었던 거겠지. 아무튼, 문제는 해결됐어.”
- 대뜸 전화해서 끊어 놓고 뭐라는 거야. 진짜 강도 들었던 건 아니지?
“사정이 있었어. 이젠 완전히 괜찮아.”
눈치를 살피던 루크의 모습을 생각하면 완전히 괜찮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도 카이얀은 한숨을 내쉬며 대강 말을 돌렸다.
“그냥 한번 얼굴이나 보자.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고.”
지그문도 머독과 비슷했다. 시원시원하게 약속에 응하더니 이따 보자며 뚝 끊어 버린다. 전해 줄 물건도 있겠다, 그날 바로 만나게 됐는데 루크를 집에 혼자 둘 일이 걱정이었다. 혼자 두고 갔다가 어제 같은 일이 또 일어나면, 카이얀은 정말 어느 쪽으로든 폭발할 것 같았다.
이번엔 영화 같은 건 보여 주지 말자. 책을 읽으라고 해도 좋고, 정원 산책도 좋겠지. 카이얀은 일단 서재로 올라갔다.
루크에게 새로 줄 책을 고르며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픽 웃고 말았다. 거리를 두니 어쩌니 하면서도, 결국 루크가 혼자 멍하게 여기 앉아 있을 게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편 루크는 서재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카이얀의 발소리를 듣고 있었다.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멈췄다 하는 카이얀의 소리를 듣고 있자니,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청력이 조금 둔해진 것 같았다. 소리가 전처럼 선명하질 못했다. 이런 것도 카이얀에게 말해야 하는 걸까. 그러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 카이얀에게 몸에 대한 얘길 꺼낼 수는 없었다.
“루크 씨.”
발소리가 저벅저벅 이동하더니, 이내 문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루크는 튕겨나가듯이 움직여 문을 열었다. 카이얀이 양손에 책을 든 채 서 있었다.
“난 나갔다 와야 되니까, 집에 있으면 됩니다.”
조금 밝아졌던 루크의 얼굴이 단번에 달라졌다. 루크는 일단 카이얀으로부터 책을 받았다. 카이얀이 날이 좋으니 정원으로 나가 보는 것도 좋을 거라는 말을 덧붙였지만 제대로 들리질 않아 다 흘려버렸다.
“내 말 듣고 있어요?”
“로스터드 씨.”
루크는 한 번만 더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카이얀은 책을 들고 여기까지 와 줬다. 어쩌면 완전히 자기가 지겨워진 건 아닌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카이얀이 떠나기 전에 이 관계를 회복해야 했다.
물론 루크는 관계 회복 방법에 대해 전혀 몰랐다. 일단 카이얀에게 미안했기 때문에 그는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
“어제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앞으로 절대 그런 일 없게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카이얀은 잠깐 할 말을 고르는 듯싶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놀랐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바짝 긴장한 얼굴로 루크가 다시 사과했다. 그러나 카이얀은 그 말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여 주지 않고 제 말을 이어갔다. 이런 부분에서의 선은 분명히 그어 둬야 한다.
“저는 한 번도 루크 씨를 성적인 대상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난 기본적으로 인류의 절반 정도는 양성애자라고 생각하는 쪽이지만, 그렇다고 루크 씨를 사랑하는 건 아닙니다. 또 설령 사랑한다 해도 쌍방 동의 없는 관계는 끔찍하고요.”
물론 모두가 사랑해서 성적인 관계를 맺는 건 아니지만. 카이얀은 그 말을 삼켰다. 말해 줘도 이해 못할 것 같았고, 사실 루크는 방금 자기가 한 말의 절반도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았다.
“아무튼 난 나가 봐야 됩니다.”
“제가 모시고 갈 수 있습니다.”
카이얀은 기가 막혀 소리 없이 웃고 말았다. 지금 상황에서도 저 레퍼토리가 나오나. 이젠 화가 난다기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뭐라고 대답할 줄 알죠? 이따 저녁에 봅시다.”
카이얀은 루크를 남겨 두고 밖으로 나왔다. 사실 지그문과의 약속 시간까지는 조금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이 집에서 루크와 둘이 있으면 어색해서 아무 것도 못할 것 같았다.
루크는 책을 들고 선 채 카이얀의 말을 곱씹었다. 아주 많은 말을 들었는데 어째서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끔찍하고요.”
사실은 그 말만이 머릿속에 웅웅 울리는 것 같았다.
* * *
“야, 지그문.”
카이얀이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지그문이 들어왔다. 손을 들어 보이니 그가 재빨리 다가와 맞은편을 차지했다.
어제 갑자기 전화한 이유를 캐물을까 했는데, 지그문은 의외로 다른 걸 물었다.
“너 어제 다른 사람이랑 있었지?”
“뭐?”
“아니, 나랑 통화할 때 다른 사람 목소리도 들리고, 너도 뭐라고 했잖아. 아니야?”
“아, 그거.”
카이얀은 대강 얼버무리며 지그문을 보았다.
지그문은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이었는데 피부는 새하얀 편이었다. 눈이 크고 턱선이 분명한 전형적인 혼혈의 얼굴이었다. 보기에는 꽤 믿음직했다.
“그거 누구였어?”
카이얀은 잠시 달콤한 유혹에 휩싸였다. 나이란에 대해 말해 버릴까. 머독에게도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여기서 나이란이 루크를 억지로 떠맡긴 일에 대해 말한 후 그녀를 향해 신나게 욕을 퍼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카이얀은 곧 그 생각을 접었다. 그럴 기력도 없었다. 사실 지난밤에 너무 놀란 탓인지 꿈자리도 좀 사나웠다. 너무 격렬한 얘긴 피하고 싶었다. 그냥 밥이나 먹고 좀 쉬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다.
“얼마 전에 머독 만났어.”
“아, 걔 뭐 또 영화 나왔던데. 거기서도 연기했대?”
“이번엔 아닌가 봐. 그냥 작가로 무대 인사 왔을 때 봤어.”
“걘 배우도 아닌 게 무대 인사는 꼬박꼬박 불려 가더라.”
“얼굴 덕분이지.”
“너도 만만치 않아.”
빙글빙글 웃으며 말하는 머독을 보고 카이얀은 코웃음을 쳤다.
“너야말로 얼굴 아니었으면 이 장사도 못 했어.”
지그문은 윤락업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리탄에서는 매춘이 합법이었다. 대부분 국가에서 관리하긴 하지만, 지그문처럼 개인이 운영하는 경우도 없진 않았다. 국가와 경쟁하다 보니 살아남기도 어려웠고 돈을 모으는 건 더욱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나 지그문은 뛰어난 수완으로 어렵지 않게 사업을 불려 나가고 있었다.
“그건 그냥 서브야. 어두운 쪽은 거의 잡고 있다고.”
“적당히 하고 그만해.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모아서 그게 뭐냐?”
“결벽 있으면서 나랑 친구는 어떻게 하냐?”
그 뒤로도 그런 식으로 사소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어느 정도 배가 채워지고 후식이 나오자, 지그문은 갑자기 카이얀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야, 근데 너 괜찮은 거야?”
“뭐가?”
뭔데 이렇게 분위기를 바꾸나 싶어 카이얀도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같이 사는 사람.”
“아.”
카이얀은 잠깐 지그문을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달리 해 줄 말이 없어서 그런 건데, 갑자기 지그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아? 아, 가 뭔데? 뭐 어떻다는 건데? 네 성격에 같이 살 정도면 뭐 사정이 있나 본데, 어제 그 사람 때문에 위험했던 거 아니야?”
“뭐? 아니야.”
잠깐 생각해 보면 위험했던 듯도 하다. 하지만 굳이 상황을 설명하고 싶지 않아서 카이얀은 대강 뭉뚱그렸다.
“좀 아픈 사람이야.”
“아프다고?”
“그래. 그냥 몸 상태가 좀 불안정할 때가 있어.”
지그문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헛기침을 하더니 공연히 냅킨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매사 말을 시원하게 하는 그가 주저하니, 카이얀도 의아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데?”
“아니, 간병하려면 힘들겠다 싶어서.”
“뭐? 그 정도는 아니야.”
카이얀이 헛웃음을 쳤다. 그러나 지그문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진중한 어조로 덧붙이기까지 했다.
“사람들 보면 금방 지치더라. 아프다고 돌봐 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러다 보면 아프고 힘들 때마다 매번 하소연 들어 줘야 하잖아.”
“야, 진짜 그런 환자 아니야. 그리고 아프단 소리도 잘 안 하고…….”
문득 카이얀의 말이 멎었다.
그러고 보면 정말 이상한 일이다. 루크는 평소 선호를 밝히거나 문제를 호소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데 어제는 적극적으로 문제를 밝혀 왔다.
거의 최음향을 들이마신 수준의 성욕이어서 견디기 힘들어서 그랬겠지 하고 가볍게 넘겨 버렸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뭔가 찜찜했다.
문득, 루크의 한 마디가 머리를 후려쳤다.
“가지 마십시오……. 이상하면, 꼭 말해야 된다고 하셔서…….”
카이얀은 아연해진 채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뭔가 실수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야… 가자.”
“응? 갑자기 왜.”
지그문이 흘끗 카이얀의 얼굴을 보고 한가하게 냅킨을 접었다. 그의 차분한 손놀림을 보던 카이얀은 정신을 차리려는 듯 머리를 털었다.
“그 문제가 아니야. 내가 좀, 실수한 것 같아서 그래.”
“무슨 소리야? 너 왜 점점 잠꼬대가 늘어나냐. 연구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니야? 대충 살라니까.”
“야, 너 그냥 가라. 그냥 나중에 보자, 응?”
발작인 줄 알았다면 자길 찾는 게 당연하다. 발작이 일어날 때마다 루크를 달랜 게 자신이었으니까. 눈치로 보아 하니 나이란이나 다른 연구원들은 루크가 발작할 때마다 팔짱 끼고 한숨이나 쉰 모양이었다.
카이얀은 낭패감 때문에 마음이 급해졌다.
“너 진짜 왜 그래? 오랜만에 만났는데 좀 앉아 있다가 천천히 가. 너 지금 너무 흥분했어.”
지그문이 너무 태연하게 행동하자, 카이얀은 순간 의문이 들었다. 그래, 지금 이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다. 루크가 어딜 가는 것도 아니고, 집에 돌아가서 충분히 설명하고 달래 주면 되는 일이다.
“그냥 마실 거 좀 더 시키자. 그 사람 얘기나 해 봐.”
카이얀은 지그문을 보며 다시 자리에 앉으려 했다. 어쩐지 기운이 빠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는데, 지그문이 하는 말들이 다 의미 없이 귓가를 스쳐 갔다.
“너 듣고 있어?”
지그문이 물었을 때, 카이얀은 도저히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카이얀은 일어났다.
“야, 미안한데 다음에 또 보자. 집에 가 봐야겠어.”
“또 그 소리야? 너 진짜 왜 그래?”
지그문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숨을 쉬고 같이 일어나 주었다. 정신이 없는 중에도 더 우기지 않는 게 고마웠다.
무슨 정신으로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는지도 몰랐다. 카이얀이 제 차에 올라타는 걸 확인한 지그문은, 운전석 쪽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카이얀이 창을 내려 주자 지그문이 고개를 까딱이며 물었다.
“내가 태워다 줄까? 너 지금 운전할 수 있겠어?”
“그 정도는 아니야.”
“너 좀 이상해. 그건 알아?”
카이얀은 혼란에 빠져 지그문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일인 건 안다. 루크에게 실수를 했다 해도, 이렇게 급히 달려갈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설명하지 않고 무작정 달려든 루크에게도 책임은 있으니까.
그래도 여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방에 올라갔을 때라도 부드럽게 말해 줄걸. 아니면 아까 오전에라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도 모르고 방에 서 있었을 루크를 떠올리면 기분이 너무나 불편해졌다.
“알아.”
이상해도 어쩔 수 없어.
카이얀은 그 말을 삼키고 시동을 걸었다. 지그문은 창을 툭툭 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카이얀은 집으로 출발했다.
* * *
루크는 집에서 혼자 사전을 뒤적이고 있었다.
[정도가 지나쳐 놀랍다. 진저리가 날 정도로 참혹하다. 정성이나 성의가 몹시 대단하고 극진하다.]
세 번째 의미는 아니겠지. 저는 정성도, 성의도 보인 적이 없으니까. 루크는 ‘참혹하다’의 뜻을 알아보기 위해 휙휙 사전을 넘겼다. 카이얀이 사전 보는 방법을 가르쳐 주던 때가 생각나 괴로웠다.
“여기 처음 철자를 보세요. 그런 다음 책 옆에서 그 철자가 적힌 부분을 찾는 겁니다. 철자 순서 알죠? 그 순서대로 적혀 있으니까 차례대로 찾아보면 되고…….”
그러면서 카이얀은 이것저것 더 설명해 주었다. 사실 사전 찾는 법 정도는 금방 배웠다. 그런데 사전 위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카이얀의 손가락을 보다가 그만 이제 알아들었다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위에는 뭐가 적혀 있고, 페이지는 여기, 철자는 이쪽에, 하며 카이얀은 몇 번이고 거듭 설명해 주었다.
그 목소리가 노랫소리 같았다. 마디가 굵고 하얀 손, 오래 공부한 사람답게 굳은살이 든 손에 시선을 빼앗겼다.
돌이켜 보면 카이얀은 정말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귀찮아 하지도 않았고, 루크가 잘 못 알아듣는다고 화를 내는 일도 없었다. 그는 때로 무심했지만 기본적으론 친절했다.
카이얀 생각을 하다가 루크는 ‘참혹하다’가 적힌 페이지를 그냥 넘겨 버렸다. 나중에야 그걸 알고 다시 앞쪽 책장으로 돌아갔다.
[비참하고 끔찍하다. 지나칠 정도로 한심하다.]
루크는 사전을 덮었다. 그냥 카이얀 생각을 계속하는 게 나을 뻔했다. 밤이면 서재를 오가는 발소리, 나지막한 목소리, 차분한 녹색 눈이나, 부드러운 금발 같은 것을. 든든하게 저를 받쳐 안고 통증은 금방 지나갈 것이라 달래 주던 저녁 같은 것을.
루크는 방을 둘러보았다. 이불과 베개, 옷장과 두 칸짜리 작은 책꽂이, 거기 카이얀이 손수 꽂아 준 동화책 몇 권.
처음 이 방의 문이 열렸을 때, 루크는 깜짝 놀랐다. 카이얀이 문을 여는 순간 갑자기 새로운 세계로 가는 통로가 생긴 느낌이었던 것이다. 전혀 모르는 세계. 루크가 겪어 본 일 없던 세계. 카이얀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몰랐을 따뜻하고 경이로운 세계.
카이얀이 이 문을 닫아 버리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여기 혼자 남겨져, 그 캡슐에서처럼 오랫동안 깊은 잠에 빠지게 될까.
그때 창문 너머 카이얀의 차가 보였다. 루크는 반사적으로 창가로 다가갔다. 뭔가를 손에 든 카이얀은 조금 조급하게 차에서 내리더니 급히 현관으로 걸어왔다.
평소라면 카이얀을 맞으러 현관까지 내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루크는 그러지 못했다. 만약 자길 보고 얼굴을 찡그린다면? 오늘 아침처럼 성가신 얼굴을 한다면? 같이 가겠다는 말을 차갑게 내치던 카이얀이 떠올라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얼굴을 비치지 않는다면, 카이얀은 정말 제게 질릴지도 모른다. 끔찍하다, 참혹하다, 한심하다… 등등 사전의 단어들이 머릿속을 헝클어뜨렸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좀 지난 모양이었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갈까 말까 고민한 일이 무색하게, 루크는 자동적으로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갔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동시에 답답할 만큼 죄어 왔다. 반가움과 두려움, 설렘과 알 수 없는 죄책감이 어지러이 교차했다.
루크가 고민하는 사이 카이얀도 느긋하진 않았다. 허둥지둥 집에 돌아오긴 했지만, 카이얀은 루크와 이야기하는 게 쉽지 않은 일임을 새삼 깨달았다.
해선 안 될 일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았다. 그날, 집에 혼자 남겨진 루크는 난생 처음 겪는 감각에 허둥대며 자기만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 걸 와서 밀쳐 버리고 대뜸 물부터 끼얹었으니 놀랐겠지.
카이얀은 한참을 망설였다. 조금 피곤한 상태였는데, 긴장하자 피로에 무뎌지는 느낌이었다. 카이얀은 겨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은 조용했다. 루크의 감각이 점차 무뎌질 것이라 했으니, 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까. 보통은 루크가 나와서 맞이해 줬는데. 찔리는 게 있는 카이얀은 걱정이 앞섰다.
많이 상심했을까.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심하게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오전에도 내내 귀찮고 성가시다는 듯 응대했으니 저밖에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놀랐을까.
루크가 지나치게 제 감정 변화에 민감하니 카이얀도 루크의 감정에 마음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친구였다면 절대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머독이나 지그문이 자기에게 강제로 키스하려 했다면 당장 다리 사이부터 차 버렸겠지만 루크는 그들과 달랐다.
친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그문 말대로 하숙생도 아니고.
이건 무슨 관계일까. 우린 무슨 관계인데, 지금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걸까.
카이얀은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카이얀은 반가운 마음에 얼른 그쪽을 보았다.
“오셨습니까.”
“아, 네.”
카이얀은 잠깐 루크를 바라보았다.
루크는 평소보다 멀리에 서 있었다. 그 거리 탓인지, 루크가 좀 더 명확히 보였다. 그 사이 검은 머리카락이 약간 길어 있었다. 불안한 듯 시선을 피하며 내리뜬 파란 눈. 처음에 보곤 정말 군인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루크의 걸음걸이는 뻣뻣하고 행동에는 각이 잡혀 있었지만, 함께 사는 동안 처음보다는 많이 무뎌지고 딱딱한 태도도 허물어졌다.
그래도 요즘에는 먼저 말을 붙여오기도 하고, 하고 싶은 것을 곧잘 말하기도 했는데…….
“방에 올라가 있겠습니다.”
카이얀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는데, 루크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카이얀은 그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해 잠깐 눈만 깜빡거렸다. 보통은 거실에서 같이 책을 보거나 했는데. 루크는 특별한 일이 없어도 카이얀 곁에 있는 걸 좋아해서, 저녁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너무 많이 했던 걸까. 카이얀은 루크가 성큼 벌려 놓은 거리가 낯설었다. 늘, 얼마나 거리를 둬야 할까 고민하던 건 자신이었는데.
“저기요, 루크 씨.”
영화도 아니고, 주춤주춤 다가가는 것도 웃겨 카이얀은 그냥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루크를 불렀다. 루크가 주저하며 다시 카이얀을 보았다. 하지만 어려운 건 카이얀도 마찬가지였다.
애초, 어느 시점 이후부턴 딱히 트러블 생길 일이 없는 친구들만 만나 왔다. 이런 식으로 실수할 일은 절대 없었고. 지그문의 말이 맞았다. 카이얀은 사과할 일 자체를 잘 만들지 않는 편이었다. 교수님들과 이런 상황에 놓일 일은 더더욱 없었고.
루크는 정말 여러모로 카이얀의 일상에 파문을 일으키는 존재였다. 처음엔 그냥 갑자기 떠맡은 짐이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되고 만 것일까.
“사실은.”
카이얀, 진심이야? 진짜 이렇게 현관에 서서 말할 생각이야? 와인에 촛불까진 못 돼도 이런 어색한 분위기는 좀 아니지 않아?
자기를 책하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찔렀다. 둘 다 뭐 그리 섬세하다고. 유난 떨 거 없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그러기엔 루크가 너무 경직되어 있었다.
이건 섬세함의 문제를 떠나 순서의 문제였다. 루크의 긴장을 풀어 주는 게 먼저일 듯했다.
천천히 하자, 천천히. 마음먹은 후 카이얀은 애써 태연한 척 루크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거실로 와요. 뭐 사 왔는데, 같이 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던져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먼저 거실로 갔다. 루크는 그 자리에 잠깐 멈춰 있었는데, 전 같으면 바로 따라왔을 사람이라 그마저도 마음에 걸렸다.
너무 못되게 굴었던 걸까. 그야 누구라도 같은 남자가 그렇게 키스하려고 하면…….
그게 맞는데도 루크가 너무 주눅 들어 있으니 모든 게 다 변명처럼 느껴졌다.
곧 루크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카이얀을 뒤따랐다. 카이얀은 뭔가를 먹은 흔적이 전혀 없는 식탁을 보고 때 아닌 짜증이 치밀었다.
혼자 밥 먹을 줄 모르나? 산책이니 자전거니 신경 쓰고 있지만, 약도 안 먹었는데 근육이며 지방이며 다 사라지고 흐물흐물 허약체질 되면 어쩌려고 이러지? 발작 문제 때문에 약 끊게 한 건데, 이렇게 되면 건강에 도움 될 게 하나도 없지 않은가.
“루크 씨.”
순간적으로 루크를 불렀는데, 네, 하고 대답하는 루크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너무 작아서 카이얀은 그만두기로 했다. 식사 얘긴 나중에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앉아요.”
카이얀은 제가 먼저 식탁 앞에 앉으며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내려놓았다. 꽤 크고 납작한 상자였다. 낯간지러운 걸 무릅쓰고 포장을 부탁해, 점원이 파란 리본으로 멋지게 묶어 주기까지 했다.
“이거요.”
카이얀은 상자를 루크 쪽으로 가볍게 밀었다. 바짝 긴장한 채 허리를 세우고 앉은 루크는 조심스럽게 카이얀의 눈치를 살폈다. 카이얀은 그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일부러 편하게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턱을 괴었다.
의식적으로 눈매를 접으며 웃음을 보였다. 눈꼬리가 둥글게 휘어지고 정확한 대칭을 이루는 입술이 부드럽게 말려 올라가는, 근사한 웃음이었다.
루크는 그 웃음을 보고 움찔했다. 어쩔 줄 몰라 하더니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도 아까보단 힘이 좀 풀린 것 같아 카이얀은 안심했다.
“루크 씨 주려고 사온 겁니다. 선물이 뭔지 알아요?”
“네, 알고 있습니다.”
“받아 본 적 있어요?”
“없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알고도 물어본 일이었다.
“풀어 봐요. 마음에 들면 좋겠는데.”
루크는 카이얀의 말에 조금 당황한 모양이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카이얀이 괜찮으니 어서 풀어 보라고 한 뒤에야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리본은 조금 낯설었지만, 온갖 잠금장치와 매듭을 풀어 본 루크는 손쉽게 파란 리본을 풀어냈다.
카이얀은 어쩐지 긴장이 되었다.
곧 루크가 하얀 상자를 열었다.
500피스짜리 퍼즐이었다. 루크는 파란색과 남색, 엷은 하늘색, 노란색, 검은색, 흰색 등이 화려하게 엉켜 있는 퍼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손에는 상자 뚜껑을 든 채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루크는 퍼즐을 본 적이 없었다. ‘별이 빛나는 밤’ 같은 것도 물론 본 적이 없었다. 사실 루크는 명화의 개념 자체도 몰랐다.
“퍼즐이라고 하는 겁니다.”
카이얀이 조심스럽게 판을 들어 비닐을 뜯었다. 비닐은 대강 한쪽에 치워 놓고 상자도 치웠다. 루크 앞에 퍼즐을 내려놓으며 카이얀은 조심스럽게 제일 구석에 있는 퍼즐 조각을 하나 분리했다.
“이렇게 조각조각 떨어져 나와요. 이걸 다 엎어 놓고 하나씩 맞추면서 처음의 그림을 완성해 나가는 겁니다.”
“아…….”
해체되는 풍경을 보고 루크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퍼즐 조각은 작았다. 잃어버리면 안 되는데. 그 생각부터 들었다.
“루크 씨.”
퍼즐 조각을 식탁에 올려놓으며 카이얀이 조용히 말을 시작했다. 쑥스럽고 민망했다. 세상에, 몇 년을 내리 사귄 친구들과도 이런 일을 해 본 적이 없는데. 그냥 들어가서 사과부터 꺼내 놓기가 민망해 선물을 고른 것도 저답지 않은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문득 루크가 그렇게 말했다.
카이얀은 루크를 보았다. 루크가 조금 어두운 얼굴로, 그러나 눈을 빛내며 자기를 보고 있었다.
카이얀은 어쩐지 허탈해졌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제 일 말인데요.”
차분한 척 얘기를 꺼내자 루크의 얼굴에서 단번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카이얀은 그를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바로 말을 이었다.
“아팠던 거죠?”
카이얀은 최대한 부드럽게 물었다. 그러나 여직 굳어 있는 루크는 긴장한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정말 루크는 긴장이 되어 쓰러져 버릴 것 같았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머리가 웅웅 울리는 느낌이었다. 카이얀이 무얼 갖다 줘서, 어제 일은 그냥 이대로 넘어가는구나, 막연히 짐작했는데. 카이얀이 그 일을 다시 입에 올리자마자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설명을 해 줬어야 하는데, 루크 씨가 그렇게 받아들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건 루크 씨가 종종 겪은 발작이 아니라, 누구나 겪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물론 루크의 경우엔 정도가 좀 심했지만, 카이얀은 그런 얘기를 하진 않았다. 해 봤자 하등 도움 안 될 얘기였다.
“원래, 다들 가끔 그럽니다. 성욕이라고 하는데, 몸이 자극을 원할 때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음, 루크 씨가 그걸 아픔이라고 생각하는 줄 알았으면, 제가 좀 더 잘 설명해 줬을 텐데……. 그걸 몰라서요.”
카이얀은 그렇게 말하고 잠깐 기다렸다. 루크는 카이얀의 말을 반 정도만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젠 루크 씨가 좀 많이 흥분한 것 같아서, 제가 좀 놀라서… 그랬습니다.”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카이얀은 스스로가 한심했다. 과연 루크는 알아듣지 못한 얼굴이었다. 카이얀은 그냥 다 집어치우고 직선으로 찌르기로 했다.
“루크 씨가 싫었다거나, 발작하는 걸 모르는 척하려고 했다거나 한 게 아닙니다.”
쉽게 가자. 어차피 이 사람은 복잡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분명 이 말이 끝나면 성욕이 뭐냐고 묻기 시작하겠지. 카이얀은 이어 말했다.
“루크 씨가 저를 강제로 휘두르는 것 같아서, 약간 놀랐습니다. 그래서 제가 좀 거칠게 행동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최대한 천천히 말하자 루크도 조금씩 표정을 허물어뜨렸다. 싫었다거나 한 게 아니라고 말한 순간부터 루크는 눈에 띄게 안도하고 있었다. 카이얀은 정말, 이 사람의 모든 것이 자기에게 달려 있음을 깨달았다.
“어제 일은 제가 오해했습니다. 사과하고 싶은데… 받아 줄 수 있겠어요?”
차분한 어조였다. 그러나 카이얀의 속은 꽤 번잡했다. 루크가 당연히 괜찮다고 할 걸 알면서도,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사실 루크는 카이얀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발작이 일어난 것인데, 카이얀은 아니라고 한다.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지만 카이얀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어젯밤의 저는 이성을 잃었다. 그 일에 대한 기억은 거의 희미했지만, 제가 카이얀을 소파에 내던지다시피 했던 건 기억이 났다. 막무가내로 입술을 겹치고 알 수 없는 자극에 미친 듯이 허리를 흔들었던 것만 떠올랐지만 그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았다.
“어제…….”
루크도, 카이얀만큼이나 말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제가 로스터드 씨를 밀고, 함부로 대했습니다. 사과하실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루크는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고 주저하며 느린 템포로 말했다. 사과할 필요 없다는 말이 나올 줄은 몰라서 카이얀은 좀 당황했다.
“네, 물어보세요.”
얼결에 대답을 꺼내 놓으니 루크는 또 한참을 머뭇거렸다. 모르는 걸 물으려는 건 아니었다. 분명 아까 사전에서도 찾아봤는데, 모르는 게 아닌데. 외울 수도 있는데 왜 묻고 싶은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이것도 약을 끊은 부작용일까……?
어떻든 좋았다. 루크는 마른침을 삼켰다.
“끔찍하다는 건, 어떤 뜻입니까?”
카이얀은 잠깐 말을 잃었다.
뭐라고 대답하지. 뭐라고 해야 이 사람이 덜 상처받을까. 어쩌자고 그런 말을 했을까. 사실 그 말이야말로 가장 무겁게 얹혀 있던 말이었다. 루크가 그 말을 기억할까, 그가 끔찍하단 말이 아니었는데 뭐라고 변명할까, 그런 생각도 잠시 했었다. 아마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고 그가 언급하지 않는다면 그냥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루크 씨, 그건 제가…….”
루크는 카이얀에게 완전히 집중한 상태였다. 그 정직한 눈을 보는데, 턱 말문이 막혔다. 제가 실수한 겁니다, 라고 말할 생각이었는데 도저히 입이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그렇게 말하려던 게 아니라… 루크 씨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망할, 앞으로 두 번 다시 그 말은 입에도 담지 않으리라. 카이얀은 스스로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난감했다. 정말, 루크가 끔찍하다고 말한 게 아니다. 상황 자체가 그렇단 얘기였는데 그 차이를 설명하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해 줄 말이 없어서 겨우 그렇게만 얘기했다. 그렇게 말하려던 건 아니었다고, 죄송하다고 덧붙였지만 루크는 여전히 개운치 않은 얼굴이었다.
사실 루크에게 있어 카이얀의 사과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괜한 말이 아니라, 정말 카이얀이 자기에게 사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전 괜찮습니다.”
루크의 말을 마지막으로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카이얀은 루크가 뭐라도 말해 줬으면 싶었지만, 루크는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카이얀은 잠시 고민했다
이걸로 정말 끝난 건가?
여전히 루크는 편치 않은 얼굴이었지만 사과도 필요 없다니 더 해 줄 말이 없었다. 결국 카이얀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루크도 습관처럼 그를 따라 일어섰다.
“저녁 안 먹은 것 같은데 지금 간단한 거라도 먹는 게 좋겠습니다. 바로 잘 건 아니죠?”
“아,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간단한 거라도요.”
인체에 대해 설명해 주고 싶었지만 카이얀도 그 점에 대해선 잘 몰랐다. 다른 친구들이었다면 배고플 때 알아서 먹으라며 그냥 뒀겠지만, 루크는 약을 끊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카이얀은 간단히 야채라도 볶을까 싶어 일어났다. 양파 껍질부터 벗기기 시작하는데 루크가 슬쩍 옆으로 다가왔다.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
“아.”
그러고 보면 식사 준비를 같이 한 적은 없었다. 루크가 요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으니까. 칼 같은 거야 잘 다룰지 몰라도. 거기 생각이 미치자 카이얀은 자기도 모르게 루크에게 물었다.
“혹시 칼도 썼습니까?”
카이얀은 루크를 한 번 보았다. 별로, 칼과 어울리는 인상은 아니었다. 물론 군이나 연구소가 그런 걸 고려하진 않았겠지만.
“아주 가끔 필요한 경우에만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보통 총을 사용했습니다.”
보고하는 것처럼 딱딱하게 대답한 루크는 그대로 잠깐 멈춰 있었다. 카이얀은 그냥 그러려니 넘어갔다.
“그럼 이것 좀 대강 물에.”
카이얀은 막 냉장고에서 꺼내 온 버섯을 루크 쪽으로 내밀었다. 루크가 얼결에 두 손으로 받았다. 양파를 다 까고 막 칼을 드는데, 루크가 여전히 가만 서 있는 게 보였다. 뭐지 싶어 카이얀이 잠깐 칼을 내려놓았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물에, 다음 지시를 듣지 못했습니다.”
카이얀은 잠시 루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음 지시라니 저건 또 무슨 소리야? 자기가 한 말을 차근차근 되짚어 간다고 해도 습관처럼 한 말들을 모두 기억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어… 그냥 물에 씻으면 됩니다. 너무 세게 문지를 필요는 없고, 그냥 적당히…….”
루크의 표정이 또 아리송하게 변하자 카이얀은 얼른 숫자를 생각해 냈다.
“그, 3이나 4 정도? 10을 최대치라고 했을 때요.”
“네, 알겠습니다.”
루크는 싱크대에서 버섯을 문질러 닦았다. 카이얀도 흘끗 그쪽을 보고 다시 칼을 들었다. 막 양파를 반 토막 내려는데 또 루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꾸 으스러집니다.”
카이얀이 시선을 돌렸다. 과연 루크의 손에서 버섯이 다 으스러져 있었다. 카이얀은 문득 제정신 아니던 루크가 제 양 팔을 억세게 붙잡았을 때를 떠올렸다. 약효가 서서히 떨어져가는 중이니, 그런 힘도 조금씩 줄어들까, 아니면 그건 타고난 걸까?
“그럼 파프리카가 낫겠네요. 그건 제가 할 테니까.”
카이얀은 또 냉장고로 가서 빨갛고 노란 파프리카를 꺼내 왔다. 버섯이랑 양파랑 넣고 볶으면 먹을 만하겠지. 하지만 곧 파프리카도 갈라져 버렸기 때문에 카이얀은 결국 감자를 꺼내 와야 했다.
정말 요리할 걸 고른다기보다는 루크가 만져도 되는 걸 고르는 느낌이었다. 카이얀은 감자를 내주며 저걸 버섯이랑 볶아도 이상하지 않을까 잠시 고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자꾸…….”
“아, 아뇨. 원래 처음 요리할 땐 다들 그럽니다. 자연스러운 거예요.”
물론 버섯을 으스러뜨리고 파프리카를 조각내는 사람은 몇 없겠지만 카이얀은 굳이 그런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루크는 감자에 묻은 흙을 진지한 얼굴로 닦아 냈다. 카이얀은 양파를 썰며 그 모습을 힐끔힐끔 보았는데, 참 배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잠시 서로 이것저것 주고받고 하다 보니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렸다. 카이얀은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며 지나가는 것처럼 물었다.
“요즘 듣는 거나 보는 건 좀 어떻습니까?”
좀 애매한 물음일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루크는 빨리 알아들었다.
“청력이 조금 떨어졌습니다. 시력에는 아직 이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카이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이 없다’고 표현하는구나. 카이얀 본인이야 일반인의 입장이지만 루크는 다를 것이다. 일반인과 비교했을 때 비정상적으로 발달된 청각과 시각을 제 본래 감각이라 느끼며 지냈을 텐데.
“불편하거나 그러진 않고요?”
“네. 괜찮습니다.”
“그래요. 다행입니다.”
카이얀은 예열된 팬에 양파와 버섯과 감자와 파프리카를 쏟아 부었다. 양친이 사망한 후 줄곧 혼자 살아 요리에는 어려움이 없지만, 대강 해 먹는 버릇이 있어 재료를 순서대로 넣는 일은 드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닭이라도 하나 사 올 걸 그랬네요.”
카이얀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자기야 아무렇게나 먹어도 늘 이 몸이지만, 루크는 또 어떨지 모른다.
단백질 같은 게 필요하지 않을까? 카이얀은 잠깐 루크의 몸을 살폈다. 조금 야위었나? 아니, 워낙 근골이 단단해 말랐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요즘은 어디 또 아프다든가, 그러진 않고요?”
“네.”
“어… 그렇다니 다행이지만, 좀 더 생각해 보고 대답해도 됩니다.”
너무 즉답이 나와 카이얀은 일부러 그런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루크는 바로 대답했다.
“몸에는 전혀 이상 없습니다.”
카이얀은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재료를 섞었다. 마음이 불편해졌다. 루크는 거의 강박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제 몸이 멀쩡함을 주장하고 있었다. 정말 멀쩡해서 괜찮다고 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루크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괜찮다고만 대답한다는 데 있었다.
역시 어제 일이 마음에 걸렸다. 어정쩡하게 하다 만 사과도. 어제의 이상 상태야말로 가장 큰 문제였을 텐데, 그 일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않는 루크의 태도도.
하지만 카이얀은 일단 입을 다물었다. 루크가 어제 자기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설명해 달라고 해도, 제대로 설명해 줄 자신이 없었다.
이 문제는 미뤄 두자.
카이얀은 퍼즐을 한쪽에 두고, 채소 볶음을 식탁으로 옮기며 그렇게만 생각했다. 간하는 걸 깜빡 잊었다는 게 떠올랐지만 이제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카이얀은 루크에게 앉으라고 말한 후 먼저 맛을 봤다.
“싱거운데.”
하지만 카이얀은 굳이 다시 소금을 뿌리지 않았다. 사실 카이얀이 루크에게 기름진 음식을 잘 먹이지 않고 샐러드나 시리얼, 다진 고기 같은 것만 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카이얀은 루크의 미각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어쩌면 아주 약간의 소금간도 지나치게 짜다 느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보통 카이얀은 소금을 작은 그릇에 따로 따라주었다.
“아, 혹시 지난번에 외식했던 거 기억납니까?”
“외식 말씀이십니까?”
“집에서 말고, 밖에서 먹는 거요. 지난번에 왜, 그 밀리엄 장군님이랑 먹었던 것처럼.”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혹시 그 이후에 뭐 속이 좀 불편했다거나 하진 않았고요?”
진작 확인했어야 되는 일인데. 그날 마음이 번잡해서 잊고 있었다. 카이얀은 좀 미안해졌지만 루크는 그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었다.
“네.”
설령 이상이 있었다 해도 루크는 없었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루크 씨가 싫었다거나, 발작하는 걸 모르는 척하려고 했다거나 한 게 아닙니다.”
카이얀은 그렇게 말했지만, 루크는 그 말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싫거나 귀찮았던 게 아니라면 왜 화를 내고 가 버린 것일까? 시간이 가면서, 어제 일은 마치 꿈처럼 남았다. 어떤 일은 희미했고 어떤 일은 또 놀랍도록 선명했다.
분명 카이얀은 망설이지도 않고 자신을 밀었다. 소파에 내팽개쳐졌을 때 걷어찬 것이야 당연한 일이라 어쩔 수 없다 해도. 그 전에 연구실에서 매달렸을 때도 카이얀은 냉정했다. 당혹한 표정 너머 언뜻 들여다보였던 짜증과 성가심이 그저 제 착각인지 아닌지, 루크는 분간할 수 없었다.
루크는 다른 통증과 성욕의 차이를 분간하지 못했다. 그러니 카이얀이 상반된 반응을 보인 게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루크는 처음으로, 지시를 어기고 입을 다물기로 했다.
카이얀은 루크 쪽에 식기를 놔주고 몇 번 음식을 깨작거렸다.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자 곧 밖에서 먹고 와서요, 하고 말하며 멋쩍게 웃는다. 뚜렷한 입매와 부드럽게 휘어지는 초록색 눈. 시선이 부딪치자 루크는 제풀에 놀라 포크부터 쥐었다.
또 그 느낌이다. 정원에서 책 읽는 카이얀의 얼굴을 보았을 때 느낀. 루크는 얼른 그 감각이 사라지길 기다렸지만 이번엔 지난번처럼 되지 않을 모양이었다.
들키면 안 돼.
루크는 눈길을 음식에 고정한 채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무슨 맛인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온몸의 신경이 카이얀을 향해 곤두선 듯한 느낌이었다.
“혼자 있을 때도 대강이라도 챙겨 드십시오. 자꾸 거르면 몸에 안 좋기도 하고.”
카이얀이 뭐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이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일까. 모든 감각이 카이얀에게 집중된 상태인데 왜 그가 하는 말은 잘 들리지 않을까. 하도 심장이 거세게 뛰어, 이러다간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와 버릴 것 같았다.
“아, 억지로 안 먹어도 되는데. 입맛 없으면 적당히 먹고 남겨요.”
루크의 얼굴이 경직되는 걸 보고, 카이얀은 대수롭지 않은 듯 물을 떠다 주며 말했다. 혹시 어디가 아픈가, 그래도 지금까지 이 정도 먹는 건 아무 문제도 없었는데……. 카이얀은 그런 염려와 함께 루크를 살폈다.
결국 루크는 식기를 내려놓았다. 배가 별로 안 고팠나, 카이얀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루크는 어느새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아.
카이얀은 그만 약간 몸을 뒤로 물리고 말았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라 고개만 숙이고 있던 루크는 거의 느끼지 못했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카이얀은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이렇게 피하기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카이얀이 막 일어나려고 몸을 앞으로 숙이는데, 루크가 선수를 쳤다.
“죄송합니다.”
벌떡 일어난 채 루크는 카이얀의 표정을 살폈다. 놀란 얼굴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약간… 졸려서…….”
카이얀은 어쩔 줄 모르고 얼굴만 붉히는 루크를 보고 말을 잃었다.
졸리다니, 지금 그 얼굴로 졸리다고?
곤란하면 말을 뚝 끊고 사라져 버려도 될 텐데, 말은 언제나 정확히 끝맺어야 한다고 배워온 루크는 그러지도 못하고 쩔쩔맸다. 그러다 카이얀이 바닥에 내려놓은 퍼즐 상자를 보고 마치 동아줄이라도 잡은 양 덥석 그것부터 집어 들었다.
“이건 그,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럼 저, 안녕히 주무십시오.”
겨우 말을 끝낸 루크는 거의 뛰다시피 해서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거실에 혼자 남은 카이얀은 좀 어안이 벙벙해, 한동안 그냥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루크가 다시 성욕을 느낀 이 상황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그냥 나랑 밥 먹은 거잖아. 아니면 너무 오래 억제되어 와서 시도 때도 없이 저럴 수밖에 없는 건가? 그보다도 왜 말을 안 하지, 저러다가 정말 심각한 일이 생겼는데 그것까지 숨기면? 몸에 이상 있으면 바로 말하라니까…….
혼자 끝 간 데 없이 이어지던 생각은 그 시점에서 딱 멈추었다.
말하면 어쩔 건데? 참아 보라고 할 건가? 아니면 자위라도 가르쳐 줘? 차라리 그냥 이대로 두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괜히 난감한 상황이 될 수도 있고.
그러다 카이얀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도 참 여러 가지다. 루크가 언제 연구소로 돌아갈지도 모르는데 이대로 방치하는 건 폭력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카이얀은 몸을 일으켜 2층으로 올라갔다. 마음이 무거웠다. 정말, 이건, 정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딱 혼자 하는 방법까지만 알려 주고 나오겠다고 굳게 다짐한 채 카이얀은 루크의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루크 씨, 잠깐 나와 보십시오.”
이상한 일이었다.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걱정이 솟았다. 아까 착각한 거라면? 단순 성욕이 아니라 통증이었다면? 카이얀은 문고리부터 확 돌렸다. 그런데 조금 밀리던 방문이 이내 다시 쾅 닫혀 버렸다.
“루크 씨? 안에 있습니까?”
있는 걸 알면서도 물었다. 반대편에서 문을 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카이얀은 똑똑, 다시 노크했다.
“열어 봐요.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닙니까?”
“없습니다.”
우기긴.
카이얀은 문고리에서 손을 뗐다.
“루크 씨, 아까 얘기했잖아요. 루크 씨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는데 왜 이럽니까? 문 열어 봐요.”
“전 정말 괜찮습니다…….”
루크는 이제 거의 애원하는 투였다. 그러는 중에도 호흡이 불안정했다.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으니까, 그냥 문 앞에서 비키세요.”
카이얀은 그 뒤로도 무수히 루크를 타일렀다. 그러나 루크는 카이얀으로부터 달아나지 못해 안달이었다.
처음에는 그러게 왜 어제 그런 말을 했을까 후회하던 카이얀도 점차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일곱 살 애도 아니고 이만큼 달랬으면 문을 열어야 할 게 아닌가. 생각해 보면 꼭 이 일이 아니더라도 문 여는 건 언제나 제 몫이었던 것 같았다.
“야.”
카이얀이 음산하게 내뱉은 건 루크가 자긴 괜찮으니 제발 내버려 두고 가라고 두 번쯤 더 말했을 때였다. 대뜸 반말로 부르자 안쪽의 기척이 뚝 멎었다. 카이얀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문 열어.”
루크는 쉽게 반응을 정하지 못하고 허둥댔다. 그는 문고리를 잡은 채 머뭇거렸으나 카이얀이 정말 짜증이 난 것처럼 보이자 확 겁을 먹었다.
아직까지 물리적으로 카이얀은 루크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루크는 카이얀이 무서웠다. 그 누구보다도 루크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존재였다.
루크는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문을 열었다. 카이얀은 그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탁, 제 등 뒤로 문을 닫으며 카이얀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열라고 했죠.”
“그, 죄송합니다.”
다행히 카이얀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선 채 루크를 위아래로 훑어봤을 뿐이다. 어쩐지 루크는 조금 위축이 되었다. 이대로라면 저번처럼 카이얀을 넘어뜨리고 억지로 올라타게 될 것 같았다.
“루크 씨, 다시 말하지만 난 이런 일 때문에 루크 씨를 싫어하진 않습니다. 루크 씨는 그냥 모르는 겁니다. 내가 알려 줄 테니까, 겁먹지 말고 알아 가면 된다고요. 무슨 말인지 알아듣습니까?”
좀 상냥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잘 되지 않았다. 카이얀도 내심으론 긴장하고 있었다. 남자 형제 없이 자란 데다가 남자 형제가 있었다 해도 이런 상황에선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다. 스물일곱 살이나 먹어서, 정확히 몇 살인지도 모르는 남자에게 성교육을 해 주게 되다니.
그것도 매번 자길 보고 흥분하는 남자에게.
“네.”
대답하면서도 루크는 여전히 자신 없는 모습이었다. 카이얀은 루크가 정신없이 흥분했던 그날, 제가 루크를 좀 거칠게 대했음을 인정했다. 그래서 최대한 표정을 부드럽게 풀고 루크에게 다가갔다.
“자, 단추 하나씩 풀고요.”
어쩌다 보니 어린애 다루듯 하고 있었다. 카이얀은 루크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 주었다. 사실 처음 단추에 손을 댔을 때 이럴 필요까진 없지 않나 싶었지만 그대로 손을 거두기도 머쓱했다. 카이얀은 루크의 셔츠를 천천히 벗겼다.
잘 다듬어진 몸이 빛 아래 드러났다. 같은 남자의 기를 죽이는 몸이었다. 다른 건 어떨지 몰라도, 근육만은 정말 잘 만들어진 예술품 같았다.
힘을 쓰기에 가장 용이한 형태로 근육을 발달시키면, 형태조차 저렇게 완벽해지는 모양이었다. 승모근에 대퇴근, 대흉근, 복직근……. 카이얀은 부러 잘 알지도 못하는 단어를 나열하며 자기를 진정시켰다. 정신 차려. 지금 감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음, 아, 사실 저도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지만.”
카이얀은 정말 당황스러웠다. 위만 벗겨서 될 문제가 아니다. 당연히 그건 안다. 그렇지만 차마 루크를 다 벗겨 놓고 여기저기 만지며 이렇다 저렇다 말해 줄 용기가 나질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이러면 안 돼. 죽도 밥도 안 된다고.
카이얀은 고개를 젓고 다시 정신을 붙들었다.
“자, 봐요.”
카이얀이 가볍게 루크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식은땀이 났다. 카이얀은 예전, 이쪽에는 거의 박사 수준이라고 자부하는 지그문으로부터 들었던 얘기들을 떠올렸다.
“남자도 그쪽으로 느낄 수 있어. 당연하지. 사실 사람 몸은 전부 다 성감대야. 유두가 어떻게 생겼나 생각해 보라고, 딱 봐도 나 만져 주세요, 하는 것 같지 않아?”
전혀 그렇게 안 생겼어! 카이얀은 이를 악물고 루크의 가슴팍을 거의 노려보다시피 했다. 그 시선에 루크가 놀라 주춤 물러나려 들 정도였다. 카이얀은 하는 수 없이 늘어져 있는 루크의 왼손을 잡아 턱 그의 가슴에 올려 주었다.
“자, 해 봐요. 만져 보라고요.”
루크는 카이얀이 왜 이러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만지긴 했다. 사실 루크는 카이얀이 제 몸에 손을 댄 그 순간부터 미쳐 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상하니까 그만하자고 매달리고 싶은 마음이 반, 이성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지난번처럼 입술부터 먹어 치우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루크 씨, 집중 좀 할래요? 기분 어때요? 나쁜 거 아니고, 아픈 것도 아니고, 이상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누구나 당연히 느끼는…….”
루크는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모순적이게도 정신이 바짝 깨고 몸이 확 달아올랐다.
“키스하고 싶습니다.”
민망한 마음에 계속 루크의 손만 보고 있던 카이얀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지금 뭐라고?
“안 됩니까?”
루크는 진지하게 물었다. 그러나 이미 반쯤 고개가 기울어져 있었다. 안 된다고 하면 안 할 겁니까? 그렇게 묻기도 전에 루크가 몸으로 대답했다.
루크의 입술이 카이얀의 것에 닿았다. 어쩐지 지난번보다 더 능숙해진 것 같았다. 전처럼 카이얀의 팔뚝을 쥐었는데, 거의 느끼지도 못할 만큼 가볍게 잡고 있었다. 그러나 카이얀이 놀라 떨어지려 하자 콱 힘이 들어갔다.
카이얀은 지난번처럼 당황하지 않았다. 손을 들어 루크의 어깨를 잡고 밀었다. 떠민 것이 아니라 떨어뜨린다는 느낌으로. 다행히 아직 이성을 잃지 않은 루크는 순순히 카이얀에게 밀려나 주었다. 타액에 젖은 입술을 슥 닦아 내고 루크를 보았다.
“루크 씨, 저기, 지금 이건 좀…….”
“이건 하면 안 되는 겁니까?”
루크가 정말 모르겠다는 듯 물어서 카이얀은 말문이 막혔다.
“나쁜 겁니까?”
젠장, 이분법적인 사람 같으니라고.
카이얀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나쁜 게 아닌데, 하면 안 되는 게 아닌데,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그건 아니지만 이건 좀.”
“싫으십니까?”
“아니, 싫은 게 아니라…….”
“하고 싶습니다.”
슬슬 또 루크의 이성이 날아가는 것 같았다. 눈에는 빛이 들어와 있는데, 움직임이 기묘했다. 루크는 본능이 이끄는 대로, 카이얀을 제 손에 쥔 채 빤히 내려다보았다.
난색을 표한 채 저를 올려다보는 카이얀은 여전히 어렵고 두려웠으나, 지난번처럼 밀어 버리고 걷어차지 않는 점이 루크를 안심시켰다.
“하게 해 주십시오.”
“루크 씨, 잠깐…….”
몸이 대답을 기다릴 수 없다고 하기에 루크는 기다리지 않았다.
“하겠습니다.”
아까보다 훨씬 더 따뜻한 감촉이었다. 루크는 카이얀의 입술을 자연스럽게 열고 들어왔다. 얼결에 입을 벌려 준 카이얀은, 치열을 훑고 입천장을 간질였다가 숨을 쉬기 위해 떨어지고, 또 갑자기 급박하게 밀고 들어오는 그 입술을 받아들였다.
윤락업을 운영하는 지그문과 친구인 주제에 ‘이런 건 사랑하는 사람과만 하는 겁니다.’라고 가르쳐 줄 생각은 없었지만……. 막상 이성이 남은 루크와 키스하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루크는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카이얀의 팔뚝을 잡고 몸을 고정시키더니, 이젠 한 팔을 내려 허리를 안았다. 루크가 저를 바짝 당겨 안자, 잔뜩 딱딱해진 그의 중심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의 것이 서로 닿자 루크가 아예 두 팔로 카이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카이얀은 당혹스러웠다. 루크가 흥분한 건 당연하지만 자기까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확실히 오랜만이긴 했다.
카이얀은 어정쩡하게 붕 떠 있던 두 손을 루크의 어깨에 짚었다. 단단한 몸이었다. 루크가 자연 제 한쪽 다리를 카이얀의 다리 사이에 넣으며 거리를 좁혔다. 카이얀이 숨을 쉬기 위해 떨어진 순간 루크가 그의 셔츠에 손을 올렸다.
“어…….”
카이얀은 주춤했다.
애도 아니고 벗겨 줄 필요 없는데.
“로스터드 씨도 해 주셨으니까, 저도.”
해명하듯 말하고 루크가 단추를 풀었다. 벗든 벗기든 상관없겠지 싶어 카이얀은 그가 내키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반쯤은 흥분한 상태, 또 반쯤은 체념한 상태였다. 이 방에 들어올 때부터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오래 망설였던 것 같기도 했다.
둘은 금세 전라가 되었다. 카이얀은 루크가 생각보다 능숙한 것에 놀랐다. 지난번처럼 이성을 잃지도 않았고, 막무가내로 휘두르거나 힘으로 짓누르지도 않았다.
그러나 루크는 키스를 마친 후 당혹했다. 그의 지식은, 카이얀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얕았다. 기껏해야 딱 한 번 본 성인 영화가 전부였고 동성 간의 관계를 다룬 것도 아니었으니 그 이상을 알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일단, 처음엔 누웠던 것 같은데.
루크가 기억을 더듬어 카이얀을 바닥에 눕혔다. 이불이 깔려 있지 않아, 카이얀은 등이 조금 배기는 느낌이었다. 어깻죽지가 바닥에 눌려 아팠다. 루크의 무게까지 실리자 통증이 만만치 않아 카이얀은 살짝 인상을 썼다.
카이얀의 미간이 부드럽게 찡그려지는 걸 본 순간 루크는 갑자기 참을 수가 없어졌다. 카이얀 옆에 팔꿈치를 대고 몸을 가까이 하자 상체가 맞닿았다.
“읍, 아!”
루크가 달려들 듯 카이얀의 입술을 삼켰다. 그 입술이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루크의 입술이 가슴을 지나다 멈칫했다.
“해도 됩니까?”
아래서 빤히 올려다보며 묻는데, 카이얀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안 된다고 하면 안 할 거냐고.
“하겠습니다.”
이쯤 되면 숫제 통보였다. 곧 루크가 맹렬하게 카이얀의 가슴에 매달렸다. 자극을 받아 단단해진 유두를 집요하게 핥더니 흥분을 조절하지 못한 듯 콱 깨물고 말았다.
“윽!”
감미로운 아픔 정도가 아니라 카이얀의 몸이 순간 확 튀어 올랐다. 카이얀은 루크가 어설프게 영화를 흉내 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뭐라고 말해 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루크 씨, 잠깐, 너무…….”
“왜.”
루크가 문득 입술을 떨어뜨리고 말을 시작했다. 루크는 제 침에 젖은 카이얀의 가슴팍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진지하게 물었다.
“왜, 괜찮아지지 않는 겁니까?”
“…….”
그거야 당신이 지금 터지기 일보 직전인 당신 중심을 해결 안 했으니까. 카이얀은 속으로만 대답했다. 그러나 사실 카이얀의 상황도 좋지만은 않았다. 능숙하지 못한 애무에 반쯤 흥분했지만 제 걸 먼저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픕니다.”
하나도 안 아픈 얼굴로 그렇게 말하니 더 할 말이 없었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갑자기 시야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루크가 카이얀의 양 옆에 손을 짚은 채, 위에서 카이얀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르쳐 주십시오.”
저를 내려다보는 파란 눈. 잔뜩 흥분한 몸과는 달리, 너무나 순진하고 무구한 눈빛. 긴 키스로 붉어진 입술.
카이얀은 어쩐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루크 씨, 잠깐만요.”
카이얀은 일단 제동을 걸었다. 사실 카이얀도 자기가 무슨 정신으로 이 방에 들어왔는지 정확히 몰랐다. 내심으론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예상과 실제는 정말 다른 것이어서, 막상 일이 이렇게 되자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이래도 되나? 이 사람은 이 방면으론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앤데, 어쩌면 이 관계는 루크에 대한 성적 학대일 수도 있지 않나?
난감한 처지가 되자 상황과 맞지 않는 생각들이 머리를 찔렀다. 그러나 루크는 슬슬 안달을 내고 있었다. 그가 카이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재촉했다. 뜨거웠다.
“원래 이렇게 오래 걸리는 겁니까?”
“아뇨, 제가 생각을 좀 하느라.”
“원래 이렇게 많은 생각이 필요한 겁니까?”
루크가 카이얀의 목덜미와 귓가를 지분거리며 재차 물었다. 구강기도 아니고, 마치 루크의 모든 에너지가 그의 입술에 집중되어 있는 듯했다. 카이얀은 역시 마스터베이션을 알려 주는 게 좋겠다 싶어 일단 루크의 어깨를 밀었다.
“좀 떨어져 보십시오. 혼자 하는 걸 알려 줄 테니까…….”
“싫습니다.”
“네?”
“혼자 하는 건 싫습니다.”
나보고 어쩌라고……?
카이얀은 그렇게 묻고 싶은 걸 참았다. ‘혼자 한다’의 의미가 뭔지는 알고 있나? 모르고 저러는 거면 혼자라는 말이 싫어서일 테고, 알고 그러는 거면 지식의 출처가 의심스럽다.
“루크 씨만 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얼결에 그렇게 뱉어 놨는데, 루크가 카이얀의 목에서 입술을 떨어뜨렸다. 그러면서 전처럼 카이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싫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야.”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라, 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제가 싫으십니까?”
“아뇨.”
카이얀은 확 정신이 들었다.
잘못된 성지식이 전달되고 있어!
“관계를 거절하는 게 싫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어, 굳이 말하자면, 그, 좋지 않다 정도?”
“뭐가 다릅니까?”
“그러게요…….”
제 흥분을 가라앉히랴, 루크의 질문에 대답하랴, 카이얀은 반쯤 혼이 나가 버렸다. 이상한 대답을 들은 루크는 카이얀을 만난 이래 최고로 아리송한 얼굴이 되었다.
조금 풀이 죽은 것 같기도 했지만, 그의 중심은 전혀 달랐다. 이젠 그것의 존재감이 너무 확연하게 느껴져 카이얀이 슬쩍 몸을 빼려 들 정도였다.
“가르쳐 주시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알아서 하긴 뭘 알아서 해?
안심시키려고 한 말인 모양이지만 더 못미더워졌다. 그러는 중에 카이얀의 의식도 점차 혼탁해지고 있었다. 어떻든 상관없지 않을까. 루크에게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도 마찬가지고, 또 이건 가르쳐 준다는 측면에서.
그런저런 이유를 다 집어치우고서라도, 몸이 동했다. 그게 카이얀의 가장 큰 문제였다. 하고 싶지 않았다면, 루크가 뭐라고 매달려도 혼자 하는 법을 알려 주고 나가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루크의 입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었고, 이제 슬슬 올라온 손이 카이얀의 중심을…….
“저기, 저기요!”
“이렇게 하면 됩니까?”
무구한 얼굴로 루크는 묻고 있었다. 카이얀은 상체를 일으켜 세워 루크의 손이 어디 있는지를 보려고 했는데, 루크가 다른 손으로 카이얀의 어깨를 눌러 고정했다. 꽤 강압적인 태도라 카이얀은 당혹해서 루크를 보았다.
루크의 손은 카이얀의 것과 제 것을 동시에 잡고 있었다. 뜨겁고 단단해진 것이 맞닿자, 두 사람의 얼굴이 거의 동시에 상기되었다.
루크는 가르쳐 주지 않아도 할 수 있다는 듯 손을 움직였다. 제 중심에는 손도 못 대고 어떻게든 해 달라고 매달리던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로스터드 씨, 따뜻합니다.”
“그런 거 좀… 말하지 마세요.”
“안 됩니까?”
젠장, 무슨 말을 못하게 하네.
그 와중에 루크가 갑자기 허리를 쳐올려 확 마찰이 일어났다. 카이얀은 신음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자기도 모르게 이를 꽉 깨물어 볼 안쪽이 욱신거렸다. 왜 이렇게까지 참는 건지 자기도 알 수가 없었다.
불빛 아래 환하게 드러난 루크의 나신은 너무 잘 다듬어져 있었고, 그가 움직일 때마다 잘 짜인 근육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꼭 서로의 것이 밀착되어 있지 않더라도, 시각적으로도 자극이 컸다.
처음도 아닌데, 왜 환한 게 부끄러운지 모를 일이다. 카이얀은 결국 입을 열었다.
“불, 꺼도 보이죠?”
“네. 예전보단 좀 어둡게 보이지만.”
“그럼 끄는 게 좋겠습니다.”
“꼭 그래야 합니까?”
오늘 대체 왜 이렇게 말을 안 듣지?
카이얀은 흥분한 와중에 의아하게 루크를 올려다보았다. 루크는 별로 머뭇거리지도 않고 대답했다.
“보면서 하는 게 좋습니다.”
“보인다면서요.”
“환하게 보면서 하는 게 좋다는 뜻이었습니다.”
난 싫은데요, 라고 말하기도 전에 루크가 카이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면서도 손은 부지런히 움직였고, 루크는 그대로 한차례 사정했다. 카이얀의 배 위에 정액이 흩뿌려졌다.
청소년기의 성욕을 느끼는 루크야 그 정도 자극에도 민감할지 모르겠지만, 카이얀 입장에서는 단단한 손이 예민한 곳을 주무르니 아프기만 했다. 키스만으로 흥분시키더니, 막상 이건…….
“아.”
루크는 제 사정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카이얀은 한차례 사정했음에도 별로 수그러들지 않은 그의 것을 보고 더 당황했다.
“이래도 됩니까? 이상한 겁니까?”
루크가 눈치를 살피며 그렇게 물었을 때, 카이얀은 딱 한 가지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정상입니다. 아주 건강하시네요.”
“로스터드 씨는 건강하지 않으십니까?”
오늘 루크와는 정말 대화가 통하질 않았다. 대체 왜 얘기가 그리로 튀는 건지 몰라 그를 보니, 루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로스터드 씨에게선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
여기서 네가 무작정 주무르기만 해서 그러는 거야, 라고 말해도 될까?
욱한 카이얀이 정말 진지하게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루크가 상체를 일으켰다. 루크는 잠시 그 상태로 누운 카이얀을 내려다보았다.
약간 떨어진 채로 보니 루크의 몸이 더 선명하게 보여 카이얀은 당혹했다. 그리고 루크가 그의 입술을 카이얀의 아래로 내렸을 때, 그 당혹은 배가 되어 카이얀을 후려쳤다.
“아니, 아니, 잠깐!”
루크는 카이얀의 말을 듣고 멈칫했지만 하려던 일을 그만두진 않았다. 다음 순간, 루크는 그대로 카이얀의 것을 삼켰다.
이래도 되나 싶었는지 끝만 물고 살짝 늘어지다가, 곧 키스할 때처럼 달려들었다. 목구멍으로 넘어갔는데도 루크는 전혀 당혹하지 않았다. 카이얀은 발로 루크를 밀어 버리지도 못하고 주먹만 세게 쥔 채 끙끙댔다.
단단한 손으로 만질 때와는 엄청나게 다른 느낌이었다. 온도와 압력이 달라지자 가라앉는가 싶던 흥분이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자기도 모르게 허벅지 안쪽이 움찔움찔 경련하고, 뱃속이 꽉 조이면서 허리가 들썩였다.
이따금 루크의 숨결이 닿을 때면 미칠 것 같았다. 어깻죽지와 꼬리뼈가 바닥에 눌려 아팠지만 금세 잊었다.
“흐읏!”
카이얀은 발을 들어 루크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다. 파정이 가까운 것 같았다. 더 참기가 어려웠다. 카이얀이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었을 때, 갑자기 루크가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카이얀은 지금 루크의 청력에 대한 것을 잊고 있었지만 지금 루크에겐 시각보다 청각이 더 큰 자극이었다.
“소리.”
루크는 카이얀의 것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더 내 주십시오.”
루크는 놀라고 있었다. 이 사람의 가쁜 숨소리, 단단한 바닥과 뼈가 맞닿는 소리, 움직일 때마다 들리는 모든 소리들이 놀라웠다. 카이얀이 더 참지 못하고 다시 신음을 내질렀을 때 루크는 그대로 사정해 버릴 것 같았다.
들을 수 있다는 게 이렇게 좋은 일인 줄 몰랐다.
루크는 다시 속도를 내어 달려들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루크는 점차 어떻게 움직여야 카이얀의 숨이 더 거칠어지고 움직임이 격렬해지는지 알아 가기 시작했다.
곧 카이얀은 떨어지라고 말할 새도 없이 파정했다.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루크의 입과 목이 뜨거워 그랬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루크는 입에 한가득 카이얀의 정액을 머금은 채 카이얀을 보았다. 카이얀은 너무 당혹해 더듬더듬 말했다.
“그래서 내가 하지 말라고… 일단 뱉…….”
“로스터드 씨도 건강하십니다.”
카이얀은 어쩐지 더 대꾸할 기운도 없어지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카이얀은 늘 건강했다. 아마 오랜 시간 약물에 노출된 루크보다 더 건강할 것이다. 하지만 일일이 대답해 줄 기운도 없어서 카이얀은 대충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일어나 앉아 보십시오. 혼자 어떻게 하는지 알려 줄 테니까.”
“하지만 원래 같이 하는 게 아닙니까?”
“어…….”
카이얀은 잠깐 머뭇거렸다. 그 영화에서 자위하는 장면은 안 나온 모양이지. 카이얀이 말을 고르고 있는데, 루크가 몸을 일으킨 카이얀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별로 부끄럽다는 생각도 없는지, 정좌하고 앉아 제 중심을 내보인 채였다.
한 번 사정했다 해서 개운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두 사람 다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카이얀은, 정말 자기가 루크와 끝까지 가길 원하는 건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보통은 여자랑 하는 겁니다.”
이런 대답을 하는 게 한심했다. 하지만 루크가 싫어서 거절하는 건 아니다.
포지션의 문제였다. 제가 올라타면 루크가 겁을 먹을 것이고, 그렇다고 루크보고 올라타라 하자니 삽입부를 푸는 방법도 모를 게 마음에 걸렸다. 위생상 관장도 필요할 것인데 별로 내키지도 않았고. 혼자 젤을 이용해 넓히는 짓을 할 생각도 전혀 없었다. 루크에게 방법을 알려 주는 건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렇게 손가락에 젤을 묻혀서, 처음엔 하나만 넣는 겁니다. 천천히요.’
와, 세상에.
잠깐 상상해 본 카이얀은 루크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저런 이야기만은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러나 루크는 여전히 상기된 얼굴이었다.
“전 로스터드 씨와 하고 싶습니다. 저나 로스터드 씨가 여자가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당연히 그럴 순 없죠. 그러니까, 보통의 여자는 아래에 성교를 위한 기관을 갖고 있습니다. 보통은 여자의 몸 안쪽으로 남자의 성기를 받아들이게 되고요.”
드디어 좀 성교육 같은 말이 나왔다. 카이얀은 한숨 돌린 것처럼 안도했다.
“성기란 건 루크 씨의 여기를 말하는 겁니다.”
카이얀이 가볍게 루크의 것을 가리켰다. 카이얀의 손이 가까이 왔을 때, 루크는 순간 숨을 멈추었다.
카이얀의 하얀 손만 눈에 들어왔다.
뱃속이 울렁거린다. 머리가 아프다. 귀에서 이명이 울리는 것 같다. 카이얀의 입술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다. 키스해 달라는 걸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루크는 제 안의 이상한 감각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카이얀은 그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설명을 이어 갔다. 빨리 말을 마치고 이 방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남자에겐 그런 기관이 없습니다. 그러니 보통은 여자랑 함께하게 되는데, 이게 아무 여자랑이나 가능한 게 아니라 서로 연인 관계거나 합의한 사항일 때…….”
“로스터드 씨.”
드물게 루크가 말을 끊었다. 카이얀은 뭔가 싶어 루크를 보았다가 당황했다. 루크가 자기를 너무 빤히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키 차이가 있으니 앉은키도 루크 쪽이 좀 더 컸다. 평소에는 올려다본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는데, 잘 다듬어진 나신을 앞에 두고 있으니 루크가 왠지 더 커 보였다.
“네? 못 알아듣겠는 거 있습니까?”
“만져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번에 카이얀은 루크의 말을 정확히 알아들었다. 그야, 루크의 것이 다시 당장에라도 파정할 듯 단단해진 게 보였으니까. 카이얀은 약간 황당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해서 루크를 타일렀다.
“그러니까 꼭 제가 해 줄 필요 없이, 루크 씨가 혼자 해도 된다는 얘길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만져 주십시오.”
“내 말 안 듣고 있죠?”
“저도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더니 루크가 덥석 카이얀의 것을 잡았다. 카이얀의 몸이 펄쩍 뛰었다. 안 그래도 민감해진 상태인데, 불시에 타인의 손이 닿으니 놀란 것이다. 루크가 카이얀의 것을 놓아주지 않아, 카이얀은 선뜻 일어나지도 못하고 루크의 손목부터 잡았다.
그러나 루크는 그걸 느끼지 못했다. 카이얀의 중심이 제 손에 있었다. 정작 카이얀은 저를 외면하고 있는데, 루크는 제 것이 다시 걷잡을 수 없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처음보단 아니라 해도 루크는 흥분 상태였다.
점차 카이얀의 말이 감미로운 흥얼거림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분명한데 무슨 뜻인지 하나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도 개의치 않았다.
루크는 참지 못하고 카이얀에게 바짝 다가갔다. 카이얀의 허리를 안아 그를 반쯤 일으켜 세웠다. 계속 카이얀의 것을 주무르며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자 카이얀이 어어, 하며 얼결에 끌려왔다.
“만져 주십시오.”
루크가 다시 카이얀을 물었다. 카이얀은 자기가 너무 오래 시간을 끌었음을 알았다. 다시 루크의 이성이 날아가고 있었다. 대체 이건 언제쯤 정상으로 돌아오는 거야, 보통은 제어할 수 있다고! 카이얀은 소리치고 싶은 걸 참으며 제 배에 닿은 루크의 것을 손으로 쥐었다.
“아!”
루크가 탄성을 흘리며 카이얀에게 달려들었다.
쾅!
카이얀이 그대로 뒤로 밀쳐지며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찡하고 골이 울렸다. 다음 순간 루크가 정말 글자 그대로 카이얀을 깔아뭉갰다. 카이얀이 그만두란 소리를 못할 만큼 미친 듯이 밀어붙이더니 갑자기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대체…….”
“있습니다.”
루크는 조금도 헐떡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친 건 카이얀이었다. 그 잠깐 사이 카이얀의 상체는 얼룩덜룩해져 있었다. 루크가 짓씹은 가슴팍은 아예 멍이 들 것 같았다. 카이얀이 뭐가 있단 거냐고 묻기도 전에 루크가 홱 카이얀의 몸을 뒤집었다.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턱을 바닥에 부딪치진 않았지만 충격은 여전했다. 루크가 제 허벅지 안쪽을 붙잡아 벌렸을 때, 카이얀은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것인지 직감했다.
“받아들일 수 있는 기관.”
루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덧붙였다. 카이얀이 충격 때문에 터뜨린 신음 소리가 루크를 자극했다. 카이얀의 호흡은 아까보다 더 거칠었다. 버둥거리는 팔은 명백하게 거부의 뜻이었지만 이성을 상실한 루크의 눈에는 그저 가벼운 손짓처럼 보였다.
카이얀은 속수무책으로 그에게 짓눌렸다. 하지만 루크가 다리를 꽉 잡고 있는 건 아니라서, 마음만 먹으면 그대로 걷어차 버릴 수도 있었다.
“될 것 같습니다.”
카이얀은 너무 당황해서 대처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루크의 것이 그대로 아래를 밀고 들어왔을 때, 미칠 듯한 격통이 척추를 울렸을 때, 카이얀을 움직인 건 본능이었다.
그는 오른쪽 무릎을 굽혔다가 강하게 루크를 걷어찼다. 경황 중이라 빗나갔는지 가볍게 스치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카이얀은 멈추지 않았다. 루크가 멈칫한 틈을 타 확 몸을 뒤집으며 그대로 루크의 얼굴을 걷어차 버렸다.
정통으로 들어간 게 느껴졌다. 카이얀은 비명을 참으며 벌떡 일어났다. 아래가 참기 어려울 정도로 욱신거렸다. 카이얀은 이를 악물었다.
“미쳤어요?”
카이얀이 버럭 소리쳤다.
“그대로 넣으면 찢어집니다! 평생 주머니 차고 다닐 일 있어요?”
루크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카이얀은 그대로 목소리를 높였다.
“얘길 하든가 물어보라고요! 정신이 없어서 그랬다고 하면 답니까? 이렇게 무작정 달려들어서… 내가 일반인이라 우스워요?”
너무 놀라서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루크가 짐승처럼 저를 덮쳤을 때, 힘없이 밀려나 머리를 찧었던 감각. 거기까진 괜찮았다. 커다란 개가 장난치자 달려든 거라고 이해해도 된다.
하지만 그 다음 일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아직도 아래는 엄청나게 화끈거리고 아팠다. 열상인지도 모른다. 분명히 찢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피가 난 것인지 조금 끈적거렸다.
카이얀은 선 채로 루크를 내려다보았다. 루크는 엉거주춤하게 몸을 일으킨 채 카이얀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카이얀의 말을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렇게 무작정 밀어 넣으면 안 되는 거였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루크가 다급하게 카이얀의 손을 붙잡았다. 카이얀은 저도 모르게 확 인상을 썼다. 강간이니 뭐니 할 생각은 결코 없다. 그러나 루크가 그렇게 순식간에 이성을 잃을 줄은 몰랐다. 이쪽 감각도 너무 오래 억제되었던 탓에 비정상적인 폭발력을 보이는 모양이었다.
“안, 안 그러겠습니다.”
“됐습니다.”
카이얀은 한숨처럼 말했다. 순식간에 사색이 된 루크를 보자 더 화낼 기운도 사라지고 말았다. 갑자기 흥분이 싹 가라앉고, 몸에 남은 루크의 흔적들이 불편하게 느껴지고, 그냥 동영상이나 던져 주고 말걸 하는 후회가 일었다.
“다치셨습니까?”
루크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카이얀은 아니라며 한 걸음 물러나려 했으나 루크는 놔주지 않았다. 좀 전까지 흥분에 젖어 나른하게 풀어졌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피 냄새가…….”
아, 이 사람은 후각도 좀 예민하다고 했다. 루크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자, 카이얀은 가볍게 그의 손목을 잡아 제게서 떨어뜨렸다.
“심한 건 아닙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물론 걱정이 필요 없을 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 루크에게 다시 제 뒤를 맡기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제대로 못 알려 줘서 미안한데, 아무래도 미뤄야 할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뚜렷한 피 냄새가 루크의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카이얀이 안 믿어 줄까 겁이 났지만 정말 카이얀이 다칠 줄은 몰랐다. 지난번처럼 자전거를 타다 넘어진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다치게 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5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죄송하다 소릴 세 번이나 들었다. 카이얀은 정말 괜찮다고 말했지만 루크는 안심하지 못했다. 피 냄새가 너무 강했다.
루크는 제 것을 내려다보고 거기도 피가 묻었음을 알았다.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대로 계속했다면 카이얀이 갈기갈기 찢어져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었다.
“치료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아뇨, 일단 전 좀 씻고… 자야겠습니다. 루크 씨 먼저 씻을래요?”
카이얀은 그렇게 이 난감한 상황을 정리했다. 주저하는 루크를 떠밀어 먼저 욕실로 들여보냈다. 대체 왜 이 짓을 했나 싶었다. 왜 동영상 생각을 못 했을까.
하지만 그런 건 과장이 심해 좋지 않았을 것이다. 카이얀은 옷부터 입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바닥에 눌린 어깻죽지와 허리가 몹시 아팠다.
침대부터 갖다 놔야겠다. 카이얀은 가볍게 인상을 쓰며 생각했다.
* * *
카이얀이 샤워를 마치고 상처까지 다 살피고 나왔을 때-다행히 생각만큼 심하진 않았다- 루크는 욕실 앞에 서 있었다.
또 그 예의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이었다. 카이얀이 나오자마자 움찔하더니, 욕실 쓸 거냐며 자연스럽게 물러나는 카이얀을 제대로 붙잡지도 못했다. 피 냄새는 사라지고, 바디 워시 특유의 화학약품 냄새가 났지만 그런다고 마음이 편해지는 건 아니었다.
“괜찮으십니까?”
“아… 네.”
카이얀이 깔끔하게 대답하니 더 할 말이 없었다.
카이얀은 물기가 덜 마른 머리를 털며 루크를 보았다. 왜 이러고 서 있었는지는 알겠는데, 선뜻 당신이 잘못한 게 아니란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기도 하고.
“물이라도 한 잔 마실래요? 목 안 마릅니까?”
자연스레 앞장서자 루크가 뒤따라 왔다. 물을 한 잔 따라 주고 소파에 늘어졌다. 상처 때문에 앉기가 조금 불편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부러 편한 척 행동하고 있는데, 루크는 영 태연하지 못하고 허둥댔다. 관계가 조금 편해진 후에는 앉으라고 말하지 않아도 자리를 잡았는데, 지금은 바짝 긴장해서 앉지도 못하고 있었다.
“루크 씨, 화 안 낼 테니까 앉아요.”
루크를 앉혀 놓고 카이얀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피곤해서 그냥 쓰러져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마무리를 제대로 해 주지 않으면 루크는 한잠도 못 자고 끙끙대기만 할 것이다.
“잠깐 너무 흥분해서 그랬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루크는 대답하지 못했다. 카이얀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걸 먼저 알려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흥분해서 이성을 잃진 않습니다. 아마 루크 씨 성욕이… 성욕이라는 건 루크 씨가 아까 느꼈던 그런 걸 말하는 겁니다. 루크 씨 성욕이 너무 오래 억눌려 와서 좀 비정상적으로 폭발하는 것 같은데……. 차차 나아질 겁니다.”
나아질지 심해질지 카이얀은 몰랐다. 하지만 극대화되었던 감각이 점차 무뎌지고 있으니 성욕도 점차 일반인의 것과 비슷해지지 않을까 짐작할 뿐이다.
“그러니까 루크 씨는 지금 좀… 몸이, 정상이 아닌 겁니다. 민간인의 몸과는 다르다고요. 그리고 그건 루크 씨 잘못이 아닙니다. 루크 씨가 잘했다는 게 아니라, 내가 루크 씨 몸이 조금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고, 그걸 이해한다는 얘깁니다.”
물론 걷어 차인 후에도 정신 못 차리고 힘으로 달려들었다면, 당장 내쫓고 문을 쾅 닫았겠지만.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사람 따라 다르지만 섹스는… 루크 씨가 영화에서 본 그걸 섹스라고 합니다. 아무튼 섹스는 보통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게 됩니다. 어, 정확히 말하면 하고 싶어진다는 게 맞겠죠. 경우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요. 사랑의 일부라고 해야 하나, 이건 견해에 따라 다른 문제라.”
그 뒤로 카이얀은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설명했다. 성적 쾌락이나 임신이나 연인, 결혼, 가족, 그런 것들에 대해서. 카이얀도 사실 완전히 진정되지 않은 상태라 말이 횡설수설 했지만, 어쨌든 루크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연인이 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과정에 대해선 제대로 이해한 듯 보였다.
루크가 오류를 범한 부분은 딱 한 군데였다. 카이얀이 설명을 끝내고 잘 알아들었느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네. 그러면 저는 로스터드 씨를 사랑하는 겁니까?”
“네?”
“사랑하면 섹스하고 싶어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카이얀은 멍하게 대답했다. 대답이라기보다는 그냥 추임새 정도였다. 루크는 진지한 얼굴로 카이얀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걸 사랑이라고 합니까?”
“아, 아, 잠깐만요. 사랑이랑 성욕은 다른 겁니다. 아니, 꼭 다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루크 씨가 저한테 성욕을 느낀다고 해서 그게 절 사랑한다는 뜻이 되는 건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게 당연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카이얀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몰랐으니까. 그러니까, 사랑하면 섹스하고 싶어지는데, 섹스하고 싶다고 무조건 다 사랑은 아니고, 그러니까 이게 선행관계의 문제라기보다는… 아니, 선행관계라는 말을 모르겠지…….
카이얀의 머릿속은 점점 엉망이 되었다. 카이얀은 띄엄띄엄 되는대로 뱉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루크 씨가 절 사랑하게 된다면, 저랑만 섹스하고 싶을 겁니다.”
“네.”
“하지만 루크 씨가 그냥 성욕을 느끼는 거라면, 길에서 마주치는 모든… 이건 아니고, 루크 씨 눈에 차거나 성적인 매력을 가진 사람들 모두와 섹스하고 싶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 차이를 알겠어요?”
당연히 모르겠지.
대답도 듣기 전에 그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루크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네, 알겠습니다.”
너무 쉽게 대답이 나오자 그건 또 그것대로 이상했다. 카이얀은 좀 더 부연 설명을 해 주고 싶었지만 몸이 거의 방전 직전이었다. 설명은 나중에 좀 더 해 줘도 되겠지. 안 될 것 같긴 했는데, 너무 피곤해서 그냥 넘어가고 싶었다.
“저는 로스터드 씨와만 섹스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저는 로스터드 씨를 사랑하는 게 맞습니까?”
카이얀은 너무 놀라 루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루크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아까 그렇게 흥분했던 사람답지 않게, 아주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 한편에는 기묘한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다른 사람과 하는 건 원하지 않습니다. 로스터드 씨와 하는 게 좋습니다. 물론, 그, 다치게 하지 않겠습니다.”
눈치를 보며 얼른 덧붙이는 말에 카이얀은 약간 멍해졌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나. 아니, 문제는 문젠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루크의 착각에 있었다.
“아니, 아까도 말했지만 모든 사람에게 성욕을 느끼는 건 아닙니다. 취향에 잘 맞는 사람을 아직 못 만난 걸지도 모르고요.”
“취향이 무슨 뜻입니까?”
“아…….”
이러다간 날 새도록 얘기가 안 끝날 것 같았다. 카이얀은 정말 너무 지쳐서 그대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손으로 가볍게 눈두덩을 지압하고 억지로 얘기를 잘랐다.
“나중에 마저 얘기합시다. 복잡한 얘기라서.”
“많이 아프십니까?”
루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카이얀을 붙들었다. 부축이라도 해 주려는 건가 싶어 픽 웃고 부드럽게 그 팔을 치웠다.
“아뇨. 그냥 좀 졸리고 피곤한 겁니다. 루크 씨도 올라가서 자요.”
예전에는 지시 사항이라고 생각해 따랐을 텐데, 루크는 굳이 카이얀의 침실 앞까지 따라왔다. 카이얀은 뒤따라 걷는 루크가 신경이 쓰여서, 절뚝거리지도 못하고 억지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걸어야 했다. 상처는 예상보다 심하지 않았을 뿐 멀쩡한 건 절대 아니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루크 씨도, 음, 이해하게 될 겁니다.”
톡톡, 독려하듯 어깨까지 두드려 주고 카이얀은 침실로 들어갔다. 루크는 카이얀이 침대 이불을 걷고 자리 잡는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어쩐지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사랑한다. 사랑. 동화책에서 본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어감이었다. 카이얀과 자전거를 타러 나갔던 날처럼 반짝거리고, 그가 넘어져 피 흘릴 때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카이얀과 함께 산책하던 그 아침처럼 평화로웠다가, 카이얀의 가지런한 손가락이 제 것에 가까이 왔을 때처럼 뜨겁기도 했다.
루크는 되뇌었다.
나는 로스터드 씨를 사랑하고 있다.
카이얀이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작은 기척들이 모두 놀라운 음악처럼 다가와 루크를 깨웠다. 루크는 다시 생각했다.
나는 저 사람을 사랑하는 거야.
주석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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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연, 『삼국유사』, 「사복이 말을 못하다」, 민음사, 2008, 469쪽, 원문은 “苦兮生死元非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