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명 폴라리스(개정증보판) 01
1장. 이 만남은 오류다
그해 27세가 된 카이얀 로스터드는 학계에서 주목받는 젊은 학자였다. 그는 세계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이었는데, 문화권과 시대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파고들어 연구하고 누구보다도 뛰어난 결과를 쉬지 않고 발표해 온 수재였다.
카이얀 로스터드는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지만, 학계는 물론이고 여성들의 관심까지 한 몸에 받고 있었다. 179cm의 훤칠한 키, 빛나는 녹색 눈과 금발, 창백한 피부, 날이 선 콧날과 강한 턱선 때문에 연구자보다는 모델이나 배우처럼 보였다.
연예계는 물론이고 정·재계에서도 카이얀 로스터에게 끊임없는 러브콜을 보냈다. 이 보기 좋은 천재를 자기들의 마스코트로 데려가지 못해 안달이 난 기업도 많았다. 연 억대의 연구 지원금을 제시하며 후원하겠다 자처하고 나선 곳도 많았지만, 카이얀 로스터드는 그 후원금이 아니어도 충분히 부자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대도시에 머물던 카이얀 로스터드는, 계속되는 관심이 성가셨는지 도시 외곽에 개인 가택을 마련해 어느 날 휙 떠나 버렸다. 이웃들은 물론이고 친구들조차 한동안 그의 거취를 알지 못해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신비주의도 이쯤 되면 보통이 아니라며 혀를 찼다. 가족사 역시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그에 대한 무수한 소문이 떠돌았다. 사실 고아라든지, 놀랄 정도로 닮은-얼굴과 머리 모두- 쌍둥이 형이 있어 둘이 번갈아 가며 연구를 한다든지, 학계 거물의 숨겨진 아들이라든지……. 하지만 그 말을 퍼뜨리는 사람들 스스로도 잘 알고 있듯, 모두 소문일 뿐이었다.
잘 생기고 똑똑하고 사람을 귀찮아 하는 천재 학자. 보통 사람들이 아는 카이얀 로스터드는 그 정도였다.
그의 오랜 친구, 나이란 캠벨 역시 거기 새로 덧붙일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정정해 주고 싶은 건 하나 있었다. 카이얀 로스터드는 사람을 귀찮아 하는 게 아니다. 경계가 지나친 것이다.
“너. 네 뒤에 누구야.”
카이얀은 눈에 보일 정도로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나이란은 자기 뒤에 서 있는 남자를 흘끗 돌아보았다. 바짝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남자는, 평범한 셔츠에 블랙진을 입고 있었다. 이렇게 입은 모습은 나이란도 처음이라 아직도 좀 낯설었다.
어쨌든 나이란은 카이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미루고 눈웃음을 치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안 들여보내 주는 거야? 그래도 거의 일 년 만에 본 친군데? 야, 넌 이사 가면서 나한테 주소도 안 남기고, 내가 여기까지 찾아오느라 얼마나…….”
“군인이잖아.”
카이얀은 나이란의 말을 뚝 끊었다. 그는 여전히 문고리를 꽉 쥔 채였다. 나이란은 좀 맥이 빠졌다.
여전히 감이 좋네. 평상복을 입혀 놨는데도……. 하긴, 저렇게 각 잡고 서 있으면 누구라도 알아보겠지.
하지만 나이란은 친구에 대해 한 가지를 더 알고 있었다. 생각보다 마음이 약하고, 밀어붙이면 꽤 쉽게 밀려나 버린다는 거였다.
“기자보단 낫잖아. 됐으니까 차나 한잔 줘.”
“너…….”
“자자, 들어가자니깐!”
나이란은 문가에 버티고 선 카이얀의 팔을 툭툭 쳤다. 카이얀이 비키지 않자, 나이란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그의 팔 아래로 몸을 숙여 집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카이얀은 기가 막혀 그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다시 현관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첫인상은 꽤 딱딱하단 거였다. 연푸른 계열 셔츠에 블랙진, 그런데도 남자는 어쩔 수 없는 군인으로 보였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자세로 꼿꼿하게 서 있는 남자는 꽤 미남이었다. 목을 덮지 않도록 짧게 자른 검은 머리카락에, 의도적으로 15도쯤 위에 고정되어 있는 푸른 눈.
꽤 안절부절못하고 있단 느낌이었다. 자길 여기까지 데리고 온 나이란이 안으로 들어가 버렸으니 자기도 따라가야 하는데, 카이얀이 문가에서 비키지 않자 행동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딱딱하고, 고지식하고. 카이얀은 남자에 대한 인상을 추가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에게 군인은 도저히 반길 수 없는 존재였다.
“으악, 야야야! 나 어떡해! 야야, 이거 무너진다고!”
“아, 저걸 그냥 진짜…….”
카이얀은 머리가 아파오는 걸 느끼며 휙 돌아섰다. 밖에 세워 둘 순 없으니 들어오란 뜻으로 문은 열어 두었다. 카이얀은 나이란의 비명 소리가 들린 곳으로 허둥지둥 뛰어갔다.
평소엔 결벽증이라도 있는 것처럼 깔끔하게 치워 두지만, 한참 연구를 진행할 땐 주위가 어지럽든 말든 관심도 없고 자료를 산처럼 쌓아 두는 스타일이었다. 나이란이 재수 없게 쌓인 책이나 자료를 건드린 게 분명했다.
“내가 연구실 건들지 말랬지!”
카이얀은 자기 연구실에서 무너지려는 책무더기를 온몸으로 얼싸안고 있는 나이란을 보고 기겁했다. 저게 무너지면 일백 프로 다 끝장이다.
저게 저래 보여도 체계가 다 분류되어 있는 거라고!
카이얀은 어떻게든 일을 수습해 보려고 했으나 쉽지가 않았다. 이미 키보다 더 높게 쌓여 있어서 조금이라도 건들면 무너질 게 분명했다.
“너 꼼짝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카이얀은 단단히 당부한 후 한쪽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겼다. 의자 위에 올라가 맨 위에 있는 책들부터 차곡차곡 바닥에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때 책 무더기가 무너지지 않게 버티고 있던 나이란이 물었다.
“야, 너 루크는 어쨌어?”
카이얀은 화가 난 상태였다. 분명 더없이 평온한 오후였는데, 연구도 잘되어 가고 있었는데, 일 년 만에 들이닥친 사람이 일을 다 망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카이얀은 루크란 게 그 군인을 말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대꾸하지 않았다.
“너 진짜… 루크! 루크, 들어와 봐! 와서 이것 좀 도와!”
“부르지 마, 더 망쳐 놓는다고!”
카이얀이 짜증스럽게 소리쳤으나 급히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소리만 들어도 어떤 폼으로 걸어오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걷는 것도 군인처럼 걷겠군.
카이얀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책 옮기는 일을 계속했다. 곧 남자가 안으로 들어온 것인지 가까워지던 발소리가 뚝 멎었다. 나이란은 반가운 듯 책을 안고 있던 한 팔을 떼고 남자를 향해 손짓했다.
“이것 좀 같이 잡아 줘. 이거 무너질 것 같……!”
“이 멍청아!”
팔을 치우면 당연히 무너지지!
카이얀은 자기와 나이란 쪽으로 빠르게 무너지는 책과 종이들을 보고 본능적으로 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나 지금 의자에서 있는데 뒤로 넘어지면 다치겠지, 책상 모서리에 부딪치는 거 아냐? 순간적으로 온갖 생각이 스쳤다.
다음 순간 누가 저를 확 잡아당겼다. 그대로 균형을 잃고 휘청했는데 곧 등이 안전하게 땅에 닿았다. 책이 우르르 무너지며 책상이며 바닥에 나뒹구는 소리가 났다.
예상했던 통증은 전혀 없었다. 카이얀은 얼굴을 가렸던 팔을 치우고 시야를 확보했다. 파란 눈을 발견한 순간 카이얀은 자기도 모르게 얼어붙고 말았다. 남자는 카이얀을 바닥에 눕힌 채 그의 얼굴 양옆에 손을 짚은 자세였다.
아 줄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카이얀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아마 이 남자가 의자 위에 멍청하게 서 있는 자신을 바닥에 눕히고 보호한 모양이었다.
고맙단 말이 나와야 할 타이밍이란 걸 알면서도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남자는 잠시 카이얀을 보고 있다가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카이얀은 바닥을 어지럽힌 책들을 대충 치우고 자리를 만들어 앉았다.
남자는 어느새 일어나 있었는데, 카이얀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흠칫 몸을 긴장시켰다. 잠시 보고 있자 뒷짐을 진 채 큰 목소리로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명령은 없었지만, 위험하실 것 같아서 움직였습니다!”
톤이 낮은 목소리라 큰소리를 내는데도 듣기 거슬리지 않았다. 그래도 좀 조용히 말해 주면 좋겠는데. 카이얀은 한숨을 내쉬며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이란이 머리통을 문지르며 인상을 쓰는 게 보였다.
“너 무슨 꿍꿍이야. 여긴 왜 왔어?”
이렇게 된 거 빨리 용건을 듣고 보내 버리고 싶은 마음뿐이다. 카이얀은 숱이 적고 색감이 약한 금발을 탈탈 털어 내고 있는 나이란을 향해 물었다. 제 몸 정리에 정신이 없던 나이란은 카이얀 쪽을 보고 배시시 웃었다. 카이얀은 소름이 끼쳤다.
느낌이 안 좋아. 진짜 진짜 진짜로 안 좋다고.
“루크, 나 안 구하고 쟤부터 구하는 거야? 너도 얼굴 따지냐?”
게다가 말을 돌린다. 카이얀은 장난치지 말고 할 말 있으면 빨리 하고 가라고 쏴붙이려 했다. 그러나 곧장 이어진 남자의 대답이 그의 입을 막았다.
“죄송합니다. 오늘부터 이분이 제 상관이라고 들어서 그랬습니다.”
“…….”
카이얀은 멍하게 고개를 돌려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여전히 각 잡힌 자세로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두 남녀가 엉망이 된 방에 주저앉아 있는데, 저쪽만 저렇게 우뚝 서 있으니 현실감이 없었다. 그러니까 잘못 들은 거겠지, 하고 카이얀은 생각했다. 생각했다기보다는 그렇길 바랐다.
“이야, 벌써부터 아주 충성이…….”
“나이란. 너 제대로 대답해. 여기까진 뭐하러 왔어. 저 사람은 왜 데려왔고.”
말이 끊긴 나이란은 슬쩍 카이얀의 눈치를 보았다. 카이얀의 얼굴에선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저러면 안 좋은데.
나이란은 카이얀 쪽으로 슬며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부러 눈치를 보고 애원하는 얼굴을 꾸며 냈다. 반 정도는 진심이기도 했고.
“카이얀, 내 친구, 있잖아. 너도 알다시피 이번에 벤자민 라투르가 대통령직 연임에 실패했잖니? 그래서 내각 구성에 좀 변화가 있었단 말이지.”
“용건만 간단하게 해.”
“좀 들어 봐. 근데 우리 연구소가 라투르 정권 후원을 받고 있었단 말이야. 특히 비밀 실험은 돈이 너무! 정말! 심하게! 많이 들어서 그쪽 국방부 인사들 후원 없이는 진행 자체를 할 수가 없는 거 있지. 근데 저기 있는 우리 루크는 연구소에 있어서도 좀 특별한 케이스라 막 약물처럼 창고에 견출지 붙여서 보관할 수가 없거든. 생각해 봐, 사람을 물류 창고에 가둬 둘 순 없는 거잖아. 그치?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맡길 수도 없고. 루크한테 한 실험이 생각하기에 따라선 좀, 뭐랄까, 비인도적일 수도 있다고 해야 하나, 아주 약간 위헌(違憲)일 수도 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래서 함부로 노출되면 안 되거든.”
카이얀은 와락 인상을 썼다. 아니겠지. 설마 그건 아니겠지. 일 년 만에 불쑥 나타나서 한단 소리가 설마…….
“그래서 네가 좀 맡아 줬으면 해.”
그러면서 나이란은 두 손을 짝 맞부딪쳐 모아 보였다. 카이얀은 기가 막혀서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슬슬 저자세로 나오면 넘어갈 줄 아는 모양이지?
뭐라 욕이라도 하나 내뱉고 싶은데 무슨 욕이 제일 적절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가 멍청한 엉덩아, 평생 엉덩이만 먹고 살아라?
욕을 고르느라 침묵했는데 나이란은 그 틈을 타 벌떡 일어나 버렸다. 그러더니 슬슬 옆걸음질을 쳤다. 어질러진 책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움직이더니, 엉망이 된 책상에 손을 짚고 살짝 카이얀의 눈치를 살폈다. 곧 다물어졌던 입술에서 말이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루크랑 관련해서 발생하는 비용은 전부 연구소에서 지원해 줄 거야. 다시 연구 시작할 수 있게만 되면 바로 데려갈게. 어차피 여기 혼자 살긴 너무 크잖아. 기자들도 못 오겠다, 이웃도 얼마 없겠다, 낯선 남자랑 조용히 살기 얼마나 좋아! 하하하!”
“너 지금 그렇게 가면, 앞으로 두 번 다시 안 볼 줄 알아.”
카이얀은 음산하게 말했다. 거의 연구실 문까지 달아났던 나이란은 여전히 주저앉아 있는 친구를 보고 싱긋 웃었다.
“거짓말.”
마음도 약한 게.
“그럼 잘 부탁해. 안녕!”
쾅!
연구실 문이 거세게 닫혔다. 팔랑, 근처에 있던 종이가 그 기세에 가볍게 날아왔다. 눈앞까지 날아온 종이를 멍하게 보고 있다가 카이얀은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나이란을 뒤쫓았을 때, 그녀가 타고 온 차는 이미 출발해 버린 뒤였다.
카이얀은 현관에 멍하게 서서 멀어지는 차 뒤꽁무니만 보고 있었다. 방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손질 덜 된 정원에는 오후 햇살만 무심히 반짝거렸다.
은둔 수재 카이얀 로스터드, 아무 인연 없는 임시 퇴역 군인을 떠맡게 된 첫날이었다.
* * *
카이얀은 군인을 싫어했다. 눈물 없인 들을 수 없지만 꽤 흔해 빠진 개인사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개인사 때문이 아니더라도 카이얀과 군인은 애초에 그리 잘 맞질 않았다. 그는 상명하복이나 물 샐 틈 없는 규칙 같은 것들이 거북했다.
그래, 물론 그게 내가 저 사람을 싫어할 정당한 이유가 될 순 없지.
카이얀은 어느새 쭈뼛쭈뼛 제 뒤를 따라 나온 남자를 보며 한숨을 삼켰다. 그러면서 일단 연구실을 대충 치워 놓은 다음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현관을 떠나 연구실로 향하자 루크는 충실하게도 뒤따라왔다. 애써 그의 존재를 무시하고 연구실로 돌아오자마자 카이얀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연구실은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엉망이었다. 자료를 다시 정리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넘어지고 깨진 물건들까지 다 수습하려면 한참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제가 도울 것이 있습니까?”
허리를 숙여 가장 가까이에 있는 책부터 집어 들자, 루크가 물었다. 카이얀은 아주 잠깐의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
“아뇨. 제가 정리해야 뭐가 어딨는지 아니까 그냥 한쪽에…….”
참, 너무 엉망이라 앉을 데도 없지.
카이얀은 자길 다스리려고 한숨을 내쉬었다.
“거실에 가 있으면 됩니다.”
소파에 앉든지 하겠지. 알아서 물이든 뭐든 챙겨 먹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지만, 당장 거기까지 신경 기울여 줄 마음은 들지 않았다. 카이얀은 일단 창문을 열고, 기억을 더듬어 흐트러진 책을 하나씩 제자리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느라 시간을 한참 소비한 것 같다. 대충 정리가 끝났을 때, 카이얀은 더위를 느꼈다. 물이라도 한잔 마시고 거실에 멀뚱히 앉아 있을 그 군인을 어떻게든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뒤로 돌아섰는데, 아까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서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조금 곤란한 듯, 머뭇거리는 듯 카이얀의 움직임을 살피던 남자가 화들짝 놀라 눈을 돌렸다. 아까처럼 시선을 살짝 들어 올리는 모습에 카이얀은 덩달아 당혹하고 말았다.
“거실에 가 있으라고 했는데……. 계속 거기 서 있었어요?”
“죄송합니다. 거실이 뭔지 잘 모릅니다.”
카이얀은 자기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뭐라고요?”
그저 되물었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남자는 더 군기가 들어 조금 전보다 큰 소리로 또박또박 제 말을 반복했다.
“거실이 뭔지 잘 모릅니다.”
잘못 들은 건 아니군.
카이얀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거실이 뭔지 모른다니,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설마 거실이 어딨는지 모르겠단 말을 저런 식으로 하는 건 아니겠지. 만약 저게 저 사람 언어 습관이면 난감하겠네. 진작 말을 했으면 설명해 줬을 텐데 왜 나만 보고 서 있었지.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카이얀은 앞장섰다. 먼지가 잔뜩 묻은 손을 털며 거실로 가 물을 한 잔 마셨다.
“앉으세요. 물 한잔 드릴까요?”
“아닙니다.”
“아니면 커피? 주스?”
“죄송합니다. 뭘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여상히 묻다가 카이얀은 멈칫했다. 남자를 돌아보고, 물이 반쯤 담긴 컵을 싱크대에 탁 내려놓았다.
커피랑 주스가 뭔지 몰라?
“그리고 수분은 정해진 시간에만 섭취해야 합니다.”
덧붙이는 말에 카이얀은 더 이상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군대에 대해 잘 모르지만, 물 마시는 시간까지 정해 두던가? 물 아닌 다른 음료수는 그럴 수 있다 쳐도 물 마시는 시간까지? 물론 훈련 중엔 안 되겠지만……. 아니, 혹시 그런 것도 훈련의 일부인가?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어쨌든 당사자가 그렇다는데 집요하게 캐묻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럼 일단 앉으세요.”
남자는 조심스럽게 소파에 걸터앉았다. 등을 기대고 편히 앉을 거라고 예상하진 않았지만 저렇게 또 각을 잡고 앉을 줄은 몰랐다. 카이얀은 편하게 계셔도 된다고 할까 하다가, 내일이면 돌려보낼 사람인데 굳이 이래라저래라 할 필요는 없다 싶어 그만두었다. 그는 남자 맞은편에 앉았다.
“루크 씨, 맞으시죠?”
최대한 편하게 풀어가자. 사람 대하는 일엔 서툴지만 관련된 책이라면 연구하느라 많이 읽었다. 카이얀은 긴장을 흩어 버리려고 애썼다.
“네, 각하.”
삐끗. 다른 의미에서 카이얀의 긴장이 풀렸다. 각하라고? 이런 분위기만 아니었다면 웃어 버릴 뻔했다. 잘못 들은 건가 했지만 아닌 모양이었다. 카이얀은 자기가 하려고 했던 말을 잠깐 잊어버렸다.
“전 대통령이 아닙니다. 루크 씨 상관도 아니고요.”
“저는 귀하를 상관으로 모시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제가 잘못 전달받았습니까?”
“어… 아마 그런 것 같네요. 전 카이얀 로스터드고, 루크 씨에 대해선 사전에 아무 말도 못 들었습니다. 곧 나이란에게 연락할 테니까 오늘 저녁은 여기서 지내시고, 나이란이 오면 같이 가시면 됩니다. 그때까진 편하게 계세요.”
어색했다. 카이얀은 나이란에게 화가 났다. 내가 왜 연구하다 말고 이런 어색한 대화나 하고 있어야 하는 거지? 연구와 관련 없는 낯선 사람과 이렇게 오래 말을 섞은 지 벌써 몇 년은 된 것 같은데. 대답 없는 루크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을 때, 카이얀의 그런 생각은 더 강해졌다.
“캠벨 박사님은 제가 장기간 이곳에서 지내게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이것도 제가 잘못 전달받았습니까?”
아니 글쎄, 나는 아예 뭘 들은 적이 없다니까요.
카이얀이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서자 루크도 따라 일어났다. 카이얀은 재빨리 그를 만류했다.
밖으로 나가자 우편배달부가 와 있었다. 등기 올 게 없는데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지만, 종이봉투를 받고 서명을 했다. 발신지란에는 낯선 주소가 적혀 있었다.
발신자, 나이란 캠벨.
그대로 현관에 서서 봉투 입구를 뜯었다. 한 장짜리 인쇄물이 들어 있었다. 표지도 없고, 덧붙이는 다른 말도 없었다. 그냥 용지 맨 위에 볼드체로 ‘참고 사항’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카이얀은 선 채로 그 목록을 훑어 내려갔다.
간단한 목록으로 되어 있어 보긴 어렵지 않았지만,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한 지점에서 뚝 눈이 멈췄다.
[물은 여덟 시간마다 한 번씩, 각 1리터.]
카이얀은 멍해졌다. 수분은 정해진 시간에만 섭취해야 한다던 루크의 말이 떠올랐다. 뭐 더 든 게 없나 싶어 종이봉투를 거꾸로 뒤집어 탈탈 털었다.
알약이 든 네모난 봉투가 쏟아졌다. 뭔가 싶어 주워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비닐마다 8시, 16시, 24시라고 적혀 있었다.
카이얀은 불안한 마음으로 거실 쪽을 돌아보았다. 현관에서 복도를 따라 좀 더 안으로 들어가야 거실이 나오니, 여기서 돌아본다고 해도 루크를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더 이상하고 위험한 걸 떠맡게 된 것 같았다.
“안 되겠다.”
이러다가 정말 복잡하고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게 분명하다. 영문도 모른 채 이리저리 끌려 다녀야 할 남자에겐 좀 미안하지만 이쪽에겐 사정이란 게 있었다.
카이얀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았다. 괜히 어설프게 정이라도 들면 내보내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기 전에 빨리 일을 처리해야 했다.
방으로 가 차키와 지갑만 간단히 챙겼다. 그걸 본 루크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됐습니다.”
예상하고 있던 말이라 바로 대답이 나왔다. 남자가 움찔하는 게 보였다. 냉랭하게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신경이 예민해져 있다 보니 어조가 좀 사나웠을까.
그러다 문득 남자를 여기 두고 갈 수는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여긴 아무도 함부로 들이지 않는 사적인 공간이다. 게다가 목적지를 생각해 보면, 남자를 데려가는 게 더 효율적이다.
“아니, 그냥 따라오세요. 연구소로 갈 테니까.”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카이얀을 뒤따랐다. 카이얀은 문을 잠그고 차고 문을 열었다. 남자는 카이얀이 차고 문 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뭐야, 차고 처음 보나.
카이얀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차에 탔다. 하얀색 중고 세단이었다. 운전석에 올라 남자가 타길 기다렸다.
또 어벙하게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나이란의 차를 함께 타고 온 덕인지 무리 없이 조수석에 올랐다. 남자는 긴장한 상태였지만, 그러면서도 처음 소풍 나온 어린애처럼 들뜬 기색이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중요한 일은 아니라서 카이얀은 시동을 걸었다.
“벨트 매요.”
신경이 쓰여서 한마디 했을 뿐인데 남자는 또 허둥댔다. 아무래도 안전벨트 매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카이얀은 답답한 것을 꾹 참으며 벨트 매는 것을 도와주었다.
여자한테도 해 줘 본 적 없는 일인데…….
아무래도 이 군인은 일상적인 많은 것에 서툰 듯했다.
“감사합니다, 각하.”
“아, 좀.”
카이얀은 웃어야 하는지 울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차를 출발시키며 카이얀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아까 말했지만 전 대통령도 아니고 루크 씨 상관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꼬박꼬박 경칭 붙일 필요 없습니다.”
“네, 시정하겠습니다.”
시정하겠다니, 아주 가지가지…….
하지만 여기서 더 뭐라고 말하면 귀찮아지기만 할 것 같아서 카이얀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흘끗 옆에 둔 종이봉투를 확인했다.
나이란이 근무하는 연구소 주소는 꽤 낯설었지만 못 찾아갈 것도 없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교외.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자기 집이 도시 외곽이라곤 해도 차로 이동하면 금세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다행히도 멀지 않은 곳이니 한 시간이면 될 거라는 계산이 섰다.
“제가 운전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배우겠습니다.”
글쎄, 우린 곧 헤어질 거라니까.
카이얀은 그 말을 꾹 참았다. 생각이야 이렇게 해도 굳이 서로 기분 상할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네, 뭐.”
그래도 할 줄도 모르는 운전을 자기가 하겠다고 나서지 않는 게 어디냐 싶었다.
차는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집들이 드문드문 떨어져 자리를 잡고 있었다. 평화로운 곳이었다. 연구소가 있을 분위기는 아니다 싶었지만 카이얀은 속도를 늦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길눈이 어두운 편은 아니라 찾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사방이 다 평화로운 전원주택인데, 혼자 철조망을 두르고 있는 이상한 건물이었다.
카이얀은 비상등을 켜고 철조망 앞에 차를 세웠다. 남자도 뒤따라 내렸다.
[폐쇄. 출입금지.]
철조망에 붙은 그 팻말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카이얀은 남자에게 건넬 작별 인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철조망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썰렁했다. 그 흔한 고양이 하나 어슬렁거리지 않았다.
카이얀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품을 뒤져 핸드폰을 찾았다. 주소록에서 나이란 캠벨의 이름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 존재하지 않는 번호입니다. 번호를 확인하신 후 다시 걸어 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소린지는 알아들었는데, 받아들이기가 싫어서 그 기계음을 끝까지 들었다. 카이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침착하게 이 사태를 정리해 보려고 했다.
우편은 우체국을 통해서, 등기로 왔다. 그러니까 적어도 오늘 보낸 건 아니다. 분명 며칠 전에 미리 남자의 거취를 다 결정해서 우편 먼저 보내 놓고 오늘에서야 찾아온 것이다.
발신지 주소로 찾아와 봤더니 연구소는 폐쇄, 군인 따위를 떠맡기고 간 친구는 잠수.
카이얀은 멍하게 서서 결론을 내렸다.
나 꼼짝없이 낚였구나.
* * *
차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루크는 카이얀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루크는 연구소가 폐쇄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이란 캠벨 박사가 얘기해 줬으니까. 그러니 카이얀이 연구소로 가는 걸 미리 알았다면 거긴 이미 폐쇄되어서 가 봤자 아무도 만날 수 없다고 말해 줬을 것이다.
하지만 루크는 카이얀의 목적지를 몰랐고, 출발할 때부터 좀 기분이 저조한 것 같은 상관에게 목적지 같은 것을 물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루크는 차라리 그때 물어봤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중이었다. 폐쇄된 연구소까지 헛걸음을 하게 된 탓인지, 카이얀은 아까보다 더 기분이 나빠 보였다.
“나이란한테서 뭐 들은 거 없어요?”
갑자기 던져진 물음에 루크는 당황해서 조금 더듬었다.
“그, 네. 네, 그렇습니다. 달리 보고해야 할 점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습니다.”
카이얀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살짝 미간을 좁히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을 뿐이다. 카이얀은 올 때처럼 부드럽게 운전하고 있었으나 속도는 꽤 빨랐다. 다행히 교외 지역인지라 지나다니는 차가 많지 않았다.
루크는 카이얀의 표정을 살피다가 제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혹시 제가 놓친 게 있다면…….”
“아뇨. 됐습니다.”
카이얀은 꽤 냉랭하게 루크의 말을 끊어 냈다. 그게 그냥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라는 말인 것 같아서, 루크는 얌전히 침묵을 택했다.
카이얀의 머릿속은 루크의 짐작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하루아침에 식구가 늘어 버린 것이다. 가족이라곤 하나도 없고 친척이라고 해 봤자 왕래도 없어, 이젠 누구와 같이 살았던 기억이 아득해질 정도인데.
게다가 카이얀은 루크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나이란의 이상한 연구소 출신. 거실이 뭔지 모른다고 하질 않나 차고를 신기해하지 않나. 아까의 그 종이를 떠올려 보면 모르긴 몰라도 생활 전반이 꽤나 엄격한 통제하에 이루어지는 모양이고.
그냥 평범한 군인이었다면 받아들이기가 좀 더 쉬웠을까?
카이얀은 확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는 원래 사람과 함께 사는 걸 싫어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물론 군인도 싫어했다.
어느 모로 보나 루크는 카이얀이 반길 만한 군식구는 아니었던 것이다. 거기에 뭔가 수상하다는 점이 하나 더 따라붙은 것뿐이다.
“루크랑 관련해서 발생하는 비용은 전부 연구소에서 지원해 줄 거야.”
그러고 보니, 연구소가 폐쇄됐는데 어떻게 비용을 지원할 생각이었을까. 분명 계좌로 들어오겠지. 만약 연구소 이름으로 들어온다면 여전히 누군가 연구소 전반이나 일부라도 관리하고 있단 얘기니, 그 계좌를 추적해 볼까. 입금한 은행 같은 걸 알아내면 생각보다 일이 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게 언제 입금될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카이얀은 몹시 초조하고 짜증스러운 것을 억지로 다스리려 했다. 나이란이 옆에 없으니 괜히 루크에게 성질이 났다. 어차피 저 군인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게 분명하니까, 애먼 데 화풀이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차를 차고에 넣어 두고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어느새 어둑해져 있었다. 폐쇄된 연구소까지 가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렸으니 이미 늦은 저녁이 된 건 당연했다. 그런데 그 당연한 시간의 흐름이 왠지 또 짜증이 났다.
카이얀은 루크가 제 뒤를 따라오는 걸 느끼며 현관 열쇠를 꺼냈다. 그런데 그때 발밑에 탁 뭐가 걸렸다.
이건 또 뭐야.
더 이상 뭘 겪어도 놀라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서류 봉투였다.
내가 이걸 여기 두고 갔던가? 분명 연구소 주소를 보려고 차에 챙겨 갔는데.
카이얀은 봉투를 들어 올렸다. 입구가 봉해진 걸 보니 아까 그 정체불명의 종이가 들었던 봉투는 아니었다. 꽤 무게가 있었다. 평소 같았다면 집에 들어가서 씻은 후에 봉투를 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이상한 날이었으므로 카이얀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봉투를 한 번 뒤집었는데 ‘카이얀 로스터드 귀하’라고 적힌 게 보였다. 발신지도 적혀 있지 않았다.
카이얀은 루크가 뒤에 있는 걸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봉투 입구를 쭉 찢었다.
“하.”
기가 막히는군.
카이얀은 중얼거렸다. 봉투 안으로 손을 넣어 고무줄로 묶인 종이 뭉치를 꺼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종이가 아니라 지폐 뭉치였다. 수표도 아닌 현금, 그중에서도 가장 단위가 큰 지폐로만 수십 장 묶음, 그 묶음이 다시 열 개…….
무슨 생각으로 이 큰 돈을 현관 앞에 던져둔 거지.
카이얀은 지폐를 종이봉투 속에 도로 집어넣었다. 계좌 추적은 안 되겠네,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다시 연구 시작할 수 있게만 되면 바로 데려갈게.”
대체 그게 언젤까.
카이얀은 피로에 젖어 현관문을 열었다. 루크는 또 곧장 들어오지 않고 현관 밖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을 잠깐 보다가 카이얀은 묘책을 떠올렸다.
어차피 이 돈은 루크 앞으로 온 게 아닌가.
“저기, 나가서 오른쪽으로 한 20분 정도만 걸어가면 모텔 있거든요.”
그래도 이대로 보내는 건 뭔가 찜찜했다. 차로 모텔까지 데려다주는 건 조금 지나친 것 같고. 카이얀은 현관 서랍장에 놔뒀던 메모지를 하나 뽑아 자기 핸드폰 번호를 적어 주었다.
“자, 이건 루크 씨 돈. 너무 낭비만 안 하면 한 달은 호화롭게 살 거예요.”
봉투를 턱 안겨 주자 얼결에 받아 든다.
아,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이 사람이 다섯 살짜리 어린애도 아니고 당연히 돈만 있으면 어디서든 혼자 지낼 수 있잖아.
카이얀은 순간적으로 이런 해법을 생각해 낸 자기에게 뿌듯함을 느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서 루크를 봤는데, 무슨 말인지 전혀 못 알아들은 얼굴이었다.
순간 맥이 빠지긴 했지만 카이얀은 한 번 더 친절하게 반복해 주었다. 오른쪽으로 직진해서 20분만 걸어가면 모텔이 있다, 그 돈이면 충분히 오래 지낼 수 있고, 따로 지내는 편이 서로에게 좋을 거다.
“그럼 안녕. 만나서 반가웠어요.”
루크가 여전히 멍한 얼굴인 게 신경 쓰였지만 카이얀은 재빨리 문을 닫았다. 자기 것도 아닌데 쓸데없이 속만 시끄러워지는 돈도 없앴겠다, 그 김에 낯선 군인도 보냈겠다, 만사형통이라는 건 지금 같은 때 쓰는 말이다. 오늘 조사하려고 했던 건 꼼짝없이 내일로 미뤄야겠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카이얀은 느긋하게 샤워를 하고 늦은 저녁을 차려 먹었다. 간단히 샌드위치나 먹을까 하다가 오랜만에 기분이 나서 요리를 했다. 면을 삶고 소스를 뿌리고, 야채에 구운 콩까지 얹어 먹으니 살 것 같았다.
카이얀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눕기로 했다. 오후 일찍부터 나이란과 루크에게 신경을 쓰고 운전도 오래 한 탓에 그날 하루를 빨리 끝내 버리고 싶었다.
커튼을 치고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아주 잠시, 루크가 모텔에 잘 도착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카이얀은 이미 이불 속에 있었다. 그는 금세 잠들어 버렸다.
* * *
카이얀은 정해진 시간에 눈을 떴다. 여섯 시 알람을 끄고 카이얀은 기지개를 켰다. 평소보다 더 잔 탓인지 머릿속에 옅은 안개가 낀 것 같았지만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부엌으로 가서 물을 한 잔 마시자 완전히 개운해졌다. 최상의 컨디션이었다. 이대로라면 오늘 안에 자료조사 전반을 다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이얀은 현관문을 열었다.
“으악!”
카이얀은 펄쩍 뛰었다. 낯선 남자가 문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괴한이라면 이미 늦었다. 카이얀은 몸을 긴장시켰지만 상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카이얀은 그제야 뭔가 싶어 상대방을 살폈다. 루크임을 확인하자마자 경계심이 확 누그러졌지만, 요란하게 놀란 것에 대한 무안함과 짜증이 함께 폭발했다.
“대체 뭡니까!”
카이얀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냥 평소처럼 산책하려 했을 뿐인데, 하마터면 놀라 자빠질 뻔했다. 다행히 자빠지진 않았지만 그런 한가한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밖이 아직 어두워서 루크의 얼굴이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길을 막아서 화가 났다고 생각한 건지, 그는 재빨리 현관 옆으로 비켜났다. 카이얀은 얼결에 현관문 밖으로 나와 쾅 문을 닫았다.
“죄송합니다.”
“죄송이고 자시고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냐고요!”
“모텔… 모텔이 뭔지 모릅니다. 이게 뭔지도 잘 모릅니다.”
그러면서 루크는 봉투를 들어 보였다.
모텔이 뭔지도 모른다, 돈이 뭔지도 모른다……. 카이얀은 생각보다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하단 걸 깨달았다. 이후 자기의 행동을 쉽게 정할 수가 없었다.
“계속 여기 서 있었어요?”
“네, 그러면 안 되는 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말끝마다 저 죄송하다 소리. 듣기 거슬렸다. 카이얀은 루크의 얼굴을 살폈다. 밤새 추위에 떤 것인지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봄이라곤 해도 밤에는 쌀쌀하다. 새벽엔 이슬도 내렸겠지. 카이얀은 인상을 썼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참 좋았는데, 순식간에 몹시 불쾌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모텔이 뭔지 모르겠으면 날 불러서 물어봐야 될 거 아니에요. 난 당연히 가서 잘 자고 있을 줄 알았더니, 밤새 여기서 기다리면서 날 깨워야겠단 생각은 안 들었어요?”
이렇게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답답해서 그런지 말이 거칠게 나갔다. 루크는 뒤꿈치를 붙이고 정자세로 서서 내내 듣기만 했다.
“일단 들어와요.”
카이얀은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대체 뭘 어째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당장 해야 하는 일부터 하는 수밖에.
카이얀은 지금 바로 쓸 수 있는 침실이 있나 생각했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자기 하나만 사는 곳에 다른 침실이 있을 리 없다. 카이얀은 급한 대로 루크를 제 침실로 데려갔다.
그러다 문득 루크가 밖에서 신던 신발을 신은 채 안으로 들어왔다는 걸 깨달았다. 안에서 신는 슬리퍼가 따로 있어서 신발을 그대로 신고 들어오면 안 되는데……. 카이얀은 청소할 생각에 골치가 아팠지만, 걸레로 대충 훔치면 되겠지 하고 그 일을 미뤄 두었다.
“신발 벗고, 올라가서 좀 자요.”
“아닙니다. 수면 시간은 정해져 있습니다.”
카이얀은 확 신경질이 났다.
저러다 잘못되든 말든 알아서 하라지.
하지만 이상한 건 루크가 전혀 지친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거의 여덟 시간을 꼬박 밖에 서서 기다려 놓고도. 카이얀은 순간적으로 짜증이 가셨다. 그 자리를 약간의 섬뜩함이 채웠다.
기계 같은 몸이다. 정말 정해진 대로만 움직이게 훈련받은.
“어디 나가시려던 게 아닙니까? 허락하신다면 동행하겠습니다.”
아, 산책 나가려던 참이었지.
완전히 잊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산책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카이얀은 아주 불편한 죄책감을 느꼈다. 역시 자기 전에 모텔에 전화를 걸어 봤어야 했다.
거실이 뭔지도 모른다는 사람인데, 내심으론 그가 모텔에 가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자기가 매정한 사람이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생각해 보면 이 남자는 밖에서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했을까.
이런 죄책감 뒤로 또 다른 성가신 감정이 뒤따랐다. 따지고 보면 루크는 자기 책임이 아니다. 형도 동생도 친구도 아닐뿐더러 자기는 이 남자에 대해 아는 것도 거의 없다. 그런데 왜 이 남자를 여덟 시간 정도 밖에 세워 놨다는 것에 대해 이런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걸까.
나이란, 너 나중에 꼭 두고 보자.
“여기 앉아 있어요, 그냥.”
아무래도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이대로 남자를 차에 태워 모텔로 직행하는 수도 있었다. 하지만 카이얀은 그 대안을 폐기했다.
저 남자는 돈을 사용하는 방법도 모른다. 데려다주고 결제까지 대신해 준다 해도 의식(衣食) 중 그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루크를 두고 그대로 방을 나서려다가 카이얀은 이것도 어쩌면 모호한 말일 수도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카이얀은 인내심을 가지려고 애쓰며 침대 위를 탁탁 두드렸다.
“이게 뭔지 압니까?”
“모릅니다.”
“침대라고 하는 거예요. 딱히 할 게 있으면 여기 앉아서 기다리세요. 혹시 배고픕니까?”
“아닙니다. 아직 약 먹을 시간이 아닙니다.”
카이얀은 종이봉투 속에서 떨어졌던 알약 봉지들을 떠올렸다. 어제 자정에 먹었어야 할 약을 안 먹었겠구나 싶었다. 물도…….
카이얀은 흘끗 시계를 보았다. 여덟 시가 되려면 한 시간 반이 넘게 남아 있었다. 어차피 정해진 시간이 되기 전까진 아무 것도 먹지 않을 모양이니 잠깐은 그냥 둬도 괜찮겠지.
“그럼 전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문까지 함께 가겠습니다.”
“아뇨. 그냥 여기 있는 게 낫겠습니다.”
조금만 더 이 남자랑 있다간 답답해서 대머리가 될 것 같았다. 카이얀은 침실에서 나오며 괜히 제 금발을 한 번 손으로 빗어 보았다. 그리 길지도 않아 금방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지만, 벌써부터 몇 가닥씩 빠지는 것 같았다.
미치겠네.
정말 머리가 빠지는 것도 우습고, 이런 것에 신경 쓰는 자기도 우스웠다.
카이얀은 침실 밖으로 나와서 폐품 상자를 뒤졌다. 어제 루크를 만난 후부터 이렇다 할 연구를 하지 않아 폐지는 많지 않았다. 맨 처음 받았던 종이봉투는 금방 나왔다.
카이얀은 제발 자기가 이 안에 안내 용지와 알약을 다 그대로 넣었길 바라며 종이봉투를 뒤집어 탈탈 털었다. 다행히, 식탁 위로 처음 들었던 내용물들이 고스란히 쏟아졌다.
카이얀은 일단 알약부터 찬장에 올려놓았다.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그리고 ‘참고 사항’이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집 밖으로 나왔다. 안에 있으면 제 침실에 있는 사람이 신경 쓰여 집중이 안 될 것 같았다.
아침 공기는 쌀쌀했다. 새벽엔 더 추웠겠지. 서서히 동이 트고 있었다. 오늘도 화창한 봄 날씨일 게 분명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 시간에 산책을 하며 이번 연구가 끝나면 정원을 좀 돌봐 볼까 느긋한 생각이나 했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혼란스럽고 불편한 기분으로 길거리를 헤매고 있는지.
불평은 그만두고 카이얀은 종이를 살폈다. 대충 물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던 기억이 났다. 다른 것도 많았던 것 같은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모두 잊어버렸다.
[물은 여덟 시간마다 한 번씩, 각 1리터.]
[동봉한 알약은 봉투에 적힌 시간마다.]
[수면 시간: 평시에는 0시부터 5시.]
깔끔하게 인쇄된 글자를 훑다가 카이얀은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대체 뭐지? 군인들은 원래 이런 삶을 사나?
군인에 대해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절대 이렇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곧 카이얀은 맨 아래의 주의사항에 도달했다.
[정해진 행동 수칙을 준수할 것
알약이 아닌 외부 음식의 섭취, 불규칙하거나 정량 초과 혹은 정량 미만의 수분 섭취, 과다․과소한 수면 등은 피실험체의 신체(통제 변인)에 영향을 줌. 실험 결과에 예상 불가능한 오차를 일으킬 수 있음.]
이게 뭐야.
카이얀은 마지막 문단에서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동이 텄다. 카이얀은 갑자기 집에 들어가기가 무서워졌다.
* * *
루크는 카이얀이 지정해 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두 손은 가볍게 주먹을 쥐어 허벅지 위에 올렸다. 그는 여전히 돈이 가득 든 봉투를 들고 있었다. 푹신한 침대의 감각이 낯설었다. 사실 루크는 이런 걸 느껴 본 적이 처음이었다.
사방이 조용했다. 게다가 낯설기까지 했다. 혼자 있으니 더 그런 것 같았다. 물론 루크는 이미 많은 시간을 혼자 보냈으나, 이런 일은 쉽게 익숙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훈련받은 대로 루크는 머리를 비우려 애썼다. 언제나 그랬듯 잘되진 않았다. 실험을 주도하던 박사나 연구원들은 자주 “생각하지 마.”라고 지시하곤 했다. 생각하지 말고 명령에 따를 것, 착용한 무전기의 기계음 섞인 목소리에 복종할 것을 요구받았다.
요구받은 대로 행동하는 것이 루크가 가장 먼저 배운 일이었으므로 루크는 그대로 했다. 하지만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루크는 카이얀이 빨리 돌아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카이얀은 언제나 피곤해 보였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루크는 대부분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했지만 다른 군인들과 함께한 일도 없진 않았다. 때문에 그들을 통해 ‘분노’라는 감정을 배웠는데, 루크는 그들 사이에서도 겉도는 존재였으므로 자세한 걸 알진 못했고 그저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해야 했다.
그들은 얼굴을 붉히고 큰 소리를 냈으며, 몇몇은 카이얀처럼 인상을 쓰기도 했다. 루크는 그 감정의 이름이 ‘분노’라는 것을 알지 못했지만 좋지 않은 감정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나 때문에 화가 난 걸까?
카이얀은 줄곧 자기와 있었으니, 화가 날 다른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연구원들도 자기에게 하는 실험 때문에 자주 신경질을 내지 않았던가. 캠벨 박사는 ‘잠시 다른 실험을 받는다고 생각해.’라고 말해 줬지만… 루크는 처음으로 의문이 들었다.
카이얀은 사실 이 실험에 참여하는 게 아주 싫었던 건 아닐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현관과 침실은 꽤 멀었지만 루크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카이얀이 열쇠를 걸어 놓느라 짤랑거리는 소리, 실내용 슬리퍼로 갈아 신는 소리까지 전부 들렸다.
루크는 벌떡 일어나서 맞으러 나가려다가 카이얀이 여기 앉아 있으라고 했던 게 떠올라 다시 자리에 앉았다.
침실 쪽으로 걸어오는 발소리에 루크는 일어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소리는 문 바로 앞에서 뚝 멎었다. 그러다가 다시 멀어져 갔다. 무슨 일인지 몰라서 루크는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는데, 그 일은 몇 번 더 반복되었다.
루크는 카이얀이 대체 왜 저러는 건지 궁금했지만 참기로 했다. 카이얀으로부터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를 받았고, 괜한 행동을 해 카이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잠깐의 시간이 더 지나 마침내 문이 열렸다. 문만 연 채 카이얀은 여전히 방 밖에 서 있었다. 카이얀은 좀 머뭇거리는 것 같더니 루크에게 말했다.
“잠깐 나와서 얘기 좀 할래요?”
청유가 낯설었다. 루크는 그게 청유인 것도 몰랐다. 네, 하고 대답하며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크는 거실로 갔다. 카이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이야기는 보통 서서 듣는 편이었는데, 카이얀은 함께 어디 있을 때마다 자리를 권해 그것도 새로웠다.
“이게 뭔지 알아요?”
루크는 카이얀이 내미는 종이를 받아 들었다.
“네.”
대답하고 잠시 기다렸으나 카이얀은 말이 없었다. 루크도 계속 기다렸다.
카이얀은 답답해졌다.
도대체 이 사람에겐 눈치란 게 없나? 내가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부연해 주면 안 돼?
하지만 루크에게 그런 걸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결국 카이얀은 이게 뭔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라고 이야기해 줘야 했다.
“규칙들입니다.”
그게 ‘자세히’야?
맥이 빠졌지만 더 물어봤자 나올 게 없을 것 같았다.
“평소에도 이런 걸 다 지키면서 살아요?”
루크는 잠깐 당황했다. 카이얀의 질문이 너무 이상했던 것이다.
“네.”
대답이 약간 늦어졌다. 카이얀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치에 대해선 잘 모른다. 하지만 전 대통령에 대해서라면 교수들을 통해 들은 바가 있었다. 벤자민 라투르는 과학, 특히 인체 공학에 관심이 많았다. 세포와 조직, 장기 등을 연구하게 하고 유전자 분야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안드로이드 공화국이라도 만들 셈이냐는 빈정거림이 있을 정도였다.
예전에 나이란도 이렇게 팍팍 밀어주는 정권은 또 처음이라고 말했었고. 그 정권의 후원이 끊어져 실험을 계속 진행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역시 이 사람은 인조인간일까? 저 눈은 사실 강철로 만든 기계 부품이고, 칼로 배를 갈라 보면 피가 나는 대신 쇠 긁히는 소리가 나는 걸까?
하지만 루크는 인조인간이라기엔 뭔가 이상했다. 수분 공급이나 수면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고. 카이얀은 한참 동안 루크를 보고 있다가 자기 자신에게 약간 놀랐다.
관심 갖지 말자. 어차피 나이란이 금방 데려갈 사람이고, 인연이 있어 여기 있는 것도 아니다. 돌봐 줘야 할 어린애도 아니고 생활에 기본적인 것만 좀 더 익힌다면 서로 불편한 일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생각 같아선 다른 곳에 맡기고 싶지만 그건 안 될 것 같고, 나이란이나 연구소 쪽과 연락할 방법을 계속 찾아보면서 시간을 보내면 된다. 훈련받은 군인이라 지시라면 잘 따르는 모양이니 주의를 주면 함부로 움직이지도 않을 테고.
“좋아요.”
대강 정리를 끝낸 카이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크는 뭐가 좋단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건 내가 챙겨줘야 하거나 그런 건 아니죠? 알아서 할 수 있죠? 물이랑 알약이 어디 있는지 알려 줄 테니까, 옷은…… 옷에 대한 규칙은 없었던 것 같고.”
“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또 옷에 대한 규칙은 없습니다.”
“옷 뭐 따로 가져온 건 없어요? 입고 온 게 전부?”
카이얀이 가볍게 턱짓을 하며 물었다.
“네.”
“그것부터 해결해야겠네. 속옷도 없을 거고…….”
저쪽이 알아서 하겠거니 했는데, 생각보다 챙길 게 많았다. 카이얀은 잠깐 루크를 보다가 시간을 확인했다. 여덟 시가 되려면 30분 정도 더 지나야 했다. 원래는 산책을 다녀와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슬슬 연구실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일이 꼬이네.
그래도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밤새도록 문 밖에 서 있게 만든 건 좀 미안하기도 했다. 물론 상대는 그런 건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양이지만.
“필요한 거 먼저 알려 줄게요.”
늦어도 여덟 시엔 연구실로 들어가고 싶었다. 카이얀이 일어나자 루크도 벌떡 따라 일어섰다. 카이얀은 식탁으로 걸어가 거기 놓인 동그란 나무 대접의 용도부터 알려 주었다.
“알약은 여기다 둬요. 내 영양제 같은 것도 다 여기 두니까.”
“네.”
영양제가 뭔지는 알고 대답하는 걸까. 기본 생활 어휘가 많이 부족한 것 같았는데. 잠시 걱정했으나 영양제야 어차피 루크가 먹을 게 아니니 상관없었다. 자기 약은 잘 구분해 챙겨 먹겠지.
“알약 말곤 아무 것도 안 먹어요?”
“네.”
너무 당연하다는 듯 나온 대답에 카이얀은 약간 무안해졌다. 도무지 이 공상 과학 소설 같은 남자에게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럼 다른 건 필요 없겠고. 물 1리터라는 건 뭐, 알아서 재서 먹어야 되는 건가? 전 정수기 쓰는데, 그쪽은 뭘로……. 아니, 아니에요. 그냥 물 1리터짜리들 좀 배달시켜야겠네.”
정수기 소리를 하는 순간, 루크는 분명 그게 뭔지도 모를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괜히 정수기에서 물 떠먹는다고 오가다가 마주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당장이야 별수 없다 쳐도 앞으론 물을 주기적으로 배달시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옷은… 보통 뭐 입어요? 군복?”
“작전 수행 중일 때는 군복을 입습니다. 연구소에 있을 때는 보통 아무 것도 입지 않았습니다.”
카이얀은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자기도 모르게 어마어마하게 당혹한 얼굴로 루크를 돌아보았던 것이다. 루크는 뭔가 싶었으나 묻지도 못하고 딱 굳어서 카이얀의 다음 말만 기다렸다.
그 연구소, 인권이란 단어를 모르는 모양이지?
자신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긴 해도 별로 유쾌하진 않았다. 남자가 해 온 생활이 대략적으로 눈앞에 그려졌다. 살기 좋은 환경은 아니었을 것이다.
신경 끄자.
자기를 타이르며 카이얀은 하던 얘길 이어 갔다.
“여기서 벗고 지낼 순 없어요. 아무튼 밖에서 옷 살 줄은 모를 거고, 그렇다고 같이 나가는 건 유난인 것 같으니까 그냥 인터넷으로 주문하죠. 인터넷이 뭐냐면… 그냥 이따 보여 줄게요.”
“네.”
“방은, 지금 당장은 치워 놓은 게 없어요. 그나마 2층 서재 옆에 창고로 쓰는 방이 있는데 거기 알려 줄 테니까 따라와요.”
카이얀은 성큼성큼 2층으로 올라갔다. 서재 옆을 내주는 게 좀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전혀 정리가 안 되어 있을 게 뻔해 카이얀은 창고 앞에서 잠깐 한숨을 내쉬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불을 켰다. 역시 방 안엔 상자가 가득했고 그 위엔 먼지가 하얗게 쌓여 있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무상했다.
“치울 수 있겠어요?”
이 사람이 과연 손걸레가 뭔지 알까? 연구소에서 먹고 자는 것까지 전부 다 통제받고 지냈다면 청소 같은 걸 해 봤을 리 없는데.
아니나 다를까 루크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각을 잡고 대답했다.
“방법을 모릅니다. 배우겠습니다.”
“청소가 뭔지 알아요?”
“작전 지령 중의 하나였습니다. 지난 1월 4일에…….”
“잠깐.”
작전 지령이 ‘청소’라니.
짐작 가는 게 없는 건 아니지만 그냥 모르는 채로 넘어가고 싶었다. 새삼 이 남자가 두렵게 느껴졌다. 카이얀은 남자에게 청소에 대해 묻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됐어요. 내가 말하는 청소는 무슨… 무슨 군사 작전이 아니라 그냥 치우는 걸 말하는 거예요. 말하자면 여길 루크 씨가 지낼 만한 곳으로 만든다는 거죠.”
“저는 지금까지 캡슐 기구에서 지냈습니다. 여긴 새로운 형식의 캡슐입니까?”
아, 머리야.
카이얀은 캡슐 기구가 뭔지 대충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아마 SF 영화에서 보던 그런 거겠지. 설마 입에 호스 같은 걸 꽂고 부글부글 거품을 내며 초록색 액체 속에 들어 있었던 건 아니겠지? 아니,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루크 씨가 이해하기 쉬운 쪽으로 생각해요. 어쨌든 청소는 할 줄 모를 테니까 이건 이따 내가 치울게요.”
문득 이런 걸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카이얀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럼 일단 옷부터 골라 보죠. 방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내려와요.”
카이얀은 계단을 내려와 다시 1층으로 왔다. 컴퓨터는 자기 연구실에 있는 게 전부였다. 낯선 사람을 함부로 들이지 않는 곳이지만, 이미 나이란과 루크가 들어와 엉망으로 만든 전적이 있는 곳이다. 카이얀은 좀 자포자기한 심정이 되었다.
“자. 맘에 드는 거 골라 봐요.”
쇼핑몰 사이트를 하나 열어 남성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카이얀은 몇 가지 필수적으로 사야 할 것들을 헤아리고 있었는데, 운동화를 하나 더 사야 할까 이대로도 괜찮을까 생각하는 중이었다.
“다른 사람이 오는 겁니까? 옆에 있는 숫자는 이 군인들의 전투력을 수치로 나타낸 겁니까? 이렇게 높은 건 처음 봅니다.”
카이얀은 잠깐 루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 음… 아니요. 이건 모델이고요…….”
카이얀은 자기가 지금 엄청난 시간 낭비를 하고 있다는 걸 깔끔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이 사람은 아마 가정용 컴퓨터라는 걸 처음 볼 테고, 당연히 쇼핑몰 같은 건 알지도 못하겠지. 옷 가격을 보고 전투력 수치라고 생각할 정도라니, 이게 무슨 게임인 줄 아나. 물론 게임이 뭔지도 모를 것 같지만.
“좋아하는 색이?”
설마 색깔이 뭐냐고 물어보진 않겠지. 다행히 이 군인도 그 정도는 아는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좋아하다’가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카이얀은 다시 한번 루크를 돌아보았다. 카이얀은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러다 잠시 후 “알겠어요.” 하고 대답했다.
루크는 자기가 모르는 게 많아 카이얀을 성가시게 하고 있는 것인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카이얀은 딱히 화를 내거나 루크를 내버려 두고 사라져 버리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알 수 없는 기계를 통해 알 수 없는 작업을 했을 뿐이다.
루크는 카이얀이 고르는 ‘모델’이라는 군인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저 사람들도 실험에 참가했던 사람들인가? 여기서 같이 지내게 되는 걸까? 자기의 물음에 대해 카이얀은 ‘아니요.’라고 대답했지만 어떤 것에 대한 부정인지 루크는 알지 못했다.
새로 오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나은 실험을 받은 사람들이면 좋겠다고, 루크는 생각했다. 그럼 카이얀도 좀 더 즐거워질까. 그럴 것 같았다.
“아직 오전이니까, 특급으로 주문하면 오늘 저녁엔 올 거예요. 가격이 확 뛰긴 하는데 오늘 안에 오는 게 좋으니까.”
역시 모르는 단어가 있었지만 루크는 그 말을 대강 알아들었다. 카이얀은 시간을 한 번 확인하고 루크에게 거실로 가서 시간 되면 약과 물을 챙겨 먹으라고 말했다.
물이 올 때까진 정수기를 사용하라며 정수기를 사용하는 법도 알려 주었다. 그러더니 정수기를 보고 신기해하는 루크를 두고 휙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루크는 2층에서 뭔가 우당탕 떨어지고 뒹굴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카이얀이 걸어 다닐 때마다 발소리가 났다. 처음 들어 보는 요란한 기계음도. 루크는 그 소리를 들으며 카이얀이 알려 준 대로 정수기를 사용해 물을 마시고 약을 삼켰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계속 쥐고 있어서 구깃구깃해진 종이봉투를 내려다보았다. 분명 ‘카이얀 로스터드 귀하’라고 적혀 있었다. 왜 나한테 준 걸까. 루크는 망설이다 봉투를 식탁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 두었다.
카이얀은 루크의 방을 청소하느라 바빴고 루크는 할 일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는 동안 오전이 갔다. 중간에 카이얀은 지친 얼굴로 내려와 대강 점심을 챙겨 먹고 다시 올라갔다.
루크가 혼자서 16시 약과 물을 챙겼을 때, 벨이 울렸다. 카이얀도 벨 소리를 들었다. 창고에 쌓아 둔 모든 물건들을 다 치우고 먼지를 닦느라 기진맥진한 카이얀은 터덜터덜 1층으로 내려왔다.
루크가 눈치껏 나가 주문한 물건을 받아 오면 좋겠지만, 루크는 서명이 뭔지도 모를 게 분명했다. 아마 벨 소리가 뭔지도 모르겠지. 그래서 카이얀은 지친 몸을 끌고 직접 택배를 받았다.
“자, 이게 루크 씨 물건이에요.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차차 준비해 가고.”
물론 그러기 전에 이 이상한 관계가 끝나면 좋겠지만. 카이얀은 그리 무겁지 않은 상자를 바닥에 탁 내려놓았다. 그리고 상자를 열어 무지개 색 티와 바지를 루크에게 보여 주었다.
패키지 상품으로 나온 걸 주문했는데, 대강 고른 건 사실이지만 실제로 보니 더 별로였다. 하지만 내가 입을 것도 아니고 저 사람은 집에만 있을 거니까. 카이얀은 가볍게 생각하고 루크에게 물었다.
“맘에 들어요?”
물론 맘에 든다는 게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루크를 보았는데, 어딘지 좀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이얀은 뭔가 싶어 루크를 살폈으나 옷이 맘에 든다거나 안 든다거나 하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카이얀은 상자를 들고 일어나 루크의 임시 방으로 올라가며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뭘 생각한 거야?
루크가 ‘모델’이 군인이 아니라 옷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다시 루크의 방으로 올라간 카이얀은 그 나름대로의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 하나 더 들이는 데 이렇게 많은 준비가 필요한가?
옷을 가져오니 또 옷장이 문제였다. 생각해 보니 화장실 문제도 있다. 다행히 알약만 먹는다니 식기 때문에 귀찮을 일은 없겠지만, 하나씩 꼽아 보니 손톱깎이라든지 이불이라든지 세탁 문제라든지…….
그러고 보니 깜빡 잊고 아까 양말을 안 샀잖아! 거기 생각이 미치자 카이얀은 제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지금이야 봄이지만 날이 가면 여름이 될 거고, 그 당연한 사실이 카이얀을 괴롭게 했다. 그럼 그때도 일곱 색깔 무지개 반팔 반바지를 주문해야 하나? 그러고 보니 사람이 하나 더 들어와 살게 됐는데 관공서에 신고는… 안 해도 될 것 같긴 했다. 카이얀에게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이불. 이불부터 하자.”
그래, 남는 이불이 있다. 분명 침실에 남는 게 있을 거다. 카이얀은 빠른 걸음으로 침실로 가서 이불을 꺼냈다. 순간적으로 혼자 거실에 있는 루크가 지루할 거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지금 그 사람 방을 만들고 있는 거니까 어쩔 수 없지 싶었다. 이불과 베개를 들고 2층까지 올라갔는데, 이걸 한 번 빨아야 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아…….”
귀찮다. 그것도 엄청나게. 그냥 하지 말자.
냄새를 맡아 보니 옷장 냄새가 날 뿐이었다. 이불을 내려놓고 나니 이번엔 옷이 문제였다. 카이얀은 또 혼잣말을 했다.
“행거가 있나?”
없다. 평생 혼자 살 줄 알았으니 당연히 여분의 장롱 같은 게 있을 리 없고. 카이얀은 옷이 든 박스를 보다가 수납함 정도는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있긴 하겠지. 오래된 연구 자료를 정리해서 넣어 둔…….
여분의 수납함을 찾으려면 찾겠지만, 카이얀은 이미 창고 정리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쌓여 있던 상자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알맞은 장소로 옮겨 놓거나 버리거나 하는 데만도 몇 시간이 걸렸으니까. 일을 더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박스에 넣어 놓고 꺼내 쓰라고 해도 되겠지. 까탈스러운 편도 아닌 것 같고, 그런 걸로 까다롭게 군다면 염치가 없는 거기도 했다. 카이얀은 고개를 끄덕이고 대강 정리가 된 것 같은 방을 둘러보았다.
방은 지나칠 정도로 휑했다. 있는 거라곤 방금 가져다 둔 이불과 베개, 그리고 옷상자 정도였다. 기본적으로 집이 남향이라 햇빛은 잘 드는 것 같지만, 작년 장마철에 문제가 있었던 건지 하얀 벽 여기저기에 얼룩이 남아 있었다. 바닥만 시멘트로 변한다면 영락없이 감옥 같을 것이다.
“뭐, 하나씩 채워 넣으면 되겠지.”
뭘 넣어 줘야 할진 모르겠지만. 대체 뭐가 필요한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래도 이 정도면 며칠 더 지내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온몸이 뻐근했다. 그는 원래 육체노동에 능한 부류가 아니었다. 게다가 아침부터 지금까지 계속 먼지를 마셨더니 목까지 아팠다. 시계를 보니 네 시 반 정도였다. 브런치로 대충 끼니를 해결한 탓에 배가 고팠다.
내려가서 뭐라도 먹어야지. 루크 씨한테 방도 알려 주고.
거실로 가니 루크는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순간 한숨이 올라왔다.
나 지금 뭐하는 거지.
“루크 씨.”
불렀더니 습관처럼 벌떡 일어난다. 가까이 있었다면 분명 저 머리에 턱이 부딪쳐 혀를 깨물었을 거다. 거리를 두고 부르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카이얀은 턱짓했다.
“청소 다 됐어요. 보여 줄게요.”
루크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곧장 따라왔다. 카이얀은 루크가 지금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여기서 지내면 돼요.”
문을 열고 루크에게 방을 보여 주었다. 절대 대충 치운 게 아닌데, 왠지 자기가 좀 비인간적인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황량한 방이었다. 카이얀은 안으로 들어갔다. 루크는 방 밖에 똑바로 선 채 카이얀만 보고 있었다. 카이얀은 또 당황하고 말았다.
“어… 들어오죠?”
맘에 안 드나?
“들어가도 괜찮습니까?”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카이얀은 지금만큼 그 말의 의미를 절실히 깨달은 적이 없었다. 안 풀리는 문제를 앞에 두고 있을 때, 분명 어디서 봤는데 찾을 수가 없는 자료 때문에 온 연구실을 뒤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몇 배 정도 되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카이얀은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며 말했다.
“네, 루크 씨 방이니까요.”
‘그러니까 제발 빨리 좀 들어와라. 나 밥 좀 먹게.’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는데, 루크는 오히려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물론 원래 자세에서 더 굳어질 수 있다면 말이지만. 카이얀도 뭘 어째야 하는지 모르고 루크가 움직이기만을 기다렸다.
“제 방 말씀이십니까?”
“음… 네.”
당분간만, 이라는 말은 안 하는 게 좋겠지. 카이얀은 지금 루크가 왜 저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루크는 방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주먹만 쥐었다 폈다 하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저건 무엇입니까?”
루크는 이불을 가리켰다. 카이얀은 간신히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불이라는 거예요. 잘 때 덮고 자는 거요.”
“저기서 잡니까?”
루크는 놀란 것 같았다. 카이얀은 지금 자기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고 무작정 고개부터 끄덕였다.
“그럼 방은 잠을 자는 곳입니까? 네모난 캡슐 기구입니까? 연구원들이 가끔 방 이야기를 하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도 캡슐에서 잠을 잡니까?”
카이얀은 문득 아까 루크가 방을 보고 한 소릴 떠올렸다.
“저는 지금까지 캡슐 기구에서 지냈습니다. 여긴 새로운 형식의 캡슐입니까?”
그땐 귀찮아서 그냥 당신 편한 쪽으로 생각해라 하고 말았는데, 설명해 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 방은 그러니까, 루크 씨만 쓰는 곳이에요. 여기서 옷 갈아입고, 중요한 걸 두거나, 어, 잠도 자고, 책을 보기도 하고, 혼자 생각하기도 하고……. 여기서 실험을 하거나 그러진 않고, 그냥… 그냥 있는 곳이에요.”
이 사람은, 과연 책이라든지 생각이라는 단어에 대해 알까. ‘그냥 있는 곳’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을까.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카이얀은 말끝을 흐리며 루크를 살폈다. 과연 제대로 못 알아들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 전체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번져 있었다. 루크는 카이얀과는 다른 의미로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방이 이런 것인 줄 몰랐습니다.”
연구원들은 종종 ‘방에 두고 왔다.’라든지 ‘방에 가봐야 한다.’ 같은 말을 했다. 방이라는 게 뭔지 궁금했지만 물어 봤자 대답해 주지 않을 테니 묻지 않았다. 방에 대해 알지 못했고 앞으로도 알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뭐든 박사나 연구원이 가진 것은 루크의 것이 되기 어려웠다. 사실 루크가 손에 쥘 수 있는 건 무기 정도였는데, 그것도 작전이 끝나면 반납해야 하니 자기 것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루크는 아주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가슴이 이상할 정도로 뛰었다. 목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몸에 문제가 생긴 걸까. 루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감사합니다.”
카이얀은 좀 멍해졌다. 확신은 못 하겠지만 루크는 상상 이상으로 좋아하는 것 같았다.
루크는 루크대로 답답했다. 카이얀에게 이 감정을 알려 주고 싶은데,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카이얀은 루크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당연히, 이름 붙여서 말로 전하지 않는 감정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쩔 줄 모르는 루크를 보고 카이얀은 넌지시 물었다.
“좋아요?”
카이얀은 루크가 ‘좋다’의 뜻을 모른다고 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카이얀은 가볍게 루크의 팔을 잡고 방 안으로 들였다. 루크는 카이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좋다’는 거예요.”
이불이랑 옷상자 하나 달랑 있는 방을 줘 놓고 생색내는 것 같지만, 본인이 좋다니 상관없을 것 같았다.
“네, 좋습니다.”
루크는 대답했다. 그러더니 자기 대답이 뭔가 부족하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루크는 큰 소리로 다시 말했다.
“아주 좋습니다!”
“그래요. 좋아하니까 나도 좋네요.”
상대가 하도 좋아하니 카이얀이 넌지시 덧붙였다. 그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루크가 다시 외쳤다.
“0에서 10 사이의 숫자로 표현하자면 10만큼 좋습니다!”
“어…….”
말을 말자.
카이얀은 그냥 포기했다. 뭔가 저 표현이 좀 이상한 건 알겠는데 고쳐 줄 수가 없었다. 고쳐 주려고 했다간 왠지 말이 길어질 것 같았다. 카이얀의 마음과는 반대로, 루크는 그렇게 말한 자기에게 아주 만족한 모양이었다.
“그럼 있어요. 난 내려갈 테니까.”
카이얀은 뒤에 루크를 두고 밖으로 나왔다. 돌아보니 루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카이얀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순식간에 환해지던 루크의 얼굴은 생각보다 인상적이었다. 조금 감동받은 것 같기도 했지. 카이얀은 좀 이상한 기분이 되어 거실로 내려왔다.
거실은 여느 때와 똑같았다. 루크가 여기 한나절 이상 앉아 있었다는 흔적은 거의 없었다. 식탁 위에 놓인 종이봉투, 싱크대에 놓여 있는 컵 정도였다. 저녁 준비를 하려다가 몸이 좀 지친 것 같아서 그냥 식탁 의자에 앉아 버렸다.
의식하지 못했는데, 팔다리가 쑤시고 허리도 아팠다. 눈도 피곤했다. 먼지를 뒤집어써서 식사를 하기 전에 먼저 씻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고 나면 완전히 밤이 되겠지. 계획했던 일정이 틀어지는 건 당연히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맥이 쭉 빠졌다.
기진맥진해서 그러고 있는데, 똑바로 시립한 채 큰 소리로 외치던 루크가 떠올랐다.
“0에서 10 사이의 숫자로 표현하자면 10만큼 좋습니다!”
카이얀은 픽 웃었다. 아깐 기가 막혔지 웃기진 않았는데.
카이얀은 의자에 축 늘어졌다. 아침 여섯 시에 문 밖의 루크를 보고 기절할 만큼 놀라고, 안에 들여서 이상한 종이를 살펴 보고, 옷을 주문하고, 방을 치우고……. 이쯤 되니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오늘도 연구는 공쳤네.
“아주 좋습니다!”
뭐,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 * *
카이얀은 열일곱 살 이후로 누구와 같이 살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나이가 이미 스물일곱이니 누구와 같이 산 건 벌써 10년 전의 일이었다. 때문에 카이얀은 ‘누구와 같이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에 대해 거의 다 잊어버렸다. 게다가 상대는 평범한 하숙생 같은 게 아니라, 인터넷 쇼핑몰이 뭔지도 모르는 의문의 피실험체였다.
이 의문의 피실험체라고 상황이 더 좋을 건 없었다. 루크는 애초에 ‘집에서 산다’는 개념에 대해 몰랐다. 그리고 일반적인 사람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연구소 사람들과 같이 있기도 했고, 아주 가끔 다른 군인들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으니 사람에 대해 아주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같이 있었던 연구소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제 신체의 변화를 측정하고 기록하는 사람들이었고, 군인들은 루크의 존재를 불편해했으므로 교류랄 게 없었다. 그러니 루크는 사람에 대해 거의 모르는 셈이었다.
이렇듯 같이 살기엔 최악일 두 사람이 만났지만 별다른 문제는 벌어지지 않았다. 카이얀은 루크가 생활하는 데 필요한 대략적인 환경을 만들어 준 후 본격적으로 연구에 집중했다. 그는 거의 온종일 연구실에만 머물렀다.
루크도 거실 겸 부엌에 와서 물을 마시고 약을 먹을 때, 그리고 화장실을 사용할 때 외에는 자기 방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
그러니 자연 둘이 이렇게 마주치는 일은 꽤 드물었다.
카이얀은 거실에서 밥을 먹다가, 물과 알약을 챙기러 오는 루크와 마주쳤다. 엄청난 우연이네, 그 생각부터 들었다. 그러다 지금 자기들이 한 집에 살고 있다는 걸 새삼 기억해 냈다. 루크는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게다가 자기도 내내 연구실에만 있으니 루크와 같이 산다는 게 아직도 새롭고 낯설었다.
“안녕하십니까!”
루크가 척 먼저 경례를 붙였다. 카이얀은 잠깐 멍해졌다.
“경례 안 하셔도 되고요…….”
꽤 귀한 피실험체였던 것 같은데 대체 저런 건 누가 가르친 걸까. 집 안에서 군대식 경례를 받으니 카이얀은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파란색 많이 좋아하세요?”
루크는 파란 티셔츠에 파란 면바지를 입은 상태였다. 무지개 색 세트로 구입한 것이라 티와 바지의 색깔은 아주 똑같았다. 너무 이상한 꼴이라 웃음도 나지 않았다. 카이얀은 갑자기 심각해졌다.
물론 저쪽이 옷을 어떻게 입든 상관이야 없지만, 저건 좀 심하지 않나?
“원래 맞춰서 입는 게 아닙니까?”
군복이나 실험복 같은 걸 생각한 모양이었다. 카이얀은 뭐라고 말해 줘야 할지 몰라 잠깐 머뭇거렸다. 속옷과 양말까지 무지개 색으로 사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맘에 드는 대로 입으시면 돼요. 꼭 그렇게 색 맞출 필요는 없고요.”
그렇게 말하고 카이얀은 밥을 마저 먹었다. 루크는 물도 없이 알약을 삼킨 후, 냉장고에 있는 1리터짜리 물통을 하나 꺼냈다. 그러더니 그대로 뚜껑을 열고 물 1리터를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카이얀은 잠깐 밥 먹는 것도 잊고 넋이 빠져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루크가 물 마시는 건 처음 봤는데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차력 쇼를 보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무슨 물을 숨도 안 쉬고 마시네.
카이얀은 슬그머니 식기를 내려놓았다. 일반인이라면 먹다 그대로 토할 것 같은 양인데, 루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물 한 통을 선 채로 다 마셔 버렸다. 고개를 뒤로 젖힌 탓에 목울대가 울렁이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확실히 근사한 몸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카이얀은 루크가 물통을 냉장고 옆 박스에 내려놓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그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루크가 흘끗 카이얀 쪽을 살폈다. 눈이 마주치자 약간 놀란 듯 어깨를 굳혔다가 그 자리에 똑바로 섰다. 또 그 예의 군인다운 자세였다.
“지시할 게 있으십니까?”
딱히 그런 의미로 쳐다본 건 아니었다. 카이얀은 말을 돌렸다.
“물을 원래 그렇게 마셔요?”
“네.”
그렇다는데 할 말이 없었다. 식도가 두 갠가? 멍청한 질문을 안으로 밀어 넣고 카이얀은 딱히 시킬 일 같은 건 없다고만 말해 루크를 돌려보냈다.
저녁에 화장실에 가다가 루크와 마주쳤을 때, 루크는 또 초록색 티와 초록색 바지를 맞춰 입고 있었다.
하루도 안 지났는데 왜 갈아입은 거야?
자기도 모르게 불만이 일어난 건 세탁기 돌리는 게 귀찮아서가 아니었다. 파란색보다 초록색 맞춤이 더 끔찍해서였다. 카이얀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루크는 의아한 듯 물어왔다.
“어디 다치셨습니까?”
“아뇨.”
그냥 시신경이 좀 쑤시는 것 같네요.
“샤워기 쓸 줄 알아요?”
화장실에서 마주친 김에 그것부터 물었다. 모를 거라고 짐작했는데 루크는 안다고 대답했다. 샤워기가 뭔지 설명할 준비를 했던 카이얀은 좀 의아한 얼굴로 루크를 보았다. 그러다 아무리 그래도 연구소에서 씻는 것 정도는 했겠지 싶어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쓸래요?”
“제가 써도 괜찮습니까?”
카이얀은 가까스로 그 말을 알아들었다.
“네……. 그럼요. 안 씻고 살 수도 없고.”
깔끔 떠는 편은 아니지만 같이 사는 사람이 전혀 씻지 않는다면, 그건 사양하고 싶었다. 카이얀은 여분의 칫솔부터 꺼내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연구실에 있는 것만 아니면, 이것저것 꺼내서 써도 돼요.”
덧붙이자 알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먼저 씻을 거냐고 다시 물었지만 루크는 카이얀이 다 쓸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짐작했던 답이었다. 카이얀은 손에 아무 것도 없는 루크를 보고 가볍게 충고해 주었다.
“옷 들고 오는 게 좋을걸요.”
“아, 네!”
뭐라 지적한 건 아닌데, 실수라도 한 양 후다닥 뛰어 올라가는 걸 보고 카이얀은 한숨을 내쉬었다.
샤워를 마치고 안에서 옷을 입었다. 혼자 살 땐 그냥 바로 밖으로 나와 물기를 말리고 옷을 입었는데, 아무리 남자라도 다른 사람이 같이 산다고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었다. 어쩐지 옷이 좀 젖은 것 같아 찜찜했다.
밖으로 나오자 문 옆에 서 있는 루크가 보였다. 굳이 저렇게 정자세로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데. 거실과 연결된 곳이니 소파에 앉아 기다리는 쪽이 편할 거라고 말해 줄까 했지만 귀찮았다. 손에 빨간색 티와 바지를 들고 있는 걸 보고 카이얀은 당장 새 옷을 주문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저게 샴푸고요, 저게 비누예요. 수건은 저 문 열면 쌓여 있고요.”
이것저것 설명해 주고 난 후 문을 닫았다. 그리고 바로 연구실 컴퓨터 앞에 앉았다.
쇼핑몰, 쇼핑몰. 제발 저 무지개 옷 좀 치워 버리자.
이것저것 고르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루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여쭤 볼 게 있습니다.”
루크가 일사천리로 혼자 욕실을 사용할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카이얀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루크는 좀 난처한 표정이었다. 조금도 젖지 않은 걸 보니 시작도 못 한 모양이었다. 카이얀은 앞장서서 화장실로 갔다.
“샤워기를 찾지 못했습니다.”
카이얀은 욕조 위에 걸린 샤워기를 가리켰다.
“그게 샤워기입니까? 몰랐습니다.”
“뭔지 안다면서요?”
“연구소 샤워기는 위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줄을 당겨서 사용했습니다.”
카이얀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샤워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설마 어린애처럼 하나씩 도와줘야 하는 건 아니겠지.
“이건 이렇게, 수도꼭지를 위로 올리는 거예요. 이건 욕조에 물 받을 때 사용하고요. 그리고 이걸 이렇게 돌리면, 샤워기로 전환되면서 물이 나오는 거죠…….”
“소독하는 버튼은 어디 있습니까?”
카이얀은 이번엔 짜증도 나지 않았다. 그냥 멍해졌다. 카이얀의 표정이 변하자 루크는 좀 자신감을 잃은 모양이었다.
“연구소에서는 소독을 먼저 한 후 물로 씻어 냈습니다. 민간인의 방식에는 익숙하지 못합니다. 배우겠습니다.”
카이얀은 가슴 한구석에서 뭔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소독이라니, 액체를 말하는 걸까, 아니면 연기? 짐승이나 그렇게 씻긴다. 카이얀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자기가 무슨 취급을 당했는지도 모른 채 눈치를 살피며 배우겠다고 말하는 루크도 답답했다.
“그래요, 배우면 되죠.”
너무 깊이 마음 쓰면 안 된다. 카이얀은 자기를 타일렀다. 객관적으로 봐. 이 사람은 그냥 잠시 맡겨진 실험 군인일 뿐이야. 게다가 나이란의 말대로 심각하게 반인권적이고 위헌적인 실험에 참여하고 있는 듯했다. 깊이 엮여서 좋을 게 없었다.
카이얀은 참을성을 가지고 루크를 가르쳤다. 샤워기를 사용하는 방법과 샴푸를 사용하는 법, 거품을 내는 법 같은 것들을. 루크는 카이얀이 몇 가지 시범을 보이는 것을 보며 그의 설명을 주의 깊게 들었다.
카이얀은 내친 김에 세탁기에 세탁물을 넣는 방법도 가르쳤다. 그렇게 이것저것 알려 주고 나자 진이 쭉 빠졌다.
루크가 마침내 씻으러 들어간 후, 카이얀은 다시 연구실로 돌아왔다. 모니터에 아까 보다 말았던 쇼핑몰 페이지가 떠 있었다. 좀 지친 듯한 기분이 들어서 카이얀은 그 창을 닫아 버렸다.
카이얀의 연구가 끝날 때까지 두 사람의 관계는 그런 식으로 이어졌다. 기본적인 것을 가르치자 부딪칠 일은 거의 없었다.
두 사람은 가끔 거실이나 화장실에서 마주쳤고, 그때마다 루크는 똑같은 색의 티와 바지를 입고 있어 카이얀의 눈을 괴롭게 했다. 루크는 점차 실내용 슬리퍼에 익숙해져 갔고, 카이얀은 사흘에 한 번씩 아홉 병의 생수를 갖고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생수 배달원의 얼굴을 외웠다. 냉장고 옆에 수북이 쌓여 가는 빈 생수병을 보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가끔 쓰레기통에서 알약 봉투를 보기도 했다.
나이란이 루크를 떠맡긴 지 딱 10일째 되던 날, 진행하던 연구가 다 끝났다. 루크가 오기 전부터 해 오던 일이라 카이얀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학회에 논문을 보내고 거실로 나와 소파에 늘어졌다. 다음 연구를 시작할 때까진 연구실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따뜻한 햇볕이 쏟아졌다. 논문은 만족스러웠고 생각보다 시간도 덜 걸렸다. 모든 게 최고였다. 마음에 드는 결과를 내고 나면 언제나 이런 나른함이 찾아온다. 카이얀은 편한 마음으로 소파에 엎드려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16시 약과 물을 챙기러 아래로 내려온 루크는 잠들어 있는 카이얀을 보았다. 검은 가죽 소파에 길게 엎드린 카이얀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카이얀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는 루크를 볼 때마다 어느 정도 경직되곤 했다. 그러니 루크는 이렇게 편안하게 늘어진 카이얀을 처음 보는 셈이었다.
사실 루크는 누가 자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다른 군인들과 있을 때는 작전 중이었으므로 아무도 저렇게 잘 생각을 하지 못했고, 당연히 자기가 어떤 모습으로 자는지도 몰랐다. 게다가 루크는 캡슐에서 잠을 자기 전에 대체로 신체 지수 측정을 위한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에 잠이 휴식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잠든 카이얀을 본 순간, 루크는 본능적으로 발소리를 죽였다. 자기도 왜 그랬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루크는 본능적으로 카이얀이 아주 편하게 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건 루크가 발휘한 몇 안 되는 인간적인 직관 중 하나였다.
자는 카이얀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시간이 계속 지체되고 있으니 물을 꺼내야 하는데, 냉장고 문 여는 소리에 카이얀이 깰 것 같았다.
루크는 아주 조심스럽게 냉장고 문을 열었다. 소리가 났지만, 생각만큼 얕은 잠은 아니었는지 카이얀은 깨지 않았다. 조심히 물을 꺼내고, 그것보다 더 조심스럽게 알약 봉투를 뜯었다.
물을 다 마신 후 루크는 천천히 냉장고 옆에 생수병을 내려놓았다. 보통 이러고 나면 루크는 바로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그는 방에서 거의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그건 지루한 시간이었지만 카이얀을 귀찮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원래 지시를 받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게 그의 일이었고.
하지만 이번엔 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래도 되는 걸까. 루크는 잠시 고민했다.
연구원들은 루크가 대형 군사 작전에 투입되어도 무리 없이 어울릴 수 있길 바랐기 때문에, 루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상관을 대하는 방법 같은 것을 배워 왔다.
마땅히 따르고 익힐 행동 지침이 그것뿐이어서 루크는 스펀지처럼 그 교육을 받아들였다. 이런 상황에 대해선 배운 바가 없어 모르겠지만, 잠든 상관을 지켜보는 게 그리 예의 없는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루크는 우뚝 선 채 카이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좋다.’
루크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다 아주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방이란 걸 갖게 되었을 때, 카이얀은 ‘좋다’는 말에 대해 알려 주었다. 지금과 비슷한 감정이었던 것 같은데, 좀 달랐다.
이번에도 카이얀이 이럴 땐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알려 줬으면 싶었다. 하지만 모순적으로, 카이얀이 계속 저런…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모습으로 있어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배를 대고 엎드려 잠든 탓에, 카이얀의 얼굴은 루크 쪽으로 돌려져 있었다. 루크는 그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살짝 목을 덮는 금발. 감긴 눈꺼풀에 가지런한 속눈썹. 햇빛을 받아 먼지가 마치 빛의 입자처럼 반짝거렸다. 유연한 곡선을 그리는 등허리가 들숨 날숨에 따라 가볍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루크의 시선이 움직였다. 소파 아래로 내려와 바닥에 닿은 오른손. 손가락이 길었다. 펜을 잡는 부분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흉터 없이 보기 좋은 손이었다.
얼마나 그러고 서 있었을까.
카이얀이 잠깐 눈을 떴다가, 다시 눈을 감고 팔을 위로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긴 몸이 일자로 쭉 늘어났다가 한숨 같은 호흡과 함께 다시 축 늘어졌다.
카이얀은 엎드린 채 얼굴을 문지르고 팔꿈치로 상체를 일으켰다. 조금 멍한 것 같았지만 개운해 보였다. 카이얀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가, 루크를 보고 딱 굳어졌다.
“아…….”
카이얀은 머리를 매만지며 소파에 앉았다. 방금 깨어나 멍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루크도 덩달아 놀랐다. 실례되는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걸까.
“일이 다 끝나서, 조금만 누워 있으려고 했는데. 잠들었나 보네.”
자기를 빤히 보는 루크 때문에 민망해진 카이얀은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자기한테 하는 말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으므로 루크는 대답을 망설였다.
“물 마시러 온 거예요?”
“네. 다 마셨습니다.”
언제나 칼 같은 대답이다. 저렇게 대답하면 늘 더 이어갈 말이 없었다. 원래 사교적인 편이 아니기도 했고. 해서 카이얀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일어나려 했다. 그때 카이얀은 루크가 자길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어,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카이얀은 좀 아차 싶었다. 열흘 내내 연구에 집중한다고 루크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샤워할 줄도 모르고 무지개 색 옷을 맞춰 입는 사람이니 좀 더 신경을 써 줬어야 하는데. 연구하다 종종 루크가 떠오르긴 했지만, 부러 거리를 둔 것도 있었다. 곧 떠날 사람이니 그게 맞다 생각했고.
“아닙니다. 없습니다.”
그런데 왜 저렇게 보지? 루크는 좀 넋이 빠진 것 같았다. 혹시 제 머리가 엉망인가 싶어 카이얀은 몇 번 손으로 머리를 눌렀다.
“생활하는 데는 좀 익숙해졌어요? 모르겠는 거나 어려운 거나, 그런 거 없어요?”
“네, 없습니다.”
부담스러우니까 그만 좀 쳐다보면 좋겠다. 카이얀은 그 말을 어떻게 부드럽게 돌려서 할 수 있나 고민했다. 하지만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어서, 카이얀은 그만두었다.
“그럼 됐어요. 쉬어요.”
안 친한 홈스테이 학생이랑 얘기하는 기분이었다. 카이얀은 서둘러 등을 돌렸다. 잠깐 자고 일어나서 저녁을 챙길 생각이었다. 루크도 빨리 방으로 돌아갔으면 싶었다.
하지만 카이얀의 바람과는 달리, 루크는 카이얀의 뒷모습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 * *
루크가 아는 사람은 몇 없었다. 연구원들, 박사들, 함께 작전을 수행했던 군인들. 그들은 전부 한 개인이 아니라 덩어리였다. 루크에게 있어서 그들은 일종의 이미지였다.
흰 가운을 입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연구원들. 그들은 물리적으로 루크와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 홀로그램으로 전투 훈련을 할 때 유리창 너머에서 지켜보는 것도 그들이었고-루크는 그들을 볼 수 없었지만 거기 그들이 있다는 건 알았다- 신체 능력 향상 수치를 기록하고 약물을 주사하는 것도 그들이었다.
하지만 루크는 그들 중 그 누구의 이름도 몰랐다. 대부분 마스크를 쓰고 있었기에 아는 얼굴도 드물었다.
박사는 연구원에 비해 수가 적었다. 그들은 연구원이 입는 하얀 가운 대신 정장을 입고 루크 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대개 연구원들과 이야기했지만 가끔 루크에게 말을 걸 때도 있었다. 자기 이름을 말해 주는 일은 극히 드물어서 루크는 박사들의 이름도 잘 몰랐다. 오직 나이란 캠벨 박사의 이름만 알 뿐이었다.
함께 작전을 수행했던 군인들은, 사실 루크에게 있어선 홀로그램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행동했으나 루크는 그들이 낯설고 불편했다.
무엇보다도 거추장스러웠다. 루크는 동료애 같은 것을 모른다. 그는 군인들을 보며 저 사람은 왜 빨리 달리지 못할까, 왜 저 정도 부상 때문에 주저앉아 있을까, 그런 의문을 가졌다.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냐.”
캠벨 박사에게 일반 군인들에 대해 물었을 때 그녀는 그렇게만 대꾸했다. 평소라면 그 정도에서 그냥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루크는 별것도 아닌 부상 때문에 다리를 안고 뒹구는 군인을 본 뒤였다. 머릿속에 강하게 남을 만큼 이상한 광경이었다.
“그 군인의 실험이 잘못된 건 아닙니까?”
한 번 더 물었을 때 캠벨 박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루크의 신체 능력을 수치화해 둔 차트를 바라보며 인상을 쓰던 그녀는, 갑자기 루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뚝 서 있던 루크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 놀랐다.
“그쪽이 정상이야. 그 군인은 실험을 받고 있지 않아. 사실 모든 군인이 다 그렇지. 실험받고 있는 건 너뿐이야.”
그때 루크는 처음으로 자기가 남과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이상하긴 했다. 연구원들이 모두 옷을 입고 다닐 때 자기는 벌거벗고 있는 것도, 방이 뭔지 모르는 것도, 군인들이 자길 흘끔거리고 피하는 것도 전부 이상했다.
난 정상이 아니구나.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게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킨 건 아니었다. 그냥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고, 한편으론 계속 미결로 남았던 것을 해결한 듯한 후련함도 있었다. 물론 루크는 그 감정들의 이름을 몰랐다.
“아. 잘 잤어요?”
그리고 지금 느끼는 감정의 이름도, 알 길이 없었다. 루크에게 있어, 카이얀은 덩어리가 아닌 하나의 개인으로 자기 앞에 나타난 최초의 사람이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로웠다. 신기해서 계속 카이얀을 바라보게 된다.
“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그 간단한 말을 하는데도 긴장이 되었다.
카이얀은 루크의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막 부엌으로 들어온 카이얀은 찬장에서 시리얼을 꺼냈다. 아침에는 원래 입맛이 없었다. 대강 먹고 있는데 루크가 냉장고 근처에 서서 이쪽을 빤히 보는 게 느껴졌다.
오늘은 남색이네.
카이얀은 이번에야말로 방에 들어가 새 옷을 사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다 문득 연구소에서 온 봉투를 떠올렸다. 연구실 한쪽에 잘 두긴 했는데, 루크의 생활을 생각해 보면 지나칠 정도로 많은 돈이었다.
“뭐 갖고 싶은 거 있어요? 취미 같은 건?”
묻고 나서도 바보 같은 질문이다 싶었다. 취미가 있었을 리 없고, 아마 취미가 뭔지도 모를 것이다. 카이얀의 예상대로 루크는 취미란 단어가 뭔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카이얀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이게 실례되는 질문일까 아닐까 잠시 가늠했다.
“글씨 읽을 줄 알아요?”
“네.”
간결한 대답이었다. 카이얀은 고개를 끄덕이고 서재에 루크가 읽을 만한 책이 있나 생각해 보았다.
이제 카이얀은 루크에게 꽤 익숙해졌다. 그래서 그가 글자를 읽을 줄 안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진 않았다. 물론 루크는 거짓말이라곤 모르고, 돌려서 말하는 법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는 일반적인 사람과는 아주 달랐다.
루크는 오직 전투나 군사 작전에 필요한 것만 배운 것 같았다. 그러니 글자도 그 정도 수준까지만 알지도 모른다. 카이얀은 대충 그릇을 치우고 설거지를 했다. 할 것도 많지 않아 금방 끝났다.
“가르쳐 주시면 배우겠습니다.”
“뭘요?”
뜬금없는 말에 되물었다. 루크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싱크대를 흘끔 보았다. 그 눈짓의 의미를 안 카이얀은 다 씻은 그릇을 정리하며 고개를 저었다.
“설거지요? 됐어요, 내가 먹은 건데.”
그보단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카이얀은 루크에게 따라오라고 말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다 2층 서재 앞에 서서 잠깐 머뭇거렸다.
“아, 미안한데 잠깐 방에 가 있을래요?”
서재도 연구실도, 남에게 보이는 건 내키지 않았다. 루크는 영문도 모른 채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에야 카이얀은 좀 의아해졌다.
내가 지금 왜 갑자기 루크 씨 책을 고르고 있는 거야?
아마 거실에서 루크와 마주쳐서 그런 것 같았다. 그때가 여덟 시였던가, 연구가 끝나 좀 늦게 일어났는데……. 손목시계를 확인하자 시간은 아홉 시였다.
왜 여덟 시에 물을 먹고 바로 방에 안 올라갔지? 역시 뭐가 필요해서 말하려고 기다렸던 건 아닐까.
카이얀은 고개를 갸웃하며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는 이 집에서 가장 넓은 공간이었다. 책 때문에 가장 좁은 공간이 되어 버리기는 했지만. 카이얀은 안쪽에 있는 책꽂이로 가서 제목을 훑었다. 전문 서적은 당연히 안 될 테고, 군사 서적 같은 건 없기도 하고 있어도 주기 꺼려지니, 어렵지 않고 흥미를 유도할 수 있는 책을 골라야 했다.
단편집. 단편 소설집이 좋겠다.
카이얀은 서가를 뒤졌다. 잠시 후 카이얀은 자기가 심심풀이로 읽었던 소설집을 찾아냈다. 한번 펼쳐서 쭉 넘겨 보았다. 루크의 수준을 모르니 이 정도가 적당한지 아닌지 가늠하는 건 쉽지 않았다.
일단 갖다 줘 봐야지.
카이얀은 책을 들고 서재 밖으로 나왔다.
루크의 방 앞에서, 카이얀은 습관처럼 문을 벌컥 열어젖힐 뻔했다. 그러다 이게 이제 다른 사람 방임을 인지하고 가볍게 노크를 했다. 잠시 기다리다가 한 번 더 노크했는데도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카이얀은 의아해서 루크를 불렀다.
“루크 씨, 안에 있어요?”
다음 순간 빠르게 문이 열렸다. 카이얀은 루크를 향해 어설프게 책을 들어 보였다.
“심심할까 봐, 읽어 보라고요.”
그래, 노크가 뭔지 모른다 이거지. 당연히 캡슐에 대고 노크하는 사람도 없었겠지.
카이얀은 한숨을 참았다. 루크에게 턱 책을 건네자 루크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카이얀은 루크가 연구실에서 책 읽을 일이 있었을 것인가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결국 책 표지를 넘기며 루크에게 책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이건 책이란 거예요. 이렇게 책장을 넘기면서 읽는 거고요. 읽을 수 있겠어요?”
루크는 첫 문장을 읽었다. 소리 내어 발음하라면 할 수 있겠는데, 의미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읽을 수는 있습니다.”
“단어 뜻을 모른단 소리죠?”
짐작했던 바라 카이얀은 당혹하지 않았다. 사전이 있을 텐데, 하지만 사전을 가져와도 설명을 해석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었다. 그제야 카이얀은 루크에게 책을 건네준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음, 뭐 달리 하고 싶은 거 있어요, 그럼?”
카이얀은 다시 책을 가져오며 물었다. 루크는 카이얀이 도로 가져간 책을 보며 주저했다.
“가르쳐 주신다면 그걸 읽어 보고 싶습니다.”
“아…….”
카이얀은 머뭇거렸다. 미안하지만, 모든 단어를 다 가르쳐 줄 마음은 없었다. 그럴 시간적 여유도… 여유는 있는 것 같았다. 카이얀은 잠깐 루크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단어를 전혀 몰라서, 어려울 것 같은데요.”
그렇게 말하며 약간 웃어 보이자, 루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너무 망설임 없는 대답이어서 오히려 카이얀이 움찔했다. 생각해 보니 여기 와서 루크가 무언가 하고 싶다고 말한 건 처음인 것 같았다. 그런데도 너무 간단한 포기였다.
어쩌면 모든 걸 포기해야 하는 삶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루크의 태도에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샤워도 가축처럼 하던 사람이다. 그저 그런 평범한 일상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른다. 카이얀은 루크의 어깨 너머로 그의 방을 보았다. 처음 꾸며준 그대로, 이불과 옷상자밖에 없었다.
카이얀은 집주인으로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방에서 보통 뭐 했어요?”
“대기했습니다.”
무슨 뜻이냐고 묻고 싶지만 말 그대로의 뜻일 게 분명했다. 카이얀은 별로 넓지도 않고 할 거라곤 아무 것도 없는 이 방에서 혼자 있었을 루크를 생각했다.
나이란이 잘 맞추었듯, 카이얀은 본래부터 마음이 약했다. 건조한 가면으로 그걸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카이얀은 루크에게 미안해졌다.
반갑지 않은 군식구라 해도 이렇게 내팽개쳐 두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런 카이얀의 무심함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는 듯, 아예 원망이 뭔지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는 루크가 그의 마음을 더 불편하게 했다.
“책 읽고 싶어요?”
“네. 하지만 괜찮습니다.”
“아뇨. 읽고 싶으면 읽어야죠. 읽어요.”
무표정하던 루크의 얼굴이 일순 환해졌다. 너무 좋아하는 얼굴이라 카이얀은 순간 당황했다.
“네, 감사합니다. 좋습니다.”
“이 책은 말고, 다른 책 골라 줄게요.”
배운 말을 충실히 써먹는 루크를 뒤로 하고 카이얀은 서재로 돌아왔다. 저 깊숙한 곳에 있는 책꽂이로 향하며 카이얀은 루크의 얼굴을 떠올렸다. 방이 생겼을 때도 봤던 그 얼굴이었다. 책을 읽어도 된다는 말을 했을 뿐인데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으니 이쪽이 더 놀라고 말았다.
안쪽으로 걸어가며 카이얀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좀 더 신경을 쓰되 거리는 두자. 곧 떠날 사람이야. 그걸 잊어버리면 안 돼.
카이얀은 책꽂이 앞에 쭈그려 앉으며 다짐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느새 카이얀은 맨 아래에 꽂힌 책 제목을 훑어보며 진지하게 루크에게 줄 책을 고르고 있었다.
아기 돼지 삼형제, 신데렐라, 빨간 구두……. 예전에 동화 원전에 대한 연구를 할 때 사고 그 후론 들춰 보지 않은 책들이라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 아이들이 보는 책이니 단어 수도 많지 않을 것 같았다. 쭉 제목을 훑던 카이얀의 눈이 한 곳에 멈추었다.
피노키오.
카이얀은 고개를 갸웃했다. 피노키오랑 닮진 않았지. 책을 빼들고 표지의 그림을 살폈다. 정말로 루크와 닮진 않았지만, 카이얀은 그 책을 들고 일어섰다.
“루크 씨, 나와 봐요.”
노크하며 루크를 불렀다. 루크는 아까처럼 바로 나왔다. 카이얀은 루크에게 책을 건넸다. 소중하게 받아 든 루크는 카이얀의 얼굴을 살폈다.
“음, 모르는 단어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요. 거실에 있을 거니까.”
굳이 루크의 방에서 같이 읽고 싶진 않았다. 루크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카이얀도 등을 돌려 1층으로 내려왔는데, 계단을 다 내려오기도 전에 루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박사님.”
세상에, 박사님이라고?
카이얀은 이제 그냥 웃기기만 했다. 전처럼 기막히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면, 자기만 루크 씨, 루크 씨, 잘 불렀을 뿐 저쪽은 호칭을 정하지 못해 허둥댔던 것 같기도 하다. 카이얀은 좁은 층계 중간에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냥 로스터드 씨라고 불러도 돼요. 그보다, 왜요?”
“네, 로스터드 씨. 인형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뜻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실제로 들으니 ‘로스터드 씨’는 정말 어감이 별로였다. 카이얀은 잠깐 다른 생각을 하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사람 형상을 하고 있는 작은 장난감을 말하는 겁니다. 그림 있죠? 거기 나무로 되어 있는 게 인형이라는 거예요.”
루크는 감사하다고 말하고 제 방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카이얀은 거실로 와 소파에 앉자마자 또 질문을 받아야 했다.
거실까지 내려온 루크가 ‘할아버지’가 뭔지 물었던 것이다. 그 다음은 아들에 대해, 실에 대해, 책에 나오는 여러 동물과 식물에 대해…….
카이얀을 더 정신 사납게 했던 건 굳이 자기 방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는 루크의 행동이었다.
카이얀에게 단어의 뜻을 묻고 대답을 얻은 뒤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가, 다음 문장에서 또 모르는 단어를 만나면 또 내려와 묻고, 그 다음 다시 방으로…….
식사를 하던 카이얀은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루크 씨, 서 봐요.”
그러지 않아도 자기가 카이얀을 너무 귀찮게 하는 걸까, 고민하고 있던 루크는 곧장 멈췄다. 돌아보는 얼굴에 약간의 걱정이 어려 있었다. 카이얀은 한숨을 참으며 애써 입꼬리를 당겼다.
“그냥 거기 앉아서 읽다가 물어봐요. 방까지 오르락내리락하지 말고.”
루크는 양장으로 된 책을 꽉 쥔 채 카이얀의 눈치를 살피다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며 카이얀은, 피노키오를 만든 제페토도 이만큼 귀찮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 정체 모를 군인이 사람이 되기 위해선, 요정의 도움이 아닌 제 수고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루크는 그날 하루 종일 책을 읽었다. 같은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거실에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서. 옆에서 계속 책을 읽고 있으니 왠지 자기도 읽고 싶어져서, 카이얀은 오랜만에 가벼운 소설책을 한 권 골라 들었다.
“재밌어요?”
피노키오의 코가 늘어나는 페이지를 펼치고 있는 루크를 향해 슬쩍 물었더니, 루크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잘 못 들었습니다.”
재밌었던 모양이네.
카이얀은 픽 웃었다. 온종일 단어 뜻을 알려 주느라 성가셨지만 저렇게 집중해서 여러 번 읽는 걸 보니 기분이 좋기도 했다.
“재밌다는 게 뭔지 알아요?”
“잘 모릅니다. 배우겠습니다.”
“지금 루크 씨가 느끼는 걸 재밌다고 하는 거예요. 그 책, 재밌죠?”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게 뭐 그렇게 재밌겠느냐마는. 그래도 루크가 해 온 다른 일들보단 재밌을 것 같았다. 어린애처럼 집중하는 얼굴이기도 했고.
“네, 재미있습니다. 이 뒤에 나오는 요정은 대단한 박사인 것 같습니다. 실험 기간도 없이 나무 인형을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아, 음.”
카이얀은 좀 떨떠름해졌다.
재밌게 읽고 있는 거… 맞겠지?
* * *
늦은 밤, 카이얀은 서재에서 새 연구 주제를 고르고 있었다.
지난번 논문은 역시 학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몇몇 잡지사에서 그와 관련된 추가적인 에세이를 더 써 달라고 요청해 오기도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에세이 같은 것은 적성에 맞질 않는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첨가해야 하는 것도 부담스럽고, 감상적인 문투나 애매한 결말도 싫다. 칼럼이라면 고려해 보겠지만, 쓰고 싶은 주제도 없으니 그만두었다.
뭐가 좋을까. 이번엔 열대 지방으로 가는 것도 좋겠지. 그런 곳에 사는 사람들이 쓰는 글은 항상 뭔가 에너지가 넘치니까. 적당한 작품을 몇 편 고르고 이론서도 뽑다 보니 품에 책이 가득이었다. 카이얀은 간신히 서재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희미한 신음 소리를 들은 건 그때였다.
카이얀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잠깐 그 자리에 서서 이게 어디서 나는 소리지, 멍청하게 생각했다. 이 집에 사는 사람이라곤 둘뿐인데도.
카이얀은 루크의 방문 앞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억눌린 신음 소리가 났다. 오래된 집이고 애초에 방음이 그리 잘 되는 편도 아니라, 소리는 꽤 분명했다.
“루크 씨……?”
조심스럽게 불렀다. 안에선 대답이 없었다.
사실 루크는 도저히 대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루크는 거의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하고 한쪽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신음 소리를 누르고 있었다. 명치 부근에서 시작된 엄청난 통증은 익숙한 것이었으나, 고통은 늘 그렇듯 새롭고 버거웠다.
“루크 씨, 무슨 일 있습니까?”
밖에서 주저하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루크는 대답하고 나가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이번 통증은 너무 심했다.
진통제. 진통제…….
아, 여긴 연구소가 아니다. 캡슐도 아니었다. 하지만 밖에서 카이얀이 부르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루크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뱃속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왔다. 루크는 이를 악물고 간신히 문고리를 쥐었다.
“루크 씨, 괜찮…….”
카이얀이 말을 뚝 멈췄다. 루크의 얼굴을 보고 말이 막힌 것이다. 루크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카이얀은 당혹해서 멍하게 루크만 쳐다보았다. 그는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는데, 제 가슴을 움켜쥔 채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죄송, 흡, 죄송합니다. 지금, 그, 읏!”
카이얀은 서둘러 책부터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설프게 루크를 부축해 바닥에 눕혔다. 평소라면 절대 자기 앞에서 누워 있진 못했을 텐데, 통증이 심한 탓인지 루크는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카이얀은 어쩔 줄 모르고 루크 옆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왜 이럽니까? 무슨 일이에요? 약 같은 거라도 줄까요? 배 아픈 겁니까? 아니면 가슴 쪽?”
루크는 거의 혼절한 채로 간신히 고개만 저었다. 카이얀은 이렇게 아픈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뭘 해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잠깐 기다려 봐요.”
나이란. 나이란한테 전화를 하자.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카이얀은 후다닥 거실로 내려와 아무데나 굴려 둔 핸드폰을 찾았다. 소파에 있는 걸 들어 바로 나이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존재하지 않는 번호입니다. 번호를 확인하신 후…….
“아, 망할!”
카이얀은 핸드폰을 내팽개쳤다. 막막해서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 곧 구급상자를 찾아 찬장을 뒤졌다.
진통제. 대체 복통인지 뭔지 알 수가 없어서 뭘 들고 가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카이얀은 결국 이런저런 진통제를 가득 쥐고 컵에 물까지 따라 루크의 방으로 올라갔다.
루크는 여전히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팔다리가 뻣뻣하게 경직되고 눈꺼풀이 경련을 일으켰다. 어찌나 몸에 힘을 주고 있는지 목의 힘줄까지 솟아오르고 드러난 흰자위는 빨갛게 물든 채였다. 실핏줄이 터진 모양이었다. 기괴하게 뒤틀린 몸을 멍하게 보다가 카이얀은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루크를 일으키려 했다.
다른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차라리 정신을 잃는 게 덜 가혹할 것 같았다. 카이얀은 이렇게 생생한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약 가져왔어요. 진통제니까 이거부터…….”
“아닙, 안, 안 됩니다. 윽, 약, 정해진 것만, 윽!”
카이얀은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사실 이 진통제가 무슨 도움이 될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안 먹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억지로 먹여 보려 했지만 카이얀은 얼마 가지 않아 인정해야 했다. 설령 루크가 약을 삼키려 했어도 그러지 못했을 것임을. 루크는 제 타액조차 삼킬 여력이 없는 것 같았다.
카이얀은 미친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음이 너무 급해서 옷상자부터 뒤졌다. 그 안에 처음에 받은 그 이상한 종이가 들어 있었다. 단번에 찾은 것에 안도할 틈도 없이 카이얀은 그 목록을 쭉 읽어 내렸다.
수분, 수면, 알약, 정해진 시간…….
[연구소에서 제조한 알약 외에는 그 어떤 약물도 섭취해서는 안 됨.]
그딴 한심한 소리만 적혀 있을 뿐 어디에도 통증에 대한 말은 없었다. 카이얀은 어쩔 줄 모르고 루크 주위를 맴돌았다. 루크는 몸부림치고 비명을 삼키며 바닥에 매달리려는 사람처럼 손톱으로 바닥을 긁어 댔다. 끔찍한 신음이 계속 이어졌다.
카이얀은 더 볼 수가 없었다. 몸부림치는 루크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 행동이 루크의 통증을 더 심하게 할까 걱정스러웠지만 저대로 바닥에 제 몸을 찧게 두는 것보단 나을 듯했다. 카이얀은 루크의 어깨를 붙들고 등을 감쌌다. 극심한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괜찮아요. 괜찮아, 괜찮을 겁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카이얀은 루크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괜찮을 거라고 속삭였다. 루크는 몸부림을 쳤고 마구 움직이는 팔 때문에 카이얀은 턱과 어깨 몇 대를 얻어맞았다. 욱신거렸지만 카이얀은 개의치 않았다.
루크는 거의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그러나 고통은 상상 이상으로 끔찍했다. 루크는 그 고통 때문에 정신을 잃었다가 고통 때문에 다시 깨어났다.
근처에 사람이 있는 게 느껴졌다. 루크는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단단한 곳에 머리를 박아 버리고 싶었다. 그러다 툭, 하고 턱에 무언가가 닿았다.
루크는 그게 뭔지도 몰랐다. 그런 걸 판단할 수 있는 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뭔가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었다. 루크는 본능적으로 카이얀의 어깨를 세게 물었다.
“윽!”
갑작스러운 통증에 카이얀이 눈살을 찌푸렸다. 보지 않아도 루크가 뭘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옷 위로 물린 것이지만 얇은 옷이라 그리 도움이 되진 않았다. 하지만 루크를 밀쳐 버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제 어깨를 문 후 루크의 몸부림이 좀 잦아든 것 같아서였다.
카이얀의 추측은 사실이었다. 루크는 카이얀의 어깨를 물고 고통을 견뎠다. 고통이 극심해질수록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견디는 것이 조금 쉬워졌다. 고통은 아주 천천히 가셨다. 루크는 어느새 카이얀에게 매달리듯 그의 등을 끌어안고 있었다.
“하, 하아…….”
고통이 사라지자, 루크는 턱에서 힘을 빼고 숨을 몰아쉬었다. 얼마나 힘을 주고 있었는지 단련된 복부 근육이 뻐근하게 아팠다. 루크는 잠시 상황을 판단하지 못했다. 그저 저를 안고 있는 따뜻한 몸이 좋아, 팔을 바짝 조여 그 몸에 매달렸다.
“좀 괜찮아요?”
“네…….”
루크는 지친 목소리로 대답하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카이얀의 얼굴이 보였다. 그제야 루크는 제가 바닥에 앉은 카이얀에게 바짝 붙어 있는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아!”
루크는 후다닥 팔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카이얀은 아니라고 했지만, 루크는 여전히 그를 상관처럼 인식하고 있었다. 루크는 지친 와중에도 일어나려고 비틀거렸다. 그 답답한 태도에 카이얀이 재빨리 루크의 손목을 잡아 주저앉혔다.
“앉아 있어요. 괜찮습니까?”
“네, 저, 네,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루크는 카이얀의 안색을 살폈다. 어두웠지만 루크는 잘 볼 수 있었다. 그는 카이얀이 좀 지친 낯빛을 하고 있다는 것과, 그의 어깨가 좀 이상해 보인다는 걸 알았다. 그러다 자기가 고통 중에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해 냈다.
“좀 쉴래요? 아니면 물 떠다 주겠습니다.”
카이얀은 평소보다 훨씬 더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치 막 열이 떨어진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 조심스럽고 사려 깊은 목소리였다. 루크는 한 번도 그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어 당황했고,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또 당황했다. 그러다 바닥에 컵이 넘어져 있는 걸 보았다.
“아, 신경 쓰지 마요. 금방 닦을 테니까.”
“아닙니다. 제가…….”
“여기 가만히 있어요. 알았습니까?”
카이얀은 여전히 상냥한 태도로 말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루크는 카이얀이 닫고 나간 문을 보다가 멍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통증이 한 번 왔다 간 후엔 늘 그렇듯, 전신에 기운이 없고 몸이 갑갑했다. 입가를 문지르니 타액으로 엉망이었다. 방 한쪽에는 규칙이 적힌 종이가 내팽개쳐져 있고, 물은 엎질러졌고, 진통제 몇 알이 뒹굴고 있었다.
“누워 있지 그래요. 아, 이불 젖었나?”
금세 돌아온 카이얀이 바닥을 닦아 내며 물었다. 루크는 쉰 목으로 아니라고 대답하며 카이얀의 어깨를 살폈다. 옷 위에 선명하게 잇자국이 남아 있었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카이얀은 대충 방 정리를 끝내고 이불을 바르게 정리해 주었다.
“자, 누워요.”
“죄송합니다. 그, 정말…….”
“그만하고 누워요, 얼른.”
루크는 카이얀이 시키는 대로 자리에 누웠다. 몸이 너무 지친 상태였다.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또 아플 것 같으면, 옆에 좀 앉아 있다 가겠습니다.”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데. 어깨를 문 것에 대해서도 사과해야 하고.
루크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지만 의식이 버텨 내질 못했다. 생전 처음 겪어 보는 타인의 다정한 태도에, 긴장이 그대로 다 무너져 버린 것 같았다. 루크는 그대로 잠에 빠지고 말았다.
카이얀은 한 시간 정도 루크의 옆에 머물렀다. 수건을 적혀 땀에 젖은 얼굴을 닦아 주었다. 누구 병간호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어서 그 이상 뭘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사실, 도무지 현실감이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없이 책을 보던 사람인데, 왜 갑자기? 카이얀이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원래 지병이 있거나, 좀 억지스럽긴 해도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적응 못한 몸이 문제를 일으켰다거나…….
약물 부작용 같은 건 아닐까. 문득 거기 생각이 미쳤다. 루크는 정말 물과 알약을 빼고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빈속에 약을 먹는 게 안 좋다는 건 어린애도 아는 일이다. 전문가가 아닌 카이얀이 할 수 있는 추측은 그 정도였다.
카이얀은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거실로 돌아와 다시 핸드폰을 찾았다. 멍청한 짓인 걸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의사에게 전화해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카이얀은 나이란에게 전화를 걸었고 또 존재하지 않는 번호 어쩌고 하는 기계음을 들어야 했다.
카이얀은 소파에 그대로 등을 기대고 늘어졌다. 잠이 확 달아나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샤워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일어서기가 싫어 그대로 앉아 있었다.
루크에게 얻어맞은 턱이 욱신거렸다. 그 주먹은 상상 이상으로 단단했다. 조금만 더 제대로 맞았다면 턱이 빠졌을지도 모른다. 그가 깨문 어깨도 몹시 아팠다. 혼자 앉아 있으니 아깐 별로 느끼지 못했던 통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카이얀은 다른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루크는 몇 번이나 그렇게 말했다. 아파 죽겠는 건 저 자신이면서. 고통 때문에 얼굴이 파랗게 질려선 계속 죄송하다고 말하던 루크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아 괴로웠다.
카이얀은 손에 들린 핸드폰을 원수라도 되는 양 노려보았다.
나이란, 넌 정말 벌 받을 거야.
속으로 씹어 뱉고, 카이얀은 핸드폰을 팽개쳐 버렸다.
* * *
정확히 여덟 시 오 분 전, 카이얀은 거실에 나와 있었다.
아침 산책은 걸렀다. 혹시 루크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층계 아래서 기웃기웃 위층의 기색을 살피다가 막 거실로 온 참이었다. 여덟 시 약을 챙기러 루크가 내려올 테니, 그때 상태를 좀 살필 생각이었다. 방으로 찾아갈까 했지만 루크가 놀랄 것 같아 그만두었다.
이런 시간은 칼 같은 사람이니, 제때 오지 않으면 바로 올라가 봐야겠다. 카이얀이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루크가 아래로 내려왔다. 카이얀은 자기도 모르게 번쩍 고개를 들어 루크를 보았다.
“아… 안녕하십니까.”
루크는 좀 기운 없는 목소리로, 그럼에도 제자리에 딱 서서 정확하게 인사를 했다. 손만 올라가지 않았을 뿐이지 경례를 받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안색이 좋지 않았다. 갑자기 어색해져서 카이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뭔가 더 말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지 루크는 기다렸다. 하지만 카이얀도 할 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괜찮아요? 한마디면 될 일인데 그 말이 왜 어색한지. 어젠 무슨 정신으로 루크를 안고 달래기까지 했는지 모르겠다.
카이얀이 침묵하자 루크도 고개를 돌리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평소처럼 물 없이 알약을 삼키고, 물 한 병을 선 채로 들이켰다. 카이얀은 아침이나 먹을까 하며 괜히 싱크대 앞을 서성였다. 손이 무안해서 저도 정수기에서 물을 받았다.
루크는 빈 물통을 냉장고 옆에 내려놓았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어정쩡하게 서 있는 카이얀을 향해 돌아섰다.
“새벽에 있었던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어깨는 괜찮으십니까?”
막 물을 마시던 카이얀은 얼른 컵을 내려놓았다. 저렇게 딱 굳어서 사과하니 오히려 민망해졌다.
“아, 어깨요. 네, 괜찮습니다.”
사실 별로 괜찮지 않았다. 아침에 씻다가 확인해 보니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안 그래도 쑤셨는데 그걸 보니 더 아픈 것 같아 카이얀은 거울로부터 고개를 돌려 버렸다. 턱도 조금 부은 것 같았다. 파랗게 멍이 올라오기도 했고.
루크도 카이얀이 전혀 괜찮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카이얀이 너무 간단하게 사과를 받아들이는 게 불편했다. 차라리 화를 냈더라면 좀 나았을까. 어쩐지, 자기에게 화를 내는 카이얀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게 왠지 더 미안했다.
“얼굴, 혹시 제가…….”
“아. 별거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요.”
카이얀은 부러 가볍게 손을 저었다. 루크와 좀 더 편한 사이였다면, 돌에 얻어맞은 줄 알았다고 엄살을 떨며 살살 놀려 볼 텐데. 하지만 그러기엔 분위기가 너무 무거웠다. 게다가 그런 장난을 걸면 루크는 당장 사색이 될 테고.
“이런 일 처음입니까? 아니면 원래 있는 병?”
“종종 이런 일이 있습니다.”
“그때 먹는 약 같은 건 따로 없나? 그때 내가 받은 건 그 알약이 전부라서요.”
“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는 거라 특별히 약을 먹지는 않습니다.”
“아, 음.”
카이얀은 기분이 불편해졌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니까 약을 먹진 않는다니, 그럼 결국 그렇게 혼자 참고 뒹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단 건가? 그거에 대해서 정말 아무 생각도 없는 거야? 사람으로서 정말 일말의 부당함도 못 느끼나?
카이얀의 이유 모를 불쾌감은 루크가 다음 말을 했을 때 급작스레 극에 달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피해가 가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놈의 죄송하다는 소리 그만 좀 하죠?”
자기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갔다. 이런 경험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카이얀은 제 신경질적인 말투에 움찔하는 루크를 보고 더 기분이 나빠졌다. 죄송하다는 소릴 하지 말라고 하니, 루크는 다음 반응을 정하지 못하고 허둥댔다.
“연구소나 캠벨 박사랑 연락할 수 있는 방법, 아는 거 있습니까?”
“없습니다. 죄송…….”
확 인상을 쓰자 루크는 얼른 말을 고쳤다.
“아닙니다. 없습니다.”
“없으면 됐어요. 가서 쉬어요.”
더 눈앞에 보이면 괜한 짜증을 낼 것 같아서 카이얀은 루크를 내쫓았다. 루크는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다가 그러겠다는 말만 남기고 2층으로 올라갔다. 싱크대 앞에 서서 멀어지는 발소리를 듣고 있다가 카이얀은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했다.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이었다. 카이얀은 자꾸 자기가 루크에게 마음을 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거리를 둬야 하는데. 그러나 누구와 같이 산 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순식간에 별로 크지도 않은 루크의 존재감에 휘말리게 된다.
그리고 그건 카이얀만 그런 게 아니었다. 루크도 마찬가지였다.
정오가 조금 지난 무렵 루크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원에 있는 카이얀을 보는 중이었다.
봄이 한창이라 정원에 꽃이 올망졸망 핀 게 보였다. 정원은 대체적으로 정리가 안 된 편이었다. 겨울 내내 팽개쳐 두기도 했고 카이얀은 원래 부지런 떨며 주기적으로 정원을 손질하는 타입은 아니었던 것이다.
루크에게 날카롭게 군 게 마음에 걸린 카이얀은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고 정원에 나온 참이었지만, 루크가 자길 보고 있다는 건 전혀 몰랐다.
카이얀은 겨울 내내 내버려 둬 엉망이 된 정원 한가운데 서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고개를 젓고 한숨을 내쉬며 뭐라고 혼잣말을 했는데, 청력이 비정상적으로 좋은 루크로서도 그 말은 들을 수가 없었다.
곧 카이얀은 목장갑을 끼고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겨울 사이 얼어 죽은 가지를 자르고 엉킨 것을 풀고, 잔디를 깎고 물까지 주었다.
엉망이던 정원이 서서히 정리되기 시작했다. 울타리에 달라붙은 죽은 담쟁이넝쿨을 우두둑 뜯어낸 카이얀은 목장갑을 털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 루크는 확 창가에서 물러났다. 의문은 그 후에야 찾아왔다.
왜 숨었지?
인상을 쓰며 저를 보던 카이얀이 떠올랐다. 화나게 한 걸까. 역시 어제 일이 문제였던 걸까, 하지만 카이얀은 괜찮다고 여러 번 말했다. 어제 자기를 품에 안고 괜찮다고 수없이 말해 줬던 카이얀이다.
의식이 있고부터 그렇게…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자기에게 그렇게 대해 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매번 이 시기쯤에 문제네. 역시 약이 좀 문제가 있는 걸까.”
박사와 연구원들은 자기의 통증이 끝나고 나면 늘 그런 말을 하곤 했다. 기진맥진한 채 그 말을 들었다.
찡그린 얼굴을 보고 그들의 기분이 안 좋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 루크는 매번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자기가 통증 때문에 시끄럽고 요란하게 굴어서 그런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아, 곧 작전인데 왜 하필이면 지금… 좀 참아 봐!”
누구는 몸부림치는 자기에게 그렇게 소리치기도 했었고. 확실히 아픈 사람은 방해가 된다. 다른 군인들과 함께 일할 때도 그랬다.
부상자는 거치적거린다. 도움이 되질 않는다. 물론 혼자 작전을 수행할 때도, 다친 상태면 곤란했다. 다쳐서 돌아오면 연구원들은 늘 성가시단 얼굴을 했다.
“다쳤어? 또?”
제 담당이던 캠벨 박사는 제 부상을 보면 인상을 썼다. 그럼 왠지 주눅이 들었다. 루크는 그때마다 죄송하다고 대답했고, 그런 루크를 가만히 보던 캠벨 박사는 한숨을 내쉬고 더 추궁하지 않았다.
통증이든 부상이든, 루크가 원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루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통증은 간헐적으로 찾아왔고 예상 밖의 부상도 어쩔 수 없었다.
루크는 다시 조심스럽게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느새 카이얀은 나무 그늘 아래 다리를 뻗고 앉아 쉬고 있었다. 응달 아래, 바람에 흔들리는 금발과 맑은 녹색 눈동자. 루크는 문득 잠든 카이얀을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편안하고 따뜻했다. 그 느낌이 좋아서 루크는 계속 카이얀을 바라보았다. 그저 보고 있었을 뿐인데, 무겁고 불편하던 마음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 * *
카이얀은 정원에서 깜빡 잠들었다 깨어났다. 세 시가 조금 못 된 시간이었다. 오랜만에 힘을 썼더니 근육이 뻐근했다. 들어가서 샤워하고, 간단하게 좀 먹고…….
그러다 문득 루크에게 생각이 미쳤다. 아까 괜히 짜증냈던 게 맘에 걸렸지만, 곧 카이얀은 대수롭잖게 넘겨 버렸다. 자기도 루크도 사춘기 여학생 같은 게 아니니 괜찮겠지 싶었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거실로 가니 루크는 소파에 앉아서 피노키오를 읽고 있었다. 어제 거실에서 읽으라고 했더니 이리로 내려온 모양이었다. 내용이 재밌어서 읽는 것보단 그냥 글씨를 읽는 것 자체가 즐거운 것 같았다. 카이얀이 들어오자 루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요. 매번 안 일어나도 됩니다.”
카이얀은 가볍게 말하고 물부터 마셨다.
“이제 모르는 말 없어요?”
“네, 없습니다.”
“배우는 게 빠르네요. 다른 책 줄까요?”
그렇게 물었다가 카이얀은 생각을 바꿨다. 안 그래도 맘에 걸리는 게 있었다.
“혹시 답답하거나 그러진 않습니까? 계속 집에만 있었으니까, 좀 이따 밖에 나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루크가 번뜩 놀라는 게 느껴졌다. 그 순간적인 표정 변화에 오히려 카이얀이 놀랄 정도였다.
“실례되는 질문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로스터드 씨와 같이 나갑니까?”
주저하며 묻는 말이 어린애처럼 귀여워서, 카이얀은 픽 웃어 버렸다.
“그건 왜 묻습니까? 같이 나가기 싫어서?”
딱딱한 말투를 따라하며 놀렸는데, 놀린 줄도 모르고 루크는 절대 아니라며 고개부터 저었다. 당연히 같이 나가야지, 길도 모르고 핸드폰도 없는 사람을 혼자 내보낼 수는 없었다.
“그럼 이따 일곱 시쯤 나가죠. 저녁 먹고.”
“네.”
카이얀은 고개를 끄덕이고 대충 밥을 차려 먹었다. 루크가 자꾸 흘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제 딴에는 티가 안 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곁눈으로 훤히 보였다.
저녁 일곱 시, 루크는 초록색 티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언제 봐도 끔찍한 패션이라 카이얀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새 옷 산다는 걸 잊어버렸다. 루크 앞으로 온 돈이야 많으니 그걸로 나간 김에 옷이나 살까. 일단 저렇게 입은 사람과는 어디도 함께 나가고 싶지 않았다.
“옷 갈아입어요. 처음 입고 왔던 옷 있잖습니까? 그거.”
태어나서 남 옷 입는 것에 간섭하긴 처음이었다. 하지만 저쪽은 정말 간섭이 필요했다. 집에서야 저 좋을 대로 입어도 상관없지만.
루크는 들뜬 얼굴로 불평도 없이 제 방으로 올라갔다. 처음에 입고 온 건 평범한 셔츠에 블랙진이니까,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겠지. 사실 그 무지개 색 옷은 어떻게 매치해도 이상할 게 분명했다. 카이얀은 제 선택에 만족하며 현관에서 루크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밖에 나왔을 때, 카이얀은 루크가 옷을 어떻게 입든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현관을 나와 잔디밭 울타리 밖으로 나갈 때부터, 루크는 계속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보기 싫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신경이 쓰였다.
루크는 분명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도 그가 내지르는 탄성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루크는 마치 처음 밖에 나와 본 사람처럼 굴었다. 정원에 나와 바비큐를 굽던 그리 안 친한 이웃들이 그들 쪽을 흘끔거릴 정도였다.
그렇다고 신난 사람 면전에 대고 가만 좀 있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 좋아, 카이얀은 자기가 상상한 루크의 생활을 대입해 그를 이해하려고 했다.
아마 내내 연구소 안에만 있었을 것이다. 밖에 나가는 건 작전 수행할 때뿐이었을 거고, 그마저도 어땠는지 모르지. 어쨌든 루크는 나름 평범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는 자기로선 상상할 수도 없는 생활을 해 왔을 테니까.
“걸으니까 좋아요?”
제발 그만 좀 두리번거렸으면 해서 넌지시 물었다. 다행히 묻는 즉시 루크의 시선이 카이얀에게 고정되었다.
“네,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로스터드 씨.”
루크는 반 발자국 정도 떨어진 채 걸었다. 정말 부하 직원 데리고 산책하는 것 같아-물론 그런 식의 단체생활은 해 본 적이 없지만- 카이얀은 기분이 좀 묘해졌다.
“원래 그 정도 간격을 두고 걷습니까?”
“네, 상관과 동행할 때는 규정상 조금 떨어져 걷습니다.”
난 그쪽 상관이 아니라니까 그러시네. 하지만 이제 정정해 주는 것도 귀찮았다. 카이얀은 그가 맘대로 하게 둬 버리고 천천히 걸었다.
카이얀의 집은 한가로운 도시 외곽에 있어서, 시내로 가려면 빠른 걸음으로 30분 정도는 걸어야 했다. 그래도 산책하기엔 좋아서 카이얀은 보통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도로를 왼쪽에 끼고 시내 근처까지 갔다가 돌아오곤 했다.
인도는 잘 보수되어 있고 봄이면 가로수도 싱그럽고 향기로워서 기분이 좋아졌다. 루크에게 그 길을 알려 주고, 심심할 때 혼자 다녀 보라고 할 셈이었다.
“집에서 답답했겠습니다. 내가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연구소에서도 지시가 없을 때는 늘 대기했습니다.”
카이얀은 새삼스럽게 잘 다져진 루크의 몸을 보았다. 운동 없이는 만들기 힘든 몸이었다. 피트니스 센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여 주기 위해 만든 몸과는 어딘가 달랐다. 정말 날렵하게 움직이기 위한 몸이었다.
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몸 칭찬이라도 해서 침묵을 깨 볼까. 자연스러운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 카이얀도 어색했다. 그저 루크가 관계에 있어 지나치게 서툴러, 상대적으로 능숙하게 상황을 이끄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정적 속에서 계속 걸었다. 루크는 딱히 침묵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저 밖에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워 보여서, 정말 한 번도 밖에 나와 본 적이 없나 의아해질 정도였다.
“연구소에 있을 때…….”
막 물으려 하는데, 갑자기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잠깐만요. 누구지?”
이 번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카이얀은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 게다가 핸드폰 번호 형식도 아니었다.
공중전화인가? 뭐지?
카이얀은 일단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카이얀! 나야.
우뚝, 카이얀은 걸음을 멈추었다. 루크가 의아한 듯 이쪽을 보는 게 느껴졌다. 카이얀은 잔뜩 들떠서 반짝거리는 루크의 눈을 흘끗 돌아보았다. 뭔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걸 느끼며, 카이얀은 휴대폰을 좀 더 귀에 가까이 했다.
“나이란.”
- 잘 지냈어? 루크는 어때?
카이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뭔가 나이란과 통화를 하게 되면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는데, 막상 목소리를 들으니 무슨 얘기부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연구소 폐쇄됐던데.”
그 말부터 꺼냈다. 제가 듣기에도 딱딱한 목소리였다. 루크가 이쪽을 빤히 보는 게 느껴졌다. 카이얀은 그냥 계속 걷자고 손짓했다. 루크는 용케 알아듣고 같이 걸었다.
- 아, 어쩔 수 없었어. 거기 유지비도 만만치 않아서. 별일은 없었고?
“ 있었어. 너, 이거 위헌이야. 아주 심각한 인권 침해라고.”
법에 대해 전문가는 아니지만 기본적인 건 안다. 화를 내게 될 것 같았는데 의외로 건조한 목소리가 나왔다. 나이란은 개의치 않고 핸드폰 너머에서 신나게 한차례 웃었다. 대답을 회피하는 행동이었다.
- 그건 그거고, 뭐 돈 부족하거나 하진 않지?
“한 번 아팠어. 가끔 그런다는데 약도 없고.”
- 아. 진통제 같은 거 주면 안 돼. 그 종이 읽어 봤어? 루크 몸이 되게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는 상태라 함부로 그런 거 먹이면…….
“야.”
카이얀은 나이란의 말을 끊었다. 핸드폰도 없애 버리고 완전히 모습을 감춰 버린 사람이다. 지금 갑자기 공중전화로 연락한 데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너 무슨 말 하려고 전화했어.”
옆에서 루크가 귀를 기울이는 게 느껴졌다. 카이얀은 그가 듣지 않았으면 했지만, 당연히 들리는 걸 억지로 듣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약이 하나 새로 갈 거야. 그걸로 바꿔서 먹여.
“무슨 약?”
- 아, 그냥 루크가 매번 먹던 약이야. 근데 이것저것 바꾸고 새로 만들었어. 어떤지 봐야 하니까 그거 루크한테 줘.
“위험한 거 아냐?”
혹시 약물 부작용 같은 것 때문에 루크가 아팠던 게 아닐까 생각했던 카이얀은 대뜸 그것부터 물었다. 나이란은 또 웃었다.
- 걱정하는 거야? 그새 정들었나 보네. 하긴, 좀 오래 혼자 살았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카이얀은 짜증이 났다. 위험한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은근슬쩍 말을 돌리고 있었다. 카이얀은 휴대폰을 꽉 쥐었다.
- 루크는 중요한 전력이야. 위험한 걸 먹일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잘 갖다 주기만 해.
카이얀은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연락해야 하는지, 대체 이 남자를 언제쯤 데려갈 생각인지, 그렇게 힘들어 하는데 해결할 방법은 전혀 없는 건지, 그런 것들을. 카이얀이 막 말을 꺼내려는데 나이란이 선수를 쳤다.
- 너무 마음 주지 마. 루크가 전쟁에서 뭘 했는지 알면 뒤로 넘어갈걸. 대단한 군인이었지. 넌 상상도 못해.
진지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더니, 나이란은 멋대로 작별 인사를 남기고 뚝 전화를 끊어 버렸다. 카이얀은 멍해져서 핸드폰 대기 화면만 내려다보았다.
생각해 보면 루크를 맡기고 갈 때도 나이란은 영 제멋대로였다. 이런 사람에겐 휘둘리게 된다. 카이얀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내 불빛이 가까이 보였다. 사람도 많아진 것 같았다. 카이얀은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루크에게 말했다.
“슬슬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며 카이얀은 심란해졌다. 루크는 아쉬운 얼굴이었지만, 집까지 가려면 또 30분이 남아 있었다. 그 솔직한 얼굴을 보다가 카이얀은 애써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 루크가 전쟁에서 뭘 했는지 알면 뒤로 넘어갈걸.
어쩔 수 없이, 나이란의 말이 머릿속에 남았다.
* * *
솔직히 말하자면 루크는 별로 군인 같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카이얀은 서재에 틀어박혔다. 책을 뒤적거리며 심란한 마음을 달래 보려 하다가 포기했다. 루크에 대한 생각이 계속 이어졌다.
처음엔, 이렇게 군인 같은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반듯한 자세와 딱 떨어지는 말투, 그리고 잘 만들어진 몸. 지시받은 대로만 움직이고 지시가 없으면 무한정 대기하는 수동성.
그러나 루크는 다른 의미에선 전혀 군인 같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피노키오를 읽는 루크, 진지한 얼굴로 인형이 뭐냐고 묻는 루크는 차라리 어린애 같았다.
방을 보여 줬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밖에 나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즐거워하던 모습도 그랬다. 사실 루크와 함께 지내는 동안 카이얀은 루크가 군인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루크는 아주 자연스럽게 카이얀의 일상에 녹아들었다.
관계는 원래 그런 거였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그저 우연히 마주치기만 해도 시작되고 이어지고 깊어지는 게 관계였다. 카이얀과 루크의 관계도 그랬다. 그걸 경계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르다크에 2차 파병, 내전 종식 기대]
[타이멘, 대 르메니온 선전포고… 평화기구 나서나]
카이얀은 성의 없이 인터넷 뉴스 페이지를 뒤졌다. 거짓말로라도 국제 분쟁에 관심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전후 문학에 약간의 관심이 있는 정도. 그러나 루크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자꾸 그렇고 그런 기사들에 눈이 갔다.
그의 나라 리탄은 자칭 국제 분쟁의 중재자였다. 국제 평화 기구에서 의장 역할을 하며, 불법적인 전쟁이 발생했을 때 가장 많은 수의 군인을 파병했다. 카이얀은 아마 루크도 그런 파병에 동원된 군인이었으리라 짐작했다.
길을 걸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루크가 떠올랐다.
그런 얼굴을 하는 사람도, 사람을 죽일 수 있구나.
모르는 건 아니다. 어린애도 아니고, 꼭 사악한 사람만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전쟁은 원래 그런 거고, 납득 못 할 일도 아니다.
그때, 지직거리던 흑백 녹화 영상이 머리를 후려쳤다. 소리조차 나지 않던, 그 고요한 살해…….
카이얀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편견이다. 어릴 땐 편견이 아니라 진리라고 생각했지만, 스물일곱 살이 된 지금은 다르다.
카이얀은 모니터를 꺼 버렸다. 이렇게 저렇게 부질없이 궁리해 봐도, 마음은 전혀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 후로 며칠, 카이얀은 루크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루크가 거실로 내려오는 시간은 자정, 오전 여덟 시, 오후 네 시, 이렇게 세 번이었다. 카이얀은 그 시간을 피해 거실로 갔다.
그렇게만 하면 루크와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 외로 루크의 얼굴을 보는 일이 많았다. 처음엔 긴가민가했지만 아무래도 자길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이전 같았으면 안쓰러웠겠지만 이젠 아니었다. 카이얀은 루크가 부담스러웠다. 친절하게 대하긴 했지만 별다른 뜻이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니다. 그저 누구나 해 줄 수 있는 일을 해 준 것뿐인데.
“안녕하십니까.”
벌떡 일어나는 루크를 보고, 카이얀은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오전 아홉 시가 넘은 시간이다. 계속 여기 있었던 모양이다.
“네.”
짤막하게 대답하고 물부터 마셨다. 흘끗 쓰레기통을 보니 조금 다른 색의 알약 봉지가 있었다. 바뀐 약은 잘 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카이얀은 냉장고를 열었다. 마트에 가지 않은 지 꽤 오래돼서 마땅히 먹을 게 없었다. 냉동식품으로 대충 넘길까. 아침부터 그런 걸 먹긴 싫어서 카이얀은 차키를 챙겼다.
“저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아, 모시고 가겠습니다.”
“아뇨.”
카이얀은 거절해 놓고도 움찔했다. 그 거절의 말이 거의 루크의 말을 끊다시피 하며 튀어나온 탓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뱉은 말이었는데, 루크는 좀 놀란 것 같았다. 카이얀은 그에게서 애써 시선을 돌렸다.
“집 비워 두면 안 되니까요. 그냥 기다리고 있으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고 카이얀은 곧장 등을 돌렸다. 루크는 배웅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제자리에 선 채 카이얀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루크는 가슴이 울렁이는 걸 느꼈다.
건 무슨 기분이지…….
잠시 고민하다가 루크는 천천히 소파에 앉았다.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고 했다. 기다리자. 기다리는 것에는 자신 있었다. 훈련이나 실험을 할 때, 작전에 참가할 때를 제외하면 루크는 늘 기다려야 했으니까.
카이얀의 생각대로, 루크는 계속 거실에서 카이얀이 오기를 기다렸다. 물을 마시고 약을 챙긴 후에, 카이얀이 언제쯤 거실로 올까 귀를 기울였다. 가까이 오는 그의 발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마음이 환해졌다. 그리고 루크는 그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을 꽤 즐겼다.
대단할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짧은 대화를 상상하면,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린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생경한 감정. 카이얀을 기다리는 건 즐거웠다. 그건 전혀 힘들지 않았다. 그랬는데… 어쩐지 이번엔, 그 기다림이 좀 힘들 것 같았다.
밖으로 나온 카이얀도 마음이 편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티 났겠지?”
시동은 걸었는데 출발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혼잣말을 하고 잠깐 그대로 앉아 있다가 마른세수를 했다.
마트에서 무슨 정신이었는지도 몰랐다. 루크에게 신경이 쓰였다가, 그렇게 신경 쓰는 자기에게 짜증이 났다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나이란에게 제대로 화를 내지 못한 게 아쉬웠다가, 감정이 오락가락했다.
애초에 왜 나한테 군인을 맡긴 걸까. 아니, 맡겼으면 조용히 있을 것이지 왜 군인이란 걸 그런 식으로 상기시킨 걸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면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이 피해 의식과 고정관념을 알면서.
그가 과거를 숨기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카이얀의 과거는 아주 적은 사람들만 알고 있으며, 그 소수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건드리지 않는 카이얀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어지러운 생각을 바퀴 삼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다고 딱히 상황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채소를 다듬고 있는데 루크가 다가왔다. 기척도 없이 가까이 와서 카이얀은 움찔 놀랐다. 당연히 루크도 그 기색을 알아차렸다.
“아… 죄송합니다.”
루크가 주눅 든 얼굴로 한 걸음 물러서며 사과했다. 카이얀은 가까스로 괜찮다고 대답하고 다시 싱크대로 몸을 돌렸다. 제발 루크가 자기 방으로 올라가 주길 바랐지만 루크는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결국 카이얀은 루크가 보는 앞에서 채소를 다듬고 냉장고까지 정리했다.
입맛도 없고, 루크가 옆에서 보고 있으니 더 불편했다. 카이얀은 대충 만든 샐러드를 먹으며 대체 왜 루크가 방으로 돌아가지 않는 걸까 고민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식탁 옆에 뻣뻣하게 선 채 루크가 말했다. 부탁. 카이얀은 그쪽으로 시선을 두었다가, 전전긍긍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을 보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눈치를 보는 어린애 같은 얼굴이라 기묘한 죄책감에 속이 답답했다.
“뭡니까?”
“다른 책을 읽었으면 합니다.”
카이얀은 멈칫했다. 부탁하는 건 처음이지 싶었다. 그러나 카이얀은 여전히 루크로부터 시선을 돌린 채 어영부영 대답했다.
“책은 드릴 수 있는데, 제가 좀 바빠서 이것저것 알려 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루크는 대답해 놓고도 머뭇거렸다. 대답은 습관처럼 반사적으로 해 놓고 무어라 이을 말을 찾는 모양이었다. 카이얀은 크게 잘못한 것도 없이 악당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분간 바쁠 것 같습니다. 지내는 데 문제 있으면 얘기하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연구가 끝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다. 바쁜 일은 전혀 없었다. 카이얀은 연구 주제를 느긋하게 고르는 편이라, 앞으로 며칠 정도는 여유롭게 쉬는 기간이라 해도 좋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루크가 계속 이것저것 말을 걸 것 같아 카이얀은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뱉었다.
루크는 주춤거리며 카이얀의 눈치를 살피다가, 이내 인사를 하고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여전히 손에 피노키오 책을 든 채였다.
루크가 사라지자 카이얀은 탁 포크를 놓았다. 그리고 접시에 남은 걸 전부 싱크대에 부어 버렸다. 아까부터 입맛이 없었지만, 지금은 음식을 쳐다보기도 싫어졌다.
“나 뭐하냐, 진짜.”
카이얀은 식기를 대충 싱크대에 던졌다. 요란한 소리가 났다.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 * *
루크는 카이얀과 나이란의 통화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청력은 비정상적으로 좋아서,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나이란의 목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카이얀은 나이란과 통화한 이후 급격히 태도를 바꾸었고 루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귀찮아진 건지도 모른다. 이제 루크는 어렴풋이나마 카이얀은 이 실험에 참가하는 것에 동의한 적이 없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니 자기를 맡는 게 달갑지만은 않았을 테고, 나이란과 연락한 후엔 그 생각이 더 굳어졌을지도.
아니면, 다른 이유일 수도 있다. 루크는 코가 길어진 피노키오 그림을 내려다보며 멍하게 생각에 잠겼다.
“루크, 뭐하는 거야. 쏴.”
전쟁터에 나갈 때 루크는 늘 초소형 원격 통신 기구를 착용했다. 박사와 연구원은 그 기구를 통해 루크와 이야기할 수도 있었고, 전쟁 상황을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도 있었다. 그들은 그 장치를 통해 루크의 신체 능력 향상도를 평가하고 수치화해 기록했다.
“당장 쏴, 왜 거기서 미적거려!”
처음 전쟁터에 나간 날. 누가 귀에다 대고 끊임없이 살인을 종용했다. 루크는 혼란스러웠다. 손가락을 방아쇠에 건 채 웅크려 떠는 소년병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루크는 간신히 대꾸했다.
“표적이 평소와 다릅니다.”
훈련할 때의 표적은 저런 표정을 짓지 않는다. 그건 그냥 만들어진 사람으로, 표정이랄 것이 없다. 떨지도 않는다. 그냥 쏴서 맞추면 되는 것이다. 루크는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을 처음 본 것 같은 생경한 얼굴로 머뭇거리기만 했다.
“무슨 소리야, 똑같아. 똑같은 거야. 쏘고 다음 지점으로 가야 할 거 아냐! 당장 움직여!”
“하지만 이건 다릅니다. 이건 표적이 아닙니다.”
루크는 고장 난 것처럼 그 말만 반복했다. 지시를 내리던 상대가 욕설을 퍼부었다.
언제 연구소에 들어갔는지는 잘 모른다. 원래 연구소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주기적으로 주사를 맞고 약을 먹고 훈련을 했다. 물론 사람을 쏴 맞추는 훈련도 했다. 하지만 그건 진짜 사람이 아니었다.
루크는 연구소에서만 자랐지만 인간과의 접촉이 없진 않았다. 루크는 연구원이나 박사들이 웃거나 얼굴을 찡그리거나 하는 것을 보며 지냈다. 그게 사람이었고, 자기도 사람이었다. 때문에 루크는 소년병을 보는 순간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건, 무어라 표현할지 모르겠지만 이건…….
“당장 쏴. 명령에 불복하는 건가?”
명령하는 목소리가 바뀌었다. 귀에 익은, 묵직한 음성이었다. 몸은 명령에 반응했다. 루크는 방아쇠를 당겼다. 루크는 거의 터지다시피 한 소년병의 머리를 보다가 그만 등을 돌려 버렸다.
당연히, 추궁은 있었다.
“미쳤어? 네 지원이 늦어져서 아군 몇 명이 다쳤는지 알아?”
나이란 박사는 루크의 상처에 지혈제를 뿌리며 다그쳤다. 루크는 대답할 말을 찾았지만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그건 표적과 달랐다, 이미 통신할 때도 여러 번 말했지만 묵살당하지 않았나.
루크는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죄송합니다.”라고만 말했다.
어쩌면 그 군인은 표적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자기가 다른 사람과는 조금 달라서, 착각하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크는 다음 사격 훈련을 하면서도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표적에는 눈조차 그려져 있지 않다. 표적은 그 군인 같은 눈을 하지 않는다. 떨지도 않아. 그 군인은 박사나 연구원처럼 걷고 뛰며 움직였다. 종이나 판넬 따위로 만든 팔다리가 아니었어.
탕! 탕! 탕!
총알은 계속 명중했다. 루크는 쏘고 또 쏘았다. 몇 번이고 탄창을 갈아 끼우며, 루크는 왜 아까 그 군인은 이렇게 쏴 맞출 수 없었던 건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구할 수 없었다.
“생각하지 마.”
왜 그런 지시가 거듭되었던 건지 루크는 마침내 깨달았다. 애초부터 자기가 알아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괴물 같은 놈.”
같이 작전을 수행하던 아군도 자길 향해 그렇게 말했다. 적대적인 투는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 꺼리는 어조였다. 루크는 그때 괴물이란 단어를 처음 들었다.
그 뜻을 알게 된 후엔 자기가 그렇게 불리는 것이 어느 정도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루크는 자기에게 죽기 전에 비명을 지르고 떨던 사람들을 잊지 못했다.
루크는 피노키오를 읽으며 ‘나쁘다’는 말에 대해 배웠다. 그건 아마 나쁜 짓이었던 것 같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박사나 연구원을 죽이는 건 나쁜 일일 테고, 그 표적들도 박사나 연구원과 똑같이 움직였으니 그 사람을 죽이는 것도 나쁜 일이겠지.
어쩌면 카이얀도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팔랑팔랑, 희미하게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루크는 책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에 바짝 붙으니 소리가 좀 더 분명해졌다. 가벼운 발소리. 카이얀이 서재를 돌아다니고 있는 모양이었다.
“좋아요? 이게 ‘좋다’는 거예요.”
좋다. 루크는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카이얀이 있는 건 좋다. 그가 곁에 있는 건 좋은 일이다.
“당분간 바쁠 것 같습니다.”
루크는 이해하려 했다. 연구소 사람들도 자주 바빴다. 그들이라고 루크를 방치한 건 아니었다. 아주 가끔, 아플 때 신경을 써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도 바쁘면 그러지 못했다. 그러니 루크는 카이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카이얀 로스터드 씨가 좋다.
루크는 천천히 그 명제를 곱씹었다. ‘좋다,’는 말의 어감은 정말 좋았다. 루크는 처음으로 자기가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카이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서 자각도 못한 채 간절히 바랐다.
내가 나쁜 짓을 했어도, 날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 *
카이얀이 군인을 싫어하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애초부터 루크가 무슨 짓을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루크가 군인이라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두 사람의 동거는 기묘한 형태로 계속되었다. 루크는 카이얀을 귀찮게 하지 않을까 염려하면서도 계속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카이얀은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루크가 어렵사리 꺼낸 말들을 모두 건조하게 받아쳤다.
관계는 지지부진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 루크는 전전긍긍 카이얀의 눈치를 살피고, 카이얀은 그에게 까닭 없이 냉랭하게 대하는 자기 모습에 죄책감을 느끼면서.
그러나 문제는 생각보다 일찍 터졌다. 나이란으로부터 다시 한번 전화가 걸려 온 것이다.
- 별일 없지?
“그래.”
카이얀은 전혀 달갑지 않게 나이란의 전화를 받았다. 지금 마음 같아선 어떻게든 나이란에게 루크를 다시 데려가라고 말하고 싶었다. 카이얀은 자기가 서재에 혼자 있는 걸 알면서도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
- 아, 다행이다. 이번 약은 좀 불안했는데 문제없는 모양이네.
“너 저 사람 언제 데려갈 거야.”
- 말했잖아. 연구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면 바로 데려간다고.
“그러니까 그게 언제냐고 하잖아.”
- 왜 갑자기 그래? 루크가 뭐 실수했어? 어설퍼도 이상한 실수할 사람은 아닌데.
카이얀은 기가 막혀 허 웃고 말았다.
“그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긴 하나 보지?”
- 어쨌든 안드로이드는 아니잖아.
“지금 그딴 게 중요해? 언제 데려갈 거냐고!”
카이얀은 못 참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루크가 바로 옆방에 있다. 문 밖에 귀를 대고 있지만 않으면 들리지 않을 소리였다. 적어도 카이얀은 그렇게 생각했다.
- 시간 좀 걸려. 우리도 지금 정권 바뀌는 바람에 정신없다고. 너 같은 학구파는 이해 못 하겠지만 이런 일은 원래 틀어박혀서 연구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와서 당장 데려가.”
카이얀은 상대의 말을 끊었다. 저 너머에서 잠깐 침묵하던 나이란은 한숨을 쉬더니 중얼거렸다.
- 뭔 일 있었나 보네.
“말 돌리지 말고 당장 연락처 불러.”
- 정말 둘 데가 없어서 그래. 좀 봐줘. 창고에 둘 수밖에 없는데, 너도 그건 싫을 거 아냐.
둘 데가 없다니, 지금…….
카이얀은 울컥했다. 아깐 사람이라더니 이젠 또 짐 덩어리 취급이다. 그냥 나이란 집에 함께 있어도 되는 문제 아닌가. 카이얀은 나이란이 말도 안 되는 소릴 해서 화가 나는 건지, 루크를 짐처럼 취급해서 화가 나는 건지 스스로도 몰랐다.
“그럼 창고에라도 두든가, 저건 군인이잖아!”
아.
카이얀은 뱉어 놓고도 움찔했다. 이렇게 말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럼 창고에 두라니, 이래서야 나이란과 다를 게 없었다.
- 너…….
휴대폰 너머에서 나이란도 놀란 모양이었다. 카이얀은 평소 절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개인에겐 무관심해도 인도주의자였다.
나이란이 노린 것도 그 점이었다. 루크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면서도 잘 데리고 있을 사람이 필요했다.
카이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이 약해 루크를 떠넘기면 그대로 받아들이겠지만, 루크가 군인인 이상 절대 제 선 안으로 들여놓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이얀을 고른 건데, 생각보다 카이얀 안의 충돌이 요란한 모양이었다.
이 계기를 잘못 넘긴다면 카이얀은 루크를 완전히 제 안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나이란은 그걸 짐작할 수 있었다. 나이란이 가장 바라지 않는 일 중 하나였다. 그래서 일부러 루크가 군인이라는 것을 상기시킨 건데, 일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가 버렸다. 나이란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변했네.
카이얀은 들으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어쩌라고. 보태 줄 거 아니면 주소나 불러.”
- 정말 창고에 둘 거야. 그래도 상관없어?
“저 사람이 내 아들이라도 되냐. 부르기나 해.”
결국 나이란은 짤막한 주소를 하나 알려 주었다. 첫날 막무가내로 떠맡기고 갈 때에 비하면 순순한 태도였다. 카이얀은 주소를 받아 적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두세 시간쯤 꼬박 달려야 할 거리였다.
- 문제 생기면 이쪽으로 전화해. 임시 번호긴 하지만.
그러면서 나이란은 번호 하나를 더 불러 주었다. 카이얀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 후 카이얀은 잠깐 제 서재에 서 있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달랬다.
그래. 이러는 게 맞다. 애초부터 이럴 생각 아니었나. 이편이 서로에게 좋을 것이다. 전처럼 얼결에 루크를 떠맡아 일을 복잡하게 만드느니, 이쯤에서 관계를 정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오지랖 넓은 생각하지 마.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을 함부로 들여놓으면 안 돼.
카이얀은 자꾸 어린애처럼 기뻐하던 루크를 떠올리는 자기 자신을 엄하게 타일렀다. 천성이다. 어쩔 수 없는 성격이다. 하지만 이번만은 안 된다. 상대는 군인이다. 그냥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려보내는 것뿐이다.
카이얀은 서재 밖으로 나왔다. 거실로 내려와 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좀 지치는 것 같아서 핸드폰을 아무데나 두고 소파에 늘어졌다. 시간을 보니 네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루크가 네 시 약을 먹으면 곧장 출발하자고 다짐했다.
카이얀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루크에게 쓰라고 보내왔던 돈과 루크의 약을 챙기고 차키까지 주머니에 넣었다.
거실에서 잠시 기다리자 루크가 거실로 내려왔다. 루크는 카이얀에게 인사를 하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카이얀은 약간 불편한 마음으로 루크를 지켜보았다.
루크의 태도가 평소와 약간 달랐다. 카이얀은 어디가 아픈가 싶어 주의 깊게 루크를 살폈다. 평소의 루크라면 그 시선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렸겠지만 루크는 카이얀과 눈 마주치는 것을 꺼리는 듯했다.
무슨 일이지?
카이얀은 의아했으나 굳이 묻진 않았다. 루크는 평소처럼 거실에 머물지 않고, 물을 다 마시자마자 곧장 2층으로 올라가려 했다. 카이얀은 서둘러 루크를 불렀다.
“루크 씨. 얘기 좀 하고 싶은데요.”
루크는 잠깐 등을 보인 채로 돌아서 있다가 천천히 카이얀을 보았다. 평소처럼 무표정이었는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인지 카이얀은 그 얼굴이 좀 처연하다고 느꼈다.
“아까 나이란하고 통화했습니다.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차로 태워다 줄 수 있는 곳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루크는 곧장 대답했다. 놀라는 것 같지도 않았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태연함에 오히려 카이얀이 당혹했다.
루크는 또 바로 돌아섰다. 제 방으로 올라가려는 모양이었다. 기묘하게 도망치는 모양새라, 카이얀은 또 루크를 붙잡아야 했다.
“저기, 지금 가려고요.”
이번에 루크는 아까보다 좀 더 오래 머뭇거렸다. 제자리에 선 채 자길 돌아보지 않는 루크를 향해, 카이얀이 어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바로 출발하면 될 것 같습니다.”
더 있다간 마음만 약해질 것 같았다. 카이얀은 짐을 챙긴 비닐봉지를 살짝 들어 보였다. 루크는 그제야 천천히 카이얀을 돌아보았다. 보라색 옷을 위아래로 맞춰 입은 모습이, 이번에는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로스터드 씨.”
“네.”
루크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였다. 카이얀은 불안을 안은 채 루크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루크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나이란에게 그랬던 것처럼, 카이얀이 제게도 고함을 칠까 두려웠다. 매달린다고 받아 줄까. 어차피 포기해야 할 것이라면 카이얀이 자길 미워하지 않는 지금 이 상태로 포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나가겠습니다.”
카이얀은 안도했다. 그럼 가죠, 하고 대답하며 루크의 곁을 스쳐갈 때, 카이얀은 루크의 대답에 안도하는 자기를 어쩔 수 없이 미워했다.
차 안은 조용했다.
카이얀도 루크도 달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분위기는 조금도 험악하지 않았지만 부드러운 것도 아니었다. 카이얀은 그들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를 떠올렸다. 루크를 데리고 연구소로 간 적도 있었지 싶었다. 루크는 그때처럼 바르게 앉아 정면만 보고 있었다.
카이얀은 운전에 집중하려 애썼다. 하지만 자꾸 잡생각이 차올랐다.
어려서부터 이런 순간이 가장 싫었다, 고 기억한다.
어릴 때의 카이얀은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잘 웃는 아이여서 자연히 주위에 사람이 모였다.
그중에는 카이얀에게 친구 이상의 역할을 부여하는 사람도 있었다. 몇몇은 카이얀에게 지나치게 의지했고, 카이얀은 그들의 끝나지 않는 투정과 어리광을 다 받아들일 만큼 그릇이 크질 못했다.
버거워지면 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카이얀에겐 그것도 어려웠다. 말을 꺼내려 하면 상대가 상처받을까 염려부터 되는 것이다.
결말은 늘 똑같았다. 더 견디지 못한 카이얀은 그들과의 관계를 정리해 버리고, 아무 언질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런 카이얀의 태도에 놀라고 상처받고…….
처음에 내보냈어야 했다. 알고 있었는데, 그러질 못했다. 카이얀은 무수히 후회했지만 루크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진 않았다. 루크를 이해시킬 자신이 없었다.
루크 역시 카이얀으로부터 사과받길 바라진 않았다. 실상 루크는 카이얀이 뭔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잘못이 있다면 내게 있을 것이다, 아마 내가 지시를 받아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루크는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카이얀에게 매달릴 수 없었다.
문득 루크가 입을 열었다.
“식사 안 하셔도 괜찮습니까?”
묻지 않아도 될 말이었지만 침묵이 괴로워 물었다. 그러나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결코 카이얀에게 말하진 않겠지만, 좀 더 카이얀과 있고 싶었다.
카이얀은 흘끗 시계를 봤다. 다섯 시가 조금 못 된 시간. 조금 허기가 지긴 해도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낯선 식당에서 루크와 둘이 마주 보고 앉아 밥을 먹을 마음은 없었다.
“네. 나중에 집에 가서 먹으면 됩니다.”
그 후엔 또 정적이었다.
차는 계속 달렸다. 도저히 깰 수가 없는 불편한 침묵이었다. 카이얀은 견디지 못하고 라디오를 틀었다.
여기저기 다니지 않는 편이라 자연 차에서 라디오 듣는 일도 드물었다. 라디오에선 진행자가 그 주의 신규 음악을 소개하고 있었다. 루크가 뭐냐고 물을 것을 대비해 카이얀은 라디오에 대해 설명할 준비를 했다. 무의식중에 떠올린 것이었다.
그러나 루크는 라디오에 대해 묻지 않았다. 갑자기 소리가 나오자 놀란 듯 그쪽을 흘끗 보긴 했지만 이내 다시 시선을 돌려 정면만 바라보았다.
카이얀은 어쩐지, 라디오 켠 것이 후회스러웠다.
“거의 다 왔네요. 거의 허허벌판인데.”
날이 어둑해질 무렵 카이얀의 차는 버려진 공장 지대를 연상시키는 한적한 곳에 도착했다. 카이얀은 불안감을 억누르며 라디오를 끄고 속도를 늦추었다.
“다, 온 것 같은데…….”
카이얀은 마침내 표지판을 찾았다. 천천히 차를 멈추고 카이얀은 차에서 내렸다. 카이얀은 어째서인지 자기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허.”
탁 문을 닫고 도착한 곳을 보며 카이얀은 헛웃음을 쳤다. 사실 전혀 웃기지 않았다.
도착한 곳은 물류 창고였다. 네바른 주 물류 창고, 페인트칠이 벗겨진 커다란 간판을 보며 카이얀은 자기 눈이 잘못된 게 아닐까 여러 번 생각했다. 주소가 잘못된 건 아닌지 여러 번 확인했지만 숫자 하나 다르지 않았다.
카이얀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이란이 이런 사람인 줄 몰랐다. 그렇게 태연한 목소리로 창고 주소를 부를 줄은 정말 몰랐다. 그저 협박이라고만 생각했다. 정말 오래된 잡동사니나 갖다 두고 먼지가 쌓이게 내버려 두는 물류 창고 주소를 부를 줄이야.
카이얀은 차에 손을 올리고 서서 나이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 설마 진심은 아니겠지. 가정집 창고도 아니고 물류 창고에 사람을 넣어 두란 건 아니겠지.
나이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신호음을 듣고 있다가 카이얀은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잠시 그러고 서서 이 막막한 사태를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문득 루크가 계속 차 안에 있다는 게 떠올랐다.
혹시 혼자 차문을 열 줄 모르는 게 아닐까 싶어 카이얀은 조수석 쪽으로 빙 돌아갔다. 그리고 조수석 쪽 문을 열었다.
“루크 씨, 다…….”
오긴 했는데, 라는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카이얀은 번개처럼 달려들어 루크의 몸을 밖으로 빼냈다. 루크는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몸부림을 쳤다. 눈이 하얗게 뒤집히고 입에서 거품이 끓었다. 이딴 건 영화에서나 보여 주는 거 아니었어? 그런 한가한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카이얀은 일단 루크를 바닥에 눕히려 했지만 루크는 말을 듣지 않았다.
아마 자기가 차에서 내린 직후부터 이런 것 같았다. 아니, 언제부터든 지금 그런 게 무슨 상관인가. 카이얀은 루크가 아스팔트 바닥을 미친 듯이 손톱으로 긁어 대는 끔찍한 장면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카이얀은 일단 루크의 팔 아래로 손을 넣어 상체라도 일으켜 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대체 왜!
카이얀이 어쩔 줄 모르고 그저 그새 손톱이 부러져 피가 흐르는 루크의 손을 붙드는데, 갑자기 루크의 경련이 멎었다. 그 몸이 축 늘어졌다.
카이얀은 더럭 겁부터 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루크는 곧 깨어났다. 잠시 가물가물 눈을 뜨고 카이얀을 보던 루크는 갑자기 거칠게 그를 떠밀었다. 그러더니 바닥에 엎드려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먹은 게 물과 알약뿐이니 토사물 같은 게 쏟아질 리 없었다. 그러나 루크는 여러 번 헛구역질을 했다. 그러다 왈칵, 시뻘건 생피 덩어리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루크 씨!”
제가 바닥에 뱉은 피를 보며 잠시 숨을 고르던 루크는, 또다시 바닥에 무너졌다. 루크는 의식을 잃지 않았으나 제대로 된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저 지금 느끼는 통증을 다른 통증으로 완화해 보려는 듯 바닥을 벅벅 긁었다.
카이얀이 간신히 그의 상체를 일으켜 제 가슴팍에 기대게 하자, 루크는 숨이 모자란 듯 필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히며 꺽꺽거렸다.
고통은 길었다. 이전처럼 쉽게 멈출 것 같지가 않았다. 카이얀은 다시 핸드폰을 꺼냈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나이란에게 전화하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자기가 한심해 미칠 것 같았다.
신호음은 더디게 이어졌다. 그동안에도 루크는 마치 보이지 않는 손으로부터 도망가려는 듯 바닥을 기었다. 그러나 루크 앞에 진통제 같은 건 없었다. 오직 군데군데 부서진 물류 창고의 시멘트벽만 있을 뿐이었다.
카이얀이 덥석 루크를 붙잡았다. 그때 핸드폰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여보세요? 왜, 카이얀?
“지금 루크 씨 상태가 이상해, 지난번처럼 또 아픈 것 같아. 너 지금 어디야, 이쪽으로 와서 약이든 뭐든…….”
- 아, 역시. 그 약 좀 불안하다 했더니.
“뭐?”
카이얀은 멍해져서 되물었다. 그러나 그러고 있을 틈도 없었다. 카이얀은 손톱이 빠져 피범벅이 된 루크의 손을 붙잡고 억지로 제게 끌어당겼다.
“정신 차려요, 나한테 기대요, 숨 쉬고!”
- 카이얀, 그냥 두면 돼.
카이얀은 나이란의 말을 잘 듣지 못했다. 그는 급한 마음에 핸드폰을 스피커폰 모드로 바꿔놓고 바닥에 대충 팽개쳤다. 그는 아까처럼 루크의 몸을 억지로 자기에게 기대게 했다.
그러다 문득 지난번에 루크가 어깨를 문 게 생각났다. 그때도, 그랬더니 좀 괜찮았던 것 같다. 카이얀은 루크를 뒤에서 안은 채 제 팔을 루크의 입가로 갖다 댔다.
“물어요. 괜찮을 겁니다.”
루크는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목소리가 들리긴 하는 걸까. 카이얀은 답답한 마음에 제 팔을 루크의 입에 완전히 붙였다.
“물어. 물라고!”
- 카이얀, 그냥 놔두면 된다니까?
그 순간 루크가 콱 카이얀의 팔을 물었다. 정말 짐승이 문 것처럼 엄청난 통증이 전해졌다. 어느새 카이얀의 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 와중에도 나이란이 뱉는 헛소리가 기가 막혀 카이얀은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무슨 개소리야, 이러다 죽겠다고!”
핸드폰 쪽에다 버럭 고함을 친 후에 카이얀은 루크를 차에서 좀 떨어뜨리려고 했다. 차체의 열기가 덜 식어 루크에게 도움 될 게 없을 것 같아서였다. 나이란에게 한 말은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 루크는 정말 숨도 안 쉬고 카이얀의 팔을 물고 있었는데, 고통 때문에 숨 쉬는 것도 잊은 듯했다.
루크는 정말 살점을 물어뜯을 것처럼 카이얀의 팔을 물었다. 아예 피범벅이 된 제 두 손으로 카이얀의 손목과 팔뚝을 붙들기까지 했다.
견디는 게 힘들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고 있으니, 루크는 더 이상 바닥을 긁거나 하는 식으로 스스로를 다치게 하진 않았다.
“안 멈추잖아! 여기 지금 네가 알려 준 거기야, 와서 뭔가 처방을 해야 될 거 아니야!”
이젠 팔에 거의 감각이 없었다. 카이얀은 나이란을 향해 비명처럼 고함을 쳤다.
- 이번에 바꾼 약이 좀 안 맞아서 그런 것 같으니까 잠깐 두면 괜찮아져. 원래 가끔 그래,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반쯤 흘려듣고 있으면서도 그 말만은 기가 막혔다.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고? 사람이 몸부림치며 눈을 까뒤집고 발작하고 있는데? 피까지 토하고 이성은 완전히 날아간 지금 이 상황에서 원래 가끔 그런단 소리가 나온다고?
대꾸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루크가 카이얀의 팔을 놓았다. 그러더니 앉은 채로 머리부터 앞으로 쓰러졌다. 카이얀은 다시 바닥에 대고 자해하려는 루크를 재빨리 붙잡았다. 지난번처럼 가슴이 맞닿게 해 끌어안으니 루크는 답답한지 몸부림치다가 이내 버거울 만큼 매달려 왔다.
제발 빨리 끝나라. 제발…….
카이얀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간절히 빌었다.
점차 루크의 몸이 안정되었다. 통제 불가능할 정도의 경련도 멎어갔다. 그러나 카이얀을 안은 팔에서는 힘이 빠지지 않아, 카이얀은 걱정스러웠다.
그때 귓가에 작은 속삭임이 들렸다. 거의 혼자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였다. 혹시 어디가 더 불편한가 싶어 카이얀은 루크의 입가로 귀를 가까이 했다. 떨림이 완전히 멎은 후에는 끌어안은 팔에서 조금 힘을 풀었는데, 그러자마자 루크가 더 강하게 안아 와 순간 숨이 막혔다.
“잘못했습니다…….”
멈칫, 카이얀은 순간 숨을 멈추었다. 잦아드는 목소리를 놓칠까 싶어서였다. 루크는 반쯤 정신을 잃어 가고 있었다.
“앞으론 안 그럴 테니까…….”
말은 거기서 끊어졌다. 어느새 루크는 카이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잠들고 말았다. 카이얀은 이게 잠든 건지 쓰러진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딱딱한 아스팔트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카이얀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물류 창고와 제 차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고개만 돌려 핸드폰을 확인했다. 나이란이 전화를 끊었는지 핸드폰은 조용했다. 카이얀은 손을 뻗어 핸드폰을 챙기고, 축 늘어진 루크의 몸을 간신히 차 뒷좌석에 눕혔다.
한숨이 나왔다.
카이얀은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그래 놓고도 한동안 출발하지 못하고 핸들만 쥐고 있었다. 이대로 집에 루크를 데려가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는다. 두 번 다시 이렇게 헤어질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잘못했습니다…….”
카이얀은 핸들을 탁 놓고 팔을 늘어뜨린 채, 긴 숨을 내쉬었다. 그는 결말이 정해져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기 자신과 치열하게 싸웠다.
곧 카이얀은 차를 출발시켰다. 백미러로 멀어지는 물류 창고의 시멘트벽이 보였다. 카이얀은 거기서 시선을 떨어뜨렸다. 루크는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 * *
루크는 집에 도착하고 나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카이얀은 완전히 늘어진 루크를 집 안까지 업어 옮겼다. 근육으로 다져진 몸인데다 완전히 기절한 상태라 상상 이상으로 무거웠지만, 카이얀도 약골은 아니었다. 그는 루크를 소파 위에 눕히고 물부터 한 컵 마셨다.
어쩌자고 다시 데려온 걸까.
막상 루크를 수습해 놓고 보니 막막했다. 카이얀은 제 무책임한 동정심에 화가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거기 그대로 두고 올 수는 없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고통에 겨워 쓰러져 버린 사람을 물류 창고에 맡기고 와 버린다니,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러지 못할 것이다. 물론 멀쩡한 상태였어도 그런 창고에 루크를 맡기는 건 어려웠을 것이다.
새삼 나이란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카이얀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일단 구급상자를 꺼냈다. 루크의 손끝이 엉망이었다. 손보다 얼굴을 먼저 닦아 내야 할 것 같아, 카이얀은 다시 일어나 수건을 물에 적셨다. 그 김에 제 손도 헹구고 세수까지 했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이 창백했다. 이게 두 번째였다고 해도 루크의 상태에 적잖이 놀란 탓이었다.
카이얀은 꽤 부산하게 움직였다. 수건으로 루크의 얼굴과 팔다리를 닦고, 피범벅이 된 손가락도 조심스럽게 닦아 냈다. 군데군데 상처가 보여서 거기에도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였다.
진통제 같은 걸 처방하는 게 금지되어 있다면, 시중에서 파는 연고도 안 될 게 당연했다. 하지만 카이얀은 신경 쓰지 않았다. 연구소에 있을 때도 상처 치료는 했을 거 아닌가.
카이얀은 완전히 의식을 잃은 루크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잘 만들어진 몸이다. 목과 어깨의 윤곽이 뚜렷하고 단단하다. 머리와 가슴, 허리와 팔다리의 비율까지 완벽하게 짜여 있다. 내리감은 눈꺼풀, 남자의 것치곤 긴 속눈썹이 제법 촘촘하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창밖은 캄캄했다. 카이얀은 루크의 머리에 살짝 손을 얹었다.
“잘못했습니다.”
뭐에 대한 사과였을까. 아픈 것? 아니면 다른 것에 대한 얘기였을까?
거리를 두기 시작했을 때, 루크가 초조하게 눈치를 살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을 떼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앞으론 안 그럴 테니까…….”
그래도, 그런 말까지 바란 건 아니다.
카이얀은 그저 막막했다. 루크는 엄밀히 말하자면 일종의 국가 재산이다. 모르긴 몰라도 연구소에서 모든 걸 다 통제하는 군인이니 루크에게 투자된 돈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 데리고 있는다 해서 그게 영원할 리 없었다. 언젠간 헤어지게 될 것이다.
루크에게 괜한 기대만 심어 주는 게 아닐까. 카이얀은 그게 가장 고민스러웠다.
밤은 고요히 깊어 갔다. 카이얀은 루크를 살피다가 소파 아래서 잠들었다.
* * *
루크는 아침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는 깨어나자마자 약냄새를 맡았다. 제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낯선 냄새가 났다. 루크는 몸을 일으켜 주위를 살피다가, 바닥에 누워 잠들어 있는 카이얀을 발견했다.
“로스터드 씨?”
띄엄띄엄 기억이 났다. 카이얀의 차를 타고 멀리까지 갔고, 차가 멈추었을 때 갑자기 통증이 느껴졌다.
그 이후에 어떻게 된 건지 루크는 기억하지 못했다. 보통은 쓰러져도 어느 정도까진 기억이 있는데, 이번엔 상태가 평소보다 나빴던 건지 아무 것도 제대로 기억할 수가 없었다.
‘데리고 와 줬구나.’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알 수 있었다. 한쪽에 카이얀이 챙겼던 루크의 얼마 안 되는 짐이 놓여 있었다. 루크는 그걸 흘끗 보고 조심스럽게 카이얀을 안았다. 그의 몸을 제가 누웠던 곳에 눕힐 생각이었다.
“아, 깼습니다. 괜찮아요.”
깊이 잠들지 않았는지 카이얀은 소파에 몸이 닿자마자 눈을 떴다. 루크가 엉겁결에 카이얀을 소파에 내려놓자, 그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루크는 왠지 어색해서 어쩔 줄 모르다가 카이얀 앞에 똑바로 섰고, 카이얀은 좀 피곤한 듯 눈을 꾹꾹 누르며 루크에게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괜찮으시면 서서 듣겠습니다.”
누구와 마주 앉는 것에는 익숙하지 못했다. 하지만 카이얀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앉으세요.”
카이얀이 두 번째 말하자 루크는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루크는 카이얀의 안색을 살피며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떠올려 보려 했다. 그러나 마땅히 새로 기억나는 건 없었다. 다행히 카이얀의 표정은 나쁘지 않아 루크는 다소 안심했다.
“어제, 나이란이 알려 준 곳으로 갔었습니다. 기억나죠?”
“네.”
“도착했는데 루크 씨가 갑자기 또 아픈 것 같아서요.”
“네……. 기억이 납니다.”
루크는 폐가 된 것 같아 죄송하다고 말하려다가, 지난번 카이얀의 날카로운 반응이 떠올라 그만두었다. 괜한 말로 눈 밖에 나고 싶진 않았다.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카이얀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 어디까지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여기 있고 싶으면 있어도 좋다고 말하자. 통증이 있을 땐 바로 말하라고도. 특별히 약 같은 걸 챙겨 줄 순 없겠지만, 혼자 방에서 앓는 것보단 낫겠지.
“루크 씨,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루크는 다소 긴장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중요한 물음은 아닌데, 싶어 카이얀은 곧장 물었다.
“여기서 계속 지내고 싶어요?”
루크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제껏 받아 본 적이 없는 종류의 질문이었다. 루크는 자기의 거취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사실 그럴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루크는 몰랐다. 자기가 원하는 곳을 골라 살 수 있다는 건 루크에게 낯선 개념이었다.
“네.”
루크는 머뭇거리다 카이얀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카이얀은 눈썹을 까딱 움직였다. 뭐지. 긍정의 대답이긴 한데 어딘지 마음에 걸렸다. 사실은 루크도 여기서 지내는 게 불편했던 거 아닐까.
“그러면 좋겠습니다.”
루크가 조심스럽게 덧붙이고 나서야, 카이얀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루크는 지난번부터 묘하게 눈치 보는 어린애처럼 굴고 있었다. 위축된 루크와 이야기를 하려면, 당분간은 인내심을 가져야 할 듯했다.
“생각해 봤는데… 여기서 계속 지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언젠간 다시 연구소로 가게 되겠지만, 루크 씨가 원한다면 그 전까진…….”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평소라면 무시하고 나중에 되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이얀은 나이란의 전화일 것임을 직감했다.
지금 시간은 아침 일곱 시. 흘끗 시계를 본 후 카이얀은 “잠깐만요.” 하고 말하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과연 나이란이 알려 준 임시 번호였다.
“여보세요.”
- 창고에 전화해 봤어. 너 안 왔다던데.
나이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어제 고통에 몸부림치는 루크를 그냥 두면 된다고 말하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루크가 핸드폰 너머 나이란의 목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는 걸 아직 모르는 카이얀은, 혹시 루크가 들을까 싶어 음성 볼륨을 낮추었다. 소용없는 행동이었다.
“그래. 그냥 다시 집에 왔어. 루크 씨는 이제 괜찮아졌어. 물론 넌 안 궁금하겠지만.”
- 비꼬지 마.
“사실이잖아. 관심도 없는 주제에 아침부터 전화는 왜 했는데.”
좋은 말이 나가질 않았다. 나이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쪽도 꽤 지친 기색이었다.
- 오늘 택배 하나 새로 갈 거야.
새 약인 모양이지. 지난번 약은 부작용이 컸으니까…….
카이얀은 정말 이 모든 게 다 지긋지긋했다. 그러나 나이란의 다음 말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 측정긴데, 루크한테 주면 알아서 착용할 거야. 약 먹고 루크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봐야 되니까.
카이얀은 되묻지도 못하고 굳어 버렸다. 갑자기 세상에서 제일가는 바보가 된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선, 이 뻔뻔하고 돼먹지 못한 상대에게 해 줄 욕 한마디가 생각나지 않을 리 없다.
“무슨 소리야?”
- 새로 보낸 그 약 부작용이 좀 있는 것 같아. 근데 어디가 잘못된 건지 알아야 되니까, 그 측정기 착용하게 하고…….
“너 정말 대단하다.”
카이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엉거주춤 따라 일어나려는 루크에게 그냥 앉아 있으라고 거칠게 손짓했다. 루크가 이 대화를 듣지 않았으면 싶었다. 카이얀은 루크 방으로 올라가는 층계 앞까지 갔다.
“그 약 먹고 그렇게 아팠던 거라며. 지난번에 아팠던 거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고. 멀쩡하던 사람이 피까지 토했어. 근데 뭐? 그 약을 계속 먹여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보겠다고? 너 미쳤어?”
- 카이얀, 감정적으로 굴지 마.
나이란의 차분한 목소리가 오히려 화를 부추겼다. 카이얀은 그대로 핸드폰을 던져 버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 그건 실험 대상이야. 루크가 먹는 약은 일반적인 사람처럼 먹고 자고 하지 않아도 루크의 몸을 정상적으로 유지시켜 주고 신체 기능을 향상시켜 주는 약이야. 그런 약을 완벽하게 만드는 건 당연히 네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고, 그것 때문에 루크 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야 한다는 거야.
“루크 씬 사람이야. 저 사람이 무슨 립스틱 실험하는 원숭이인 줄 알아?”
- 카이얀.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입장에선 루크는 실험동물이 맞아.
지금까지 이런 사람과 친구랍시고 알고 지냈다니. 카이얀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누구라도, 그 어떤 이유라도, 같은 인간을 이렇게 취급할 순 없다. 카이얀은 점차 분노가 치밀었다.
“개소리 그만해.”
카이얀의 목소리가 떨렸다. 머리로 열이 몰렸다. 눈과 뺨, 목과 귀까지 전부 화끈거렸다.
- 넌 루크한테 정 안 줄 것 같아서 일부러 맡긴 건데, 이렇게 나오면…….
“닥치랬지!”
카이얀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이란은 놀란 것인지 입을 다물었다. 카이얀은 전혀 폭력적인 사람이 아니었지만, 지금 나이란이 눈앞에 있다면 그 얼굴을 한 대 갈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너희 연구소가 루크 씨를 어떻게 인계받았든 신경 안 써. 어떤 루트든 당연히 불법적이었겠지. 너 이거 내가 언론에 찌르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어릴 때부터 이 짓 계속한 모양인데 아동 학대에 감금에 폭행, 인권 침해에 위헌 문제, 정치 비리까지 줄줄이 딸려 나와. 그거 감당할 자신 있으면 계속 지껄여.”
- 좀 진정해. 어차피 루크도 이제 실험체로서 안정기라, 더 이상 무리한 실험을 할 계획도 없어. 앞으론 그냥…….
“앞으로도 그냥 가끔 부작용 때문에 피 토하고 기절하고 만신창이 좀 되면 되겠지. 허구한 날 연구소 캡슐에 갇혀 있다가 어느 날 남의 나라 전쟁터에서 죽을 거고. 아니, 나이 들어서 필요 없어지면 영화에서처럼 폐기 처분이라도 하나? 그래?”
- 극단적으로 말하지 마. 네 말대로 정계랑도 엮여 있어서 생각보다 단순한 문제가…….
카이얀은 자길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단순한 문제가 아니면 뭐 어쩌자는 건가. 정치와 엮여 있으니 조용히 하라고 입막음이라도 할 생각인가. 자길 정치에 까막눈인 바보로 아는 모양이었다. 카이얀은 들으라는 듯 비웃었다.
“어차피 너흴 후원하던 라투르 정권은 실각했어. 퇴진한 정권의 비리는 언제나 모두의 관심거리지. 그런데다 이번 정권은 아슬아슬하게 라투르를 이기고 들어서서 지난 정권을 못 물어뜯어 안달이 났을 거야.”
다 맞는 말이라 나이란은 반박할 말이 없었다. 새 정권의 노선은 라투르 정권과 거의 정반대 수준이었고, 불법 실험의 꼬리를 밟히지 않기 위해 연구소도 임시 폐쇄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주요 박사와 연구원은 여전히 새 정권의 감시하에 있었다. 루크를 일반인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그 짧은 순간 동안, 나이란은 카이얀에게 루크를 맡긴 걸 몹시 후회했다. 카이얀이 워낙 조용한 연구자 타입이라 이렇게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카이얀은 이를 갈며 나이란을 몰아붙였다.
“게다가 누구보다도 네가 잘 알겠지만, 군은 내게 빚이 있어. 군 수뇌부며 방송에 신문에 인터넷에 시민단체까지 다 끌어들일 수 있어.”
빈말이 아니었다. 카이얀은 할 수 있었다. 수재에 신비주의, 모델에 견줄 만한 외양의 카이얀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관심 대상이었다.
- 어떻게 하면 좋겠는데.
나이란은 약간 기세를 죽이며 물었다. 카이얀은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뭐라고 말해야 나이란이 두 번 다시 전화하지 못할까.
“앞으론 이딴 일로 전화하지 마. 복잡한 문제라는 거 알아. 나도 막무가내로 우길 생각은 없어. 루크 씨가 내 집에 머물 동안, 그가 연구소로 돌아가도 최소한의 인간적인 대우라도 받을 수 있도록 네가 알아서 조치해.”
- 나도 위에서 지시를 받는 입장이야. 그럴 만한 위치가…….
“그럴 힘이 없다면 어떻게 해서든 힘을 가져야 할 거야. 이 일을 언론에 알리면 잘못되는 건 네 상관이 아니라 네가 될 테니까.”
카이얀은 전화를 끊었다. 격렬하게 말을 쏟아 낸 탓에 몸에서 열이 가시질 않았다. 원하는 만큼 나이란을 몰아붙였는데도, 카이얀은 제 안의 분노가 거의 사그라지지 않았음을 느꼈다.
카이얀은 거실로 갔다. 루크의 모습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경직된 얼굴, 거수경례, 그깟 작은 방 하나에 날아갈 듯 행복해하던 얼굴, 쓰러진 모습, 손톱이 부러지고 빠져서 피투성이가 된 와중에도 잘못했다고 빌던…….
“로스터드 씨.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루크 씨 짐 어딨어요.”
카이얀은 사나운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더니 루크의 대답도 듣지 않고 제가 어제 대충 루크의 물건을 담았던 봉투를 찾았다. 안을 뒤적거려 처음 받았던 종이를 꺼냈다. 물은 어떻고 음식은 어떻고 외부 약은 금지, 어쩌고저쩌고 하는 그 종이였다. 카이얀은 그걸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거칠게 루크 쪽으로 내밀었다.
루크는 엉겁결에 손을 내밀어 종이를 받았다. 카이얀은 자길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다가 홱 고개를 돌려 루크를 보았다. 잔뜩 화가 난 얼굴이라 루크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하나 묻죠. 아직도 날 상관이라고 생각합니까?”
“그, 그렇습니다. 제가 명령받기로는…….”
카이얀의 기세에 루크는 뒤로 물러날 뻔했다. 가까스로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대답을 꺼내 놓는데, 카이얀은 뚝 말을 끊으며 재차 물어왔다.
“연구소의 명령과 내 지시 중 어떤 게 우선입니까.”
“아, 그런 상황에 대한 지시는 받은 적이 없지만…….”
아무래도 느낌상 연구소 명령이 우선인 것 같았다. 확신이 없어 처음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그때 카이얀이 답을 재촉하듯 얼굴을 구겼다. 루크에게 이런 방향의 직감은 거의 없었으나 카이얀이 요구하는 대답이 너무 명백해서 루크는 얼른 대답을 내놓았다.
“로스터드 씨의 명령이 우선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찢어요.”
아주 담백한 명령이었다. 너무 곧장 튀어나온 말이라 루크는 잠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카이얀은 인상을 썼다. 루크는 거의 반사적으로 제 손에 들린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못 알아듣습니까? 찢으라고요. 설마 찢는 게 뭔지 모릅니까?”
“아,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이걸 찢으란 말씀이십니까?”
“네. 찢으세요.”
이렇게 급박하게 몰아치는 카이얀은 처음이었다. 루크는 카이얀의 시선을 피해 얼른 종이를 찢었다. 어차피 머릿속에 다 있는 내용이니 없어도 상관없었다.
“버려요.”
루크는 얼른 쓰레기통에 종이를 버렸다. 카이얀은 화난 듯 보이진 않았지만, 이렇게 거친 모습은 처음이라 불안했다.
“목마르죠. 물 마셔요.”
어제 네 시 이후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카이얀이 언급하자 갈증이 일었다. 그러나 루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수분은 정해진 시간에만…….”
“그만.”
카이얀은 다시 루크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선 채로, 루크를 똑바로 보며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주지시켰다.
“앞으로 내 집에서 그런 말은 금집니다. 연구소에서는 이렇게 했다, 캠벨 박사님이 어떻게 하라고 했다,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루크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대답하지 못했다. 카이얀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 남자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제 잘못이라 생각하는 어린애다. 아무리 설명해도 자기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음을 지금 당장 깨닫지는 못할 것이다.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다.
“앞으로 루크 씨는 정해진 시간이 아니라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실 겁니다. 배가 고프면 나한테 얘기해서 식사를 할 거고, 갖고 있는 알약은 다 버릴 겁니다. 몸이 아프면 진통제를 먹을 거고, 하고 싶은 게 있거나 갖고 싶은 게 생기면 그때그때 말할 거고.”
루크는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카이얀은 루크의 혼란을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어느 정도 헤아릴 순 있었다. 카이얀은 어조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루크 씨가 그렇게 해 준다면 기쁠 겁니다.”
루크는 피노키오를 읽으며 ‘기쁘다’에 대해 배웠다. 카이얀은 그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기다렸다. 루크는 허둥댔지만, 카이얀이 물끄러미 자길 바라보자 곧 어렵사리 대답을 꺼내 놓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카이얀이 기뻐하면 좋겠다. 그가 좋다. 같이 있고 싶다.
“좋습니다.”
카이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종이를 꺼냈던 봉투에서 알약 뭉치를 마저 꺼냈다. 카이얀은 그걸 루크에게 건넸다.
“버리세요.”
아까 종이를 찢으라고 명령할 때와는 또 다른, 부드러운 어조였다. 그러나 루크는 홀린 듯 움직였다.
카이얀은 루크가 조금 당혹한 움직임으로 알약 봉투를 전부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루크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려 하는지 알고 있을까. 아마 모를 거라고, 카이얀은 짐작했다. 그리고 사실 카이얀도 정확히는 몰랐다.
곧 완전히 날이 밝았다. 루크의 삶이,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첫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