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최태혁은 본인이 한 말을 지켰다. 우선 날 찾은 창고에서 잡은 두 명을 비롯해 그 두 명이 겁에 질려 이름을 말해 버린 창현이란 남자까지 잡아들였다.
그 과정에서 창현이 어떤 일에 가담했는지 미처 몰랐던 간부들이 항의하려고 했으나, 동행했던 최태혁의 최측근 종현 씨의 친절한 상황 설명을 듣고 순순히 그를 넘겼다고 했다. 창현이 내 앞에서 용돈 벌이 하자고 조직을 말아먹을 수는 없지 않냐고 말했던 것처럼, 그들 역시 말단에 가까운 조직원 하나 구하자고 조직을 말아먹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행동은 기실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최태혁은 애초에 창현이 몸담은 조직은 물론이요, 외삼촌이란 사람에게 빚을 지운 작은 업체와 덩치가 소속된 중간 업체까지 봐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들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겠지만, 어쩌겠는가. 최태혁은 ‘나쁜 일을 하면서 사는 놈들은 언젠가는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고, 그게 싫다면 필사적으로 권력을 키우고 자본을 축적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그리고 녀석은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돈이 많고 세력이 매우 큰 편이야. 문제였던 일도 이제 거의 마무리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널 혼자 두는 일은 없어. 그 말에 나는 별걸 다 자랑한다고 생각하며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었다.
아무튼, 최태혁은 마침내 그 셋은 물론이요, 그들과 엮여 있는 조직원들까지 모조리 잡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최태혁은 그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피해자인 내게 그들을 처리할 권한을 준 것이었다. 이제 그들은 내 말 한마디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 놓인 것과 다름없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아마 회귀 전 내가 예령이와 납치를 당한 이유도 저 길고 긴 최태혁의 사정과 연관이 있었겠구나.
그래, 원래도 어렴풋이 그 납치가 최태혁과 관련이 있으리라고 생각은 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대 사회에 조폭이 일반인을 납치까지 할 일은 매우 특수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추측이 이제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회귀 전 나와 예령이를 납치했던 조직도 창현이란 남자가 소속된 곳이었고, 그 이유야 최태혁이 관심을 보이는 예령이를 인질로 원하는 걸 얻어 내기 위해서였겠지. 회귀 후에는 내가 그 대상이 된 거고.
다만 다른 점은, 그때는 ‘내 거 건드리면 죽음.’이라는 식의 내용을 공표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대놓고 엄포를 놓았기에 내가 더 험한 꼴을 보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것 같았다.
나는 문득 예령이의 교통사고를 떠올렸다. 막으려고 했으나 막지 못했던 교통사고는 내게 절망을 안겨 주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희망적인 부분도 있었다. 회귀 전 혼수상태에 빠질 만큼 크게 다친 아저씨가 이번엔 긁힌 상처 몇 개만 얻고 끝난 것처럼, 있었던 일을 완벽히 막을 순 없더라도 그 정도가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이 그랬다.
이번에도 그때처럼 ‘납치’는 결국 일어났지만, 결과가 크게 달랐다. 큰 조직이 작정하고 했던 납치는 삼류 양아치들의 어설픈 납치극이 되었고, 덕분에 총까지 등장해 내가 죽었던 과거와 달리 조금 얻어맞고 끝나는 해프닝이 되었다.
그리고 예령이에게 딸려 같이 납치되었던 내가, 이번엔 납치의 주 대상자가 되었고, 지금은 나를 납치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회귀 전 나를 죽였던 그 사람들의 목숨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나는 묘한 고양감에 최태혁을 보고 있던 시선을 내려 손을 펼쳐 보았다. 내가 꿈에서도, 생활하면서 그렇게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던 일을 벌인 사람들이 모조리 다 내 손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이상했다. 이상하다는 말로는 부족했지만, 달리 표현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딘가 허무하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복잡한 감정.
그리고 그걸 다 감싸는 커다란 안도감에 나는 살며시 주먹을 쥐고 웃었다.
정말 끝났다. 나는 살았다. 마침내 나는 살았다. 그 과정에서 위험하고 미친놈들하고 엮여 앞으로의 미래가 안전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나는 업처럼 짊어지고 있던 예정된 미래를 바꿔 내었다.
1년을 회귀했던 내게 씌워진 압박감과 부담감이 서서히 옅어지다 아예 없어진 것 같았다.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덜어진 어깨는 한결 가벼웠다.
나는 산뜻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그 기분을 한껏 느끼고 나서 조용히 내 대답을 기다리던 최태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뱉은 말에 최태혁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알아서 혼내 주세요. 아, 김진호를 납치하면 진짜 좆되는구나- 라는 소문이 날 만큼. 그래서 다시는 누구도 절 위험에 빠트릴 수 없도록. 이번처럼 무서운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도록요.’
지금 생각해 봐도 참 적당한 대답이었다.
“그래서, 그 외삼촌이란 사람 아직도 안 잡힌 거야?”
이번 사건의 주동자와 그 이유를 들은 채예령이 가장 먼저 뱉은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채예령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김은수와 강하민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야, 그럼 그런 위험한 사람이 아직 밖에 있다는 거잖아. 너 뭐 그, 경찰에 보호 요청 같은 거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아는 형이 경호원 붙여 주고, 당분간 안전한 데 지내게 해 준다고도 했어.”
날 걱정해 주는 친구들을 속이려니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바른 사나이 채예령과 조폭이라고는 영화에서만 들어 봤을 김은수, 강하민에게 사실 신고는 형식적인 거였고, 범인들은 최태혁이 잡아 처리했다는 얘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걱정 말라는 소리에도 인상을 찌푸리고 이런저런 걱정을 내뱉는 둘을 놔두고 다시 채예령에게 고개를 돌렸다. 녀석은 여전히 얼굴을 잔뜩 구긴 상태로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미안하다, 채예령. 나 때문에 이런 험한 일까지 당하게 하고. 진짜 미안해.”
이미 전화로 했지만, 얼굴을 마주 보고 하고 싶었던 사과를 뱉자마자 녀석의 불만 어린 시선이 나를 향했다.
뚱하게 힘을 준 입술이 몇 번이고 움질거리다 힐긋, 어느새 조용히 우리 둘을 지켜보던 김은수와 강하민을 곁눈질했다. 할 말이 있는데 두 사람이 들어도 될지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채예령이 저렇게 고민하는 주제는 대부분 내 가족에 대한 것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녀석의 어깨를 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냥 말해. 어차피 쟤네도 이젠 대충 다 아는데, 뭘.”
그러자 채예령이 눈썹 한쪽을 슥- 들더니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물었다.
“안다고? 너, 형들이랑 만나는 거 쟤네들한테도 벌써 말했어? 언제?”
“…어?”
이게 아닌데. 기껏해야 엄마한테는 그 뒤 연락은 왔냐, 아니면 연락했냐, 같은 걸 물어볼 줄 알았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질문에 뇌가 정지했다. 나의 한 박자 느린 반응에 채예령은 아차 싶은 얼굴을 했고,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물은 두 명은 기회를 놓칠세라 꼬투리를 잡고 늘어졌다.
“뭘 말해? 우리가 뭘 모르는데? 누굴 만나? 형들이 누군데?”
“아니, 근데 형들? 들? 너 여러 명 만나?”
나는 눈을 빛내며 질문을 쏟아 내는 두 사람의 열렬한 시선을 외면하며 채예령을 향해 눈을 흘겼다. 채예령은 머쓱한 얼굴로 웃더니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에 내가 어떻게 좀 해 보라는 뜻으로 두 녀석을 향해 턱짓을 해 보이자, 채예령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 이왕 이렇게 된 거 혼자 속 썩이지 말고 얘네한테도 말 해 줘. 원래 친구들끼리 연애 얘기도 하고 상담도 하고 그러는 거지, 뭐.”
저 새끼가? 폭탄을 던진 놈치고 매우 뻔뻔한 발언에 순간 혈압이 확 올랐다. 아니, 친구들끼리 연애 이야기하는 게 문제는 아니지만 나는 좀 경우가 특수하잖아.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놈도 최근에서야 겨우 제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 준 주제에, 뭐? 여언애? 사앙담?
나는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눈에 담아 채예령을 살벌하게 노려봤으나 이미 뻔뻔 노선을 탄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 녀석의 질문 공세에 가담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네가 가장 좋아하는 건 누군데? 정했어?”
“오오, 진짜 여러 명인가 보네! 야이씨, 김진호 너 인기 많았냐? 너 왜 인기 많냐, 치사하게!”
“예쁘, 가 아니지. 잘생겼냐?”
와, 얘넨 정말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이나 편견이 1도 없구나. 예쁘냐고 물어보려다가 급히 선회하여 잘생겼냐고 묻는 강하민을 보니 내심 마음을 졸였던 1분 전의 내가 바보 같을 지경이었다.
남자 셋이 간이 의자에 쪼르륵 나란히 앉아서 잘생겼냐, 누가 좋냐 물어보는 광경이라니. 그게 퍽 웃기고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감사했다. 다소 껄끄러울 수 있는 이야기를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무겁지 않게 들어 주고 반응해 주는 친구들에게. 나 때문에 납치를 당했다는 걸 듣고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 준 죽마고우에게는 특히나.
나는 너무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일부러 더 호들갑 떠는 친구들을 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고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렇게 녀석들이 가기 전까지 우리는 내 복잡한 연애사 이야기를 하느라 납치에 대한 이야기를 할 틈이 없었다.
그리고 녀석들은 병실을 나서면서 내게 인사 대신 몇몇 이름을 외쳤다.
“남궁후! 나는 남궁후 형이다!”
“나는 최태혁! 최태혁 형이라고 생각함!”
“뭐래, 민선우 형이지. 그 두 명은 그때 내 병실에 있었던 멤버라 탈락이야.”
나는 해탈한 미소를 지으며 잘 가라는 인사 대신 중지를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