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몸은 빠른 속도로 회복됐다. 특별한 내상이 없는데도 며칠 동안 의식을 차리지 못했던 게 이상해 다시 검사해 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뇌 정상, 장기 정상. 영양도 좋은 편이었기에 의식을 차리고 제대로 된 밥을 먹은 후부턴 링거도 필요 없어졌다.
마음 같아선 링거를 뺐던 날 퇴원도 하고 싶었으나, 날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호언장담한 보호자 다섯 명이 결사반대하는 바람에 병원에 계속 머물게 되었다.
그나마 납치되기 하루 전날이 6개월 계약의 마지막 날이라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알바 주제에 또 장기 휴가를 낼 뻔했다. 그랬으면 나도 염치가 없어서 이력서에 경력으로 써도 될지 심각하게 고민했겠지.
아무튼, 이래저래 크게 문제 될 건 없어서 나도 그냥 요양하는 셈 치고 넓고 쾌적한 병실에 상주하는 중이었다.
“와 씨, 병실 넓은 거 봐. 이런 데는 하루에 얼마나 하냐?”
“그런 거 알아서 뭐 하게. 이거나 먹어.”
“헉, 이거 내가 아는 그 샤인머스캣 맞아? 알이 원래 이렇게 큰 거였어?”
나는 병실을 보며 연신 감탄하는 김은수와 아까 남궁후가 씻어다 준 샤인머스캣을 보고 놀라는 강하민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녀석들의 질문에 답할 수가 없었다.
이 병실이 얼마나 하는지, 저 샤인머스캣은 왜 저렇게 알이 큰지 내가 알 턱이 있나. 내가 산 게 아니고 돈 낸 게 아닌데 어떻게 알겠어.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허허 웃으며 다른 주제로 돌리는 것뿐이었다.
“오늘 너네도 오는 줄 알았으면 머리라도 감았을 텐데. 몰골이 너무 말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야.”
“나만 오는 거였어도 머리는 감고 있어라, 좀.”
“아냐, 아냐. 나도 머리 삼 일째 안 감았어. 괜찮아, 괜찮아.”
“…엘리베이터 탔을 때 어디선가 냄새가 난다 했는데, 너였구나.”
삼 일째 머리를 안 감았다는 김은수는 금방이라도 헛구역질을 할 것 같은 강하민을 보며 씩 웃었다. 양 볼에 샤인머스캣이 빵빵하게 들어차 있어서 더 얄미운 모습에 강하민이 주먹을 쥐는 것까지 보고 나는 채예령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시선을 알아챈 채예령도 둘을 보다가 날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보는 내 친구는 여전히 예쁘다면 예쁘고, 잘생겼다면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듯한 이목구비, 투명한 피부. 그래서 이마 구석에 남은 상흔이 더 눈에 걸렸다.
“너, 나 보라고 일부러 머리 올렸지.”
“어떻게 알았냐? 보고 매우 미안해하라고 확 올리고 왔는데. 어때?”
상처를 노려보면서 묻는 말에 채예령이 한쪽 입꼬리만 씩 올리며 답했다. 표정이 너무 얄미워 당장에라도 한마디 해 주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저 상처 자체가 나 때문에 생겼기에 할 말이 없었을뿐더러 저 말이 사실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채예령은 자기가 생각하기에 정말 괜찮지 않은 일이면 철저히 숨길 놈이었다. 저렇게 드러내 놓고 왔다는 건, 그만큼 괜찮다는 판단하에 제가 아무렇지 않음을 내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사실 녀석의 피부가 워낙 잡티 하나 없어서 이마의 경계선에 작게 남은 갈색 딱지가 유독 잘 보여서 그렇지, 상처만 놓고 보면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긴 했다.
그래도 상처는 상처. 그것도 존재조차 몰랐던 삼촌이란 사람이 벌인 촌극으로 인한 피해자인 걸 아는 나로선, 녀석이 괜찮다고 덩달아 괜찮겠거니 넘어갈 수는 없었다.
나는 뭘 또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냐면서 가볍게 툭 치는 채예령을 빤히 보면서 어제 최태혁과 했던 대화를 상기했다.
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아라, 하는 오만한 통보 이후 다섯 명은 서로 같은 공간에 있기 신경 쓰인다면서 번갈아 오기로 했다.
프리랜서인 정새빈이야 그렇다 쳐도, 각자 일도 있는데 무리하지 말라는 내 말은 언제나 그렇듯 가볍게 씹고 나온 결론이었다. 나 역시 이 독불장군들이 들어줄 거란 기대 없이 예의상 한 만류였기에 별다른 대거리 없이 결과에 순응했다.
그리고 어제는 최태혁이 오기로 한 날이었고, 하루 종일 묵묵히 이런저런 시중을 들어 주던 녀석은 저녁쯤이 되어 어떤 전화를 받더니 내게 말했다.
‘없애 줄 수 있다.’
뜬금없는 그 말에 내가 한 생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정새빈이 온 날 녀석을 앉혀 두고 했던 사람과 대화할 때 고려해야 하는 예의와 상식을 이놈한테도 알려 줘야겠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뭘 없앤다는 건지는 몰라도 내가 원한다면 그게 뭐든 간에 싹 없애 버릴 것 같다는 것이었다.
무서운 놈. 장례식 사건 이후부터 내 눈치를 살피는 걸 숨기지 않아 조금 만만하게 느끼다가도 한 번씩 이럴 때마다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낀다. 나는 오소소 닭살이 돋은 팔을 옷 위로 문지르면서 최태혁에게 되물었다.
‘제발 좀 육하원칙에 해당하는 내용을 다 담아서 얘기해 줄 순 없어요? 특히 그렇게 살벌한 얘기는 정보를 더 담아 달라고요, 제발. 제발!’
마지막 제발 소리에 확 올라온 짜증을 그대로 담아 말하자 최태혁이 약간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 납치 사건에 가담한 자는 총 세 명, 그 세 명이 일을 벌이는 데 일조한 조직은 큰 게 하나, 작은 게 둘이다. 당연히 세 명의 신원은 확보했고 그 뒤에 있는 조직도 정리할 수 있게끔 준비를 마친 상태인데, 구체적인 처벌 수위를 내가 임의로 정하는 것보단 피해자인 네가 정하는 게 맞는 것 같아 물었다. 어떻게 하길 바라지?’
그래, 이렇게 얘기하니까 얼마나 좋아. 하면 잘하는 놈이 도대체 왜 정새빈처럼 구는지 모르겠다. 물론 이렇게 얘기하면 본인은 절대 그놈과 같지 않다며 극구 부인하겠지만.
아무튼, 나는 이제야 무슨 내용인지 이해한 녀석의 제안을 곰곰이 곱씹다가 문득 걸리는 게 있어 입을 열었다.
‘이 일에 엮인 조직들이 있어요? 저는 그 외삼촌이란 놈이 돈이 급해서 작당한 일이라고 들었는데요.’
그리고 그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내 심장을 철렁이게 하는 동시에, 커다란 안도감을 가져다주었다.
최태혁은 지금 본인의 사업과 휘하의 부하 직원들을 양지로 끌어 올리기 위해 가지치기를 하는 중이라는 설명부터 시작했다.
여기서 말하는 ‘가지치기’란 양지에선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지저분한 일들을 정리하는 걸 의미하는데, 이미 대부분은 정리가 된 상태지만 딱 한 분야. 약을 다루는 조직들만큼은 그 일을 놓을 수 없다고 표명해 버린 모양이었다.
최태혁에게 시간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아봤겠지만, 그는 아버지의 끊임없는 재촉을 받아 가며 최대한 빠른 시일 내 모든 걸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최태혁은 결국 약 사업을 그대로 남기는 대신 철저히 음지에서만, 만에 하나 걸리더라도 전혀 관련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도록 여러 중간 절차를 설치하려고 했다.
문제는, 그런 그의 결정을 그의 아버지 대부터 일했던 조직의 간부들이 자신들의 공을 무시하고 내치려는 움직임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었다.
자연히 최태혁과 그들은 반목하게 되었고, 언제 어떤 방식으로 공격해 올지 모르는 놈들이라 항상 긴장한 상태로 지내야 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나는 최태혁과 가장 많이, 그리고 깊게 엮었다는 죄로 나도 모르는 새 아주 위태로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최태혁이 아무것도 안 했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게, 그들이 나를 여태까지 건드리지 않은 이유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최태혁이었다.
사실 몇 달 전, 할아버지를 찾아가기 위해 최태혁이 붙여 주었던 경호원과 떨어졌을 때 날 납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했다. 그때 최태혁의 빠른 대처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번처럼 삼류 양아치의 어설픈 납치 작전이 아니라 내가 회귀 전에 맞닥뜨렸던 ‘진짜 위험한 놈들에게 납치당하는 경험’을 할 뻔했다.
그리고 그때, 나를 납치하려던 놈들을 다 잡아들인 최태혁은 그냥 감싸고 돌기만 해선 오히려 더 위험하겠다는 생각 끝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나를 건드린다면 그의 모든 걸 걸고 개인이든 조직이든 철저히 망가트려 주겠다고 아예 공표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에 그동안 방관하던 최태혁의 아버지와 이미 극성이라고 소문난 어머니까지 가세하여 녀석의 말에 힘을 실어 주자, 웬만큼 머리가 큰 조직원들은 일찌감치 나를 이용해 어떻게 하려는 심산을 접었다.
여기서 맹점은 내 외삼촌이라는 사람과 그의 조력자였던 덩치는 진짜 동네 삼류 양아치였다는 것이다. 그나마 창현이라고 불린 남자는 회귀 전에도 봤던 것처럼 꽤 큰 조직에 소속된 진짜 조직원이긴 했으나, 개중에도 워낙 질이 좋지 않고 돈을 밝힌다는 소문이 난 놈이었다.
삼류 양아치에 약쟁이였던 외삼촌과 그런 외삼촌을 호구 잡은 덩치는 당연히 나에 대한 경보 발령을 들을 만한 인맥이 없었고, 말단보다 아주 조금 위인 데다 소문도 좋지 않은 창현이라는 남자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일을 친절하고 자세히 설명해 준 상사가 없었다.
결국 그 일을 전혀 모르는 두 명과 나에 대한 소문을 듣긴 했지만 어설프게 알았던 한 명이 합심해서 나를 납치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