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호 이야기 (191)화 (190/234)

191화

철저히 감정을 배제하고 본다면, 정말 녀석들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그들은 사실 잘못한 것이 없었다.

내가 가장 먼저 전화를 건 최태혁을 기준으로 저들이 나의 연락을 보지 못한 것은 대략 한 시간이 조금 넘었을 뿐이었다. 원래도 그 정도 시간이야 충분히 연락이 되지 않을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이번엔 특히나 납득하고도 남을 이유가 있었다.

최태혁은 본인의 부하직원이 아끼던 후배의 차를 박아 교통사고를 냈으니 핸드폰이고 뭐고 확인할 정신이 없었을 것이고, 남궁 쌍둥이 역시 아끼는 후배와 그 아버지가 응급실에 실려 왔다는 걸 듣고 연락을 보지 못할 정도로 놀라 달려갔을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나도 예령이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빈소까지 비우고 달려가지 않았는가.

분명 머리로는 알았다. 그런데도 나는 화가 났었다. 그들이 내가 아닌 예령이의 옆에 있다는 것이 너무 섭섭했다.

나를 향해 인상을 찌푸리는 그들에게 왜 전화를 받지 않았냐고, 부재중 전화가 왔다는 것조차 확인할 틈이 없었냐고 소리치며 따지고 싶었다. 그 마음을 겨우 누르고 또 누른 것은 나에게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힘든 일을 당했다고 해서 그들이 급한 일을 제쳐두고 왔어야 했다고 분노할 만큼의 관계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심지어 정새빈은 고작 수화기 너머로 들은 한마디로 알아챈 나의 상태를 전혀 알아채지 못한 그들을 보고 있을수록 더 없어졌다.

그런데 지금 그 세 명이 내게 사과를 해왔다. 마치 내가 이 일로 마음 상한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아주 미안한 얼굴을 하고 내 반응을 살폈다.

그 모습에 당황한 것도 잠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화가 났다. 그래, 내가 너희한테 그런 존재였다는 거지. 그 생각이 들자 억지로 눌러뒀던 분노가 스멀스멀 차올라 머리가 뜨거워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민선우가 내민 숟가락을 피하면서 말했다.

“그게 왜 미안한데요. 바로 올 필요가 뭐가 있어서. 바빴잖아요. 한창 바쁠 시간에, 그것도 제일 아끼는 후배 교통사고 났다고 많이 놀란 상황에서 연락 못 받은 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그걸 제가 뭐라 그래요. 그리고 장례식장에 늦게 오는 게 어딨어요. 왔으면 온 걸로 고마운 건데.”

우리가 그렇게까지 각별하고, 뭐 그런 사이 아니잖아요. 마지막 치기 어린 말은 내가 생각해도 유치해서 하지 않았지만, 그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목소리의 떨림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내 말이 이어질수록 세 명의 얼굴은 딱딱히 굳더니 쌍둥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최태혁은 이를 악물었다. 짧은 정적 후 남궁후가 마른세수를 하면서 입을 열었다.

“미안해, 진호야. 이유가 어찌 되었건 내 잘못이니까 변명은 하지 않을게. 전화 못 받아서 미안. 네가 어떤 상황인지 알면서도 다른 거 신경 쓰느라 정작 중요할 때 옆에 못 있어 줘서 미안해.”

녀석의 말은 다른 의미에서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나는 잊고 있었던 바윗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는 걸 느끼며 울분에 차 말했다.

“그걸 왜 형이 정해요?”

“...응?”

“이유가 뭐든 간에 그게 변명인지 아닌지를 왜 형이 정하냐고요.”

앞의 세 명은 물론이고 옆에 있던 민선우까지 처음 보이는 내 모습에 놀랐는지 나를 보고 있던 눈이 커졌다.

“해요, 변명. 나한테 그렇게 미안하면. 내가 이해하고 용서해주길 바라는 거면 해야죠. 그게 내 마음 풀어주려는 노력인 거잖아요. 근데 그걸 왜 마음대로 생략하고 미안하대. 왜요. 나 같은 거한테 변명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자존심 상해요? 그렇게까지 미안하지는 않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 진호야.”

“셋 다 말해 봐요. 나한테 미안하면, 어디 있는 힘껏 변명해 보라고요. 아니면 자존감이 낮은 제가 어떤 상상을 할지 모르니까. 또 어떤 온갖 비참하고 우울해지는 추측을 할 테니까, 그게 싫으면. 그렇게 또 혼자 가슴 치고 있을 내가 불쌍해 보일 정도의 의리라도 있으면 입 다물고 있지 말고 말을 해요, 사람 답답하게 만들지 말고!”

마지막은 숫제 소리를 지르듯 말했다. 더 이상 소란 일으키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한 게 얼마 전인데, 내가 큰 소리를 내버렸다.

그러나 참을 수가 없었다. 내게 모진 말을 할 때는 그렇게 말을 잘하던 사람들이 내가 뱉은 원망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것이 너무 분했다. 엄마와 아버지에 이어 앞에 앉아 있는 세 놈까지 정작 말하길 바라는 것에 대해선 입을 딱 다물고 있는 꼴에 복장이 터졌다.

나는 거칠어진 숨을 뱉으면서 녀석들을 보는 눈에 힘을 주었다. 다소 놀란 것 같던 녀석들이 그런 내 눈을 마주하더니 서로를 쳐다봤다. 눈빛을 주고받은 후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최태혁이었다.

“사고가, 교통사고가 났었다. 급하게 움직이느라 신호를 어긴 부하직원의 차가 좌회전을 하는 차를 그대로 박아버렸어. 내가 타고 있던 차는 그 뒤를 바짝 따라붙어 있던 터라 급하게 방향만 바꿔서 차를 세웠고, 내려서 상황을 살피다가 사고당한 차에 예령이가 타 있다는 걸 알았다.”

최태혁은 그걸 보자마자 119에 신고하기 위해 핸드폰을 찾았지만, 서두르다 두고 나온 것인지 아니면 주머니에서 빠진 건지 핸드폰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급하게 주변에 있던 사람에게 부탁해 119에 신고하고, 신고받고 온 경찰과 사고 현장을 기록한 다음, 사고 낸 부하직원과 그 차에 탔던 사람들만 남겨두고 예령이와 같이 구급차를 타고 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최태혁은 사고 나지 않았던 차에 탔던 사람들은 하던 일을 수습하기 위해 보냈다고 덧붙이고 나서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보내기 전에, 너와 같이 있는 놈한테 연락해두라고 말했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나한테 전화하지 말고 놈한테 말하라고. 나중에 병실로 옮기는 사이에 확인했을 땐 분명 너에게 전했다고 했기 때문에 마음을, 놓고 있었어. 그래서 붙여놨던 놈까지 차출할 만큼 일이 꼬여서 보고가 늦어졌다는 걸 너무 뒤늦게 파악했다.”

녀석이 이렇게 길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심 교통사고 때문에 신경 쓸 것이 많아 연락할 틈이 없었다고 간단히 말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는 미안하다고 덧붙이는 최태혁을 보다가 순서를 기다렸다는 듯 말하기 시작하는 쌍둥이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수술 들어갔다가 나오는 길에 진동이 울려서 핸드폰을 보니까 예령이였어. 전화를 받았는데 응급실 거쳤다가 병실에 입원 중이라는 말을 듣고 전화하던 그대로 놀라서 뛰어갔고, 병실에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피느라 따로 핸드폰 확인하지 않은 채 그냥 주머니에 넣어버렸어.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서 네가 왔던 거야.”

“나는.... 하아. 내가 제일 한심하네. 나는 당직실에서 쉬다가 깜박 잠이 들었어. 진동에 깨서 전화를 받았는데, 나랑도 예령이랑도 친한 동기가 응급실 지원 갔다가 예령이 봤다고 방금 전에 병실로 옮긴 것 같으니 한번 가보라고 하더라. 잠결에 놀라서 뛰어올라 갔어. 가보니까 이미 이 두 녀석이 있었고, 몇 분 지나지 않아서 네가 왔어.”

둘은 정말 면목이 없다는 듯 손으로 눈을 덮으며 한숨을 쉬었다. 최태혁과는 반대로 원래 말이 많고 청산유수인 녀석들이 어떤 자기합리화도 없이 있는 그대로 말하는 걸 듣자니 정말 진심처럼 느껴졌다.

그렇구나. 그랬구나. 제법 그럴싸한 이유들 덕분인지 조금, 아주 조금은 가슴 위 바위가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바위는 여전히 바위였다.

나는 놓았던 수저를 집어 들며 다시 조용해진 녀석들에게 물었다.

“저 봤을 때는요. 저 보자마자 셋 다 인상 쓴 거 다 봤어요. 그건 왜 그런 거예요?”

“그건 네가 양복을 입고 있으니까 놀라서-”

“네가 검은 바지에 흰 셔츠를 입고 있었으니까.”

“무슨 일이 있구나 싶어서.”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온 대답의 내용은 이번에도 엇비슷했다. 이런 걸 보면 참 다르면서도 닮은 사고방식을 가진 녀석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숟가락에 올라가 있던 반찬과 밥을 옆으로 젖혀 치우고 애꿎은 밥알만 쿡쿡 찌르며 또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럼 그렇게 생각했는데도, 왜 나한테 아무것도 안 물어봤어요?”

그 말을 하는데 그때까지 멀쩡했던 코끝이 시려왔다. 시야도 흐려졌다. 나는 나 나오고 웃는 거 다 들었다고 말하려던 것을 삼키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민선우의 손이 등을 쓰다듬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예령이 앞에서 말하기 꺼려하는 것 같았어. 물어보고 싶었는데. 정말 묻고 싶었는데 네가 일부러 말 안 하는 것 같아서 일부러 참고-”

“거짓말.”

나를 기만하는 것 같은 변명을 하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말을 끊었다. 목소리를 내자마자 참고 있던 눈물 한 방울이 내가 괴롭히던 밥알 위로 떨어졌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그럼 내가 나가고 나서 왜 안 나왔어요? 그렇게 걱정됐으면 나와서 물어봐야 했던 거 아니에요? 왜 거짓말해요. 내가 다 들었는데. 나 나오고 나서 웃는 소리. 다 들었어요, 나.”

“아냐 진호야. 그건, 그건 나오기 전에 잠깐 대화하면서 흐름상 어쩔 수 없이-”

“그래, 진호야. 너무 급하게 나오면 이상하다고 생각할까 봐 진짜 그냥 나오기 전에 가볍게 얘기하다 그런 거야.”

투둑투둑. 다급한 어조로 하는 말을 들으면서 눈을 깜박일 때마다 눈물이 밥알 위로 떨어졌다. 음식 아깝게 이러면 안 되는데. 이거 먹어야 하는 건데. 도피하듯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애써 진정하려고 해봐도 서러움은 가라앉지 않았다.

웃긴다, 김진호. 그런 사이가 아니니 서운해할 필요 없다고, 그러지 말자고 다짐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래.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헛웃음을 지었다. 울면서 웃는 이상한 놈으로 보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눈물도 웃음도 참을 수가 없었다. 누가 알아주는 게 좋아서, 달래주는 게 좋아서 더 우는 아이처럼 구는 스스로가 한심하고 어이가 없었다.

그런 내 꼴이 말문을 막히게 했는지 초조하게 이 말 저 말 덧붙이던 쌍둥이가 조용해졌다. 그렇게 또 숨 막히는 정적이 식장을 메우려는 찰나, 전혀 다른 방향에서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쫑쫑이 왜 울어.”

놀라 뒤돌아보니 성의 없게 신발을 벗어 던진 정새빈이 걸어오고 있었다.

“묻잖아, 병신들아. 쫑쫑이 왜 우냐고.”

녀석은 흉흉한 눈으로 비소하고 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