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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 (190)화 (189/234)

190화

아버지도 내가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는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유독 불편하고 무서웠던 아버지 앞에서의 나는 더 조용하고 고분고분했으니 놀라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나는 그 눈을 보면서 덤덤히 말했다.

“그렇잖아요. 돈이 필요해서 애 입양해놓고 그 당사자 앞에서 그게 정말 별일 아니었던 것처럼 얘기하는 거 좀, 어이없는 거 맞잖아요. 두 분이 그렇다고 그 시간 내내 좋은 부모님이 되어주셨던 것도 아니고.”

거기까지 말하고 나니 문득 땀으로 젖은 앞머리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손을 올려 앞머리를 넘기면서 말을 이었다.

“입양하고 나서 설명해주었으니 괜찮다고 생각하고 계시는 건 아닐 거라 믿어요. 그건 어린아이에겐 또 다른 폭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요.”

나는 손바닥에 묻은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환해진 시야 덕에 아버지와 엄마의 얼굴이 더 명확하게 보였다. 둘은 불편한 낯을 띄고 있었다.

“얼마나 자기합리화를 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두 분에게 소리를 쳐야 할 사람은요. 우리 셋 중에서 상대에게 원망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저였어요.”

두 분이 아니라. 그 말을 하면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엄마는 아까와 달리 손가락을 움찔거렸을 뿐 어떻게 웃을 수 있냐고 소리 지르지 않았다.

“근데 저 그거 안 할 거예요. 왜냐하면, 진짜 멍청한 말이지만 그 모든 일을 겪고도 두 분이 싫어지지 않는 것도 있고, 소리칠 힘이 없다는 이유도 있는데. 그것보단.... 기대가 없어져서요. 제가 뭘 한다고 해서 두 분이 바뀔 거란 기대가 이젠 정말, 하나도 없어서. 그래서 그럴 마음이 안 생겨요. 그냥 피곤해요.”

“너...!”

“그러니까 두 분께도 부탁드릴게요. 아마 제가 두 분께 드리는 마지막 부탁일 거예요. 어려운 건 아니고, 그냥 3일 동안만. 아빠 보내드리는 동안만은 더 이상 소란 피우지 않으셨으면 해요. 그럴 일은 없을 거 같지만, 혹시 만에 하나 할아버지가 오셔도 소리 지르고 하실 거면 나가서 해주세요.”

“진호야.”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사실이지만, 나는 사실 이름 불리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나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나를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좋아했다.

근데 아까 예령이의 병실에서도 그렇고, 지금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내 이름은 나에게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왜 부르는지 궁금하지 않았고, 달갑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 이름을 부른 아버지 쪽을 보지도 않고 그대로 마저 말을 이었다.

“사실 두 분 만나면 물어볼까 했던 말이 있었거든요. 그래도 저 아들로서 사랑은 하셨냐고, 그거는 한 번쯤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러려고 했었는데, 지금 하시는 거 보니까 안 물어봐도 될 거 같아요. 답 들은 걸로 할래요. 그게 덜 상처받는 방법 같아요.”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가 편지를 남기셨어요. 제가 드리고 싶을 때 드리라고 주신 건데, 그것도 그냥 오늘 드릴게요. 그걸로 제가 두 분 심정 이해하면서도 오늘에서야 연락드린 거 퉁쳐주세요. 그게 가방에 있어서. 가지고 나올게요. 잠시만요.”

그 말을 끝으로 나에게 따라붙는 시선을 모른 체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어두운 방에 들어와 불을 켜고, 문을 닫자마자 자리에 주저앉았다.

생전 처음으로 엄마와 아버지를 향해 모진 말을 했는데 후련하기보단 허무했다. 아니, 허무하기보단 공허했다. 왜일까. 엄마처럼 소리를 지르지 않아서 그런가. 나한테 왜 그랬냐고 말로 추궁하는 것이 나았을까.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엔 내가 지금 너무 힘이 없었다.

다시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럼 나는 왜 이렇게 아플까. 아까 언뜻 봤던 것 같은 가방을 찾아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면서도 계속 생각했다. 그러다 가방을 벌려 편지를 찾은 순간 깨달았다.

아 나는 두 사람이 변명해주기를 바랐구나.

그래, 그거였다. 내가 그들이 한 짓에 대해 안다고 말했을 때, 오직 나에게만 원망할 자격이 있다고 했을 때, 나를 사랑한 적이 있었는지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고 자조했을 때. 조용히 있는 것이 아니라 후회하고 가슴 아파하며 변명해주길 바랐다.

이젠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다고 말해놓고, 나는 또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의 상처가 그들에게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는 건 참으로 답답한 느낌이었다. 가슴 위에 말도 안 되게 큰 바위를 올려놓은 듯 꽉 막힌 기분.

나는 호흡을 고르면서 편지를 손에 쥐고 일어났다. 그리고 순간 머리가 핑 돌아 잠시 서 있어야 했다. 몸이 한계에 부딪힌 듯했다. 정말 쓰러지기 전에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이 상태로 먹다가 체하진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쓰러지는 것보단 체하는 게 나았다.

우선 이 편지를 건네주고 간단히 요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라앉는 마음을 다잡으며 문을 열었다. 아버지와 엄마는 아빠의 사진을 보고 서 있었다. 방금까지 내게 들었던 말들은 역시나 그들에게 조금의 영향도 끼치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그들에게 다가가 편지를 내밀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두 사람은 각자의 이름이 쓰여있는 편지 봉투와 나를 번갈아 보다가 조심스레 편지를 받아 갔다.

나는 허전해진 손을 한 번 쥐었다 펴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손님이 하나도 없어 멀뚱히 서 계신 아주머니에게 다가가 상 하나만 차려주실 수 있겠느냐 묻는 찰나, 겨우 조용해진 장례식장을 시끄럽게 만드는 소리가 들렸다. 금방 준비해주시겠다는 말에 반사적으로 인사를 하고 나서 시끄러운 곳을 향해 걸어가 보니 익숙한 사람들이 실랑이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느라 늦은 주제에 말이 많네.”

“너한테는 그런 소리 들을 이유 없어.”

“그래, 들어도 너 새끼가 아니라 진호한테 들을 말이야.”

“선 넘지 말… 진호야!”

신발장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인기척을 느낀 세 사람이 날 향해 고개를 돌렸다. 등지고 서 있던 민선우도 고개를 돌렸다. 나는 말 없이 최태혁과 남궁호, 남궁후를 차례로 쳐다봤다. 녀석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민선우는 자기를 보는 내게 조금 곤란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미안, 시끄러웠지? 여긴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

그 말에 셋의 얼굴이 분한 듯 일그러졌다. 그러나 아까 살벌하게 굴었던 것과는 달리 입은 굳게 다물고 있었다. 나를 힐끔거리는 것을 봐선 아마 나 때문인 것 같았다.

본의 아니게 소란을 잠재우긴 했으나 그래도 건장한 남자 넷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 자체가 워낙 눈에 띄어서 그런지 복도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쪽을 보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텅 빈 장례식장을 한 번, 덩칫값 못하는 남자 네 명을 한 번 보고 입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그 말만 하고 뒤돌아 빈소를 향했다. 소동에 기웃거릴 법도 한데 엄마와 아버지는 뜯지 않는 편지를 소중하게 안아 든 자세 그대로 아빠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

나는 신발 벗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버지와 엄마에게 손을 뻗었다. 그제야 누군가가 왔다는 것을 안 그들은 의아한 눈빛으로 들어오는 네 사람을 훑으면서 나와 나란히 섰다. 우리는 어느새 다가와 조그맣게 설명해주는 남자의 말에 따라 헌화와 두 번의 절, 그리고 마주 서 인사를 했다. 그 후 네 명은 나를 내려다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그새 호기심을 잃고 다시 아빠의 사진을 보는 두 사람을 놔두고 몸을 돌려 한 사람분의 식사가 차려진 테이블로 향했다. 나를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짓던 아주머니가 뒤에 따라 들어오는 사람을 봤는지 재빠르게 음식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것을 말리지 않고 준비된 테이블 앞에 앉으며 말했다.

“일단 앉아요. 밥, 먹고 가세요.”

그들이 밥을 먹었는지 아닌지는 알 바 아니었다. 내가 배가 고팠고, 이곳이 너무 텅 비어 보이는 것이 싫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민선우가 걸어오더니 내 옆에 앉았다. 나머지는 답지 않게 멀찍이 서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두 번이나 친절히 권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들이 서 있건 말건 숟가락을 들어 밥을 펐다. 입을 크게 벌려 밥을 욱여넣고 젓가락을 드는데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사람, 한 사람 내 앞에 앉는 것이 보였다. 맨 뒤에는 쟁반 가득 음식이 담긴 일회용 접시들을 가져온 아주머니가 서 계셨다. 아주머니께서 조용하고 신속하게 테이블을 채우는 동안 나는 열심히 먹고 그들은 조용히 기다렸다.

그리고 우리만 남게 되었을 때, 잘 넘어가지 않는 밥을 억지로 삼킨 내게 남궁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 진호야. 진짜 미안해.”

“미안하다.”

“미안해, 진호야.”

남궁호를 시작으로 나머지 둘도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다시 밥을 푸려던 것을 멈추고 눈을 깜박였다. 눈 앞에 펼쳐진,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잠시 멍해졌다가 민선우의 혀 차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나는 내 손을 감싸 쥐고 손수 밥을 퍼 반찬을 위에 올려주는 민선우를 보면서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

“뭐...가요?”

그러자 녀석들이 동시에 답했다.

“전화를 받지 못했던 것, 그래서 너무 늦어버린 것. 정말 미안하다, 진호야.”

“많이 힘들었을 텐데, 빨리 못 와서 미안해.”

“바로 와주지 못해서,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그들은 퍽 진심 어린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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