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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 (187)화 (186/234)

187화

한바탕 울고 나니 차분해졌다. 여전히 기분은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래도 이젠 민선우의 얼굴을 마주보기 민망할 정도의 정신은 돌아왔다.

나는 아예 티슈 곽을 들고 다가오는 녀석에게서 시선을 돌려 상복을 집어 들었다. 받아들자마자 붙잡고 울어 눈물과 콧물이 묻어버린 것은 손에 쥐고 있던 휴지 뭉치로 대충 쓱쓱 닦아 냈다. 다행히 검은색이라 별 티가 나지 않았다.

축축한 곳을 몇 번 더 쓸면서 보다가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마침 다가와 깨끗한 휴지 한 장을 건네는 민선우에게 멋쩍게 말했다.

“저, 형. 그… 저 옷 좀 갈아입을게요.”

“도와줄게.”

순순히 뒤돌아 서줄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알겠다며 뒤로 좀 물러서 줄줄 알았던 민선우가 오히려 한 발짝 더 다가왔다. 급격히 가까워진 거리감에 당황스러운 나머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하며 손을 들었다.

“어… 아니, 옷은 저 혼자 입을 건데요.”

민선우는 자기를 저지하기 위해 펼쳐진 양 손바닥을 물끄러미 보더니, 이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벗는 건 혼자 해. 입는 것만 도와줄게.”

“...입는 것도 저 혼자서 할 수 있는데, 요.”

“진호 지금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거 알아서 그래. 다 해주겠다는 게 아니고, 도와만 줄 거야.”

그 말을 하면서 녀석이 내게 팔을 뻗었다. 커다란 손이 땀으로 젖은 앞머리를 넘겨주고, 눈물 자국이 있을 볼을 감싸 쥐더니 담백하게 떨어져 나갔다. 나는 반걸음 정도 뒤로 물러서는 민선우를 보며 머뭇머뭇 손을 내렸다.

나는 잠깐동안 가만히 녀석을 보고 있다가 한숨과 함께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옷 입는 것이 뭐가 어렵다고 도와준다는 건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 이상 쓸데없는 실랑이를 하기엔 내 정신이 너무 지쳐있었다. 그리고 다행인지 아니면 김이 빠질 일인지 몰라도, 옷을 다 벗고 바지를 입을 때까지 녀석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서 있기만 했다.

나는 나를 보면서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녀석을 힐긋 곁눈질하면서 힘겹게 바지 버클을 채웠다. 확실히 녀석이 말했던 대로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그런지 손가락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아무리 울었다지만 왜 이렇게 힘이 없지 싶어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종일 한 끼도 먹지 못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침엔 시간이 없었고, 점심엔 먹으려고 넣었던 것도 뱉어낼 만큼 큰일이 있었다. 그 뒤는 그런 걸 챙길 정신이 아니었고.

나는 힘을 주려고 해도 저릿한 감각과 함께 잘 쥐어지지 않는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한 다음 셔츠에 팔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단추를 잠그려고 손을 올리는데, 쑥 들어온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내 손을 밀어내고 대신 단추를 잡았다.

“이 정도는 괜찮지?”

“...네.”

조곤조곤 묻는 말에 안 그래도 잘게 떨리고 있던 손가락을 말아 쥐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정히 웃어 보인 민선우가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단추를 잠가주기 시작했다. 머쓱한 상황에 눈 둘 곳을 찾지 못한 나는 단정하고 깨끗한 민선우의 손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고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아까는 옷 갈아입는다고 의식하지 않았던 침묵이 너무 어색하게 다가왔다.

나는 입을 오므렸다 안으로 말아 물었다 하면서 다른 생각을 하려고 머리를 굴리다 문득 민선우에게 전화했던 시간과 도착한 시간을 떠올렸다. 물론 시계를 확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체감상 그 간격이 지나치게 짧았던 것 같았다.

민선우네 집이 여기서 가까웠던가? 아닌데. 안 가까운데. 거기다 형 일하고 있을 시간 아니었나? 그냥 이렇게 바로 올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보이는 상황에 뭔지 모를 불안감이 몰려왔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 단추를 채우고 있는 손을 보던 자세 그대로 녀석에게 물었다.

“형, 근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오고 있는 길이었거든.”

불안함을 외면하기 위해 일부러 가볍게 물어서 그런가, 민선우도 똑같이 별거 없다는 투로 답했다. 그러나 그 어조에 실린 것은 또 다른 의문이 들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오고 있었다고요? 여길요? 병원엘?”

“응. 아, 오늘 안 그래도 여기 오려고 반차 썼었어. 우리 얼굴 본 지 너무 오래됐잖아. 원래는 개인적인 볼일 보고 너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서 병문안 겸 얼굴 보려고 했는데. 그 볼일 시작하기 전에 연락이 와서 막 출발한 참이었거든.”

“연락이요? 제 연락 말고 다른 연락 말하는 거죠?”

나도 모르게 녀석을 추궁하는 것처럼 질문했다. 내가 동요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음에도 뭔가 모르게 자꾸 엄습하는 불안을 이기지 못해서였다. 병원에서 연락 좀 올 수도 있지. 뭐, 그 전에 건강검진이라도 받았나 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워낙 병원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서 그런가, 왠지 모르게 초조해졌다.

그러나 나와는 달리 민선우는 내 손이 그의 팔을 잡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흰 셔츠를 바지 속으로 넣어주며 차분하게 물음에 답해주었다.

“응. 예령이가 여기 응급실로 온 김에 입원도 여기에 할 거라고 해서. 진호 퇴근 전에 병문안이라도 가볼까 해서 일은 미루고 바로 출발했었어.”

말속에 섞여 있는 익숙한 이름.

“예령이라면… 그 예령이요? 저도 아는, 그 채예령 말하는 거예요?”

되묻는 내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리고 있어서 그런지 넥타이를 찾아 이리저리 움직이던 민선우의 눈이 내게 향했다. 내 눈부터 얼굴, 그의 팔을 쥐고 있는 손까지 천천히 훑어본 녀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 몰랐겠구나. 예령이 오늘 교통사고 당해서 응급실에 실려 갔었어. 크게 다치거나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조금 요란하게 받히기도 했고, 들이받은 쪽이 우연찮게도 최태혁이더라고. 최태혁이 입원 치료하라고 고집을 부려서 입원하기로 한 모양-”

이게 뭐야. 그게 무슨 말인데. 채예령이 왜 교통사고가 나. 그거 내가, 내가 그때 막았잖아. 없어진 일이잖아. 이래선 안 된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는 내가 막을 수 있는 일이었다.

죽음은 어쩌지 못하더라도, 사람 마음은 어떻게 못하더라도 교통사고는 바꿀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막아냈다고 생각했다. 나는 민선우를 잡고 있던 것을 놓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불이 들어온 화면에는 새 메시지가 와 있음을 알리는 아이콘이 떠 있었다. 아까는 내 상황에 매몰되어 확인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그 메시지는 채예령에게서 온 것이었다.

[너 오늘 퇴근 언제 해?]

[나 어쩌다 보니까 여기 병원에 입원하게 됐는데 퇴근하고 시간 되면 얼굴 보고 가라.]

나는 마지막 메시지에 적힌 병실 호수를 확인하자마자 발을 움직였다. 다급하게 방을 벗어나 신발을 신은 후에는 나도 모르게 뛰고 있었다.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민선우의 목소리와 상주를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병실 침대 위에서 망연자실하고 있는 채예령과 눈을 뜨지 못하던 아저씨, 나를 붙잡고 오열하던 아주머니의 모습이 차례대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 알고 있다. 채예령이 내게 보낸 문자 내용만 봐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성적인 결론은 채예령의 이름과 교통사고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힘을 잃었다. 나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달리고 또 달려 채예령이 보냈던 병실 앞에 도착했다.

쾅-!

“채, 하아, 하아. 채예령!”

힘 조절 없이 밀어버린 2인 병실의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리고, 병실 안이 보였다.

“...김진호?”

문소리 때문인지 내가 낸 큰소리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둘 다인지 몰라도 침대에 앉아 있던 채예령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이 보였다. 멍하니 허공을 보며 눈물만 흘리고 있던 것과는 다른, 생기 있는 모습.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병실을 둘러보았다. 채예령 말고도 안에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주머니라기엔 너무 큰 인영들은 나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최태혁은 채예령의 침대 옆에, 남궁 후와 호는 복도에 서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훑어보는 그들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었다.

지금 중요한 건 저들이 아니었다. 나는 다시 채예령에게 시선을 옮기고 아까보다 더 자세히 확인하며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입구에선 보이지 않았던 침대가 시야에 걸렸다. 별생각 없이 힐끔 본 침대 위엔 누군가가 누워있었다. 아저씨였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하얀 침대, 누워있는 아저씨, 우는 아주머니. 피가 빠져나가는 소름 끼치는 감각을 이겨내며 앞으로 걸어갔다. 덜덜 떨리는 팔을 뻗어 아저씨의 얼굴에 손가락을 대었다. 따뜻해. 다행이야. 따뜻해. 그제야 숨이 트이고 안도감이 몰려왔다.

그리고 안도감이 들자마자 억지로 내리눌렀던 뭔가가 울컥 솟아올랐다.

“이게, 이게 뭐야 이 새끼야! 내가, 씨발. 내가 너 운전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렇게 뒤죽박죽되어버린 온갖 감정이 기어코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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