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 그 조건이라는 게 취직이라는 말씀이신 거예요?”
“그래.”
갑자기 무슨 소린가 싶어 되묻는 말에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리고 별안간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치며 호통을 치셨다.
“사내란! 모름지기 첫째로 능력을 키우고, 둘째로 내조 잘하는 아내와 부모 공경하는 자녀가 있는 가정을 이루어야 하며, 셋째로 그 가정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모자람이 없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저게 도대체 뭔 개소리야. 이 진지한 상황에, 그것도 나보다 한참 어르신을 향해서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것은 알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자연스레 확 찌푸려지는 인상을 펴기 위해 노력했다. 조선시대에서 오신 건가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니 이런 콩가루 집안을 만들어낸 것일 테지. 나는 마치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말해준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날 내려다보는 할아버지 눈을 피해 시선을 내렸다. 할 말이 없기도 했거니와 어떤 말도 보태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내가 당신의 말에 동의했다고 생각했는지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래서 네 아비도 그저 사람답게, 사내답게 살게 하려고 내 그리 무던히 노력하고 기다렸건만. 그 못난 놈은 결국 그 무엇하나 이루지 못했어. 비역질에 빠져 사내놈 뒤꽁무니나 쫓아다니질 않나, 근본 없는 꽃뱀 같은 것을 데리고 와서 아내 자리에 앉히질 않나.”
물론 이어진 이야기라고 듣기 좋지는 않았다. 가까스로 폈던 미간에 다시 주름이 졌다. 어제와는 달리 그런 말씀 하지 마시라는 말이 목구멍에서만 맴돌았다.
그래, 원래 나는 할아버지 앞에선 항상 이랬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와 엄마에게 어떤 모진 소리를 해도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 못 하고 눈치만 봤다. 어제는 벼랑 끝에 몰려 앞뒤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 화를 삼키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화를 누른 것은 미약한 통증이 아니라 뒤에 이어진 할아버지의 말이었다.
“듣자 하니 네놈도 비역질을 한다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놀라서 고개를 들어 마주친 눈빛은 차가웠다. 이 와중에 경멸이 없다는 것에 안도하는 내가 한심했지만, 그런 자괴감보다는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먼저였다. 나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그, 걸 어떻게....”
“...그리 숨길 생각도 없이 떠들고 다녔는데,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아. 그랬다. 나에게 관심 한 자락 없는 할아버지가, 그것도 동성애를 그렇게 혐오하는 사람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 마비되었던 사고가 그제야 돌았다.
나는 단 한 번도 내 성향을 숨긴 적이 없었다. 말을 하지 않은 적은 있을지라도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으면 매번 솔직히 답했다. 할아버지가 설치한 카메라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병실에서 아빠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이해받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학 동기들 앞에서 당당히 밝혔다.
무엇보다 내가 스스로 엄마와 아버지에게 말해 집안에 난리가 난 적도 있었다. 이렇게 되짚어보니 할아버지가 모르는 게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알고 계셨구나. 긴장으로 뻣뻣해졌던 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 사이 할아버지의 언성은 다시 높아져 있었다.
“아무리 보고 자란 것이 그 짓이라지만, 뭐 좋을 게 있다고 어디 배울 것이 없어 그딴 몹쓸 짓을 말이야. 내 네가 그렇게 된 것이 태훈이 놈의 무책임한 교육 탓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호적에서 팠을 거다!”
한번 놀랐다 긴장이 풀리니 여러 가지 감정으로 복잡했던 머리가 오히려 맑아진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이렇게 주눅들 필요가 없는 자리였다. 할아버지가 내 성향을 알든, 내게 소리를 치든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더 이상 할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던, 애정을 얻고 싶어 하던 어린아이가 아니었으므로 그의 분노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움츠렸던 어깨와 굽혔던 허리를 폈다. 자연스럽게 눈높이가 올라갔다. 할아버지가 그런 나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한숨을 쉬며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허나 못난 자식놈도 그렇고, 이래저래 나 또한 네 인생을 그리 만든 것에 대한 책임이 있는 데다 이 몸뚱어리가 너무 늙어 버렸어. 이젠 늙어 힘도 없고 시간도 충분치 않아.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기력도, 겨를도 없다. 그러니 그 부분은.... 그 부분은 포기했다.”
못마땅한 기색이 만연했던 어조에 지친 기색이 섞였다. 얼굴 또한 목소리처럼 지쳐 보였다. 회한이 담긴 것 같기도, 후회가 스민 것 같기도 했다. 처음으로 할아버지가 작아 보이는 순간이었으나, 그 감상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금세 당신다운 고집스럽고 냉철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내 평생을 바쳐 일궈낸 것을 거저 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암, 그렇고말고. 내 평생 내 피를 이은 자식에게도 쉽게 내주지 않은 것이 바로 재산이다. 네 아비에겐 한 푼도 주지 않을 작정인 재산이고, 당연히 네 어미에게도 동전 하나 쥐여주지 않을 생각인 재산이야.”
단 한 문장으로 엄마가 기대하던 미래를 산산이 조각낸 할아버지가 나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그걸 너에겐 주마.”
나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덤덤히 그 눈빛을 마주했다.
“그저 내 손자라고 인정할 만한 거 하나만 들고 오너라. 능력을 보이든, 번듯한 명함을 가지고 오든 네가 할 수 있는 걸 한 번 보여봐. 그놈처럼 그저 멍청할 만큼 착하고 미련하게 굴지만 말고, 내 것을 내어 줄 만한 가치가 있는 놈이 되란 말이다.”
할아버지의 입이 뭔가를 더 말하려는 것처럼 벌어지다가 도로 다물렸다. 일자가 된 입가 옆으로 주름이 지고, 내내 나를 똑바로 보던 할아버지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한참을 뜸 들이다 나온 목소리는 전보다 작고 힘이 없었다.
“네 놈도 이 썩을 놈의 집구석에서 뭐라도 얻어가는 게 있어야 할 것 아니냐. 기왕 좋은 대학 간 것이 아깝지도 않은 게야? 첫발은 스스로 내디뎌야 하는 법이다. 첫발만 내디뎌라. 나머지는 그 어린 것이 그만큼 애썼던 값으로 이.... 할애비가 알아서 해줄 테니.”
눈을 깜박였다. 방금 내가 뭘 들은 걸까. 할아버지가 본인을 나의 할아버지라고 지칭한 게 맞나. 내가 맞게 들은 건가.
확인을 위해 집요하게 할아버지의 눈을 쫓았지만, 할아버지는 시선을 허공에 둔 채 헛기침만 했다. 아무래도 내가 맞게 들은 모양이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가 머뭇거리다가 그냥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시야에 서류가 보였다. 멍한 정신으로 종이를 보면서 할아버지가 한 말을 곱씹었다.
아빠가 할아버지에게 나에 대한 책임을 거론했다. 할아버지는 그 책임을 지기로 했다. 나의 성적 지향을 알고 계시지만, 그에 대한 것은 넘어가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에게 재산을 주신단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아무것도 받지 못할 것이며 엄마도 마찬가지인데, 나에게는 주신단다. 내가 당신의 손자로서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그래도 본인의 친아들과 형식상이지만 며느리인 아버지와 엄마에게도 주지 않는 것을 내게는 주겠다고 말했다.
생전 처음으로 나의 할아버지라고 말씀하시면서, 내 어린 날의 보상으로 당신의 것을 내주신다고. 하하. 차마 내뱉을 수 없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듣고 싶었던 할아버지의 인정은 생각보다 큰 감동이 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별 감흥이 없었다. 그저 놀랐을 뿐이었다. 내 가슴에 파동을 일으킨 것은 너무 뒤늦어 쓸모없어져 버린 동정이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평생 일할 수 없을 만큼의 재산이란 건 얼마를 얘기하는 걸까. 어린 진호가 온 마음에 상처를 입어가며 아등바등 살아왔던 값은 과연 얼마일까.
손을 뻗어 서류 몇 장을 넘겨봤다. 확인해보고 싶어서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었으나 이상했다. 종이에 들어찬 빼곡한 글씨가 눈으로 들어와 뒤통수로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할아버지가 아까부터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아주 소중한 재산이 지금 나에겐 그저 종이 쪼가리 이상의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 울컥 치솟는 감정이 눈을 가린 탓이었다.
나는 종이를 넘기던 손을 거둬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할아버지를 불렀다,
“할아버지.”
작지만 분명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따라 할아버지의 고개가 들렸다. 나는 지금껏 말로 해봤자 해결하지 못하는 일들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내가 답답하고 힘든 것쯤이야 그냥 없었던 일인 듯 흘려보내면 된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건 원래부터 소심했던 내 성격이기도 했고, 용기 내어 말해봤자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들어주더라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학습한 결과이기도 했다.
어른이 되면서 전보다 내 말에 힘이 생기고,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잘 들어줄지 깨달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미 감정적으로 너무나 지친 내게는 누굴 원망하는 것조차 피곤함으로 다가왔다. 누군가가 나를 속없고 멍청한 사람으로 여길지라도, 한없이 가볍고 생각 없는 사람으로 여길지라도 상관없었다. 나는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금방 잊고 말아버리는 사람처럼 살아왔다.
그러나 이번엔. 아니,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탓일까, 아니면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생겨서일까. 원래라면 그저 알겠다 답하고 말았을 입이 근질거렸다. 답답하기만 하고 끝났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나는 항상 무서워 피하기 바빴던 할아버지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생각했다. 해결되지 않으면 뭐 어때. 이렇게 폭발할 것 같은데. 해결하지도 못할 일을 굳이 말해 상대가 상처받을 수 있다는 걸 내가 왜 걱정해야 해. 나는 이미 상처받았는데.
꾸욱, 무릎에 올려놓았던 양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