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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137화 (137/234)

137화

TH 바이오의 TH는 분명 아버지 이름을 딴 것일 테다. 누구보다 자랑스럽고 사랑스럽다가 어느 순간 집안의 수치가 되어버린, 장남 김태훈의 이니셜. 그 수치를 가리기 위해 들여온 인형 김진호. 할아버지가 아무 말 하지 않았다면 나 또한 그 위치를 입에 담을 자격은 없었다. 그럼 뭐라고 말해야 하지. 사람들이 적당히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가 뭐가 있을까.

멋들어지게 쓰여 있는 글자들을 쓸며 고민하던 나는 내가 아직 희망에 가득 찼을 시기, 할아버지와 단둘이서만 있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기억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옛날에 그분이 산책하실 때 말동무가 되어드린 적이 있어요. 그때 다리가 좀 안 좋으셔서 옆에서 부축도 해드렸고요. 아마 그걸 기억하시고 연락하라고 하셨나 봐요.”

“산... 책? 그냥 지나가다 산책 도와드렸는데, 그게 회장님이셨다는 거에요? 진짜? 그걸 기억하신 거라고요? 와, 완전 드라마 아니에요, 이 이야기?”

솔직히 썩 믿음이 갈만한 탄탄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다행히도 대리님이 먼저 드라마 같다며 포장을 해주셨다. 나는 그 말에 맞장구치며 웃을 뿐이었다.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다. 사실도 드라마 같은 건 맞으니까.

다른 점이라면 대리님이 상상하는 건 주말 저녁 드라마라면, 현실은 아침 막장 드라마에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이미 한 번 배드엔딩으로 끝나버린, 인기 없는 그런 드라마. 다행히 나의 수많은 노력과 비굴함으로 그 엔딩은 벗어난 것 같지만 여전히 해피엔딩이 될 거란 자신은 들지 않았다. 나는 드라마나 영화 모두 해피엔딩 아니면 시작도 안 하는데, 내 인생도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

괜스레 입을 삐쭉 내밀며 속으로만 구시렁대고 있자니 앞에 있던 대리님은 어느새 저 멀리 팀장님 자리로 간 후였다. 나를 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사람들과 드라마 어쩌고가 들리는 걸 보면 내 얘기를 하는 것 같다. 그중 몇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으나 나는 그저 마주 웃어 보이곤 빙글, 의자를 돌렸다. 내내 쥐고 있던 명함을 조심스레 지갑에 넣은 후 다시 일을 시작했다. 머리가 복잡할 땐 역시 일이다.

“곰돌이, 오늘도 일 잘했어?”

저 호칭은 정말 계속 부를 건가. 남궁호는 고미인지 뭔지로 부르는 거 관두고 이름으로 불러주는데, 남궁후는 잊을만하면 꼭 저 말도 안 되는 호칭을 꺼내 들었다. 싫다는 의미를 담아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째려봤더니 운전하다 날 힐긋 보고 씩 웃는다. 저 저, 얄미운 놈!

“그냥 그랬어요.”

“그래? 흐음....”

심통 난 그대로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남궁호 녀석이 가운데로 고개를 내밀어 날 보더니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불쑥 들이 밀어진 얼굴이 부담스러워 창문 쪽으로 몸을 물리는 것을 보고 그 큰 몸을 구겨 넣는 녀석에게 결국 운전하던 남궁후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 꺼지라고! 운전하는 거 안 보여?”

“진호 너 오늘 정말 아무 일 없었어? 정말?”

물론 남궁호는 그런 남궁후의 샤우팅과 팔꿈치로 내려찍는 공격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날 향해 질문했다. 이대로 있다간 사고가 날 것 같아 나는 남궁호의 어깨를 살살 밀어 제대로 앉게 하고, 미친 새끼라면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남궁후의 어깨를 툭툭 쳐 진정시켰다. 그나저나 저 질문은 뭔가 알고 한 것 같지?

“누구한테 뭐 들었어요?”

“으음, 병원은 의외로 소문이 빠르거든.”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보통 사무업무 보는 사람들 사이에 난 소문이 의사들한테까지도 하루 만에 퍼지나? 같은 건물이지만 분위기도 동떨어져 있는데. 살짝 드는 의문에 남궁호를 보려고 뒤돌아있던 그대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녀석이 그래서 병원은 조심해야 하는 거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뭐, 반평생 그 병원에서 지낸 녀석이 그렇다 그럼 그런 거겠지 뭐. 소문을 들었다면 거기서 더 해줄 말은 없었다. 이 둘이라고 해서 내가 할아버지와의 진짜 관계를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뭘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들은 그대로일 거예요. 놀라긴 했는데 큰일은 아니라서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 싶은 정도?”

무슨 일이 있다고 할 일은 아니었어요. 중얼거리듯 뒷말까지 끝낸 나는 한껏 돌아가 있던 허리를 바로 하고 앞 유리창 너머 풍경에 시선을 고정했다. 혹시라도 내 복잡한 마음이 표정에 드러날까 봐 주먹을 꽉 쥐었다.

다행히 힐긋, 옆 창문으로 확인한 얼굴은 제법 덤덤해 보였다. 남궁호는 무슨 재밌는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기대했는데 그런 거였냐면서 심드렁하게 답하더니, 자연스레 주제를 바꿔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남궁호와 후의 이야기에 편승해 웃고 떠들었다. 그러다 보니 요 며칠간 항상 그랬던 것처럼 금세 집에 도착해 있었다.

“바로 밥할 거니까 진호 먼저 가서 씻어.”

“어? 저도 같이하면 안 돼요? 제가 형들보다 훨씬 잘하는-”

“오랜만에 셋이잖아.”

씨발. 나는 음흉하게 웃는 쌍둥이를 번갈아 노려보다가 발을 쿵쿵 구르며 화장실로 향했다. 그러니까 저게 무슨 소리냐면, 밥 먹고 바로 그 짓 할 거니까 이따 씻는다는 핑계 댈 생각하지 말고 시간 줄 때 씻으라는 소리다.

요즘 나는 혼자 자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못하는’ 거긴 한데, 어차피 혼자 자는 것도 싫었으니 그냥 ‘않는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전에 그런 일을 당하고서 참 태평하다 싶을 수 있겠지만, 딱 하루 내가 우기고 우겨서 혼자 자려고 한 그 밤에 지독한 불면과 악몽을 겪은 후 나는 내 일신의 안위를 위해 고집을 꺾었다. 그리고 걱정만큼 그들은 그 짓을 막무가내로 하진 않았다.

진짜 어이없는 게, 이 집에 있는 동안 저 둘은 둘 중 한 명이 없을 땐 나와 그렇고 그런 짓을 하지 않기로 저들끼리 약속을 한 모양이었다. 하나가 바빠서 한 명만 나와 같이 퇴근한 날엔 거기가 옷 위로도 느껴질 정도로 발기한 상태에서도 키스 이상 건드리지 않았다. 아침에 양 볼에 뽀뽀를 받아야 출근하는 것처럼, 흉흉한 물건이 찌르는 와중에도 그 품에 안겨 잠드는 것엔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진짜 이런 거 보면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 맞다 싶었다.

아무튼 그렇다고 그걸 전혀 안 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둘이 같이 일찍 퇴근한 날 나의 체력이 괜찮아 보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날 홀라당 꿀꺽해버렸다. 한 명도 버거운데 두 명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라 항상 지고 말았다. 그리고 전에 한 번, 무조건 먼저 씻어야 한다고 고집부리다가 저들이 나의 어디를 어떻게 씻기고 있는지 생중계 당하는 수치를 당하고 나선 이런 걸로 반항하진 않기로 했다.

일단 씻고 밥 먹으면 양치하자고 하자.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둘도 그런 생각 없어질 수도 있어. 응, 그럴 거야. 하지만 그렇게 애써 부정하면서도 혹시 몰라 꼼꼼히 씻게 되는 내 모습에 현타가 몰려왔다. 그렇게 옅은 자괴감과 부끄러움 때문에 함이 팍 들어간 손으로 때가 나올 정도로 빡빡 씻고 나갔더니 부엌엔 어느새 12첩 반상이 차려져 있었다. 이 녀석들, 요리 솜씨 느는 속도가 아주 심상치 않아.

“딱 맞춰 나왔네. 얼른 앉아.”

“형들 이젠 뚝 뚝딱 엄청 잘하네요, 요리.”

“그럼! 우리가 누군데!”

소문난 천재 쌍둥이라고?

“소문난 천재 쌍둥이라고!”

“...그래요. 알겠으니까 그만하고 앉아요, 호형.”

“응!”

나는 참 해맑게도 웃는 29살 남궁호를 보며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이미 앉아서 제 쌍둥이 형제를 한껏 이상한 사람 보듯 보던 남궁후는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뿌듯하게도 이제 나는 녀석들을 10에 6번은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딱히 외모에서 차이점을 발견했다기보단 같이 지낸 짬이 있어서 그런가 느낌적인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뭔가, 정확하게는 표현하지 못하겠지만 대충 남궁후는 인성이 막돼먹었고, 남궁호는 음흉한 그런 느낌이랄까. 어쨌든 둘 다 장난기가 매우 넘치는 나머지, 같이 있다 보면 의사는커녕 성인으로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새빈과 있을 땐 멍하고 나른한 분위기였다면 쌍둥이는 스펙터클하고 다이내믹 했다. 진짜 극과 극이었다. 아무 걱정 없이 본능대로 사는 것도 좋았지만 이쪽도 나쁘지 않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내 감상이었다. 신기하게도 이 녀석들이랑 있으면 우울한 감정도 복잡한 고민들도 금방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오늘만 봐도 그랬다. 나는 분명 녀석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일하는 것을 잠시라도 멈추면 금세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차올라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둘과 함께 있으면 그런 괴로움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둘 사이에 있을 땐 내가 평범한 26살 김진호처럼 느껴졌다.

“자아, 밥 다 먹었으면 일어날까? 얼른 양치해야지.”

“그래 치우는 건 나중에 우리가 할 테니 일단 다 같이 양치부터 할까?”

“.....”

물론 이런 것만 빼면 말이다. 나는 능글맞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녀석들을 아주 차가운 눈으로 바라봐 주었다. 잊어버리지 않았군. 제기랄. 떠밀리듯 욕실에 온 나는 칫솔과 치약을 쥔 채 신난 얼굴로 옷을 벗어 던지는 녀석들에게서 슬금슬금 멀어졌다. 그래봤자 욕실을 벗어나려고 하는 순간 붙잡혀버리는 걸 아는 나로선 최대한 벽 쪽으로 붙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녀석들의 가랑이 사이를 필사적으로 못 본 척하고 있자니 녀석들도 각자 칫솔을 입에 물고 전투적으로 칫솔질을 하기 시작했다. 저렇게까지 불탈 일인가. 도대체 이런 볼품없는 몸뚱아리에 왜 저렇게 열을 내는 거야. 질리지도 않는 건지.

녀석들이 샤워한다고 내게서 시선을 뗀 틈을 타 티셔츠 목 부근을 늘어트린 나는 그 사이로 내 몸에 점점이 남은 흔적들이 아주 약간 옅어진 것을 훑어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놈의 자국은 없어질 틈이 없네, 틈이.

“퉤-”

“진호 다 했어?”

내가 입을 헹군 물을 뱉자마자 누군가가 뒤에서 허리를 감싸왔다. 얌전히 감겨있던 손은 내가 칫솔을 칫솔꽂이에 꽂자마자 슬슬 움직여 내 티셔츠를 위로 잡아 올렸다. 전에 안 벗겠다고 버티다가 옷이 갈기갈기 찢긴 것을 기억하는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만세를 했다. 동시에 발목을 툭툭 치는 손길에 따라 발을 들어 바지와 속옷 또한 벗었다.

“예쁜 우리 곰돌이, 어디서 하고 싶어? 응?”

“...안 하고 싶, 읏, 흐으, 침, 침대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부려본 미약한 반항은 망설임 없이 중심을 주물러오는 손길에 막혔다. 이대로면 또 서서 그 큰 걸 받아들이는 불상사가 일어날까 봐 무서웠던 나는, 그나마 가장 편하고 금방 끝날 수 있을 것 같은 장소를 급하게 외쳤다. 씩 웃은 남궁후는 그대로 날 안아 들고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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