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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120화 (120/234)

120화

“위선자.”

정새빈은 피식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이번엔 명백한 빈정거림이었다. 나에게 향해있던 남궁후의 시선이 녀석에게로 옮겨갔다.

“이 자리에서 네가 말하는 ‘이런 식의 회피’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었나? 회피를 하다 못해 탈선해버린 미친놈, 회피하는 사실조차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피터 팬인 척하는 비겁한 놈, 귀찮아서 방관하고 재밌다고 가담했던 이기적인 놈만 보이는데, 내 눈에는.”

아무 표정 없이 말하는 정새빈의 어조엔 비소와 자조가 적절히 섞여 있었다.

“남들이 보면 뭐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우리도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이 꼴이 났는데, 네가 감히 뭐라고 이제 와서 누굴 가르치려고 들어. 그것도 뭐, 망가지니 뭐니 그렇게 말하니까 누가 보면 네놈들이 진짜 진호 걱정해서 그러는 것 같잖아.”

정새빈은 고개를 젖히며 노래하듯 주절거렸다. 입꼬리는 단어에 따라 올라가기도, 내려가기도 했다. 나는 남궁후의 부들거리는 주먹을 가만히 지켜보며 이어지는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뭐, 이미지 메이킹? 그런 거 하려고 그러는 건가? 내가 미친놈 포지션 잡은 것 같으니 너네는 건강하고 밝고 유쾌한, 그런 이미지 담당하려고? 나는 미친놈이라 널 망가트리고 말 테니 이딴 새끼랑 이러고 있지 말고 우리들이랑 가자- 그렇게 말하려고 밑밥 까는 거 같은데, 아무리 봐도.”

“...야.”

나를 잡고 있던 남궁호가 나지막하게 정새빈을 불렀다. 그 부름에 답이라도 하듯 젖혀 있던 정새빈의 고개가 반듯하게 돌아왔다. 녀석의 고요한 시선은 자기를 보고 있는 나를 스쳐 내 뒤에 정착했다.

“같잖은 위선 떨지 말고 차라리 솔직히 말해. 네놈들이 흥미로워하는 장난감을 누가 말도 없이 가져가서 죽어라 찾아다녔다고. 근데 찾아보니 이미 다른 새끼가 물고 빨고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것 같아서 화가 나 못 견딜 것 같다고 해, 그냥.”

“이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나까지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저질스러운 내용에 남궁후도 참을 수 없었는지, 정새빈의 멱살을 쥐고 벽에 강하게 밀쳤다. 충격에 살짝 콜록거린 정새빈은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궁후를 향해 읊조리듯 말했다.

“...가 ...에 ...거, 너도 알면서 왜 위선이야, 후야.”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였음에도 앞부분의 대화는 들리지 않았다. 이어지는 말로 봐서는, 어쨌든 멈추지 않고 힐난한 듯했다. 정새빈의 멱살을 잡고 있던 남궁후의 손에 핏줄이 설 정도로 힘이 실리더니, 이젠 거의 목을 짓누르는 수준으로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나는 눈에 띄게 부들거리는 남궁후의 주먹이 금방이라도 정새빈을 후려칠까 봐 잔뜩 긴장해야 했다. 그러나 정작 목이 졸린 당사자는 숨이 막혀 얼굴이 시뻘게지는데도 담담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비아냥조차 없는 숨 막히는 정적이 오히려 살벌했다. 부디 정새빈이 더 이상 남궁후를 자극하지 않기를 바랐다. 내 눈앞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게 싫기도 했지만, 그동안 정새빈에게 정이라도 든 건지 녀석이 다칠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폭풍전야 같은 침묵이 이어지고, 저 둘이 대치하고 있는 원흉인 내가 나서야 하나 싶어 결연하게 침을 꿀꺽 삼키는데, 갑자기 뒤에서 대뜸 남궁호가 입을 열었다.

“아닌데.”

갑작스럽게 끼어든 것도 당황스러웠는데, 잔뜩 골이 난 초등학생이나 할 법한 말투가 상황에 전혀 맞지 않았다. 황당해서 뒤를 돌아 얼굴을 보니 심지어 입술도 삐죽이고 있었다. 지금 이 분위기에 이런다고? 진짜? 더 어이가 없는 건 남궁후가 손에 힘을 뺀 건지 혈색이 돌아온 정새빈도 장단을 맞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는 점이었다.

“...맞는데.”

“아닌데, 네 말 다 틀렸는데.”

“아닌데, 맞는데.”

“으응, 네 말 다 틀렸죠? 전부 아니죠? 맞은 거 하나 없는데 괜히 잘난 척하고 앉아 있죠?”

...실화야? 한없이 진지하고 무거웠던 분위기는 어디로 치워버리고, 초등학생같이 구는 두 사람의 대화 때문에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절로 벌어지는 입을 간신히 다물고 고개를 돌리자 입술을 늘어트린 채 에베베 거리고 있는 남궁호가 보였다. 미친 건가. 지금까지의 흐름에 이 행동이 과연 맞는 건가.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떡 벌리고 질린 표정을 짓고 말았다.

남궁호는 그런 나를 힐긋 보고 개구진 미소를 짓더니, 머리를 한번 헝클인 다음 천천히 정새빈 쪽으로 걸어갔다. 남궁호가 오는 것을 빤히 보던 남궁후가 정새빈의 멱살을 놓았다. 둘은 밑에서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치더니 이번엔 남궁후가 내 쪽으로 와 어깨에 팔을 둘렀다.

“뭘 그렇게 꼬고, 꼬고, 꼬아서 말해, 듣는 사람 거북하게. 그것도 누가 들으면 네가 하는 말이 진짜인 것처럼 분위기 겁나 무겁게 잡고. 응? 목은 좀 괜찮아? 안 아파? 그러게 왜 입을 막 놀려서 사람 성질을 건드려.”

진짜 패버리고 싶게. 정새빈의 구겨진 옷을 펴주면서 하는 말의 어조는 아주 가볍고 산뜻했다.

“이 피터 팬이 보기엔 말이야. 어떤 미친놈이 자기가 한 짓이 얼마나 또라이 같은 짓인지, 납치당한 웬디가 깨달아서 도망가버릴까 봐 별 시답잖은 궤변을 늘어놓는 중인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미친놈?”

“궤변이 아니라 사실적시겠지.”

“...하하. 그래, 뭐. 아예 틀렸다고는 안 할게. 좀 과하게 비틀렸지만 맞는 부분도 있긴 하니까. 근데 그게 가장 무서운 거야. 사람 심리가 말이야, 거짓이 99퍼센트라고 해도 1퍼센트의 진실이 들어가 있으면 판단에 오류가 와. 그 진실 하나 때문에 나머지 99개도 다 진짜인 거 같고 그렇거든. 그래서 더는 못 어울려주겠다, 네 그 퇴폐미 자랑 쇼.”

이런 칙칙한 분위기는 영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아 나를 보는 남궁호의 입은 그린 듯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해 생기면 귀찮으니까 명확히 하자면, 얘가 미친놈. 내가 피터 팬. 쟤가 방관 및 가담자. 남부러울 것 없는 인생인데도 각자 환경이나 멘탈, 그것도 아니면 인성에 문제 있어서 회피하고 외면하고 제멋대로 살아왔어, 우리. 자세한 얘기가 궁금하면 나중에 해줄게. 언제든지 물어봐.”

“아... 네.”

남궁호는 엄지로 정새빈을 한 번, 검지로 자기를 한 번, 손을 뻗어 남궁후를 한 번 가리키면서 아까 정새빈이 했던 말을 친절히 풀어서 설명해주었다. 언뜻 들어도 무거운 게 느껴지는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산뜻하게 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명랑하게 말하던 그는, 마지막에 턱까지 치켜들고 물어보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는 갑자기 바뀐 텐션에 맞춰도 되는 건가 고민하며 엉거주춤 대답했다. 그러자 옆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남궁후가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렇게 눈치 볼 거 없어. 이미 다 지난 일이고, 이제 와선 별거 아닌 일이니까. 저 미친놈이 분위기 잡는 건 단지 네가 자기 놔두고 우리 따라갈까 봐 그런 거야. 심각한 일 아니라고. 사람 열받게 말을 거지같이 해서 나도 순간 욱하긴 했지만, 네가 이렇게 주눅들 일이 아니야. 그렇지, 미친놈?”

아래에서 올려다봐서 그런지 씩 웃는 남궁후의 입술 뒤로 송곳니가 유독 도드라졌다. 웃는 건지 위협하는 건지 헷갈리는 이상한 미소였다. 정새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남궁후를 유심히 보다가 반대편으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곰돌아, 진호야. 우리 너 걱정돼서 온 거 맞아. 장난감이니 뭐니 미친 새끼가 초조해서 별 병신같은 소리를 막 했는데,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절대 그런 생각 안 해, 그런 거였으면 15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최태혁네 인력까지 빌려 가면서 이렇게 좆 빠지게 찾아다니지도 않아.”

“그러엄. 더럽게 바쁜 와중에 오프 내면서까지 여기 직접 오는 짓은 더더욱 안 하지. 우리는 저기 있는 미친놈과는 달리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피터 팬과 방관자라 휴일 하나하나가 소중한 사람들이거든.”

“어....”

남궁후가 머리를 기울여 내 머리에 뺨을 비비면서 달래듯 말하자마자, 남궁호가 손으로 내 오른쪽 볼을 감싸며 눈을 맞춘 채 말을 이었다. 정새빈이 한 말에 대해 나름대로 열심히 해명하는 모습에,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앞에 있는 남궁호를 올려다보았다. 녀석들이 하는 말을 다 들었고, 이해도 했는데, 깔끔하게 정리가 되지 않았다. 눈 앞에 펼쳐지는 상황을 따라잡는 것도 벅찬데 나에게 이목이 집중되니, 가만히 지켜보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단시간에 너무 많은 정보들이 머릿속에 욱여 넣어진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날짜로는 15일이 지났고, 엄마에게서 온 연락은 문자 한 통이 전부였는데, 정새빈은 미친놈이고, 쌍둥이는 피터 팬이고 방관자라니. 거기다 나는 누군가가 물고 빨아서 더러워진 장난감이었다가 엄청나게 바쁜 와중에 시간 내서 달려올 정도로 걱정되는 사람이 되었다. 한없이 무겁고 진지했던 분위기가 갑작스레 살벌하지만 명랑하게 변했고, 며칠 내내 내 시야를 독점하고 있던 정새빈은 쌍둥이에게 가려 보이지도 않았다.

“일단 우리랑 가. 우리랑 가서 햇볕 쬐면서 산책 좀 하다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밀렸던 연락도 천천히 답장하면서 당분간은 우리 집에서 지내. 이렇게 계속 있다간 너 큰일 나, 진호야.”

남궁후가 입술을 달싹이고만 있던 내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앞으로 걷게끔 힘을 주어 밀었다. 내 앞에 있던 남궁호는 앞서 걸으면서 교묘하게 정새빈을 가렸다. 나는 힘에 밀려 걷기 시작하자마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정새빈을 찾았다. 쌍둥이의 몸 틈으로는 몸의 일부만 보일 뿐, 녀석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잠, 잠깐만요.”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지만 이대로 가버리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황급히 ‘잠깐’을 외치며 몸에 힘을 주고 버텼다. 그리고 녀석들의 사이를 벌려 정새빈을 찾았다.

“야, 정새...빈....”

비켜주지 않으려는 듯 요지부동인 두 사람의 몸을 겨우 떨어트려 확인한 정새빈은, 벽 앞에 오도카니 서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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