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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61화 (61/234)

61화

“네…?”

듣지 못했을 리는 없는데, 차마 이해가 되지 않았던 건지 진호가 되물었다. 평소 자신의 명령에 되묻는 것을 좋아하지 않던 선우는 이번엔 진호를 봐 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비어 있던 손으로 아까 봐 뒀던 젖꼭지를 잡고 비틀었다.

“아!”

“말 들어야지, 나비야. 혀 내밀라고 했어, 내가.”

진호는 작게 비명을 지르며 다급하게 선우를 올려다봤다. 그의 눈은 당황으로 물들어 있었다. 선우는 자기의 손목을 잡고 있는 진호의 손을 한 번 곁눈질하더니 손가락에 더 힘을 주었다 풀었다.

손에 힘을 줄 때마다 같은 행동을 몇 번 반복하고 나서야 진호가 조금 떨리는 손을 얌전히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선우는 그 모습에 칭찬하듯 입을 한 번 가볍게 맞춰 주고 이번엔 진호의 젖꼭지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아아! 잠,”

작정하고 세게 잡아당긴 손속에 진호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아까의 기억 때문인지 그의 손은 선우의 손 주변만 맴돌 뿐이었다.

“혀.”

선우는 억울함이 담긴 진호의 눈을 마주치며 그가 잊어버린 명령을 다시 말해 주었다. 수줍게 내밀어진 혀를 본 선우는 웃으며 손가락의 힘을 빼고 발갛게 된 젖꼭지를 달래듯 살살 만져 주었다. 진호의 몸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서려고 했으나 선우의 팔 안에 갇힌 상태였기 때문에 그 몸짓은 무의미했다.

“으…, 흐….”

혀를 내밀라고 해 놓고 선우의 혀는 진호의 입가만 스치듯 핥았다. 그러면서도 진호가 조금이라도 혀를 집어넣으려고 하면 어김없이 젖꼭지를 아프게 비틀어 올렸다. 그 강도는 점점 세져서 마지막엔 아픔을 못 이긴 진호가 자기도 모르게 손이 올라가는 쪽으로 가슴을 내밀며 아픔을 줄이려고 했을 정도였다. 진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착하다. 내 예쁜 나비.”

선우는 눈동자엔 갈등이 가득한데도 시키는 대로 혀를 내밀고 있는 진호가 사랑스러웠다. 상을 주듯 간질이던 것을 멈추고 진호의 혀를 삼켜 한 번 빨아주고는 그대로 그의 입안으로 혀를 넣어 볼 안쪽을 쓸어 주었다.

선우는 진호의 몸을 가두고 있던 팔을 풀어 어깨를 잡고 밀었다. 뒤로 떨어지는 느낌에 놀랐는지 진호가 다급하게 선우의 가슴께의 가운을 잡았다. 마치 구명줄이라도 된 양 꽉 잡은 것이 느껴져 선우는 입술을 맞댄 채 목을 울리며 웃었다. 그리고 일부러 진호를 완전히 눕히지 않고 허공에 떠 있도록 만들었다.

진호는 뒤에 소파가 있는 것을 잊은 사람처럼 있는 힘껏 선우에게 매달렸다. 그는 진호의 질끈 감은 눈을 보며 키스를 이어 갔다.

“흐, 잡, 잡아…. 무서, 워.”

끝나지 않을 것처럼 한참 이어지던 둘의 키스는 진호의 애원으로 끝이 났다. 진호는 도리질을 치며 선우에게 애원했다. 선우는 감히 먼저 입술을 떼 버린 진호를 혼내 버릇을 가르쳐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울먹이는 눈이 퍽 귀여워 지금은 봐주기로 했다. 그는 진호의 목뒤를 손으로 받히고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눕히며 나직하게 말했다.

“나비는 다정한 걸 좋아하지?”

그 당연한 물음에 진호가 입술을 꼭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미소 지은 선우는 진호의 코에 코를 한 번 비비고 물었다.

“사랑받는 것도 좋아하고. 그렇지?”

이번에 진호는 조금 울먹거리며 눈을 감아버렸다. 선우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조금 놀랐지만, 재촉하지 않고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진호의 흐느낌이었다.

“흐윽….”

선우는 진호의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진호의 감정 변화가 이해되지 않았다. 자기가 했던 말을 돌이켜 봐도 그렇게 문제 되는 말이 없었고, 애초에 두 마디밖에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진호는 이제 두 손을 눈 위에 올려놓고 아주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흐읍…. 흐어어엉!”

선우는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오열하는 진호를 내려다보면서 한숨을 뱉었다. 자고 일어나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직 발작의 여파가 남아 있었나 보다. 평소에 눈물이 나오려고 하면 입을 앙 다물고 인상을 찌푸리며 억지로 참아내던 진호는 어디로 가고, 툭 건들면 바로 울음이 터지는 울보만 남아 있었다.

선우는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리고는 다정한 목소리를 꾸며내어 진호를 불렀다.

“나비야”

그 부름에 진호가 꾸물꾸물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웠다. 그리고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선우를 올려 보며 말했다.

“나, 아니 저는. 저는 드릴 것이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진호의 목소리는 엉망진창으로 갈라져 있었다.

* * *

사랑. 그건 언제나 내가 간절히 바라던 것이었다. 주려던 사람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받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아니다. 마찬가지가 아니라, 더 최악의 상황이다. 사랑이 아닌 것을 내 마음대로 사랑으로 치환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면서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처음에 나는 그들에게 원하는 것이 있었다. 그건 그들의 관심과 친밀감이었다. 내가 위험에 처했음을 알아챌 수 있을 만큼의 관심과 나를 구하러 와줄 정도의 친밀감을 형성하고 싶었다. 그들에게는 그것들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는 모른다. 단지 나는 평생 단 한 번도 얻어 보지 못해 본 것들이었기에 그 값어치를 결코 가볍게 여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동원했다.

채예령에게 받은 정보를 이용해 그들과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그나마 괜찮다고 생각하는 요리 실력을 발휘해 그들에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고, 낯을 가리는 성격도 뒤로한 채 최대한 친근하게 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모를 수 없었던 그들의 억지도 나는 모른 척 넘겼다. 그게 내가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 필요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에게도 원칙은 있었다. 다른 것들은 모두 줄 수 있었지만 내가 줄 수 없는 몇 가지 것들이 있었다. 아주 현실적인 것들을 예로 들자면, 내가 생활할 돈과 우리 집과 내 목숨 같은 것들이었다. 다행히 그들도 그것들은 요구하지 않았다. 문제는 현실적인 것들이 아니라 무형의, 가치적인 것들에 있었다.

나는 다섯 명 중 누구에게도 내 마음 한 자락 줄 생각이 없었다. 이성적인 호감은 물론이고, 인간으로서도 나는 그들과 ‘진짜’로 친해질 생각이 없었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점점 선을 넘었다. 아니, 그들의 관심에 취한 내가 선을 지웠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긋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진호 씨.”

민선우는 가볍게 물었음을 안다. 야릇한 분위기에서 으레 속삭이는 달콤한 말이었겠지. 나 또한 평소라면 그냥 지나가는 말로 넘겼겠지만, 아까 복도에서 흔들린 정신이 아직 단단해지지 못했었나 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내 마음 어딘가가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울음이 터졌다. 나도 모르게 꽁꽁 숨겨 두었던 마음이 조금 새어 나가 버렸다. 내가 너희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이미 다 줘 버렸다고. 그게 다라고. 나는, 더 이상 줄 것이 없다고. 다행히 앞의 말은 삼켰지만, 뒤의 말은 뱉어 버렸다.

내 안에서는 미쳤냐고 외치는 이성과 서러움을 토해 내고 싶은 마음이 싸우고 있었다. 나는 당황한 민선우의 얼굴을 한 번 올려다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 나 같아도 아까 그 분위기에서 상대가 갑자기 오열한다면 저런 얼굴로 쳐다볼 것이다. 그러나 저 녀석도 이 상황에 대한 책임이 조금은 있었다.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민선우는 하필 약해져서 밖으로 드러나 버린 나의 역린을 건드렸다.

“하…. 왜 자꾸 울어요.”

나도 미칠 것 같다. 내가 왜 이러지 싶으면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창피하고, 서럽고, 슬펐다. 어떻게든 진정해 보려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는데, 몸이 들렸다. 놀라서 눈을 뜨니 민선우가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나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민선우의 다리 사이에 옆으로 앉아 아이처럼 안겨 있는 자세가 되었다.

단단한 팔에 비스듬히 기댄 채 멍하니 녀석을 올려다보는데 커다란 손이 다가와 눈물로 젖은 내 얼굴을 닦아 주었다. 다른 손으로는 엉덩이를 토닥이며, 녀석은 다정한 낯으로 나긋하게 나를 달랬다.

“그만 울어요, 진호 씨. 이러다 눈 짓무르겠어요.”

민선우의 의도와는 다르게 거의 멈춰 가던 눈물이 다시 터졌다. 녀석의 행동이 아팠다. 다정한 말이 너무 아팠다. 가슴이 너무 아려 와서 도망치고 싶었다. 아까처럼 헛소리를 늘어놓을 것 같아 나는 황급히 입을 막고 무릎을 세워 얼굴을 묻어 버렸다. 그리고 계속 되뇌었다.

‘안 돼. 후회할 거야.’

문득 해맑은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시 마음 어딘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뭐가 그렇게 슬프고 어려워요, 진호 씨는. 우리가 뭘 원하는 것 같길래 이렇게 힘들어 하는 걸까요.”

너희들이 원하는 것 같아서 힘든 게 아니다. 줄 것이 없다는 말은 나 스스로에게 당부하는 말이었다. 원하지도 않는데 내가 줘 버릴까 봐 이러는 것이었다. 항상 그래왔듯이, 나에겐 더없이 소중한 내 마음이 누군가에겐 휴지 조각처럼 쓸모없는 것임을 또다시 확인 받을까 봐 이러는 것이다.

주지 않는 것이 어려웠다. ‘관심’이라는 허울 좋은 단어를 뒤집어씌운 채 나를 서로에게 빼앗기기 싫은, 한 번쯤 가져 보고 싶은 인형처럼 취급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나에게 점점 다정해지고, 아픈 나를 보듬어 주고, 내가 위험할까 걱정해 주고, 무서운 상황에 달려와 구해 주고, 이렇게 툭하면 나한테 닿아 오는 너희들에게 흔들려서 슬펐다.

애써 외면했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조금씩 기대와 희망을 키워나갈 것을 알아서 벌써부터 지쳤다. 왜냐하면, 그 기대와 희망의 끝은 좌절과 허무라는 것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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