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아…. 순식간에 다가온 큰 손에 몸을 좀 움츠렸지만 다행히 때리는 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때린 건 아니고 꼬집었다. 그것도 아주 무지막지한 힘으로.
“아, 아아! 아하! 아하요, 형!”
진짜 장난 아니야! 내 볼! 아파! 나는 온힘을 다해 놈의 손목을 흔들었지만 떨어지긴커녕 내 볼 살만 으깨질 뻔했다. 잡아당기는 건 포기하고 놈의 팔뚝이며 다리를 찰싹 찰싹 때리는데도 반응이 없다.
서서히 생리적인 눈물이 고이는 게 느껴졌다. 놈이 당기는 대로 열심히 머리를 따라 움직였다. 젠장, 아프긴 더럽게 아프지, 옆에선 정새빈이 킥킥대는 거 같지. 근데 최태혁은 말없이 계속 힘만 더 주고 있지…. 이거 힘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서워서 눈도 못 마주치던 녀석이…. 못 본 새에 많이 귀여워졌구나.”
누가 들으면 내가 최태혁 애새낀 줄 착각할 만한 취급이다. 얼굴은 또 어찌나 인자한지 몇 번 불러보지도 못한 아빠 소리가 절로 나올 것 같다. 사람 눈이 레이저를 쏠 수 있다면 이 몸이 죽고 죽어 골백번 고쳐 죽었으려나.
나는 이왕 아플 거 영문이라도 좀 알고 싶어서 기어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나랑 놈들을 같은 취급하지 마라. 불쾌하다.”
그렇게 말하는 최태혁에게 코웃음을 치고 싶었다. 솔직히 내가 볼 때 최태혁은 녀석들이랑 다를 바가 없는 놈이었다. 저도 막무가내로 우리 집에 드나들고, 내 자위를 돕는다느니 하면서 날 만지작댔던 것을 잊었나 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여전히 속으로만 구시렁구시렁 늘어놓으며 겉으론 비굴하게 웃었다.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놔주세요.”
웅얼거리는 애원이 거실에 울려 퍼지고, 얼마 뒤 볼이 마비된 것 같을 때쯤 최태혁이 손을 놨다. 볼에는 멍들어 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 들어 보게 생겼다.
차마 문지르지도 못할 만큼 아픈 볼을 애써 모른 척하고 머리를 쓰다듬는 최태혁의 손길을 가만히 받아 들였다.
놈은 조만간 조치를 해 두겠다며 마음껏 머리칼을 흐트러트렸다. 평소 귀찮아서 선풍기로 대충 말리는 머리라지만 너무 헤집는다. 불만스럽지만 반항을 못하는 이유는 입술을 삐죽일 때마다 두피를 꾹 눌러오는 놈의 손가락 힘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역시 나도 참가.”
잠깐 새 완벽하게 잊혔던 정새빈이 어딘가 토라진 듯한 목소리로 주목을 끌었다.
역시는 뭐고 어디에 참가하겠단 거고, 거기에 이미 참가해 있는 건 또 누군데 나도, 라는 걸까. 뭐라 의문을 표출하기도 전에 최태혁이 놈을 획 째려보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의 격한 반응에 어이가 없었다. 뭔 소린지 알아들은 것을 보면 최태혁도 참가 어쩌고 하는 것의 전말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몇 분 왕따 시켰다고 고개를 돌리고 앉은 정새빈은 놈의 눈빛은 신경도 안 썼다. 최태혁은 이윽고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우리 모두 자연스럽게 무시하고 있었지만 놈의 핸드폰은 오래 전부터 진동으로 난리가 난 상태였다.
“…그래. …음. …알았다.”
통화음을 최소로 줄여 놓은 건지 이 거리에서도 목소리만 들리지 내용은 안 들린다. 무슨 대단한 비밀 얘기를 한다고 저렇게 속닥거리는 거래. 전화를 받는 최태혁은 점점 뭔가 체념한 듯한, 그리고 끝에 가선 결심한 듯한 얼굴을 했다.
난 할 말도 없고, 남이 전화 통화하는데 장난칠 생각도 없었기에 그냥 닥치고 있었다. 전화를 마친 놈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후…. 애들 온다. 오면 얘기하자.”
우리 집은 나도 모르는 새 놈들의 아지트가 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어…. 아니, 아니지. 그러니까가 아니고, 뭐라고요?”
“스킨십은 어디까지 괜찮냐고. 너 왜 말을 못 알아들어.”
말이 방구 같으니까 못 알아듣지, 라고 내뱉고 싶었지만 일단 허허 웃기만 했다. 다시 들어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전혀 감도 안 잡히는 질문에 웃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최태혁의 전화 후 민선우와 쌍둥이가 차례대로 도착하여 우리 집 거실은 남자 여섯으로 꽉 찼다. 정확히 말하면 거실엔 다섯 놈이 소파와 바닥에 서로를 보고 앉아 있었고, 나는 부엌 쪽 구석에 쭈구리처럼 앉아 있는 거지만.
아무튼 나는 모두 모이자마자 정새빈과 있었던 일을 다시 한번 설명해야 했고, 그로 인해 정새빈은 쌍둥이에게 꿀밤을 한 대씩 맞았으며, 나는 쌤통이라며 킥킥대다가 민선우의 잔소리 폭탄을 맞아야 했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내용을 쫓아갈 수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여기 모인 ‘진짜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부터는 도통 알아먹을 수 없는 멍멍 왈왈 소리만 들렸다는 것이다.
“대학 때 이후로 동선이 겹칠 일이 없기도 했고, 원체 취향이 달라서 이런 일은 다신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신기하네.”
“어쨌든 그때와 비슷한 일이 생겼으니까 규칙이 필요해 보여.”
“근데 내용은 달라도 될 것 같지 않아? 대상이 다르잖아.”
“뭐, 당연히 같을 수는 없겠지. 무엇보다 이번엔 그 당사자가 저기서 듣고 있다.”
“…싫어.”
머리 좋은 내가 해석하자면 얘네, 대학 때 뭔 규칙을 만들었나 보다. 어떤 사람 때문에. 근데 이번엔 나를 두고 그 규칙을 정할 심산인가 본데….
일단 얘네가 공통적으로 취향 어쩌고 할 만한 사람은 내가 알기론 채예령밖에 없다. 그때 채예령 때문에 다섯이 규칙을 만들었고 이번에도 나 때문에 만들어야겠는데, 사람이 다르니까 내용도 다르게 만들겠다는… 아마 그런 얘기인 것 같았다. 근데 정새빈은 왜 갑자기 싫다는거야? …아니, 이미 충분히 복잡하니 이건 못 들은 걸로 하자.
아무튼, 최태혁의 말에 의하면 아주 고오맙게도 내가 옆에서 듣고 있다는 건 잊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아무 맥락도 없이 저딴 질문을 던진 거 보면 정말 잊지’만’ 않은 것 같지만.
“형. 제가요, 어떤 맥락에서 그 질문이 나온 건지 진짜! 전혀! 요! 맨! 큼! 도 모르겠거든요.”
누가 저한테 자세히 설명 좀 해주실 분? 활짝 웃으며 한 말에 최태혁은 소파에 기대앉았고 민선우는 식탁에 턱을 괴었으며, 남궁후와 호는 관자놀이를 긁적였고 정새빈은 천장을 보기 시작했다.
개떡같이 말한 이유가 있었다. 아무도 나한테 말해 줄 생각이 없는 거다. 깨달음을 얻으며 진짜 개빡치려는데 날 빤히 보던 민선우가 잔잔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진호 씨. 현재 우리 다섯 명에게 진호 씨는 음…. 되게 관심이 가는 사람이에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돌려 녀석들을 둘러봤다. 모두 나를 보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눈이 마주쳤고, 그때마다 놈들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퍽 흥미로운 존재랄까? 이런 일은 참 흔치 않은데 공교롭게도 다섯 명이 비슷한 타이밍에 진호 씨를 다시 알게 되었고, 모두 평범 이상의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진호 씨도 알겠지만 관심이 가는 사람과는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잖아요. 그래서 나는 진호 씨와 시간을 보내보고 싶은데, 문제는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여기 있는 다섯 명 모두가 그렇다는 거죠. 참 빌어먹게도.”
솔직히 매우 직설적인 그 설명에 나는 조금 쑥스러워졌다. 누군가가 나와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말하는 걸 듣는 날이 오다니. 그것도 한명이 아니라 무려 다섯 명이 그러고 있다니.
“다른 사람이었다면 간단히 치워 버렸을 텐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서로 그러기가 좀 곤란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부득이하게 진호 씨의 시간을 나눠 가져야 할 것 같은데, 다 욕심 많은 사람들이라 누구 한 명에게 치우치는 건 봐줄 수 없으니까 최대한 공평하게 하기 나누기 위해 규칙을 정하려고 해요.”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나는 조금 멍해졌다. 그러니까, 지금 쟤네 나한테 ‘나와 시간을 같이 보내주지 않을래?’ 하는 제안이 아니라 ‘너는 나와 시간을 보내게 될 거고 나만 그러고 싶은 게 아니라서 규칙을 정 할 거야.’ 하고 통보를 하고 있는 거네.
“그리고 규칙 중에는 진호 씨와의 스킨십에 관한 것도 있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진호 씨가 당사자이니 물어볼게요. 우리와 어디까지 가능할 것 같아요?”
심지어 스킨십도 하는 것으로 이미 정해졌고, 나한테는 한계 설정만 하라는 태도였다. 다른 녀석들은 내 대답을 기다리는 건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몇 번 입을 뻐끔대다가 다물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관심이라. 내가 세운 계획을 생각한다면 지금 민선우의 이야기를 듣고 기쁜 마음이 먼저 드는 것이 정상이다. 근데 왜 나는 갑자기 도망치고 싶을까?
기뻐하고 뿌듯해 해도 될 것 같은 상황인데 도망치고 싶어졌다. 왜냐면… 싫지가 않아서. 애정도 아니고 단지 ‘관심’만으로 내 시간을 맘대로 나눠 갖겠다는 저 말이 기분 나쁠 법도 한데, 그렇지가 않아서. 참 가벼운 그 단어가 여전히 달콤하게 들린다는 사실이 너무 무섭고 불편했다.
내 인생 전반에 걸쳐 사람의 일시적 관심과 흥미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꼈으면서 나는 또 그게 싫지가 않았다. 차라리 그냥 이 말을 가소롭게 느끼며, 그래도 목표달성 했구나, 뿌듯하다- 생각할 수 있었으면 이렇게 불편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괜히 오한이 들어서 무릎을 끌어안고 놈들을 둘러보니 다들 아무 말 없이 나만 보고 있었다.
이렇게 오롯이 주목 받아 본 적도 없고, 주목 비슷한 걸 받을 땐 보통 질책이나 수군거림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이 상황이 너무 어색했다. 그래서 괜히 눈을 돌리며 말꼬리를 잡았다.
“스킨십은…. 그건 왜요. 관심이 있다고 해도, 보통은 남자끼리 스킨십하고 그러진 않잖아요. 뭐 썸 타는 것도 아니고.”
물론 나는 녀석들이 남자와도 가능한 녀석들이라는 것을 알지만 모르는 척 물었다. 내 말에 남궁호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꼭 그렇지는 않지. 그럼 지금까지 우리가 한 건 뭐야? 썸은 아니라고 쳐도, 명백한 접촉이 있었잖아.”
그렇긴 하다. 분명 모두와 접촉이 있었다. 그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친해지기 위해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했던 모든 행위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래, 나로서도 그게 스킨십이 아니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건 성적인 의도가 담긴 접촉이 맞았다. 내가 굉장히 새삼스러운 말을 했구나 싶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점이 하나 있었다.
나는 쟤네가 채예령에게 관심을 보내는 것을 보거나 소문을 통해 저 녀석들이 남자도 성적 대상으로 보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정새빈을 제외하고는 직접 본 것이 아니었기에 무조건 확신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 관점에서 놈들은 채예령에게 선배 이상의 관심을 보였으므로 자연스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이 ‘나’인 것에 놀랐을지언정 ‘남자’에게 그런 종류의 스킨십을 해 오는 것에 놀라지는 않았던 것이다.
근데 쟤들은? 그러고 보니까 쟤들은 뭔 생각으로 나한테 스킨십을 했던 거지? 쟤들 설마…. 아닌데. 쟤네, 내가 누군지도 몰랐잖아. 근데 그걸 기억한다고? 말이 안 되는데?
“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냐, 김진호.”
“어…. 아니, 잠깐만요. 잠깐, 생각 정리 좀 할게요.”
근데 또 어떻게 보면 기억을 하고 있어야 말이 좀 맞다고 볼 수 있는 것이, 그걸 모르고 그랬다면 쟤네들 진짜 좀… 쓰레기인데? 상대방 입장은 전혀 상관 안 하는 인간 쓰레기. 물론 정새빈은 좀 논외다. 저놈은 원래 그런 놈이니까.
정새빈을 빼고는 나름 정상인들인데, 설마 나랑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규칙도 만들고 스킨십 정도까지 물어보는데 모르고 그러는 거겠어. 그때 나름 좀 떠들썩하기도 했었으니까 역시 이상한 일은 아니다.
“형들, 그…. 이런 얘길 물어보신다는 건 역시 그거, 알고 계시는 거죠?”
“뭐를?”
“어….”
“……?”
“…제가 게이인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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