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뭘 먹으면 가라앉는다고?
나는 뭔가 이상한 말을 들은 거 같아 다시 한번 얘기해줄 것을 요청했다. 돌아온 대답은 별나라 세계 얘기였다.
그러니까 민선우의 말에 따르면 세상에 있는 많고 많은 약 중엔 정액을 먹어야 가라앉는 미약도 있는 모양이다. 민선우도 그 사실을 어제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했다.
심하게 장난꾸러기라는 자신의 외사촌을 다그쳐 알아낸 사실에 당황했던 민선우는 일단 나에게도 설명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날 돌아봤지만, 나는 스트립쇼를 벌일 만큼 흥분이 극에 달한 상태라 설명은커녕 말리기부터 해야 했다. 그래서 손목을 잡고 내리눌러 놨더니 이번엔 내가 그 손에 비비적대며 가고 싶다고 애원했다.
그 모습을 본 민선우는 순간 스스로의 정액을 먹는 것보단 그냥 타인의 정액을 먹이는 게 낫단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침 자세도 난 앉아 있고, 민선우는 구부정하게 서 있어서 내 입이 놈의 거기와 가까운 상태였다. 원래라면 사정한 뒤 그 정액만 조금 먹였겠지만 그즈음 민선우도 한계였기 때문에 급한 나머지 그냥 다이렉트로 먹이자는 결론을 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의 기억이라는 소리다.
말하는 민선우의 진지한 표정도 그렇고, 중간 중간 들어간 상황들도 다 있었던 일이긴 해서 딱히 트집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니 씨발, 뭔가 억지 같으면서도 딱히 억지라고 우길 수 없는 이 시나리오는 뭐지? 내가 무식해서 모르는 건가? 세상에 진짜 그런 약이 있어? 난 이런 쪽에 전혀 무지하니까 뭐라고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럼 시간이 지날수록 흥분이 가라앉았던 게 많이 내보내서가 아니라 민선우의 정액을 먹어서라고? 그냥 내가 많이 내보내서 좋았던 거라고 생각했는데. 뭘 모르니까 어떻게 따질 수도 없고,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럽다.
“이유가 어찌됐든 당황스러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그냥 이대로 퇴근하셔도 돼요.”
어제의 민선우가 거짓말이라는 듯 눈앞의 놈은 언제나처럼 배려가 넘쳤다. 말하느라 아직 바르지 못한 약도 한 손에 꼭 쥐고 있고.
나는 집에 가보라는 민선우의 말에 머뭇거리다가 문득 어제가 월급날이었단 것을 떠올렸다. 맞다! 나 여기 정식으로 고용되기 계획도 있었는데! 원래 일하던 사람이 쉬는 기간 동안이라고 했으니까 언제 잘릴지 모르는 거라 한시가 급한데, 이렇게 감쪽같이 까먹다니.
펠라고 뭐고 간에 일단 중요한 건 생사였다. 돈 때문에 쪼들려 죽겠는 마당에 혼전순결 주의자도 아니고 그런 일에 연연할 때가 아니다. 그래도 엉덩이는 무사하고, 어쩔 수 없었던 일이니까.
아직도 찝찝하고 뭔가 속은 느낌이었지만 난 애써 무시하고 억지웃음을 지었다. 오늘 이대로 돌아갔다가 다음 날 해고됐다는 소리를 들을 순 없었다. 민선우 쪽에선 날 잘라버리면 그만이다.
에이 씨, 그러길래 집에서 좀 더 지내라니까. 최태혁 놈이 주는 생활비가 있었으면 이렇게까지 비위 맞추느니 그냥 일용직 일로 돌아갔을 텐데. 원망이 괜히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그래, 얘랑 더 친해지자는 목표도 있었잖아. 서로 거기 만져준 사이면 이미 충분히 친해진 것 같지만 특수한 상황이었던 걸 감안하여 이번 일은 친밀도 측정에 넣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면서 방을 나서려는데 뒤에서 민선우가 날 불러 세웠다.
“아 참. 정신이 없어 미처 말하지 못한 건데, 어제 오후쯤 지금 쉬고 계시단 분이 결국 그만 두시게 됐다고 연락이 왔었어요. 그래서 말인데, 괜찮다면 정식으로 이 저택에 취직하는 건 어떻습니까?”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아주 상큼하게 웃었다. 정말 어제 일이 정말 사소한 해프닝이었다는 듯 구는 얘가 이상한 걸까, 아니면 얘가 좀 이상해 보이는 내가 이상한 걸까. 그런 생각에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머리를 굴렸다.
일용직은 말 그대로 일용직이라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 회사에 취직하고 싶어도 회귀하기 전을 생각하면 그게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충분히 알고 있다. 지금 권유하고 있는 고용주가 조금 찜찜한 느낌이 들게 하는 사람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이 직장은 웬만한 회사보다 훨씬 대우도 좋고, 급여도 좋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며 마지막으로 내 고정 지출 목록들을 떠올렸다. 그래, 결심했어!
“하겠습니다!”
고용주가 좀 이상한 것 같으면 어때. 원래 고용주는 어딘가 조금씩 이상하고 짜증나는 구석이 있는 법이다. 영 아닌 거 같다 싶으면 여기서 일하면서 스펙 쌓아서 이직하지 뭐. 일단은, 오예다! 민선우 고용주님 감사합니다!
핸드폰이 난리가 났다. 쏟아지는 연락 때문에 켜자마자 배터리 나갈 기세이다. 얼른 무음으로 설정을 바꾸니 진동은 멈췄지만 메시지 개수와 부재중 내역이 어마어마했다.
최태혁 이놈은 잠 안 자고 밤새 통화 버튼만 눌렀는지 찍혀 있는 시간이 5분 이상 차이가 나는 게 없다. 메시지의 내용을 보고는 더욱 식겁했다. 처음은 그래도 끝났냐, 오늘은 좀 늦게 끝나냐, 하는 내용이지만 네 번째부터 어디야의 연속이다. 한참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는데 전화 수신 화면이 나타났다. 최태혁이었다.
“여, 여보세요?”
-너, 어디야.
이건, 지옥에서 끌어올리는 저음인가. 사람의 목소리가 이렇게 살벌해질 수도 있구나. 나는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먹듯 내뱉는 최태혁에게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이든 내뱉으면 이번엔 잔소리 폭탄 정도로 끝날 거 같지 않아서 등 뒤에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꿀꺽 침만 삼켰다. 수화기 너머로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대답.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더듬거리며 미리 생각해 놓은 변명거릴 뱉어내기 시작했다.
“아니, 형. 그게요. 어제 너무 바빠서 핸드폰이 꺼진 줄도 모르고 일을 했지 뭐예요. 전화하려고 보니까 켜지질 않길래 집에 와서 충전하면서 전화 드리려고 했는데, 집에 와서 잠깐 소파에 앉은 거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론 기억이…. 눈 뜨니까 아침이었어요.”
-퇴근 후 전화 하려고 보니까 전원이 꺼져 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집에 가서 하려고 했지만 막상 도착한 후엔 너무 피곤해서 그냥 잠이 들어 버리고 말았다?
“네…, 네! 맞아요!”
-흐음-. 그래?
녀석의 말투가 조금 바뀐 것이 느껴졌다. 목소리도 조금은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 핸드폰을 켜기 전에 혹시 몰라서 열심히 알리바이를 만든 보람이 느껴졌다. 사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연락이 없었던 것에 대해 쫄아야 하는지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만, 내 입장에서도 매일 주고받던 연락이 아무 예고도 없이 뚝 끊겨 버린다면 조금은 서운하고 걱정할 것 같기에 그냥 저자세를 유지했다.
아무튼 다행이다. 속은 것 같아서.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신발을 벗으며 최태혁에게 혹시 많이 걱정했냐고 묻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 버렸다. 아무도 없어야 할 거실에 누군가의 형체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근데 왜 이제야 들어와?”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씨발! 최태혁이 왜 여기 있어!
“설명해.”
나는 최태혁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얼어붙을 것 같은 목소리에 어깨가 다 떨리는 기분이었다.
전화 통화로 최태혁을 어찌어찌 속여 넘겼다고 생각한 건 큰 오산이었다.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이 화가 난 모습에 일단 꿇어앉기는 했지만 조금 억울했다. 지금은 내가 따져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하는 아주 논리적인 생각에서였다.
최태혁은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저 녀석이 갈 때 열쇠를 준 기억이 없었다. 그리고 어제든 오늘이든 하다못해 방금 했던 통화에서조차 우리 집에 오겠다, 오고 싶다, 혹은 와 있다 소리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나도 오라고 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이건 누가 봐도 명백한 무단침입이란 소리였다.
근데 왜 집주인인 내가 무릎을 꿇고 있고 최태혁은 소파에 앉아서 날 내려다보고 있냐고. 이해가 정말 단 1도 가지 않는다고!
“어젯밤에 어디 있었나.”
“그…. 일하는 사람 집이요.”
나도 안다. 소리를 내야 상대방이 들을 수 있다는 거. 하지만 그 상대방이 이렇게나 무서운데 답답한 마음을 어쩔 수 없다면 속으로 씹어대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다. 격하게 씹어대다 보면 표정 관리가 안 될 때도 있으니까 고개를 푹 숙이는 건 포인트. 오랜 기간에 걸쳐 터득해온 나의 기가 막힌 대처법이다.
그래도 사안이 사안인 만큼 나중에 화가 좀 가라앉았다 싶을 때 꼭 물어봐야겠다. 어떻게 우리 집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그렇게 소심한 생각을 하면서 무릎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는데 어디 있었는지만 물어보고 다시 침묵을 지키던 최태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너. 넌 네놈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몰라?”
“네? 상황이라니 무슨…?”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아 걱정했다는 질책을 들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숙였던 고개를 들어 녀석을 올려다봤다. 나와 눈을 마주친 최태혁은 내 어리둥절한 표정에 이를 한번 으득 갈더니 짓씹듯이 말을 뱉었다.
“넌 칼을 맞고 쓰러져 있는 사람을 구한 거다. 누군가 노리고 있는 인물을 도운 거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멍해졌다.
“…….”
“내가 왜 너에게 매번 연락을 하라고 했는지 정말 몰라서 이런 행동을 한 거냐? 응?”
몰랐다기보단 방심하고 있었다. 원래 나쁜 기억은 금방 잊고 마는 성격이라 최태혁이 집에서 나가고 하루 이틀 지나면서 그런 걱정들도 점점 희미해져 갔다.
메시지도 전화도 그저 약속이기 때문에, 또 어두운 밤길이 무서워서 한 거였는데 최태혁은 내가 위험에 처할까봐 그랬다니. 할 말이 없었다. 살겠다고 팔자에도 없는 친해지기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나보다 더 나를 신경 써 주고 있었다는 말이다.
“분명 끝날 시간인데 연락이 늦다 싶어서 전화했더니 안 받아. 새벽엔 그마저도 꺼놨더군. 배터리가 없겠지, 다른 데서 연락이 오지 않는 걸 보면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 거야. 내내 그따위 생각을 하면서 이 빌어먹을 물건을 손에서 놓질 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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