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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크리처 (Under creature) (78)화 (78/102)
  • #078

    이겸은 어디선가 얼음 팩을 구해 온 재우에게 감사하며 제 눈 위에 올리고는 중얼거렸다.

    “이럴 거면 2인실을 잡지, 비좁게 뭐 하는 짓이야.”

    과도한 능력 사용에 시력 저하까지 온 건지 앞이 흐릿하다.

    윤이겸은 부작용 때문에 당분간은 혼자 둘 수 없다며 시중을 자처하고 나선 서도현 탓에 그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혼자라면 1인실도 넉넉하겠지만 도현과 도아, 재우, 거기다 배상우까지 들이차니 방이 몹시 협소하게 느껴졌다.

    ‘왜 내 방에서.’

    할 말이 있으니 다들 모여 달라는 서도현의 말에 이동이 불편한 자신을 배려해 제 방으로 와 준 건 감사하다만….

    “그래서 이 근처에 사육장이 있다고요?”

    설명을 전해 들은 도아가 간식 봉투를 뜯으며 태평히 물었다. 이겸이 아마, 라고 대답하자 배상우는 인상을 굳히며 의심했다.

    “잘못 본 건 아니고?”

    “전 잘못 본 적 없어요.”

    단 한 번도 제 기억을 의심한 적 없었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이겸은 조금 긴장한 얼굴이었다. 크리처 사육, 교배, 아무래도 이건 블러드 헌터의 짓이 분명하고 다소 위험한 일이 될 것 같은데 굳이 이런 일에 엮이고 싶지 않았다.

    배상우에게 신고했으니 나머지는 자경단이 알아서 처리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잠시.

    “이런 불확실한 일에 움직일 수 없어.”

    “…네?”

    이겸이 멍하니 배상우를 쳐다봤다. 그는 태연하게 손톱 옆 거스러미나 뜯으며 말을 이었다.

    “너를 못 믿는 건 아니고, 크리처 사육장이라면 엄청나게 큰일이야. 하지만 자경단에 신고를 할 거면 좀 더 확실한 증거를 가져 와야 돼. 그게 아니면 자경단은 움직이지 않아.”

    “하지만 아저씨는….”

    “높은 위치지. 그렇다고 내가 자경단을 함부로 호출한 적 있어?”

    “…….”

    뭔 말이 그래. 그럼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움직인다는 뜻인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 아닌가? 그리고 크리처들 사이에 사람이 있었다니까? 죽었을지도 모른다니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무어라 반박하려는 찰나 배상우가 선수쳤다.

    “자경단도 사람이야. 지금도 어디선가 싸우고 있고, 우리는 네가 ‘봤다’라는 그 말 한마디에 움직일 만큼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야. 그리고 이런 큰일은 여럿이 움직여야 할 테니 더 까다롭고. 그게 우리 자경단의 지침이고 방식이야.”

    “…….”

    그럼 그 사람은 어떡할 건데. 자경단은 정확한 증거 없이는 꼼짝도 안 할 거니 너희가 알아서 처리해라 이건가? 내 말을 믿는다면서 증거가 없이는 못 움직여? 지침이 그렇다고? 무슨 그런 궤변이….

    이겸의 표정이 점차 험악하게 굳어 갈 때쯤 배상우가 넌지시 말했다.

    “그러니 당분간은 나로 만족해.”

    “…네?”

    들려오는 말에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배상우가 곤란하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정확한 증거 없이 자경단 호출 불가야, 그러니까 지금부터 증거를 찾아야지.”

    “…….”

    이겸은 미처 대답도 하지 못하고 얼빠진 얼굴을 지었다.

    “뭐, 왜. 증거 찾기 싫어? 언제는 신고 접수 안 된다며 세상 우울한 표정을 다 짓고 있더만.”

    “…제 말을 믿으시네요.”

    “믿는다 했잖아!”

    “윽!”

    따악, 배상우가 꿀밤을 놓자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아팠다. 그가 후련하단 듯 손을 털었다.

    “그래서, 윤이겸이. 네가 봤다는 위치가 어딘데?”

    “몰라요.”

    “…뭐?”

    그의 인상이 사나워졌다. 이겸은 고저 없는 어조로 태연히 말을 늘어놓았다.

    “능력으로 봐서 정확한 위치는 몰라요. 아마 물이 있는 곳 그 어딘가겠죠.”

    그에 배상우는 또 한 번 버럭 화를 내었다.

    “세상에 물 없는 곳이 어디 있냐!!”

    다혈질인 사람이었다. 배상우의 주먹 쥔 손이 이겸의 머리 위로 재차 다가오려던 순간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도현이 이겸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만 때려요. 얘 아픈 거 싫어해요.”

    “나도 성가신 건 싫거든!?”

    도현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연이어 말했다.

    “그리고 증거 찾기는 저랑 윤이겸으로 만족하세요. 애들은 끼우지 말고.”

    사실 서도현은 이 일에 끼고 싶지 않았다. 래터가 할 일도 아니었고, 자경단에 신고 접수가 되든 안 되든 상관도 없었다. 그로 인해 자신들에게 올 페널티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증거 찾기에 나서는 이유는 첫째, 윤이겸이 그러고 싶어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고 둘째, 배상우는 어릴 적부터 도아를 돌보아 준 은인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윤이겸은 말린다 해도 좋으나 싫으나 이 일에 끼어들 것 같으니 어쩔 수 없고, 괜히 애들까지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왜 우린 빼! 나도 할 수 있어. 차재우 너는?”

    “나…난. 어! 으, 응. 당연하지.”

    항상 이겸과 도현 둘만 있을 때 사건이 터지거나, 혹은 자신들을 빼놓고 해결하려는 모습을 다수 봐 왔던 도아와 재우는 이번 일에 자신들도 끼고 싶다며 호소해 왔다.

    서도현, 그리고 자신들보다 늦게 들어온 윤이겸, 둘의 그림자에 숨어 목숨을 연명할 정도로 염치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너희는 그냥 숙소에….”

    “됐어요!”

    말리려는 이겸에게 도아가 버럭 외쳤다. 차재우도 결심한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주억였다. 말도 잘 안 듣고, 학교에 보호자나 부르고… 이러니 진짜 사춘기가 따로 없네.

    배상우가 그들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그럼 일단 작전부터 짜 볼까.”

    ***

    끼익-. 재우가 있는 방문이 닫히고 이겸이 나왔다. 그래도 친구라고 걱정되기는 한 모양인지, 밖에서 기다리던 도아가 물었다.

    “상태는 어때요?”

    이겸은 방에서 들고 온 꽃송이를 도아의 품에 한 아름 안겨 주며 대답했다.

    “죽으려 하지. 들어가 보든가.”

    “…들어가기엔 꽃 향이 너무 강해서.”

    도아가 코를 막으며 시선을 회피했다.

    꽃향기도 어느 정도껏 나야 기분이 좋지, 머리 아플 정도로 방 안을 가득 채운 꽃 향에 다들 피신을 나와 있는 상태였다. 이겸만이 얼마나 일이 진전되었나 확인하러 잠깐 들어갔던 것이고.

    그렇다. 현재 그들은 재우의 능력을 이용해 꽃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블러드 헌터가 크리처 사육장을 이 근처에 만들었다면 이련에서 크리처를 가둘 철창, 그 재료인 철을 구하기 위해서란 게 결론이었고, 그렇다면 블러드 헌터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이련에 방문하는 건 기정사실.

    언젠가 철을 얻기 위해 이곳에 발걸음할 수상한 자를 찾으면 된다. 그리고 현재 그 흔적들을 쫓기 위해 재우는 열심히 꽃을 만드는 중이다.

    뒤를 쫓는 것과 재우의 능력이 무슨 상관이냐고 의아해할 수도 있지만 그들은 진지했다. 이겸이 고안해 낸 한 계책 때문이다.

    수상한 자를 찾기 위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이련 내부에서 눈을 떼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고작 사람 다섯 명이서 그 넓은 이련을 전부 감시한다는 게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러다간 수상한 사람을 잡기는커녕 되려 눈치를 채고 도망갈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겸의 능력으로 이련 내부를 CCTV처럼 전부 보는 건 어떨까. 과도한 능력 사용 때문에 부작용이 따를 수도 있다지만 지금까지 나온 의견 중에 제일 괜찮고 그럴듯한 주장이었다.

    그럼 이제 그 CCTV를 만들어야 하는데, 재우의 능력으로 꽃을 만들어 유리병에 물을 담은 후 꽂아 두면? 그리고 그 꽃병을 인테리어처럼 이련 내부에 여기저기 장식해 놓는다면? 가장 이상적인 CCTV를 만들 수 있었다.

    인테리어로 위장해 장식하는 건 배상우가 자신만 믿으라며 호언장담했기에 그렇게 해서 현재. 이겸이 낸 제안에 다들 수긍하며, 재우가 본격 꽃 만들기에 돌입한 지 한 시간이 넘었다.

    아무래도 공간이 넓은 탓에 꽃을 대량 생산해야 해 재우가 고생이었다. 내일은 아침 일찍 유리병을 공수해 와서 꽃꽂이를 한 뒤, 본격적인 감시에 돌입하면 되었다.

    오늘 밤은 재우가, 내일부터는 이겸이 고생할 예정이었다.

    이겸은 방금 재우가 있던 방을 들어갔다 나오면서 보았던 그의 상태를 떠올렸다. 과도한 이능의 부작용은 자신에게만 찾아오는 건 아닌지 재우는 아주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평소 먹는 그 산더미 같은 음식이 다 어디로 들어가나 했더니 꽃을 생산하는 양분이 되는 듯했다.

    “일단 그…. 재우 먹을 것 좀 많이 준비해 두자.”

    오늘 야식은 평소의 배는 더 먹을 것 같으니 말이다.

    ***

    부산에 온 지 이틀째의 날이 밝았다.

    그들은 아침을 사 먹고 꽃을 꽂을 유리병을 공수해 올 겸 잠시 외출을 하기로 했다. 배상우는 이른 아침부터 혼자 볼일이 있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고, 이겸과 도아는 아직 오지 않은 재우와 도현을 기다리기 위해 숙소 로비에 앉아 있었다.

    “배고파 죽겠네. 왜 안 내려오지?”

    도아가 답답한지 시원한 물을 들이켜며 투덜거렸다.

    “그러게.”

    이겸은 대충 대답하고 넘기며 로비를 오가는 헌터들을 관찰했다.

    ‘저분들이 전부 기술직이란 말이지.’

    그리고 몇 년 전엔 남궁산하도 저 중 한 명이었을 테고.

    이겸은 도아를 보고 말문을 텄다.

    “근데 넌 재우랑 언제부터 친했어? 되게 친해 보이던데.”

    “걔요? 래터 들어온 뒤부터죠. 그리고 저희가 친하면 오빠들은 뭔데요.”

    그렇게 말하니 또 할 말은 없었다. 그러다 문득 보호자로서 고등학교에 방문했을 때 차재우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서도아 어릴 땐 나름 귀엽기라도 했지, 지금은 완전… 어휴, 말도 마요.’

    래터에 들어오고 친해졌다면 최근일 텐데, 그럼 그건 무슨 뜻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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