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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크리처 (Under creature) (74)화 (74/102)
  • #074

    이겸의 미간이 꿈틀했다.

    “네. 재우 보호자로 온 윤이겸입니다. 그쪽은?”

    “도아 친오빠인데요. 겸이 씨는 재우와 무슨 관계죠? 성도 다르고.”

    이겸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한 건지 놀란 도아를 뒤로하고 도현이 악수를 건네며 장난스레 물어왔다.

    “아는…, 친한 형입니다. 근데 도아가 저희 재우 볼을 화려하게 만들었더라고요.”

    “네. 그 부분은 제가 잘 다그쳤습니다. 병원비는 제가 내겠습니다. 근데 재우는 교실 문을 부쉈다는데요?”

    “…문을?”

    얼마나 험하게 싸웠길래? 이겸이 당황한 눈으로 재우를 쳐다봤다. 그가 어리둥절해하며 제 결백을 주장했다.

    “어쩌다 보니 그런 거예요! 서도아가 자꾸 쫓아오잖아요…. 문 쪽으로 살짝 넘어진 것뿐인데…. 그, 그! 경첩이 낡았어요! 경첩 탓이에요.”

    “그럴 수도 있지. 이참에 튼튼한 문으로 고치죠.”

    도현이 별거 아니라며 재우를 달랬다. 안심한 재우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사이로 이겸이 부루퉁하게 물었다.

    “네. 애들이 학교생활 하다 보면 싸울 수도 있죠. 하지만 그 수리비는 누가 내고요?”

    보호자들의 대화를 경청하며 문제 발생 시 중재에 나서려던 담임이 얼른 대답했다.

    “아! 수리비는….”

    “도아 피하려다 벌어진 일인데 마땅히 제가 내야죠. 재우야, 뺨 말고 다친 곳은 없어?”

    도현이 담임의 말을 끊고 살갑게 물었다.

    “흑…, 네. 뺨이 좀 아리긴 하지만 다른 곳은 멀쩡해요, 도현이 형… 이 아니라 도아 보호자님.”

    학교에선 서로 모른 척하기로 입을 맞춘 건지 재우는 울먹이면서도 얼른 호칭을 바꿨다.

    “두 분 다 와 주셔서 감사해요. 보통이라면 제 선에서 해결했겠지만 아무래도 수리비로 돈 문제가 오가다 보니….”

    수리비는 도아 쪽에서 처리한다는 답을 들은 담임은 한층 화사해진 얼굴로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네. 충분히 이해합니다. 자, 해결했으면 도아 너도 재우한테 사과해야지.”

    그리고 서도현은 상냥한 보호자 노릇을 철저히 연기했다.

    만약 도아가 재우가 아닌 다른 놈과 싸웠어도 저런 반응이었을까? 오히려 맞고만 있지 않아서 잘했다고 칭찬할 놈이었다.

    도아와 재우가 타인에게 맞았다면 병원비는 최대한으로 청구할 놈이었고.

    도아는 부어오른 재우의 볼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일이 되면 형형색색 무지개로 자리 잡을 부기였다. 내가 봐도 심하게 때리긴 했네.

    “야, 때려서 미안하다. 그래도 부산은 내 거야. 넌 다른 곳으로 골라. 애초에 넌 네 줄밖에 안 적었잖아. 고치려면 네가 더 쉬워.”

    “…네 줄이라도 힘겹게 적은 건데.”

    “아, 진짜! 내가 도와주면 되잖아!”

    언성을 높이자 재우는 속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나도 미안. 가위바위보로 해결하면 될 일인데 너보고 바꾸라고 고집부려서. 부산은 너 가져. 내가 딴 거 할게.”

    “그래.”

    도아는 재우의 손을 맞잡은 뒤 붕붕 흔들었다.

    “선생님, 저랑 차재우 화해했어요.”

    “어…. 그러니? 근데 방금 부산은 무슨….”

    이것들이 담임 앞에서 체험 학습 위조를 당당히도 말한다. 이겸이 마른세수를 하며 변명했다.

    “부루, 하아…. 부루×블이요. 게임하다 싸웠나 봅니다.”

    ***

    둘이 화해하고, 보호자도 극성이지 않고, 수리비 문제도 해결하니 일사천리로 일이 끝났다.

    재우는 보건실에서 간단한 치료를 받은 뒤 도아와 남은 수업을 들으러 교실로 향했다. 가기 전에 이겸에게 형도 수업 중일 텐데 불러서 죄송하다는 사과 역시 빼놓지 않았다.

    이미 지난 일인데 어쩔 수 없지. 항상 A+을 노렸는데 이번 학기는 이런저런 일로 B까지 학점이 내려가는 걸 각오해야겠다며 교문을 나섰다.

    대학교에 있다가 급하게 온 터라 교재가 든 크로스백을 메고 왔다. 그 끈을 도현이 주욱 잡아당기며 물었다.

    “재우 보호자? 어디 가는 길? 다시 수업 들으러?”

    “뭔 수업이야. 이미 강의 다 끝났어. 난 놓쳤고.”

    “저런. 태워 줄까 했는데.”

    뭔 저런이야, 저런은. 수업도 글렀겠다 오늘은 이만 집에 가서 쉬기 위해 서두르는 이겸을 도현이 붙잡았다.

    “수업 끝났으면 같이 밥이나 먹자. 오늘은 선약 없지?”

    “없긴 한데….”

    지금은 좀 쉬고 싶은데.

    “그럼 가자. 그리고 내일도 시간 비워 놔.”

    “왜?”

    “나랑 놀자.”

    “내가 왜 너랑 놀…. 어차피 다음 주 부산 가면 일주일 동안 질리도록 볼 거잖아.”

    무심코 말하다 급히 단어 선택을 달리한 이겸에 도현은 의뭉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글쎄. 난 그 정도론 안 질려서.”

    결국 서도현의 조름에 식사를 하고, 집으로 가려던 찰나 또 붙잡혀 사무실로 향했다.

    “오늘은 일도 없는데.”

    일도 없는데 왜 서도현을 만나고 있어야 하지, 속으로 한탄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심지어 사무실에 함께 있는다 해도 서도현과 수다를 떠는 것도 아니었다. 각자 따로 떨어져 할 일을 하는 게 전부였다.

    그저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을 뿐,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다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이겸은 수업이 끝났다며 자신의 자취방으로 온다는 강태하의 연락에 현재 일이 있어 다른 곳에 있다는 회신을 보내며 시간을 죽였다.

    사무실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수단으로 택시를 타긴 돈이 아깝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자니 귀찮고, 걸어가긴 더욱 귀찮았다. 여기서 시간을 때우다 보면 서도현이 퇴근하는 길에 제 자취방까지 데려다줄 걸 잘 알고 있었다.

    소일거리를 하며 한참을 있다 보니 도아와 재우가 하교했다.

    “왔냐, 사춘기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겸은 과제에 얼굴을 박은 채 인사했다.

    “누가 사춘기예요.”

    “누구긴 누구야. 학교에서 싸워 보호자 부른 너희들이지.”

    잔잔한 어조로 꾸중하는 이겸에 도아가 성큼성큼 다가갔다.

    “아니. 제가 체험 학습 다 써서 제출만 하면 됐는데 차재우가 갑자기 새로 쓰라잖아요! 오빠는 과제 다 했는데 새로 제출하라하면 화 안 나요?”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네. 서도아가 찰떡같이 비유하자 이겸은 얌전히 동의했다. 그치. 과제 다 했는데 처음부터 다시 하라면 화날 만도 하지.

    “그래. 재우 넌 왜 다시 쓰라고 한 거야?”

    이겸이 질문하자 재우가 열변했다.

    “저… 저도 다 썼는걸요! 네 줄이지만 열심히 정성 들여 썼다고요! 저도 제출만 하면 됐는데 생각해 보니까 서도아랑 내용이 비슷하잖아요. 같은 날짜에 같은 여행지…. 누구 한 명은 바꿔야죠.”

    “그러니까 그게 왜 난데. 네 줄 적은 네가 더 바꾸기 쉽잖아.”

    “네 줄이지만 정성 들여 썼다고! 서도아 너는 막… 막 보이는 걸로만 평가하는 그런 애야? 그 네 줄 안에 담긴 정성은 네 거에 비하면 정성도 아니다 뭐 그런 거야?”

    이겸은 또 한 번 동의했다. 그치. 정성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법이니 재우도 도아 못지 않게 노력해 작성했겠지.

    테이블에 앉은 이겸의 앞에 나란히 서서 두 명이 열띤 토론을 벌이니 마치 법원과 비슷한 풍경이 되었다.

    “그리고 넌 대화로 해결하면 되지 사람을 때리냐! 나 여기 밴드 안 보여? 앞으로 아파서 어떻게 식사하냐고.”

    재우의 뺨은 아까 학교에서 본 것보다 더 부풀어 있었다. 도아가 힘이 세긴 하구나.

    “…그건 미안. 나도 진심으로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 당분간은 왼쪽으로 씹어.”

    도아가 고분고분 사과했다. 열이 뻗쳐 이리저리 팔을 휘둘렀을 뿐인데 마침 재우의 볼이 근처에 있어 맞힌 거였다. 때릴 의도는 없었다지만 앞으로는 화나면 몸부터 움직이는 버릇을 고치겠다는 다짐과 사과를 건넸다.

    “그래. 둘이 화해하니까 보기 좋네. 체험 학습서는 아까 보니 재우가 바꾸기로 했다며. 도아가 옆에서 잘 도와주고.”

    “근데 형은 무슨 솔로몬도 아니고 왜 자꾸 제 말이 맞네, 서도아 말이 맞네 호응하세요?”

    “그러니까. 저희보다 오빠들이 더 많이 싸우는 거 알죠?”

    “우리 요즘 안 싸워.”

    그러려고 노력 중이지만.

    이겸은 할 말을 끝낸 후, 펜을 들어 다시 과제에 집중했다. 다음 주 부산에 가는 걸로 인해 결석은 피할 수 없다지만 과제는 친구에게 부탁해 대신 제출해 달라고 하면 되니 이거라도 열심히 하자는 심정이었다.

    “근데 오빠는 짐 다 쌌어요?”

    “아직 3일 남았는데 뭘 벌써부터 싸.”

    단순 여행도 아니고 일하러 가는 건데.

    “전 지금부터 차재우랑 쇼핑하러 가려고요. 오빠도 갈래요?”

    “귀찮아.”

    “네. 춥고 귀찮겠죠. 그럼 저희끼리 다녀올게요.”

    도아는 이겸의 답변을 예상해 본래부터 기대도 안 하고 물은 건지, 씩씩하게 중얼거렸다.

    그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학교에 보호자까지 불러 가며 싸웠던 주제에 앙숙이자 친구인 건지 뭔지, 단둘이서 이곳저곳 잘 다녔다.

    “형! 아까는 진짜 죄송해요. 형도 수업 중이었을 텐데….”

    재우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사죄했다. 윤이겸이 학업에 진심이란 건 지금껏 봐 와서 잘 알고 있는데 자신 때문에 결석하게 된 게 내심 마음 쓰이는 모양이었다.

    “괜찮아. 하루 정도야 결석할 수도 있지.”

    호쾌하게 넘어가 주자 재우가 감동 어린 표정으로 훌쩍였다.

    “쇼핑하다 예쁜 옷 있으면 제가 형 것도 사 올게요!”

    “아니… 괜찮은데.”

    “서도아! 빨리 가자!”

    한쪽 뺨에 제 얼굴만 한 크기의 밴드를 붙인 재우가 이겸의 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명랑하게 외쳤다.

    “어. 오빠 나 카드 좀.”

    당연하게 손을 내미는 도아에 도현은 한쪽에 벗어 둔 제 외투를 향해 고갯짓했다.

    “재킷 주머니. 재우 것도 그걸로 계산해. 오는 길에 약도 사 오고.”

    “응. 다녀올게.”

    “저희 다녀올게요!”

    이겸은 도현의 지갑을 챙겨 들고 신나게 밖을 나서는 학생을 쳐다보다 그를 불렀다.

    “너한텐 같이 가잔 말도 안 꺼내네. 안 서운해?”

    “별로.”

    재우는 몰라도 도아는… 자신에게 권유했으면서 친오빠에겐 권유도 안 하다니, 흔히 말하는 친남매 뭐 그런 건가? 오빠는 돈만 주면 된다? 그래도 좀 그렇지 않나?

    정작 서도현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이겸은 괜스레 제가 다 신경 쓰여 손에 쥔 볼펜만 빙글빙글 돌렸다.

    그때 서도현이 입을 뗐다.

    “애들도 아는 거지.”

    “……?”

    “네가 안 가는데 내가 갈 리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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