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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크리처 (Under creature) (63)화 (63/102)
  • #063

    이겸은 배상우가 말해 준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은 지난번 참고인 조사를 위해 갔었던 건물과 도보로 1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그 앞에서 기다리니 배상우가 멀리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안녕하세요.”

    “어어, 안녕. 밥은 먹었고?”

    “네.”

    “그럼 바로 들어갈까.”

    배상우가 건물 옆에 설치된 인식기에 엄지를 올린 후, 또 한 번 비번을 치자 그제야 문이 열렸다. 래터에선 찾아볼 수 없는 최첨단 기계였다. 그 앞에는 또 경비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곳이 자경단의 본거지였다. 입구부터 보안이 철저했다. 한눈에 봐도 외부인 출입을 엄중히 금하는 곳이었다.

    “…제가 들어가도 되는 거 맞죠?”

    “그럼그럼. 편하게 들어와.”

    이겸은 그의 뒤를 따르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입구는 첨단 시설로 도배해 놓았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오니 내부는 일반 건물들과 다를 게 없었다.

    “근데 아저씨는 서도현이랑 친한 거 아닌가요?”

    “도현이? 내가 옛날에 많이 챙겨 줬지. 걔는 그걸 싫어했지만.”

    “근데 걔 앞에서 저한테 이런 제안해도 됐어요? 제가 정말 여기가 더 좋다고 대답해서 래터 나가면 둘은 어쩌려고요.”

    저번 카페에서 진작 물어봤어야 할 늦은 질문이었다. 배상우는 그의 질문을 듣더니 걱정 말라며 가볍게 웃어넘겼다.

    “도현이는 원래 나 싫어해서 괜찮아. 그리고 내가 아니라 A가 제안한 건데 뭐 어쩌겠어. 그놈 눈치 보여도 물어는 봐야지.”

    결론은 상사가 까라면 까야지, 라는 답변이었다.

    그 A가 대체 누구길래? 뭐 하는 사람이길래? 무슨 능력자길래? 여러 가지 의문 중에서도 아는 거라곤 자경단의 리더라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여긴 내 집무실인데, 일단 들어와.”

    “집무실이요?”

    “별거 없어. 주로 사건 일지나 적의 동태 등을 기록해 놓는 것뿐이야.”

    그의 설명답게 집무실에는 연도와 날짜별로 깔끔히 분류된 파일들이 꽂힌 책장과 업무용 탁자 하나와 손님용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배상우가 의자에 앉자 이겸은 나열된 사건 일지 파일을 주욱 확인했다.

    2001년, 2002년, 2003년….

    그러다 20**년 4월 5일, 지금으로부터 약 7년 전의 일지를 발견했다.

    ‘4월 5일이라.’

    남 일 같지 않은 날짜 탓인지 절로 손이 올라갔다. 뭔가 큰 사건이 있었는지 기존의 일지 파일보다 2배는 두툼했다.

    “구경만 하고 열어 보지는 마. 외부인한테 함부로 알려 줄 순 없어.”

    “…….”

    “커피? 차?”

    책장 앞에 서 있던 이겸은 포트에 물을 끓이는 배상우의 맞은편으로 가서 자리 잡고 앉았다.

    “차로 주세요.”

    “그래. 여기 분위기는 어때? 좋은 것 같아?”

    “깔끔하긴 하네요.”

    “하핫! 너희 사무실보다 더럽긴 어렵지. 거기서 생활은 되냐?”

    만난 적도 별로 없건만 친근하게 물어 오는 게 꼭 옆집에 오지랖 넓은 아저씨가 산다면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이겸은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답했다.

    “살다 보니 또 적응은 되더라고요.”

    “그래? 대단하네. 나였으면 그런 데서 생활 못 하겠던데, 직접 치우고도 남았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처음에만 좀 불편했지 지금은 사무실의 환경에 익숙해져 아무렇지도 않았다.

    “치워 봤자 금방 돌아올 텐데 포기하고 그냥 놔두는 게 낫죠.”

    더군다나 주로 어지르는 건 서도아, 차재우인데 그들도 나름대로 규칙은 있는지라 물건을 어질러 놓은 것 같으면서도 그 안에 보이지 않는 패턴이 있었다.

    배상우의 말대로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듯 줄곧 청소만 했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거다.

    왜 그런 말도 있잖은가, 놓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이 상황에 쓰이는 말인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근데 아저씨.”

    “엉.”

    이겸은 4월 5일 사건 파일이 있는 쪽으로 눈을 흘겼다.

    “20**년 4월 5일에 무슨 일 있었나요?”

    “일이 있으니 기록해 뒀겠지.”

    “무슨 일이요?”

    “여기 기록된 게 뭐가 있겠어? 뻔하지 뭐. 죄다 블러드 헌터 얘기겠지.”

    배상우는 여상히 컵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의 컵 입구엔 책갈피처럼 은색 핀이 꽂혀 있었다.

    “그건 뭐예요?”

    “이거? 크리처 피 판별기.”

    크리처 피 판별기? 이겸은 은색 핀을 좀 더 자세히 살폈다. 과거에 은수저로 독 첨가 여부를 파악한다는 그런 유인가?

    “우리 같은 사람들은 무조건 갖고 있어. 이 안에서도 필수로 착용해야 하고.”

    “왜죠?”

    “내 먹을 거에 누가 피를 타 놓으면 어떡해? 조심 또 조심하자는 주의지.”

    물이 아닌 불투명한 무언가엔 크리처의 피가 가려지니 그걸 위한 대비책이었다.

    이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 동료들에 대한 스트레스는 있다는 건가.

    쉽게 말해 자신이 A의 밑에서 근무하게 된다면 외부의 위협은 없지만 내부로부터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는 뜻이었다. 누가 언제 배신해서 제 등 뒤에 칼을 꽂을지 모를 일이니까.

    이 점에선 래터가 아주 살짝 낫긴 했다. 산하 형이나 고등학생 둘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서도현은 몰라도.

    굳이 따져 본다면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보이지 않는 적이 더 위험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왜 제 건 없나요?”

    “뭐? 넌 외부인이잖아.”

    “외부인이라고 피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건 아니잖아요.”

    “…거 참 맹랑한 학생일세.”

    본거지에 외부인이 들어오는 건 5년 전 블러드 헌터에 의한 뮤턴트 크리처의 침입 외에는 처음이다. 매뉴얼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배상우는 제 컵의 핀을 빼 물기를 턴 후, 이겸의 찻잔에 담가 주었다. 핀의 색깔은 변하지 않았다.

    “이제 됐냐? 이 아저씨의 목숨줄을 빼앗고 만족해? 애초에 내가 거기 피를 탔겠냐? 으휴, 요즘 애들은 참. 엉? 내가 너 때는 말이야…. 아아 됐다. 말하기도 귀찮다 이젠.”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다시 돌려 드릴….”

    “커피? 차?”

    “…네?”

    이겸은 눈을 깜빡였다. 이 무슨.

    “아, 커피 마실 거냐고 차 마실 거냐고. 얼른 말해. 아님 아무거나 탄다?”

    서둘러 제 발밑 위치를 살폈다. 사건 파일들이 꽂힌 책장 앞이었다. 시간이….

    “…차로 주세요.”

    이겸은 배상우의 맞은편에 앉으며 즉시 휴대폰을 꺼내 들어 서도현의 번호를 눌렀다.

    “응? 갑자기 전화는 왜?”

    “서도현한테 할 말이 있어서요.”

    “여기 구경 와서 상우 아저씨한테 차 대접 받았다고 보고라도 하려고?”

    “그런 건 아니… 여보세요.”

    스피커 너머로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 응, 겸아. 아저씨 만나러 갔다며?

    오늘 낮에 상우 아저씨 만나고 온다는 문자를 보냈는데, 이제야 확인한 듯싶었다.

    “어. 근데 지금 뭔… 크리처 잡아?”

    - 아니, 사무실.

    “근데 웬 지랄이야.”

    - 그냥. 아저씨랑 있는 게 좋으면 더 오래 있으라고.

    “…….”

    또 뭐에 회까닥한 거지? 자기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며 자존심 박박 긁어 놓고선 막상 또 상우 아저씨를 만나러 오니 심술이 난 건가?

    “너 지금 질투하냐? 너 버리고 자경단 갔다고?”

    - 전혀. 구경 가도 상관없다고 한 건 나인데.

    근데 시간은 왜 돌리는 건데. 애도 아니고.

    “아무튼 나 바쁘니까 끊어.”

    이겸은 더 묻지도 않고 통화를 끊었다. 배고픈 짐승에겐 먹이를 주면 안 된다. 그와 같은 맥락으로 서도현에게 관심을 주지 않기로 했다.

    서도현이 지금부터 능력을 사용한다면 50분, 최대 50분 버티면 되는 건가. 그럼 알아서 제풀에 지치겠지?

    “워…. 둘이 사귀냐? 되게 돈독하네.”

    “뭔 돈독이에요. 그냥 얘가 저 못살게 구는 거예요.”

    “표현 서툰 애들이 좋아하는 애한테 더 못되게 군다잖아. 도현이가 널 많이 좋아하나 보다.”

    “그럼 괴롭혀지는 전 무슨 잘못인데요.”

    애당초 서도현은 저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그저 래터의 멤버로서 챙겨 주는 것뿐이다. 자기 마음에 안 들게 굴면 괴롭히는 거고.

     서도현이 날 좋아한다고? 아무리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해도, 포장도 그런 포장이 없었다.

    이겸은 그의 말을 대충 흘려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은 몇 번이나 가려나.’

    그간 경험을 통해 이 시간의 반복이 고작 한 번으로 그치진 않을 거라 짐작할 수 있었다.

    또 무엇을 하며 시간을 때워야 하나 이리저리 둘러보다 아까 보지 못했던 4월 5일 사건 일지가 눈에 띄었다. 힐끔 배상우를 쳐다봤다.

    “여기 분위기는 어때? 좋은 것 같아?”

    “깔끔하긴 하네요.”

    “하핫! 너희 사무실보다 더럽긴 어렵지. 거기서 생활은 되냐?”

    이내 그의 말을 뒤로 하고 이겸은 슬그머니 일어섰다.

    “왜?”

    “책장 구경 좀 하려고요.”

    “구경만 해. 열어 보진 말고.”

    다행히도 배상우는 자신에게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 틈을 이용해 서도현이 능력을 쓰는 동안 저 파일 내용을 확인해 보자는 충동이 들었다.

    열어 보지 말라 했던 판도라의 상자를 두고, 금기를 어기는 기분에 침이 넘어갔다.

    조심히 눈치를 보다 사건 파일을 슬쩍 집고 배상우가 막을세라 얼른 첫 페이지를 펼쳤다. 다른 날짜도 많은데 굳이 4월 5일을 고른 까닭은 이겸에게도 낯설지 않은 날이기 때문이다.

    “너…!”

    배상우는 테이블에 놓인 컵을 엎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사이 윤이겸은 첫 페이지를 사진처럼 기억하며 읽어 갔다. 그러다 서서히 그려지는 익숙한 얼굴에 속독하던 눈동자가 일순 멈췄다.

    훌쩍 다가온 배상우가 파일을 잽싸게 덮으며 크게 격분했다.

    “보지 말라고 했지!?”

    “…죄송해요.”

    이겸은 떨떠름히 중얼거리며 방금 읽었던 내용의 중간 부분을 곱씹었다.

    「11세 서○○ 양은 20**년 4월 5일 초등학교 하교 후, 오빠의 직장 동료라 주장하며 나타난 이에 의해… 그 이후 자취를 감춘 서○○ 양… 뒤늦게 알게 된 그녀의 친오빠 15세 서○○ 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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