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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크리처 (Under creature) (51)화 (51/102)
  • #051

    두 번째는 쉬웠다.

    이겸은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공간을 잇는 이능을 가진 블러드 헌터를 처리했다.

    뭐든 하면 할수록 는다.

    첫 번째보다 쉬웠다.

    본인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두 번째 죽음이었고, 이겸의 두 번째 살인이었다.

    감흥은 없었다.

    정신이 다른 곳에 쏠려 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심장이 쿵쿵 세차게 뛰었다.

    이겸은 곧 살짝 열려 있는 탑차의 창고를 확인했다.

    “주승태.”

    아직도 방금 일이 환각인지 실제인지 구분이 안 섰다. 하지만 직감은 그에게 사실이라 말해 주고 있었다.

    주승태는 탑차의 창고 틈으로 몰래 상황을 지켜보다가 자신이 다치거나 위험에 처하면 어김없이 뛰쳐나온다.

    본디 제가 친구인 주승태를 구하기 위해 이곳까지 한걸음에 달려온 건데, 그가 위험에 처하면 모든 것이 말짱 도루묵이다. 아직도 피에 젖은 손끝이 떨려오는 듯했다.

    이겸에게 한 가지 미션이 더 생겼다.

    어떻게든 그가 나설 일이 없게 해야 한다. 차라리 창고 문을 잠그는 편이 나을까.

    “어떻게 한 거지?”

    이겸은 시선을 돌려 제게 말을 건 이를 쳐다봤다. 굳이 대답하지는 않았다.

    크리처의 피라면 일반인에겐 독에 가까울 것이다.

    이상한 환각통으로 인해 뭐가 뭔지 경황이 없었다.

    그렇다면 칼에 맞으면 안 되는데…. 독이 묻은 칼은 하나뿐인가?

    심지어 아까부터 자꾸만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계획과 다르잖아! 멈춰! 다 끝나면 죽이든가 하고 아직은….’

    저들은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사용한 독만 하더라도 그렇다.

    환상통을 보여 주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치명적인 독을 썼더라면 처음부터 자신을 단숨에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저치들은 그러지 않았다.

    ‘아직’은 말이지.

    그래서 이전의 남자도 괜히 자신과 대화하는 척하면서 시간을 끌었던 건가.

    대화에 어울려 주며 서도현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끈다고 생각했건만, 오히려 저 쪽의 꾀에 넘어간 셈이다.

    저들도 자신처럼 시간을 끌어야 될 무언의 까닭이 있던 거다.

    뭘까. 뭔가를 기다리나? 그것에 내가 필요한가? 그래서 죽이면 안 되는 건가? 그리고… 혹시 처음부터 날 유인한 건가?

    주승태를 구하기 위해 제 발로 왔다고 여겼다. 하지만… ‘유도’당한 걸지도 모른다.

    문득 주승태가 떠올랐다. 하면 안 될 터인 의심이었다.

    왜 그는 휴대폰을 사용할 수 있음에도 곧장 경찰 대신 자신에게 연락을 주었을까?

    일반인은 블러드 헌터가 뭔지도 모른다. 게다가 자신의 상태를 단순한 납치로 여겼다면 경찰에 신고 전화를 하는 게 옳은 선택이었다.

    왜지? 왜? 경찰과 연결한다니까 갑자기… 전원이 끊긴 것도 배터리가 나간 것이 아니라….

    ‘도망가!!!!!!’

    ‘멍청아!! 죽기 싫으면 도망가!!!’

    ‘내, 내 친구는… 건드리지 마!’

    ‘이, 이겸아. …쿨럭! 도망, 도망쳐.’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이겸은 부정했다.

    자신더러 도망가라고 힘껏 소리치던 그가, 자신 대신 피를 흘렸던 그가 그럴 리는 없었다.

    주승태도 저들의 작전에 휘말린 피해자일 뿐이었다.

    그래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이겸아, 진짜 갈 거야? 뭔가 느낌이 안 좋아서 그래.’

    ‘…산하 형은 알고 있었구나.’

    설령 알고 있진 않더라도 짐작은 했던 거다.

    친구가 위험하단 사실에 꽂혀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했던 건 나였나.

    문득 자괴감이 들었다.

    좀 더 현실적으로 상황을 볼 필요가 있었다. 나무 말고 숲을 봐야 했었다. 자경단에 맡기지 않고 이곳까지 달려온 건 자신의 실수였다.

    정말 주승태가….

    “그 이어폰, 누구랑 연결돼 있지?”

    남자가 물었다.

    “그냥…. 노래.”

    - 2분 후면 도착이야.

    “아깐 3분이었잖아.”

    - 지름길을 알았거든.

    “그래.”

    이겸은 반성이나 주승태에 대한 파악은 뒤로하고, 우선 눈앞의 상황을 해결하기로 했다.

    지금쯤이면….

    순식간에 허리를 비틀었다. 미세한 차이로 크리처의 피가 묻은 칼이 쌩하니 지나갔다.

    이겸은 그것의 손잡이를 빠르게 낚아채 옷소매로 날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독이 묻은 칼이 하나라면 이것만 유의하면 될 것이다. 그러면 환상통을 겪을 일도 없다.

    “…….”

    남자는 잠시 침묵하며 행동을 멈추었다.

    “싸우는 방식이 닮았구나.”

    “…닮아?”

    “그래. 꼭 그놈과 닮았어. 그 말이 이해될 것도 같군.”

    “그 말? 무슨 소리야.”

    그러지 않아도 머리가 복잡해 터질 지경인데 의미 모를 소리만 내뱉으니 짜증이 치밀었다.

    남자는 상세히 알려 줄 필요가 없다는 듯 말을 돌렸다.

    “자경단은 내성이 있어 통하지 않지만.”

    다른 칼로 제 팔뚝에 주욱 상처를 낸 후 피를 적셨다.

    블러드 헌터의 몸에는 인간의 피와 크리처의 피가 공존하고 있다.

    자경단은 상시 블러드 헌터를 마주치고, 그와 피를 튀기며 싸우기 때문에 언제나 해독제를 들고 다니며, 후에는 싫어도 내성이 쌓이고 만다.

    하지만 일반 헌터는 달랐다.

    인간의 피에 희석된 크리처의 피라도 환상통을 겪게 하기엔 충분했다. 아까도 그 때문에 피를 칼에 적신 거고. 윤이겸이 칼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한들, 다시 묻힐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그 때문에 일반 헌터는 블러드 헌터와의 전투에서 유난히 불리한 위치에 있다.

    눈치 빠른 이겸은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그리고 자신이 잡은 칼에 묻어 있는 피의 출처가 어디서 나온 건지 금세 깨달았다. 그렇다면 날에 스치기만 해도 아까의 그 상황에 처하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런저런 타개책을 궁리하던 이겸이 불쑥 소리쳤다.

    “산하 형!!”

    자신이 독에 당했을 때 그는 곧장 나타나 공격해 오는 위치를 알려 주었다.

    그렇다면 근처에 있을 터.

    “응!!!”

    올라오는 중인지 멀리서 자그마한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해독제가 필요해요!!”

    “…알았어어!!!”

    잠시 멈칫한 산하는 방금 이겸의 외침이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 힘차게 답했다.

    트렁크에 다양한 종류의 해독제가 실려 있지만 현재 이겸이 싸우고 있는 상대는 블러드 헌터였다. 그중 어떤 해독제가 필요할지는 뻔했다.

    이겸은 남자를 노려봤다. 이로써 해독제는 해결됐고, 그때까지 버티면 된다. 서도현이 오기까지 앞으로 1분.

    분명했다. 남자는 자신을 죽이지 않는다. 자신의 쓰임새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통이 없단 것도 아니다. 분명 자신이 지칠 때까지 공격해 올 거고, 곤죽을 내 놓을 것이다.

    ‘온다…!’

    아찔하게 날아오는 칼을 피했다. 하지만 그건 부메랑처럼 공중에서 방향을 틀어 재차 날아왔다.

    자그마한 생채기에도 머리가 핑 하고 어지러웠다.

    그럼에도 아직은 버틸 만했다.

    지잉-.

    그 순간 몸이 무언가에 잡힌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남자가 능력을 쓴 것이다.

    목전에 섬뜩한 날이 다가왔다. 이겸은 찾아올 통증에 대비해 눈을 질끈 감았다.

    부릉, 부르릉-.

    - 전투 중엔 눈 감지 말라니까.

    오토바이 엔진 소리와 함께 이어폰 너머 서도현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겁먹은 것처럼 보이잖아.”

    그대로 나타난 오토바이 한 대가 앞바퀴로 블러드 헌터의 머리를 대차게 갈아 버렸다.

    “크아악!”

    그 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착지한 도현이 중얼거렸다.

    “등신, 두 번이나 당하네. 학습 능력이 없나.”

    상대는 기억도 못 하는 일을 가지고 잔뜩 비꼬았다.

    그와 동시에 남자의 염력에서 풀린 이겸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2분 걸린다며.”

    2분도 되기 전에 도착한 도현이 칭찬해 달란 듯 자랑스레 말했다.

    “응. 너 기다릴까 봐 빨리 왔지.”

    “…….”

    “어때? 좋은 타이밍에 등장했어? 지금은 좀 멀쩡해 보이네.”

    아까는 독에 허덕이더니 지금은 살맛 나 보인다는 뜻인가?

    도현의 큰 손이 이겸의 서늘한 뺨을 덮었다.

    “괜찮아? 아까 많이 놀랐지?”

    “…….”

    답지 않게 따뜻한 손과 다정한 위로였다. 주승태의 일을 말하는 건가. 이겸은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그의 위로를 받아들였다.

    복잡한 머릿속이 조금 진정되는 듯했다.

    도현이 엄지로 볼을 쓰다듬으며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익숙해져야지. 앞으로 그런 일을 수도 없이 겪게 될….”

    “치워, 새끼야.”

    이겸은 그가 닿았던 볼을 벅벅 문질렀다.

    시발, 소름 돋아. 순간 안심했나? 저놈이 왔다고? 쟤가 뭔데? 나는 또, 위로라도 해 주는 줄 알았네. 아니 위로받으면 뭐? 기분이 풀리기라도 할 거야? 아, 짜증 나.

    아까보다 더한 자괴감이 몰려왔다. 이번엔 부끄럽기까지 했다. 몇 번이나 당하고도 서도현의 성격을 몰라? 쟤가 누군가를 위로해 줄 성격이냐고.

    이겸이 진절머리를 치는 동안 남자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일어섰다. 나직한 신음과 함께 도현을 보며 중얼거렸다.

    “…서도현.”

    도현은 발도와 함께 단숨에 튀어 나갔다. 그에 아니 땐 바람이 불고, 마른 나뭇잎이 살짝 흔들릴 정도의 빠른 속도였다.

    “네 놈에게 볼일은 없어.”

    남자가 급하게 손을 뻗었다. 상반신 전체가 크리처화되며 몸을 보다 단단히 만들었고, 뒤쪽으로 검을 조종해 도현을 겨냥했다.

    “서도현! 네 뒤!”

    윤이겸의 고함에도 도현은 시선을 일정하게 두었다.

    상관없어.

    기습 따위. 급소만 아니면 상관없었다. 지금은 빠르게 끝내고 다른 용무를 확인해야 했다.

    아마, 적은 한 명 더 있을 것이다.

    숲 너머 어딘가 몸을 사리고 있을 터이니, 도망가기 전에 얼른 잡아야 했다.

    공중에서 날아온 단검이 옆구리에 꽂혔다. 크리처의 피가 묻어 있는 검이었다. 크리처의 피는 곧 독을 의미했다.

    소량임에도 불구하고 그 농도가 짙어 지독한 환상통을 유발하는 ‘상’ 등급의 피가 있는 반면, ‘하’ 등급의 크리처 피는 대량임에도 단순 어지러움만 유발하기도 한다. 이것저것 다양한 가운데 도현은 ‘상’에도 끄떡없는 정도의 내성이 쌓여 있다.

    그렇게 남자에게 당도한 도현은, 일검에 그를 베어 냈다.

    윤이겸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자신이 남자를 상대로 고전한 게 우스울 정도로 단칼에 숨을 끊었다.

    도현은 검집에 검을 집어넣으며 여상히 말했다.

    “망설이면 죽는 거야.”

    “나는… 네가 올 때까지 버티려고….”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 그래도.”

    그가 옆구리에 꽂힌 검을 빼내었다.

    “공격이야말로 최고의 방어잖아?”

    “아.”

    자신은 단순히 그에게 의지하기 바빠 그 당연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거였나.

    이겸은 문득 도로 위의 탑차를 바라봤다.

    모든 게 끝났다.

    주승태. 이제 주승태를 구하면 되는데 자꾸만 드는 의심이 한 줄기 씨앗을 피어 냈다.

    애써 뒤로하고 탑차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도현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윤이겸.”

    “…왜?”

    “쥐새끼가 하나 더 있어.”

    덜컹. 심장이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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