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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크리처 (Under creature) (48)화 (48/102)
  • #048

    “으아아아아악-! 이, 이이!!!”

    남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눈을 부여잡고 분노를 표해 냈다. 손 틈새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 겸아, 5분 다 돼 가. 리셋할까?

    “아니. 굳혀.”

    - 그래. 굳히고 바로 시작할게.

    굳히고 그 후 5분까지. 또 시뮬이 시작되었다.

    이겸은 탄알을 다 소비한 권총을 내려 두고 단검을 쥐었다.

    “저런 놈에게 당하다니.”

    다른 자는 제 동료의 부상을 한심하게 평가하기만 할 뿐, 나서는 일은 없었다. 이겸으로선 다행이었다. 남자가 고통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공격을 속행하기로 결심했다.

    얼른 달려가 숨통을 끊으려던 찰나, 그가 비척이며 일어섰다. 탄알이 박힌 왼눈은 이미 상처가 아물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치유를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왼눈 주변에서 튀어나온 흉측한 수준으로 시뻘건 붉은 살이 상처를 감싸듯 덮으며 꿈틀거렸다. 크리처의 재생 능력을 이용하기 위해 안면 쪽에 크리처화를 시도하려는 듯싶은데 생각만큼 빠르게 되지 않아 보였다. 그만큼 유효한 공격이었다 이건가.

    “생각이 바뀌었다.”

    “…뭐?”

    “널 죽인다.”

    그게 무슨….

    이겸이 뭐라 말하려 했지만 갑자기 그의 주위로 공간이 어지럽게 찢어졌다. 그리고 그 찢어진 공간, 어두컴컴하고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에서 남자의 손이 불쑥 나타났다.

    화들짝 놀라 피하긴 했지만 볼가에 생채기가 났다.

    ‘무슨 능력이지?’

    공간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건가?

    허공에서 자꾸만 검이 날아오자 피하기에 급급해졌다. 공간을 다룰 수 있다면 뒤도 조심해야 했다. 한눈팔 겨를이 없었다.

    ‘물이 있었다면.’

    물이 있었다면 가볍게 피했을 텐데.

    이겸은 억울함을 느꼈다. 누구는 시뮬을 이용하고, 또 누구는 공간을 다루고, 물이 없으면 쓸 수 없는 제 능력은 한심할 짝이었다. 남궁상하의 트렁크에 생수 묶음이 들어 있었던 것도 같은데…. 지금 상황에서 가져올 수는 없겠지.

    차라리 비라도 내렸으면.

    안타깝게도 오늘은 화창하기 그지없는 날이었다.

    그 와중에도 몇몇 공격을 허용해 팔이고, 다리고, 옆구리고 가느다란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처가 날수록 움직임이 둔해졌다. 잇따라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고, 결국 명치 아래에 칼이 꽂히고 말았다.

    “윽.”

    죽을 만큼 아팠다. 딱 죽을 만큼.

    하지만 남자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단순히 급소를 칼로 찔러 빠르게 숨통을 끊는 게 아니라 어디서, 어떻게 해야 이겸이 더 고통을 느끼는지 알고 있었다. 급소를 피해 공격하고, 상처 부위를 헤집듯 칼을 비틀어 빼냈다.

    “으아악!”

    고통에 숨이 벅찼다. 하늘은 분명 푸른데 사방이 노랗게 보였다.

    - 괜찮아?

    비명을 들은 도현이 물었지만 대답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정신을 잃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게 전부였다.

    “가장 고통스럽게 죽여 주지.”

    “이봐. 죽이지는 마. 알잖아.”

    죽이지는 마? 알아? 뭘? 탑차 쪽에서 외치는 동료의 소리에 이겸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띄워졌다.

    무슨 소리지? 처음부터 날 죽일 작정은 아니었나? 그렇다면 왜….

    “그딴 거 몰라.”

    다만 눈앞의 상대는 분노에 이성을 잃었는지 동료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이겸은 공격을 피하랴, 머리를 굴리랴, 고통을 인내하랴, 허덕이기 바빴다.

    이내 명치 아래 크게 난 상처에서 계속해서 피가 빠져나가자 머리가 지끈거리는 어지러움에 쓰러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눈앞에 칼이 가까워졌다.

    ‘아, 여기까지인가.’

    하지만 괜찮다. 공격 루트는 모두 외워 두었고 리셋되면 반격을….

    “계획과 다르잖아! 멈춰! 다 끝나면 죽이든가 하고 아직은….”

    “그딴 거 모른다니까!”

    이겸을 죽일 기세로 칼을 빼 든 남자에 동료가 급히 그를 말렸다.

    이겸은 고통에 시달리며 뿌예진 시선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눈앞에 찢겨진 공간의 틈이 생겼다. 그 공간에선 칼을 들고 있는 남자의 손이 언뜻 보였다.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을 고통이지만 이겸은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냉정하게 판단했다. 자신이 멈추면 친구가 죽고 만다.

    아프다. 물론 죽을 만큼 아프지만, 딱 죽기 직전이지만. 아무것도 아니다. 조금만 참으면 사라질 상처. 견뎌 내고 상대의 능력과 기술을 파악하는 게 옳았다.

    지금은 그래야만 했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일어난 내분에 잠시간의 시간을 번 이겸은 상처를 부여잡으며 덜덜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일어섰다.

    “독기는 있군.”

    그런 그를 냉담히 평가한 남자가 찢어진 공간 틈으로 제 손을 집어넣었다. 아무것도 없는 찢겨진 공간 속에서 남자의 손이 나오더니 이겸의 상처 부위를 꽈악 움켜쥐었다. 편안한 죽음이 아닌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선사하겠다는 명백한 의도가 담겨져 있었다.

    “크아아악!”

    고문과도 같은 행위였다.

    “이봐! 진짜 그러다 죽는다니까!? 아직은 죽이면…!”

    “윤이겸!!!”

    이겸은 누군가 자신을 부른 소리를 들었다.

    ‘산하 형인가.’

    그렇다기엔 목소리가 좀 더 하이 톤이었다. 누구지, 자주 들어본 목소리는 맞는데….

    “도망가!!!”

    혼미한 눈이 번쩍 뜨였다.

    “…주, 쿨럭. 주승태.”

    분명 주승태였다. 탑차 트럭에 얌전히 피신해 있거나 그도 아니면 도망가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굳이 비집고 나와 고함쳤다.

    “윤이겸! 얼른 도망가라고!!”

    “뭐야 쟨. 언제 나왔어? 얌전히 창고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블러드 헌터가 주승태를 보며 타박했다. 그럼에도 주승태는 개의치 않고 꾸준히 외쳤다.

    “멍청아!! 죽기 싫으면 도망가라고!!!”

    미안하지만 소리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멍청이는 자신이 아니라 주승태였다. 너야말로 죽기 싫으면 도망가라고.

    ‘여태 도망가지 않고 뭐 했어.’

    아, 도망가도 어차피 리셋되나.

    그러고 보니 지금 몇 분 지났더라.

    시간은 상대적인 거라고. 잠을 자거나, 좋아하는 침대에 몸을 눕히고 있으면 5분이 1분처럼 지나가는데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인내하며 몇 초 단위로 합을 겨루는 지금 상황에선 5분이 1시간처럼 흘렀다.

    “하아.”

    벅찬 숨이 흘러나왔다.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와중에 이겸은 불쑥 손가락을 뻗었다. 그 손을 뻗는 작은 행동조차 힘겨워서 나무늘보처럼 아주 느릿하게 움직였다.

    느닷없이 든 생각이다. 만약 남자의 이능이 공간을 가르고 잇는 능력이라면, 현재 이겸과 그의 거리는 이어져 있을 터, 이것을 잘만 이용한다면 승산이 생기지 않을까.

    이겸은 시험 삼아 찢겨진 공간 안으로 팔을 뻗었다. 무언가 손끝에 닿았고 뒤로 물러나는 것이 느껴졌다.

    아릿한 시선으로 남자를 확인했다. 그는 제 볼을 닦아 내고 있었다. 붉은 피가 묻어 나왔다. 이겸의 손에 묻어 있던 피였다.

    거기서 분명한 희망이 피어났다.

    - 5, 4, 3….

    5분의 리밋 시간을 재는 도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 2, 1.

    리셋.

    ***

    “저런 놈에게 당하다니.”

    다른 이가 제 동료의 부상을 한심하게 평가하고 있을 무렵, 이겸은 상처 하나 없이 거뜬히 돌아온 제 몸을 느꼈다.

    그리고 일부러 단검을 쥐고 남자에게 뛰어들었다.

    이내 남자가 비척이며 일어섰고, 중얼거렸다.

    “생각이 바뀌었다.”

    “…뭐?”

    “널 죽인다.”

    여기서 달리던 걸음을 잠깐 멈춰 섰다.

    지금까진 상황이 같다.

    당연하게도 이겸의 주위로 공간이 어지럽게 찢어졌다.

    그리고 남자의 손이 나타났다.

    고개를 뒤로 빼 피한 후, 이전 판에서 기억해 두었던 루트를 유용하게 써먹어 피했다.

    “쥐새끼처럼 잘도 피하는군.”

    처음은 공간 사이로 검을 던졌다. 남자는 공간을 타고 제게 날아오는 검을 가볍게 피했다.

    그걸로 확신했다. 공간이 연결되면 그걸 이용할 수 있는 건 이능을 지닌 남자뿐만이 아니란 걸.

    상대방 역시 이용 가능했다.

    한 가지 더.

    이겸은 칼날을 피해 몸을 숙이며 땅에 무성히 난 잡초를 쥐어뜯어 공간 틈으로 빠르게 집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제 등으로 칼날이 꽂혔지만 확인이 중요했다. 뜯겨 나간 잡초가 공간으로 들어가는 순간을 사진처럼 기억했다. 아까처럼 이겸이 공간을 이용하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남자는 빠르게 연결된 공간을 지웠다.

    그럼 공간 속으로 던져 넣은 잡초는?

    아무 일 없었단 듯 허공에 흩뿌려지게 됐다. 그 장면은 이겸이 사진으로 기억했던 잡초의 수와 동일했다.

    공간에 갇히진 않는구나.

    점점 희망이 커져 갔다. 전투의 승산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 후 이겸은 몇 번이나 다른 방식으로 확인에 확인을 거듭했다. 그로 인해 다섯 번의 기회를 쓰고 나서야 확신을 가졌다.

    남자가 이어 붙인 공간은 타인도 이용이 가능하고, 갑자기 공간이 사라진다거나 그 외의 변수가 있더라도 상처를 입진 않는다. 그저 이곳과 저곳을 연결했던 공간이 사라졌을 뿐, 그 사라짐에 있어 공간 안에 들어 있던 것은 모두 취소 처리가 되는 듯 허공으로 무언가를 하는 행태만 남을 뿐이었다.

    그렇게 공간 사용이 안전하단 걸 확신하고 나서야 이겸은 저 남자를 단숨에 끝장낼 방법을 알아냈다.

    - 이번에도 리셋이야?

    “응. 부탁한다.”

    - 난 거의 30분을 넘게 가는 중인 거네.

    서도현이 장난스레 웃으며 중얼거렸다.

    세상이, 서도현이 정한 기점을 기준으로 모든 것이 5분 전으로 돌아간다. 때문에 리셋을 실행하면 그는 계속해서 5분 전 그 위치에 있는 것이다.

    장장 몇 분 동안 변하지 않는 풍경을 보고 있는 거겠지. 러닝머신을 타는 기분이려나. 지루할 만도 했다.

    “저런 놈에게 당하다니.”

    다른 이가 제 동료의 부상을 한심하게 평가했고, 상처 하나 없는 몸으로 돌아온 이겸은 조용히 독백했다.

    “어. 이번엔 끝장을 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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