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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크리처 (Under creature) (16)화 (16/102)
  • #016

    “…….”

    이겸의 질문에 고요가 가라앉았다. 그 틈새로 풋, 하고 미미한 웃음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안 죽여. 겁먹지 마.”

    “겸이 오빠 생각보다 귀여우시네요.”

    “형! 저도 겸이 형이라 불러도 돼요!?”

    눈매를 비실 접으며 말하는 서도현의 뒤에서 도아와 재우가 능글맞게 한마디씩 거들었다.

    이겸의 하얀 피부에 얕은 홍조가 피어올랐다.

    아 괜히 호들갑 떨었네. 아니 근데 겁먹을 만하지 않나? 서도현한테만 무려 다섯 번을 죽었는데. 생각하니까 빡치네. 아까 누가 웃었지? 서도현? 차재우? 분명 남자 목소리였는데.

    머쓱함에 목뒤를 가볍게 쓸어내리던 이겸이 점차 그라데이션으로 분노를 내뿜기 시작했다.

    그때 서도현이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굳게 잠겨 있는 창고 문을 벌컥 열었다. 그곳에는 헬스장에서나 볼 법한 운동 기구들이 가득 자리 잡고 있었다.

    “산하 형이 운동을 좋아하거든.”

    군대 갔다는 그분?

    도현은 무게 추가 가득 끼워진 덤벨을 가리켰다.

    “한번 들어 볼래?”

    “저렇게 무거운 건 좀.”

    “겸이 형, 저 정도는 서도아도 들 수 있어요!”

    “…도아가?”

    이겸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도아를 쳐다봤다. 다시 얌전히 책상에 파묻혀 숙제를 하던 도아가 고개를 들었다.

    “네. 1차 각성하면 저건 거뜬해요. 겸이 오빠도 가볍게 느껴질걸요. 헌터 테스트는 안 하셨어요?”

    “…도망 나왔어.”

    “네에?”

    도아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이겸의 물음에 달력을 확인한 서도현이 말했다.

    “다음 달 테스트로 예약 잡아 놓을게.”

    “…싫은데.”

    “테스트 크리처들은 엄청 약해. 공략만 알면 쉽게 잡을 수 있어.”

    이겸은 여전히 입술을 꾹 다물었다.

    “다음 달이면 수요일이네요! 저희도 구경 가도 돼요?”

    도현이 아이들을 향해 싱긋 웃었다.

    “괜찮아. 들어와도 돼.”

    개, 돼지도 막 들어오는데 너희라고 못 들어올까. VIP 방에서의 그 섬뜩함과 궤를 달리하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근데 수요일이면, 평일 아니야? 너희 학교 안 가?”

    이겸이 원초적인 질문을 꺼냈다.

    “학교요?”

    “평일이잖아. 학교 가야지.”

    이겸은 마침 그날 공강이었다. 차라리 강의가 있었으면 변명이라도 해 볼걸. 빼도 박도 못하게 테스트실로 끌려가게 생겼다. 아쉬움에 낮게 혀를 찼다.

    재우는 눈을 깜빡이며 슬그머니 손을 들어 의견을 피력했다.

    “겸이 형, 학교 빠지는 게 뭐 어때서요?”

    “학생이 학교를 가야지 무슨 당연한 질문을 해.”

    “아니, 갈 생각이긴 했지만…. 저희는 굳이 학교 안 나와도 돈 잘 벌고 잘만 사는데요?”

    서도아도 재우의 말이 맞는다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숙제하길래 모범생인 줄 알았더만.’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사실 이 짓도 어느 정도 해결책을 찾고 나면 그만둘 작정이었다. 크리처? 목숨이 위험한데 계속할 것 같으냐? 절대 사양이었다.

    그 기간이 조금 늘어날 것 같긴 했지만 언젠가 이 바닥 뜬다, 라는 깊은 신념이 뿌리처럼 박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학업 전념이 필수였다.

    ‘너희도 일찍부터 진로를 정하지 말라고.’

    무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직업이었다. 아직 성인도 안 된 고등학생 애들이 돈에 눈이 멀어 철없이 헌터로 직업을 정했다고 여기는 이겸으로서는 기함할 노릇이었다.

    학교 출석도, 학업에도 제대로 신경 쓰지 않고 있다간 나중에 이 바닥을 벗어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었다.

    “차재우, 서도아. 너희 둘. 앞으로 중요한 일 아니면 웬만해서 학교는 가.”

    “네에? 래터로서 하는 모든 일이 중요한데 어떻게 그래요.”

    “가라면 가는 거지 뭔 말들이 많아.”

    학생이라면 응당 해야 하는 일 아닌가? 뭘 주눅 든 표정이야?

    “부마스터 명령이야. 학교 가.”

    이왕 얻은 권력 이렇게라도 써 보자 싶었다. 이겸이 단호하게 말하자 학생 둘은 그를 좀 말려 보라는 눈빛으로 서도현을 쳐다봤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이는 게 전부였다.

    “부마스터 명령이라잖아. 학교 가.”

    감투를 씌워 줬으면 그에 맞는 대우는 해 줘야지.

    “너무해요! 제가 부마스터일 땐 실컷 부리기만 했으면서!”

    심지어 지금도 부리고 있어! 재우는 자신의 처우가 부당하다며 칭얼거렸다. 이내 다들 들은 척도 안 하자 이겸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겸이 형, 저 진짜 소중한 전력인데 그걸 학교에서 썩히라고요?”

    “무슨 능력인데.”

    재우가 이겸의 눈앞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겸이 눈을 끔벅이며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바라볼 때 재우의 손바닥에서 예쁜 분홍색 꽃이 피어났다.

    “대충 이런 능력이요! 어때요? 완전 멋지죠? 근사하죠?”

    “…학교 가.”

    “네에!?”

    소중한 전력은 무슨. 학교 가서 화단이나 가꿔라.

    “혀엉…!”

    “차재우, 넌 잠깐 나와.”

    그때 서도아가 차재우를 밀치고 이겸의 앞에 서서 장기 자랑 하듯 능력을 선보였다. 순간 사방이 캄캄해지며 어둠이 들이닥쳤다.

    “오빠, 전 공격계예요. 기타계인 차재우와 달리 전투할 때 도움이 돼요.”

    도아의 주장에 이겸은 지그시 그녀를 응시했다. 생긴 건 서도현과 똑 닮아서 하는 짓은 의외로 맹했다. 그래도 부마스터라고 대우는 해 주네.

    “너희는 학생이 학교 빠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학교란 본디 직업과 적성을 찾기 위해 다니는 걸로 저희는 이미 그걸 찾아 진로 활동을….”

    “시끄럽고.”

    이겸은 도아의 말을 일축했다. 진짜 진로라고 생각한다면 여긴 엄연한 회사였고 이겸은 그들의 상사였다. 상사가 까라면 까야지, 어딜.

    “가라면 가.”

    군대 갔다는 분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서도현은 재우에 이어 제 동생까지 전투에 끌어들이고 싶은 걸까. 성인이면 보호자 노릇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래터는 가족이니 뭐니 말만 그럴듯하지 빛 좋은 개살구가 따로 없었다.

    “너희 같은 학교랬지? 내일 등교해서 인증 샷 보내. 확인할 테니까.”

    소파에 가서 털썩 앉은 이겸의 귀에 학생 둘이 속닥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차재우. 너 포토샵 할 줄 알아? 사진 조작이나 그런 거.”

    “어… 배운 적은 없는데. 너는?”

    “못 하니까 너한테 물었지. 맨날 컴퓨터만 붙잡고 있더니 그것도 모르고 지금까지 대체 뭘 한 거야?”

    “뭐!? 그야 일했지! 너 부마스터가 얼마나 바쁜지 몰라? 래터 담당 CA 지역 확인하고 스케줄 짜야 한다고!”

    이겸은 여유롭게 그들의 대화를 감청했다. 마치 소머즈라도 된 것처럼 그들의 속닥임이 빼곡하게 들려왔다.

    ‘1차 각성 때문인가? 이거 하난 좋네.’

    그나저나 CA 지역 확인하고 스케줄 짜기? 부마스터였던 재우가 했었다면,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인가. 순전 서도현 때문에 래터에 오긴 했지만, 이왕 온 거 어느 정도 일은 해야 할 것 같았다.

    서도아는 이내 안 되겠는지 자신의 친오빠인 서도현에게 달라붙었다.

    “오빠, 우리 신입 또 안 구해? 얼른 부마스터 바꾸자.”

    “글쎄, 당분간은 생각 없는데.”

    부마스터가 버젓이 앞에 있는데 감히 반역을 논하네. 어느새 권력에 맛 들인 이겸이 도아를 향해 말했다.

    “서도아, 넌 숙제 다 하고 나한테 검사 받아.”

    “…그렇게까지 한다고?”

    “바보 서도아. 그러게 1절만 해야지.”

    “차재우 너도. 괜히 도아 숙제 베낄 생각 하지 말고.”

    “…네.”

    옆에서 도아를 비웃던 재우가 우울한 몸짓으로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왜 부마스터였을 때 권력을 갖지 못했을까, 지난 과거를 뉘우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얌전히 숙제하러 가는 둘을 본 서도현이 만족스레 웃었다.

    “이번 부마스터는 잘 뽑은 것 같아.”

    “도현이 혀엉? 이번 부마스터요? 저번은 별로였나요?”

    “차재우 조용히 해. 나 숙제하고 있잖아. 시끄럽게 떠들지 마.”

    도아에게 치이기만 하는 차재우로 이겸은 어느 정도 이곳의 서열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재우가 맨 아래구나.

    할 일이 끝난 이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래. 그럼 테스트날인 한 달 뒤에 보는 걸로 하고, 오늘 할 거 없으면 난 가 봐도 되지?”

    “무슨 소리야.”

    도현이 뒤의 빨간 펜으로 특정 날짜를 표시한 달력을 가리켰다.

    7, 10, 13, 14, 22, 25, 30?

    “저 날짜는 시간 비워 놔.”

    CA 지역에 크리처가 뜨는 날짜 아닌가?

    “나 크리처 안 잡는다니까?”

    “알겠으니까 일단 나와.”

    왜인지 불안감이 엄습했다.

    ***

    일단 나오긴 했는데…. 차재우와 서도아는 어디 가고, 왜 서도현밖에 없는 거지?

    이겸은 열고 들어왔던 문 그대로 나가기 위해 등을 돌렸다. 그때 어깨에 묵직한 팔이 얹혔다.

    “출발할까.”

    소름이 끼쳤다.

    “치워.”

    “신체 적응은 끝냈어?”

    도현은 까칠한 말에도 개의치 않고 되물어 왔다.

    “그럭저럭.”

    매일 아침 산책 겸 운동을 나간다. 이전과 다르게 장시간 달리기를 해도 쉽게 지치지 않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몸이 개운했다.

    덤벨까지 들어 보진 못했는데 필시 거뜬하게 들 수 있을 거다.

    도현이 자신의 차에 올라타고 이겸은 조수석이 아닌 뒷좌석에 올랐다.

    “왜, 옆에 안 앉고.”

    “뭐 좋다고 네 옆에 앉아. 다시 말하지만 나는 크리처보다 네 능력 사용에 대해….”

    “벨트 매. 출발할게.”

    “…….”

    서도현은 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러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도 이겸이 래터에 온 대가로 도현은 무분별한 반복을 자제하고, 능력 사용 전 꼬박꼬박 언질을 주고 있었다. 그것만 해도 삶의 질이 상승했다.

    나직이 눈매를 늘어뜨린 이겸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 어딘데?”

    인가가 한적한 장소. 도현은 자연스레 팔을 뻗어 이겸의 손에 단검을 쥐여 주었다.

    “지금부터 크리처를 잡을 거야.”

    “……?”

    “너와 나. 둘이서.”

    도현이 마주 보며 예쁘게 웃었다.

    “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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