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진짜 미치겠다. 정우는 손가락에 닿아오는 느낌에 미간을 확 구기며 손을 떼어냈다. 아쉬운 건지 입술을 앞으로 내미는 그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보였다. 그래도 계속해서 수위 조절이 되지 않는 말을 하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숙소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하진이 무슨 말을 하지는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정우는 문이 열리자마자 차에서 내려 하진의 손을 잡아주었다.
“다 왔어?”
“네. 넘어지지 말고 잘 잡아요.”
“응…….”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비틀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귀여워 그만 웃어버린 정우가 하진의 허리를 더 꽉 안으며 부축했다. 차에서 내리는 멤버들을 보니 그 모습들도 하진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야, 해성아! 해성아, 내 말 들려? 나 누구야, 어?”
“지창쓰!”
“그래, 술이 좋지. 내가 말을 말아야지. 넘어지지 말고 잡아.”
“네!”
정우는 지창과 훈이 해성과 영우를 각각 부축하는 것을 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지하로 내려와 있어 지체하지 않고 올라갈 수 있었다. 장신의 남자 일곱 명이 한 번에 타자 제법 묵직하게 꽉 찬 느낌이 났다.
“어휴, 무거워. 분명 말랐는데 얘 왜 이렇게 무거워.”
“근육몬!”
“말귀는 또 다 알아듣네. 그래, 너 근육몬이니까 자자.”
“네!”
하이톤으로 대답하는 해성을 보고 웃은 정우가 하진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앉혔다. 앉자마자 옆으로 추욱 기울어지는 몸에 놀란 정우가 얼른 하진의 옆으로 앉아 몸을 잡아주었다. 그대로 정우의 품에 얼굴을 묻은 하진이 부비부비 고개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좋은 냄새…….”
“누워요.”
“정우 냄새… 정우한테만 나는 냄새……. 좋아.”
늘 위축되어 있는 하진을 보다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니 마음이 이상했다. 술에 취해 달라진 걸까. 아니, 하진은 원래 이렇게 밝았었다. 달라진 것은 지금이 아니라 평소 지나치게 조용해지고, 위축되어 제 눈치를 보는 바로 그 모습이었다.
“피곤할 텐데 누워요.”
“싫어…….”
“형.”
“숙소 가면 해준다고 했잖아…….”
“이렇게 취했으면서 그걸 기억해요?”
“나 안 취했는데…….”
품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든 하진이 정우를 보며 입술을 길게 끌어올렸다. 취해도 탁해지지 않는 예쁜 눈동자가 사라지며 부드럽게 올라가는 입술을 본 정우의 심장이 아프게 뛰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보네요. 형 그렇게 웃는 거.”
언제부터인가 하진은 잘 웃지 않았다. 웃는다고 해도 어색해지고 싶지 않아 애써 웃음을 짓거나, 웃지 않으면 이상해질 것 같아 분위기를 보고 웃는 게 전부였다. 웃어야 하니까 웃는 그런 얼굴이 아니라, 그냥 웃음이 나와서 웃는 얼굴을 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낯설다.”
“왜…?”
“우는 것만 계속 봐서 그런가.”
“…울리지 마…….”
“…….”
“울면… 아프단 말이야……. 머리도 아프고, 여기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다 아파. 기분도 아파져서… 계속 생각나고 또 생각나고 또 생각나.”
가슴 위를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린 하진이 정우의 가슴 위로 손을 대었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박동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또다시 입가로 웃음이 번졌다. 정우는 웃는 하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우 너는 안 아프구나.”
“어떻게 알아요.”
“난 알아……. 아프면 이렇게 안 뛰거든.”
“…취했으면 잠이나 자요. 내일 피곤하다고 하지 말고.”
감고 있던 눈을 뜬 하진이 일어나는 정우의 손을 얼른 잡았다. 정우는 제 손을 잡고 눈을 동그랗게 뜬 하진을 내려 보았다.
“다음에 해요. 형 취했으니까 다음에.”
숙소에 와서 섹스할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지금 이대로 하진과 섹스하고 싶지는 않았다. 제 눈치를 보고, 늘 전보다 다운된 목소리와 분위기로 말하던 하진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내일 아침이 되면, 저 술기운이 사라지면 하진은 다시 그렇게 돌아갈 것이었다. 그걸 생각하면, 천진한 얼굴로 저를 보는 하진에게 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같이 자는 것도… 안 돼?”
잡은 손을 놓고 한 걸음 더 움직이자 이번에는 옷자락을 당기는 게 느껴졌다. 정우는 다시 그런 하진을 돌아보았다.
“여기서 같이 자자, 응?”
제가 앉은 옆 빈자리를 손으로 팡팡 두드린 하진이 또 전처럼 웃었다. 걱정이라고는 곡을 다 외울 수 있을까, 안무를 다 딸 수 있을까 밖에 없던 그때처럼. 정우는 답답해지는 마음에 작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그제야 활짝 웃은 하진이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자고 왜 일어나요?”
“칫솔!”
“칫솔? 아, 네. 가요, 그럼.”
양차질을 해야 한다는 하진의 말을 알아들은 정우가 그대로 욕실까지 부축해 데려다주었다. 방에서 넘어지는 것도 위험하지만, 욕실에서 넘어지는 것은 더더욱 위험하기에 하진이 양치질을 하고, 옷을 다 적시며 세수를 하는 동안에도 단단히 하진을 잡고 서 있어야 했다.
“뭐예요. 다 젖었잖아요.”
“왜 그러지…….”
젖은 옷을 보고 시무룩해지는 그 얼굴에 웃은 정우가 하진을 다시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침대에 앉힌 뒤, 갈아입을 편한 티셔츠를 꺼내 옆에 놓았다.
“갈아입고 자요. 씻고 올 테니까.”
“너 오면… 잘 거야. 같이 자기로 했잖아…….”
“먼저 자도 같이 잘 테니까 자고 있어요.”
“…응.”
못내 서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하진을 본 정우가 방문을 닫아주고 욕실로 향했다. 입고 있던 옷을 전부 벗고 평소보다 조금 더 길게 몸을 씻어낸 정우가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아무렇게나 문질렀다. 이쯤 됐으면 잠들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정우는 물이 떨어지지 않을 때까지 머리칼을 털어내고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
예상대로 하진은 잠이 들어 있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다행이라는 것이었다. 정우는 하진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누워 잠든 옆으로 젖은 옷이 놓인 게 보였다. 그 옷을 들어 올린 정우가 한쪽으로 치우고, 얇은 이불을 하진의 몸 위로 덮어주었다.
저 역시 하진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하진이 저에게 위축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저 역시 하진에게 날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상처 받게 말하고, 귀찮다는 듯 밀어냈다. 틈을 주지 않고, 절벽으로 밀어 세웠다. 그리고 떨어지기 직전에 한 번씩 손을 잡아 품에 닿을 만큼 가까이 당겼다.
저를 밀어 떨어뜨리려던 것도 잊고, 품에 가까이 닿을 때면 하진은 늘 기대가 담긴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도대체 그 기대와 희망은 어디서 계속 나오는 걸까 궁금할 정도로 끈질겼다.
「미안한데, 나 지금도 제정신 아니야.」
정우는 지금도 제정신이 아니라며 덤덤하게 말하던 하진을 떠올렸다. 하진에게 충격받은 몇 번의 순간 중 하나였다.
「그때랑 별로 달라진 거 없어. 네가 날 봐주고, 화도 안 내고, 같이 있어 주니까 그럴 필요가 없는 것뿐이지.」
봐주고, 화를 내지 않고, 같이 있어 준다는 것은 뭘까. 사랑은 그것만 해주면 되는 걸까? 사실 하진이 바라는 것은 너무 사소해서 어이가 없는 것들이었다. 차라리 거창한 것을 원한다면 나을 텐데, 하진은 무척 사소한 것들을 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것들의 공통점은 ‘둘이 같이’ 한다는 것이었다.
전이라면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고 무시해버렸을 텐데 확실히 생각이 많아졌다. 생각이 많아지면, 행동이 소극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먼저 행동을 저지르던 때와는 기분이 달랐다.
“…….”
제가 하진이었다면 어땠을까. 애초에 그런 사랑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아니, 사랑의 시작은 너무나 갑자기 오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작된다고 하니 저도 사랑하게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오래 이런 말과 행동을 겪으면서까지 기대를 품고, 마음을 간직하지는 못했을 것 같았다. 진작 나가떨어져 원망하고, 사랑했던 기억마저 퇴색해 후회로 변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하진은 달랐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
잠든 하진의 힘이 풀린 그 부드러운 얼굴에 한참이나 시선을 맞추던 정우가 일어나 불을 껐다. 금세 어둠으로 뒤덮이자 비로소 마음이 편해졌다. 진작 불을 끌 걸 그랬다. 들어오자마자 껐다면, 적어도 이런 낯설고 어색한 감상에 젖지는 않았을 텐데. 정우는 제 침대에 올라 벽을 보고 누웠다. 그리고 잠이 묻지 않은 눈을 억지로 감았다.
「같이 자는 것도… 안 돼?」
애처로울 만큼 간절하던 얼굴. 옷자락을 쥐고 당기던 미약한 힘. 정우는 깊게 숨을 내쉬며 더 깊게 눈을 감았다. 하지만 한 번 맺혀버린 낯설고 진지한 생각들을 내내 떨치지 못했다.
***
늦잠을 잔 하진이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났다.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오늘이 쉬는 날이라는 것이었다. 오후가 되어도 전혀 회복될 것 같지 않은 상태였다. 하진은 무겁게 아픈 머리를 꾹 누르다가 고개를 돌려 정우의 침대를 바라보았다.
“…….”
아직 자는 정우를 가만히 보던 하진이 무언가를 떠올렸다. 다른 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멤버들과 갔던 가게 화장실에서 정우와 키스하고, 또 숙소에 와서 같이 자자고 한 것은 떠올랐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짧은 기억이지만, 꽤 선명한 두 순간이었다.
“…같이 잔다고 했으면서…….”
씻고 올 테니 먼저 자고 있으라던 정우의 말도 떠올랐다. 하진은 제 옆이 아니라 공간을 지나 다른 곳에 있는 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연애해 줄게. 자주기는 할게. 노력해 줄게. 말 들어주려고 해볼게. 해달라는 거 다 해주는데 왜 자꾸 울어. 정우는 늘 그런 식으로 말했다. 그 모든 말 안에는 ‘정우의 노력’이 들어가 있었다. 하고 싶지는 않지만, 너를 위해서 한 번 해볼게. 노력할게. 알면서도 하진은 그런 정우가 고마웠다. 노력이라도 해주는 게 어디인가 싶기 때문이었다.
기형적인 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가 백 번을 다가가도, 정우가 아량을 베풀어 한 번 팔을 벌려야 안길 수 있는 그런 관계였다. 저는 정우의 아량과 노력이 없으면, 그 무엇도 성립되지 않는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자도 같이 잘 테니까 자고 있어요.」
달래기 위한 말이었을 거라는 것을 알고, 이해하면서도 서운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가짜라는 것도 알고, 이름뿐인 연인이라는 관계도 정우의 아량과 배려, 노력이 있기에 이어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진은 다 알면서도 자꾸만 기대에 넘실대는 마음을 접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 번쯤은, 정말 한 번쯤은 정우도 흔들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또 가지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버티기가 힘들기 때문이었다.
“…….”
눈을 떴을 때, 정우가 옆에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아주 행복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하진은 제 침대와 정우의 침대 사이에 있는 공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이 방에서 같이 지낸 뒤부터 늘 저만큼의 거리가 정우와 저 사이에 존재했다. 붙이려고 해도 떨어지고, 같이 있어도 사이가 벌어졌다. 하진은 그 거리감이 싫어 침대에서 내려가 한걸음에 그 거리를 넘어섰다. 그리고 그 기척에 눈을 뜨는 정우와 눈을 맞추며 침대에 살짝 앉았다.
“일어났어? 더 자도 돼. 같이 잘래?”
“술은 다 깼어요?”
“…안 깬 것 같아?”
“안 하던 말 하니까.”
정우는 몸을 일으켜 하진과 마주 앉았다. 하진이 그런 정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우야. 나 하나만 물어볼게.”
“네.”
저를 바라보지 않는 정우를 본 하진이 흔들리는 마음을 꽉 움켜쥐었다.
“…언제까지 나랑 연애해 줄 수 있어?”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평생 해달라고 하면… 그럴 수도 있어?”
“진짜 연애하는 사람들도 평생이라는 말 안 하잖아요, 요즘.”
아침이 다 되어서야 잠이 든 탓에 피곤이 몰리고,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정우는 예민하게 곤두선 신경으로 아무렇게나 대답하다가 아차 싶어 하진을 바라보았다.
“내 말은, 그게.”
“…….”
진짜 연애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미친 소리가 튀어나와 버렸다. 정우는 가만히 저를 보는 하진의 얼굴에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추락했다. 말실수를 하는 순간은 늘 사라지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
“형, 내 말은 그러니까…….”
“…괜찮아. 가짜인 거 나도 아는데 뭘.”
“…….”
“더 자. 난 좀 씻어야겠다.”
눈동자에 머물던 빛이 사라진 것 같았다. 그대로 일어나 조용히 갈아입을 옷을 꺼내 방을 나가는 하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우가 닫히는 문을 보며 눈을 깊게 내리감았다. 그리고 침대 위를 주먹으로 화풀이하듯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