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85화 (85/122)

#85

내내 일본어 가사를 보면서 달달 외운 덕분에 녹음을 잘 마칠 수 있었다. 그 준비가 막바지에 달하자 한국 미니 앨범 준비도 시작되었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연습에 공백기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바빴다.

“와, 이게 얼마 만에 마시는 술이야. 아, 확 감긴다.”

얼마나 고된 연습을 했는지 세 끼를 먹고 간식까지 고칼로리로 먹는데도 살이 쭉쭉 빠졌다. 그 덕분에 공백기에도 관리 잘하는 아이돌 1위로 뽑혀 칭찬을 받았지만, 그래도 힘든 것은 힘든 것이었다.

이렇게 다 같이 모여 맥주 한잔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꽤 오랜만이었다. 물론 이야기야 연습실에서도 하고 숙소에서도 내내 하지만, 따로 밖에서 연습이나 일 얘기가 아니라 그냥 아무 이야기나 할 있는 기회는 사실 거의 없었다.

“아, 우리 송 리더님, 얼굴 완전 샤프해졌어요. 조각이야, 조각. 피부는 왜 이렇게 좋아요?”

“야, 형은 진짜 부지런히 관리하잖아. 본판이 되는데 거기에 관리까지 열심히 하니까 당연히 좋지. 우린 로션 하나 문지르고 끝내니까 이 모양인 거야.”

“하진이랑 정우도 뭐 별로 안 바르던데?”

“쟤들은 본판이… 아, 말할 필요도 없는 걸 묻고 앉아 있네. 조해성 당장 일어나서 화장실 거울 보고 온다, 실시!”

“실시!”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던 해성이 그대로 영우에게 몸을 돌려 장난스럽게 턱을 잡았다.

“이럴 줄 알았냐?”

“아, 미친 손에서 프레첼 냄새나.”

“단짠단짠 고급지기만 한데.”

메인 안주가 나오기 전 기본으로 나온 나초와 프레첼을 먹던 하진이 해성과 영우를 보고 소리 내어 웃었다. 늘 느끼는 거지만, 해성과 영우가 있으면 평생 웃으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편안하고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게 해 주는 형들이었다.

“아, 여행 가고 싶다. 방콕 좋았는데.”

안주가 나오기 전 맥주를 다 비운 해성이 턱을 괴며 감상에 빠져들었다. 하진은 해성의 말에 방콕을 떠올렸다.

“…….”

방콕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당연히 정우와 내내 방에서 섹스했던 것이었다. 리허설을 하고 돌아와 다음 날 아침까지 정우와 셀 수도 없이 내내 섹스했었다. 대충 몇 번이나 했는지 짐작해보려고 해도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정우의 손만 스쳐도 사정했던 것까지 치면 정말 열 번도 넘게 사정했을 것이었다.

“…….”

그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섹스한 적이 없었다. 정우는 늘 그랬던 것처럼 하진이 먼저 손을 대지 않으면, 먼저 잘 닿아오지 않았다. 너무 바빠 같은 방을 쓰면서도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드물고, 어쩐지 사이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 자꾸 신경이 쓰였다. 하진은 반쯤 마신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시며 옆에 앉은 정우를 흘끔 바라보았다.

“…….”

“…….”

어둑한 조명 아래에서 눈이 마주치자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먼저 시선을 앞으로 한 하진이 연거푸 맥주를 들이켰다. 마시고 또 마셔도 자꾸만 목이 마르고, 또 말랐다.

“하진이 오늘 잘 마시네?”

“아, 저도 오늘 술 받는 날인가 봐요.”

“그래, 그럴 때가 있다니까.”

들어오자마자 주문한 여러 개의 안주가 테이블 위로 세팅되었다. 보글보글 끓는 어묵탕부터 넓적한 당면이 든 떡볶이, 과카몰리와 연어 외에도 잔뜩 나온 안주들로 그 큰 테이블 위가 꽉 찼다. 하진은 어묵을 한 꼬치 가져와 호오 불어 한 입을 깨물었다. 부드럽고 짭짤한 맛에 저절로 술이 더 당겼다.

“자, 술 당기는 우리 하진이가 제일 맛있게 말린 거 마셔라! 일명 해성주.”

“와, 진짜 마시기 싫은 이름이다.”

고개를 젓는 영우를 보며 똑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해성이 하진에게 잔을 내밀었다. 웃으며 잔을 받은 하진이 기다렸다가 멤버들과 다 같이 건배했다.

오늘 정말 술이 잘 받는 날인 모양이었다. 한 잔 마시고 또 한 잔을 마셔도 자꾸만 목이 말랐다. 하진은 형들이 돌아가며 주는 술을 꿀떡꿀떡 잘도 마셨다.

“괜찮겠어요? 천천히 마셔요.”

보다 못한 정우가 또다시 잔을 들고 마시려는 하진의 잔을 잡았다. 하진이 그런 정우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지었다.

“괜찮아. 나 하나도 안 취했어. 오늘 완전 잘 마시는 날이라니까.”

안 취했다더니 말하는 게 평소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살짝 끝이 늘어지기도 하고, 말투 자체도 조금 달랐다. 정우는 어쩔 수 없이 잡고 있던 잔을 놓아주었다. 눈을 접으며 환히 웃은 하진이 단숨에 잔을 비웠다.

“정우 너는 오늘 취하지도 않네?”

“저 원래 술 세잖아요.”

“더 세진 것 같아. 오늘 꽤 빠르게 도는데 멀쩡한 것 봐.”

“그렇게 멀쩡하지는 않아요. 좀 멍하기는 해요.”

“갓정우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

엄지를 치켜들며 소주병을 든 해성을 향해 잔을 내민 정우가 옆에서 일어나는 하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술잔이 옆으로 움직이며 정우의 손 위로 소주가 흘러내렸지만, 정우는 그쪽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비틀대며 일어나는 하진을 붙들었다.

“어디 가게요?”

“화장실…….”

끝이 길게 늘어지고 말이 입속에 고여 바깥으로 잘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정우는 하진을 단단히 붙든 채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제가 같이 갔다 올게요.”

“그래, 그래. 깡하진 한 번에 훅 갔네. 조심해서 다녀와.”

“네.”

정우는 하진을 부축한 채 방을 나섰다. 그리고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타이밍이 좋았던 건지 화장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진이 비틀대며 세면대로 가 물을 세게 틀었다.

“너무 더워……. 얼굴도 뜨겁고, 귀도 뜨겁고…….”

“…….”

“세수해야지…….”

소매를 걷지도 않고 차가운 물에 손을 확 넣는 하진을 본 정우가 얼른 물을 잠갔다. 하진이 나오지 않는 수도꼭지를 손으로 톡톡 건드리다가 정우를 돌아보았다.

“안 나와…….”

“…젖었잖아요.”

“물 안 나와, 정우야…….”

페이퍼타올을 몇 장 뽑은 정우가 젖은 하진의 손과 소매를 닦아주었다. 그런 정우를 빤히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하진이 그대로 손을 빼내어 정우의 목에 팔을 둘렀다.

“형.”

“아까… 형이 방콕 갔던 거… 얘기했잖아…….”

“…….”

“너는 무슨 생각 했어?”

목소리가 유난히 달콤했다. 술에 취해 그런 걸까. 길게 늘어지는 발음도 그렇고, 더 나긋나긋하게 닿아오는 목소리가 간지러웠다.

“…….”

솔직히 방콕이라는 말만 들어도 떠오르는 것은 하나였다. 공연을 하러 가기는 했지만, 공연보다 더 오랜 시간 했던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정문혁을 만나러 가겠다는 하진을 가지 못하게 했고, 그대로 그 시간부터 새벽까지 몇 번이고 섹스했었다. 깊은 곳을 짓누를 때마다 자지러지던 민감한 몸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중에는 유두만 살짝 집고 돌려도 말간 액을 쏟아내며 느끼던 야한 얼굴과 숨소리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정우 너랑 섹스한 거 생각했어…….”

“…….”

“너무너무 힘든데… 너무너무 좋았어.”

“…….”

“생각만 해도 간지러워……. 또 하고 싶어…….”

“취했어요, 형. 여기 숙소도 아니고.”

당장이라도 저 칸 안으로 들어가 원하는 대로 잔뜩 해버리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언제 누가 들어올지 모르는 화장실이고, 또 멤버들과 함께 온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섹스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랑… 이제 하기 싫어?”

“그게 아니라.”

“…내가 해달라고 하면…… 나 불쌍해서… 해줬잖아……. 이제 안 그래?”

불쌍해서, 라는 말이 마음에 탁 걸렸다. 정우는 여전히 제 목에 팔을 두른 채 눈을 맞추는 하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또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 이제… 안 불쌍해?”

“착각하지 말아요. 형 불쌍해서 한 거 아니니까.”

“그럼… 나랑 섹스해…….”

“정신 좀 차려 봐요. 여기 밖이라고. 형들 기다린다구요.”

“…키스해 줘…….”

“…….”

“제발…….”

울 것 같은 눈을 감은 하진이 그대로 정우의 입술을 머금었다. 뜨거운 혀가 입술 사이로 빼꼼 나와 정우의 입술을 핥으며, 들어가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밀어내려고 어깨를 잡았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정우는 시선을 내리깔아 눈을 맞추며 그 뜨거운 혀끝을 문질러주었다. 마주 닿아 문질리는 순간 하진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좋아…….”

하진은 계속 좋다고 말했다. 속삭이는 것처럼 숨에 섞인 소리를 숨기지 않았다. 정우는 한참이나 그 혀끝을 문지르고, 빨아주었다. 그러다가 결국, 서로의 혀를 집어삼키며 탐닉했다.

“하아…….”

그때 문밖에서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정우는 얼른 하진을 떼어냈다. 엉켜 있던 혀가 풀리며 혀끝으로 타액이 길게 늘어지다 끊겼다. 정우가 얼른 그 젖은 입술을 손으로 문질러 닦아주었다.

“가요.”

정우가 문을 열자 한 중년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먼저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린 정우가 하진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왔다. 하진이 비틀대면서도 정우를 벽으로 밀며 몸을 기대어 왔다.

“키스 또… 응?”

“형.”

“정우야……. 나 키스… 응? 혀 문질러 줘.”

이대로 멤버들 앞에 데리고 가는 것도 문제였다. 정우는 하진의 어깨를 꽉 잡아 조용한 복도 벽으로 밀쳐 세웠다. 그리고 눈을 맞췄다.

“정신 차려요.”

“…….”

“숙소 가서 형이 해달라는 거 다 해줄 테니까 조용히 해요.”

“응…….”

“키스고 섹스고 한 번만 더 말하면 숙소 가서 안 해줄 거야. 알았어요?”

“…으응.”

온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자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정우는 얼른 하진을 데리고 멤버들이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다른 멤버들도 술을 마실 만큼 마셔 꽤 취한 것처럼 보였다. 지금이라면 하진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부부 오셨다!”

“부부! 부부!”

정우와 하진이 같이 들어오는 것을 본 영우와 해성이 두 손을 번쩍 들어 환영회라도 해주는 듯 크게 부부를 외쳤다. 그런 영우와 해성을 보고 웃은 정우가 눈을 끔쩍이는 하진을 자리에 잘 앉혀주었다. 계속 혀끝이 닿고 뒤엉켰던 입속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 자리에서라도 박고 싶을 만큼 마음이 급했다.

술자리는 한 시간 정도 더 이어졌다. 더 마시지 말라고 하는데도 하진은 기어이 술을 몇 잔 더 마셨다. 차라리 더 취하면, 이상한 말을 형들 앞에서 하지 않고 잠들지 않을까 싶어 종국에는 정우도 하진을 저지하지 않았다.

결국, 다른 멤버들까지 멍하니 취했을 때 지창과 훈이 데리러 왔다. 혼자 걷는 인규를 제외하고 지창은 해성을, 훈이는 영우를 부축하고 나갔다. 정우는 제일 뒤에서 하진을 데리고 밴으로 향했다.

“숙소… 가는 거야?”

“네.”

“빨리 가고 싶어…….”

“가까우니까 금방 갈 거예요. 가서 자요.”

“싫어…….”

“…….”

“해준다고 했잖아…….”

더 취해서 잊었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우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하진을 달랬다. 그리고 밴으로 먼저 태운 뒤에 옆으로 올라앉았다.

“어떻게 정우 너만 살아남았어? 서바이벌이야?”

앞으로 탄 지창이 정우 빼고 전멸한 뒤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정우가 그런 지창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그러게요. 빨리 마셔서 그런 것 같아요.”

“보나 마나 조해성이랑 이영우가 미친 듯이 돌렸겠지. 술도 제일 약한 것들이 꼭 잘 마시는 척하다가 먼저 취하더라. 정우 네가 고생이 많다.”

“아니에요.”

차가 움직이자 지창이 앞으로 몸을 돌렸다. 하진이 고개를 앞으로 꾸벅 기울이다가 잠에서 깨어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야……. 아직 숙소 아니야?”

“쉿.”

앞까지 들릴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하진에게 몸을 기울인 정우가 그 입을 살짝 손으로 막았다. 하진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살짝 혀를 내밀어 정우의 손가락을 핥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