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38화 (38/122)

#38

숙소로 가는 밴 안은 조용했다. 고된 PT에 시달린 해성과 영우가 뻗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진은 내내 신곡 가이드를 돌려 들었다. 곡과 친해지려면 일단 무조건 많이 듣는 게 가장 좋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

일부러 창 쪽을 보면서 곡을 듣던 하진은 짙게 선팅이 된 창으로 정우의 형체가 아른거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멤버들은 모르겠지만, 아까 운동을 하던 정우와 눈이 마주친 이후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이렇게 이동을 할 때 서로 장난을 치기도 하고, 신곡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어 아쉬웠다.

이렇게 될 줄 몰랐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바보 같지만 정말 몰랐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진은 정말 몰랐다. 정우를 좋아하는 게 이렇게 큰 파장을 일으킬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어느 순간 정우를 보면 떨리기 시작했고, 아무렇지도 않게 나누던 스킨십에 의미가 생겨버린 순간에도 혼자만 가지는 감정이 무슨 힘이 있나 싶었다. 그렇게 쉽게 들킬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해본 적 없기 때문이었다.

“…….”

물론 그 마음이 지지받을 수 없는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대놓고 들키기라도 하면, 팀이 무너질 수 있는 커다란 위험 요소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유세주. 유세주가 그랬었다. 남자와 스킨십을 하는 사진이 찍혔고, 인터넷에 뿌려졌다. 해명을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불신이고, 조롱이었다. 사람들은 유세주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하진 역시 몇 년 전 유세주의 그룹이 정점을 찍었을 때 터진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도 사람들은 유세주의 이름이 나오면 그 멤버랑 사귄 그 게이? 라는 말부터 하고는 했다. 낙인이라는 건 무서운 것이었다. 얼굴과 이름이 알려진 연예인에게는 더 그랬다. 다음 기회 같은 것은 주지 않은 채, 쉽게 판단하고 조롱했다.

“…….”

곡이 끝나고 또다시 반복해 나오기 시작했다. 틀어 놓고 들으려고는 하는데 전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고 나니 후회가 됐다. 내가 그때 그러지 않았다면,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냥 연습생이 되지 말았더라면, 어느 시점을 떠올려도 후회뿐이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제가 존재하는 것 자체를 부정해 버릴 것 같아 생각하는 것을 관두었다.

“아, 졸려.”

“형 진짜 피곤해 보여요.”

“나 진짜 죽겠어. 아직도 다리가 막 후들거려.”

숙소 지하 주차장에 내린 해성이 그대로 하진을 뒤에서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정우가 늘 하는 것처럼 하진의 어깨에 얼굴을 푹 묻었다. 하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해성의 손등을 장난스럽게 두드렸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떨리지도 않고, 긴장이 되지도 않았다. 그저 해성이 진짜 피곤한 것 같아 조금 걱정이 될 뿐이었다.

이렇게 다른 거구나. 이런 닿음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거였구나. 꼭 몰랐던 것처럼 새롭게 느껴지는 생각들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진은 숙소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내내 휴대폰만 보는 정우를 흘끗 바라보았다. 이대로 내내 눈이 마주치는 일이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 졸리더니 갑자기 또 배고파.”

문이 열리자마자 제일 먼저 숙소 안으로 들어간 해성이 냉장고를 열고 헐 소리를 내며 차례로 들어오는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하진은 해성의 넋이 나간 얼굴에 그쪽으로 다가가 냉장고 안을 바라보았다. 안에는 샐러드 팩과 단백질 셰이크, 탄산수 같은 다이어트에 좋은 것들이 꽉 채워져 있었다.

“이영우랑 조해성을 위한 식단이라고 경호가 특별히 신경 썼어. 오늘부터 저녁은 성수기 대비 식단으로 들어가고, 싹 비운 인증 샷 보내라고 하던데? 힘들 내라.”

지창이 해성의 어깨를 두드리며 씩 웃었다. 해성은 세상을 잃은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얼굴을 보고 웃은 하진이 겉옷을 벗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안에서는 이미 정우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오늘부터 저녁은 성수기 대비 식단이래. 며칠 엄청 배고프겠다.”

하진은 옷걸이에 겉옷을 걸며 정우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아무리 어색함이 당연한 관계가 되었다지만, 정말 최악의 상황을 만들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연습실에서 부딪친 뒤로 거의 한마디도 나누지 않은 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

“적응되겠죠, 뭐.”

“전에는 하도 배고파서 다음 날 점심 서로 많이 먹겠다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점심이라도 많이 먹어놔야 저녁에 버틸 수 있다고. 그때 진짜 많이 웃었는데.”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부드럽지는 않지만, 삐딱한 목소리도 아니었다. 하진은 작게 숨을 뱉고 용기를 내어 그런 정우를 바라보며 섰다.

“…네 마음 알아. 내가 원망스러울 거야. 나 때문에 다 망칠지도 모른다는 생각 드는 것도 이해해. 왜 안 그러겠어……. 왜 하필 너인지 그것도 싫을 거고, 내가 남자라는 것도 불쾌할 거고, 노력한다고 하면서…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거야. 나도 알아. 네 맘 알아.”

정우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었다. 한 번만 더 믿어달라고, 정말 걱정하는 일 없게 하겠다고 꼭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말할 틈도 없었고, 정우가 저의 말은 다시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아 쉽게 입을 뗄 수가 없던 말들이었다.

“…배신감 클 거야. 네가 그동안 나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그런데 결국 돌아오는 게 이런 거라 미안해. 진짜 미안해.”

“…….”

“나 노력할게. 정말 노력할게. 절대 들키지 않을게. 멤버들은 이런 일이 있었는지도 앞으로 계속 모를 거야. 내가 그렇게 할 거야. 정우 너도 신경 안 쓰이게 내가… 내가 진짜 잘할게. 그러니까… 한 번만 더 믿어주라. 나 너랑… 잘 지내고 싶어.”

“나도 형이랑 잘 지내고 싶어요. 나 아직은 형 좋아하거든.”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우의 입에서 나오는 좋아한다는 그 말에 마음이 마구 흔들리며 뛰기 시작했다. 하진은 애써 그 마음을 확 눌러 숨기며 작게 웃음 지었다.

“…나 그래도 정신 좀 차렸어. 이제 정규 앨범 준비도 본격 시작할 거고, 정신없이 바빠질 텐데… 전처럼 그럴 일 없어. 다 들켰고, 너한테 이런 모습 자꾸 보이는 것도 창피해서… 더 그러고 싶지 않아. 나만 접으면 되는 거잖아. 정우 너랑 잘 지내고 싶은데, 내가 널… 좋아하는 게 걸림돌이 된다면… 안 할 거야. 안 할 수 있어. 나 너랑 오래오래 같은 팀 하고 싶어.”

진심이었다. 정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하진의 진심이기도 했다. 저의 이 감정, 사랑이라는 것이 정우와의 관계를 악화시킨다면, 버리는 게 맞다는 생각이었다.

멤버, 동료, 친구, 동생. 이런 관계의 이름으로는 늘 웃으며 지내왔었다. 행복했고, 하루하루가 즐거웠었다. 힘들어도 정우가 있어서 좋았고, 그런 저를 안고 토닥여 주는 그 손길이 따뜻해 좋기만 했었다. 하지만 좋은 거라 생각한, 행복하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사랑이라는 이름이 마음을 뒤덮은 순간부터는 전혀 그러지 못했다.

행복할 줄 알았는데 우는 순간이 많아졌고, 따뜻한 건 줄 알았는데 처음 보는 차가움에 움츠려야 했다. 이건 하진이 생각한 사랑이 아니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행복에 젖을 거라 생각한 사랑은 너무나도 차갑고 뾰족해 소리를 낼 때마다 상처를 남겼다. 그런 게 사랑이라면, 정우와 저의 사이를 방해하는 게 저의 사랑이라면… 관두는 게 맞았다. 하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알았어요. 형 말 다시 믿어볼게요.”

“…고마워. 정말 고마워.”

누그러진 정우의 목소리를 들으니 정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오래도 아니고 고작 며칠이었지만, 차가운 시선, 낮고 예민한 목소리가 스칠 때마다 무수히 마음이 쪼개지고, 부서졌었다. 눈치가 보이고, 두려워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래서 정말 정우를 대하기가 어려웠는데, 이제야 작은 빛이 다시 보이는 거 같았다.

“옷 갈아입고 나와요.”

“…응.”

정우의 손이 하진의 어깨 위를 한 번 묵직하게 누르고 떨어졌다. 하진은 먼저 방을 나서는 정우를 보며 내내 제대로 내쉬지 못하던 숨을 뱉어냈다. 정말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옷을 갈아입고 나가자 샐러드가 식탁에 하나씩 놓여 있었다. 하진은 죽을상을 하고 샐러드를 휘적대는 해성과 영우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 아직 날이 추워 그런지 사실 차가운 샐러드보다는 따뜻한 게 더 끌리기는 했지만, 컴백 준비를 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형 여기 커피. 디카페인으로 내렸어요.”

“아, 고마워. 안 그래도 커피 마시고 싶었는데.”

하진은 정우가 앞에 놓아주는 커피를 들어 향을 한 번 맡고 호- 불어 한 모금을 마셨다. 정우와 그래도 잘 이야기를 끝낸 뒤라 그런지 옆에 정우가 앉아도 전처럼 막 의식을 하게 되거나, 눈치를 보게 되지 않았다. 진작 이렇게 털어놓고 말을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정우가 제 마음을 알아버린 그 순간에도 계속 솔직히 말을 하고 정우를 속이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 조금 후회스러웠다.

“배고파서 그런지 맛있다.”

종일 정우의 눈치를 보고, 긴장을 하느라 뭘 먹어도 제대로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점심도 입에 거의 대지 못했고, 물과 커피 같은 액체만 겨우 몇 모금 넘긴 게 전부였다. 그래도 배고프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는데,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지 이제야 배고픔이 느껴졌다. 하진은 새콤하고 묽은 드레싱을 반만 뿌린 샐러드를 아주 맛있게 먹었다.

다 먹고 난 뒤에는 빈 샐러드 박스를 들고 인증 샷을 찍어 경호에게 보내야 했다. 하진은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정우의 앞에서 빈 플라스틱 통을 들고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었다. 정우가 화면 속에 보이는 브이를 한 하진을 보며 숨처럼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너도 찍어서 경호 형한테 같이 보낼게. 어차피 단톡으로 보낼 거니까 뭐.”

“네.”

정우는 그냥 심플하게 빈 것을 들기만 했다. 하진은 화면 속 보이는 정우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살아 움직이는데 직접 저와 눈이 마주치지 않아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마음껏 볼 수 있어 좋았다.

“형?”

“…어? 어! 찍을게.”

잠시 정신이 팔린 사이 정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진은 놀라 얼른 정우의 사진을 찍고 씩 웃어 보였다. 갑자기 정우와 평소처럼 지내는 게 조금 어색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냉랭한 분위기에 있다가 멤버들 앞에서만 부자연스럽게 닿던 낮보다는 훨씬 좋았다.

그렇게 경호와 멤버들이 다 같이 있는 단체 메시지 방에 정우와 제 사진을 보낸 하진이 이제 푹 쉬라는 경호의 말을 보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정우가 내려준 커피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전부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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