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37화 (37/122)

#37

“…….”

귓가로 정우의 목소리와 숨이 스쳤다. 겨우 입술을 올려 웃음을 지은 채 영우를 보고 있지만,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전혀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 오늘부터 다이어트 해야겠다. 안 그래도 경호 형이 휴가 때 먹은 거 솔직히 말하라고 난리도 아니야. 이따 가야 되는데 미치겠다. 보자마자 피티 룸에 처박힐 듯. 나 많이 봐둬라. 형 이 부기 빠질 때까지 숙소 못 갈지도 모르니까.”

영우의 말에 정우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진은 정우의 웃음소리를 받아내며 미소 지었다. 저 뒤에서 인규가 영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진은 영우가 인규에게 가는 것을 거울로 보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놔 줘.”

“싫어요.”

“정우야.”

“형 내 앞에서는 연기 잘하더니 왜 이렇게 멤버들 앞에서는 연기를 못 해요? 금방 들키겠어요.”

정우는 인규와 영우가 연습실을 나가는 것을 보며 거울 앞으로 하진을 더욱 가까이 밀고 갔다. 그리고 하진의 턱을 잡아들어 강제로 거울을 보게 만들었다. 거울 속에서 마주친 시선에 하진은 결국 눈을 내리감았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좋게 말하면 못 알아들으니까.”

하진은 그대로 온 힘을 다해 정우를 뿌리쳤다. 그리고 뒤돌아 거울을 통하지 않고 정우와 눈을 맞추었다. 무심하고 건조한, 그리고 미약하지만 분명 경멸이 묻은 시선과 마주한 순간 또다시 심장이 덜컹이기 시작했다.

“너한테 피해 더는 안 가게 할게. 멤버들도 절대 모르게… 내가 더 잘할게. 그러니까… 너무 차갑게 그러지… 마……. 솔직히 좀 무서워.”

“좋게 말하면서 정리할 시간 줬더니 형 어떻게 했어요.”

“…….”

“정리하는 척하면서 나 속이고 연기했죠. 그리고 나랑 자기까지 했어요. 그러더니 연애하는 것처럼 굴었죠. 들떠 있고, 눈치 보고, 어색하지 않으려고 웃으면서 막 내 앞에서 그랬잖아요.”

“…그건…….”

“내가 끝내게 해줄게요. 형 마음 접게 해준다는 거예요. 형이 못 하니까 내가 대신 해 준다는 거잖아. 이런 내가 무서워요?”

“…….”

정우가 하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하진은 제 얼굴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눌려 뒷걸음쳤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뒤로 움직이자 거울이 등에 닿아 왔다. 더는 도망갈 곳이 없다는 말이었다. 정우는 그렇게 한 걸음 더 다가가 하진과 밀착했다.

“나랑 잘 때부터 무서웠어야지.”

“…….”

“그땐 안 무서웠어요?”

“형들, 형들 들어올 거야.”

“들키는 게 무서웠으면, 시작하지도 말았어야지. 형이 못 끝내니까 내가 나서서 도와준다는데 그것도 거절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럼 형 너무 이기적이잖아.”

“…정우야, 제발…….”

“그냥 다 까발려버릴까? 형이 나 좋아한다고. 그래서 같이 잤다고. 멤버들끼리 비밀 있고 이러면 안 되잖아요.”

하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손을 올려 정우의 어깨를 밀어냈다. 언제 멤버들이 들어올지 몰랐다. 아무리 저와 정우가 평소에 친해서 스킨십을 많이 한다고 해도 이런 식의 닿음은 분명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었다.

“왜 그렇게 떨어요. 형 나 좋아한다며. 나랑 자고 싶다면서요. 내 손만 닿아도 발정 나서 난리가 나잖아. 말해도 안 듣고, 도와준다고 해도 싫다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멤버들도 아는 수밖에.”

“이러다 형들 들어오면… 진짜… 진짜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이상하게만 생각하면 안 되는데.”

“뭐?”

“어쩔 수 없네. 알리려면 확실히 알려야지. 그냥 알리고 그룹 해체되는 거 같이 구경이나 해요. 형이 바라는 게 그런 거 아닌가?”

한 손으로 하진의 턱을 확 움켜쥐며 들어 올린 정우가 그대로 입술을 집어삼켰다. 하진은 그 엄청난 악력에 턱을 잡힌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입이 저절로 벌어지고 안으로 정우의 혀가 거칠게 파고드는 순간 너무 놀라 겨우 손을 들어 정우를 마구 밀어냈다. 이러다가 정말 저 문이 열리면, 그게 누구든 이 상황을 본다면 모든 게 끝날 것이었다.

“흣, 이러지… 으응, 하읏, 정우야!”

“왜요. 형 이런 거 좋아하잖아.”

떨어진 입술이 다시 붙고 또 겨우 떨어지면 다시 맞물렸다. 입안이 얼얼할 만큼 헤집은 정우가 하진의 혀를 길게 빨아들였다. 이 순간에도 아찔할 만큼 퍼지는 쾌감에 하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정우를 밀어냈다. 정확히도 맞물려 있던 입술이 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간지러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순간 문이 열렸다.

하진은 놀라 정우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영우와 인규가 음료수를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서로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다행히 이쪽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하진은 얼른 손등으로 입술을 아무렇게나 문질러 닦았다.

“이리 와, 이거 마셔. 너희 것도 가져왔어.”

하진은 저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선 채 여전히 노려보듯 바라보는 정우와 눈을 맞추었다. 그런 하진을 잠시 예민한 시선으로 내려 보던 정우가 뒤돌아 멤버들에게 다가갔다. 하진은 멀어지는 정우를 보며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

“하진아 너도 이거 마셔.”

“…네.”

가까이 다가가자 영우가 하진이 잘 받을 수 있도록 음료 캔을 던져주었다. 한 번에 안정적으로 잘 받은 하진이 애써 웃으며 캔을 열었다. 아직도 입안에 정우의 느낌이 남아 있었다. 뿌리까지 뽑아버릴 것처럼 빨아들인 혀가 얼얼했다. 그 와중에 열이 오른 몸 역시 진정이 되지 않았다. 하진은 정우가 아닌 인규의 옆쪽으로 앉아 차가운 음료수를 한 모금 삼켰다.

“너희도 운동 갈 거야? 우린 다시 기계적인 운동을 해야 관리 될 것 같아서 갈 건데 너희는?”

정우가 하진을 바라보았다. 하진은 잠시 망설였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라 운동까지 하기에는 조금 무리였다. 하지만 정우와 이대로 둘이 숙소에 가는 것은 더 힘들 것 같았다. 차갑고 날카로운 정우의 말과 시선을 더 받을 용기가 없었다.

“저도 운동 갈래요. 체력이 좀 떨어진 것 같아서요.”

“그래, 같이 가. 그럼 정우도 운동 가겠네? 하진이가 가는데 차정우 안 갈 리가 없잖아.”

웃으며 말하는 영우를 본 정우가 음료수를 한 모금 삼키며 시선을 하진에게로 옮겼다. 하진은 평소처럼 다정하고 따뜻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정우와 눈을 맞췄다.

“그럼요. 제가 어떻게 형이랑 떨어져요.”

“…….”

“그리고 저도 운동 다시 하기는 해야 돼요. 며칠 너무 늘어졌더니 티가 나더라구요.”

정우의 말에 영우가 야유하며 엉덩이를 밀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정우의 티셔츠를 위로 슬쩍 올려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정우의 식스팩을 확인하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녕히 잘 계시는데?”

“아니에요. 저 금방 없어져요.”

“나는 진작 가출하셔서 행불팩 되셨다. 돌아오기는 하나.”

절망한 영우의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인규가 집 나가 완전히 사라진 영우의 식스팩을 애도해 주었다. 그런 인규를 붙잡고 우는 시늉을 한 영우가 이온 음료를 술처럼 마시기 시작했다. 그 행동에 연습실 안으로 웃음이 번졌다. 하진은 소리 내어 웃는 정우를 보며 겨우 입술을 끌어올렸다. 올라간 입술과는 달리 마음은 한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도대체 끝이 어디인지 모를 깊고 깊은 바닥을 향해.

***

아포제 전담 트레이너인 경호는 예리한 눈으로 멤버들의 몸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하진과 정우, 인규를 옆으로 밀어놓았다. 마지막까지 남은 해성과 영우는 눈을 감고 올 게 왔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신나게 드시고 마시고 노신 만큼 눈물 빼고, 땀도 빼야 되는 거 알지?”

“…네.”

“다들 가서 러닝으로 몸부터 풀어. 영우랑 해성이는 집중 관리 들어가고, 인규, 하진이 정우는 전에 하던 것처럼 체력 위주로 할게.”

지옥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처럼 걷는 영우와 해성을 보고 웃은 하진이 러닝머신 위로 올라 적당히 걸을 수 있는 속도로 맞췄다. 20분 정도는 걸어서 몸을 풀고 속도를 높일 생각이었다. 운동을 하는 동안에는 땀이 많이 나고, 더는 움직이지 못할 만큼 몸 쓰는 것을 좋아했다. 빠르게 달려 숨이 가빠지고 결국은 쓰러질 것 같은 그 순간이 좋았다. 몸에 쌓인 스트레스와 상념, 노폐물 같은 것들이 전부 빠져나가는 기분이기 때문이었다.

“오늘 강하진 운동 좀 받네?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필 받았다고 심하게 하면 탈 나.”

“네, 적당히, 하아… 할게요.”

하진은 빠르게 러닝머신 위를 달리며 경호에게 대답했다. 평소에 땀이 잘 안 나는 타입이라 이렇게 달리는데도 막 땀이 쏟아지지는 않았다. 하진은 숨이 턱까지 차올라 호흡하기가 곤란해질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몸에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고, 이제는 넘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뒤에야 정지 버튼을 눌렀다. 속도가 점점 느려지다가 완전히 멈춘 뒤에야 열이 확 오르며 땀이 흘러내렸다. 하진은 러닝머신을 잡고 기댄 채 엉망으로 터져 나오는 숨을 뱉어냈다.

“…….”

이렇게 죽을 만큼 움직였는데도 속은 시원해지지 않았다. 평소라면 싹 다 비워낸 기분이어야 되는데, 그조차도 쉽지가 않았다. 하진은 러닝머신 위에서 내려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문이 닫힌 피티 룸 안에서 영우의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고통인지 너무나도 잘 알기에 저절로 몸이 막 움츠러들었다.

“하진아. 무슨 일 있어? 오늘 강도가 세네.”

“아니에요. 그냥 정규 준비한다니까 좀 열심히 몸 만들어야 할 것 같아서요.”

“너 스트레스 받거나 잘 안 풀리면 운동 세게 했잖아. 그래서 혹시나 하고.”

“요즘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는데요, 뭐. 그럼 전 휴게실 좀 가 있을게요. 너무 오버했나 봐요. 아무것도 못 하겠어요.”

“그래, 가서 쉬고 있어.”

근력 운동을 하는 인규와 짧게 이야기를 나눈 하진이 다른 운동기구에 앉아 상체 운동을 하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팔을 움직일 때마다 미간이 살짝 구겨지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숨을 내쉬었다.

근육이 잘 붙지 않는 저와는 달리 정우의 팔과 몸에는 적당히 보기 좋은 단단한 근육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진은 그 단단한 정우의 팔이 점점 더 무거운 무게를 견디며 움직이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런 무게를 견디며 운동하는 정우의 힘을 제가 당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사랑이다, 참사랑이야.”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놀라 하진은 들고 있던 물병을 떨어뜨렸다. 그 소리에 인규와 정우의 시선이 하진에게 달라붙었다. 하진은 얼른 떨어진 물병을 들고, 제 옆에 선 해성을 바라보았다.

“뭐 그렇게 넋을 놓고 봐.”

“네?”

“너 지금 정우 운동하는 거 넋 놓고 봤어. 진짜 참사랑이다. 그렇게 매일 보는데도 그냥 지나치지를 못하네.”

“아……. 아니, 저 휴게실 가다가…. 형은요?”

“땀이 너무 나서 세수 좀 하고 왔어. 이영우 죽는소리 들린다. 나 정말 죽을 뻔했어. 경호 형 지금 장난 아냐. 나도 몇 세트 더 해야 돼. 살아서 보자.”

“…네.”

피티 룸으로 가는 해성을 본 하진은 여전히 저에게 닿아 있는 정우의 시선과 마주했다. 그 눈빛만 봐도 자꾸 마음이 작아지고 움츠러들었다. 하진은 도망치듯 휴게실로 향했다. 그리고 휴게실 안 투명한 냉장고를 열어 이온 음료 한 병을 꺼냈다. 왜 자꾸 일이 이렇게 되는 걸까. 또다시 답답한 마음이 하진의 모든 것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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