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하진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캐스팅되었다. 연예기획사라고 하면 누구나 제일 먼저 떠올릴 한영엔터테인먼트의 오태근 실장이 ‘성공한 선배의 인사’라는 다소 진부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러 왔다가 생긴 일이었다.
오 실장은 자신이 한국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왜 한영엔터테인먼트 실장이 되었는지 그 과정을 설명했다. 처음에는 도대체 왜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저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의 신입생들도 ‘한영엔터테인먼트’라는 말이 나옴과 동시에 모두 집중했다.
하진 역시 꽤 흥미로운 이야기였기에 열심히 그 말에 집중했다. 그런데 어쩐지 자꾸만 강단 위의 사람과 눈이 마주치는 것 같았다. 착각이려니 하며 이야기를 끝까지 잘 듣고, 박수를 치고 있는데, 강단에서 내려온 오 실장이 가까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하진은 멍하니 가까워지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나한테 오는 건가? 이것도 착각…….
“안녕하세요. 한영엔터테인먼트 오태근 실장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신입생이죠?”
“네.”
“연예인 해 볼 생각 없어요?”
“네?”
그렇게 하진은 같은 학부 사람들이 전부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캐스팅됐다. 처음에는 농담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 실장은 굉장히 진지하고 적극적이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라 죄송하다고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그 뒤로도 오 실장은 몇 번이나 하진을 찾아왔다.
세 번을 거절한 하진의 생각이 바뀐 것은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런 일을 해볼 수 있겠냐.’라는 오 실장의 말 때문이었다. 공부는 지금이 아니어도 할 수 있지만, 이 일은 제안이 온 지금이 아니면 평생 해볼 수가 없는 일이었다. 평소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고, 뭐든 배우는 것을 좋아하던 하진은 오 실장의 말에 며칠을 아주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부모님은 늘 하진을 오픈 마인드로 키우셨다. 하진이 스스로 생각해서 결정할 수 있는 삶을 만들어 주었고, 이번에도 하진의 결정을 존중했다. 하진은 그렇게 한영엔터테인먼트로 가서 계약을 하고 간단한 모든 테스트를 받았다.
“마스크가 너무 좋아요. 어디 넣어도 다 대박 나겠는데. 드라마도 좋겠고, 아이돌 해도 난리 날 것 같은데.”
“나이가 스물이라 좀 어렵죠. 바로 데뷔하면 몰라도.”
“하긴 트레이닝 받아서 데뷔할 정도 되려면 빨라도 스물둘, 늦으면 스물넷, 다섯도 될 텐데 그건 좀 너무 늦지.”
“아깝다. 2년만 먼저 찾았어도 아이돌에 넣는 건데.”
녹음 부스 안에 들어가서 긴장하고 서 있는 하진을 보며 말한 작곡가와 보컬 트레이너가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마이크를 켜고 부스 안에 있는 하진에게 말했다.
“자, 아까 말한 노래 한번 해 봐요. 반주 틀어줄 테니까. 자, 시작합니다.”
하진이 부스 안에 들어가기 전 가장 좋아하는 노래, 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무엇인지 묻고, 그 반주를 준비했다. 트레이너와 작곡가는 별 기대 없이 반주를 재생하고 의자 뒤로 기대어 녹음 부스 안을 바라보았다.
“어?”
“좋은데?”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지만, 놀라기에 충분한 실력이었다. 의자 뒤로 기대고 있던 등을 앞으로 떼며 빠져들듯, 대박이라는 듯 바라보던 트레이너가 서둘러 마이크를 켰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여러 곡을 더 부르게 해보았다.
예상보다 길어진 보컬 테스트가 끝난 뒤, 오 실장과 트레이너들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열여덟만 됐어도 아이돌 연습생에 넣었을 텐데, 벌써 스물이라는 나이가 걸렸다. 솔로 가수로 내보낼까 생각도 했지만, 한영엔터테인먼트는 기본적으로 아이돌로 세계를 뒤흔드는 기획사였다. 솔로 가수보다는 아이돌이 훨씬 더 경쟁력 있고, 자신 있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내년 초 데뷔 플랜으로 5인조 남자 아이돌 그룹을 기획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딱 그 자리에 넣고 싶을 만큼 비주얼, 피지컬, 음색, 기본적인 노래 실력 모두가 훌륭했다. 하지만 훌륭하다고 해서 모든 걸 무시하고 무조건 넣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 실장은 깊은 고민과 함께 하진과 실장실에서 마주했다.
“우리는 강하진 씨를 딱 아이돌 시키면 좋겠어요. 외모, 음색, 팬들 모을 수 있는 그런 힘. 다 가지고 있는 게 보이거든요. 그런데 아이돌이라는 게 보기에는 잘생기고, 노래 어느 정도 잘하고, 춤 배워서 따라만 하면 될 거 같이 보여도 그게 아니에요.”
“…….”
“몇 년 동안 같은 연습만 계속해 온 애들이 데뷔하는 거예요. 나만 튀면 안 되고, 팀이 살도록 나를 죽일 수도 있어야 하고, 나한테만 기회가 와도 누를 줄 알아야 되고, 희생도 할 줄 알아야 해요. 그럼에도 하겠다고 지하에서 지금 연습하고 있는 남자애들만 서른 명이 넘어요.”
“…아, 네.”
“우리가 내년 초에 5인조 새 그룹을 데뷔시킬 계획인데… 난 강하진 씨가 거기 보컬 자리로 들어가면 좋겠거든요.”
“…제가요? 아이돌을요? 전… 춤도 춰 본 적 없고……. 노래 듣고, 하고 그런 건 좋아하지만, 제가 아이돌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요.”
“나도 여기 데려올 때, 아이돌 쪽은 생각 안 해봤는데… 몇 명 그림이 그려져서 그래요. 강하진 씨보다 나이 더 많은 연습생도 몇 명 있기는 하거든요. 아, 그런데 실력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그게 제일 큰 문제네. 춤 한 번 안 춰봤다니까… 아, 무모한 권유 같기도 하고. 포기하자니 아깝고.”
오 실장이 말하는 ‘무모한 권유’라는 말에 하진은 뭔가 도전해 보고 싶어졌다. 무모한 일이 아니라는 증명을 해 보고 싶은 오기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또 제가 살며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아이돌이라는 꿈을 꿔볼 수 있겠는가. 되면 좋고, 안 되면 또 다른 시작을 하면 될 것이었다. 하진은 실패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게 두려웠다면,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래서 하진은 저에게 찾아온 조금, 아니 솔직히 많이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기꺼이 해보기로 했다.
“해볼래요.”
“…….”
“아이돌.”
***
연습실 안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서른 명의 눈이 저를 바라보고 있는데, 숨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진은 저에게 닿는 경계심 가득한 눈들을 바라보았다. 꼭 조난을 당한 기분이었다. 기절했다가 깨어 보니 주변에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사람들이 저를 둘러싸고 있는 그런 기분에 덩달아 숨을 잘 쉴 수가 없었다.
오 실장이 직접 하진을 연습생들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새로 합류한 연습생이고, 앞으로 같이 트레이닝을 받을 거니까 잘 지내라는 말도 이어졌다. 박수가 터지기는 했지만, 굉장히 형식적인 소리였다.
빨리 적응하는 것도 능력이라는 명언을 남긴 오 실장은 어쩔 줄 모르는 하진을 두고 연습실을 나갔다. 하진은 각자 다 흩어져 저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는 연습생들을 바라보다가 순하고 어려 보이는 얼굴의 연습생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저… 테스트 준비를 하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해야 돼요? 제가 처음이라…….”
“각자 알아서 하는 건데요.”
하진에게 제대로 눈길도 주지 않으며 대답한 한 연습생이 그대로 옆을 지나쳤다. 하진은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대답에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눈동자만 굴렸다.
지금까지는 사교성도 좋고, 크게 낯을 가리지도 않는 성격으로 사람들과 늘 쉽게 친해지고, 좋은 관계를 유지했었다. 처음에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어색함이야 너무나도 당연한 거지만, 지금 이 상황은 하진에게 너무나도 낯설고 해결하기 어려운 최초의 위기였다.
“저기…….”
말을 걸어도 못 들은 척 그냥 지나가고, 누구도 눈길 한 번 주지를 않고 있었다. 각자 다들 위치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고, 여럿이 모여서 얘기도 하고 있는데, 저만 혼자였다. 하진은 저에게만 뾰족한 분위기를 느끼며 마른 입술을 꾹꾹 감쳐물었다.
“형, 이거 준비하시면 돼요.”
그때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하진은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고맙게도 저에게 말을 걸어준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우와…….”
저도 모르게 감탄이 터졌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잘생겼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뭐라고 표현을 해야 할까. 표현을 하고 싶은데 얼굴을 본 순간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멍하니 그 얼굴을 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태어나 이렇게 잘생기고 완벽한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형?”
“…진짜 잘생겼다.”
“제 얼굴 감상할 시간 없을걸요. 테스트 준비 장난 아닌데.”
“네? 아… 아! 미안해요. 너무 놀라서, 아니! 너무 잘생겨서…. 기분 나빴죠, 내가 너무 빤히 봐서. 진짜 미안해요!”
“괜찮아요. 잘생겨서 봤다는데 기분 좋은 일이죠.”
잘생긴 사람 보려면 한영엔터테인먼트 앞에 서 있으면 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하진은 앞에 선 남자가 저를 보며 눈동자를 움직이고, 말을 하는 것도 사실 믿을 수가 없었다. 보면 실례라는 것을 알기에 보지 않으려고 하는데 계속 보게 될 만큼 정말 잘생긴 얼굴이었다. 하진은 계속 그 얼굴을 멍하니 보며, 남자가 내미는 종이를 받아들었다.
“테스트는 매주 봐요. 보컬은 자유곡 한 곡 부르는 거고, 댄스는 자유곡에 안무 짜는 거예요.”
“…….”
“형, 제 말 들어요?”
위에 있던 얼굴이 슥 아래로 내려왔다. 하진은 코앞까지 다가온 얼굴에 흐읍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 하진을 보며 작게 웃은 남자가 다시 고개를 세웠다. 하진은 그제야 휴우 긴 숨을 내쉬었다.
“테스트 내일모레예요. 뭐 궁금한 거 있으면 저한테 오세요.”
“아… 네! 고마워요.”
“아, 형. 말 편하게 하세요. 저 열여덟인데. 아, 이름도 말 안 했구나. 차정우예요.”
“차정우… 정우! 이름도 진짜 잘 어울린다…. 어, 진짜 말 편하게 해도 돼요?”
“그럼요. 여기 다 편하게 지내요.”
정우의 허락에 하진은 그제야 작게 웃었다. 그리고 주변 눈치를 한 번 보고 다시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럼 그럴게. 고마워. 혹시 혼자 연습할 거면 옆에 있어도 될까? 방해 안 할게!”
구김살 하나 없게 생겨서는 특유의 연습실 분위기와 기 싸움에 눌려 쭈글쭈글해진 하진을 보며 웃은 정우가 그대로 하진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연습실 한쪽 빈자리로 간 하진은 바닥에 앉는 정우를 따라 옆에 앉았다. 그리고 바로 이어폰을 꽂고 화면을 보며 곡 연습을 하는 정우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