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무호는 확신하는 듯했다. 지금 당장 교인들을 물리고 곤륜산을 떠난다고 해도 사술이 발작하면 다시 마음을 바꿔 돌아오게 될 거란 걸. 곧 있으면 칼로 아무리 가슴을 찔러도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을 거란 걸.
“차라리 교주직을 내려놓으면 안 되는 거야?”
청연은 무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입을 열었다. 가슴에 찌릿한 통증이 번지는 게, 꼭 그의 칼에 자신이 대신 찔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사술이 발동해도 네가 전쟁을 명할 수 없게끔…. 그러면 안 돼?”
다른 사람에게 교주직을 넘겨 무호의 권력이 사라진다면 괜찮지 않을까. 청연은 어떻게든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무호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없으면 다음 교주는 누가 될 줄 알고.”
“…누가 되는데?”
“부교주.”
조금 전 정상까지 올라오는 길에 마주쳤던 부교주의 얼굴을 떠올리자 기분이 께름칙했다. 그는 마치 멀찍이 떨어져서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걸 예상하였다는 듯이.
혹시 그 사람도 혈마와 한 패였던 걸까. 그래서 무호가 반역을 일으켜 교주가 될 수 있도록 도운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기 남아 뭘 어쩌겠다는 건데?”
청연의 물음에 무호는 단호하게 답했다.
“저놈들 뿌리를 뽑아야지.”
“…….”
“하나도 남김없이.”
“하지만….”
혈마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며. 청연은 목구멍에 걸린 말을 차마 뱉지 못했다.
혈마를 제외한 모든 인원을 처리하더라도 우두머리가 살아 있는 이상 완전한 해결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무덤을 파헤쳐 시체들을 강시로 부리고, 정파 고수들도 마음대로 조종하는 자 아닌가. 이 사실은 무호도 분명히 알고 있으며, 뿌리를 뽑겠다는 말은 우두머리인 혈마까지 처리하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따로 할 일도 있고.”
“할 일? 그게 뭔데?”
이번에는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청연에게 말해 줄 수 없는 일인 듯했다.
청연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중에도 무호는 차분하게 그를 토닥였다. 아무리 오른팔이라도 가슴에 칼이 꽂힌 채 몸을 움직인다는 건 쉽지 않을 터였다.
“움직이지 마. 너 지금 아프잖아. 피도 계속 나는데….”
“청연.”
“응?”
잠시 기다려도 다음 말이 들려오지 않자 청연은 얼굴을 들고 무호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에 붉은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채 은은하게 남아 있었다.
조금만 더 다가가면 입술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청연은 그의 얼굴을 차근히 눈에 담았다. 그동안 수십 번씩 입을 맞췄으면서도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하나하나 뜯어 본 기억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어쩌면 무호를 찾기 위해 산을 오르는 동안 단순히 걱정되고 불안해서 힘들었던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걱정되고 불안한 건 여전했지만 그와 마주 보고 있으니 차가웠던 손발이 따뜻하게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어느새 청연의 마음속에는 잔잔한 물결 같은 깨달음이 밀려왔다.
‘나는 네가 보고 싶었나 보다.’
나도 모르게 이 얼굴을 그리워했나 보다.
청연과 눈을 맞추던 무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번에 네가 나한테 물었잖아. 왜 교주가 된 거냐고.”
“응…. 그랬지.”
지난번에 지하 감옥의 계단을 함께 내려가면서 청연이 건넨 질문이었다. 청연은 그 당시 무호가 했던 답변을 떠올려 그대로 읊어 주었다.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며.”
그러자 무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었다고?”
“권력 같은 거 욕심 없었으니까.”
“그럼 왜….”
무호는 한 손으로 청연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일 년 전, 그가 차기 교주 후계자로 있을 당시에 사술의 증상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무호는 전 소교주의 경고가 허풍이 아니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자신의 머리가 완전히 돌아버리기까지 앞으로 남은 시간은 단 일 년뿐이었다.
처음에는 모든 걸 내려놓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뭐 어쩔 건가. 정해진 운명은 거스를 수 없다는데. 어차피 제 의지대로 살아본 적 없는 삶, 남은 미련 또한 없었다.
단 한 가지만 빼면.
“생각해 보니까 미련이 아예 없지는 않았더라고.”
청연은 무호의 허리춤을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다음 말이 궁금하면서도 두려웠다.
“내가 미쳐 버리기 전에, 꼭 멀쩡한 맨정신으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어.”
“…….”
“네가 보고 싶었어.”
일 년이라도 좋으니까 너를 곁에 두고 싶었다. 무호의 말에 청연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전임 교주의 삼엄한 감시 아래, 무호는 천산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 온종일 지옥 같은 고통 속에 무공을 전수하여야 했고, 자유로운 생활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당시 천마신교의 수석 장로였던 부교주가 은밀한 제안을 해왔다. 반역을 일으키자. 교주와 다른 장로들을 전부 처리한 뒤 너를 새로운 교주 자리에 앉혀 주겠다. 너는 내게 부교주의 직위를 약속하기만 하면 된다.
무호는 그의 제안 뒤에 교활한 계략이 감춰져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소교주가 내쳐지기 전, 그와 가깝게 지내던 사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의 제안을 수락하고야 말았다. 그만큼 일 년이라는 시간이 간절했고, 청연이 간절했다.
“설마 취임하자마자 날 데려가서 가둬 둔 것도….”
청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자 무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없으니 억지로라도 옆에 둘까 해서.”
강제로 혼례라도 올려버릴까 고민했지만 참았다, 말하며 무호는 피식 웃었지만 청연은 차마 따라 웃을 수 없었다.
민아의 말이 옳았다. 무호가 정해진 운명보다 일 년 일찍 마교주가 된 건 전부 자신 때문이었다. 목숨 걸고 반역을 일으켜 전임 교주를 살해하고, 권력 욕심도 없으면서 교주 자리를 차지했다. 제정신으로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일 년을 청연과 함께하기 위해서.
“…미친놈아.”
넋이 나간 청연은 무심코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퍽 때리려다가 멈칫했다.
“너는 무슨… 아니, 그러면 말이라도 일찍 하든가. 나는 아무것도 몰랐는데….”
“그래도 봤으니까 됐어.”
“…뭐?”
무호는 청연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얼굴도 봤고, 과분한 관심도 받았으니까 됐어.”
“…….”
“이제 가 봐.”
가라고? 여태 이런 말들로 날 흔들어놓고 혼자 가라고?
무호의 말이 왠지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들려 심장이 내려앉았다. 청연은 안고 있던 무호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고집스럽게 말했다.
“못 가. 네가 안 가면 나도 안 가. 저놈들 뿌리를 뽑든 따로 할 일을 하든 같이 해.”
“…청연.”
“네가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내가 널 두고 갈 수 있을 것 같아? 바보 같은 소리 좀 작작 해.”
어깨를 쓰다듬던 무호의 손길이 멈췄다. 청연은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며 그를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애처로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긴 너무 외롭잖아. 혼자 있지 마.”
“…….”
무호는 굳은 얼굴로 말이 없었다. 청연은 그를 붙든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그가 옆에 서 있던 지홍에게 눈짓했을 때까지도.
“모시고 내려가거라.”
“뭐? 나 안 간다니까!”
지홍이 다가와 청연의 팔을 잡았다. 청연은 억지로 끌려 나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리고 부교주를 데려오거라. 내 그놈부터 족칠 것이니.”
“안 가! 안 간다고! 이러지 마!”
그러나 무호는 이미 청연의 몸을 놓은 뒤였다. 강한 악력에 질질 끌려가던 청연은 그의 얼굴에 비친 공허함을 보았다. 왼쪽 가슴에 대도를 꽂아 넣은 채 마지막 미련마저 털어버린 듯한 얼굴을.
***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청연은 지홍의 손에 이끌려 봉우리를 내려가며 생각했다. 아무리 몸부림치고,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쏠릴 만큼 악을 써 봐도 소용없었다. 주군의 명령을 이행하는 지홍의 몸짓은 단호하기만 했다.
‘무호가 마교주가 되어 찾아왔을 때로, 딱 일 년만 되돌리고 싶다.’
그러면 도망가지 않을 텐데. 그동안 고생했다고 꼭 안아 줄 텐데.
무호에게서 몸이 멀어질수록 청연의 두려움은 한계치를 넘어가고 있었다. 환각이 현실이 될까 하는 두려움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이성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청연은 그제야 깨달았다. 무호의 곁에 있어 주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제 말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무호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필요로 하는 건 자신이었다. 어둠 속에서 손을 잡고 이끌어 줄 사람이, 끝도 없는 두려움을 달래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는 더 이상 잃어버린 열다섯 살짜리 아이가 아니었다.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주군은 제가 곁에서 잘 모실 테니 꼭 안전히 하산하십시오.”
걱정으로 가득한 지홍의 목소리가 청연의 귓가에 울렸다. 멍한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니 이미 제하와 헤어졌던 봉우리 기슭에 도착해 있었다.
“이건 벗어 놓으셨던 옷입니다.”
지홍이 청연의 옷을 가져와 손에 들려 주었다. 청연은 여기저기 피가 묻고 찢어진 옷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럼.”
고개를 까딱한 지홍이 걸음을 돌렸다. 멀어져 가는 그의 모습을 쳐다보던 청연은 손에 들고 있던 옷가지를 툭 떨어뜨렸다.
“객주님!”
등 뒤에서 제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근처에서 청연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는 헐레벌떡 달려와 청연의 몸을 살폈다.
“괜찮으세요? 더 다친 데는 없으시고요? 객주님께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의 말이 귓가에 맴돌다가 흘러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큰일 났습니다. 지원을 나온 정파 무인들이 점점 이상해지는 겁니다. 하나둘씩 동공이 풀리더니 꼭 누군가에게 조종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같은 편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위가 높은 고수들도 마찬가지로… 객주님?”
제하는 당황하여 하던 말을 멈췄다. 청연의 뺨을 향해 다가오던 그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거렸다.
“왜 우세요?”
청연은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제하가 청연의 어깨를 조심스레 토닥였다.
인간은 이다지도 어리석다. 누군가를 향한 마음을 자각했을 땐 너무나도 늦어버렸고, 어긋난 시간을 되돌리는 건 불가능했다. 다가오는 운명 앞에 그는 한없이 무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