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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객잔 정상 영업합니다 (97)화 (98/145)

097화

여운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청연을 내려다보았다.

“세화야,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물으며 손을 뻗는 그의 행동에 청연은 흠칫 뒷걸음질 쳤다. 얼굴을 어루만지려던 손이 허공에 우뚝 멈췄다.

“세화가 아니야.”

“…….”

“나는, 나는 어쩌다 이 몸에 들어온 거야.”

청연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나는 세화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어떻게 밝혀야 할까. 검을 휘두르는 동안 계속해서 고민했지만 그의 얼굴을 마주하니 준비했던 모든 것들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미안해…. 나도 그동안 혼란스러웠어. 내가 세화인 줄 알았어. 일부러 속이려고 한 건 절대 아니야.”

청연은 마치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화의 몸을 차지한 걸로도 모자라 여운의 앞에서 그의 행세를 하기까지 했으니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애 혼백이 이 몸에 남아 있었대. 그래서 착각했나 봐. 이제는… 내가 누군지 알아.”

“…….”

“네가 알던 세화랑 나는 다른 사람이야.”

말을 하는 게 괴로웠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시 같았다. 날카로운 가시가 목구멍을 찌르고, 입 안에 피를 내고, 결국엔 여운의 가슴에 박혀 그 역시 괴롭게 할 것이다.

그렇다고 침묵할 수는 없었다. 정체성을 되찾은 이상 과거의 연인에게 이 사실을 숨기는 건 여운과 세화, 두 사람 모두에게 못 할 짓이었다.

“여전히 널 좋아해. 그런데 이건 내 감정이 아닌 것 같아.”

청연은 말하면서도 속으로 되뇌었다.

‘몸에 남은 감정이다. 내 것이 아니다. 세화의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했던 말을 취소하고 싶어질 것만 같았다.

“…이해가 잘 안 돼.”

여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청연의 양쪽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나는 원래 이 세계 사람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오게 된 거고….”

“아니.”

여운이 청연의 말을 뚝 끊었다. 순간 그의 얼굴에 불쾌한 표정이 떠오르고,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 이제 안 취했어. 술 다 깼으니까 장난 그만해.”

“장난이 아니라….”

“하나도 재미없어.”

청연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믿지 않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단호한 말투를 들으니 서글픔이 차올랐다. 이 몸에 빙의해 그와 재회한 뒤, 처음으로 들어보는 냉랭한 목소리였다.

“들어가자.”

어깨에서 손을 떼어 낸 여운이 휙 돌아섰다. 청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게서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마음이 아프고 서운했다. 염치도 없이 그에게 서운해하면 안 되는 건데.

‘내 것이 아니다. 내 감정이 아니다.’

청연은 한 번 더 머릿속으로 되뇌며 그의 뒤에다 대고 물었다.

“달라졌다고 느낀 적 없어?”

그러자 여운의 발걸음이 멈췄다.

“내가 달라진 걸 느낀 적 없냐고. 갑자기 청소를 잘한다든가, 비 오는 걸 좋아한다든가, 낚시를 하러 간다든가.”

“…….”

“성격이 변하고, 사소한 습관이 변하고, 너를 대할 때 작은 행동까지도….”

“그 정도는 누구나 변해.”

그는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며 답했다. 한숨을 내쉰 청연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그를 마주 보고 섰다.

“너도… 너도 조금은 느꼈을 거 아니야. 내가 이전과는 다르다는걸.”

“…….”

“나는 세화가 아니야.”

청연은 다시 못 박아 말했다.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지만 이렇게 해야만 했다. 남의 인생을 대신 살며 그의 연인까지 빼앗을 수는 없었다.

차가운 얼굴로 침묵하던 여운은 입을 열었다.

“그만하라고 했잖아.”

“네가 내 말을 안 듣는데 어떻게 그만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듣지.”

평소의 다정하던 모습과 대비되어 더욱 속이 상했다. 청연은 자꾸만 올라오려고 하는 감정을 꾹꾹 누르며 이성을 다잡았다.

“이 몸에 들어온 지 벌써 구 년을 지나 십 년이 다 돼가. 나는 중원이 아닌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왔고, 내가 여기 왔을 때 세화는… 세화는 이미….”

“그만.”

“…….”

“농담에도 정도가 있어.”

그는 이제 정말로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기만 해도 청연의 몸이 크게 반응했다. 이 사실을 털어놓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는데, 들어주지도 않는 그의 모습에 서러워졌다.

이 또한 몸에 남은 감정일지도 몰랐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냉대받는 기분은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게 몸의 반응이다 생각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해봐도, 그 감정을 오롯이 견뎌 내는 건 결국 청연 자신의 몫이었다.

“조금만 더… 들어주면 안 돼?”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여운의 눈가가 움찔했다.

“농담하는 거 아니고, 너 골탕 먹이려는 것도 아니고…. 나 용기 낸 건데….”

“듣기 싫어.”

그의 단호한 한 마디에 청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시선을 떨궜다. 가만히 땅만 보고 있는 동안, 여운은 냉정하게 말했다.

“계속 그런 얘기 할 거면 나는 갈게.”

“…….”

“나중에 봐.”

그는 그대로 청연을 스쳐 지나갔다. 홀로 남겨진 청연은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정말 가버렸다.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도 않고, 화가 난 채로 떠나버렸다.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그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으나, 자꾸만 차오르는 서러움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청연은 그 자리에 못 박혀 가만히 서 있었다. 누군가의 그림자가 눈앞에 드리울 때까지.

“세화야.”

부드러운 목소리에 슬며시 고개를 들어 보니 그곳에는 여운이 있었다. 떠난 줄 알았건만, 다시 돌아온 그는 청연의 몸을 끌어당겨 품속에 안았다.

“미안해.”

“…….”

“내가 심했어.”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마음이 저려 청연은 크게 심호흡했다. 이런 순간까지 먼저 다가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그의 모습이 세화의 기억 속, 어린 여운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내가 말을 심하게 했어.”

“…….”

“화내서 미안해.”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청연이 슬쩍 몸을 빼내려고 하자 그는 팔에 힘을 주어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의 입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술 때문에 그래?”

“…….”

“내가 어젯밤에 술 마셔서 화났어?”

“그게 아니라….”

“내가 또 너를 불편하게 해서….”

“아니야.”

청연은 그의 어깨를 살짝 밀며 몸을 빼냈다. 이번에는 순순히 밀려난 그가 걱정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아니면 어디 아파? 어제 다친 것 때문에 그래?”

“…아니야.”

청연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받아들이기 힘들 거 알아. 그런데 나는 정말… 네가 알던 세화가 아니야.”

“…….”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어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교룡과 마주친 뒤 어딜 다녀왔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어떻게 멀쩡한 몸을 얻게 된 건지.

이야기를 듣는 내내 여운은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말을 끊지 않았고, 떠나지도 않았다. 그저 청연의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된 거야.”

“…….”

이야기를 끝마쳤음에도 여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던 청연은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처럼 네 곁에 있을 수가 없어. 이런 마음으로 너를 계속 만나면 안 될 것 같아.”

그건 이 몸의 주인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러면서 청연은 다시 한번 미안하다고 사과를 건넸다.

“네가 지금 당장 받아들이지 못해도 이해할게. 나 같아도 그럴 거야.”

“…세화….”

이름을 부르려던 여운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며 깊게 숨을 고르더니, 침착한 말투로 말했다.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

“지금은 이해가 안 되니까…. 다음에 만나면 얘기해.”

“…….”

“그때까지 잘 생각해 볼게.”

그렇게 말한 여운은 청연의 어깨를 토닥였다.

“잘 있어. 나는 갈게.”

“잠깐만.”

“배웅 나올 필요 없어.”

그를 잡으려 했으나 잡을 수 없었다. 청연은 흰 옷자락을 휘날리며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만 눈에 담았다.

‘내 감정도 아닌데 왜 이렇게….’

왜 이렇게 아프지.

청연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릎을 세워 얼굴을 묻고, 아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소리 내 중얼거렸다.

“내가 아니다. 내 것이 아니다. 내 감정이 아니다….”

정말로?

그는 자꾸만 떠오르는 의문을 가슴 속에 묻으며 계속해서 입술을 달싹였다.

“내 것이 아니다. 세화의 것이다….”

자신의 감정이어서는 안 된다.

“세화의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

혼자 후원에 남아 조용히 시간을 보낸 뒤, 객잔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이미 한 시진이 흘러 있었다. 여전히 바글바글한 손님들, 그리고 평소와 같이 시끌벅적한 객잔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시랑을 잃은 세화는 무너져 점점 병들어갔는데.

세화의 몸을 빌려 살게 된 자신은 괜찮을까. 시랑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의 마음은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다 보니 눈앞이 어지러워 탁자를 짚었다.

그러자 해령이 다가와 물었다.

“객주님, 또 어디 아프세요?”

“…아니.”

“피곤하시면 들어가서 쉬세요.”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윙윙 울렸다. 청연은 정신이 멍해져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자신은 한 번도 세화인 적이 없었다. 시랑과 세화가 사라진 자리에는 여운과 청연만이 남아 있었다.

“진짜 괜찮으세요?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

“괜찮아. 가서 일 봐.”

청연은 걱정하지 말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나 마음속은 엉망진창이었다.

괜찮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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