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화
그날 아침, 지옥 같던 대작이 끝난 후 제하는 스승님의 호출을 받아 객잔을 떠나야 했다. 청연은 두 사람이 좋아할 만한 산해진미를 잔뜩 챙겨 제하의 손에 들려 보냈다. 지난번 누님의 목숨을 살려 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대문 앞에 선 제하는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물었다. 객잔 안에 마교주가 떡하니 버티고 있어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자가 또 객주님께 무슨 짓을 할까 겁이 납니다. 이번에도 강제로 데려가거나 객주님을 다치게 한다면….”
“안 그럴 거야. 너도 봤잖아.”
청연은 제하의 어깨를 토닥이며 안심시켰다. 무호를 너무 경계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에게 마교 교주라는 직위가 따라붙는 한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제하가 어려서 마교에 납치당할 뻔했던 걸 생각하면 더더욱.
더군다나 제하에게 그의 첫인상은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청연은 자신의 목에 남은 울혈을 바라보던 제하의 표정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앙금을 털어버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저쪽도 바쁜 몸이라서 금방 떠나야 할 거야. 걱정하지 마.”
청연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제하를 배웅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새 한 마리가 날아와 객잔 지붕 위에 내려앉았다. 지난번에 보았던 마교의 전서구였다.
신기한 마음에 손을 뻗어보니 새는 낯선 이를 경계하며 푸드덕 날아올라 청연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그러나 무호가 객잔에서 걸어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와 그의 어깨에 앉았다.
“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데도 알아보네.”
청연이 흥미롭게 지켜보는 동안 무호는 새의 다리에 묶인 서신을 풀어 펼쳐 보았다.
“…떠나는 거야?”
무호는 손바닥 위의 서신을 불태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망설이던 청연은 그동안 정신이 없어 하지 못했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 반지 있잖아. 나 그거 또 잃어버렸어.”
“…….”
“그런데 이제 안 찾아 줘도 돼.”
찾으려고 해도 아마 못 찾을 거야. 땅을 보며 중얼거리던 청연은 고개를 들어 무호와 시선을 맞췄다. 그는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튼… 덕분에 금방 돌아올 수 있었어.”
청연은 무호가 이해하지 못할 말들을 늘어놓으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했다.
다음에는 자신이 갈 것이다. 무호가 있는 천산으로. 그곳에 가서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마교의 지하 감옥에 갇혀있을 그놈에게 복수하는 것. 세화의 몸에 들어온 이상 그의 염원을 모두 들어줄 생각이었다.
세화의 마지막 남은 혼백을 떠나보냈음에도 몸의 기억과 감정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놈의 가면을 떠올리기만 해도 겁이 나 몸이 떨리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렇다고 그를 살려 둘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마음의 준비가 되면 그를 찾아갈 것이다.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자신이 생겼을 때.
청연은 무호를 배웅한 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는 문을 닫고 그리웠던 침상 위로 풀썩 쓰러졌다.
여운은 옆방에 곤히 잠들어 있었고, 다른 두 사람은 떠났다. 이제야 한숨 돌릴 여유가 생긴 것이다. 어젯밤부터 저 세 사람 때문에 긴장해 있었던 터라 건강한 몸을 얻었음에도 피로해졌다.
드디어 혼자 남겨진 청연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차분히 생각할 시간이 절실하던 참이었다.
‘멀쩡한 몸이 생겼다고 내 인생이 많이 달라지려나.’
그래도 여전히 객잔 주인인 건 다름없는데.
고민하던 청연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정리가 되지 않을 때, 세화가 늘 하던 일이 있었다.
그는 얼마 전 여운이 가져다준 검을 꺼냈다. 오랜 시간 주인이 없었음에도 말끔하게 관리되어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검을 들고 객잔 후원으로 향했다.
적당히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을 곳에 다다른 청연은 자세를 잡고 발검했다. 그리고 차분히 기억을 더듬으며 검법을 전개해나갔다.
소청검법. 곤륜의 입문 무공이자 세화가 처음으로 배운 검법이었다. 곤륜산의 기세를 닮아 날카로운 상승검법들과 달리, 소청검법은 그야말로 기초 중의 기초였다. 남을 공격하거나 제압하는 용도가 아니라 기본기를 쌓으며 심신을 단련하는 수련법에 가까웠다.
하나부터 열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머리로만 기억하는 게 아니라 몸이 절로 움직였다. 무거운 검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버거웠던 이전과는 다르게, 건강해진 몸이 가뿐하게 초식을 전개했다. 동작과 동작이 물 흐르듯 이어져 막힘이 없었다. 세화가 수천, 수만 번을 반복한 동작들이었다.
그는 생각이 많을 때마다 연무장으로 향하고는 했다. 거기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검을 휘두르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차분해져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 물론 항상 그랬던 건 아니었지만.
아무리 땀을 흘려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던 날이 있었다. 청연은 저도 모르게 세화의 기억에 빠져들었다.
***
세화는 연무장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몇 시진을 수련해도 자꾸만 잡생각이 들어 전부 헛수고였다.
이게 다 그놈 때문이었다. 망할 여운 사형.
“그 미친놈이 진짜….”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은 세화는 머리를 헝클였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세화가 여운의 뒤를 졸졸 따라다닌 건 곤륜에 입문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제도 사형의 옆에 딱 붙어 장난을 치다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사소한 일로 시비가 붙어 치고받고 싸웠다.
사실 싸웠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얻어맞았지만, 그래도 말로는 지지 않았다. 세화는 끝까지 입을 나불거리며 그의 성질을 돋웠다. 결국 여느 때처럼 여운과 단둘이 남아 벌을 받게 되었다.
거기까지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단 말이다. 그런데 왜….
‘대체 왜 나한테 접문을 한 건데?’
정말이지 뜬금없었다. 벌 받으면서 투닥거리다가 잠깐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하필 그때 밤바람이 불었고, 하필 별이 밝았고, 하필 분위기가 이상해져서….
어젯밤을 회상하던 세화의 뺨이 화르륵 타올랐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양 손목을 단단히 붙든 그의 손과 무작정 밀어붙이던 힘, 요령 없이 들이받던 입술의 촉감 같은 것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접문인지 주둥아리 싸움인지 모를 것이 끝나고, 여운은 시뻘게진 얼굴로 숨을 고르다가 그대로 도망가 버렸다. 세화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은 채 한참이나 자리를 떠나지 못했고, 심장이 너무나도 빠르게 뛰어 밤새 뜬눈으로 지새웠다.
‘생각하다 보니 화나네….’
곤륜은 제자들의 혼인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세화도 딱히 여인과의 혼사를 염두에 두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린 마음에 환상이란 게 있었다. 첫 접문, 첫 연정 같은 것 말이다.
그런 첫 접문을 강제로 빼앗긴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오늘 아침, 연무장에서 마주친 여운의 태도는 더욱 어이가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저를 외면하는 눈빛이었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이런 일을 대충 용서하고 넘어갔다가는 제명에 못 죽지.
세화는 주먹을 불끈 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운을 찾아가 잘잘못을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
그가 이 시간에 어디에 있을지는 뻔했다. 세화는 깊숙한 산길을 돌고 돌아 계곡으로 향했다. 여운은 다른 사형제들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목욕을 하니 그곳에 있을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계곡 앞에 서 있는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세화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외쳤다.
“야!”
보는 눈이 있을 땐 꼬박꼬박 사형이라고 불렀지만, 단둘이 있을 때는 호칭에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외침에 여운의 등이 움찔했다.
“너 어제 나한테 왜 그랬냐? 그게 사람이 할 짓이야?”
세화는 앞뒤를 모두 잘라먹고 다짜고짜 따져 물으며 그의 몸을 돌려세웠다.
“어떻게 내 소중한 첫 접문을 그런 식으로 가져가? 어?”
“…….”
“내가 맨날 너 따라다닌다고 그렇게 만만해 보였… 어…? 오….”
화를 내던 세화는 순간 넋이 나가 감탄을 내뱉었다. 돌아선 여운의 앞섶이 완전히 벌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드러난 근육질의 몸이 오늘따라 더 근사했기 때문이었다.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네. 말도 안 나오게.
“아니, 그 뭐냐…. 아무튼 그러면 안 되는 거 몰라? 너 상도덕은 어디다 팔아먹었…어?”
방금 세수했나. 하얀 턱에서 뚝뚝 떨어진 물방울들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모습에 세화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 단정해 보이는 얼굴이 어젯밤에 자신을 몰아붙이던 그 얼굴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분명 매일 보던 얼굴과 몸이다. 지겹도록 익숙한 사람인데 왜… 왜 이렇게 새롭지?
자꾸만 떠오르는 입술의 촉감이 마음을 괴롭게 했다. 세화는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 시선을 피하며 투덜거렸다.
“내 첫 접문 물어내.”
“…뭘 어떻게 물어내.”
“몰라! 네 잘못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
그 말을 끝으로 침묵이 흘렀다. 한동안 말없이 서 있던 여운이 한 걸음 다가오자 세화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불안했다. 그가 무슨 짓을 할까 두려운 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헤아릴 수가 없어서 두려웠다. 항상 먼저 다가가고 장난을 치던 건 저였는데. 그를 동경하고, 친우가 되고 싶다며 따라다니고, 멋대로 기다린 것도 다 저였는데. 겨우 그 접문 한 번으로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어 이제는 그와 눈을 맞추는 것조차 어려웠다.
여운이 다가올 때마다 뒷걸음질 치던 세화는 이내 그에게 팔을 붙들려 도망칠 수 없게 되었다. 피부가 맞닿은 곳이 뜨거워 데일 것만 같았다.
“세화….”
“잠깐! 잠깐, 잠깐만….”
점점 가까워지려 하는 그의 얼굴에 당황한 세화는 다급히 그를 멈춰 세웠다.
“그… 아, 안 되잖아…. 무슨 사내끼리… 아니, 사형제끼리, 아니….”
“한 번만.”
“…어?”
“딱 한 번만 더 할게.”
“…….”
세화는 할 말을 잃고 여운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가 어제부터 왜 이러는 건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정말 마지막 한 번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이걸로 자신의 감정을 정의할 수 있게 된다면.
“진짜… 한 번만 할 거야?”
용기 내서 묻자 여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물기 있는 흰 피부, 젖은 머리, 물방울을 매단 속눈썹 같은 것들을 정신없이 바라보느라 눈앞이 다 어지러웠다.
어지럼증을 견딜 수 없었던 세화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겨울 공기 같은 체향이 훅 끼쳐옴과 동시에 촉촉한 입술이 포개어졌다.
***
청연은 들고 있던 검을 툭 떨어뜨렸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누군가의 기척이 지독하게 익숙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본 그는 묵묵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던 여운과 눈이 마주쳤다.
제가 무슨 말을 하든 전부 들어줄 것 같은 눈빛이었다. 모두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여줄 것만 같았다.
생사의 기로에서 살아 돌아온 그 순간부터 그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하지 못할 것 같아, 청연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던 입술을 열었다.
“네가 좋아, 시랑.”
“…….”
“좋아해. 내 기억이, 몸이, 마음이 네가 좋대. 여전히 너만 보면 설레고 벅차올라.”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진심이었다.
“잠깐만….”
여운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청연에게 다가왔다. 그는 조심스레 청연의 얼굴을 살펴보며 물었다. 다정한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네가 좋아….”
“…세화야.”
“좋은데… 내가… 내가….”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던 청연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내가 그 사람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