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8화
청연과 송원이 서로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을 때, 마침 갑판 위에서 누군가 상단주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송원은 피 묻은 칼날을 청연의 옷자락에 스윽 닦고서는 다시 품속에 넣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쓸모가 없어졌으니 계획대로 강물에 던져버리는 수밖에.”
“…….”
“이제 곧 협곡에 도착할 거야. 그때까지 열심히 기도나 하든가.”
그는 휙 돌아서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이 사라지기 무섭게 청연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많이 맞은 건지 숨만 쉬는데도 온몸이 다 아팠다.
뺨에서 배어 나오는 피를 어깨에 문질러 닦았다. 이곳에 거울이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에서 흐른 피까지 합하면 얼굴이 엉망진창일 테니까. 이 얼굴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면 덜컥 겁이 났을 것이다.
청연은 다시 밧줄을 풀기 위해 애썼다. 거친 밧줄에 손목이 이리저리 쓸려 통증이 생겼지만 개의치 않았다. 탈출을 시도하다가 맞아 죽을지언정, 저놈이 원하는 대로 물에 빠져 죽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갑판 위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청연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작은 틈새로 밖을 내다보려고 시도하며 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단주는 어서 배를 돌리지 않고 뭐 하는 거야? 물건을 다 뺏기려고 작정한 거야?”
“자네는 이번 출항이 처음이지? 진정해. 이럴 때를 대비해서 고용한 무사가 몇 명인데. 통행세만 넉넉하게 챙겨 주면 별문제 없이 지나갈 수 있을 거야.”
“하지만… 헉, 저기 뒤에서도 온다.”
무슨 일이지?
긴장한 청연의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배가 저렇게 많은데?”
“그렇다니까. 우리가 이런 일 한두 번 겪는 것도 아니고.”
머지않아 갑판 위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발소리와 몇몇 뱃사람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거친 목소리의 누군가와 논쟁을 하는가 싶더니, 배 전체가 쿵 하며 진동했다. 배가 무언가에 부딪친 듯했다.
그러자 조금 전 선실에 들어갔던 남자들이 손에 무기를 들고 뛰어나왔다. 눈을 말똥말똥하게 뜬 채 상황을 지켜보는 청연은 안중에도 없는 듯, 그들은 급히 계단을 오르며 외쳤다.
“장강수로채다!”
장강수로채?
청연은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장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수적 집단이었다. 산에는 녹림이라는 이름의 산적이 있다면, 강에는 이들이 있었다. 이번이 첫 출항이라던 상인이 왜 그리 겁을 집어먹었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산적과 수적은 상단의 최대 적수다. 그리하여 규모가 큰 상단의 경우, 먼 길을 떠날 때 그들을 호위할 무사들을 여럿 고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수적이든 상단이든, 싸움이 벌어진다면 서로에게 손해라는 걸 잘 알기에 상단 쪽에서 적당한 선의 통행료를 지불하고 끝낸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조금 전에 했던 말로 미루어보아, 배는 이미 수적들에게 포위당한 것 같았다. 수적 몇몇이 상단의 배로 넘어온 듯, 그들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생생하게 들려왔다.
‘어쩌면 도망칠 틈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저들 사이에 싸움이 붙기라도 한다면…. 그런데 발에 달린 족쇄는 어쩐다.
수적들은 상단주와 통행세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청연은 일이 틀어지기만을 바라며 잠자코 기다렸다.
“지난번보다 열 배나 높은 통행세라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마침 그들이 금액을 이전보다 훨씬 높게 부른 모양이었다. 송원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따져 묻자 수적이 답했다.
“우리 정보통에 따르면 오늘 이 배에 특별히 값진 물건들이 많이 실려있다던데. 물건값이 올라가면 당연히 통행세도 비싸지는 거 아니겠소?”
“지금 그게 무슨….”
“그 정도 금액이 아니라면 차라리 물건을 받아 가는 편이 우리에게는 이득일 터인데.”
걸걸한 목소리의 수적이 그를 협박하고 있었다. 원하는 액수를 받지 못한다면 당장이라도 무력을 사용해 물건을 약탈해가겠다고. 그런데 평소의 열 배라니, 그건 청연이 보기에도 과한 금액이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이 갑판 아래쪽까지 느껴졌다. 언성이 높아지고 분위기가 과열될수록 청연의 가슴도 뛰었다.
‘일단 족쇄를 끊어낼 무기라도 손에 넣어야….’
청연이 무기를 얻을 방법을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머리 위에서 날붙이들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챙하고 들려왔다. 이어서 송원이 외쳤다.
“이, 이 무슨 경우 없는!”
협상이 마음처럼 되지 않자 수적 쪽에서 먼저 공격을 가한 모양이었다. 다음 일은 뻔했다.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모든 일이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고함과 병장기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한데 뒤섞였다. 저들이 싸움을 끝내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혹시 선실에 남은 무기가 있을까.’
청연이 낑낑거리며 아픈 몸을 끌고 선실 쪽으로 기어가려 할 때였다. 혼란을 틈타 누군가가 계단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한 청연은 놀라 숨을 죽였다.
그는 계단을 모두 내려오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객주님?”
그 목소리를 들은 청연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몸의 힘이 풀리며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제하야.”
“객주님!”
안도한 청연과 달리, 그의 얼굴을 본 제하의 표정은 사색이 되었다. 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청연의 앞에 꿇어앉았다. 얼굴을 감싸 쥐지도 못하고 그의 두 손이 덜덜 떨렸다.
“객주님, 어, 얼굴이… 피가… 이게….”
“괜찮아.”
“어떻게 이런 짓을….”
지금 중요한 건 이 얼굴 따위가 아니라 여기서 탈출하는 거였다. 청연은 충격과 분노로 떨고 있는 제하를 진정시키기 위해 반복해서 말했다.
“괜찮아, 제하야.”
네가 구하러 왔으니까.
***
오늘 아침, 제하는 일찍이 잠에서 깨어났다. 사실 어젯밤에 객주님께서 친우라는 손님과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엿듣게 되었다. 아침 해가 뜨자마자 낚시를 하러 가자던가.
종일 청연의 뒤를 따라다니며 성가시게 굴었던 제하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내심 반성했다. 그래서 친우분과 편히 어울리실 수 있도록 모르는 척하던 참이었다. 그건 곤륜파 여운 도장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근처 산에 올라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운기하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산에서 내려왔을 땐 이미 오후가 되어 있었다. 객주님께서 돌아오셨을까 생각하며 객잔으로 걸어가던 그는 저를 향해 달려오는 여자를 보고 몸을 굳혔다.
“신, 아니, 청연이가…!”
객주님과 함께 길을 나섰던 친우분이 혼자서 돌아와 울먹거리며 사정을 이야기하는 내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핏자국, 커다란 배, 상단의 깃발 같은 단어들이 머릿속을 휘저어놓았다. 객주님의 친우분이 어떻게 자신을 알고 있는지 따위는 고민할 겨를도 없었다.
제하는 여운 도장이 객잔에 돌아오거든 그에게도 이 일을 알리라는 말을 남겨 놓고 곧장 길을 떠났다.
경공은 배보다 훨씬 빠르니 따라잡는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넓은 강에서 어떻게 배에 오르느냐가 문제였다. 장강의 규모를 고려하면 헤엄을 치기에는 무리였고, 청연을 데리고 나올 때 탈 배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수적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대충 얼굴에 더러운 흙을 묻히고 너덜너덜한 피풍의를 뒤집어쓴 뒤 그들이 노예처럼 부리는 일꾼들 사이에 숨어드니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애초에 내부 결속력이 약한 집단이었다.
제하는 슬쩍 헛소문까지 흘렸다. 상단이 이번에는 아주 값비싼 물건들을 많이 챙겨 왔다고. 그렇게 해서 수적과 상단 사이에 싸움이 붙으면 혼란을 틈타 청연을 데리고 나올 작정이었다.
이런 식으로 복잡하게 일을 벌이는 까닭은 살생에 익숙해져서는 안 된다는 스승님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놈들을 모두 해치우고 싶었고 그럴 자신도 있었지만, 그랬다가는 몇 명의 목숨을 앗아 가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제하는 속으로 다짐했다. 꼭 필요한 경우에는 살생을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
제하는 피풍의를 집어던지고 감춰둔 검을 꺼내 청연의 손목에 묶인 밧줄을 끊었다. 그리고 발목의 족쇄 또한 내리쳐 단숨에 부숴버렸다. 청연은 빨갛게 부어오른 손목을 돌리며 그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내 꼴이 많이 안 좋긴 한가 보다.’
애가 저렇게 부들부들 떠는 걸 보면.
청연은 갑판 위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귀를 기울이며 그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빠져나가지?”
“수적들이 끌고 온 배 중에 작은 배가 한 척 있습니다. 그걸 빼앗을 겁니다.”
애써 담담한 척 말하는 제하에게서 순간 살기가 흐른 것 같았다.
“방해하는 자는 모조리 벨 것입니다.”
“아….”
말문이 막힌 청연은 입을 굳게 닫고 그의 뒤를 따랐다. 계단을 올라가니 갑판 위는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상인들은 몸을 숨기느라 바빴고 수적들과 무사들이 뒤엉켜 싸우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쪽으로.”
제하는 온몸으로 청연을 보호하며 그를 이끌었다. 이따금 정체 모를 누군가가 달려들면 검으로 가볍게 쳐냈다. 그에게는 아주 쉬운 일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선미 쪽으로 나아갔다.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내려다보니 제하가 말한 대로 작은 배 한 척이 떠 있었다. 제하는 긴 다리로 난간을 훌쩍 넘어가더니 청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몰아치는 물살에 배 전체가 기우뚱하고 크게 흔들렸다. 제하의 손을 잡으려던 청연은 중심을 잃고 넘어져 몇 바퀴를 굴렀다.
“객주님!”
배는 마치 폭풍우를 만난 것처럼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화창하다 못해 쨍쨍한 날씨인데, 물살은 여느 때보다 거칠었다. 마치 이 배를 부수고야 말겠다는 것처럼.
‘설마 여기….’
반대쪽 난간을 잡고 버티던 청연은 간신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협곡으로 향하는 진입로가 보였다. 구당협이었다.
“객주님, 제가 갈 테니 거기 가만히 계세요!”
제하가 외쳤다. 그는 다시 난간을 넘어 곧장 청연에게 달려오려고 했으나 칼을 들고 덤비는 수적들에게 막혀 검을 몇 번 휘둘러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 배는 미친 듯이 흔들렸다.
제하를 기다리던 중, 청연은 짐 더미 뒤에 숨어 마찬가지로 몸을 사리고 있는 송원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 역시 싸움에 휘말려 상처를 입었는지 값비싼 비단옷에 피를 묻힌 채였다.
‘가만.’
갑작스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에 청연이 움찔했다. 원작에서 송원은 산을 넘다가 녹림에게 죽었는데.
송원… 상단… 녹림… 장강수로채… 제하….
생각을 이어가던 청연은 고개를 돌려 요동치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저 물속에 있는 것의 정체를 깨달은 순간,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오늘 아침에 왜 낚시를 하러 나왔고, 왜 하필 거기서 송원과 마주쳤으며, 제하는 왜 수적과 함께 왔는지. 일련의 사건들이 원작과 다른 듯하면서도 딱 들어맞았다.
“제하… 제하야!”
청연은 다급히 제하를 불렀다. 마침 수적 몇 명을 베어낸 그가 청연을 바라보았다.
“…객주님?”
달려오려다 말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제하의 표정이 이상했다. 그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청연의 배를 응시하고 있었다.
‘왜 저러지?’
청연은 그의 시선을 따라가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커다란 칼날이 있었다. 등에서부터 시작해 몸을 뚫고 나온 거대한 날붙이가.
몸에 박힌 칼날이 빠져나가자 피가 줄줄 쏟아져 나왔다. 아무리 손으로 막아 보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청연은 망연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제하와 시선을 맞췄다.
“제하….”
배가 다시 한번 기울었다.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청연의 몸을 기운 센 물살이 집어삼켰다. 차가운 강물 속으로 떨어지며, 마지막으로 두 눈에 가득 담은 건 제하의 흔들리는 갈색 눈동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