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화
제하는 어두컴컴한 주방을 노려보았다. 어제 그 일이 있고 나서 숙수님은 객잔에 출근하지 않으셨다. 객주님께서는 심란하신지 종일 한숨만 푹푹 내쉬더니 일찍이 방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그분께서 속상해하시는 모습을 보는 건 제게도 고역이었다. 늘 좋은 것만 보시고 행복하시기를 바랐다. 누가 되었든 그분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자는 벌을 받아야 마땅했다.
계획대로였다면 이미 스승님을 도우러 떠났어야 했지만, 객주님의 곁에 있어 드리고 싶어 하루 더 머물기로 했다. 예전에도 기분이 안 좋으실 때 옆에서 이런저런 말을 걸면 곧잘 웃어 주시곤 했으니까.
제하는 계단을 올랐다. 청연의 방문 틈새로 빛이 새어 나오는 걸 봐선 아직 깨어계신 모양이었다. 조심히 문 앞으로 다가간 그는 문을 똑똑 두드렸다.
“객주님.”
“들어와.”
그를 부르자마자 들려온 대답에 기분이 좋아진 제하는 씩 웃으며 문을 열었다. 방에 들어서자 보인 건 탁자 위에 펼쳐진 종이와 먹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술병과 잔이 놓여 있었다.
“술 마시고 계셨어요?”
“조금. 이리와 앉아.”
제하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종이 위에 쓰인 글자를 읽어 보니 누군가에게 서신을 쓰시던 중인 것 같았다. 남의 서신을 훔쳐보고 싶지는 않았던지라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청연이 낮게 웃었다.
“봐도 돼.”
“누구에게 서신을… 어? 누님이 있으십니까?”
“응. 친누님은 아니지만.”
종이 위에 고운 서체로 써 내려간 편지에는 그간의 안부와 그리움이 듬뿍 묻어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한 사람에게 전하는 서신인 듯했다.
“누님과 어찌 그리 오래 떨어져 계셨습니까?”
“내가 못난 아우라서.”
“에….”
객주님께서 그러셨을 리가. 좀 더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스승님께서는 남의 가정사에 함부로 관심을 가지면 안 된다고 하셨다.
제하는 춤을 추듯 미끄러지는 붓을 바라보았다. 그의 서체만 놓고 따지자면 마치 서신이 아니라 서글픈 시가를 써 내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어려서부터 느꼈지만 객주님께선 정말 명필이셨다.
“저도 글씨를 잘 썼으면 좋았을 텐데.”
“충분히 잘 써.”
“저야 바르게 쓰는 것이 전부이지 않습니까. 객주님의 서체는 쓰는 사람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마치 시가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 역시 돌아가신 어머니를 닮았나.”
어머니?
오늘따라 객주님께서 안 하시던 가족 이야기를 꺼내시는 게 이상했다. 아무래도 술기운 탓인가. 아니면 어제 숙수님 일의 영향이 컸던가.
“숙수님 일은 어찌하실 생각이세요?”
“글쎄. 종일 고민해봤는데 내가 처분을 내릴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아.”
“그럼요?”
청연은 말없이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지난번 마차에서 보았던 그 반지였다. 무슨 의미라도 담긴 물건일까 고민하던 제하는 그에게 위로를 건넸다.
“걱정 마세요. 이제 주방에 보조 숙수분들도 많이 계시고 하니…. 물론 객주님께서도 요리를 잘하시고요.”
“그건 또 아버지를 닮았더라고.”
“…예?”
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객주님의 양친께선 어떤 분들이셨습니까?”
“나도 잘 기억은 안 나. 그냥 좋은 분들이셨다는 것밖에는….”
“그리우십니까?”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무언가 이상했다. 제하는 아주 오래전에 청연이 스치듯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부모와 함께한 좋은 기억이 많지 않아 딱히 그립지 않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내 기억이 잘못됐나?’
어찌 되었든 그의 목소리가 서글프니 마음이 아팠다. 제하는 그의 한쪽 손을 끌어다가 제 뺨 위에 얹어놓았다.
“너무 슬퍼 마세요.”
어려서는 이렇게 해드리면 좋아하셨는데. 젖살이 내린 탓에 그 작은 위로마저 어렵게 되어 버렸다.
제하의 얼굴을 살짝 어루만지던 청연은 작게 미소 짓더니 입을 열었다.
“제하야.”
“예?”
“너는 내가 왜 좋아?”
“…….”
순간 당황하여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얼굴에 열이 몰리고 뺨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 그런 걸 왜… 물으시는지….”
“궁금하잖아. 나도 좀 알자.”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지난번 마음을 털어놓았을 때는 빨리 말씀드리고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에 급급해 부끄러움도 몰랐는데, 이리도 차분하게 물어오시니 무어라 답을 드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야… 객주님께서는….”
“나는?”
“어려서 제 목숨을 구해 주신 은인이시고…. 항상 제게 친절하시고, 또….”
얼굴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이런 이야기를 내 입으로 직접 뱉고 있다니.
“강한 분이셔서 좋아요….”
“내가?”
청연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내가 겁이 얼마나 많은데. 나 벌레도 무서워해.”
“벌레 정도는 제가 다 잡아드리겠습니다.”
제하가 내놓은 수줍은 대답에 그는 작게 웃으며 종이 위에 마지막 한 글자를 적은 뒤 붓을 내려놓았다. 완성된 서신이 탁자 한쪽에 곱게 놓였다.
“…가끔은 객주님께서도 제게 의지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용기 내어 뱉은 말이었다. 좋아하는 이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어려서부터 변함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청연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하야. 나는 겁이 많아서 누군가한테 의지하게 되는 게 두려워.”
“…….”
“몸도 약한데 의지할 상대가 생기면 마음까지 약해질까 봐. 더군다나 너는 내가 어려서부터 봐온 친동생 같은 존재잖아. 지켜 주지는 못할망정 너한테 기대면 안 될 것 같아.”
그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음을 거절하려는 거였다. 그의 심중에 제 자리가 없음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막상 이런 말을 들으니 서운한 감정을 감추기 어려웠다.
“제가 그리도 미덥지 않으십니까?”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아니면 따로 마음에 둔 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
청연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스치는 걸 목격한 제하는 착잡해졌다. 역시 곤륜의 그자인가.
어려서는 청연의 곁에 머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나이를 조금 더 먹고, 키가 조금 더 자라면 그와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과정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게 행운이라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과거를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직도 그에게는 어린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비참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가깝게 지내지 않았을 것을.
“기다리겠습니다.”
“제하야….”
“기다릴 것입니다. 그리 쉽게 접을 마음이었다면 애초에 털어놓지도 않았습니다.”
당신이 나를 충분히 믿고, 내게 의지할 수 있을 때까지. 이 자리에 있겠습니다.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른다 하더라도.
***
다음 날 아침, 제하는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잠에서 깨어났다.
청연에게 호언장담한 것과 별개로, 슬픈 건 역시 슬픈 거였다. 베개 위에 눈물 자국이 얼굴 모양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한심한 놈….”
객주님께 예쁘게 보여도 모자랄 판에 눈이 부을 정도로 질질 짜고 있었다니.
제하는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아침 공기 덕분에 창틀의 온도가 서늘했다. 허리를 숙여 거기에다 얼굴을 가져다 대니 눈가의 열기가 조금 식는 듯했다.
내가 어리게만 보여 정인 삼을 수 없는 거라면 그걸 극복할 만한 매력을 보여드리자.
‘일단은 외양부터 단정히 하고.’
부기가 가라앉은 뒤 제하는 침의를 새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깔끔하게 올려 묶었다. 면경에 비친 제 모습이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남이라는 말을 자주 들어온 터라 외모엔 자신감이 있었다. 물론 객주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단장이 거의 끝나갈 때쯤이었다. 갑자기 아래층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싶어 급히 준비를 마무리한 제하는 방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 일 층에 도착한 그는 식당 안의 풍경을 보고 제 눈을 의심했다.
“이게… 다 뭡니까?”
“아, 일어났어? 오늘따라 더 빛이 나네.”
계단 앞에 서 있던 청연은 어젯밤 일 때문인지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반면에 제하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식당을 훑어보았다.
“음식이 왜 죄다 주방 밖에….”
김을 모락모락 내뿜는 온갖 종류의 요리가 각각 커다란 대접에 담긴 채 탁자 위에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심지어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손님이 수십 명씩 온다고 해도 나누어 먹을 수 있을 만한 양이었다.
“아직 아침 장사를 시작하기도 전인데 왜 이리하시는 겁니까? 예약 손님이라도 받으셨습니까?”
“그게….”
청연은 머쓱하게 웃으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해우가 오랫동안 숙수로 있었잖아. 그런 애가 갑자기 안 나오니까 자꾸만 주문이 꼬이더라고. 어제도 몇 번이나 주문이 잘 못 나가서 점소이가 애먹었대.”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그냥 많이 팔리는 요리 위주로 다 만들어 놨어. 알아서들 가져다 드시라고.”
“…예?”
손님들이 요리를 알아서 가져다 드신다고? 그게 가능한 건가.
어안이 벙벙해진 제하는 한쪽 구석에 쌓여 있는 빈 접시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객잔 문이 열린 뒤 청연은 대문 앞에 서서 손님들에게 입장료를 받기 시작했다. 한 끼 식사에 지불하기에는 비싼 금액인지라 모두 망설이는 분위기였으나, 몇 번이고 무제한으로 음식을 가져다 먹을 수 있다는 말에 조금씩 설득되어 들어왔다.
그렇게 손님을 받던 청연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창고에서 나무판자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붓을 들어 거침없이 네 글자를 써 내려갔다.
이윽고 객잔의 대문 앞에 놓이게 된 판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조식비패(朝食備覇). 아침 식사로 으뜸가는 것만을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