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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객잔 정상 영업합니다 (69)화 (70/145)

069화

‘네가 있어 우리 곤륜의 미래가 밝구나.’

여운이 어린 나이에 곤륜파 제자로 입문한 뒤 항상 들어온 말이었다. 또래에 비해 조숙하고 타고난 재능이 하늘을 찌른다는 칭찬도 함께였다. 그가 훌륭한 무인으로 성장해 사문의 이름을 빛낼 것이라고 모두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주변의 평가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최대 관심사는 그저 수련, 또 수련이었다. 그중에서도 검법에 미친 듯이 매진했다. 아직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날이 서지 않은 수련용 검을 사용하면서도 그 검에 검기를 맺을 정도였다. 그 외 다른 일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게 바로 그가 심부름을 하게 된 계기였다.

다른 어린 제자들과 달리 산 아래의 세속적인 것에는 하등 관심이 없었고, 어른들도 다니기 버거워하는 험한 산맥을 단숨에 오르내리니 자잘한 심부름이 계속해서 주어졌다.

그 결과 안 그래도 부족한 수련 시간을 빼앗기게 되었지만, 그는 불평 한마디 해본 적 없었다. 자신이 속한 사문을 사랑했고, 평생 그 안에 몸담을 거라 여겼다. 그러니 심부름 같은 건 정말 별거 아니었다. 그 애를 만나기 전까지는.

‘너 방금 내 팔 부러뜨린 거야? 멋져!’

부러진 팔을 덜렁거리며 눈을 빛내는 그 애에게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광기가 느껴졌다. 자꾸만 이름을 알려달라며 쫓아오는 게 성가시고 부담스러웠다. 대체 무슨 이유로 제게 관심을 가지는지 알 수 없었다.

마을에 내려갈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뒤를 따라오고,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을 줄줄이 늘어놓는 그 때문에 머리가 다 아팠다. 이름은 세화, 나이는 열다섯, 근방의 기루에서 나고 자랐다. 일부러 외우려던 건 아니었다. 반복된 주입의 결과였다.

그의 옷에는 매번 핏자국이 남아 있었고 몸에는 싸움의 흔적이 역력했다. 게다가,

‘역시 사람들이 하는 말 틀린 거 하나 없었어. 정파니 뭐니 하는 놈들도 결국엔 입으로만 의협이 어쩌고 하는 위선자들이라고.’

그런 말까지 들었으니 절대로 그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자신이 뱉은 말이 얼마나 경솔했는지 깨닫게 해 주고 싶었지만 더 이상 엮이기 싫어서 대충 넘어갔을 뿐이다.

그랬을 뿐인데….

몇 달간 저를 열심히 따라다니던 그가 보이지 않자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혹시 또 누군가를 괴롭히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되었다. 결국 저잣거리에서 그를 찾아내 뒤를 밟았고, 웬 절벽에 올라 하염없이 하늘만 올려다보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친우가 되고 싶다고 졸졸 쫓아오며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던 때와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늘 혼자였다. 제 곁에 있을 때도, 제가 외면하고 떠나버려 그 자리에 남겨졌을 때도.

왠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동안 그 자리에 붙박여 그의 잠든 모습만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

정신을 차리고 하산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 그대로 떠나려 했는데, 이 시간에 산속에서 잠들어 있는 그 애가 마음에 걸렸다.

‘다시 가서 깨워야 하나. 그러면 여기까지 따라온 걸 들킬 텐데.’

그렇게 오도 가도 못하고 한참을 고민하던 중에 늑대에게 쫓기던 남자가 뛰어 내려왔고, 그 애를 돕기 위해 다시 산을 올랐다. 그날은 밤늦게 사문에 돌아온 탓에 난생처음으로 벌까지 받았다.

창피하고 숨고 싶었다. 벌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동안 그 애를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였다. 의와 협을 행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해 놓고 엄한 사람 팔이나 부러뜨렸다는 게 부끄러웠다.

그 후로 심부름을 마치면 저도 모르게 기루로 향하게 되었다. 정작 그 애와 마주쳐 함께 시간을 보낸 건 단 한 번이었고, 그 외에는 혼자서 잠시 기다리다가 발걸음을 돌렸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거리를 지나치는 행인들의 입에서 나온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저쪽 기루 루주가 괴한에게 살해당했다던데?’

그 뒤로 세화는 보이지 않았다. 누각 위를 아무리 오랫동안 올려다보아도 그곳에 저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혹시 다친 건 아닐까. 아니겠지. 그저 루주의 죽음을 추모하느라 정신이 없는 거겠지. 혹시 나를 잊은 걸까. 설마.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그토록 좋아하던 검마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건 정말 큰 일이었다. 머리가 어떻게 된 걸까 싶었다.

‘손목도 잡고 팔도 부러뜨렸으면 그게 친우지 뭐야.’

친우…. 세화의 입에서 나왔던 친우라는 단어를 곱씹던 여운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일로 수련을 게을리해서는 안 됐다.

그리하여 일부러 기루를 피해서 다녔다. 일을 마치면 곧장 돌아오기 바빴고, 그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를 만나지 않았던, 수련밖에 몰랐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행인들의 입에서 나온 말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몽연루가 밤새 불타서 이제는 흔적만 남았다는구먼.’

정신없이 달려간 길의 끝에서 담벼락 아래 주저앉아 있는 세화를 발견했다. 한순간에 불안감이 가시고 안도감이 물밀듯이 차올랐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의 폭풍 속에, 여운은 생각했다.

‘내 친우는 무사했구나.’

“사형!”

생각에 잠겼던 여운은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퍼뜩 뒤를 돌아보았다.

“여운 사형,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제가 몇 번을 불렀는데.”

그의 사제 여현이었다.

“요즘 진짜 이상하십니다. 자꾸만 정신을 쏙 빼놓으시고 불러도 못 들으시고.”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라면 다행이긴 한데, 사형이 이러시는 건 처음 봐서 걱정했습니다. 아, 그나저나 그 얘기 들으셨어요? 지금 사문 앞에 누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던데.”

“무슨 소리야?”

“아니 글쎄, 누가 찾아와서 제자로 받아달라고 땡깡을 부리고 있다는 겁니다. 입문 시기가 아니라서 안된다고 돌려보내려고 해봐도 막무가내랍니다. 입문 시험이라도 보게 해 달라고요. 그때까지 거기서 무릎 꿇고 앉아 있을 거라고요.”

“…….”

“언제까지 그러고 있나 가서 구경이라도 해볼 참이었는데… 어라? 사형, 어디 가세요!”

여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쏜살같이 멀어지는 여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사형은 요즘 이상해진 게 틀림없었다.

***

세화는 이를 악물고 산을 올랐다. 이렇게 크고 험한 산을 매번 오르내렸다니, 여운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나마 짐이 없어 다행이었다. 사실 모든 게 불타 없어진 바람에 빈털터리가 된 거였지만.

지금 세화가 지닌 물건은 단 두 가지였다. 목에 매단 반지와 품속에 소중히 넣은 쪽지 한 장.

‘앞으로 내가 일할 기루 이름이랑 위치야. 무슨 일 생기면 꼭 연락해야 해. 알겠어?’

그렇게 말하며 마지막으로 안아 주던 보화 누님의 품이 벌써 그리웠다. 보화가 마차를 타고 호북을 향해 떠날 때까지, 그리고 다른 누님들과 작별 인사를 할 때까지 세화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누님들께서 홀로 남을 아우를 걱정하시지 않도록.

커다란 산맥을 돌고 돌아 끝끝내 도관을 찾아낸 세화는 완전히 탈진 상태였다. 안 그래도 다친 몸에 불난리까지 겪고 험한 산을 기어오르느라 딱 죽기 직전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올라왔는데 입문 시기가 아니라서 안 된다니, 여운을 기다리던 때와 마찬가지로 오기가 발동했다.

‘받아 줄 때까지 버텨보지, 뭐.’

여기서 밤새 무릎 꿇고 추위에 떨다가 굶주려 죽어 간다면 그땐 받아 주지 않을까. 그래도 명색이 도사들인데 어리고 불쌍한 놈을 그냥 외면하지는 않겠지. 그런 생각이었다.

꿇어앉은 지 어느새 두 시진이 지나가고 있었다. 다리에는 감각이 없었고 매서운 바람에 코끝이 시렸다. 음식을 먹은 지 오래되어 배도 고팠다. 세화는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부릅뜨며 버텼다. 누군가가 이리로 걸어오고 있는 것도 모르는 채.

세화를 잠시 내려다보던 여운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곁에서 같은 자세로, 같은 곳을 바라보며 꿇어앉았다.

인기척을 느끼고 눈길을 돌린 세화는 제 곁에 결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여운의 하얀 얼굴을 발견했다. 그를 보고 놀란 것도 잠시, 기분 좋은 웃음이 배시시 새어 나왔다.

‘내 사람 보는 눈은 틀리지 않았다니까.’

그와 함께라면 며칠을 더 앉아 있어도 힘들지 않을 것이었다.

***

청연은 어두운 방 안에서 눈을 떴다. 처음 보는 낯선 객잔 방이었다.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 아래 여운의 얼굴이 보였다. 침상 머리맡에 걸터앉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무치게 그리웠던 얼굴이.

“사형….”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청연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오랜만에 이렇게 불러 보고 싶어서….”

“너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머리를 쓰다듬는 여운의 손길이 마치 꿈만 같았다. 이게 정말 꿈이라면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시랑.”

“응.”

“보고 싶었어.”

청연은 제 머리칼을 만지던 여운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대로 끌어내려 입술에 가져다 대니 익숙한 체향이 느껴졌다. 차가운 겨울 공기를 닮은, 제가 그리도 좋아하던 향이었다.

“계속 보고 싶은데… 머리가 너무 아파.”

“더 자. 옆에 있을게.”

“그러지 말고 이리 들어와. 안아 줘.”

청연은 덮고 있던 이불을 들추며 옆자리를 통통 두드렸다. 무거운 눈꺼풀은 이미 감긴 채였다.

이윽고 옆자리가 사람의 온기로 채워지자 만족스러운 웃음이 나왔다. 그를 끌어안으며 품속으로 파고드니 마주 안아 주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이마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앉는 입술 또한 기꺼웠다.

‘평생 이러고 있고 싶다.’

다른 복잡한 문제들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도록.

고요한 방 안, 청연은 여운의 품 안에 안겨 그의 심장 박동에 귀를 기울였다.

비무대회 같은 건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사실 비무대회를 보러 가기 전에 여운과 마주친 게 천만다행이었다. 대회장에 이 몸으로 걸어 들어갔다가는 어떤 일이 생겼을지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애초에 여길 오겠다고 생각한 것부터가 어리석었다.

청연은 곤륜의 파문 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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