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화
표국에서 나온 사람은 세화의 나이 또래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에 눈매는 날카로웠고, 그가 입은 흰옷에는 곤륜을 상징하는 용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곤륜파의 본산 제자들이 입는 도복이었다.
그를 볼 때마다 꼭 산에서 내려온 하얀 새끼 늑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눈 덮인 설산에 잘 어울릴 것 같은 그런 외모였다.
세화는 지붕 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땅에 발을 디뎠다. 사뿐사뿐 다가오는 그의 모습을 발견한 소년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걸음을 빨리했다. 말도 섞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또 보네?”
그는 세화의 인사를 가볍게 무시했다. 그에 질세라 세화도 발을 빠르게 놀리며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인사도 안 해 줄 거야? 서운하네. 나 한참 동안 너만 기다렸는데.”
“…….”
“진짜야. 오늘은 얌전히 기다리기만 했어. 싸움도 안 했다고.”
그러자 소년의 눈길이 세화의 옷에 묻은 핏자국으로 향했다. 조금 전 기루에서 손님을 때려눕히고 손에 묻은 피를 닦아 낸 자국이었다.
“이건 아까 코피가 나서 닦은 거야. 어젯밤에 책 좀 읽느라 밤을 새웠더니 아침에 코피가 나더라고.”
세화는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물론 밤새 책을 읽었다는 건 거짓이 아니었다. 보화 누님이 좋아하시는 언정소설 몇 권을 훔쳐다 읽은 건 사실이니까.
“그나저나 우리가 우애를 다진 지 벌써 몇 달짼데 여태 서로 이름도 모르고 지냈네. 나는 유세환데 네 이름은 뭐야? 아, 이런 식으로 물으면 안 되는 건가?”
그는 잽싸게 소년의 앞을 가로막고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도장의 도호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
“이렇게 하는 거 아니야? 내가 틀렸어? 야, 천천히 가.”
세화는 또다시 외면당했지만 굴하지 않고 그의 뒤를 쫓았다. 이 정도 냉대는 이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냉대가 문제인가. 더 얻어맞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인간적으로 이름 정도는 알려 주라. 너 그때 내 팔 부러뜨리고 치료비도 안 줬으면서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소년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세화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땐 네가 무고한 양민을 해치려 했잖아.”
“무고하긴 뭐가 무고해. 너 그거 다 오해야. 그 아저씨가 우리 기루에 올 때마다 누님들 얼마나 못살게 구는지 알아? 그리고 해치려고 한 것도 아니야. 난 그냥 그 아저씨 바지 앞섶이나 찢어서 재미 좀 볼까 했던 거고, 마침 품속에 단검이 있었고, 그래서….”
“저리 가.”
귀찮아 죽겠다는 양 눈을 흘기고 다시 걸음을 재촉하는 그를 끈질기게 쫓으며, 세화는 그와 처음 만난 날을 회상했다.
그날 세화는 저자에서 간식거리나 사 먹을까 하여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던 중, 마침 기루에서 무례하게 굴기로 악명 높은 왕 씨를 발견했다. 주변에 사람도 많겠다, 소소한 장난을 치기에 적절한 때인 것 같아 그는 품속에 지니고 다니던 단검을 꺼내 들었다.
말 그대로 그저 바지를 찢으려 했을 뿐이다. 지나다니는 사람들 앞에서 망신이나 주고 끝내려 했지, 절대로 그의 양물을 자르겠다든가 하는 목적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어디선가 쏜살같이 나타난 저 애에게 손목을 잡히고 만 것이다.
세화는 잡히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그의 팔을 비틀어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손이 그의 몸에 닿기도 전에 날카로운 손날에 막히더니, 이윽고 단검을 들고 있던 팔에 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오른팔이 부러진 뒤였다.
그때 세화가 느낀 감정은 수치심도, 두려움도 아니었다. 그저 그의 정체가 궁금했다. 이 동네 또래 애들 얼굴은 다 꿰고 있는 제가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인 데다가, 손날로 내려쳐 팔을 단숨에 부러뜨리다니. 진심으로 흥미로웠다.
이후 그를 따라다니기 시작한 세화는 그가 항상 입고 다니는 옷이 곤륜파의 도복이며, 종종 심부름 비슷한 것을 하러 하산해 표국에 들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외출할 때면 그가 오든 말든 표국 앞에서 기다리는 게 일상이 되었다.
물론 돌아오는 반응은 언제나 오늘처럼 차가웠지만.
“나이는 몇이야? 나랑 비슷해 보이는데. 나보다 한두 살 아랜가?”
“…….”
“하긴, 우애를 다지는 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어. 나는 그런 거 신경 안 쓰니까 형님이라고 부를 필요 없어.”
“아까부터 무슨 우애 타령이야.”
“손목도 잡고 팔도 부러뜨렸으면 그게 친우지 뭐야.”
“너랑 그딴 거 안 해.”
“안 하면 후회할걸? 내가 나름대로 여기 정보통이라 요리 맛있게 하는 집 많이 아는데.”
그때 두 사람의 등 뒤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형! 여운 사형!”
동시에 굳어지는 그의 표정을 목격한 세화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도호가 여운이구나?”
“…아니야.”
반 박자 늦은 대답이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이어서 그와 같은 도복을 입은 소년이 헐레벌떡 달려와 눈치도 없이 말했다.
“같이 가요, 여운 사형. 잠시만 기다려 달라 말씀드렸는데 어찌 그리 빨리 가십니까. 무슨 급한 용무라도… 어, 이분은 누구십니까?”
“말하는 돌멩이.”
뭐…? 마, 말하는 뭐…?
굳어 버린 세화는 할 말을 잃고 여운의 냉담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세화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제 갈 길을 가기 바빴다. 사제와 함께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세화는 순간 짜증이 치밀었다.
“야!”
여운의 걸음이 멈추고, 세화를 돌아보는 그의 얼굴에 성가심이 잔뜩 묻어났다.
“내가 말했잖아. 그거 다 오해였다고. 못된 놈 혼내 주려다가 팔까지 부러졌는데, 진짜 무고한 사람은 나 아니야? 그런데 뭐? 말하는 돌멩이? 이제 인간 취급도 안 해 주냐?”
“애초에 인간 취급 한 적 없는데.”
“와… 너무하네. 역시 사람들이 하는 말 틀린 거 하나 없었어. 정파니 뭐니 하는 놈들도 결국엔 입으로만 의협이 어쩌고 하는 위선자들이라고.”
“뭐?”
순간 분위기가 급격하게 험악해졌다. 세화는 제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걸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이미 뱉은 말을 취소하고 싶지도 않았다. 멋대로 오해해 놓고 해명은 들은 척도 않는 여운에게 막 정이 떨어지려던 참이었다.
친우가 되고 싶다고 몇 달을 매달려 봤자 진척도 없는데 계속 가까이해서 뭘 하겠는가. 어차피 저와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었다. 성격도, 살아온 환경도, 앞으로 나아갈 길도.
“그렇잖아. 제대로 사실 관계 따져 보지도 않고 눈에 보이는 것만 곧이곧대로 믿잖아, 너.”
그러자 여운이 그에게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어린 나이임에도 매서운 기세였다. 이번에는 또 어디가 부러질까. 세화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저따위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걸.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을 때, 여운의 손이 세화에게로 뻗어 왔다. 세화가 몸을 피하려던 순간, 빠르게 손목을 낚아챈 여운이 그의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매번 까져 있는 손등.”
그러고는 손목을 놓더니 세화의 옷자락을 툭툭 쳤다.
“하루가 멀다고 묻어 있는 핏자국.”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세화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품속에 숨기고 다니는 단검.”
그는 곧은 시선으로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네 말대로야. 나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어.”
“…….”
“그래서 네 말은 못 믿겠다.”
세화는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노려보았다. 홱 돌아선 그가 사제와 함께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
“얘가 웬일이래. 평소에는 해 지기 전까진 절대 안 들어오더니 이렇게 일찍 기어들어 오고.”
보화는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세화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거기다 기운도 없어 보이네. 무슨 일이야?”
“기운이 없긴요. 이렇게 쌩쌩한데.”
“아니야. 이 얼굴은 내가 알던 세화가 아니야.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해.”
“그냥… 어떤 재수 없는 놈 때문에요.”
“재수 없는 놈? 너 설마 또 싸웠니? 사고 친 거 아니지?”
“거 누님도 참….”
대답할 기력이 없었던 세화는 별일 없었다고 대충 둘러대며 계단을 올랐다. 그저 몸이 조금 피곤한 것뿐이었다. 지금까지 친우 하나 없이 잘만 살아왔는데 그 애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정신적 타격을 입었을 리 없다.
“그나저나 내 책이 몇 권 없어졌던데, 네 짓이지?”
“책이라니 무슨 책이요?”
“내가 읽던 언정소설 말이야. 너 말고 그걸 훔쳐 갈 사람이 어디 있어?”
“에에? 소화 누님이면 몰라도 저는 아닙니다.”
“거짓말하지 말고 빨리 내놔. 이 공자랑 장 소저랑 딱 이어지려던 참이었는데 끊겼잖아.”
“아, 그거 배 공자랑 이어지던데요.”
“뭐? 배 공자랑 장 소저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아뇨, 배 공자랑 이 공자가요.”
“…죽을래?”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 복도에 늘어선 방문 중의 하나가 열리더니 누군가가 방 안에서 걸어 나왔다. 별생각 없이 길을 비켜 주려던 세화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랐다.
평범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검은색 가면을 쓰고 있었다. 이마 위에 뿔이 두 개 달린 이상한 모양의 가면을.
하나부터 열까지 수상한 사내였다. 가면을 쓴 것도 그렇고 긴 머리를 풀어 헤쳐 허리까지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린 것도 그랬다. 그가 느릿한 발걸음으로 곁을 지나쳐 갈 땐, 그에게서 느껴지는 냉기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세화는 가면에 뚫린 구멍 사이로 그와 잠시 눈이 마주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 세화는 보화에게 물었다.
“저 이상한 자는 누구입니까?”
“너 저분 몰라? 루주님 손님이잖아.”
“루주님 손님이요? 저는 처음 보는데….”
“아, 주로 밤에 오시는 분이라 너는 못 봤나? 아무튼 가끔 저렇게 해 지기 전에도 오셔.”
“그 기분 나쁜 가면은 뭔데요?”
“입 좀 조심해. 손님한테 기분 나쁜 가면이 뭐야?”
보화는 세화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한 대 때리고 말했다.
“항상 저렇게 가면을 쓰고 다니시는데, 아마 가면 벗은 얼굴은 루주님도 못 보셨을걸? 이유는 아무도 몰라. 차마 보여 줄 수 없을 정도로 흉하게 생긴 거 아니냐는 추측도 있고. 얼굴에 큰 흉터가 있다는 추측도 있고. 뭐, 나름대로 이유가 있으시겠지.”
“…….”
세화는 영 찝찝한 기분이 들어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