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화
청연은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린 채 손가락만 꼼질거렸다. 저러는 걸 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목에 자국이 이렇게까지 남았으니 없었던 일로 치고 넘어가긴 어렵긴 했다.
‘망했다….’
심지어 마지막엔 저항도 없이 그가 원하는 대로 접문을 받아 주었기에 더욱 창피했다. 저항할 힘이 없었던 것뿐이라고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많이 아파?”
숨 막힐 듯한 침묵 끝에 무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청연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습관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가 아릿하게 번지는 통증에 흠칫 놀랐다.
“약… 가져다줄게.”
“아, 아니야. 필요 없어.”
겨우 이 정도 갖고 무슨 약이야.
목소리가 자꾸만 갈라져 나와 청연은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약은 됐고…. 나, 나 그냥 집에 보내 줘.”
“…….”
“객잔을 너무 오래 비웠어. 가서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도 해 봐야 하고, 애들 급료도 줘야 하고, 그리고 또….”
너랑 이러고 있는 거 어색해서 미쳐 버릴 것 같단 말이야.
청연은 마지막 말을 애써 삼키고 눈알만 살짝 돌려 무호의 눈치를 살폈다. 입을 꾹 다문 그의 얼굴은 좀처럼 표정을 읽어 내기 힘들었다.
불과 조금 전까지 ‘나는 네 거다’, ‘아무 데도 안 간다’ 하며 그를 달랬으면서 바로 집에 가겠다고 말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지만,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제가 했던 말을 그가 기억하더라도 그 정도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대충 늘어놓은 말이라는 걸 이해할 것이다.
“가 봐야겠어. 보내 줘.”
청연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그의 눈길을 받으며 가만히 앉아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러던 중 바닥에 널린 술 단지 조각 하나를 밟아 다리가 비틀거렸다.
“그런 몸으로 어딜 간다고!”
갑자기 버럭 소리를 치며 팔을 단단히 잡아 오는 무호의 행동에 청연의 눈이 다시 커졌다.
‘내 몸이 뭐가 어쨌다고? 좀 피곤한 거 빼고는 멀쩡한데?’
무호는 한참이나 착잡한 눈으로 울긋불긋한 청연의 목을 응시했다. 그러던 그는 문득 고개를 들며 화가 난 듯이 중얼거렸다.
“그새 어떤 놈이….”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무사 한 명이 뻥 뚫린 문간으로 다가왔다. 일전에 무호가 난동을 부렸을 때 다친 듯싶었다.
“저, 교주님.”
무호가 홱 고개를 돌리자 그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동시에 무호의 한쪽 손 위로 강기가 맺히는 걸 본 그는 머리를 조아리며 덜덜 떨었다.
“침입자인가.”
“예…. 그게 교주님께서 잠시… 정신을 잃으셨을 때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청연은 흔들리는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하필 교주의 상태가 이상할 때 누군가 침입하려고 했다는 게 심상치 않았다.
무사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잠입을 위해 봉우리 외곽에 매복해 있던 중 발각되었는데, 그자가 홀로 일류 무사 스무 명을 베더니 진법까지 부수려 했다고 합니다. 하나 이미 생포하였으니 염려 마십시오.”
“그래서 지금 이 앞에다가 데려다 놓은 것이냐. 네놈들은 정녕 알아서 처리할 줄 아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인가.”
불안해진 청연은 무호의 팔을 톡톡 두드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유가 있으니까 데리고 왔겠지. 성질 좀 죽여.’
그의 눈빛을 읽은 무호는 한숨을 쉬며 강기를 거두어들였다.
“침입자를 다루는 교법에 따라 즉결 처형 하려 하였으나, 교주님께서 꼭 아셔야 할 사안이 있어 여기까지 끌고 왔습니다.”
“알아야 할 사안이라.”
무호가 낮은 목소리로 반복하여 말하자 남자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새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게….”
이어서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청연에게로 향했다.
***
남자의 뒤를 따라 황급히 방을 나선 청연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피투성이가 되어 검 하나에 몸을 지탱한 채 꿇어앉아 있는 사람을 한눈에 알아본 탓이다.
“제하야!”
청연은 곧장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가 서서히 고개를 들자 피를 잔뜩 묻힌 창백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이게 다 무슨… 제하야….”
청연은 더듬더듬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저를 찾으려 잠입을 시도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요란하게 뛰던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진 것만 같았다. 청연은 떨리는 손끝으로 제하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가.”
“객주님.”
“피… 무슨 피를 이렇게 많이 묻혔어….”
제하의 투명한 연갈색 눈동자에 가득 담긴 자신의 얼굴을 보던 청연은 너무나도 속상한 마음에 차오르는 눈물을 삼켰다. 얼마나 많이 다친 걸까. 지친 얼굴을 한 제하는 갈라진 입술을 열었다.
“객주님께서 부르시는 아가라는 호칭이 어려서는 그렇게 싫었는데…. 요 며칠간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여길 혼자 올 생각을 해….”
“소식을 듣고 한시도 지체할 수 없어 무모한 결정을 하였습니다.”
청연은 그의 몸을 살폈다. 온몸에 크고 작은 검상을 입었는데 특히 복부에 난 상처가 심각해 보였다. 환부를 꾹 누르고 있는 그의 손 틈새로 피가 새어 나왔다.
“어떻게 이 지경이 되도록….”
“걱정 마세요. 죽을 정도는 아닙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청연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자 제하는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어 보였다.
“어려서부터 객주님을 지키겠다 그리도 호언장담했으면서, 이런 일을 겪으시게 하여 민망할 따름입니다.”
“그게 네 잘못도 아닌데 왜….”
“객주님께선 제가 어려서부터 항상 저를 지켜 주셨는데….”
“일단… 일단 말하지 말아 봐. 너 지금 아프잖아.”
제하는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청연을 안심시키려는 듯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다고 안심이 될 리는 없었지만.
“그나저나 객주님께선 무탈하신 겁니까? 이런 곳에서 약도 제대로 못 드셨을 텐데요.”
“난 괜찮아.”
“입술이 터지신 듯한데.”
그제야 청연의 터진 입술을 발견한 제하는 표정을 굳혔다. 이윽고 시선을 내려 목에 남은 잇자국마저 발견했을 땐 그의 낯빛이 한층 더 창백해졌다.
“이게 다 무엇입니까?”
난감해진 청연은 급히 목깃을 여며 보았지만 그런다고 가려질 자국이 아니었다. 그가 대답하지 못하고 쩔쩔매자 제하의 눈빛이 점점 분노로 달아올랐다.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게….”
“저자의 짓입니까?”
제하는 고개를 들어 멀찍이 서 있는 무호를 노려보며 물었다.
“저자가 객주님께 이런 파렴치한 짓을… 읍.”
청연은 황급히 손을 들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마교의 본거지에서, 그것도 마교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황에서 교주를 모욕했다가는 그의 목이 날아갈 것이 자명했다.
‘입 다물어. 네가 아무리 주인공이어도 아직은 천마 상대할 레벨 안된다고.’
그렇게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때, 아니나 다를까 멀리서 제하의 말을 들은 지홍이 대도를 들고 다가왔다.
“감히 내 앞에서 주군께 무례하게 굴다니 겁도 없군.”
성큼성큼 걸어오던 그는 청연이 다친 제하의 앞을 온몸으로 막아서자 멈칫하며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청연은 그를 향해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한번 눈물을 삼켰다.
‘당신도 입조심해. 당신 주군이 원작에서는 얘 손에 죽었어.’
청연의 얼굴을 보며 머뭇거리던 지홍은 무호를 향해 돌아서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명을 내려 주십시오, 주군.”
“…….”
무호는 조금 전부터 아무 말 없이 사태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싸늘한 시선이 피를 흘리는 제하를 훑고선 온몸으로 그를 보호하려 애쓰는 청연에게로 향했다. 청연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얘랑 같이 보내 줘. 아니면 의원이라도 보게 해 줘.”
“…….”
“부탁할게.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야.”
미묘하게 구겨지는 무호의 표정을 보며 청연은 마른침을 삼켰다. 저 때문에 제하가 이렇게까지 다쳤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호할 생각이었다.
일초가 마치 일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제하를 공격하기라도 할까, 청연은 오감을 곤두세웠다. 건조한 모래바람이 불어와 그의 소맷자락을 휘날렸다.
곧이어 무호의 입에서 떨어진 명령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마차를 내어 드려라.”
그 말에 지홍은 당황하여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 이자는 천산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교인들을 베었습니다. 어찌 그냥 보내 주신단 말씀입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는 무호의 몸에서 마기가 흘러나와 검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누가 보아도 심기가 불편함을 알 수 있는 그 모습에 마교도들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차게 식은 눈으로 청연을 잠시 응시하던 그는 이내 걸음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청연은 그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