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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객잔 정상 영업합니다 (32)화 (33/145)

032화

‘남궁세가의 공자가 집을 떠나 소명의 제자가 된다고? 그래도 되는 거야? 그러면 제하랑 사형제 관계가 되는 거잖아.’

혼란스러워진 청연은 도경에게 물었다.

“집안에서 반대하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떠난다고 하면 오히려 좋아하실 분들입니다.”

“그렇지만… 제하의 스승님께선 이미 강호를 떠나신 분이고…. 애초에 제하를 받아 주신 것도 아이가 혼자 살아남지 못할까 봐 염려되는 마음에….”

“그분께서 저를 받아 주시지 않을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요…?”

청연은 혹시나 도경의 기분이 상할까 조심스러운 투로 말했다. 반면에 도경은 그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숙이고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왜 웃으십니까, 공자?”

“이전부터 생각했는데 객주님께선 얼굴에 감정을 모두 드러내시는 편이라 재밌습니다.”

이거 지금 놀리는 거지? 내가 동물원 원숭이도 아니고.

“전부 농담입니다. 그분을 스승님으로 모시겠다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그럼….”

“제가 왜 속내를 솔직히 털어놓았는지 객주님께서 궁금해하시는 것 같길래 장난을 좀 쳐 봤습니다.”

“…….”

한참이나 어린아이에게 농락당한 청연은 목뒤를 잡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그래, 즐거우면 됐다. 좀 전까지만 해도 우울해 보여서 마음이 쓰였는데.

“수다 떨 상대가 필요하셨나 봅니다.”

“예. 얼굴에 멍이 들 정도로 맞고 나니 조금 울적해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는데, 제 비밀을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뿐이라서 말입니다.”

청연은 가만히 턱을 괴고 도경을 바라보았다. 항상 감정을 잘만 숨기던 아이가 이렇게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고민했을까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제가 공자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 공자께서도 제 비밀 하나 들어 주시겠습니까?”

“말씀하세요.”

“저는 단전이 파괴된 몸입니다.”

“예…?”

갑작스러운 청연의 고백에 도경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항상 유유자적하게 웃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이 스쳤다.

청연은 덤덤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단전이 파괴되어 무공을 잃었고, 머리를 다쳐 과거의 기억도 잃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에 뿌옇게 안개가 끼어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느낌입니다.”

“그런….”

“공자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말입니다.”

도경 본인 입으로는 무공을 쉽게 포기했다 말했지만, 사실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남들보다 더한 노력에도 진전이 없으니 여러 번 좌절했겠지.

무공의 수위가 한 사람의 존재 가치를 결정하는 세상이다. 무림세가에서 태어나 재능을 가지지 못한 도경이나, 빙의하고 나니 단전이 파괴되어 있는 청연이나 비슷한 처지였다.

“무공도 없고 과거의 기억도 없지만, 그래도 당장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제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서요.”

“…….”

“공자께서도 그러셨으면 합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듣던 도경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제가 과연 무얼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하는 도경의 얼굴이 씁쓸해 보였다. 그 표정이 어린아이의 것 같지 않아서 마음 한구석이 저렸다.

“그림을 좋아한다고 해서 화공을 꿈꿔 본 적 없습니다. 저는 그저… 딱 한 번이라도 집안 어르신들의 인정을 받아 보고 싶었습니다.”

“공자.”

청연은 도경이 그려 준 부채 위의 꽃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떤 꽃은 아주 늦게 핍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일찍이 뿌리를 내려 이른 봄을 알리는 꽃이 있는가 하면, 추운 겨울에 만개하는 꽃도 있지 않습니까. 훗날 공자께서도 방도를 찾아 꽃을 활짝 피워 내실 거라 믿습니다.”

“제가 과연….”

“그렇게 될 겁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아, 몰라. 내가 된다면 되는 거야. 뻔뻔하게 우겨 보기로 한 청연은 아이를 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제가 감이 좀 좋습니다. 지난번에 비무대회 승자가 누가 될지 묻지 않으셨습니까?”

“예….”

“그때 제가 말한 답이 맞아떨어진다면, 그러면 공자께서도 저를 한 번은 믿어 주시겠습니까?”

“…….”

말없이 청연을 바라보던 도경은 망설이며 품속에서 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분명 독이 들어있을 그 병이었다.

“받으세요.”

“예? 이걸 왜 저한테.”

청연은 얼떨결에 그가 건네는 병을 받아 들었다.

“그자가 비무대회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다시 받으러 올 겁니다.”

그러니까 약속하겠다는 거네? 이번에 내 말이 맞으면 나를 믿어 주기로.

청연은 기쁜 마음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제하에게 그랬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다가 아차 싶어 손을 거두어들였다. 공자님께는 제하한테 하는 것처럼 행동하면 실례겠지.

‘그래도 기특하다, 기특해.’

마음 같아서는 참 잘했어요 도장을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쾅쾅 찍어 주고 싶었다. 청연은 눈빛에 칭찬을 가득 담아 도경에게로 실어 보냈다.

“그렇게 쳐다보시면 부담스러운데.”

“…이런.”

“농담입니다.”

도경은 청연을 향해 해맑게 웃어 보였다. 그를 만난 뒤 처음으로 보는, 진짜 아이다운 웃음이었다.

***

다음 날, 남궁세가 사람들은 떠날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시종들이 마차로 짐을 실어 나르는 동안 청연은 두리번거리며 도경을 찾았다. 조그마한 애가 어딜 갔는지 도통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객잔 후원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시끌벅적하게 들려왔다. 설마 또 싸우는 건가. 불안해진 청연은 곧장 후원으로 향했다.

“어제 결판을 다 못 내지 않았습니까!”

“내가 이긴 거 아니었어? 네가 먼저 그만두자고 했잖아.”

“그건 스승님께서 이만 잠자리에 들 시간이라고 하셔서…!”

“그럼 내가 이긴 거 맞네. 너보다 늦게 잤으니까.”

“그런 게 어딨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제하는 성을 내고 있었고 도경은 그런 그를 약 올리고 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청연은 아이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를 본 제하가 울상을 하며 외쳤다.

“객주님!”

“공자님이랑 왜 그렇게 싸워. 어제도 한참 붙어 놓고.”

“그렇지만 공자님께서 승패를 제대로 가리려 하지 않으십니다.”

누굴 닮아 이렇게 승부욕이 높을까. 청연은 제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공자님 이제 떠나실 시간이야.”

“네…?”

제하는 눈을 깜빡이며 도경을 돌아보았다.

“떠나신다고요?”

“그래. 그러니까 화 그만 내고 어서 인사드려.”

“아직… 아직 승부를 가리지 못하였는데.”

그렇게 말하는 제하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뚝뚝 묻어났다. 눈썹꼬리가 밑으로 내려가고 어깨까지 축 처진 게, 정말 승부를 가리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그새 미운 정이라도 든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다음에 또 봐, 꼬맹아.”

“꼬맹이라뇨!”

“그때까지 수련 열심히 하고. 그래야 날 이기지.”

“공자님!”

도경은 끝내 객잔을 떠날 때까지도 쉬지 않고 제하를 놀렸다. 두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던 청연의 입에선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누가 보면 절친인 줄 알겠네.’

***

“좀 괜찮아?”

청연이 방 안에 들어서니 몸에 붕대를 감은 채 침상 위에 누워 있던 해우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해령의 시선도 청연을 향했다.

“의원님 말씀으로는 이제 조금씩 움직여도 된다고 하시던데. 아직 많이 아파?”

“괜찮아요.”

청연은 침상 옆으로 의자를 하나 끌어다 앉았다.

해우의 의식이 돌아온 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지만, 약 기운에 계속 잠을 자는 바람에 제대로 대화해 볼 기회가 없었다. 그래도 이전보다 훨씬 나아진 안색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일해야 하는데 이렇게 누워만 있어서 죄송해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왜 네 잘못이야.”

청연은 울컥하는 마음에 해우의 손을 잡았다.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다 나을 때까지는 일 같은 거 생각도 하지 말고.”

“네…. 그럴게요.”

“그런데 너 혹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

청연의 물음에 해우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네. 완벽하게 기억나는 건 아닌데….”

청연과 해령이 시장으로 향했고 손님을 받지 않는 점심시간, 해우는 그 틈을 타 어질러진 주방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때 객잔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고, 그들을 평범한 손님으로 착각한 해우는 영업시간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 주방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그들이 검을 빼 들더니 객잔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내 그들과 무호 사이에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고, 그러는 사이 객잔 벽이 무너지며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저도 그런 건 태어나서 처음 봤어요. 객주님 사촌 동… 아니, 걔 진짜 무섭던데요. 눈이 시뻘게져서 아예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요.”

“너는? 도와주려다가 다친 거야?”

“그런 건 아니고 피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미쳐서 아무 데나 검을 휘두르더라고요. 그러다가 맞은 것 같아요.”

그의 말을 들을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많이 무서웠을 텐데. 하필 객잔을 비웠을 때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저, 객주님….”

그때 잠자코 있던 해령이 말을 걸어왔다.

“그…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 걔 있잖아요. 십칠. 객주님 사촌 동생 아닌 거 맞죠?”

“…….”

“가족이 아닐 거란 생각은 진작부터 했는데 그래도 마교 사람인 줄은 몰랐어요. 객주님도 이번에 보셨잖아요. 마교인들은 정말 위험하다는 거. 그런 애를 왜 여기서 지내게 하신 거예요?”

해령의 말에는 의아함과 함께 약간의 원망이 묻어 있었다. 이번 일로 하마터면 오라버니를 잃을 뻔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청연은 차마 아이들을 똑바로 볼 수가 없어 고개를 숙였다.

“객주님은 다 알고 계셨어요?”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무호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저희도 다 알아요. 객주님 좋은 분이신 거. 그래서 갈 곳 없던 저희도 직원으로 받아 주시고 방까지 내어 주신 거잖아요. 그래도 이번엔 너무 위험했다고요. 만약에 오라버니 잘못됐으면 저는 혼자서….”

“해령. 그만해.”

해우의 말에 해령은 잠시 멈칫했다가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그냥 좀 속상해서 그랬어요.”

“내가 미안해.”

청연은 바닥을 보며 중얼거렸다.

“객주님 잘못 아니에요.”

해우의 위로에 청연은 더더욱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애초에 마교도가 이런데 숨어든 게 잘못이었죠. 객주님은 저희한테 그랬듯이 호의를 베푸셨을 뿐이고요.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세요.”

그런데 있잖아, 해우야.

나는 그 애가 너무 불쌍해. 혼자서 그 오랜 시간을 견뎌 낼 생각을 하면 불쌍해서 도저히 못 견디겠어. 그래서 더 너희들을 볼 면목이 없어.

무호를 떠올릴 때마다 청연은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오랜 시간이 흘러 그와 함께한 기억은 옅어졌지만 무거운 마음만큼은 그대로였다.

그렇게 5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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