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화
‘저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세화야. 내가 사천에 아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청연은 젖은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여자의 얼굴이 사라지고 익숙한 제 방의 천장이 보였다.
눈을 뜨기 무섭게 머리가 심하게 지끈거려 다시 감아야 했다. 꿈 내용을 되짚어 보기도 전에 휘몰아치는 감정이 마음을 괴롭게 해 다른 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이 몸에 깃든 기억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차오르는 그리움에 마음이 조각나는 것처럼 아팠다.
“시랑….”
청연은 그의 이름을 소리 내 불러 보았다. 꿈속에서 쉬었던 목소리는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그의 정신은 아직 설산을 헤매고 있었다.
얼마나 많이 좋아했던 걸까. 꿈에서 몇 번 본 게 다인 데다가 실제로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그리워해서 뭘 어쩌자는 건지.
매일 밤 꿈을 꾸며 기억을 찾아 갈수록 점점 세화에게 동화되는 느낌이었다. 몸도 마음도 그의 기억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러다가 과거를 모두 알게 되면 그때는 정말 세화의 자아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덜컥 겁이 날 정도였다.
어쩌다가 그의 몸에 빙의하기는 했지만 정말 남의 인생을 훔쳐 살고 싶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더욱 원작의 청연과는 다르게 행동하려고 했는데.
청연은 손바닥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눈을 뜨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여자의 얼굴이 생각났다.
‘심지어 누님도 있었어?’
원작에서는 분명 가족도 친구도 없는 혈혈단신이라고 했다. 물론 꽤 오래전부터 원작 이야기는 믿지 않게 되어 버렸지만.
꿈을 꿀 때마다 이렇게 힘들어야 한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과거는 그저 과거로 묻어 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고 보니 객잔에 도착해서 쓰러졌던 것 같은데. 꿈에서 헤어 나오려 노력하던 청연은 정신을 잃기 전 코피가 났던 걸 기억해 냈다. 손을 내려 코 주변을 만져 보았지만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아, 또 제하 놀랐겠다.’
동그래진 눈으로 달려오던 제하의 얼굴이 떠올랐다. 청연은 저 때문에 놀랐을 아이를 걱정하며 찬찬히 주변을 살폈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피 묻은 천 조각이 탁자에 놓여 있는 걸 봐서는 누군가 자신을 보살피다 자리를 비운 듯싶었다.
청연이 부은 눈을 비비고 있을 때, 마침 문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겠습니다.”
이윽고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소명이었다. 밖에서부터 청연이 깨어 있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는 침상 옆으로 다가왔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던 청연의 어깨가 그의 손에 눌려 다시 누웠다.
‘이 장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보긴 어디서 봤겠어. 저번에 쓰러졌을 때랑 똑같잖아. 하여튼 이 허약한 몸이 여러 번 민폐 끼친다.
“그간 무리하셨나 봅니다. 건강에 특별히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나, 당분간은 외출을 삼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예…. 대인께 죄송하고 또 감사합니다.”
“별거 아닙니다.”
청연은 잠시 망설이다 소명에게 물었다.
“저, 염치없지만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깊이 잠들게 하는 처방 같은 걸 써 주실 수는 없을까요? 꿈을 안 꾸게 한다든가….”
“그런 약재가 있기는 하나 현재 드시는 약과 기운이 상충하여 드시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아….”
“제가 있는 동안은 침을 놔 드리겠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던 청연은 결국 그의 제안을 공손하게 거절했다.
감사하지만 더 이상 번거롭게 해 드릴 수는 없지. 안 그래도 여기까지 먼 길을 걸음 하시게 했는걸. 그나저나 제하가 안 보이네.
“제하는요?”
“…….”
“제가 아이를 많이 놀라게 한 겁니까?”
“그런 게 아니라….”
소명은 말끝을 흐리더니 몸을 돌려 창가로 다가갔다. 그가 창문을 열자 밖에서 아이들의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지?’
청연은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잠시 휘청거리자 소명이 빠르게 다가와 팔을 부축해 주었다. 창가로 다가간 두 사람은 소리가 들려오는 객잔 후원을 바라보았다.
“…저게 뭡니까?”
청연은 입을 헤벌리고 물었다. 소명은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그에게서 끙 하고 앓는 소리가 들려온 것만 같았다.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햇빛 아래, 두 아이가 엎치락뒤치락 뒤엉키며 땅을 구르고 있었다. 잔뜩 화가 오른 제하와 도경이었다.
“애들이 왜… 저기서 싸우고 있나요?”
“그게… 객주님이 정신을 잃으신 후에 제하가 소란스럽게 굴기도 하였고, 작일부터 저 공자에게 단단히 화가 나 있길래 차라리 나가서 비무를 해 보라 권하였더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저게 비무라고요? 그냥 동네 개싸움 같은데요.
검을 대신했을 것으로 보이는 나뭇가지 두 개는 이미 저 멀리 날아가 있었고, 몸집이 비슷한 두 아이는 서로 위를 선점하기 위해 구르며 난투를 벌였다. 소명은 태양혈을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스승의 가르침이 부족했나 봅니다.”
“그…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애들은 원래 저러면서 크는 것이니….”
그렇게 말하는 소명의 목소리에도 확신이 없었다. 아무래도 제하는 오늘 밤 스승님께 단단히 혼나게 될 것이 확실해 보였다. 청연은 목덜미를 긁적이며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이래서야 승부를 내기는 틀린 것 같았다. 한참을 싸우던 아이들은 이내 지쳐서 나가떨어졌고 가쁜 숨소리가 후원을 가득 채웠다.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도경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고운 비단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 냈다.
‘이제 끝난 건가?’
청연의 기대와 달리, 도경은 반대편에 누워있는 제하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한 번 더 해.”
뭐? 안 돼. 그만해.
그러나 누군가 말리기도 전에 제하는 벌떡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을 상대로 반드시 이기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얼굴에 가득했다.
아이들이 저러다가 다치기라도 할까, 안절부절못하던 청연은 알지 못했다. 난생처음으로 적수를 만난 아이들이 사실은 이 싸움을 즐기고 있었다는 걸.
***
그날 저녁,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청연은 도경의 방을 찾았다.
마침 탁자에 앉아 그림을 그리던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터지고 뺨에 멍이 들어 시퍼레진 얼굴을 보니 안타까웠다. 청연은 방에서 챙겨 온 고약을 내밀며 말했다.
“바르세요. 공자께 필요할 것 같아 가져왔습니다.”
“…….”
말없이 청연을 바라보던 도경은 그가 내민 약을 받아 들었다. 평소와 달리 웃음기가 싹 빠진 아이의 모습에 걱정이 되었지만 그의 일에 더 이상 오지랖을 부리고 싶지 않았다.
‘독에 대해 더 얘기해 봤자 발뺌만 할 테고. 오지랖은 약 가져다준 걸로 충분하지.’
그렇게 할 일을 마치고 방을 떠나려 할 때였다. 도경이 청연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잠깐 앉으시겠습니까?”
“…예?”
“잠깐이면 됩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청연은 도경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궁금해져 순순히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가 그리던 그림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섬세하게 그려진 꽃잎이 유명한 화공의 그림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아름다웠다.
도경은 그림을 조심히 들어 저 멀리 치워 놓았다. 그러고는 제가 챙겨 온 짐꾸러미를 뒤적이더니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는 탁자로 돌아와 가져온 물건을 청연의 눈앞에 펼쳐 놓았다. 그건 다름 아닌 부채였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그려져 있는 부채.
“이전에 그리다 만 것인데 완성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도경은 조곤조곤 말하며 다시 붓을 들었다. 거침없는 손놀림에 붓 끝이 닿는 곳마다 붉은 꽃잎이 피어났다. 순식간에 꽃 몇 송이를 그려 낸 도경은 시선을 들어 청연을 바라보았다.
“가져가 하룻밤만 말리시면 됩니다.”
“이걸 제게 주시겠다고요?”
“약값입니다.”
아니, 여기 애들은 무언가를 받으면 꼭 그 값을 치러야 하나. 그냥 대가 없는 호의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걸까.
문득 진상 손님을 두들겨 패고 밥값이라 칭하던 무호를 떠올린 청연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이런 거 굳이 안 주셔도 되는데.”
“제가 객주님 부채를 부러뜨렸으니 새걸로 하나 드려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이제야 솔직히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말에 도경은 청연의 얼굴을 힐끗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미 다 들킨 데다 바닥을 뒹굴며 어린아이에게 맞는 꼴까지 보였는데. 제가 거리낄 게 있겠습니까?”
“…….”
할 말이 없어진 청연은 부채 위에 그려진 꽃들을 들여다보았다. 도경의 그림에는 이상하게도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기운이 있어서, 꿈으로 어지러웠던 마음에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청연은 아이의 뺨에 든 멍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얼굴을 다치셔서 어찌합니까. 형님들께서 무어라 꾸중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형님들은 제게 관심이 없으십니다.”
“아….”
“형님들도, 집안 어르신들도 제게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쭉 그랬습니다.”
아예 솔직해지기로 작정한 것인지 도경은 과거사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출신에 대한 이야기와 형님들을 해하려 마음먹은 계기 등 그가 줄줄이 늘어놓는 말을 들을수록 청연은 어리둥절해졌다.
‘뭔데? 갑자기 왜 이러는데? 원래 이런 캐릭터 아니었잖아. 왜 마음을 바꾼 거야?’
혼란스러워하는 청연의 표정을 읽은 도경은 씩 웃더니 말했다.
“제가 오늘 느낀 게 많아서 말입니다.”
“느낀 거라니요?”
“저보다도 어린아이가 그토록 집요하게 승부를 걸어오는 걸 보며 깨달았습니다. 제가 그동안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무공에 재능이 없다는 핑계로 얼마나 쉽게 포기했는지.”
도경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그 아이의 스승님께 저를 제자로 받아 달라 간청드리겠다고 말입니다.”
뭐…?
미래의 서브공이 내놓은 당찬 포부에 청연은 경악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