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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객잔 정상 영업합니다 (9)화 (10/145)

009화

광활한 설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푸른 하늘 아래로 온통 새하얗게 눈이 덮여 있었고 저 멀리 언덕 너머에는 울창한 침엽수림이 자리했다.

어떻게 이런 곳에 집을 짓고 산 걸까.

놀란 마음과 다르게 몸은 익숙한 듯 발걸음을 내디뎠다. 한 걸음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발이 눈 속으로 푹푹 빠져 들었다.

아무도 간 적 없는 깨끗한 길 위에 처음으로 사람의 발자국이 새겨졌고, 사각사각 발소리가 적막한 산속에 울려 퍼졌다.

‘으, 추워.’

서늘하다 못해 시린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손끝은 점점 빨개졌고 발이 시려 왔다. 추위에 약한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뭐가 그리도 좋은지 얼굴에는 미소를 띤 채였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청연은 밝게 웃음 지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남자의 인영이 이리로 다가오고 있었다.

새하얀 옷을 입은 남자는 설산의 풍경 속에 완벽히 스며들었다. 그러나 청연에게 그를 찾아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시랑!”

입이 벌어지더니 제멋대로 소리를 냈다.

그 목소리를 들은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눈처럼 하얀 얼굴 위에 날카롭게 그어진 눈매가 청연을 발견하고는 크게 뜨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본 청연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선이 얼음을 깎아 만들어 놓은 것 같기도 했고, 그 자체가 신선처럼 보이기도 했다. 혹시 이 산의 수호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인하고 고아한 기운을 풍겼다.

“추운데 왜 나왔어.”

남자는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청연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그를 닮아 하얀 겉옷에서는 시원한 겨울 공기 냄새가 났다.

“보고 싶어서 마중 나왔지.”

‘뭐? 보고 싶어?’

제 입으로 뱉은 말에 혼란스러워졌다. 보고 싶다니, 또래 남자에게 이런 말을 해 본 적이 있던가.

그러나 마음 가득 차오르는 반가움은 절대 거짓일 리 없었다. 그를 만나 즐겁고 애틋했다.

“약은?”

“너 오면 먹으려고 기다렸어. 네가 날 챙겨야지. 안 그래?”

청연의 뻔뻔한 말에 남자는 굳어진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들어가자. 감기 걸릴라.”

“조금 더 있고 싶은데. 눈도 예쁘고.”

“저번에도 한참 앓느라 고생했잖아.”

무뚝뚝한 표정과 말투였지만 눈빛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 찰나의 눈길에도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뭐지? 연인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단순한 친구 사이에 느낄 만한 감정은 아니었다.

곧이어 남자는 혼란스럽게 이어지던 추측을 확인 사살시켜 주었다. 그의 손이 청연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고 차가운 입술이 이마 위를 지그시 눌렀다.

‘아니, 잠깐만. 얘도 게이였네….’

BL 세계관에 빙의했지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남자와 연애라니. 그런데 청연의 몸에 들어와 있어서인지 하나도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떼고서 청연의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가자.”

“들어가서 나랑 뭐 하려고 이렇게 서둘러?”

입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불거렸다. 정말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고, 청연은 손목을 걸고 맹세할 수 있었다.

남자는 말없이 얼굴을 붉혔다. 비현실적이던 얼굴에 홍조가 올라오자 그제야 사람같이 보였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청연은 남자를 끌어안았다. 아니, 안겼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키로 보나 덩치로 보나 그가 월등히 컸으니.

“응? 뭐 할 건데?”

“몰라….”

“무슨 생각을 하길래 얼굴이 빨개졌을까?”

“그만 놀려.”

청연은 헤실헤실 웃으며 그를 놓아주었다.

“그래. 들어가자. 가서 네가 원하는 거 실컷 해야지.”

“…….”

남자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청연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다시 눈밭을 헤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 두 사람의 손은 빈틈없이 맞붙은 채 서로의 온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있잖아, 시랑.”

“응.”

“너 멀리서 걸어오는 거 보니까 진짜 하얗더라. 얼굴도 하얗고 옷도 하얗고. 머리카락 없었으면 눈 속에 파묻혀서 못 알아봤을 거야. 이참에 머리도 미는 건 어때? 일종의 위장술처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왜? 너는 머리 깎고 중이 돼도 잘생겼을 거야. 빈말 아니다?”

시랑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들짐승들은 보호색을 써서 자기 몸을 지킨다잖아. 너도 그런 거지. 옷까지 홀딱 벗고 있으면 위장하기 더 쉽겠… 아, 아니다.”

“…….”

“그래. 옷은 입고 있어라. 네가 아무리 몸이 좋아도 눈밭에서 벗기는 건 경우가 아니지. 나도 밖에서 하는 건 좀 그래.”

“입 좀 다물어.”

청연은 쉴 새 없이 혀를 놀렸다. 그야말로 아무 말 대잔치였다.

원작에서 유청연은 분명 말수도 없고 친구도 없는 외톨이였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요망한 건데?

한참을 떠들던 청연은 이내 체력이 고갈되었음을 느꼈다. 가슴에 찌릿한 통증이 번졌고, 몸은 으슬으슬 떨리고 추웠다.

수다가 뚝 끊기자 묵묵히 앞만 보고 걷던 시랑의 시선이 청연을 향했다. 핏기가 가셔 한층 창백해진 얼굴을 발견한 순간 그의 걸음이 멈췄다.

“너….”

“괜찮, 아. 약 안 먹어서 그래.”

청연은 무릎을 짚고 멈춰서 잠시 숨을 골랐다. 이 정도 걷는 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추위가 문제였던가. 제게 꽂혀 오는 시랑의 시선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왜, 왜 그렇게 쳐다봐. 내가 그렇게 좋아?”

“…….”

“넌 나를 너무 좋아해서 탈….”

“가만히 있어.”

“응? 어어? 뭐 하는 거야!”

시랑은 청연의 허리와 오금을 잡더니 번쩍 들어 올렸다. 단단한 두 팔뚝이 성인 남성의 몸을 안정적으로 받쳐 들었다.

놀란 청연은 저도 모르게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졸지에 공주님처럼 안겨 버리고 만 것이다.

“갑자기 왜….”

“조용히 하고. 힘 아껴.”

“…….”

청연을 안은 채 이동하는 발걸음이 놀랍도록 빨랐다. 분명 뛰고 있지 않음에도 주변 풍경이 휙휙 스쳐 지나갔다. 그러니까 그동안은 청연의 느린 걸음에 맞춰 주고 있었던 거다.

새삼스럽게 깨달음을 얻은 청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윽고 세상이 빙빙 돌더니 장면이 전환되었다.

집에 도착한 청연은 눈에 젖어 축축해진 옷을 벗어 던지고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침상에 누워 약을 달이는 시랑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품위 있는 움직임에 맞춰 꿈틀거리는 널따란 등이 눈을 즐겁게 했다.

그는 약을 사발에 담아 침상으로 가져왔다.

“식기 전에 마셔.”

청연은 뜨거운 액체에 입김을 호호 불고는 한 모금 삼켜 냈다. 아직 약이 남아 있는 사발을 내려놓자 시랑의 미간이 구겨졌다.

“뜨겁단 말이야.”

“…….”

“아, 알았어. 마시면 되잖아.”

결국 약을 모두 비워 내고 나서야 그는 빈 사발을 치워 주었다.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은 시랑의 눈치를 살피던 중, 청연의 머릿속에 좋은 수가 떠올랐다. 그는 침상 위에 늘어진 채 최대한 불쌍한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나 아직도 추워. 이불 속에 있어도 추운 것 같아. 왜 이렇게 춥지?”

“그러게 누가 돌아다니래.”

“이러다 감기 걸리겠네. 아이고, 추워.”

“…….”

“누가 이불 속으로 들어와서 안아 주면 참 따뜻할 텐데. 그치?”

둘둘 말고 있던 이불을 들춰 내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본 시랑의 얼굴이 즉각적으로 달아올랐다.

청연은 속으로 킥킥 웃었다. 그의 반응을 구경하는 것보다 즐거운 일이 있을까.

“아무도 안 들어오려나 보네. 에이, 아쉬워라. 그럼 어쩔 수 없지. 계속 추위에 떠는 수밖에.”

청연이 이불을 다시 덮으려 하자 시랑이 다급하게 손목을 잡아 왔다.

“왜? 뭐 볼일 있어?”

“너 진짜….”

“들어오고 싶어?”

이제는 빨개지다 못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청연은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어서 들어와. 따뜻하게 해 줘. 아, 잠깐만! 옷은 벗고 들어와야지. 이불이 다 젖잖아.”

거친 손길에 허리띠가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하나둘 바닥에 쌓여 가는 옷가지들 사이로 흰 발목이 드러났다. 그 발목은 머지않아 이불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이불 속 들썩이는 광경을 보며 청연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생각만이 가득했다.

‘이런 것까지 보여 줄 필요는 없잖아!’

***

잠에서 깨어난 청연은 헉헉거리며 숨을 골랐다. 갑자기 머릿속으로 들어온 막대한 양의 정보에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술… 술이 필요해….”

그는 반쯤 정신이 나간 듯 계단을 내려가 주방으로 향했다. 이미 모두가 잠든 한밤중이라 객잔은 고요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청연은 찬장을 뒤져 술병을 찾아냈다. 그 자리에 선 채로 잔도 없이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자 그제야 잠이 좀 깨는 것 같았다.

꿈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그 속에서 느낀 감각들이 현실이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이를테면 꼭 맞잡은 두 손이라든가. 귓가에 들려오던 신음이라든가. 겹쳐진 몸에서 느껴지던 온기라든가…. 그런… 그….

“으아아아아….”

아무리 꿈이라 해도 충격적이었다. 평생을 이성애자로 살아온 자신이 남성 연인과 스킨십을 하며 그의 손길을 받았다는 게… 심지어 그것이 좋았던 탓이다.

그래, 솔직히 아주 좋았다. 그는 이미 청연을 잘 안다는 듯이 굴었고, 그의 스치는 손길에도 무너져 내렸다. 단단한 품에 갇히는 것도, 그의 쓰다듬에 눈물 흘리는 것도 미치도록 좋았다.

그러니까 남의 은밀한 시간을 직관한 걸로도 모자라 그 묘한 감각을 함께 느끼기도 한 것이다.

청연은 다른 쪽으로 생각을 돌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정리를 좀 해 보자.’

꿈속에서 새로 알게 된 정보를 나열해 보았다. 일단 유청연은 어딘지 모를 산속에 살았으며, 그곳은 춥고 눈이 많이 왔다.

‘그리고 게이였고, 조각같이 잘생긴 데다 몸도 좋은 애인이 있었고, 그 남자랑 밤을… 아, 이거 말고!’

은밀한 상황으로 가득했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걸 떠올리고 있자니 기분이 오묘해지는 것도 같았다.

“야, 이 미친놈아….”

‘이 요망한 놈아.’

충격을 이겨 내지 못한 청연은 결국 머리를 벽에 쿵쿵 찧었다. 머리라도 아프면 다른 감각이 지워질까. 몸이 좀 식을까.

정신이 완전히 팔려 버린 탓에 그는 차마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 이 시각, 어둠 속에서 살기등등한 눈빛이 저를 지켜보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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