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화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린 건 아이가 울음을 그쳐 갈 즈음이었다.
“한밤중에 무슨 소란이냐.”
‘역시 다 듣고 계셨군.’
소명은 침의를 입은 채 문간에 서서 제하를 내려다보았다. 딱딱한 말투에 비해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다 세상 사람들 다 깨우겠구나. 어서 들어와 잠자리에 들거라.”
그는 청연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폐를 끼쳤습니다.”
“아, 아닙니다. 제하야. 이제 들어가자.”
제하는 시선을 들어 스승님을 힐끗 보더니 청연의 품 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눈물에 젖어 축축한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는 모습이 꼭 어미를 찾는 강아지 같았다.
“백제하.”
소명의 목소리가 울리자 움찔한 제하는 청연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맑고 투명한 눈동자에 청연의 얼굴이 그대로 비쳐 보였다.
‘아, 귀엽다. 그냥 내가 데리고 잔다고 할까? 아니지. 두 사람 사이가 여기서 더 멀어지면 안 돼.’
청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옷소매로 아이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일찍 자야 내일도 열심히 수련하지. 응?”
“네에….”
잠긴 목소리로 시무룩하게 답한 제하는 스승님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저러다 또 혼나겠네.’
청연은 내심 걱정하며 소명에게 눈인사를 해 보였다.
***
다음 날 아침, 식당에서 마주친 제하는 청연의 걱정과 달리 의외로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간밤에 흘린 눈물로 눈은 퉁퉁 부었지만, 평소와 달리 씩씩한 모습이었다. 볼이 불룩할 정도로 입 안 가득 만두를 넣고 우물우물 씹는 걸 보고 있자니 한번 꼬집어 보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다.
“혼자서도 잘 먹네.”
“객듀님!”
“스승님은 벌써 나가셨어?”
“오누른 이리 마누셔서….”
“다 먹고 말해도 돼.”
제하는 아차 싶었는지 입을 합 다물고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보나 마나 스승님께 배운 식사 예절을 곱씹고 있겠지. 밥 먹을 때는 말을 하면 안 된다는 둥.
‘역시 미래의 스승님 바라기다워.’
잘 크고 있는 주인공이 기특해 청연은 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곱슬머리가 손에 감겨 오는 느낌이 중독성 있어 자꾸만 만지게 되었다.
마침내 입 안의 만두를 삼켜 낸 제하는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일이 많아 늦으실 거라고, 서책을 읽다가 잠자리에 들라고 하셨습니다.”
순간 마음이 무겁게 짓눌리는 듯했다. 오늘 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면서 그냥 손 놓고 있어도 괜찮은 걸까.
제하는 오늘 밤 마교도들에게 납치당한다. 방 안에서 얌전히 책을 읽다가 창문을 타고 넘어온 흑의인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뒤늦게 돌아온 소명이 아이의 행적을 추적해 결국 구해 낼 것이고.
원작에서 이 사건은 제하가 스승님에게 본격적으로 믿음을 가지게 되는 계기였다. 저에게 무관심한 줄로만 알았던 스승에게 구원받고 오해를 푸는 계기.
그리고 제하의 심중에 마교에 대한 적개심을 제대로 심어 주어 훗날 정마 대전에서 활약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영 찝찝하단 말이다. 이 어린애가 납치당할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그냥 방치하는 게 맞는 일일까? 그거 방관죄 아니야?
“객주님.”
“어?”
갑자기 청연을 부른 제하는 들고 있던 젓가락까지 내려놓고 비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중요하게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왜? 뭐 할 말 있어?”
“어젯밤에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어른처럼 정중한 말투로 준비했던 말을 내뱉는 제하의 모습에 청연은 몸의 긴장이 풀리고 푸스스 웃음이 나왔다.
“아니야, 아니야. 그렇게 공손히 사과할 필요 없어. 방에 들어가서 더 혼나지는 않았고?”
제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자가 당… 공자님과 싸운 건 잘못이 맞으나 스승님께서 인과를 따지지 않고 심하게 혼을 내셨다고, 미안하다 하셨습니다.”
‘오? 그런 말을 했다고?’
조금 놀라웠지만 금세 납득이 되었다. 애가 그렇게 우는 걸 듣고 마음이 안 아프면 그게 로봇이지 사람인가. 그래서 오늘따라 제하 기분이 좋아 보였구나.
그래, 앞으로도 그렇게만 해라. 스승님의 하나뿐인 귀염둥이가 되라고.
“오늘은 뭐 할 거야? 종일 서책만 읽을 건 아닐 테고.”
“으음… 서책을 읽고… 심법을 익히고….”
“객잔에만 있겠다고?”
안 그래도 산속에 틀어박혀 있었을 애가 멀리까지 와서 방 안에만 있는 건 안 될 일이지. 제하를 데리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에 잠깐 돌아다니는 건 괜찮을 거야.
청연은 식사를 마친 아이와 함께 시장으로 향했다.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사 먹일 생각에 신이 났다.
‘어렸을 때 동생 하나 가져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이제야 이런 걸 해 보네.’
시장은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혹시나 아이를 잃어버릴까 봐 걱정되어 그쪽으로 신경을 쏟아야 했다.
제하는 오랜만에 보는 시장이 신기한지 눈을 반짝거리며 여기저기 두리번거렸다. 아이의 시선이 멈춘 곳은 당호로1)를 파는 가판대였다. 빨간 산사나무 열매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입맛을 다시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저거 먹고 싶어?”
“예? 아, 아닙니다.”
“그래? 난 먹고 싶은데.”
청연은 가판대로 다가가 당호로 두 개를 샀다. 하나를 아이에게 건네니 머뭇거리며 받아 들었다.
“혼자 먹으면 맛없잖아. 네가 같이 좀 먹어 줘.”
“저… 그럼 돈을….”
제하는 전낭을 꺼내려는 듯 품을 뒤적거렸다.
“괜찮아. 안 줘도 돼.”
내가 아무리 장사꾼이라도 어린애 코 묻은 돈까지 받겠니.
“그렇지만 스승님께서 대가 없이 물건을 얻어서는 안 된다고….”
“스승님이 이미 주셨어.”
청연은 능숙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숙식비를 선불로 넉넉하게 주셔서 돈이 남을 정도야. 난 이제 부자다. 부럽지?”
“에….”
“먹자. 빨리 안 먹으면 당호로에 발 달려서 도망간다.”
“그게 무슨….”
청연은 아무것도 안 들리는 척 뻔뻔하게 열매 하나를 베어 물었다. 달콤하고 상큼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머뭇거리던 제하도 군침이 돌았는지 청연을 따라서 먹기 시작했다.
이제 좀 애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감이 잡혔다. 청연은 새로 사귄 주인공 친구가 꽤 마음에 들었다. 착하고 귀여워.
오물거리는 입과 하얀 볼살을 보고 있자니 다시 충동이 일었다. 한 번만 만져 볼까.
청연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아이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밀가루 반죽 같은 볼살이 말랑하게 늘어났다가 손을 놓으니 제자리로 챱 돌아갔다.
‘귀여워!’
“객주님!”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제하는 청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으응?”
“손이 너무 찹니다!”
“어?”
‘갑자기 손이 차다고?’
이 몸에 빙의하고 낮은 체온에 나름대로 익숙해졌던지라 새삼스러웠다. 제하는 청연의 손에다 입김을 호호 불더니 제 작은 손으로 손바닥을 비볐다.
“스승님께서… 그… 기혈…이 뒤틀리면 체온도 떨어진다고, 그런 사람들은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맞다, 내 단전 박살 났지. 약을 지어 먹었더니 기운이 많이 좋아져서 잊고 있었는데.
“그럼 네가 잡아 줄래? 손 시리지 않게 잡고 걸으면 되잖아.”
“네! 제가 잡아 드릴게요!”
제하는 씩씩하게 답했다. 누가 의원의 제자 아니랄까 봐.
한 손으로는 아이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당호로를 먹으며 걷는 동안 기분이 몽글몽글해졌다.
두 사람은 간식거리를 잔뜩 사 나누어 먹으며 시장을 몇 바퀴 돌았다.
아이는 곧잘 웃었고, 곧잘 말을 걸었다. 제가 사는 산에는 가을 무렵이면 계화가 만개한다는 둥. 심심할 땐 다람쥐들에게 먹이를 가져다준다는 둥. 그제야 그 또래의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간만에 밖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금방 몸이 피곤해진 청연은 제하와 함께 객잔으로 돌아가야 했다.
***
어둑어둑해지는 방 안에서 따뜻한 목욕물에 몸을 담그자 피로가 가셨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수증기를 바라보던 청연은 문득 자신의 왼쪽 팔을 들어 살펴보았다.
그의 팔에는 유독 눈에 띄는 흉터가 하나 남아 있었다. 마치 짐승의 이빨 자국처럼 보이는 흉터였다. 큰 개에게 물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이 몸에는 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싶어 자꾸만 바라보게 되었다.
가만히 흉터를 쓸어내리던 청연은 이내 욕통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머지않아 납치될 제하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그 애가 납치되는 것도, 그러다 구출되는 것도. 전부 정해진 일이잖아. 꼭 겪어야 하는 일이고.
그리고 이 세계의 주인공이잖아. 시련 없이 성장하는 주인공이 어디 있겠어. 위험에도 빠지고 그러는 게 당연하지.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며 청연은 합리화를 이어 갔다. 모든 일이 소설에서 정해진 대로 진행되기만을 바라며.
저도 모르게 욕통 안에서 살짝 잠이 들었던 청연은 어디선가 우당탕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지금인가?’
분명 같은 층 다른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물건이 넘어지고 서책이 우르르 쏟아지는 소리. 그리고 마치 어린아이가 저항하는 듯한….
청연은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쩔 수 없다. 벌어질 일은 벌어져야 하고, 무공도 없는 제가 도와 봤자 어떻게 돕겠는가.
그러면서도 불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들려오던 소리가 멈추고 고요해질 때까지, 청연의 마음은 천국과 지옥을 수십 번씩 오갔다.
목욕을 마친 청연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제하의 방으로 향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건재한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한번 하고, 문을 똑똑 두드렸다.
“제하야. 거기 있어?”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문을 살며시 밀어 보니 잠기지 않은 문이 쉽게 열렸다. 아무도 없는 방 안은 가구들이 쓰러져 엉망이었고 창문은 열린 채였다. 제하는 이미 납치된 것이다.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청연은 초조하게 복도를 오가며 소명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분명히 돌아올 것임을 알지만 불안감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낮에 해맑게 웃던 아이의 모습이, 차가운 손을 따뜻하게 데워 주던 모습이 생각나 마음속에는 죄책감만 켜켜이 쌓여 갔다.
‘왜 안 오지. 이제 올 때도 됐잖아.’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창밖은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다. 청연은 기다리다 못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대문 앞이라도 지키고 있을 생각이었다.
“어? 객주님, 무슨 일 있으세요?”
아직 1층에 남아 있던 해령이 급히 내려오는 청연을 발견하고 물었다.
“그, 저번에 오신 의원님. 아직 안 들어오셨지?”
“네. 아침에 뵙기는 했는데… 아, 맞다!”
해령이 손뼉을 짝 쳤다.
“아침에 의원님께서 말씀 좀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우리 객잔에서 우연히 친우분을 만나셨는데, 그분께서 객주님 몸에 도움이 될 만한 걸 알고 계신다고. 그걸 알아보러 의빈(宜宾)에 가신다고요.”
“뭐?”
“늦어도 자시쯤에는 올 테니 기다려 달라고 하셨는데 제가 전해 드리는 걸 깜빡했… 어? 어어! 객주님! 어디 가세요!”
‘젠장. 다 나 때문이다. 내가 다 망친 거다.’
진짜 유청연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짓을 해서, 원작에는 없던 인물까지 나타나고 일이 어그러진 거다.
‘자시는 너무 늦어. 만약 주인공이 잘못된다면 이 세계는….’
제발 늦지 않았기를 바라며, 청연은 어둠 속을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