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핸드폰을 든 지훈의 표정이 초조했다. 액정만 십 분째 바라보고 있었다. 통화 아이콘을 누르려다 뒤로 가고, 괜히 인터넷을 켜 아무 기사만 보다가 다시 주소록에 들어가 통화 아이콘을 누르려다 말기를 반복했다.
여동생. 세 글자를 보고 입술을 훑다 결국 핸드폰을 내려놨다.
카페에서 준영과 대화한 이후로 며칠이 흘렀다. 고민했던 것과 달리, 카페에서 나와 박승혁에게 바로 연락했을 땐 -저녁 시간이 되어 명준을 거치지 않았다- 마침 일을 막 정리하고 있던 즈음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만나 저녁을 먹고, 박승혁의 오피스텔로 가고, 한 침대에서 잔 다음 일어나 출근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오랜만에 사무실 옆 별실에서 같이 잘까, 아니면 지훈의 집에 가서 자볼까, 좁아도, 오히려 좁아서 더 붙어있기 좋을 거라며 간지러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물론 간지러운 말은 주로 박승혁이 했다.
오랜만에 별실 얘기를 꺼내는 지훈에게 박승혁은 최근엔 더 바쁘게 일한 곳이라 돌아가기 싫다고 말해 오피스텔로 갔다. 가는 동안 신호대기를 받을 땐 노는 손을 맞잡기도 했다. 연인이라면 으레 할 법한 대화와 스킨십이었다.
걱정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평소보다 더 다정한 분위기였다. 그게 너무 편안해서, 차라리 먼저 준영에 대해 말을 꺼내려고 했던 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편안하고도 다정한 분위기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도 들었다.
‘사실 이미 자기 소관을 벗어났다고 말했었잖아?’
예전에 병실에서 정사를 치르고 난 뒤에 그랬었다. ‘그놈은 이미 내 소관 벗어났어. 애먼 사람 의심하지 마’라고. 아무 짓도 안 할 거고,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백가연이 한 짓일 거라고까지 말했었다. 진심이라고 묻는 말엔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고 진심이라고 대답했었고.
그리고 며칠 전 카페에서 단둘이 짧지 않게 대화했는데도, 이철성이 분명 보고했을 건데도 지금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날 저녁에도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나. 정작 본인은 아무 신경도 안 쓰는데, 나 혼자 불안해서 그동안 먼저 다가오는 준영을 밀어냈다고 생각하니 안심을 넘어 민망함까지 몰려왔다.
그래. 설사 내가 납치되도록 한 놈이라 해도, 결과적으론 이렇게 연인 사이가 됐으니 신경 안 쓰겠지. 완전히 백가연한테 넘어간 놈인데다 아무 짓도 하지 말라고 못을 박아뒀으니까.
“나 혼자 존나 오바했네······”
민망해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그럼 준영에게 다음에 술 한잔하자고 할 걸 그랬나. 아, 그건 역시 좀 그런가. 어쨌든 선배 납치되게 한 놈인데.
하지만 그렇게 사과했고, 지훈도 괜찮다고 했다. 그때 이후로 시간도 많이 흘렀다. 지금은 인사 이동된 곳에서 잘 근무하고 있다. 그럼 된 거 아닌가······ 박승혁이 아무렇지 않게 나오니, 저도 아무렇지 않게 다가왔다.
지훈은 자기 집 침대에 앉은 채로 내려놓은 핸드폰을 다시 들어 만지작거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평소대로 근무하고 퇴근한 후였다.
며칠 전 박승혁과 저녁을 먹은 이후로 지금까지 매일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다음 날, 박승혁은 바빠졌다고 며칠간 보기 힘들 것 같다고 먼저 알려줬다.
여유로워지면 먼저 연락할 테니, 그동안 일 잘하고 필요한 게 있으면 명준이나 철성에게 말하면 된다고 말하는 그에게 ‘내가 어린애냐?’라고 받아쳐 놓곤, 그가 내심 보호자처럼 여겨졌다.
미리 알려준 덕분에 며칠 동안엔 자차를 끌고 출퇴근했다. 강력팀에 비하면 퇴근 시간도 보장된 편이고, 여유로웠다.
처음 하루 이틀은 편하고 좋다가 이젠 서서히 박승혁이 떠오르는 횟수가 늘었다. 틈만 나면 짧게라도 만나던 사람이라 당연한 거겠지만, 이런 생각을 가지는 자신이 어색했다.
‘보고 싶다.’
“아 씹, 뭐래······ 아!”
저도 모르게 든 생각에 욕설을 내뱉다 액정 화면을 눌러버렸다. 통화 모양 아이콘이 눌러지며, 연결음이 들렸다.
“씨발, 망했······”
“여보세요?”
여자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몇 년 만에 들어도 단번에 여동생 목소리인 걸 알 수 있었다.
“여보세요?”
대답이 없자 재차 불렀다. 왜 나인 걸 모르지, 하다 번호를 바꾼 걸 기억해내곤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지안아.”
“······큰오빠?”
침을 꿀꺽 삼켰다. 늘 꺾이는 모습 없이, 까칠해도 일은 제법 꼼꼼하게 하는 저인데, 저보다 나이 많은 박승혁한테도 존댓말 없이 잘만 반말 쓰면서 대하는 저인데, 상납금 받으려고 유흥업소 매니저들한테 저열하게 뻗대며 나갔던 저인데… 이상하게 가족 앞에선 작아졌다. 잘 나오던 욕설도 나오지 않았다. 집안 가장 노릇을 하면서도. 생활비를 주고, 가족의 카드값을 당연하게 갚으면서. 지금은 아니지만.
“큰오빠. 맞지.”
“······어.”
“웬일이야? 번호도 바꿨다고 하던데. 나 오빠인지 몰랐어.”
“······응······”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침대에서 일어났다. 방안을 한 바퀴 돌다 의자에 앉았다. 전화하기 전엔 묻고 싶은 게 천지였는데, 백지상태가 되어버린 것 같다.
“여보세요?”
“-어어.”
“왜 전화했어? 연 끊고 잘살고 있으면서.”
역시 알고 있었구나. 예상했지만 이렇게 직접 들으니 마음에 동요가 일었다. 연을 끊고 나간 자신이 불효자가 된 것 같았다.
“들었구나.”
“귀가 아프도록 들었지. 오랜만에 본가 갔는데, 보자마자 오빠 얘기하면서 얼마나 징징대던지. 하 시발······”
뒤에 조그맣게 뱉은 한숨과 욕설에 지훈이 눈을 깜빡였다. 뭐야. 얘 욕도 하네? 나도 많이 하지만, 얘는 나이도 어린데 벌써······ 짚고 넘어갈까 하다 얘기가 길어질 게 뻔해 본론으로 들어갔다.
“안 그래도 들었어. 얼마 전에 신고했다면서.”
“아- 오빠도 들었구나. 그래서······ 응. 작은오빠가 사람 때려서 바로 신고했지. 엄마가 나보고 미친년이라고 하던데? 자기 오빠 신고하는 년이 어디 있냐고. 웃기지도 않아. 근데 서에서 오빠 자리 어디 있냐고 물어보니까 다른 데로 갔다고 하더라고.”
“응. 인사 이동됐어.”
“잘됐네. 험한 꼴 안 봐서. 분명 작은오빠랑 엄마가 서에 가서 깽판 쳤을걸?”
지훈은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러기야 했겠지. 그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대학 입학했다고 들었는데, 본가에서 다니는 거야?”
“아니. 내가 왜? 정신병 걸릴 일 있어? 그 집에서 일주일만 있으면 멀쩡한 사람도 미칠걸. 그리고 나 지방대 갔어. 일부러 국립대만 지원했거든. 오빠만큼 공부 잘 하진 않아서 서울대는 못 쓰겠더라.”
“국립대는 왜.”
“왜긴. 등록금도 싸고, 비전 있잖아. 나중에 인구 줄어서 대학 다 없어져도 국립대는 살아있을걸? 그때 되면 내가 승리자야.”
예전에도 어린 게 참 냉정하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여전하다. 맹랑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그게 싫다기보단 안심이 되는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그런데 등록금 걱정을 다 했구나. 내가 있는데. 입학원서 쓸 땐 집과 연을 끊었다는 소식을 못 들었을 건데 왜 걱정한 건지 의아했다.
“등록금 걱정되면 나한테 얘기······”
“아 진짜, 답답해서 미치겠네. 왜 아직도 그래? 연 끊었다길래 웬일로 정신 차렸나 했는데.”
짜증 섞인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귀가 뚫리는 듯했다. 너무 당연하게도 막내의 생활비와 등록금도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해버렸다. 가만히 있자 알아서 말을 이었다.
“내가 엄마한테 오빠 얘기 듣는데,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 난 지금까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살면서 얼굴 안 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오빠처럼 아예 끊어버리는 게 정답이더라고.
애초에 본가 간 것도 입학하고 이것저것 챙길 게 있어서 갔던 거야. 며칠 지내는 동안 작은오빠는 더 양아치가 됐지, 엄마도 상태가 더 이상해져서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근데 마지막 날에 마침 끊을 구실을 주더라? 그래서 이때다 싶어서 신고하고, 미친년이라고 말하는 엄마한테 나도 이제 연 끊는다고 말하고 짐 들고나왔지. 속이 다 시원하더라.”
줄줄 쏟아내는 말속에 의문점이 가득했다. 지안은 뭔가 물을 게 많은 말을 쏟아냈다. 지균이 그동안 더 양아치가 됐다는 말과 어머니 상태가 더 이상해졌다는 말.
지안은 본가에 자주 가지 않았다. 그래도 이상한 걸 느낄 정도면, 최근 두 사람의 상태가 어떻다는 걸까. 그리고 끊을 구실은 당연히 세입자를 폭행한 사건을 이르는 말일 테다. 거기에 대해서도 물을 게 많았다. 어디부터 물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고민하다 순서대로 묻기로 했다.
“상태가 더 이상해졌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몰라, 예전부터 작은오빠는 글렀다고 생각하긴 했었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거든? 아니면 나도 고등학교 들어가서부터 거의 안 봐서 몰랐던 건가. 사람 때리는 쓰레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 확실히 사람이 더 이상해졌어. 깡패처럼, 아니, 깡패 되고 싶어서 억지로 흉내 내는 거 같더라고. 무슨 조폭 똘마니처럼 굴던데.
좀 많이 이상한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거 같더라고. 집 앞 편의점 가려고 잠깐 나갔는데 문신 도배한 남자들이랑 얘기하고 있는 거야. 아니, 놀이터에서 사람들한테 겁주면서 담배 피우고 있더라니까? 제대로 미친 줄 알았어.”
깡패? 누구랑 어울리고 있는 걸까. 확실한 건 지균은 지금 질 나쁜 자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원래 성격도 성격이라 그들에게 더 쉽게 물들었겠지.
‘그런데 왜?’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아무리 자신이 연을 끊었다고 해도, 그 충격으로 탈선했다고 보기엔 원래도 그리 친하진 않았다. 작년에 죽을 뻔한 저를 두고 사망보험금이니, 뭐니 하며 시계와 통장까지 훔쳤던 애다.
“학교는 다니면서 그랬다는 거야?”
“그땐 대학교도 방학이었을 때니까. 아니다, 이번 학기부터 휴학했다고 들었던 거 같아.”
“왜?”
“나야 모르지.”
“어머니는?”
“엄마야 뭐, 작은오빠가 그렇게 이상해졌는데 좋다고 띄워주고 있더라고. 우리 둘째밖에 없어, 그렇게. 툭 하면 둘이서 계속 속닥거리고. 온종일 핸드폰이랑 강아지만 들여다보고. 집구석이 더 이상해졌어.”
“아버지는? 아버지는 뵀어?”
“여전하지. 방에서 안 나오시지. 한 번 방에 들어가서 얼굴이라도 보려고 했는데, 엄마가 말리더라고. 내가 갑자기 자란 채로 들어가면 아빠 놀랄 거라고. 아빠는 계속 과거에 살고 있나 봐. 연 끊는다고 말하고 나오는데, 아빠가 마음에 걸리긴 했어. 그래도 어쩌겠어······ 계속 저렇게 계시는데. 나오려는 의지가 있어야 나도 어떻게 해주지······”
잘만 말하던 목소리가 처음으로 시무룩하게 변하더니 줄어들었다. 매몰차게 쏘아붙이고 나왔어도, 아버지만 생각하면 마음에 걸리는 것이리라.
지훈도 느꼈던 감정이었다. 아버지도 저기서 나오게 해야 하지 않을까, 하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해 모른 척해버렸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고 자책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건 지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훈도 처음으로 여동생을 달래주기로 했다. 오빠로서 동생을 달래준다는 느낌이 어색하면서도 나쁘지 않았다.
“신경 쓰지 말고 학교나 잘 다녀. 아버지도 나올 의지가 없는데 갑자기 끌고 나오면 놀라실 거야. 아니면 내가 나중에······”
“아- 좀 제발. 오빠도 신경 쓰지 말고 옮긴 데서 적응이나 잘해. 우리 서로 신경 쓰지 말자. 끝.”
“알겠어. 근데 지균이가 질 나쁜 놈들이랑 논다고 한 거, 어떤 사람들인진 알아? 깡패라는 거 말고 말이야. 혹시 얘기하는 것도 들었어?”
“집에서 통화도 자주 하더라고. 근데 그럴 때마다 자꾸 굽신거리는 게 꼴 보기 싫어서 나도 방에 들어갔었거든. 기억나기로는 말끝마다 형님, 형님 거리고, 형님 덕분이라고 그러고······ 뭐가 자꾸 감사하대. 계속 부탁드린다, 이런 말도 했던 것도 같고. ······아, 회장님? 이사님? 그런 단어도 말했어. 거의 이사님이라고 했던 거 같다. 이사님 건강하셔야 할 텐데, 그랬나? 몰라. 그게 정말이겠어? 자기들끼리 그러고 노는 거지.”
지훈이 눈썹을 찌푸렸다. 회장님? 이사님? 회장님이라면 백가연을 말하는 걸까. 백가연 끄나풀들이랑 어울리고 있나? 하지만 지안은 이사님이라고 했던 것 같다고 결론 내리듯 말했다. 그럼 이사님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사님이라면, 설마 박승혁을 가리키는 걸까. 박승혁은 조직의 수장이라도, 대외적으론 대부업체를 운영하고 있으니까. 잘 모르는 사람은 회장님이라고 지칭할 수도 있으나 공식적인 직함은 이사였다. 지훈도 처음 그를 만났던 사무실에서 ‘박승혁 이사’라고 쓰인 검은색 명패를 봤었다.
이사님이라고 지칭했다고 박승혁을 바로 떠올리는 자신이 예민할 걸까. 아니면 백가연, 박승혁 둘 다를 가리키는 게 아닐 수도 있다. 일단 지안에게 물을 게 많아 고개를 털었다.
“폭행 사건은 나도 후배한테 들었어. 지균이가 세입자 때려서 네가 신고했다면서.”
“응. 그때 바람 쐬러 나간다면서 나가서 전화했지. 거기서 하면 분명히 엄마가 지랄할 테니까.”
“지금 집 말고 다른 집 한 채가 더 있었던 거야? 너 알고 있었어?”
“나도 이번에 본가 가서 알았어. 간 김에 며칠 머무르고 있는데, 엄마가 갑자기 작은오빠랑 셋이서 어디 가자고 하는 거야. 마침 똑똑한 자식도 왔으니 같이 가서 편들어달라고. 그렇게 싸고돌아도 작은오빠 멍청한 건 아나 봐?
아무튼, 처음엔 안 간다고 했다가 세입자가 집에서 안 나가려고 한다고, 만나러 가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우리 이 집 말고 또 있었어?’하고 물어보니까 그렇대. 내가 그거 믿고 공부 안 하고 막 살까 봐 일부러 말 안 해줬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가면서 작은오빠랑 얘기하는 거 들으니까 왜 말 안 해줬는지 알겠더라고. 작은오빠한테 주려고 말 안 했던 거야. 오빠랑 내가 그 집 탐낼까 봐.”
집이 한 채 더 있었다는 말을 들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씁쓸함이 밀려왔다. 그렇게 열심히 가족에게 헌신해도 어머니는 끝끝내 집 얘기를 하지 않았다. 지안에겐 필요해서 했다고 해도, 어쨌든 저보다 먼저 알았다.
나는 집에서 어떠한 존재였던 거지. 어떤 역할이었을까. 씁쓸함을 삼키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좆 까, 이러고 있었지. 말하면 또 지랄할 거니까. 아무튼, 그래서 세 놓은 집에 갔는데, 알고 보니까 세입자가 집에서 안 나가려고 한 게 아니라, 작은오빠가 두 달 전부터 그 집에 자꾸 찾아가서 여기 내 집이다. 깨끗하게 써라, 이러면서 난리 쳤다는 거야. 엄마가 딱 두 달 전부터 곧 명의 넘겨준다고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말했나 봐. 엄마도 작은오빠 부추기는 게 좀 있어. 좀이 아니라 많이.
근데 세입자가 ‘아직 계약 남아 있으니까 더 찾아오지 마라’라고 한마디 했더니 세 들어서 사는 주제에 그런다고 엄마한테 말한 거지. 우르르 가서 본때를 보여줘야겠다고. 그거 듣는데 내가 거기 있는 게 너무 쪽팔리더라고. 그래서 나한테 같이 가자고 했던 거야. 머릿수 하나라도 늘리려고.
그렇게 겁주고 싶으면 내가 아니라 형님 형님 하던 사람들 데리고 가지 왜 저래, 했거든? 근데 정말 그러더라. 그 세입자한테 다음엔 무서운 형님들 모시고 올 거니까 고분고분하게 굴라고. 진짜 쪽팔려 죽는 줄. 아 어이없어.”
“세입자는 고분고분하게 안 나왔을 거 같은데.”
“응. 그 사람도 대단한 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예, 그러세요.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이러더라고. 그러니까 작은오빠가 ‘어, 이게 아닌데?’ 하면서 쫀 거지. 그러고는 쪽팔렸는지 ‘야 이 개새끼야!’ 이러면서 주먹을 날리더라고. 안 되겠다 싶어서 집 밖으로 나간 다음에 신고했어.”
“야. 욕까지 그렇게 재현할 필요는 없어.”
그것도 그렇게 찰지게······
난감한 큰오빠 목소리에 지안이 깔깔깔, 하고 웃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라 시원스럽게 들렸다. 분명 고개를 젖혀 목젖을 드러내고 웃고 있을 거다. 중학생 때도 그랬으니까. 누가 이걸 스무 살 여자애 말투라고 할까.
지훈이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왜 우리 집에 평범한 캐릭터는 없는 거지.
“넌 여자애가 말투 좀······”
“아 뭐야, 꼰대처럼 그러지 좀 마! 하여튼, 오빠는 옛날부터 고지식했다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공부하고 경찰대 간 거겠지만, 난 아니야.”
“아니니까 서울대 못 갔겠지.”
“놀리지 마!”
생각한 대로 알아서 잘살고 있었다. 안심이 몰려오며 처음보다 말투가 편해졌다.
“혹시 집이 좀 힘들어 보인다던가, 그런 건 없었냐? 생활비라던가······”
“아니. 전혀? 강아지 옷 쇼핑하러 간다고 나가더니 자기 옷만 왕창 사 오던데. 안 변했어. 여전하더라. 전혀 걱정하거나 신경 쓸 거 없어. 집도 두 채나 있는데 뭘 신경 써. 나도 하나도 신경 안 써. 어쩌면 하나 더 있을지도?”
작은 웃음으로 마무리한 지안이 갑자기 차분한 톤으로 말했다.
“나도 사실 할 말은 없지.”
“뭐가.”
“오빠가 보내준 돈으로 용돈 받으면서 기숙학교에 기숙학원까지 잘 다녔으니까. 오빠 아니었으면 집에서 학교 다니면서 같이 미쳐버렸을 거야.”
“······”
“가끔 연락했어도,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래서 스무 살부터는 알아서 살려고 국립대 갔잖아. 그래야 학자금 대출도 빨리 갚으니까.”
“······자취는, 안 힘드냐?”
“자취방 안 구하고 학교 기숙사 신청해서 들어갔어. 통금 시간 빡세긴 한데, 고등학생 때부터 계속 기숙 생활했으니까, 괜찮아. 근데 생각보다 대학 생활이 재밌진 않아. 장학금 받으려고 공부하고 있거든. 지각이나 결석도 한 번도 안 하고, 과제도 꼬박꼬박 내려니까 맨날 학교 도서관에서 살아. 학식도 존나 맛없어.”
“연 끊고 나왔다면서. 생활비는 어떡할 건데.”
“아 자꾸 생활비 타령이야. 알아서 해. 고등학생 때 용돈 쓸 일도 없어서 모아둔 돈도 있고, 다음 학기 때 근로장학생 신청해볼 거야.”
웬일로 차분하게 말한다 싶더니, 다시 올라가는 목소리에 지훈이 헛웃음을 쳤다.
“그래. ······힘들면 전화하든지.”
“됐거든. 가족이랑 연 끊었다면서. 나도 끊었는데, 우리 서로 가족이잖아? 최대한 보지 말자.”
“지랄하네.”
지안이 깔깔, 하고 웃었다.
새로 터전을 옮긴 도시는 어떠냐는 질문에 지안은 처음엔 사투리를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저도 가끔 사투리를 쓴다며 처음 듣는 단어를 말하기도 했다. 지방에선 번화가를 시내라고 부른다며, 이젠 시내라는 단어가 잘 나온다고 말하는 목소리는 밝고 경쾌했다. 지안도 분명 이런 일상 얘기를 하고 싶어 한 게 느껴졌다.
한 번 터진 입은 한 시간이 지나도 끝내 닫힐 생각을 안 했다. 자기 얘기를 늘어놓다 중간중간 던지는 질문에 대답하던 지훈이 피곤한 티를 내자, 그제야 입을 닫았다.
“늦었다. 자라.”
“응. 가끔 연락해도 돼?”
최대한 보지 말자고 할 땐 언제고.
“해. 바쁘면 답장은 늦을 수 있다.”
“나도 바쁘거든.”
“그래. 이만······”
“오빠.”
“어?”
또 할 얘기가 남았나. 지훈이 시계를 쳐다봤다. 내일 휴무라 늦게 자도 되긴 하지만, 한참 통화하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듣느라 귀가 얼얼했다.
“······”
“왜. 빨리 말해.”
“나는 오빠가 어떻게 살든 만족하면 그거로 됐다고 생각해.”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목소리까지 깔고. 지훈이 잘못 들었나 하는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핸드폰은 한참 전부터 스피커폰으로 돌려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어떤 모습이든지 행복하면 됐어. 나는 아무 생각이 없어. 난 내 인생에 제일 관심이 많아.”
“뭐 잘못 먹었냐?”
“아니, 그냥 그렇다고. 끊어. 가끔 연락할게. 심심하면 연락해.”
그러더니 대답도 하기 전에 툭 끊어버렸다. 잘 나가다가 찝찝하게 마무리된 느낌에 지훈은 한동안 꺼진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집과 연을 끊은 거 때문에 그러나. 하지만 자기도 끊어놓고선. 다른 얘기 한참 하다가 갑자기 그 주제로 돌아가기는. 뜬금없는 놈. 성질만큼 자기 멋대로다.
시계를 보니 애매한 시간대다. 휴무 전날 자리에 들기엔 아까운 시각.
내일이 휴무인데도 아직 박승혁에게 연락이 없는 걸 보면 내일도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동안 일 잘하고 있고 필요한 게 있으면 명준이나 철성에게 연락하라는 말은, 먼저 연락할 때까지 연락하지 말라는 뜻이다.
아주 중요한 일이거나, 경찰인 자신에게 들키면 안 되는 일일 거다. 사실 유흥업소에서 숱하게 접대받고 상납금까지 받아왔던 터라 봐도 뭐라고 할 자격은 없었다.
워낙 서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서 잠깐 망각하고 있었던 거지, 조폭과 경찰이 연인 사이라는 것부터가 모순이었다. 그냥 서로 껄끄러운 건 알아서 안 들키게 하자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지안이 말했던, 지균이 ‘회장님’ 또는 ‘이사님’이라고 칭했던 자가 누구인진 차차 고민하기로 했다. 나중에 박승혁에게 연락이 오면 만나서 한번 운을 띄워보거나, 대놓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세상 모든 이사가 박승혁일 리는 없으니까.
또 지안이 두 단어를 언급한 건 분명 지균이 그 두 단어를 모두 사용했다는 거다. 내용으로 봐선 ‘이사님’이란 단어를 주로 사용했던 것 같지만.
어쩌면 두 단어 모두 서로 다른 사람을 지칭하는 걸 수도 있다.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건 없다. 머리를 헝클었다.
“아- 복잡하네.”
문득 입이 심심했다. 저녁은 혼자서 간단히 때우고 지금까지 통화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냉장고에 사둔 닭가슴살 소시지가 생각났다. 에어프라이어에 넣고 돌려서 간단히 혼술이나 할까 싶었다. 내일 만날 사람도 없는데.
그러고 보니 박승혁이 없으면 쉬는 날 만날 사람도 없었다. 지금 부서로 인사 이동된 후에 새로운 팀 동료들이 연락해오긴 했으나 전에 있던 곳에서 사람들에게 데어 낯을 가렸다.
박승혁도 당연하게 비번이나 휴무일엔 이미 자신과 갈 곳을 정해 놓았거나 하여 전날 데리러 왔었다. 굳이 전날에 미리 만나는 건 당연히 떡 치기 위해서다. 그럼 대부분 다음날 낮까지 아린 허리를 부여잡고 같이 영화를 보는 등 여가생활을 즐겼었다.
이젠 슬슬 만나도 되겠지. 그때부터 시간도 많이 지났고, 여기서 적응도 해야 하니까. 이번처럼 박승혁이 바빠 못 만날 수 있고.
그에게만 의지하게 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연인이 된 후엔 돈을 포함한 선물을 일부러 더 받지 않으려 했다. 계약 관계였을 때야 돈이 필요했고, 스스로 남창 형사라고 생각해 당연하게 돈을 요구했었으나 지금은 아니니까.
그리고 박승혁은 모든 조건에서 저보다 우위에 있다. 받는 게 익숙해지면 안 그래도 기울어진 관계가 더 그에게로 기울 것 같았다. 못마땅해하는 그에게 ‘싫으면 예전처럼 지내. 애인하지 말고.’라고 말했더니 더 말하진 않았지만.
사실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는 직업에다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진 관계라 그러는 것도 있었으나 지훈 스스로 그의 적극적인 애정 공세가 아직 부끄럽고 어색한 탓도 있었다. 하필 그 시기도 한창 어머니와 남동생에게 시달리던 때였다. 후에 징계받고 겨우 떨어져 나가서 조용해지니, 이번엔 밀려오는 공허함 때문에 물욕이 아예 사라지다시피 되어버렸다.
그동안 어깨를 짓누르던 짐이 사라지니 어색했다. 오랫동안 어깨에 짊어지고 살았는데 앞으로는 뭘 지고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공허한 감정이 들어서, 짐을 만들어서라도 짊어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 감정에 익숙해지지도 않았는데 지금 부서로 인사 이동하여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까지 해야 했다. 혼자 적응하고 익숙해져야 하는 것들은 많은데, 박승혁 혼자 신이 나서 필요하지도 않은 걸 주고 난리를 피우니 -지훈의 입장에선 충분히 난리였다- 당황스러웠다.
그 길고 복잡한 마음을 그에게 설명하려니 엄두도 나지 않고, 조곤조곤 설명하는 것 자체가 상상만 해도 간지러워서 시도조차 안 했다.
혼자 한쪽 다리를 떨다 일어났다. 의문의 꼬리를 물고 이어진 생각이 박승혁과의 관계에 관한 생각까지 이어졌다. 뭐라도 먹으며 머리를 쉬어야 할 듯싶었다. 냉장고에 사둔 닭가슴살 소시지를 얼른 꺼내기로 했다. 맥주캔도 하나 꺼낼 생각이었다.
의자에서 일어나 방을 막 나왔을 때, 차임벨 소리가 울렸다. 이 집에 찾아올 사람은 없을 텐데. 냉장고가 아닌 인터폰으로 걸어갔다.
인사 이동할 시기엔 가족과 연을 끊었던 만큼, 지금 집은 형사 시절 지내던 곳보다 넓었다. 방이 하나 딸린 원룸으로 이사했으나 그래도 좁은 건 매한가지였다. 인터폰도 바깥이 보이는 비디오폰을 바라는 건 사치다. 아날로그식이라 바깥이 보이지 않아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누구세요?”
“경위님.”
익숙한 목소리였다. 명준이었다. 매끈한 얼굴에 무던한 인상인, 박승혁의 대부업체 비서실장. 말이 비서실장이지, 그냥 박승혁 오른팔이라고 보면 편했다.
박승혁과 지내면서 본의 아니게 자주 마주쳐 익숙했으나 반갑진 않았다. 이 집에 누군가를 초대한 적도, 누군가가 온 적도 없었다. 심지어 박승혁조차도.
굳이 좁은 집에서 만날 바엔 그의 오피스텔이나 사무실 별실에서 만나는 게 편했다. 새로 이사한 곳이 어떤지 박승혁이 궁금해한 적은 있으나 초대하진 않았다. 남자 혼자 사는, 정말 볼 거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명준이 연락도 없이 이렇게 불쑥 찾아온 거라 귀찮음이 먼저 올라왔다.
“왜.”
딱딱한 목소리에 명준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작게 웃었다.
“집들이 겸 잠시 들렀습니다.”
“초대한 적 없는데.”
“이사님 심부름도 하려고.”
“박승혁한테 연락 없었어.”
“아, 이사님이 연락하셔야 열어주십니까?”
놀리는 게 다분한 목소리였다. 지훈이 가늘게 눈을 떴다. 박승혁이고, 명준이고 관계가 변한 이후로 몇 배는 더 능글맞아졌다. 어린 동생 귀엽게 놀리는 듯한 느낌이 어이없어 일부러 더 까칠하게 받아치게 되었다. 둘 다 저보다 나이가 많긴 하지만.
“뭐 전해 주러 왔으면 놓고 가.”
“잠시만 들어가도 될까요? 꽃샘추위라 바깥 날씨가 많이 춥네요.”
뒤이어 춥다는 걸 시위하듯 “어우” 하는 신음이 들렸다. 지훈이 한숨을 작게 쉬곤 수화기를 내려놨다. 신발장에 발을 디디고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열기 직전에 저도 모르게 몸이 머뭇거렸다. 그런 스스로가 의아했다.
명준이 두렵다거나 껄끄러운 감정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박승혁보다는 못해도, 은근히 능글맞게 뱉는 소리에 묘한 친근감까지 느끼는 즈음이었다. 김명준은 박승혁의 부하이자 오른팔이고, 그에게도 반말을 일삼고 예전엔 날을 세우고 욕설을 뱉었었다. 그런 때를 제외하곤 내키는 대로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썼다. 명준도 한 번도 말투에 대해 불편함이나 자기 의견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눈치 볼 거라곤 없다.
그런데 왜 망설여질까. 내 집에 처음 오는 외부인이라서? 박승혁이 아니라 김명준이 먼저 왔다고 생각해서 그러나? 내가 언제 그런 거까지 신경 쓰는 놈이었다고.
눈살을 잠시 찌푸린 지훈은 이내 문을 열었다. 밖이 정말 추운지, 문틈으로 본 명준의 두 귀가 불그스름했다. 그 말처럼 꽃샘추위라 아침과 한낮의 기온 차이가 십 도를 웃돌았다.
‘밖에 오래 있었나?’
혹여나 싶어 확인한 어깨너머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문을 더 활짝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경위님.”
“밖에 다 들리니까 빨리 들어와.”
지훈이 문을 확 열어젖히곤 손을 놓았다. 명준이 잡은 문을 천천히 닫으며 지훈을 따라 들어왔다.
“여기, 집들이 선물입니다.”
명준이 두루마리 휴지를 신발장 입구에 내려놓았다. 그 외의 짐은 보이지 않았다.
“끝이야?”
“급하게 오느라. 다음엔 더 좋은 거 사 오겠습니다.”
그걸 말하는 게 아닌데. 지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심부름 왔다면서.”
“아- 그건······”
명준이 두 손을 맞잡아 비볐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뭐 전해 달라는 건 아니고요, 지금 경위님을 좀 모셔 오라는 지시를 받아서 부득이하게 찾아왔습니다.”
“어디로.”
“사무실로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연락을······”
못 받았다고 하려다 조금 전처럼 놀림거리 하나 쥐여줄까 봐 방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들어 확인했다. 박승혁 성격이라면 분명 명준을 보내기 전에 연락을 미리 했을 것이다. 핸드폰에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 별실에서 기다려.
불과 1분 전에 박승혁이 보낸 메시지였다. 명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앞뒤 자르고 하나만 달랑 보낸 것 하며, 명준이 이곳에 온 시간과 거의 차이 나지 않는 게, 굉장히 바쁜 듯했다. 평소의 그라면 명준에게 지시를 내리고 바로 연락했을 텐데. 보통 다 그렇게 하지 않나.
아무리 바빠도 이렇게 집까지 다짜고짜 부하를 보낸 적은 없었다. 직접 연락하거나, 아니면 명준을 시켰어도 ‘~로 오라고 하십니다’라고 말을 전하는 정도에서 끝난다. 대체 얼마나 바쁜 거지.
뒷머리를 긁으며 방에서 나오는데, 여전히 신발장 앞에 서 있는 명준이 보였다. 순간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려다 그를 위아래로 살폈다. 매일 보는 사이도 아니지만, 다른 때보다 좀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좁은 신발장에 두 손을 바르게 한 채로 서 있는 명준은 작은 상자에 큰 몸을 구겨 넣은 것 같았다. 늘 딱 맞게 단추를 잠근 정장 재킷은 풀어져 있었다. 넥타이도 목 끝까지 채워져 있지 않고 풀어져 단추 하나를 푼 셔츠 옷깃을 드러내었다.
그러고 보니 표정도 달랐다. 어딘가 초조하고 긴장해 있는 듯한 얼굴. 금방 묘하게 어긋난 대답을 한 건 능글맞은 장난이 아니라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어서였나.
지훈도 덩달아 이유 모를 긴장이 들었다. 닭가슴살 소시지 먹을 식욕은 이미 사라졌다.
“지금 바로 출발해요?”
“네.”
“그럼 잠깐만. 옷 좀 갈아입게.”
“아뇨. 편하게 가셔도 됩니다.”
“······ 같이 저녁 먹자는 건 아닌가 보네.”
“네. 시간도 늦었고, 이미 드셔서요. 필요하시면 제가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됐어요.”
한번 떠본 지훈은 방으로 도로 들어가 편한 옷을 갈아입지 않고, 외투만 걸치고 나왔다. 외투 주머니에 지갑과 차 키를 넣은 그는 집안 불을 끄고, 신발장 불에 의지해 신발을 신었다. 명준이 바로 현관문을 열었다.
주차장에 내려가서 본 차는 명준의 차였다. 몇 칸 건너 세워진 자차로 가는데 명준이 그를 말렸다.
“제 차로 가시죠. 이사님이 직접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경위님 피곤하시다고.”
과잉보호하기는. 하지만 싫지는 않아 머쓱한 얼굴로 명준의 차에 탔다. 조수석에 탄 지훈이 안전벨트를 매며 생각했다.
‘그냥 바쁜 시간 쪼개서 잠깐이라도 같이 있자는 건가. 내일 비번이니까?’
그럼 그렇다고 명준에게 분명 알려줬을 건데. 명준도 예의 은근히 능글맞은 얼굴로 ‘이사님이 조금이라도 경위님과 함께 있고 싶어서’라고 놀렸을 건데. 자꾸만 흐트러진 옷차림과 긴장된 얼굴이 머리에 남아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명준도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 곧 차가 주차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차가 빠져나간 후, 시간이 흐르고 주차장 센서등이 이내 꺼졌다. 칠흑같이 어두워진 주차장 속에서 갑자기 희미한 불빛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