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다음 날 아침 기준은 옷장에서 꺼낸 옷을 만지작거렸다.
‘아이씨.’
갈아입을 옷을 가져가자니 번거로울 게 뻔했다. 옷을 갈아입는 것도 그렇고 머리도 만지고 싶었다. 잠깐 얼굴만 비치고 올 예정이었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도서관에서 바로 나온 후줄근한 모습으로 나가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미리 꾸미고 가기엔 누가 봐도 어디 간다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안 그래도 자격증 공부한답시고 집에서 용돈 타 쓰느라 눈치가 보이는데 거기에 하윤이 했던 말도 있었다. 눈치를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었다.
‘아니, 형은 괜히 그런 말을 해서는.’
혹시나 싶어 어제 새벽 늦게까지 뉴스와 각종 커뮤니티를 뒤져 봤지만, 외출 자제 권고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평소보다 더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 정말.”
나가자니 찝찝하고 안 나가자니 몸이 비비 꼬였다. 친구 동민의 생일을 핑계 삼아 진탕 놀아 보겠노라고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던가.
‘평소보다 일찍 집에 와서 옷 갈아입고 나가자.’
이런 날은 융통성 있게 공부 시간을 조절해야 탈이 안 난다. 기준은 이것이 일종의 컨디션 관리라고 자위하며 골라 둔 옷을 따로 빼 두었다. 본래 입던 옷을 입고 나가자 괜한 의심도 사지 않고 좋았다.
식사 시간에 재차 하윤의 이야기가 나와 가슴이 뜨끔했으나, 어제 부친이 했던 말과 비슷하게 이 주나 쉴 수 없다는 이야기가 돌아왔다. 그러고는 하윤의 당부가 사실 그리 큰일은 아니리라고 지레 허풍 취급했다.
회사를 쉬어야 할 정도의 일이 터지면 대피소로 대피를 해야지 다 낡아 빠진 아파트에 있으라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것부터, 하윤이 자신은 괜찮다고 집에 오지 않는 것, 그리고 소문의 근원지와 이유가 불명인 점.
“그래도 하윤이가 우리를 위해서 당부한 거니까, 마냥 흘려듣지 말고 조심하자고. 밤늦게 돌아다녀서 좋을 거 하나 없잖아. 안 그래?”
“맞아요, 맞아.”
여러 입을 거치자 그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하윤의 말이 한결 가벼워졌다. 기준은 어제보다 훨씬 마음이 가벼워졌다. 도서관에서 평소보다 일찍 집에 들어올 때는 아예 하윤의 당부는 떠올리지도 못했다.
얼른 씻고 단장한 뒤에 나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다행스럽게도 집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때마침 친구의 연락이 왔다. 그는 약속 시간으로부터 매우 이른 시간에 도착하거나 아예 늦은 시간에 도착할 수밖에 없던 경기도인으로, 이번엔 이르게 도착할 것 같으니 자신과 먼저 만나 시간을 죽이자고 했다.
‘잘됐다.’
기준은 그러겠노라 대답하고는 급히 몸을 씻었다. 수건으로 대충 머리를 탈탈 털고 나오던 그는 문득 이 특별한 날에 특별한 뭔가를 더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곧장 지하의 방으로 들어가 그녀의 고급 드라이기에 손을 대려는 순간, 침대 한구석에 뭉쳐 있던 이불에서 서슬 퍼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작 그만.”
“으이씨, 깜짝이야!”
“너 뭐냐.”
“너 왜 집에 있냐?”
이불 뭉치 속에서 손이 쑥 뻗어져 나와 중지를 세웠다.
“생리 터져서 반차 썼어.”
“인성이 터진 거 아니고?”
“개……야.”
욕하느라 내민 얼굴이 누렇게 떠 있었다. 정말 아파 보이기는 했기에 기준은 삐죽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너 뭐 하려고 했던 거야?”
“어? 어어. 드라이기 좀 쓰려고.”
“네 꾸진 거나 써. 내거 쓰지 말고. 네 손 기름 묻는 거 혐오스럽거든.”
“넌 오빠한테 말본새가 그게 뭐냐? 손 기름? 웃기고 있네.”
“응. 됐고, 꺼지세요.”
“야, 근데 나 딱 한 번만 써 보면 안 되냐? 그냥 머리 한 번만 말릴게.”
“아, 진짜 너 짜증 난다. 아……. 그래, 써라 써. 대신 이제부터 입도 뻥긋하지 마라. 열받으니까.”
기준은 지하가 보지 못하는 위치에서 그녀의 마지막 말을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따라 했다. 지하는 그가 그러든 말든 이불을 머리 위로 끌어 올리다가,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야, 근데. 너 어디 가냐?”
“어? 아니?”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닌데 네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샤워를 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나 원래 잘 씻어. 왜 그래.”
“원래 잘…… 씻어? 너……. 수상해.”
“아니야, 그런 거.”
“진짜 솔직하게 말해. 어디 가는데?”
“야, 그냥 한 번만 모른 척해 줘. 진짜 잠깐 얼굴만 비치고 올 거야.”
“너 진짜 어디 가는데.”
지하의 계속된 추궁에 기준은 결국 실토하고 말았다.
“그랜드 파라디스.”
“너 같은 거지가 거길 어떻게 가?”
“동민이 생일이거든.”
“야, 걔도 거지잖아.”
“……생일이니까. 그리고 걔는 취직도 했고.”
쌍둥이다 보니 서로 아는 사람이 겹쳤다. 친구가 동생의 친구도 되기 때문에 지하는 거리낌 없이 이야기했다.
“이 새끼들 거기 간다고 진짜 단단히 별렀나 보네.”
“크흠.”
“그래도 너는 가지 말지.”
“나는 왜? 뭐 종일 도서관에 처박혀서 맨날 공부만 하고 있어야 하냐? 가끔 바람도 좀 쐬고 해야지 머리가 돌아가지.”
“아니, 난 큰오빠가 말한 것도 있고 해서. 우리야 직장에 매였다 치더라도 넌 좀 안 나갈 수 있는 그런 몸이잖아.”
“야. 김지하.”
“물론 오빠한테만 지키라고 하는 내 말이 고깝고, 치사하게 들릴 수 있는데, 그래도 다 안 지킨다고 하니까 마음이 좀 그래.”
“…….”
“큰오빠가 원래 그런 거 말하는 성격도 아니잖아. 늘 남처럼 우리한테 관심 없는 사람인데.”
아프기 때문일까. 말투가 다소 날카로웠으나 기준은 지하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 저야 같은 남자라 형형하고 따라붙거나 같은 방을 쓰기도 했지만, 지하는 그러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그녀에게 하윤은 친오빠라기엔 명절에 가끔 보는 사촌과 비슷했으리라.
비슷한 말을 예전에 한 적도 있고.
‘가족보다는 친지.’
김하윤도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자신들은 그냥저냥 친지 같고 오히려 저를 막 대하는 백무경이 그의 친형제 같으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그 수치와 모멸을 견디며 백무경의 곁에 붙어 있지 않았을 테니까.
‘그때 그냥 우리랑 살았으면 달랐을지도 모르는데.’
어렸을 때 메워지지 않은 거리감은 머리가 굳자 더욱 크게 벌어졌다. 어쩌면 이젠 닿지 못할 수도 있었다. 본래 그런 거리는 멀어지면 멀어졌지, 가까워지지 않는 법이니까.
“아,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
드라이기 한번 빌려 쓰려다가 기분만 찝찝해졌다. 기준은 다 말리지 못한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다가 다시 지하의 방에 들어갔다.
“야, 김지하. 너 괜히 부모님이나 형한테 이를 생각하지 마라. 나도 이거 오래전부터 약속한 거라서 얼굴 내밀러 가는 거니까. 그냥 도서관에 있는 거로 한 번만 입 맞춰 주라. 어? 부탁할게.”
“야이……!”
“부탁할게!”
기준은 지하의 대답을 듣기 전에 문을 닫았다. 시간을 확인하자 아차 싶었다.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미리 만나기로 했던 친구와 서로의 차림새를 비웃다가, 간단히 배를 채운 다음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피시방을 가느니 마느니 하다가 가까스로 친구들을 모아 본래 목적지인 그랜드 파라디스에 도착했다.
“야, 평일인데도 사람이 왜 이렇게 많냐. 주말에는 터져 나가겠는데.”
“터지진 않던데 줄은 엄청나게 서더라.”
건물의 규모가 무색하게 주차할 공간이 없어 차들이 길게 줄 서 있는 광경을 곧잘 보곤 했다.
“그래서 그나마 차 잘 빠지는 마트 쪽에 차 대 놓고 우리 노는 쪽으로 넘어오는 사람도 많음. 내 아는 동생이 주차 아르바이트했다가 인류애 사라진다고 개 쌍욕 하더라. 안 된다고 대문짝만 하게 써 놔도 다 어긴다고. 그리고 어겨 봤자 제지도 못 한다고. 놀러 갈 때 참고해서 차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하라더라.”
그만뒀기에 가능한 아르바이트생의 조언이었다. 그 외에도 가는 길에서만 해도 온갖 이야기가 쏟아졌다. 취직 이야기, 준비하는 이야기. 대체로 서로를 뽐내는 이야기였고 이에 지지 않으려 몸을 부풀리는 새처럼 서로 허세를 부렸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덧 정부 지침에 따라 정문이 곧 폐쇄된다는 안내가 흘러나왔다. 그랜드 파라디스의 참모습이 이제부터 드러나는 것이다.
음악 볼륨이 점차 높아지고, 그랜드 파라디스 내 유흥 시설들의 조명이 바뀌었다. 폐점한 일반 시설 위에도 각종 조명이 드리워졌는데, 유흥 시설로 인도하는 담장같이 보였다. 지하철에서 올라오는 길에서부터 본다면 영화 속에서나 보던 사람을 꼬여 내는 던전같이 보였으리라.
물론 기준의 의견이 아니라 건물 소개에서 슬쩍 본 내용이었다.
클럽 개장 전 간단하게 취기를 올리자며 들어간 술집도 규모가 꽤 컸다. 기준과 친구들은 연신 두리번거리다가 서로에게 어설프게 두리번거리지 말라며 타박했다. 처음 온 것 같이 보이기 싫은 탓이었다. 그러나 메뉴판을 보고 달달 떨다가, 가장 싼 술과 가장 싼 안주 하나를 시키며 연신 약한 소리를 했다.
그렇게 실컷 떠들고 헌팅을 하느니 마느니 하다가, 몇몇이 호기롭게 자리를 떠난 뒤 기준은 시계를 힐끔거렸다. 즐거운 시간이라 그랬을까.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렀다. 아직 본격적인 자리는 시작도 못 했는데 통행 제한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일어나려면 지금 일어나야 했다.
“나 먼저 가 봐야겠다. 집에 일이 있는데 까먹어서.”
“아, 너 왜 그러냐.”
일어나려는 기준을 다른 친구가 말렸다.
“너 혹시 민석이랑 화 안 풀려서 그러냐?”
“아니, 그건 진작 풀었지. 그게 아니고 집에 일이 있는 걸 깜빡했다니까.”
“그거 아니면 혹시…….”
오만 불화가 다 끌려 나왔다. 전전 여친과 만난 친구 이야기, SNS에서 기준으로 속여 다른 사람에게 치근덕거렸던 친구의 이야기, 혹은 예전에 없어진 줄 알았던 물건들의 행방까지. 이 정도면 자신이 무리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잠시 고민하던 사이 하윤과 통화할 당시 곁에 있었던 친구가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기준이 일어나려 하자 형 때문이냐고 정확하게 짚어 냈다. 술이 좀 들어갔기 때문이었을까. 다른 친구가 입술을 삐죽이며 불만을 토로했다.
“아니, 무슨 형 핑계를 대냐. 우리 앞에서 X도 없는 새끼라고 까대더니. 씨이봐, 데려와 봐. 형님이 손봐 줄게.”
“야 우리 형이 한번 터치하면 너 죽어, 인마.”
“아, 그럼 전화라도 걸어 봐. 내가, 내가 설득해 줄게. 형도 여기 오라 그러자. 형 세워 두면 헌팅 잘 되겠다. 너희 형 너랑 다르게 잘 생겼잖아.”
“새끼 취해서 헛소리하네.”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기준은 화장실 가는 척 몰래 나갈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머리를 털었다. 그때 이상하게 탄 냄새가 났다.
“야, 타는 냄새 안 나냐?”
“그건! 그건, 내 애간장이 타는 냄새야.”
“저 새끼 입 막아 봐. 진짜 탄 냄새 난다니까!”
기준은 옆에 있던 친구의 손목을 잡고 비상구로 향했다.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놈을 놓고 앞으로 나아간 순간, 굉음이 울렸다.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한 박자 늦게 건물의 보안 시스템이 작동하며 층과 층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뭐야? 뭔데? 뭐냐고!”
이 일은 우연과 우연이 겹친 일이었다.
그랜드 파라디스는 숙박 시설과 쇼핑몰, 유흥 시설이 함께하는 종합 공간으로 세간의 우려와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랜드 마크를 노리는 고층 건물은 아니었지만, 인근 건물 높이를 생각하면 기록적인 층수를 가지고 있어 특혜 논란이 있었고, 해외 특수 공법을 사용하여 사용자들의 안전과 편이를 강조했는데 시공사의 공사비 횡령과 부실 공사 의혹이 있었다.
개장 전까지 믿을 수 있느니 마느니 갑론을박이 오갔지만, 그랜드 파라디스가 내세운 안전한 놀이 공간에 대한 젊은 층의 수요가 대단했으므로 매일 엄청난 수의 인파를 맞았다. 낙수 효과를 기대했던 주변 상권은 오히려 인파를 흡수당했다며 현수막을 걸어 댔지만, 그랜드 파라디스가 명소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었다.
다만 그랜드 파라디스에 입장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괜찮을까?’ 하는 마음을 갖고 들어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랜드 파라디스에서 풍기는 달콤한 냄새에 정신을 놓다가, 무사히 돌아가면 ‘괜찮을까?’는 ‘괜찮더라.’로 바뀌었다. 이 ‘괜찮더라.’는 또 얼마 지나면 이용객의 마음을 짓누르는 죄책감을 가볍게 만들기 위해 ‘안전하다.’로 바뀌었다.
이것이 반복되다 보니 이제 안전을 묻는 말이 유난으로 들렸다. 의혹은 마음속 깊은 곳으로 내몰려 존재하지 않는 취급을 당했으나, 그렇기에 오히려 더 깊고 짙어졌다.
혹시나 이곳이 안전하지 않다면 어떻게 하지?
혹시나 이곳이 무너지지 않을까.
혹시나 지하철 통로로 잠입한 괴수가 이곳에 들어오지 않을까?
아이코, 무서워. 아이코, 무서워.
그렇게 되지 않길 바라는 티끌 같은 마음이 차곡차곡 쌓였다. 모래시계 안의 고운 모래같이 켜켜이 쌓여 산 같은 모양을 이루다가, 더는 쌓을 수 없는 높이가 되자 쓰러지고 만 것이다.
그런데 하필 이 주변은 이 주변엔 어떤 대단한 괴수가 십 년 전에 뿌려 놓은 힘이 맺힐락 말락 하고 있었다.
그 힘은 정부 지침상 능력이 미달되어 초능력자가 아니라고 분류된 사람들, 혹은 정신력이 강한 사람들에게 기생하여 숨어 있다가, 오랜 세월 그들의 무서움을 먹고 자라나 지금, 우연과 우연이 겹쳐 세상 밖으로 톡 떨어지고 만 것이었다.
처음은 나타난 괴수의 모양은 작고 형편없었으나, 이내 이를 발견한 사람이 비명을 지르자 괴수를 보지 못했음에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후두두 떨어지고, 또 이것이 고이자 다른 괴수가 튀어나왔다. 괴수는 괴수를 먹고 덩치를 키웠고,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달아나거나 혹은 괴수로 변이했다.
괴수가 뒤엉키자 서로의 두려움과 두려움이 튀었다. 불꽃이 튀고, 멀쩡하던 유리창이 깨어지고, 그러던 중에 어떤 사람들이 생각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이 건물이 무너지면 어떻게 하지?
이 건물의 대단한 안전장치가 가동하지 않거나 오작동을 일으킨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