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꿈은 내가 꿨는데 왜 네가 심각해?”
무경의 손끝이 하윤의 뺨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냥 어제 바닷가에서 끌려온 게 짜증 났었나 보지. 거기서 너한테 들은 이야기도 있고.”
“뭐?”
“문에 관한 거. 이것도 잘은 기억 안 나지만.”
“어, 그건 안 되는데.”
“뭐가?”
“그러면 안 된다고.”
“……?”
“그런 게 있어.”
무경은 숨소리같이 웃고는 머리를 마저 털었다. 대강 옷을 꿰입은 다음, 가방에서 이 약 저 약을 꺼내 하윤의 앞에 내려놓았다.
“무슨 약이야? 어디 아파?”
“아니. 너한테 줄 거.”
무경은 약통에서 약을 덜어 빈 통에 담아 주더니, 그중 몇 개는 하윤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하윤이 언젠가 한 번 본 적 있는 알약을 가만 바라보는 사이, 무경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하윤의 양말을 주워 그에게 신겼다.
“아, 더운데.”
“어제는 잘 신고 있더니.”
“그건 체온 보존 때문에…….”
“그러니까. 더워도 한숨 자고 나서 벗어. 너 오늘 체온이 조금 높더라.”
아마도 빛나는 손목을 얻을 때 힘도 많이 쓰고 체력적으로도 한계에 다다르지 않았었겠느냐는 것이 무경의 말이었다. 하윤은 문득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잘 알면 어제 조금 봐주지 그랬냐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었다.
그러나 가까스로 삼켜 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얼른 하자고 그를 재촉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윤은 골치가 아파 미간을 문지르다가, 무경이 마저 내민 물컵을 받아 들었다.
“집에 가서 다른 거 할 생각 말고 푹 쉬어. 누가 뭐라고 해도 듣지 말고. 연락도 받지 말고. 아, 내 전화는 받고. 그래도 난 저녁때쯤에 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전화도 못 받을 정도로 깊게 자면 어떻게 해?”
“그럼 새벽에 다시 하지 뭐.”
오늘 그랬던 것처럼. 무경의 말에 하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답지 않은 농담이 우스웠다. 그러나 무경의 말대로 약을 먹을 순 없었다. 너무 깊이 잠들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적당히 혀 밑에 숨기고 먹은 척했는데, 곧장 입안을 확인하는 바람에 수포가 되었다.
“제대로 먹어.”
“……의심이 많네.”
“약 먹기 전에 네가 혀를 돌리더라고.”
의심할 만하지 않았느냐는 말에 하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혀 밑에 숨기는 사이 녹기 시작한 약 때문인지 입안이 썼다. 제대로 약을 먹자 무경이 이번에는 셔츠를 걷어 보라고 했다. 하윤이 미적거리자 시간이 없다고 재촉하며 옷을 바짝 걷어 올렸다.
하윤은 졸지에 가슴과 등을 훤히 드러내고야 말았으나, 당혹스러움을 수습할 새도 없이 셔츠 자락을 직접 들고 있어야 했다.
“어차피 집에 가서 잘 거니까 약 발라 두려고. 새벽에 조금…… 과했던 것 같아서.”
무경은 자신이 새벽에 남겼던 흔적 위로 약을 발라 주었다. 그야말로 병 주고 약 주고의 표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어느덧 하윤의 등에 약을 다 바른 뒤, 앞으로 돌아왔다.
“앞은 내가 할게.”
“이미 손에 약 다 묻었는데 뭘.”
“아니, 민망해서 그래. 내가 알아서 할게.”
무경은 하윤을 힐긋 바라보다가 금방 한다며 마저 손을 움직였다.
“약 바르는 게 뭐가 민망해서.”
“…….”
“여기 때문에 그래?”
무경은 약을 듬뿍 바른 손가락으로 하윤의 가슴팍을 덧그리듯 더듬었다. 하윤은 차마 내려다볼 수 없어 옆으로 시선을 피했다.
“며칠은 건드리지 마. 여기 조금 까진 것 같아. 괜히 만지다가 덧나면 곤란하잖아.”
“…….”
어처구니가 없는 말에 하윤은 눈썹을 들썩였다. 무경은 코웃음을 친 다음 손을 닦고 하윤의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었다. 그 과정에서 셔츠를 바지 안에 죄다 넣는 바람에 하윤이 학을 뗐다. 그러나 무경은 옷자락을 빼려는 하윤에게 도리어 엄하게 굴었다.
누가 보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하윤이 대꾸하지 않는 사이 무경은 하윤에게 바짝 붙었다. 얼굴이 닿을 듯이 가깝다 싶을 때, 그의 입술이 하윤의 입술을 짓눌렀다.
“어?”
“……?”
무경은 자신이 입 맞춰 놓고서도 도리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덩달아 의아해진 하윤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자 그 상태 그대로 다시 입을 맞췄다.
아직 약을 안 먹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이번에는 떳떳했기 때문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입맞춤을 이어 나가자 무경이 그의 허리춤을 부여잡았다.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는 줄 알던 어린 시절처럼.
문득 떠오른 의심에 눈을 뜬 순간 입맞춤이 끝났다. 무경은 입가를 가린 채 뒤로 물러나서는 하윤에게 물었다.
“너 왜 이렇게 잘해?”
“……?”
영문 모를 소리였다. 하윤은 무경의 말을 곱씹다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소리 없이 짧게 웃다가 그에게 되물었다.
“내가 잘해?”
무경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서서 하윤을 노려보다가, 이내 나중에 집에 돌아가서 이야기하자고 말했다.
“오늘까지는 못 돌아갈 수 있는데, 그래도 내일쯤이면 돌아갈 수 있을 거야.”
하윤은 차마 그에게 못 돌아갈 것이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알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경은 서울로 올 필요가 없었다. 사태가 일단락될 때까지 여기 있는 게 여러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그 여러 사람에 하윤도 포함되었다.
집에 돌아가서 말하자는 말이 마음에 들었던지 무경은 서너 번쯤 같은 말을 중얼거리다가 하윤을 일으켰다.
“너 먼저 건너가. 그거 보고 가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
“알겠어.”
“연락하면 꼭 받고. 아까 말했던 대로 누구 도와줄 생각하지 말고 집에서 얌전히 쉬고 있어. 무슨 일이든 꼭 네가 아니라도 할 사람 있으니까 위험하게 나서지 마.”
차라리 모른 척하고 있으라는 말에 하윤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미덥지 않았을까. 무경은 한숨을 내쉬며 진짜 알았느냐고 되물었다. 이번에도 냉큼 대답하자 그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나 하윤이 대답을 안 한 건 아니라서 그는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
“……너도 약속 잘 지켜야 해.”
“약속?”
“그래, 맡은 일만 하고 다른 생각 안 하는 거.”
무경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럼 또 자신을 보러 와 줄 것이냐고 물었다.
“약속 잘 지키고 또 보고 싶다고 전화하면.”
그럼 또 모르지. 하윤은 뒷말을 삼킨 채 [문]을 열었다.
“이만 가 볼게. 너 늦겠다.”
슬슬 약효가 도는지 아니면 진짜 한계에 다다랐는지 눈꺼풀이 무거웠다. 하윤은 [문] 안으로 발을 디디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안녕. 나중에 보자.”
◇◇◇
하윤은 집에 돌아와서 쓰러지듯 잠에 빠졌다. 분명 해가 막 떴을 때 잠들었는데 다시 눈을 떴을 땐 해가 지고 있었다. 여름에 접어들어 해가 길어진 것을 생각하면 저녁 무렵에 깬 셈이었다. 휴대 전화엔 부재중 통화가 몇 통 들어와 있었는데, 좀 더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묻는 GTS와 박건영. 그리고 그의 누이의 전화였다.
하윤은 반사적으로 전화를 걸려다가 멈칫 손을 멈췄다. 이상하게 가슴이 술렁였다. 무리한 탓일까? 하윤은 잠시 생각하다가 베란다로 나가 바깥을 둘러보았다. 특별히 이상해 보이는 것은 없었으나 여전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불안했다. 어떻게 하면 이 불안을 해소할 수 있을까. 하윤은 고민 끝에 부재중 연락에 대답하는 대신 씻고 밥을 먹었다. 그런 다음 둔한 몸을 재촉해 여러 가지 일을 했다.
그간 잘 썼던 노트북을 어딘가에 숨기거나, 누군가에게 짧은 편지를 쓰거나. 다만 손이 마음을 따라오지 않아 음성으로 바꾸었다. 그러고 나선 정말 오랜만에 커피도 마시고 부적 삼아 무경의 영양제도 훔쳐 먹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옷을 걸치고 서이주의 서재에서 발견한 물건들로 무장을 마쳤다. 묵은 냄새가 올라와서 살짝 불쾌하기는 했지만 더는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하윤은 신발장 앞에 서서 자신이 빠트린 게 없는지 확인했다. 손가락을 꼽아 보자 뭐 이렇게 꼽히는 게 많은지. 이럴 때는 정말 자신이 다섯쯤 되었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즐겁게 살고 나머지 넷은 자신을 대신해 일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말 편할 텐데.’
하필 지구인으로 태어나서. 하윤은 가볍게 혀를 차며 집 밖으로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 맨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꼭대기 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안에서는 하윤이 나가는 모습이 보였으나 바깥에서는 그를 보지 못했다. 그가 [문]을 열고 옥상으로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숨을 들이켜며 눈을 감았다가 뜨자, 그의 눈이 선명한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일대의 모든 [문]이 보이고 [문]들의 소리가 들렸다. 하윤의 존재에 반응하듯 작게 움직였는데, 그 소리가 워낙 많아 얼핏 파도 소리같이 들렸다.
하윤은 작금의 심정이 쪽지 시험을 앞둔 학생 같다고 생각했다. 공부하지 않은 건 아닌데, 시험을 치지 않는 게 치는 것보다 나았다. 그래서 선생이 쪽지 시험을 보기로 한 것을 잊었길 바랐다.
이번엔 치는 건가? 이번엔 넘어가는 건가? 그래도 이번엔 치겠지. 아니, 그래도 이번에도 넘어갔으면. 그렇게 내내 마음을 졸이다가 차라리 치지 싶어도 시험을 칠 것 같은 기미만 보이면 번번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학생처럼.
‘그래도 안 치는 게 낫지.’
이건 단순한 쪽지 시험이 아닌,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나라가 휘청거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윤은 천천히 숨을 들이켜며 자신의 부모님 댁과 그 너머 부지런히 개발 중인 곳, 그리고 역 근처에 우뚝 서 있는 빌딩을 돌아보았다. 규모가 규모다 보니 건물의 덩치가 컸고 자연스레 시선이 갔다.
최근에 완공되었다던 그 빌딩은 숙박시설과 쇼핑몰, 각종 유흥시설이 유치되어 있었던 데다 지하철이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통행 제한 시간에 걸린 젊은이들이 지하철 내 대피소에서 머무르지 않고 그곳으로 향한다고.
기준이 핫플이라고 외치던 것이 생각난 순간, 굉음과 함께 건물의 옆구리가 터지더니 검은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 전화에 재난 알림이 울렸다.
◇◇◇
하루 전 하윤이 기준에게 전화했을 때, 그는 친구들과 함께 있었다.
“야, 대체 무슨 전화길래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
“우리 형.”
“어떤 형?”
“아니, 있어. 우리 친형.”
“뭐 있냐? 되게 심각해 보이던데.”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이상한 소리 하잖아.”
“뭔데?”
“오늘부터 한 이 주간 집 밖에 나가지 말래. 다른 거 다 팽개치고 그냥 집에 있으라는데 말이 되냐. 아이씨, 어처구니가 없어서.”
기준의 친구 현기는 뒤늦게 기준의 친형, 하윤의 존재를 떠올렸다. 기준은 늘 쌍둥이 여동생만 있는 듯이 굴다가, 아주 가끔 형을 말하곤 했다. 물론 대부분의 좋지 않은 일로 끌려 나왔다.
“그럼 너 내일 동민이 생일 파티에 못 오냐?”
“아, 미쳤냐. 무슨 욕을 들으라고.”
“너희 형이 나오지 말랬다며?”
“아,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지도 그렇게 못 할 거면서.”
“뭐 그렇다고 괜히 그런 말을 하진 않았을 거 아냐? 헛소리긴 한데, 그런 헛소리를 하려면 어디서 뭘 듣거나 꿈을 꾸거나 그랬을 거잖아. 아, 근데 그렇게 생각해도 웃기긴 해.”
“몰라. 그런 소리는 일절 없고 그냥 다짜고짜 하지 말래. 이럴 때만 지가 형이지.”
“그럼 내일 아홉 시에 역 앞에서 보는 거다. 이번엔 진짜 늦지 마라.”
“당연하지.”
기준은 현기와 헤어진 뒤 곧장 집으로 향했다. 마침 부친이 집에 돌아와 있어 하윤에게 들었던 말을 꺼내자 부친도 좋은 반응은 아니었다. 대한민국에서 회사 생활을 하면서 이 주나 이유 없이 쉬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형이 물으면 대충 집이라고 해. 저도 뭐 어디서 주워듣고 불안해서 하는 소리인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 이 주 간은 어디 싸돌아다니지 말고 도서관에서 공부 끝나면 바로 집으로 와.”
기준은 그러겠노라고 대답해 놓고 방으로 들어왔다. 하윤이 했던 말이 조금 찝찝하긴 했지만, 내일 친구들과 놀러 갈 곳이 더 기대되었다. 내내 가고 싶었던 곳이라 더 그랬는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