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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라스트-142화 (142/162)

142화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뎠을 때, 무릎까지 차올랐던 눈이 일순 물이 되어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 하윤 또한 물살에 바닥을 나뒹굴었다. 순식간에 나무들이 깜뿍 잠기어 들판이 바다가 되는가 싶었는데, 이내 눈 깜짝할 사이 물이 사라지고 하윤이 처음 봤던 봄이 되었다.

‘뭐야, 이거.’

또 조금 있자 여름이 되었다가, 눈 한번 찡긋거리자 가을로, 한숨을 내쉬자 다시 겨울로 바뀌었다. 이번 겨울이 지날 무렵에 하윤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순식간에 차오른 물에 하윤의 몸이 다시금 밀려났다. 하윤은 봄을 맞고는 조금 전보다 멀어진 사당을 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인내심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다.

이미 몸도 정신도 고되어 다리를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문득 이대로 다시 문에 닿을 수나 있을까 싶었다. 닿는다고 하더라도 저 문을 열 수 있을까.

하윤은 걸음을 멈춰선 채 몇 번의 계절을 보냈다. 가만히 서 있어도 물 때문에 밀려나 이제는 사당이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몇 번의 계절을 지났는지, 실제 시간이 흘렀다면 도낏자루 썩는 것쯤은 우스운 시간이 흘렀으리라.

‘그건 또 모르지만.’

어쩌면 이대로 밖에 나가면 무경이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 있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괴물이 깨어난 지 오래라 세상이 망했을 수도 있고. 아니, 어쩌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

사당에서 멀어지자 겨울이 지나고 생겨나는 물이 얕아졌다. 딱 겨울에 눈이 내렸던 만큼, 무릎을 살짝 덮을 정도였다. 하윤은 발을 까딱여 보다가, 다시금 사당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시발, 내가 이 정도로 멈출 거면 여기 들어오지도 않았지. 문은 열어 보지도 않아 놓고선 뭘 못 여니 어쩌니.’

하윤이 생각하기에 문지기가 문을 열지 못하고 갇혀 있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꼴이었다.

하윤은 계속해서 걸어 나갔다. 계절이 다 지나기 전에, 밀려나는 동안에도 덜 밀려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러나 이미 지친 육신이라 걸음은 점차 앞으로 기울어져, 나중에는 아예 풀을 쥐어뜯으며 기었다. 가까스로 사당의 디딤돌 앞에 닿고, 또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문에 손을 댔으나 이번에는 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차가운 눈꽃송이가 바람결에 흩날려 하윤의 뺨에 떨어졌다. 멈췄다고 생각했던 코피가 얼었다가 녹기를 반복하다 손등 위로 떨어졌다. 동그란 핏자국을 보며 하윤은 긴 한숨을 내 쉬었다. 가까워진 만큼 아주 큰 파도가 그를 덮칠 것이다.

예상했음에도 밀려든 물살에 하윤은 다시 나동그라졌다. 물을 먹은 탓인지 몸이 안 좋은 탓인지 코도 얼얼하고 귀도 먹먹했다. 속도 조금 타는 것 같았는데 기침을 하자 벌건 핏물을 게워 냈다.

“……하하.”

점점 줄어들고 있는 물 위에 퍼진 핏물을 보며 하윤은 배를 잡고 웃었다. 몸을 가누지 못해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로 크게 몸을 들썩였다.

“너는 내가 얼마나 끈질긴지 모르지.”

하윤은 이 모든 것을 특이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특이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조금 전 게워 낸 것을 보자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환상이다.’

죽을 먹고 왔는데 이렇게 깨끗하게 피만 게워 낼 수 있을 리가 있나. 그러나 환상임을 깨달았음에도 몸을 가누긴 어려웠다. 하윤은 다시 안간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계절은 봄에서 여름으로 지나갔다.

하윤은 자신의 이마를 손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생각을 해라, 김하윤. 등신같이 굴지 말고 생각을 해.’

김하윤 스물일곱 생에 열고자 하여 열지 못한 [문]이 없었다. 태어났을 때는 일대의 [문]이 경배하듯 흔들렸고, 당대 가장 강했던 문지기 서이주는 강한 질투심을 느낄 정도였다. 게다가 이제 이 땅의 문에 관해서는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존재는 바로 김하윤이었다.

그런 자신이 저깟 오래된 문 하나 열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해서야 되겠는가.

‘안 될 일이지. 그건 정말 안 될 일이지.’

하윤은 젖은 몸을 일으켰다. 얼굴을 대충 훔치다가, 손에 묻어 나온 물기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분명 환상이어서 사라졌어야 할 물이 왜 묻어 나오는 걸까. 그럼 왜 땅을 휩쓸었던 물은 사라진 걸까.

‘사라진 물에 관해서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자신을 적신 물에 관해서는 어째 생각이 닿는 구석이 있었다.

“……곡옥을 물로 봉인했다.”

어쩌면 저 물이 생각을 저지하는 것은 아닐까? 자신의 속에도 곡옥이 있을 테니까.

괜한 탓을 하는 것일 수도 있었으나, 일단 탓을 해 보기로 했다. 왜냐하면 본래 하윤은 먼 거리를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문지기이기 때문이지.’

하윤은 이제는 너무 멀어진 사당을 노려보았다. 그를 저지하듯 거센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고작 그것으론 하윤을 막을 순 없었다. 하윤의 눈동자가 환한 금빛으로 물든 순간, 다시금 나무 조각 부딪히는 소리가 우르륵 쏟아지기 시작했다.

공간이 일그러지고 접히다가 하윤의 뜻을 따라 꿰뚫렸다. 그사이 여름과 가을, 그리고 겨울이 지나 다시금 물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윤을 휩쓸지 못했다. 하윤이 만든 문에 가로막혀 좌우로 갈라졌다.

사당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수위가 그리 깊지 않아야 함에도 이번엔 꽤 많은 물이 밀려들었다. 하윤은 자신에게 닿지 못한 채 갈라지는 물줄기를 보다가 문을 열었다. 가볍게 숨을 뱉어 낸 다음 문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가까운 거리였기에 문을 통하자 사당까지 단 한 걸음에 지나지 않았다.

쿵-!

하윤은 있는 힘껏 문을 두드렸다. 문고리 하나, 손잡이 하나 없는 민자 문은 본래 열리는 문이 아니라는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윤은 손으로 문을 세게 두들기다가, 아예 몸으로 들이박았다.

“열……리라고!”

비명과 악다구니를 쓰며 재차 몸으로 들이박았다. 그러자 내내 꿈쩍 않던 문에 작은 틈이 벌어졌다. 하윤은 조금 전보다 훨씬 뒤로 가서 세차게 달려와 문에 부딪혔다. 여태까지완 사뭇 다른 소리와 함께 주먹 하나 들어갈 틈이 벌어졌다.

틈을 더욱 벌리려 문 안으로 손을 넣었을 때, 안에서 들리던 나무패 부딪히는 소리가 멎었다. 그러고는 사당의 양 문 중 왼쪽 문이 활짝 열렸다.

사당 안은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상당히 좁았는데, 사방이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바로 아래까지 지붕이 달린 지방틀로 그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장에는 알아보기 힘든 목판이 비스듬히 걸려 네 면을 채우고 있었고, 목판이 겹치지 않은 공간 아래에는 하윤이 들어갈 만한 커다란 달항아리가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자 물이 그득 차 달 같은 노란 불빛이 어른거렸는데, 물은 항아리의 목까지 채워졌다가 반쯤 줄어들었다가, 다시 채워지기를 반복했다.

“어?”

물이 줄어드는 때에 맞춰 문밖을 바라보자 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내내 하윤을 밀어냈던 물의 정체를 알았다.

‘그렇다면 혹시 이 안에?’

하윤은 손전등을 꺼내 달항아리 안을 비췄으나 바라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물이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밤바다같이 검어서 속이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내 키 정도일 뿐인데 왜 이렇게 깊어 보이는지.’

물이 가장 줄어드는 시점을 봐도 그랬다. 하윤은 안을 보는 것을 잠시 단념하고 주변을 살폈다.

‘열린 지방틀과 열리지 않은 지방틀. 이 두 개도 차이가 있는 걸까?’

열린 지방틀 속 지방을 들여다보았다. 당연하게도 한자로 쓰여 있어 읽을 수가 없었다. 지방하나도 못 읽으니 천장의 목판은 어림도 없었다.

‘휴대 전화 갖고 올걸. 요새는 찍기만 해도 해석이 된다고 그랬는데.’

다음을 기약해야 할까? 하윤은 아쉬운 마음에 가까이 있던 목판을 살짝 건드렸다. 순간 왼쪽 손목이 저릿하더니 금색 고리 하나가 공중으로 튀어나왔다. 고리는 회전하며 점차 크기를 늘렸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사당의 둘레만큼 커졌다.

“이건.”

고리는 하윤의 말에 아래위로 요동치다가, 목판 앞에서 어떤 글씨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나의 선으로 만드는 글씨라 읽기 조금 어려웠으나 한자같이 읽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정확성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하윤은 어차피 한자는 읽지 못했기에 고리가 만들어 낸 글씨의 내용을 목판의 내용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요사스러운 힘으로 세상을 어지럽힌 자들을 소탕하고 그들이 가졌던 힘을 이곳에 봉인하였다.

그러나 본래 그 힘을 가졌던 이들이 요사스럽고 대단했던 것은 아니고, 이들이 지닌 신비한 힘을 악용하는 자들의 악의가 대단하였을 뿐이다.

이들은 남들은 다니지 못하는 하늘의 길과 땅의 길을 지나다녔는데 이는 몸에 신비한 열쇠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자들도 있고 괴이하게 여긴 자들도 있어 이들은 항시 숨어 살았다. 어느 날 악의가 하늘에 다다른 악인이 하나 있어 이들의 소문을 듣고 이용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었는데, 악인의 악의가 불러들인 요사로 이들의 열쇠를 한데 묶는 재주를 깨우치고 말았다.

악인이 이들의 재주를 얻자 세상의 금은보화와 권세가 쉬이 손에 들어옴으로 보다 많은 열쇠를 얻고자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 이들을 찾아서 배를 갈랐다.

나는 숨어 살아 변변한 이름 하나 없는 필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원수의 손에 내 친지와 친구들이 산 채로 배가 갈리는 것을 보고 복수를 결심하였다. 그러나 타고난 능력이 일천하여 마땅히 복수할 방법이 없었는데 어느 날 하늘이 날 기구하게 여겼는지 내게 친지들과 친구의 힘을 모아 주었다.

하여 악인이 빼앗은 열쇠를 되찾아 뉘보다 많은 열쇠를 가진 몸이 되었은즉,

내 친구들의 힘이 그저 내가 취하기 전에

내 감정이 무고한 이들의 눈물이 되기 전에

내가 또 다른 혼란이 되기 전에

이곳에서 속죄하며 모든 것을 그치고자 한다.]

[그 과정에 있어 내 우수와 좌수를 나눌 터인데, 이는 내 친구들의 힘이 내 안에서 하나로 뭉쳐 너무 커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리석어 잘못을 반복하므로 성찰이 필요한 것인데, 세상에 황금이란 것이 있어 이 일이 요원한즉.

하여 힘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이곳에 다른 하나는 세상에 흘려보낼 것인데, 이 힘이 세상에 혼란을 주기도 하나 또 세상에 필요한 힘이기 때문이다.

악인이 흘러간 힘을 취하더라도 반절이고, 의인이 세상을 구하고자 이 힘을 필요로 하여도 반절이면 족할 것이니.]

[그러니 훗날 혼란한 세상을 위해 이곳에 닿을 문지기에게 고할 것은 이러한 사정이 있었으니 불요한 장치가 많다 나를 탓하지 말길 바라오.

또한 내가 삶을 먼저 살아 본 선배로서 말하건대, 복수를 위해 이곳에 닿은 문지기여, 이러한 사정이 있었으니 부디 단념하고 돌아가기를. 이미 당신의 힘은 복수 하나만을 좇기엔 족하기에.]

[감히 청컨대 지기여, 혹 이미 여럿의 힘을 홀로 갖게 되거든 가여운 것을 가엾이 여기시오. 당신은 삶을 사는 동안이나 스스로든 타의로든 삶을 저버린 뒤에도 가여워지기 어려운 존재이나, 당신이 어여뻐하는 자들은 가여워질 수 있기 때문이오. 하나 당신이 생전에 가여운 자를 가여워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가여운 자를 그 누구도 가여워하지 않을 것이기에. 하여 거듭 말하건대 가여운 것들을 가엾이 여기시오.

나는 생전 가여운 것을 가엾다 여기지 못하고 그저 내 일신의 가여움만을 좇았으므로 이러한 끝을 맺어야 였으나 지기여, 부디 성찰하여 내 길을 따르지 않길 바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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