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원 라스트-118화 (118/162)

118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때 백화점에 들러 이르게 나온 계절 과일 몇 가지를 샀다. 햇과일이라 알도 작고 맛도 덜 들었을 테지만 그래도 집에 있을 김하윤에게 먹이고 싶었다. 병원이랑 집에만 있어서 계절이 바뀐 줄도 모르지 않느냐고 슬쩍 붙일 말을 차 안에서 읊조리기까지 했다.

이틀 넘게 온종일 초능력을 써서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알엔 바늘이 돋친 것 같았다. 잠시 신호 때문에 멈추면 고개가 저절로 흔들거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다 괜찮았다. 집에 가는 중이었으니까.

익숙한 건물이 보이고 이제 집에 가까워지자 힘을 짜내 긴 실을 만들었다. 교통 체증에 묶인 자신 대신 집에 먼저 보내 놓고는 하윤이 집에 있는지 확인했다. 집에 있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핸들을 쥔 무경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과일이 입에 맞아야 할 텐데.’

생각과 동시에 물속에서 쥔 모래같이, 더는 참지 못하고 틔워 올린 숨같이 ‘기억’이 떠올랐다. 김하윤은 과일에 관해 딱히 취향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잘 깎아서 입 앞에 대령하기만 하면 뭐든 곧잘 먹었다. 그래서 키위나 파인애플 등 많이 먹으면 혀가 아린 과일들은 적당히 골라서 줬었다.

‘그래, 그랬었다.’

무경은 과일을 크게 베어 물어 볼이 불룩해진 하윤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하.” 하고 짧게 웃었다. 웃음이 튀어나온 줄도 모르고 감흥 없는 척하다가, 핸들에 몸을 기댔다. 피곤한 중에 능력을 썼더니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무경은 여러 번 눈을 감았다가 떴다. 혹여 길 한가운데서 잠들까 봐 무서웠다.

‘집에 가자.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돼.’

힘주어 눈을 뜨고 신호가 바뀌길 기다렸다. 내내 기어가듯 움직이던 차들이 이제야 슬슬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아파트 단지에 도착해 주차하고 집에 올라갈 땐 엘리베이터조차 기다리지 못했다. 계단을 뛰어 올라가서 문을 열려는 순간, 방심한 탓에 또다시 ‘기억’이 떠올랐다.

“…….”

다만 이건 무경이 원래부터 기억하고 있던 일이었다. 오래전에 김하윤이 자신에게 고백했던 날이었다. 선잠을 자던 중에 그 말을 듣고 자신은 김하윤을 집 밖으로 끌어냈다.

‘중간에 김하윤의 개 같은 반지를 뺏어서 베란다 창문으로 던졌었는데.’

김하윤은 반지를 따라 뛰어내리려고 했었다. 그때 자기 가슴이 얼마나 철렁였는지 김하윤은 모를 것이다. 그길로 싫다는 김하윤을 집 밖으로 끌어냈었으니까. 사실 그땐 잠깐 밖에 있게 하다가 사과를 받고 다시 집으로 들일 생각이었다. 신발도 신기지 않고 쫓아냈으니까.

그런데 김하윤은 그 발로 반지를 찾으러 나갔다. 그러곤 기어코 반지를 찾아왔다. 꽁꽁 얼어서 새빨개진 손과 발로 사과하라는 자신의 윽박에 소리 없이 울었다. 턱 밑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지 못했다면 우는지 몰랐을 정도로.

그리고는 자신이 바랐던 ‘사과’를 했다.

이제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을 정리하겠노라고.

“어……?”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내가 왜 그랬지?”

이상한 얼빠진 소리나 지껄이다가 뒷걸음질 쳤다. 내장을 몸에서 모두 덜어 낸 것같이 서늘함이 밀려들었다.

‘피곤한 탓이야.’

염동력을 너무 많이 사용한 탓에 정신적인 피로가 더는 견디지 못할 만큼 쌓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해가 갔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 찰나의 순간의 공백에 ‘기억’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때 왜 그랬냐면, 김하윤은 ‘친구’여야 했으니까.

무경은 고개를 도리 저었다. 자신이 본래 생각했던 이유와 달랐다. 그는 하윤이 미웠다. 하지만 김하윤이 자신의 곁을 떠나는 건 싫었다. 곁에서 오랫동안 괴로워하길 바랐다. 계속해서 자기 잘못을 상기하라고, 그리하여 자신의 미움을 받으라고.

두 가지 생각이 섞이자 머리가 몹시 아팠다. 머리뼈가 깨어질 것 같다가도 송곳으로 뇌를 쑤시는 것 같았다. 무경은 다급히 하윤을 찾았다. 거실에도 자신이 만들어 놓고 간 방에도 없었다. 순간 당황해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휘청거리며 벽에 겨우 기대서 몸을 가눴다.

그러다가 자신이 하윤의 발목에 실처럼 힘을 감아 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좁아졌던 시야가 트이고 하윤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윤은 욕조에 누워서 눈을 감고 있었다.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자다가 놀란 탓인지 하윤은 힘을 주지 못했다. 세우고 있던 무릎이 완전히 접히며 하윤의 상체가 욕조 속으로 빠졌다. 다급히 건져 내자 하윤이 고개를 돌린 채 기침을 했다.

“대체 무슨 짓이야! 죽으려고 환장했어?!”

“켁, 컥……!”

바락 소리 지른 것이 무색할 정도로 무경은 하윤을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수건으로 몸을 감싸고 발끝과 손끝을 확인하듯 쥐었다. 내내 찬물 속에 있었던 것처럼 손발이 찼다. 자꾸만 문 앞에서 쪼그려 앉아 있던 김하윤이 떠올랐다.

‘그때 김하윤이 아니야, 지금은 그 김하윤이 아니야.’

숨을 정리한 하윤은 놀랄 일이 아니라고 무경을 달랬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욕조에서 잠이 들었다가 놀라서 몸에 힘을 잘못 준 것이라고 변명했다. 머리로는 하윤의 말을 이해했으나 놀란 가슴이 좀처럼 진정되질 않았다.

무경은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윤은 그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몸은 좀 어때? 병원에서는 뭐래? 혹시 다른 곳에 갔었어?”

“…….”

“정신 침식이 있는 것 같다고 나갔었잖아.”

“멀쩡히 걸어 다니고 있잖아.”

“그래도.”

“왜, 내가 다른 놈한테 잡아먹히기라도 했으면 해서?”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나는 그냥 걱정돼서 그랬지.”

“걱정?”

“그래.”

“왜?”

“…….”

“왜 걱정하는데? 네가 왜?”

하윤은 입을 다물었다. 불쾌한 듯 눈썹을 찡그리다가 이내 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사과를 바란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경은 조금 멍한 눈으로 하윤을 응시했다. 자신도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말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는 김하윤이, 김하윤의 걱정이…….’

가증스러워야 했다. 그래야 하는데 이전같이 미움이 일지 않았다.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기껏 진정했던 가슴이 다시금 세차게 뛰었다. 그사이 하윤은 소파 가장자리에 앉았다. 달리 갈 곳이 없는 것처럼 망설이다가 아예 소파에서 일어나 소파 옆에 주저앉았다.

“왜 거기 앉아.”

“어?”

“왜 거기 앉냐고.”

“일어……, 날까?”

“소파에 앉으려면 앉지 왜 그러고 있냐고. 그렇다고 억지로 앉아 있을 필요 없어.”

“그럼 나 집에 갈까?”

“뭐?”

“내가 있는 게 거슬리면 그냥 우리 집에 갈게.”

무경은 눈을 깜빡였다. 네 집은 여기 아니냐는 말이 목에 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당연한 듯이 내뱉으려 한 것이다. 정신 침식은 끝난 게 아니었다. 아직도 진행 중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이렇게 이상할 리 없었다.

“무경아, 나. 그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박건영 씨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맞는 것 같아. 아무래도 그……. 음. 그게 맞는 것 같아.”

무경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윤이 하는 말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자신이 분명 그렇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했었는데 왜 그러겠단 말인가.

“김하윤.”

“이렇게 있어 봤자 네 심기만 거슬리잖아. 박건영 씨 제안을 받아들이면 내가 그쪽 담당으로 바뀐다면서. 그러면 그냥 우리 집에서 살면 된대. 그게 오히려 그쪽을 덜 번거롭게 하는 거라고 하더라고. 그럼 이제 지금처럼 네가 신경 쓸 일도 없을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걸 왜 받아들인다고 해? 그걸 왜!”

무경은 하윤을 향해 성큼 다가갔다. 어깨를 붙잡으려 손을 뻗는 순간 하윤이 몸을 웅크리며 머리를 감쌌다. 분명 동작을 멈췄음에도 비슷하게 이어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반항하기 어렵게 바닥으로 넘어트리고 발목을 잡아채서 끌고 갔던 일.

“……왜 그랬냐고. 대체 왜.”

무경은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떠오른 기억이 빨리 흩어지길 바랐다. 누가 자기 목을 조르는 것처럼 목이 갑갑했다. 넥타이도 매지 않은 옷깃을 손으로 훑으며 거칠어진 숨을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게 너나 나나 좀 편할 것 같아서.”

“…….”

“나 사실 이제 여기 많이 불편해. 그러니까 나 가게 해 주라. 응?”

무경은 대답하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 있을 수 없는 일인지는 몰라도 절대로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왜 불편해? 마음 정리하기로 했잖아. 아니, 이미 한 거 아니었어? 나는 그렇게 알고 있는데.”

무경은 하윤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하윤은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렸다. 웃음을 가장했으나 진짜 웃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무미건조한 눈이었으니까.

“하기야 했지. 나는 그래서 그래.”

“…….”

“했으니까 나가서 살지. 계속 이렇게 빈대 붙어서 살 순 없잖아. 나도 염치가 있지. 안 그래? 그리고 그렇게 살아 보니까 옛날에 내가 얼마나 못나게 굴었는지 알겠더라. 그래서 불편해진 거야. 여기에 비하면 진짜 방 한 칸보다 작은데, 이젠 거기가 내 집이야. 세상에서 최고 편한 내 집.”

“…….”

“그러니까 이만 갈게. 오늘 있던 것도 마지막 인사나 하자 싶어서 있었던 거였어. 그런 것 치고는 너무 편하게 씻고 있었나 싶긴 하지만. 칠 년을 빈대 붙은 성질이 어디 안 갔다고 생각해 주라.”

“……정리를 다 했다고?”

하윤은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무경은 다행이라고 기어들어 가듯이 대답하고는 하윤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반지도 없고 손톱도 짤막하게 잘랐다.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아니, 마음에 들지 않다 못해 속을 뒤집어 놓고 있었다.

‘아, 도저히 안 되겠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무경은 집을 박차고 나왔다. 정신없이 계단을 내려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타 문을 잠그고 차를 움직였다. 그러나 멀리 가지 못했다. 눈앞이 너무 흐렸다. 훔칠 새도 없이 아래로 떨어지는데도 도무지 맑아지지 않았다.

무경은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자신은 슬프지 않았다. 그렇다고 괴롭지도 않았다. 김하윤이 제게 품은 역겨운 감정이 드디어, 비로소 그친 날이다. 기뻐야 했다. 그게 아니면 차라리 아무렇지 않았어야 했다.

‘그래, 이게 뭐라고.’

세상이 무너져 디딜 것 하나 없이 끝없는 구덩이로 떨어지는 것 같은지. 해일 같은 설움이 자신을 덮치는지. 무경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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