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서이주의 방. 정확히는 그녀의 서재라고 하는 게 맞았다.
안은 이전에 봤던 것과 변함이 없었다. 이제는 구형이 되어 버린 컴퓨터와 책과 파일이 잔뜩 꽂힌 책장, 그리고 타임캡슐에서 발견했던 서두를 적은 사진과 같은 것이 찍혀 있지만 크기만 다른 사진의 액자. 비상시를 대비한 탈출 용품과 무기들과 익숙한 냄새까지.
심지어 발끝으로 바닥을 비비고 두들겨 보자 다른 소리가 나는 부위가 있는 것까지 똑같았다.
일단 이곳이 정확히 어디인지가 궁금했다. 아직 흔적을 발견하진 못했으나 행여 다른 사람이 점유한 곳이면 곤란하지 않은가. 하윤은 우선 환풍 시설을 확인했다. 이전에 안을 잠깐 보고 간 게 전부라 미처 몰랐으나 공기가 썩 좋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그리운 냄새가 나는 것일지도?’
살림에 썩 능숙하지 않던 서이주를 떠올린 하윤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환풍기가 있기는 한데, 매우 작기도 하고 작동 중인 것도 아니야. 하지만 작동 중이 아니라기엔 쌓인 먼지가 적은데. 느낌은 지하 같은데, 혹시 폐쇄된 곳인가?’
하윤은 자신이 자리한 곳에서 일정 높이마다 문을 열었다. 십 미터 정도는 콘크리트만 보이더니 더 높이 올라가려 하자 문을 여는 것이 어려웠다. 정확히는 통로 한가운데를 [문]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열려면 못 열 것 같지 않은데.’
[문]을 다 부실 작정으로 뚫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아니면 예전에 [문]의 위치를 옮겼던 것처럼 옮기면 될 것 같기도 했다. 다만 시간이 좀 들 뿐. 그러나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김희원이 갇혀 있던 시설이랑 똑같은데.’
이러한 공간이 어디에 있었던가. 김희원이 갇혀 있던 시설이었다.
“……텔레포터들이 힘을 못 쓰는 곳.”
한때는 자신을 가두기 위해서 만든 게 아닐까 생각도 했었다. 텔레포터들이 힘을 못 써야 할 곳을 만드는 이유는 텔레포터를 가두기 위해서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들이 제어코자 했을 인물은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하겠지만. 유언장을 생각한다면 이곳은…….’
자신을 안전하게 숨기기 위한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윤은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지하라 그런지 숨쉬기가 점차 불편해졌다. 혹시 모를 상황이라 환풍기를 틀 수도 없었다.
‘그 말인즉 여기선 컴퓨터를 열어 볼 수 없겠군.’
가장 먼저 컴퓨터를 자취방으로 옮겼다. 당장 USB를 확인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윤은 자취방 바닥에 그득한 흙과 핏자국을 모른 척한 채 컴퓨터를 켰다. 생전 서이주가 자주 사용하던 패스워드를 입력하자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었다.
‘좀 어려운 거로 해 두시지.’
자신의 손에 들어와서 망정이지.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갔다면 얼마나 쉽게 자료를 긁어 갔을까. 어쩌면 이미 긁혔을지도 몰랐다. 하윤은 굳은 얼굴로 컴퓨터를 뒤졌다.
어렵사리 숨겨 놓은 컴퓨터치고 그리 많은 자료가 있는 건 아니었다. 구형 컴퓨터이니만큼 하드웨어 용량이 적은 것도 한몫했다. 가장 많은 용량을 차지하고 있던 것은 사진첩이었는데, 특이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풍경 사진이라는 것이었다.
위치를 알기 어렵게 물살만 찍은 것도 있고 풀숲과 하늘을, 멀리 보이는 섬을 찍은 것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연도별로, 또 그 안에서 지역별로, 그 안에서 또 가나다순으로 나누어 두었다. 하지만 사진의 퀄리티와는 별개로 그냥 찍은 사진이 아니었다. 파일명 때문이었다.
하윤이 익숙하게 아는 문의 좌표를 쓰는 방식으로 파일명이 입력되어 있었다.
‘연도별로 나눈 걸 보면 문의 현황을 알 수 있는 거겠지.’
문지기들이 드나들 수 있는 장소인지, 들어갈 수 없는 곳인지 말이다.
‘다른 기준이 있는 것도 같은데 직접 가 보지 않고서는 모르겠네.’
사진에는 [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진 속 장소에서 [문]이 어떠한 형태로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하윤은 서두가 적힌 사진을 꺼내 들었다.
‘이건 어디에 있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서이주의 서재로 돌아갔다. 벽에 걸린 액자를 떼어 내 곳곳을 살피자 하윤이 찾는 흔적 비스무레한 것이 보였다.
일부러 그랬는지 좌표는 온전하지 않았다. 역시나 직접 가 보라는 뜻이다.
‘제가 그렇게 문제만 내지 말라고 했잖아요.’
하지만 답을 들을 수 없는 투정이었다. 하윤은 액자에 남은 좌표를 확인 후 책장을 살폈다. 이왕 들어온 김에 더 갖고 갈 것을 추리기 위해서였다.
하윤은 책장에 꽂힌 소설책을 대신 두꺼운 파일첩을 먼저 챙겼다. 다만 이 파일들은 집에 두기 불안해서 자신의 공간 속에 쌓아 두었다.
‘컴퓨터도 대강 확인한 뒤에 그곳에 두자.’
USB는 노트북을 충전해 공간으로 들어간 뒤 열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윤은 자신의 공간에서 서이주의 편지 뒷면, 업무 지시서에 나온 자료 목록과 가져온 목록들을 대조했다. 내용의 일치 여부는 알 수 없었으나 파일에 쓰인 제목으로 대강 유추했을 때, 업무 지시서에 있던 목록은 전부 갖춰져 있는 것 같았다.
‘분명 다른 곳으로 이관하겠다고 했는데.’
“음?”
책장 벽에 붙어 있던 푸른색 표지의 길 등록명부의 작업 대장을 발견했다. 해당 연도는 당연하게도 [그날]이 있던 해였고, 마지막으로 쓰인 날은 [그날]이 있기 이 주 전쯤 되던 시점이었다. 하윤은 확인자 명도 작성 날짜도 없는 업무 지시서를 들여다보았다.
‘선생님이 문태강에게 다녀오신 때쯤일까?’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즈음인 것은 분명했다.
‘확실히 그때쯤에 경각심을 느끼신 건 분명해.’
재차 작업 대장을 넘기자 종잇조각이 떨어졌다. 구멍이 뚫려 있는 모양으로 봐서 작업 대장의 윗면으로 보였다.
‘뜯었다?’
감추기 위해서 서이주가 뜯었을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가져간 흔적일까? 둘 다 아니라 단순히 실수해서 뜯어낸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았다. 이를 증명할 증거도 증인도 없기 때문이었다.
하윤은 짐을 마저 옮긴 뒤 컴퓨터를 마저 확인했다. 이면지로 썼던 업무 지시서의 파일을 찾아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다른 자료의 목록을 찾았다. 다만 이면지의 내용과 세 가지 정도가 달랐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서두의 인사말이었다.
공문에 의례 보이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는 말 대신 자료의 소실 위험을 문제로 이곳에 별도로 저장해 놓는다는 말이 있었다.
또 한국과 주기적으로 겹치는 [문]들에 관한 고서 해석본이 있었다. 이 문들은 긴다리불가사리들이 나오던 [문]과 비슷한 것으로 미궁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굉장히 오래전부터 이러한 [문]들에 관한 책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하윤이 가진 목록에는 1997년에서 1999년까지의 길등록명부 (3)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세 번째로는 기타 자료로 분류된 많은 목록 중 [별신굿]에 관한 항목이었다. 기타에는 워낙 많은 자료가 들어가 있어 글자 크기 자체가 작았는데, 그것을 찾아낸 것은 하윤이 가진 목록에는 [별신굿]이라고 적힌 것이 컴퓨터에는 [붉은 눈의 미륵 전설]이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붉은 눈.”
하윤은 글을 읽음과 동시에 김옥림을 떠올렸다. 그녀가 만든 공간에서 봤던 석불의 존재와 재앙을 이야기하며 눈코입에서 붉은 피를 쏟아 내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기 때문이었다.
“…….”
잠시 망설이던 하윤은 공간 안으로 들어가 파일첩 더미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신이 갖고 온 파일 중에선 찾을 수 없었다. 다시 서이주의 서재로 돌아가 아직 책장에 꽂힌 책을 확인하던 중, 하윤은 동화책 한 권을 찾아냈다.
아주 오래된 책인지 책등 위아래에 테이프가 붙여져 있었는데, 그조차 오래 묵어 테이프가 노랗게 변하다 못해 버석거렸다.
동화의 내용은 이와 같았다. 이 동네 산 깊은 곳에는 돌부처가 있었는데, 불심이 깊은 한 노인만이 이를 가꾸고 제를 올렸다. 어느 날 승려 하나가 노인을 찾아가 노인의 덕을 칭찬하며 돌부처가 피눈물을 흘리는 날 재앙이 닥칠 것이니 마을을 떠나 도망치라는 말을 한다.
노인은 이를 잊지 않으려 매일같이 승려가 알려 준 말을 외고 다녔는데, 이를 이상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연유를 묻는다. 노인에게서 연유를 들은 마을 사람들은 노인을 골려 주고자 노인이 돌부처를 찾아가 돌부처의 눈에 붉은 칠을 한다.
여느 때와 같이 돌부처를 찾아갔던 노인은 눈이 붉게 변한 돌부처를 보고 깜짝 놀라 산에서 내려오게 된다. 노인의 반응을 지켜보려 숨어 있던 마을 사람들은 노인이 혼비백산하자 마음이 좋지 않다고 수군거린다. 이때 이들을 발견한 노인은 마을 사람들에게 도망치라고 알리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저 자신들이 장난을 친 것일 뿐이라고 도리어 노인을 설득하려 한다.
노인은 이들을 뿌리치고 마을을 벗어나고, 마을 사람들은 생업으로 돌아갔다. 바느질하던 사람은 집으로, 밭일해야 하는 사람은 밭에, 나물을 캐던 사람은 들판으로. 모두가 다시 평안하던 때로 돌아간 순간, 천둥소리와 함께 마을이 땅 깊은 곳으로 꺼져 버려 호수가 되고 만다.
한순간에 마을이 꺼지자 이를 해괴하게 여긴 임금이 신하를 보내 조사하게 되는데, 신하는 살아남은 노인에게서 전해진 이야기를 임금에게 전해 올린다.
보통 돌부처가 아님을 짐작한 임금은 신하에게 돌부처를 가져올 것을 명하지만 마을이 꺼지던 때에 함께 땅 밑으로 꺼진 돌부처를 찾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신하는 가까스로 돌부처를 찾았으나 꺼내 오지 못했고 임금은 명망 높은 대사에게 이를 상담한다.
대사는 돌부처를 사사로이 데려와서는 안 된다고, 그랬다간 오히려 큰일을 당할 것이라고 하며 돌부처가 있는 곳에 절을 지어야 한다고 했다. 임금은 대사에게 감사하며 큰 재물을 시주하여 절을 짓게 하는데, 대사는 마을에서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뭇사람들이 다가가기 어렵게 절을 지었다.
불심 깊은 제자로 하여 이 절을 돌보게 하였는데 나라에 큰일이 닥치려 하면 돌부처의 눈이 붉어지고 피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로써 위기를 잘 피해 가며 나라를 오래오래 평화롭게 잘 다스렸다고 한다.
‘원래 있는 동환데 끝부분이 달라. 내 기억상으론 땅이 꺼지고 호수가 되는 것까지만 있었던 것 같은데.’
본래 이렇게 긴 이야기였던가? 하윤의 기억에는 이 이야기가 있던 동화책엔 몇 개의 동화가 더 실려 있었다. 길지 않은 이야기라는 뜻이다.
“재앙이 닥치면 피눈물을 흘리는 돌부처.”
재앙. 하윤은 나직이 중얼거리다가 조금 전에 제쳐 두었던 고서 해석본을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