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그 말을 되뇌는 순간, 하윤의 머릿속은 빠르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아직 환하던 낮에 서이주가 돌아온 날이 있었다. 담배를 피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담배 연기로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어쩌면 담배가 아니라 기억이 흐려 놓은 것일지도 몰랐지만.
‘그래, 그때.’
그때 서이주는 무경의 암시가 깨졌는지 물으며 하윤을 골렸다. 하윤의 비명에 무경이 욕실을 뛰쳐나오자 서이주는 하윤에게 [문]을 열게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문태강과 서이주, 정기오가 문에 관한 연구를 했다고 말했다.
당시 그들은 모종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그녀가 아는 문지기들은 사라지거나 살해당했다. 정기오는 이미 죽어 곡옥을 채취당했고, 문태강은 납치되었다가 탈출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인간다운 죽음을 위하여.
“…….”
서이주는 다음은 자신의 차례가 될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러고는 문지기의 몸에서 나오는 곡옥, 열쇠라고도 불리는 것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이따금 어디서 들었던가 싶던 것이 이제야 기억이 났다.
동시에 하윤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문득 타임캡슐에서 서이주의 봉투를 뜯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그 안에는 열쇠와 쪽지, 그리고 이번에 발견한 것과 똑같은 목함이 있었다.
[나머지는 안에]
‘그래. 그때 선생님은 문태강의 사리, 아니 곡옥이 든 목함 말고 하나를 더 주셨어.’
또 다른 목함은 공간 안을 한참 헤맨 뒤에야 발견되었다.
목함 속에는 이면지에 쓴 편지 한 통과 검은색 USB가 두 개 들어 있었다. USB는 같은 종류로 표면에 미궁 관측연구소의 스티커가 붙어 있었고, 둘 다 오래 사용했는지 사용감이 느껴졌다. 같은 사람의 것은 아닌지 각기 하단과 중단에 다른 표시가 있었다.
하나는 영어로 머리글자가 적혀 있었고 다른 하나는 한자가 적혀 있었다. 대충 봐도 문태상과 정기오의 것으로 보였다. 하윤은 당장에 열어 볼 수 없는 USB는 두고, 편지를 먼저 집어 들었다.
‘이면지.’
하윤은 편지를 읽기 전 이면지의 내용을 확인했다. 업무 지시서의 일부였는데 수기로 수정 사항을 표시해 놓았다.
‘업무 지시서.’
업무 지시서 내에는 기관 축소에 따른 자료의 이동 현황과 권한, 그리고 장소의 정보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 장소의 적합 여부에 관한 서이주의 메모와 낙서가 쓰여 있었다. 완성 단계는 아니었는지 담당 확인란에는 어떤 이름도 쓰여 있지 않았다.
언젠가 본 기억이 있었다. 하윤은 곰곰이 기억을 더듬다가 [그날] 이후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그를 찾아온 정부 요원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하윤의 부모님의 원활한 협조를 위해 정부 소속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갖고 왔었다.
하윤이 봤던 업무 지시서는 그 서류 중 하나였다.
‘연관이 있는 걸까?’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있는 게 지극히 적었다. 하윤은 한숨과 함께 이면지를 뒤집어 편지를 확인했다.
[하윤에게. 우선 이 편지가 두서없이 적힌 것을 이해해라. 사실 네가 이해를 안 하면 어떻겠니. 그냥 제자인 네가 이해해라. 네가 이 편지를 안 봤다면 내가 좀 오래 살아 편지를 고쳤다는 것이겠고 그게 아니라면 고칠 새도 없이 죽었다는 뜻이겠지.
하윤아, 나는 네가 이 편지를 최대한 늦게 떠올리길 바란다. 스스로 떠올렸다면 별수 없겠지만, 남에게 건네받은 질문으로 떠올렸다면, 그 시기가 부디 가장 늦고 늦은 시기이길 바란다.
나는 네가 젊은 혈기에 공연히 복수를 꿈꾸지 않길 바란다. 또 주변의 기대에 휩쓸려 의무적으로 복수할 생각 말아라. 복수가 쓸데없기 때문은 아니다. 다만 네가 젊음을 허비하지 않기를 바라.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서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훈수나 나불거리는 새끼들의 말만큼 쓸모없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 새끼들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는 네가 오래 살아남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설이 맞는다면 그것 하나만으로 그들의 모든 것을 무너트릴 수 있다.
하윤아,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다. 그러니 부디 살아남아라. 그리고 부디 행복하거라. 누군가 우리의 죽음을 운운하거나 혹여 다양한 방식으로 너를 비난하고 비겁하다고 조롱하더라도 결코 귀 기울이지 마라. 네가 살아남는 것이 최대의 이익이고 최대의 복수이며 가장 힘든 일이니까.
마지막으로 예전에 말했던 우리의 연구를 네가 맡아 주길 바라.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여 정말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연구가 힘들다면 너도 제자를 들여서 제자에게 시키도록 해라. 우리는 우리의 기록이 후대로 이어지기만 하면 된단다.
내 사랑하는 제자 하윤아, 부디 오래 슬퍼하지 마라. 우리가 행복했던 추억만 오래 기억하길 바라.
남겨질 내 두 아이를 걱정하며 서이주가.]
하윤은 편지를 다 읽어 내린 뒤에 미간을 문질렀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려서일까, 아니면 편지의 내용 때문일까. 머리가 얼얼했다.
‘그러니까 김옥림이 사건의 실마리인 양 준 메모가 목함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였고, 그 안에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숨을 골랐다. 지금 자신이 이해한 것이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김옥림은 하윤에게 가엾은 것들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했고 서이주는 이를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무시하라고 했다.
‘살아남으라고.’
하윤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복수를 꿈꾸지도 않았고 살려고도 하지 않았다. 편지를 읽는 순간 그 어떤 비난이나 조롱을 들은 것보다 수치스러웠다. 자신이 너무나 비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분명 마른 얼굴인데도 괜스레 축축하게 느껴졌다. 하윤은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린 뒤 다시 편지를 응시했다. 한숨을 내쉬고 또 내쉬어도 좀처럼 속이 후련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숨을 내쉴 때마다 가슴이 무거웠다.
별생각 없이 다시 앞장으로 종이를 뒤집었을 때, 하윤은 서이주가 남긴 낙서 중 눈에 익은 것 하나를 짚어 냈다.
“사진.”
하윤은 [문]을 열어 타임캡슐의 사진을 꺼냈다. 사진을 정신없이 뒤지다가, 가장 첫 장에 있었던 서두가 적힌 풍경 사진을 편지 옆에 갖다 댔다.
“…….”
동시에 같은 사진이 어디에 걸려 있었는지 또한 떠올렸다.
‘신발장 안과 연결돼 있던 선생님의 방.’
무경의 집 신발장 안에 있던 [문]을 통하면 예전 집에 있던 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공간이 있었다.
‘거기에 가야 해.’
그 순간 조금 전 껐다고 생각했던 알람이 다시 울렸다. 난데없는 소리에 깜짝 놀란 하윤은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제야 가족들과 저녁을 먹기로 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하윤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 온종일 무엇을 했었느냐는 말에 청소했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가족끼리 집 근처에 있는 고깃집에서 식사했다. 여동생 지하가 이틀 연속 고기를 먹느냐고 불평했으나 정작 가족 중에서 제일 못 먹은 사람은 하윤이었다.
공간 속에 있었던 것들로 머릿속이 가득해 밥이 코에 들어가는지 입에 들어가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어찌어찌 밥 한 공기를 얼추 비워 낸 것을 보면 입에 넣긴 한 모양이었다.
식사한 뒤에는 집 근처 영화관에서 영화를 봤다. SF 액션 영화였는데 소리가 요란했던 것 빼곤 생각나지 않았다. 영화가 끝난 뒤 뒤늦게 팸플릿을 보고 나서야 지구인 한 명과 미지의 외계생명체 다섯이 얽히는 내용인 줄 알았다.
시끌벅적한 고깃집에서부터 영화관까지 소음에 둘러싸여 있었으나 오히려 자신이 현실에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몇 번이고 괜찮은지 어디 아픈 곳은 없느냐는 질문을 받을 정도였다.
“괜찮아요. 그냥 청소를 열심히 해서 피곤했어요.”
“그러면 말을 하지. 집에 가서 쉬게.”
“아니에요. 이제 집에 갈 건데요.”
“…….”
“진짜 이 정도는 괜찮아서 그래요. 오랜만에 가족들이랑 나온 거기도 하고. 네?”
“엄마가 낮에 한 말 기억하지?”
“네.”
“그럼 됐어. 이제 집에 가자. 엄마도 피곤하다. 동생들도 아빠도 다 출근해야 하고.”
“……네.”
하윤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영화관과 쇼핑몰에 아직 모여 있는 사람들을 힐긋거렸다. 기준의 말로는 요샌 큰일 난 적이 없어서 조금 늦게까지도 논다는 모양이었다.
“쇼핑몰 근처에 호텔이 많은 것도 한몫하지. 통행 제한 시간이 되면 외부 출입문은 닫지만, 지하철과 호텔로 연결되는 통로는 막지 않거든. 그래서 시간 애매하면 아예 호텔 방 잡아서 놀 생각으로 저기서 내리는 애들도 많다더라고.”
“너도?”
“에이, 나는 쩐이 없어서 못 하지. 근데 그렇게 안 비싸대. 놀 생각으로 있는 애들은 객실 말고 연회장 출입객으로 들어가기도 한다더라.”
“못생겨서 입밴 당하는 거 아니야?”
“어휴, 지하 너 무슨 말이야. 엄마가 너흴 얼마나 곱게 낳았는데.”
“에이, 엄마. 큰오빠면 몰라도 기준이는 좀. 쟤는 이목구비 주차가 잘못됐어.”
“야, 넌 나랑 몰드가 같다?”
“하, 이란성은 아니거든?”
“아, 머리 따끈해지네. 너도 거울 좀 봐. 카메라 앱으로 찍은 건 네 진짜 얼굴이 아니라고.”
“오렌지 주스처럼 사진에서 2퍼센트라도 내 모습이 담겨 있으면 그게 나지? 앱으로 찍은 게 진짜 나야. 난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넌 보정 앱 안 쓰냐? 네가 찍은 셀카가 더 토 쏠리거든.”
“야. 어디서 오빠한테 토 쏠린다고. 엄마, 지하 말하는 거 좀 보세요.”
“그래, 네 오빠가 어디가 어때서. 엄마 볼 때는 최고로 잘 생겼어.”
“진짜 잘생긴 건 무경이 오빠 같은 사람이고. 쟤는 그냥 넙치야 엄마.”
“엄마가 넙치를 낳았다는 거야? 그럼 엄마도 넙치라는 거니?”
“에이, 그런 게 아니라. 내 말은 작은오빠만 좀 못생겼다는 거지. 나랑 큰오빠는 아니고.”
아무리 훌륭한 공방이라도 실패작이 나올 수밖에 없다. 지하의 변론이 이어지는 동안 부친은 하이고 참!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낯선 평화로움과 조금은 익숙한 조심스러움이 함께했다. 하윤은 부친의 웃음을 따라 웃다가 차창 너머를 응시했다.
재개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난 뒤라서일까. 재개발과 관련된 현수막들이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남들 눈에 보이지 않을 수많은 [문]들이 보였다. 하윤은 익숙하게 [문]들의 움직임을 좇다가 한숨을 삭였다.
아직도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김옥림에게 들었던 말과 서이주가 남겼던 글이, 차 안에서 웃고 떠들던 가족들의 얼굴과 무경의 얼굴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대립했다.
잠을 자기 위해 자리에 누워서도 좀처럼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결국 하윤은 자는 것을 포기한 채 까맣던 밤이 푸르게 풀어지는 것을 뜬눈으로 지켜봤다.
첫차가 움직일 시간이 되었을 때 하윤은 자리를 정리했다.
“어머, 얘. 이렇게 일찍 어디 나가려고?”
“갈 길이 멀어서 지금 나가야 할 것 같아서요.”
하윤의 말에 모친은 묘한 얼굴을 했다. 말을 고르듯 잠시 미간을 긁다가 끙 앓는 소리와 함께 말했다.
“그래도 아침은 먹고 가지. 엄마가 금방 준비해 줄게.”
“아니에요. 괜…….”
하윤은 습관적으로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모친의 눈치를 살폈다.
“…….”
“원래 아침 잘 안 먹어요. 속이 불편해서. 두유나 견과류 조금 먹거든요.”
“그럼 엄마가 선식 타 줄게. 지하가 살 뺀다고 샀는데, 안 먹어서 그대로 둔 거 있거든. 그거라도 먹고 가. 엄마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
“네. 그렇게 할게요.”
왜 지하가 먹지 않았을까, 지하가 아니더라도 기준이 먹을 수도 있었는데 왜 그대로 남아 있었을까. 한 입 먹자마자 답을 알 수 있었다. 맛이 정말 없었다. 풀 비린 맛과 묵은 맛이 같이 나는 게 신기했다.
열심히 먹는 척하다가 모친이 자리를 비웠을 때 싱크대에 부어 버린 뒤 컵을 헹궈 최대한 증거를 없앴다. 안방에 빼꼼 고개를 밀어 넣고 아직 꿈나라에 있는 부친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잠결에 어어, 하고 대답하는 소리를 끝으로 집을 나섰다.
눈 깜짝할 사이에 문과 문을 지나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남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을 곳으로 돌아오자 마음이 놓였다. 잠시 숨을 돌린 뒤, 하윤은 무경의 집 신발장과 이어지는 곳과 이어지는 문을 열었다.
몇 개의 문을 열고 통로의 통로를 건너, 다시금 서이주의 방을 본뜬 그곳에 도착했다. 비겁하게라도 살아남으라던 스승의 유언과 모친의 걱정이 하윤의 발목을 붙잡았으나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대신 죄책감은 남았기 때문에 닿지 않을 심심한 사과를 보냈다.
‘선생님, 죄송하게도 저는 복수를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죽어야겠어요.’
자신이 불길 앞에 놓인 지푸라기처럼 타오를 ‘운명’이라는데 어떻게 피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