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7. 거짓말쟁이의 선물
집으로 돌아온 날 저녁부터 하윤은 호되게 앓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린 데다 피로가 중첩된 탓이리라. 이전처럼 하룻밤 자고 나면 낫겠지 싶어 버텼더니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사흘이 되더니 닷새 동안을 꼬박 골골거렸다.
퇴사 예정일이 다가오는 중이면 좀 한가해도 될 텐데도 오히려 끝까지 단물을 빼 먹으려는 참인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어쩌면 골골거리느라 능률이 처참해 일이 밀려 바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든 퇴근하고 돌아오면 곧장 침대에서 쓰러져 자기 바빴다. 그래서일까. 하윤은 날 지나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갑작스레 걸려 온 모친의 전화에 깜짝 놀랐다.
[오늘 네 생일이잖아.]
달력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말에 하윤 또한 탁상 달력을 들여다보았다. 급여일 때문에 생일 다음 날로 퇴사일을 잡아 뒀었다. 하윤은 달력에 표시된 퇴사일을 손끝으로 살살 긁었다.
‘퇴사만 생각하고 있었네.’
그러나 퇴사일만 생각한 것치곤 퇴사일이 훌쩍 다가온 줄도 몰랐다.
‘사흘은 더 남은 줄 알았는데.’
하윤은 자신이 직장인으로서의 소양이 떨어진다며 속으로 혀를 찼다. 어떻게 직장인으로서 퇴사일을 헷갈릴 수 있단 말인가. 너무도 놀란 탓에 머리가 얼얼했다.
[요새 바쁘다 보니 날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도통 모르겠어.]
모친의 말대로 정신을 어디다 놓고 다닌 게 아닐까 싶었다.
[오늘 밥 한 끼 같이 먹고 싶은데, 다들 약속이 있다네. 엄마도 오늘 모임이 있거든. 그래서 그런데 이번 주 주말에 다 같이 외식하는 게 어떨까? 생일은 미리 챙겨야 한다지만 또 자식들 생일은 늦게 축하해 줘도 된다고 하더라고.]
“주말이요?”
[왜, 약속 있어? 정 그러면 아침 먹어도 되고.]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시라고요. 제가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얘는. 너 자꾸 그러면 안 돼. 자꾸 챙겨 달라고 해야 다른 사람도 기억하지. 네 동생 봐라. 걔들은 한 달 전부터 자기 생일 선물 리스트를 짜 놓는다니까.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사람을 아주 달달 볶아 놓는다구.]
“진짜 괜찮아서 그래요.”
[괜찮기는. 엄마 마음이 영 안 편하네. 집에 와 있을래? 엄마 모임 마치고 집에 가서 국이라도 끓여 줄게. 그래도 생일 국은 먹어야지.]
“아……. 아니요. 국 먹었어요.”
[직접 끓여 먹었어?]
“아니요. 무경이네 가서 같이 먹었어요. 생일 같잖아요.”
물 흐르듯 튀어나온 거짓말에 하윤은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아직도 양심이 남아 있었던지 가슴이 조금 따끔거렸다.
[걔는 참 웃겨. 그래도 생일은 같다고 챙겨 주네. 하기야 식탁에 국그릇 하나 더 올려 주는 게 뭐라고. 그래도 먹었다니 다행이네. 전화하기 전까지 마음이 영 찝찝했었는데.]
하윤은 대답 대신 웃음을 흘렸다. 슬슬 점심시간이 끝나 갈 무렵이라 시계를 힐긋거렸다. 점심시간이 끝나 가는 건 모친도 마찬가지라 슬슬 통화를 마무리해 갔다.
[연락 좀 자주 하고 집에도 좀 와. 반찬도 가져가고 그래.]
“네, 그렇게 할게요.”
[말로만 그러지. 두고 본다?]
“네.”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 사이 통화가 끊어졌다. 하윤은 곧장 무경에게 연락을 넣었다. 점심시간이라 혹시나 하였는데 무경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기대 없이 습관적으로 한 번 더 걸었을 땐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그간 잘 지냈어?”
[용건 없으면 끊을게.]
“너 오늘 생일이잖아. 까먹고 있었지?”
[…….]
“생일 축하할 겸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저녁, 같이 어때?”
무경은 대답이 없었다. 하윤은 초조하게 시계를 바라보다가 재차 물었다. 무경은 한숨을 내쉰 뒤 대답했다.
[오늘은 일이 많아서 퇴근이 늦을 거야. 희원이도 만나기로 했고.]
“그래?”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더 해야 할까. 그사이 무경은 바쁜지 전화를 끊겠다고 했다. 하윤은 황급히 그를 말리며 잠시 시간을 벌었다.
“……정 안되면 그냥 얼굴만 보자. 너희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래도 오늘 같은 날엔 얼굴 한번 봐야지.”
날을 까먹고 있을 때는 얼굴을 볼 생각조차 못 했는데, 생일이라는 핑계가 생기자마자 얼굴을 봐야겠다 싶었다. 마지막이니까.
[……너무 늦는다 싶으면 그냥 가. 차 끊기기 전에.]
얼굴 한번 보는 데 불편을 감수할 필요 없지 않겠느냐는 말에 하윤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하윤에겐 [문] 한 번 여닫으면 끝이었지만 그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업무 시간이 끝나자마자 하윤은 이전에 사용했던 회사 건물 로비 옆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열었다. 단번에 무경이 사는 동네로 넘어가 근처 할인점에서 장을 봤다. 같은 건물에 입점해 있는 제과점에서 케이크와 초도 샀다.
짐 때문에 손은 무거웠지만 최근 어느 때보다 마음이 설렜다.
익숙한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가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살짝 헤매긴 했으나 어찌어찌 미역국 비슷한 게 만들어졌다.
다만 너무 싱거워 좀 졸여야 했는데, 그동안 사 온 나물 반찬과 잡채를 만든 것처럼 반찬 용기에다가 옮겨 담았다.
‘이건 티가 좀 나는 것 같은데…….’
나물은 사 왔다고 이실직고하자. 암만 무경에게 할 거짓말 못 할 거짓말 다 해 왔다고는 하나, 이건 정말 말이 안 됐으니까.
‘고기도 내가 양념한 건 아니지만, 그것보단 굽는 게 중요하니까.’
이것저것 다 사 와서 할 게 없겠다는 생각과는 달리 손이 필요했다. 국 하나, 양념 고기 볶는데 땀을 뻘뻘 흘렸다. 그러다 뒤늦게 밥을 안 한 것이 생각나 식겁했다. 남은 취사 시간과 시계를 번갈아 보며 무경의 귀가를 기다렸지만, 무경은 연락이 없었다.
하윤이 직접 전화를 걸어 봤지만, 통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음만 들려올 뿐이었다.
‘희원이 만난다고 했으니까 통제구역에 들어갔겠네. 그럼 기다릴 수밖에 없는데.’
시간마다 전화를 걸거나 무경이 연락해 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하윤은 그제야 거실 소파에 앉았다.
‘차라리 잘 됐지. 밥이 아직 덜 됐으니까.’
익숙지 않은 일을 하느라 진땀을 흘려서일까. 소파에 앉자 피로와 함께 졸음이 밀려들었다. 눈이 저절로 가물거리다가 어느 순간에 꾹 닫혔다. 하윤은 늪에 빠져들 듯 깊고 무거운 잠이 들었다가, 짧은 꿈을 꿨다.
하윤은 수많은 황금색 문이 빼곡히 들어차다 못해 원형의 공간을 이루고 있는 곳에 있었다. 그는 이리저리 깨진 구체 위에 떠 있었으나 조금의 불편함도 느끼지 못했다. 문득 자신이 왜 여기 있는가 싶어 가슴이 뜨끔했으나, 그것도 잠시 곧 아무렇지 않아졌다.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았으니까.
그저 온전한 존재로서 어떤 구속도 없이 아늑한 상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가 올라탄 깨어진 구체는 본래대로 돌아가기 위해 사방에 흩어진 조각을 끌어당기는 중이었다. 조각들은 아주 느린 속도로 움직여 다 맞추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구체가 맞춰지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하윤은 문득 누군가가 [문]밖을 배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허락받지 못했던 수많은 것들이 그러했듯 문밖에서 끝없이 배회하다 말라 죽을 것이다. 관심을 거두려는 찰나, 하윤은 묘한 불안을 느꼈다. 여느 때처럼 넘어가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오름과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문밖에 있는 것이 탐욕과 분노로 얼룩진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작디작은 틈을 찾아, 아주 멀디먼 거리를 당겨서.
머리끝이 곤두서며 모든 감각이 예리해졌다. 무서운 것은 아니고 꺼림칙했다. 그러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하윤은 손목이 빛나기 시작한 왼손으로 공간의 정점을 가리키고 오른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공간을 이루고 있는 가로 열의 문들이 하윤의 손짓을 따라 좌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떤 줄은 빠르게, 또 어떤 줄은 느리게.
하윤은 이번엔 왼손과 오른손을 교차하여 방향을 뒤바꿨다. 그러자 이번에는 세로 열의 문들이 빠르게 돌았다.
차르르르르르륵!
문과 문의 위치가 바뀌어 길이 서로 엉키다 끊어지고 또 합쳐져 새롭게 생겨나길 수백 수천 번.
문밖에 있던 놈이 길을 잃고 헤매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하윤을 찾아냈다.
‘설마.’
하윤은 밥솥에서 김이 나올 때 한 번, 취사를 완료했다는 알림에 한 번. 그리고 혹시나 해 맞춰 둔 타이머에 맞춰 눈을 떴다 다시 잠들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꿈은 이어졌고 문밖을 배회하고 있는 존재는 다시금 가까워졌다.
그동안 많은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윤이 올라탄 구체는 거의 다 맞춰져 있었다. 어떤 조각들은 자신이 들어가야 할 궤도에 올라 아주 조금만 더 들어가면 될 정도였다. 하윤은 어느새 거의 완벽한 구체 위에 앉아 있었고 공간은 더없이 눈부신 황금빛을 띠었다.
그사이 문 바깥에 있는 존재는 새로 발견한 작디작은 틈을, 아주 멀디먼 거리를 당겨서 하윤을 훔쳐보았다. 실낱보다 적은 틈으로 쏟아지는 탐욕이 지독했다.
‘저것은 길을 찾을 줄 안다.’
하윤은 불안의 이유를 알아차렸다. 아직 거리는 있으나 이대로라면 머지않은 날에 저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오리라.
‘그래, 그날처럼.’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길을 찾아낸 것일까. 하윤이 이유를 찾아 고개를 돌렸을 때, 문득 자신이 공간 안에 있다는 사실에 새삼스레 속이 뜨끔거렸다. 잊고 있던 죄책감의 발로가 무엇인지 드디어 떠오른 것이다.
‘선생님.’
십 년 전 죽어 가던 서이주의 얼굴과 미궁의 문을 닫던 순간과 그 아래 에너지 폭풍을 일으키고 있던 무경이 차례로 떠올랐다. 아직도 빛나고 있던 손목이 순간 톱으로 켠 것같이 아팠다. 하윤은 손목을 움켜쥔 채 잠에서 깨어났다.
“……!”
익숙하게 신음을 삼키며 몸을 웅크렸다. 강렬한 통증 때문일까. 꿈은 빠르게 휘발되고 말았다. 하윤은 남은 기억을 곱씹다가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손목이 아닌 몸속에서 뚜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떨어진 소리를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하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쓰러지듯 소파에 주저앉은 하윤은 조심스레 손목을 감싼 손을 풀었다.
톱으로 켠 듯한 통증이 있었으나 손목은 멀쩡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통증 또한 사라졌다. 남은 것은 하윤이 스스로 남긴 손자국뿐이었다. 얼떨떨해진 하윤은 머리를 주먹으로 두들기다가 욕실에 가서 세수했다.
‘뭐 이런 개 같은 꿈을.’
얼굴을 씻는 동안에 머릿속이 어느 정도 정돈됐다. 자신이 그런 꿈을 꾼 것은 알게 모르게 쌓인 스트레스 탓이 아니었을까. 현대인의 질병 대부분은 스트레스를 근원으로 삼으니까. 자신 또한 그랬으리라.
‘아무것도 아닐 거야.’
탓을 돌리고 나자 조금 차분해질 수 있었다. 한숨을 돌린 하윤은 시간을 확인했다. 진정도 되었겠다 슬슬 무경에게 연락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