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
무경은 곧장 그의 몸을 더듬었다. 두 팔과 다리가 제대로 있는지, 몸뚱어리가 가루로 변하지 않았는지. 수색하듯 샅샅이 훑자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경아.]
반가운 목소리에 무경은 빨려들 듯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숨을 크게 들이켜 그리운 체향을 맡고 온기를 느꼈다. 규칙적인 숨소리에 귀 기울이다 무사한 것을 확인하자 곤두섰던 신경이 가라앉고 설움이 밀려들었다.
훅 피어오른 열기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제야 조금 전과 지금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그래? 나쁜 꿈이라도 꾼 사람처럼.]
‘그래, 꿈이었구나. 그래, 그럴 리가 없지.’
물에 잠긴 듯 소리가 둔하게 들렸으나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무경은 그의 말을 곱씹다가 자신이 꿈을 꾼 것 같노라고 긍정했다. 다만 자신이 내는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분명 입으로 뱉었는데 이상한 일이었으나 이상한 줄 몰랐다.
[무슨 꿈이었는데?]
다정한 물음에 무경은 순순히 대답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평소 미신은 잘 믿지 않지만, 워낙 흉한 꿈을 꾼 탓에 그런 것으로나마 위안을 얻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은 말할 수 없노라고 대꾸했다.
[응?]
열두 시가 지나야 한다고. 낮에 접어들어야 비로소 꿈의 불안을 떨쳐 낼 수 있노라고. 무경은 열심히 설명했으나 이번에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말을 들었을까? 무경이 궁금해하던 차에 그 사람은 무경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 넘겨 주었다.
마찬가지로 다정한 손길에 기분이 좋았다. 그는 평소엔 이렇게 해 주지 않았으니까.
무경은 그의 손바닥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왜 이런 흉한 꿈을 꾸었는지 알 것 같았다.
오늘 있었었던 일 때문이었다.
□□이 입술을 가려 대화 내용의 일부를 감춰서, 다른 사람과 눈을 마주치고 웃어서.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프게 해서. 곤란할 적에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돌아보고 도움을 청해서. 또 다른 사람에게 만지게 해 줘서, 그리하여 다른 사람이 □□의 일을 먼저 알아차려서.
자신 또한 만지면 알았다. 누구보다 먼저 알았을 것이다. □□의 일이니까.
그러나 이번 일을 알지 못한 것은…….
‘그래, 그건.’
□□이 멀리 가 버렸고, 또 제대로 만지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입 맞추지 말라고 했었어.’
□□이 멀쩡한 것을 확인하자 서러운 마음이 끓어 온갖 시답잖은 이유를 토해 냈다. □□을 탓했지만 사실 이 모든 게 자신의 질투라는 것을 알았다.
여태 먹은 나이를 운운하며 덜고 싶은 감정이나, 바다와 욕심 같이 퍼내도 퍼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잠깐 덜어 낸다고 하더라도 이내 다른 질투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무경은 □□의 몸을 천천히 더듬어 올렸다. 다급히 존재 여부만 확인했던 조금 전과 달랐다.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세심하게, 눈을 감고도 모양을 알 수 있도록 만졌다.
‘이것 봐. 만지면 나도 다 알지.’
자신이 절대 모를 리 없었다. 무경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말할 때마다 울리는 목을 입술로 지분거리다가 세게 빨아올렸다.
[무경아, 잠깐. 잠깐만.]
무경은 □□이 말하는 잠깐만의 의미를 알았다. 일단 자신을 떼어 낸 다음, 어찌어찌 단념시켜서 만지지 못하게 할 셈인 것이다. 이미 약이 바짝 오를 대로 올라 있는 상태라 더 듣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만지게 해 줘 놓고선.’
[조각]인 자신은 왜 안 된단 말인가. 자신만 그를 만질 수 있었다. 이는 당연한 이야기였다. 자신 또한 그 외의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만지게 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이미 약속하지 않았는가?
‘그게 아니면 또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걸까.’
아직 친구였음 하거나, 다른 사람을 만나 보고 싶다거나.
까맣기만 한 눈앞이 순간 벌겋게 느껴졌다. 무경은 자신을 밀어내려는 □□의 손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상의를 걷어 올리고 드러난 살갗을 닥치는 대로 핥고 빨기 시작했다. 그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버둥거리는 그의 허리를 잡아 눌렀다.
‘내가 얼마나 만지고 싶었는데.’
‘내가 얼마나 참았는데.’
‘내가. 내가 널 얼마나…….’
무경은 숨을 헐떡였다. 입 밖으로 내려는 감정이 너무나도 거대해 떠올리는 것만으로 버거웠다.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세상에서 □□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무경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의 질투가 어떤 짓을 할지 몰랐다.
무경은 턱 주변에 잘게 입 맞추며 손가락으로 □□의 입술을 문질렀다.
‘그래, 나도 이렇게 만지고 싶었어. 나도.’
입술의 위치와 모양을 확인한 무경은 곧장 얼굴을 들이밀었다. 살짝 닿은 코끝을 옆으로 누이며 입 맞추려는 찰나, □□의 손이 무경의 어깨를 짚었다. 이미 만지지 못하게 해서 골이 난 만큼 듣고 싶지 않았다. 무경은 아예 두 손으로 □□의 얼굴을 붙잡았다.
[야.]
무경은 몰래 웃으며 □□에게 입술을 갖다 댔다. 그저 입술만 꾹 붙였을 뿐인 가벼운 입맞춤이었으나 닿은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말캉한 입술을 꾹꾹 누르듯 입 맞추다가 뺨을 붙잡고 있던 손으로 그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이전과 달리 뺨이 홀쭉했다. 가죽만 올라온 듯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뼈대에 무경은 작게 신음했다. 그러고 보니 턱이나 목에도 살이 많이 빠졌다.
좀 더 확인하기 위해 손을 내리자 □□이 그의 손을 낚아챘다.
[그만해.]
‘…….’
[하면 안 돼.]
무경은 □□이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가 조금이라도 더 자신을 좋아하고 의지해 주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서러운 마음이 앞섰다. 무경은 밀어내는 손길을 떼어 내고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얼굴을 비비며 약한 척 엄살을 부리며 신음하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려고 그래.]
그는 위로하지 않는 척 위로하며 무경의 뺨을 건드렸다. 살짝 닿았다가 떨어지려는 손을 붙잡고 자신의 머리에 얹었다.
쓰다듬어 주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그는 손끝만 조금 움직이다가 말았다. 재촉하듯 고개를 움직여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분명 하면 안 된다고 했어.]
왜 자꾸 안 된다고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무경이 의아해하는 사이 그는 무경을 끌어안고 돌아 눕힌 다음 등을 도닥였다.
[시간이 많이 늦었어. 이만 자.]
조금만, 조금만 더. 말하고 싶었으나 아직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았다. 이따금 신음만 새어 나올 뿐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훅 내쉬자 □□이 포옹을 풀었다. 등을 도닥이는 손도 덩달아 멈추더니 어깨를 짚고 아예 멀어지려 했다.
무경은 그의 손을 부여잡고 다시 입을 맞췄다. 쪼듯 입술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다가 혀끝으로 살짝 벌어진 틈새를 핥았다. 이번엔 딱히 밀어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경은 그를 끌어안으며 더 깊이 입을 맞췄다.
느릿하게 혀를 얽고 빨다가 얼마 안 있어 본색을 드러내고 게걸스레 달려들었다. 옆으로 누워 있던 몸은 어느새 다시 그를 타고 올랐다. 무경은 그와 몸을 바짝 붙인 채 비비다가 그의 다리 사이에 자신의 다리를 밀어 넣었다.
하체를 바짝 붙이고 짧은 반바지를 입었는지 훤히 드러난 다리를 쓰다듬었다. 얼굴이 핼쑥해진 것으로 보아 전체적으로 살이 빠졌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살이 빠져 있었다. 무경은 작게 신음하며 □□의 반바지 밑으로 두 손을 밀어 넣었다.
속옷을 입지 않았는지 손끝에 걸리는 게 없었다. 어쩌면 반바지가 아니라 속옷일 수도 있겠다. 무경은 □□의 엉덩이를 두 손 가득 그러쥐었다. □□는 엉덩이가 작은 편이지만 그래도 다른 곳에 비해 살집이 있었다. 무경은 작게 웃으며 □□의 목덜미에 입술을 갖다 댔다.
무경은 그가 웃을 때 그의 몸이 어떻게 울리는지 알았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실컷 주무르는데도 진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경은 신음하다가 그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는 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경의 손을 떨쳐 내지도 않았다.
그는 찡그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웃지도 않았다. 저를 보지 않고 그저 반쯤 내리깔고 있었다. 누운 채로 눈을 내리깐들 보이지도 않을 텐데.
무경은 그를 부르듯 □□의 뺨에 잘게 입 맞췄다. □□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다가 돌연 무경의 목을 끌어안았다. 자신이 살살 긁어 짜증이 난 것처럼 와락 얼굴을 찡그렸으나 이내 무경에게 입 맞췄다.
눈치를 보며 지분거리기만 했던 그와 달리 깊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오랜만의 키스에 무경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고양감을 느꼈다.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친 기쁨에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무경은 □□과 하체를 비비듯 맞댄 채로 입맞춤을 이어 갔다. 속살이 닿고 몸을 바짝 붙였으면서도 더 붙고 싶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끌어안고, 그의 몸속 깊은 곳에 들어가 연결되고 싶었다.
어쩌면 서로가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것이 아니면 오래 굶주린 정욕일 수도 있었다. 아니다. 욕심이 많아 둘 다일 것이다. 아니, 둘보다 더 많은 것이 뒤섞였을 것이다.
오래 참았기 때문이었다.
‘□□아, □, □□아!’
수차례 그를 부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분명 자신이 말하는 것인데도 뭘 말하는지 생각도,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경은 그와 몸을 비비며 고양감과 갑갑함에 거친 숨소리를 뱉어냈다. 그때 □□이 무경의 손을 잡았다.
‘……!’
세게 쥔 것도 아니고 달달 떠는 손으로 그저 잡았다가 금세 뗐을 뿐이나 다른 생각이 깡그리 날아갈 정도로 좋았다. 무경은 달아나려는 □□의 손을 잡아채 다시 위로 끌어올렸다. 그런 다음 손가락 사이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깍지 낀 손을 지그시 누르며 무경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그와 가장 결합된 형태로, 또 계속 그러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끝에 다다랐다. 온몸으로 퍼지는 쾌감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주렸던 마음이 풀어졌다. 그런데도 그와 떨어지기 싫어 더욱 몸을 바짝 붙였다.
땀에 젖은 목덜미를 핥다가, 달랑거리는 귓바퀴를 쭉 빨았다. 마른 다리를 발목에서부터 허벅지 끝까지 힘주어 쓸어 올리다가 뒤로 손을 넣어 그의 엉덩이를 주무르기도 했다. 가쁘게 오르내리는 따듯한 가슴팍에 기대서 숨죽여 웃다가 이 끝으로 가슴을 살살 긁고, 또 지분거리는 척 살을 빨아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비록 두 눈으로는 확인하지 못하겠지만.
□□은 지쳤는지 가만히 늘어져 무경을 내버려 두었다. 이를 이용해 목에 흔적을 남기려 했으나 제지당했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무경은 □□과 맞닿은 발을 살살 비볐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행복을 기꺼이 만끽했다. 그러다가도 문득 □□의 팔다리와 가슴 오르내림을 확인해야 하긴 했지만.
이 시간이 계속되었으면.
‘계속 이대로 함께 있자. 내가 뭐든 할게. 네가 바라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내가 할게.’
이대로 자신이 눈을 뜬 뒤에도 내내 함께 있어 주었으면. 그러다가 문득 욕심이 그에게 속삭였다. 이대로 눈을 뜬다면, □□과 손을 맞잡은 채로 눈을 뜰 수만 있다면. 자신은 그렇게 찾던 □□을 되찾을 수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함께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니까.
‘게다가 내가 이렇게 정신이 맑은 적이 있었던가?’
이렇게 모든 걸 생생히 느낀 적이 있었던가?
그렇다면 자신은 이제 눈도 뜰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바람처럼 이번에야말로 두 눈으로 그를 보고, 그를 말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무경은 눈을 뜨려 애쓰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깜빡이던 눈이 왜 그리 뜨기 힘들던지. 잘 움직이던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을 용을 쓰다가, 문득 귀가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무겁고 뻑뻑하나마 눈꺼풀이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