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원 라스트-81화 (81/162)

81화

씻으면 머릿속이 차분해질까 싶었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씻을 때 끊어졌던 잡념이 나오자마자 다시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시작은 텅 빈 침대였다. 이불을 들친 흔적조차 없었다. 무경은 하윤이 식사라도 하는 중인가 싶었지만, 개수대를 확인하자 놓인 그릇이 없었다. 예전처럼 단백질 바나 견과류를 찾아 먹었나 싶었지만, 그것 또한 별다른 흔적이 없었다.

하윤을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으나 그럴 수가 없었기에 무경은 거실로 향했다.

거실 불은 다 꺼졌고, 김하윤은 TV만 튼 채 잠들어 있었다. 무경은 TV를 끄려다가, 방영 중인 영화를 보고선 혀를 찼다.

‘이걸 또 보고 있었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지 못하는 것처럼 김하윤은 이 영화가 방영하면 찾아보곤 했다. 워낙 오래된 영화라 명절 단골손님으로 등장했고, 같이 산 고로 무경 또한, 덩달아 영화를 본 것이다.

“질리지도 않나.”

하기야 평소 미련하게 구는 꼴을 보면 김하윤다운 행동이었다. 또 자는 모습 또한 미련한 게 김하윤다웠다.

김하윤은 소파에서 둘둘 만 수건을 베개 삼아 베고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머리도 덜 마른 채로 어찌나 처량하게 누워 있던지 무경이 지나치지 못할 정도였다. 무경은 이제는 필요 없어져 치워 둔 담요를 꺼냈다가, 바닥에 던져 버리고 하윤을 불렀다.

“김하윤.”

어깨를 툭 쳤으나 깊이 잠들었는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TV 안 볼 거면 안에 들어가서 자.”

아예 어깨를 잡고 흔들자 그제야 눈을 뜬 하윤은 상황 판단이 안 되는지 눈만 껌뻑거렸다. 무경이 재차 말하자 그제야 알아듣고 대답했다.

“아니야, 나 그냥 여기서 잘게.”

“나중에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어서.”

“나 여기서 자면 되니까 넌 안에 들어가서 편하게 자.”

“너 침대 아니면 못 자잖아.”

“지금 소파가 우리 집 침대보다 좋아.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부정하고 싶었으나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었다. 김하윤이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처량하게 있지나 말든가, 그게 아니면 그렇게 마르지나 말든가. 하다못해 머리카락이라도 말리고 있었으면, 옷이라도 제대로 입고 있었으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일어나.”

“여기서 자면 된다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무경은 중간 광고로 넘어간 TV 화면을 껐다. 거실 등을 대신해 거실을 밝히고 있던 TV가 꺼지자 거실이 어둠에 잠겼다. 그저 어두워졌을 뿐이나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쓴 것처럼 무겁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무경은 미동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하윤의 손을 잡아챘다. 숱하게 끌려갔던 전적 때문일까. 하윤은 무경이 살짝 당기자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무경이 이끄는 대로 따라 들어왔다.

“…….”

거실에서 고집을 부렸던 것과 달리 김하윤은 방 안에 들어오자 얌전히 침대에 누웠다.

‘진작에 이랬으면 좋았잖아.’

괜히 속이 꼬였다. 무경은 하윤을 슬쩍 흘겨보다가 저 또한 침대에 누워 자리를 잡았다. 문득 오늘에야말로 진짜 잠을 잘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 것, 놓친 것 없었다. 그리하여 무경을 괴롭히던 불안이 모습을 감췄다.

무경은 안도에서 비롯한 한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그리고 그때, 김하윤이 졸음이 잔뜩 낀 목소리로 물었다.

“안 물어봐?”

“……뭘.”

“그냥, 뭐든지. 오늘 있었던 일 중에 궁금했던 거.”

“그걸 지금 묻는다고?”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휘발되잖아. 거기다 자고 나면 더 많이 사라지고. 지금 눈 감으면 바로 잘 것 같거든. 그래서 조금이나마 생생할 때 대답하는 게 낫지 않나 싶어서.”

“더 말할 거리는 있고?”

이미 김하윤은 오늘 면회와 관련하여 영상기록물을 남겼다. 김하윤 본인의 말마따나 자고 나면 기억이 휘발되는데, 김하윤은 지금 수면제와 신경안정제를 복용한 상태였다. 게다가 기관에서 나올 때도 잤고, 씻고 나왔을 때도 조금 잤다.

무경이 궁금한 것을 묻는다고 해도 비몽사몽 해서 헛소리를 할 가능성이 컸다. 거기다 기록물에 남긴 것 외에 따로 물을 거리도 없었다.

“그런 게 있었으면 차에서 물었겠지.”

“나는 남을 태웠던 차라 일부러 그런 이야긴 피하는 줄 알았지. 선생님이랑 아저씨가 그랬었거든. 남을 태운 차에선 중요한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고.”

김하윤의 말이 점점 느려졌다. 눈꺼풀도 거의 닫히기 직전이었다. 무경은 하윤에게 헛소리 그만하고 잠이나 자라고 타박하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하윤이 더 빨랐다.

“박건영이 따로 만나자고 하던데.”

“…….”

박건영이 붙을 때부터 이미 예상한 바였다. 일반인의 눈을 가리기 위해 파견되었다기엔 박건영은 상전들이 돌려쓰는 고급인력이었으니까. 게다가 무경은 면회 일정 내내 김하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었다.

김하윤이 무경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다면 무경은 김하윤의 일은 뭐든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만지지 않아도 느끼려 하면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어떤 표정을 하는지, 어떤 말을 하는 지도.

하지만 무경은 아는 내색 하지 않았다. 그냥 김하윤이 곧이곧대로 일러바치는 말에 잠자코 귀 기울였다. 썩 기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조금 기꺼운 기분이 들었다.

“자기네 줄을 타라고 하더라.”

“줄?”

“응. 그래서 내가 썩은 줄 잡아서 뭐 하냐고 하니까, 그래도 뭐라도 잡아야 하지 않겠냐고 하더라. 그런데 듣고 보니까 맞는 말인 거야.”

“…….”

“그래서 만나기로 했어.”

“그런 건 나한테 말하면 안 될 텐데.”

“그냥, 널 속이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쟁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면서. 무경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터트렸다.

“너 나 속이는 거 아무렇지 않잖아.”

하윤은 무경의 대답에 눈을 번쩍 떴지만, 무경을 보지는 않았다. 그저 빈 허공만을 노려보다가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런데 무경아, 난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

“이건 정말이야. 믿기 어렵겠지만.”

무경은 대꾸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자는 척했다. 하윤은 평소라면 이쯤에서 입을 다물었겠으나 오늘은 달랐다.

“그래서 그만두려고 하는 거야. 더는 하고 싶지 않아서.”

“…….”

“이 말도 믿기 어렵지? 그런데 이제 정말로 괜찮을 거야. 내가 할 수 있을 때까지는 희원이 일도 최선을 다해서 도울 테니까.”

그러면 다 잘될 거야. 김하윤은 대꾸가 돌아오지 않는 말을 주문처럼 되뇌었다. 나중에는 숨소리와 비슷해져서 무경에게 하는 말인지 김하윤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너 하나 돕는다고 해서 뭐가 잘될 수 있느냐고, 가시 섞인 말이 목에서 맴돌았다. 말을 머금고 있는 자기도 따끔해서 아차 싶었다. 무경은 자꾸만 떨어지려는 입술을 짓씹은 채로 침묵이 온전히 내려앉도록 기다렸다.

까만 밤에 침묵이 내려앉자 눈꺼풀도 덩달아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흡사 짓눌리듯 잠들었다. 온통 새까만 깊은 잠에 빠졌으나, 수면의 끄트머리에서 익숙한 불안이 깊은 잠을 헤치고 올라왔다.

그가 가장 두려워한 것. 그리하여 감추고 또 감추었던 것.

바로 □□이 자신을 떠나는 것.

불안은 순식간에 까만 잠을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무경을 초조하게 했다. 당장 □□이 잘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무경의 불안에 대답이라도 하듯 주변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졌다. 다만 까만 밤에 비해 밝을 뿐, 아직 사물의 윤곽만 겨우 알아볼 정도일 뿐이었다. 하지만 무경에겐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아니, 새까만 어둠 속에 있더라도 상관없었다.

어둠 따위는 무경에게 아무런 방해물이 되지 않았으니까.

물론 어둠 외에 다른 방해물이 있다면 어려울 순 있었겠지만, 다행스럽게도 □□은 자신이 업고 있었다.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서 자신이 파란 새벽을 헤매며 얼렀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걸 왜 잊었지? 계속 업고 있어서 그랬나.’

지금은 곤히 잠들어 불러도 대답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은 무경과 함께 있었다. 아직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았다. 무경은 등에서 느껴지는 □□의 온기와 숨결을 느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제 깊이 잠들었으니까 방에 데려가야지.’

자신이 오래 업고 있어서 슬슬 고개가 불편해졌을 것이다. 무경은 그렇게 생각하며 예전 집의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조심해서 밟는다고 했지만, 특유의 삐걱거리는 소리와 발소리가 이어졌다.

무경은 작게 신음하다가 차라리 빨리 올라가자 싶었다. 그래서 조금 전보다 빠르게 계단을 밟았는데 그만 슬리퍼가 미끄러지고 말았다. 곧장 발을 떼고 한 계단 아래로 내려가 중심을 잡았기에 넘어지진 않았지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후우.’

무경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숨을 훅 내뱉었다. 그 순간, 업고 있던 □□의 오른팔이 툭 떨어졌다.

‘……?!’

당연하게도 계단을 헛디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놀라 몸을 들썩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대편 팔이 뚝 떨어졌다. 이어 다리도 달랑거리며 무경의 다리를 치다가 뚝, 뚝 떨어졌다. 몸통이라도 지켜 보려고 하는데 □□을 받치고 있던 손바닥에 가루가 버석거렸다.

가루는 무경이 숨을 쉴 때마다 아래로 후두둑 후두둑 떨어졌다. 이쯤 되자 무엇이 가루로 변했는지 알 수밖에 없었다. 무경은 가루를 더는 떨어트리지 않도록 움직임도 멈추고 숨도 쉬지 않았지만, 이제 가루는 그가 무엇을 하든 아래로 쏟아졌다.

마침내 □□을 업고 있던 등이 가벼워지고 손안엔 아주 적은 양의 가루밖에 남지 않았다. 두 손과 바닥에 쏟아진 가루를 확인하고 싶었으나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고개를 숙이지 못했다. 숨을 오래 참은 탓에 헐떡거리다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서워서 차마 아래를 내려다보지 못하고 그저 손과 몸을 이용해 가루를 그러모았다.

그러모은 가루를 쌓고 끌어안자 어느새 가루는 천으로 바뀌었다. 그 아래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무경이 찾던 사람이 누워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