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원 라스트-79화 (79/162)

79화

‘박건영.’

박건영은 하윤이 자신을 본 것을 알아차렸으면서도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저 옆 세면대에 자리 잡고 손을 씻기 시작했다.

“왜요, 볼일 보지도 않고 손만 씻는 남자 처음 보나?”

“…….”

“그래요. 그게 바로 나예요.”

“……미친놈.”

가자미눈을 뜬 하윤이 욕을 하든 말든 그는 하윤을 지나쳐 하윤의 오른편에서 페이퍼 타월을 뽑아냈다. 서너 장 쑥쑥 뽑아내자 통이 텅 비었다. 박건영은 아직 얼굴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하윤을 보면서도 뽑아낸 페이퍼 타월을 전부 사용했다.

“손을 제대로 씻어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페이퍼 타월은 한 장만 쓰는 거야.”

“외부인은 그렇겠죠. 전 직원이라 괜찮아요. 이것도 일종의 직원 복지랄까?”

“…….”

“그나저나 몸은 좀 어때요?”

박건영은 쓰고 난 페이퍼 타월을 뭉쳐 쓰레기통에 던졌다. 제법 거리가 있음에도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안착했다. 하윤이 얄밉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는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하윤에게 건넸다.

“써요. 양복 안에 넣어 두고 안 썼어.”

“너 사실 손 안 씼지?”

“그게 중요한가요?”

성급한 일반화는 좋지 않다고 하지만, 하윤이 생각하기에 정신계 능력자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대부분 심하게 꼬인 구석이 있었는데 문제는 그것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며 타인도 그러길 바랐다.

‘그러니 세뇌니 뭐니 그런 능력이 발달된 거 아니겠어?’

편견이 가득한 시선으로 박건영을 아래위로 훑어본 하윤은 결국 그가 건넨 손수건을 받았다. 다만 얼굴을 닦기엔 찝찝한 감이 없잖아 있어 손과 턱밑만 살짝 닦았다.

“얼굴이 하얘요.”

“원래 하얀 편이라.”

“토하는 소리 들리던데? 그리고 눈이랑 코 빨개요.”

“…….”

“그냥, 후유증인가 싶어서 묻는 거니까 그렇게 벽 세울 필요 없어요.”

“무슨 후유증?”

박건영은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아까, 이거요. 아주 가끔 뒤늦게 걸리는 사람이 있긴 한데, 그래도 이렇게 뒤에 걸리는 사람은 없어서. 그 말인즉? 내 잘못이 아니라 백 소령의 잘못일 수도 있다는 거죠.”

“그냥 정보가 과도하게 쏟아져서 그랬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제 괜찮고요.”

하윤은 다 쓴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러자 박건영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

“전 남이 쓴 거 안 씁니다. 그거 그냥 가지시고 저는 다음에 만날 때 새로 사 주세요. 참고로 그건 버버리 겁니다.”

미친놈인가? 하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박건영을 훑어보았다. 능글거리는 낯짝을 하고 있었지만, 진심 같았다. 하윤은 한숨을 내쉬며 손수건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다음에는 안 만날 테니 박건영의 손수건은 이제 하윤의 것이었다.

“어쨌든 모르던 정보가 과도하게 쏟아지셨다고 하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시겠군요.”

“예에, 뭐.”

“다음에는 어디서 뵐까요? 저는 우리 회사 가까운 쪽이 좋은데.”

“저도 우리 회사 가까운 곳이 좋습니다.”

“하, 뭐 그럼 다음 번은 하윤 씨 회사 근처에서 뵙죠. 그다음에는 제 차례니까 그렇게 알고 계시고요.”

“……은근슬쩍 약속 잡지 마세요. 아직 생각도 안 해 봤으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서로 얼굴이나 한번 본다는 생각으로 오시면 좋을 것 같으니까.”

“내가 네 얼굴 봐서 뭐 하게.”

“그래야 할 것 같던데.”

“…….”

“제가 아니면 어디서 물어보시려고요? 백 소령? 아니면, 오늘 만난 김희원 씨?”

“…….”

“보는 순간 알아차렸잖아요. 저한테 물어볼 거 많아 보이던데. 그래서 아까도 그렇게 뜨거운 시선으로 본 거 아닙니까.”

“하.”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박건영이 똘끼가 있어 말을 이상하게 하긴 하지만 겉핥기식이라도 하윤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관련인 중에선 유일하게 하윤의 말을 듣고 대답해 줄 만한 사람이었다.

그게 사실일지 거짓일지는 모르지만.

‘아니, 뭐 이렇게까지 알아야 하나?’

내일이라도,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모든 걸 그만두고 싶었다. 하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박건영과의 만남을 선택할 수밖에 없지만, 또 그 말을 입 밖으로 내고 싶지도 않았다.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다가 슬쩍 시계 보는 척을 했다.

“아니, 그런데 벌써 시간이.”

박건영은 하윤의 노골적인 말 돌리기에 콧방귀를 뀌면서도 시간을 확인했다. 확실히 늦은 시간이긴 했다.

“빨리 돌아가야겠다. 다들 퇴근도 못 하고 기다리고 있겠는데.”

하윤이 나가자고 눈짓하자 박건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면회는 이미 종료했습니다. 시간도 시간이고, 둘 다 상태가 안 좋아 보여서. 하나는 아프고, 하나는 지나치게 흥분했거든요.”

“저는 괜찮은데요.”

“거울 한번 다시 보는 게 어떻습니까? 자기가 더 잘 알 텐데.”

박건영은 고개를 까딱이며 거울을 가리켰다. 얼떨결에 따라 시선을 돌린 하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작게 신음했다. 괜찮다고 우기기엔 자신이 봐도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리하게 진행하다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순 없잖아요? 물론 낳는 게 황금이 아니라 악당들의 음모겠지만. 어쨌든 귀중한 자원이죠.”

“…….”

“소감이 어때요? 오늘 여러 번 물어본 것 같은데 마지막 점검 차 한 번만 더 물어봅시다.”

박건영은 자신이 일단은 공무원이라 모든 일을 서면으로 남겨야 한다며 불쌍한 척을 했다. 물론 전혀 불쌍해 보이진 않았다.

“모르겠어요.”

“……흠?”

하윤은 작게 신음하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잦아든 줄 알았던 손목의 통증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꼭 얇은 쇠톱으로 손목을 천천히 톱질하는 것 같았다. 하윤은 아픈 손목을 살살 주무르며 기억을 더듬었다.

김희원과는 조금 전에 만났을 뿐인데 꽤 오래전에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익숙하다기엔 낯설고, 낯설다기엔 또 어째 어디서 본 것 같은.

‘지하철에서 마주쳤기 때문일까?’

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지하철에서 마주친 것보다 더 오래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작금 김희원의 모습은 하윤에게 잊으려야 잊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윤은 제 숨통을 틀어막던 끔찍한 기분을 떠올리며 다시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 애가 그 애가 맞는 것 같은데, 또 그 애가 아닌 것 같아요.”

“무슨 말입니까?”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요.”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이다……. 이거군요.”

박건영은 하윤의 소감을 대강 정리해 읊었다. 그러곤 하윤이 말하기 전에 홀로 답을 생각해 내곤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기야 모습이 좀 그렇죠.”

“아니요.”

“……?”

“말하고 행동하는 게. 그게 좀 그랬어요.”

강산도 변하게 한다는 십여 년의 세월이 있긴 했으나, 단순히 세월의 흐름을 탓하기엔 자신이 꼭 백무경이라도 된 양 굴지 않았는가.

‘솔직한 말로 다 때려치우고 싶다.’

면회가 끝났다고 했지만, 곧장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박건영이 토로했던 대로 서류 작업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외부인인 하윤은 문서 작업엔 참여하지 않았으나, 영상 자료를 남겨야 했다.

하윤은 진술 동의서를 쓰고 특수 기기를 부착한 채 몇 가지 질문에 대답했다. 질문은 박건영이 화장실에서 물었던 질문과 과거 희원과의 사이에 관해 대답하는 것이었고, 하윤은 무경에게 했던 거짓말들을 읊어 댔다.

부착한 기기 때문에 자신의 동요가 드러날 수 있으나 크게 상관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놈들은 다 알고 있다.’

그리고 아마 김희원 또한 하윤과 똑같은 질문을 받을 것이다. 박건영은 하윤과 희원의 상태가 좋지 않아 면회를 마무리했다고 했지만, 하윤이 느끼기엔 서로 이야기를 맞출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그건 나도 좀 궁금하고.’

결과를 알기 위해선 박건영을 만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도출된 결과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일까. 하윤은 이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었다.

어차피 모든 것을 던지고 끝낼 판이면 이토록 힘들게 수고를 들일 필요가 있을까?

하윤은 숱하게 반복했던 질문을 거듭하며 고심했으나, 아직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후우.”

하윤은 긴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뒤척였다. 진술이 끝난 뒤, 하윤은 기관 내 자리한 의무실에서 간단하게 진료를 받았다. 진술 전에 의료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생생한 반응을 기록하기 위해서 그건 또 안 됐던 모양이었다.

어찌 됐든 초능력에 노출된 후유증이 아니라 현재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지나치게 긴장하고 신경을 쓴 탓인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기관 내 자리한 작은 의무실인 까닭에 제대로 된 조치를 하기 힘드니 조만간 순환기내과를 방문하여 제대로 된 검사를 받으라는 권유도 포함이었다.

의무실 내 비치되어 있는 각종 진통제와 말통으로 된 소독제를 보며 하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고갯짓과 반대로 병원엔 가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진료가 끝나고 하윤은 의사가 건네준 두통약과 정체 모를 알약 두어 개를 먹은 뒤에야 비로소 건물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약을 먹은 뒤 의식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깨어난 뒤에는 몽롱한 상태로 무경의 차에 타고 있었다.

무경의 차는 이미 건물이 있던 부지를 벗어나 일반 도로로 나온 상태였고, 시간은 이미 다음 날로 넘어가 있었다.

하윤은 차가운 유리창에 머리를 기댄 채 눈만 끔뻑이며 어제저녁 무렵에 있었던 일들을 차근차근하게 떠올렸다. 그러곤 다시 처음 생각으로 돌아가 때려치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술에 취한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하윤은 힘겹게 손을 들어 얼굴을 비볐다. 그러곤 운전 중인 무경을 힐긋 바라보았다.

무경은 아까 전, 아니. 어제저녁 무렵 때처럼 익숙한 경멸의 눈빛을 띄우고 있진 않았다.

‘그냥 나랑 눈이 마주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눈을 마주치면 또다시 익숙한 미움을 쏟아 낼지도 몰랐다. 하윤은 미간을 찡그린 채 차창 너머를 응시했다. 그때 무경이 입을 열었다.

“왜.”

“……응?”

“왜 찡그리냐고.”

하윤은 곧장 표정을 풀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꾸했다.

“그딴 표정 짓지 말고 문제가 있으면 말로 해. 괜히 옆에 있는 사람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그냥 약 기운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여서 그랬어.”

“…….”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

무경은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화를 억누르는 것 같아 하윤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슬슬 무경에게 묻지 않으면 안 될 질문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나 저 앞에서 내려 주면 알아서 갈게.”

하윤의 질문에 무경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그는 평소보다 조금 더 올라간 눈매로 대답했다.

“우리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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